[생각해 봅시다]


                                                 엘리야 시대 생애 (4)

                                                                                                                                           - C. H. 매킨토시

   3. 아합


   우리는 여기서 잠시 엘리야의 이야기를 멈추고 그가 하나님께 숨겨져 있는 동안의 이스라엘의 비참한 상태를 살펴보자. "하늘 문이 닫혀져 있을" 때에 세상의 상태는 정말로 참혹할 수밖에 없다. 하늘이 비를 주지 않을 때 이 세상의 상태는 흉년이 오고 황폐해지며 특히 "하늘에서 내리는 빗물을 마셔야 하는" 저 땅은 특히 더 심하다. 애굽은 하늘 문이 닫혀도 덜 했던 것 같다. 그 공급이 끊어지는 것을 본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애굽은 그 자체로 자원이 있었다. 그들은 "나의 강물은 나 자신의 소유" 라고 독립적으로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주님의 땅, "언덕과 골짜기의 땅"은 그렇지 못했다. 하늘의 공급이 떨어지면 모든 것은 황폐화되고 불모의 땅이 되었다. 이스라엘은 "나의 강은 나 자신의 소유"라고 말할 수 없었다. 그렇다. 그들은 때때로 하늘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눈은 항상 주님을 바라봐야만 했고 주님의 눈은 항상 그들 위에 계셨다. 이러하므로 어떤 일로 하늘과 땅 사이의 교통(交通)이 방해를 받으면 가나안 땅은 그 고통이 극심했다.

   엘리야의 시대가 그러했다. 삼 년 육개월 동안 하늘 문은 닫혔고 대흉년이 온 땅을 덮었다. 이스라엘은 그들의 참되시고 유일한 복의 근원을 떠나자 그 결과로 두려움을 느꼈다. "사마리아에 기근이 심하였고, 아합이 오바댜에게 이르되, 이 땅의 모든 물 근원과 모든 내로 가자. 혹시 꼴을 얻으리라. 그리하면 말과 노새를 살리리니 짐승을 다 잃지 않게 되리라 하고 두 사람이 두루 다닐 땅을 나누어 아합은 혼자 이 길로 가고 오바댜는 홀로 저 길로 가니라."

   이스라엘은 죄를 범했으며 여호와의 진노의 채찍을 실감했다. 예전의 하나님의 백성은 그들의 왕이 꼴을 얻으러 나가는 것을 보고 얼마나 비참했겠는가! 솔로몬 시대의 영광과 풍요함괴 비교할 때 참으로 대조가 되는 장면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영광은 심하게 상처를 입었고 그분의 진리는 베척 당했다. 이세벨은 그녀의 악한 선지자들을 사용하여 그녀의 정책을 펴서 악 영향을 끼쳤다. 바알의 제단이 하나님의 제단을 대신했다. 이제는 하늘은 강철이 되었고, 땅은 놋이 되었다. 눈에 보이는 것은 모두 이스라엘의 심령이 완악함과 천박한 도덕적인 수준을 말해주었다.

   이제 그의 종들에게 명한 모든 지시 속에는 하나님에 대해서는 한 말씀도 없었고, 그 땅에 내린 하나님의 심판과 무거운 진노를 가져온 죄에 대해서는 일언반구(一言半句)도 없었다. 단지 "모든 물 근원과 시내로 가자" 고 말한 것이 전부다. 아합의 생각이 이렇게 비굴하고 천박했다. 그는 마음을 겸허히 하여 여호와께 돌아가지 않았고, 절박할 때에도 그는 여호와께 부르짖지 않았다. 그의 말은 "혹시 꼴을 얻으리라" 였다. 하나님의 문이 닫혔으니 남은 것은 자기 자신뿐이었다. 그는 꼴을 찾아 다니면서도 하나님을 찾는 데는 관심이 없었다.

   흉년의 공포가 닥치지 않았다면 그는 우상 숭배하는 이세벨의 선지자들 속에서 생을 즐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을 판단하고 겸허해져서 그 흉년이 일어난 원인을 찾거나, 하나님 앞에 나와 용서와 회복을 구하지 않았고 그는 계속 완고하게 자기 길을 갔다. 아아!  그는 악행을 일삼았고 이세벨의 노예가 되었다. 그의 궁전은 더러운 새들의 소굴이 되었고 바알의 선지자들은 수많은 독수리 떼처럼 그의 왕좌 주위를 배회하며 온땅에 우상의 누룩을 퍼뜨렸다.

   마음에서 주님을 떠나게 하는 것은 참으로 끔찍한 일이다. 사람은 그 끝이 어딘지 알 수 없다. 아합은 이스라엘 안에 있었지만 그의 아내 이세벨의 선두에서 거짓 종교조직에 빠졌다. 그의 믿음과 선한 양심은 파선해서 극도의 악으로 빠져들어 버림받았다. 그처럼 하나님의 길에서 벗어난 악한 자는 없었다. 그러한 사람은 점점 더 보통의 죄와 사단의 희생물이 되는 것보다 더 깊은 악의 수렁으로 빠져들어 간다. 악마는 그러한 사람을 사로잡아서 하나님의 진리를 대항하여 그의 사악한 계획을 수행하는 도구로 삼는 것을 즐거워하는 것 같다.

   당신이 진리와 거룩함의 길이 가치가 있다는 것을 배운 적이 있고, 하나님과 그분의 길에서 기쁨을 맛보았다면 조심하라. "힘을 다하여 마음을 지키라." 거짓 종교의 영향력을 조심하라. 당신이 숨 쉬고 있는 환경은 영적 생명에 해롭고 파괴적이며 그 곳을 당신은 통과하고 있다. 그 원수는 섬뜩한 후각을 가지고 있고, 그것은 인간의 마음에 6000년 가까이 접촉하면서 예민해져서 전방위적으로 당신을 감시하고 있다. 당신의 하늘 아버지와 계속 교통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당신의 영혼을 보존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아합을 기억하고 시험에 들지 않고 보존되도록 기도하라.

   아합과 관련하여 엄숙하고 시기적절한 경고로서 다음 말씀이 유용할 것이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는 사막의 떨기나무 같아서 좋은 일이 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광야 간조한 곳 건건한 땅 사람이 살지 않는 땅에 살리라" (렘 17:5-6).

   아합은 홀과 보좌가 주어졌지만 이같이 비참했다. 그는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에게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이미 언급한대로 그는 우울한 가운데 있었고, 그의 말과 행동에는 이스라엘과 하나님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찾아볼 수가 없다. 그에게 맡겨졌고, 하나님 다음으로 그의 위대한 목적이어야만 하는 백성에 관해서는 한마디 말도 없다. 그의 땅에 속한 마음은 "말과 노새" 이상은 생각할 수 없었다. 이것들이 이스라엘의 끔찍한 재난의 시대에 걱정 많고 고독한 아합의 삶의 대상이었다.

   아아! 그의 모든 저급하고 천박한 이기심과 하나님을 닮은 사람의 고상한 영과는 얼마나 크게 대조되는가! 그 땅이 하나님의 무거운 채찍아래 떨고 있을 때,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하나님께 아뢰되, 명령하여 백성을 계수하게 한 자가 내가 아니니이까? 범죄하고 악을 행한 자는 곧 나이니이다. 이 양떼는 무엇을 행하였나이까? 청하건대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의 손으로 나와 내 아버지의 집을 치시고 주의 백성에게 재앙을 내리지 마옵소서" (대상 21:17).

   왕의 참된 정신이 여기에 있다. 다윗은 그의 복된 주인의 심정으로 양들이 안전하게 피할 수 있기를 소원했다. 그는 양들과 적 사이에 서서 그의 홀을 양치는 지팡이로 사용했다. 그는 그의 "말과 노새"를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다. 그는 그의 자신과 아비의 집을 생각하지 않았고 하나님의 백성과 그의 양들을 생각했다. 이스라엘의 흩어진 지파들이 다윗의 자비로운 보호 아래 있다는 것을 다시 발견하는 것은 말할 수 없이 복된 일이다.

   아합의 역사를 좀 더 살펴보는 것이 유익할 것이다. 그가 의로운 나봇을 부당하게 처리한 일과 나봇에게 준, 그것은 선한 왕 여호사밧의 마음과는 전혀 다른 나쁜 영향과 그의 불행한 통치로 인한 다른 많은 형편을 상고해보자.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주제와는 거리가 멀기 때문에 아합 집안의 중요한 인물의 성격을 잠시 언급하고 나서 엘리야로 돌아올 것이다.

   그 정체가 알려져 있지 않은 아합 집안의 지도자 오바댜는 주님을 경외 하였으나 그는 부도덕한 환경에서 성장했다. 의로운 오바댜의 영혼에게는 악한 아합과 그보다 더 악한 왕의 배우자는 고통스런 환경이었을 것이다. 그는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는 섬김과 말씀 증거에 방해를 받았다. 주님을 위한 섬김은 비밀리에 행해졌다. 그는 공개적으로 단호하게 행하는 것이 두려웠다. 좀 더 적당한 토양과 건전한 환경에서 양육되었다면 그는 좀 더 충분히 그의 섬김의 행동을 보여주었을 것이다. "그는 백 명의 선지자들을 데려다가 오십 명씩 동굴에 숨기고 음식과 물을 먹였다." 이것은 그가 마음으로 주님께 헌신했다는 소중한 증거였다. 이것은 매우 불리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원칙의 복된 승리의 증거였다.

   사울의 집안에서 요나단의 경우에도 그러했다. 슬프게도 그 역시 이스라엘과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방해를 받았다. 그는 아버지의 악한 삶과 행위와는 좀 더 철저히 분리된 입장에 있어야 했다. 그는 다윗처럼 사울의 상에 참여하지 말았어야 했다. 아둘람 굴이야 말로 그의 합당한 거처였다. 그는 그곳에서 거절당한 다윗과 멸시 받는 그의 동료들과 거룩한 교제 속에 있어야 했다. 그는 거기에서 더 넓고 더 적당한 영역을 발견했을 것이고 하나님과 그의 기름부음 받은 자에게 대한 열정적인 헌신을 분명하게 보여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전에 하나님의 섭리가 그들을 어떤 지역에 머물게 했던 것과 같이, 확실히 인간적인 기회주의는 요나단을 사울의 집에 머물게 했고 오바다를 아합의 집에 머물게 했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이든지 기회주의는 믿음도 아니고 섬기는 데 도움도 되지 못한다. 믿음만이 냉담한 인간적 기회주의 법칙을 돌파하여 실수하지 않고 그 자체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요나단은 때때로 사울의 상을 떠나서 다윗에게 합류하라는 압박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거부했다. 그는 그의 친구를 위해서 변호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그는 다윗과 운명을 같이 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로 인해 그는 길보아 산에서 할례 없는 자들의 손에 죽었다. 그는 그의 생애동안 사울이 세운 불의한 법에 시달리고 하나님 섬김에 방해를 받았다. 그것은 사울이 믿는 자들의 양심을 얽매기 위해서 세운 것이었다. 그는 불명예스럽게도 할례 없는 자들과 함께 죽었다.

   오바댜도 마찬가지였다. 이스라엘의 왕들이 본래의 원칙을 타락시킨, 배도의 사다리에서 가장 저급한 단계에 있는 자들과 연루된 위치에 머무는 것이 그의 운명이었다. 그는 하나님과 그의 종들을 위해서 몰래 행하는 것을 고맙게 생각했다. 그는 아합과 이세벨을 두려워했다. 그는 모든 추한 것들을 결연히 대항하는데 힘과 담대함이 부족했다. 그는 열정과 새로운 힘을 발전시킬 여지가 없었다. 그의 주변의 해로운 분위기로 그의 영혼은 고갈되어 당시에 거의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엘리야는 담대하게 아합과 대결하고 공개적으로 주님을 섬겼던 반면, 오바댜는 공개적으로는 아합을 섬기면서 은밀히 주님을 섬겼다. 엘리야는 여호와의 임재로부터 거룩한 공기를 호흡한 반면 오바댜는 악한 아합의 궁정의 오염된 공기를 호흡했다. 엘리야는 매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손에서 공급받았지만 오바댜는 아합의 말에게 주는 풀을 찾아서 돌아다녔다. 정말로  충격적인 대조가 아닌가!

   이 순간에도 많은 비슷한 오바댜가 있지 않은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세상과 짝하여 그 죽음과 불행을 공유하며, 그들과 협력하여 임박한 파멸을 피하려고 애쓰고 있지 않은가? 틀림없이 그러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일이 합당한 것인가? 불경건한 세상의 "노새와 말" 로 하여금 하나님의 교회의 유익을 제쳐놓고 그리스도인들의 생각과 에너지를 빼앗게 할 것인가? 그럴 수는 없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인들은 좀 더 고상한 목적이 있어야 한다. 그의 힘을 좀 더 높고 천상적인 영역에 써야 한다. 아합이 아니라, 하나님께 헌신해야 한다.

   이것은 매우 광범위한 질문이며 그로부터 교훈을 배우지 못한 사람이 우리들 중에는 거의 없다. 정직하게  자문해 보자. 마음을 감찰하시는 분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우리는 어떤 목적을 품고 이루고 있는가? 육신을 따라 씨를 뿌리고 있는가? 단순히 지상의 목적을 위해서 일하고 있는가? 어떤 계획을 품고 있는가? 자기 자신이나 현재의 이 세상보다 더 고상한 목적을 품고 있는가?

   올바른 위치에 서있으면 이 질문들은 엄중한 질문으로 들릴 것이다. 인간의 마음과 감정은 세상과 세상에 속한 것으로 하향하는 경향이 있다. 아합의 궁정은 아사(餓死)의 위기에 있는 사렙다 과부의 집이나 고독한 그릿시내 보다는 우리의 타락한 본성에 훨씬 더 강력하게 끌린다. 그러나 그 결말을 숙고해보자. 결과로 그러한 일을 판단하는 참된 기준을 알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저희 결국을 깨달았나이다"(시 73:17).

   엘리야는  성소에 들어가서야 아합이 미끄러운 곳에 있다는 것과 그의 집이 신속하게 무너져 진토가 될 것을 알았다. 그리고 모든 그의 사치와 영광이 쓸쓸한 무덤으로 끝나고 그의 영혼은 최후의 심판을 받기 위해 소환될 것이다. 거룩한 사람은 이 모든 것을 철저히 깨닫고 그 모든 것들로부터 분리하여 따로 서있는 것에 만족했다. 그의 가죽 허리띠와 초라한  털옷, 외로운 길이 아합의 궁정의 모든 쾌락보다 더 좋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것이 그의 판단이었다. 우리는 이 장을 마치기 전에 그의 심판의 통지를 보게 될 것이다.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예수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는 다 그분을 증거함에 있어서 더욱 단호하고 활기차기를 바란다. 우리가 좀 더 참되고 진실했다는 것을 세상에 보여주어야 한다. 우리는 너무 미온적이어서 세상과 육신에 너무 많이 타협하려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아합과 이세벨이 우리에게 입히려는 예복과 가죽 허리띠를 너무 쉽게 교환한다.

   주께서 모든 그의 백성들에게 은혜를 주셔서 악한 세상을 대항하면서 그 길과 교훈, 원칙을 떠나기를 기도한다. 한마디로 그것에 속한 모든 것으로부터 떠나기를 기도한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한 자들처럼 위엣 것에 마음을 두고 땅엣 것에 마음을 두지 말자." "우리의 시민권이 하늘에 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

Posted by 행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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