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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5.05.02 공병우 - 한글을 사랑한 괴짜 의사
  2. 2015.05.02 산에 왜 가니?
  3. 2015.05.02 유대인 이야기
  4. 2015.05.02 한 직장에서 백 살에 퇴직

 

 

 

나의 죽음을 세상에 알리지 마라

 

 

임진왜란 때 전사한 이순신 장군의 일화가 아니고, 1995년에 아흔 나이로 세상을 떠난 한국 최초의 안과의사 공병우 박사의 유언이었습니다.
‘장례식도 치르지 마라. 쓸만한 장기와 시신은모두 병원에 기증하라. 죽어서 한 평 땅을 차지하느니 
그 자리에 콩을 심는 것이 낫다. 유산은 맹인 복지를 위해 써라.’는 말을 남기고 이승을 떠났습니다.
가장 가까운 공동묘지에
매장하되 입었던 옷 그대로 값싼 널에 넣어 최소 면적의 땅에 묻어달라고 당부했습니다.
이런 유언 때문에 공 박사가 별세했다는 소식은
 이틀이 지나서야 신문 기사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공 박사는 콘택트렌즈와 쌍꺼풀 수술을
국내에 도입한 유능한 안과 의사였지만
한글 사랑, 맹인 사랑으로 더 유명합니다.
그는 1938년 공안과에 눈병 치료를 받으러 온
 한글학자 이극로를 통해 한글의 우수성에 대해 감화를 받은 뒤 한글의 과학화에 앞장섭니다.

고성능 한글 타자기를 발명했고
한글 텔레타이프, 한영 겸용 타자기, 세벌식 타자기 등을 발명해 보급했습니다.
한글 시력표를 만들었고 한글 문화원을 세워
한글 글자꼴과 남북한 통일자판 문제 등에 대해 연구했습니다.

공 박사는 특히 세벌식 타자기에 애착이 컸는데, 세벌식 키보드를 써 본 사람은 2벌식보다
속도가 훨씬 빠르고 오자가 적은데다 편리하다고 한 목소리를 내더군요.
정부가 성급히 2벌식을 표준으로 정하는 바람에
시장에 보급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습니다.
공 박사는 당시 PC 통신에서
세벌식 타자의 우수성에 대해 수많은 글을 남겼는데, 당시 사람들의 무지한 욕에 개의치 않고 계속 글을 썼습니다.

 

 

 


그는 또 자신은 옷과 신발을 해어질 때까지
입고 신으며 검소하게 살았지만, 맹인 부흥원을 설립하고 장님을 위한 타자기, 지팡이를 개발하는 등 평생 장님을 위한 일에 돈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어느 신문에 
‘한국의 고집쟁이’ 6위로 선정된 그는 수많은 일화를 남겼습니다.

일제시대에 창씨 개명을 거부하며
 ‘공병우 사망’을 선언했고 서슬퍼른 5공화국 때 대놓고 정부를 비판했습니다.
형식보다는 본질에 충실해
집안의 문지방을 모두 없애버렸고, ‘못사는 나라에서 옷치장에 시간을 낭비해선 안된다.’ 며 한복을 입지 않았습니다.
아들의 결혼식에서는 며느리에게
 폐백 절받는 것 보다 악수나 한번 하자고 청했습니다.
시간을 금쪽같이 여겨
5분 이상 머리를 깎는 이발소, 낮에 열리는 결혼식에는 가지 않았습니다.
평생 생일 잔치를 하지 않았고 미리 예약하지 않고 온 손님은
아무리 귀한 사람이라도 돌려 보냈습니다.

 

공 박사는 미국에서 한 60대 언론인을
 만나 얘기하던 중 길거리에서 젊은 사람이 컴퓨터도 안 배우냐.’고 호통을 쳤다고 합니다.
그는 젊음은 나이의 문제가 아니고
얼마나 공부를 하며 사회에 열심히 공헌하느냐가 잣대라고 말해왔습니다.

자신도 그렇게 젊게 살다가 가셨습니다.
늘 공부하며 사는 것, 남의 눈치보다는 옳다고 믿는 것을 
실천하며 사는 것, 작은 것보다는 큰 뜻에 따라 사는 것, 사랑을 품고 사는 것, 이러한 삶이야 말로 젊은 삶이 아닐까요?

 

영원한 젊은이, 공병우 선생의 살던 자세를 다시 한 번 되돌아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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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 왜 가니?

 

 

산에 올라가는 사람에게 '거기 왜 가니' 묻는다면 사람에 따라 대답할 말이 여러가지일 것이다.

건강을 위해, 산이 좋아서...

 

 

에베레스트 산에 세 번째 원정을 앞둔 영국인 말로리가 미국 순회강연중 필라델피아를 찾았을 때, 그의 강연이 끝나자 어떤 부인이 엉뚱하게 '당신은 왜 에베레스트에 오르려 하느냐'는 질문을 하자 그는 '그것이 거기에 있기 때문(Because it is there)'이라고 답한 것이 불후의 명언으로 남아있다.

그리고 성철 스님이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고 말한 것이 많은 의미를 함축하고 한국인에게 일상어에 가깝게 회자되어 있다.

 

글쓴이도 바다만 좋아하는 것이 아니고 산에 오르는 것을 참 좋아했다.

학생 때 주말이면 도봉산, 수락산, 불암산 등 주변 산에 거의 매주 올라갔다.

방학 때는 설악산, 지리산, 한라산 등을 차례로 종주 등반했었다.

 

그때 누군가가 내게 '산에 왜 가니'라고 물었다면 나는 이렇게 답했을 것이다.

"밥해 묵는 재미에..."

먹을 때 밥만 먹는 것이 아니니까... ^^

 

그런 연유에서인지 한국을 떠나 정착지를 정하는데 바다뿐만 아니라 산이 있는 곳에서 살고 싶은 생각에 두루두루 돌아서 푸켓을 염두에 두고 있는지 모르겠다.

 

 

 

Montañas

 

Montaña

 

Montaña

 

Montaña

 

Montaña

 

Montaña

 

Montaña

 

Montaña

 

Montaña

 

Montaña

 

Montaña

 

Montaña

 

Montaña

 

Montaña

 

Montaña

 

Montaña

 

Montaña

 

Montaña

 

Montaña

 

Marco Evaristti vuelve al Mont Blan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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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행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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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어떻게 부의 역사를 만들었나

 

 

스티브 잡스가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마이크로 소프트의 빌게이츠와 45조원의 재산을 갖고 있다는 세계 최고의 갑부 워렌 버핏 또한 유대인이다.

유대인들이 돈을 잘 벌고 또 돈을 잘 모은다고는 하지만 도대체 왜 이들은 돈을 그렇게도 잘 버는 것일까?

유대인들은 돈을 잘 버는데 필요한 유전적 인자를 태생적으로 갖고 태어나는 것일까?

 

1492년 8월 스페인 세비야.

럼버스 선단의 신대륙 항해 준비가 한창이었다.

옆 항구에선 한 무리의 사람들이 배에 오르고 있었다.

유대인들이었다.

이슬람 세력을 쫓아내고 스페인을 통일한 이사벨 여왕은 '가톨릭 개종'과 '국외 추방' 중 양자택일하라고 유대인을 윽박질렀다.

명분은 종교문제였지만 속셈은 유대인 재산 몰수였다.

유대인 17만 명이 스페인을 떠났다.

이후 스페인은 신대륙에서 들여온 막대한 자원으로 외형을 넓혀갔지만 속으론 골병들었다.

유대인들이 쥐고 있던 금융·유통망이 붕괴됐기 때문이다.

스페인은 결국 유대인들이 떠난 지 반세기 만인 1557년 첫 파산 선언을 하는 등 국운이 급격히 기울었다.

 

 

 

 
'유대인 이야기'는 구약성서 시대부터 현대까지 유대인에 초점을 맞춰 세계경제사의 흐름을 분석한다.

KOTRA 직원으로 정년퇴직하기까지 30여 년간 세계경제 현장에서 유대인들의 활약을 목격한 저자는 10년이 걸려 책을 완성하면서 '친유대적도 반유대적도 아닌 있는 그대로 그들의 장단점을 보고자 애썼다.'고 밝혔다.

책의 주장은 서구 역사에서 부와 패권의 흐름은 유대인의 이동사와 일치한다는 것.

로마제국에 대항했다가 고향에서 쫓겨난 유대인은 유럽 국가들에는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존재들이었다.

13세기 영국, 14세기 프랑스, 15세기 스페인, 16세기 이탈리아에서 차례로 추방당한 유대인들은 그때그때 자신들을 받아주는 곳으로 이주했고, 그 지역 경제를 부흥시켰다.

반대로 그들이 떠난 곳엔 경제 침체의 그늘이 짙어졌다.

 

현지인들과 동화되지 않고 자신들의 종교적 정체성을 내세운 유대인들은 박해받았지만 문맹이 절대다수이던 유럽에서 유일하게 대부분이 글을 읽고 셈을 할 줄 아는 민족이기도 했다.

멀쩡한 직업을 가질 수 없었기에 환전업·대부업·전당업 등을 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들은 이를 기회로 활용했다.

추방당할 것에 대비해 늘 재산을 현찰과 보석, 부동산 등으로 분산해 놓는 포트폴리오, 세계 곳곳의 유대인 네트워크를 통한 정보 유통, '돈은 버는 것이 아니라 불리는 것'이라는 경제관념은 언제 어느 곳에서든 생존과 경제적 번영을 가능케 했다.

 

 

 

 


스페인에서 쫓겨난 유대인들이 정착한 곳은 벨기에의 앤트워프.

화폐와 금을 소지하지 못하고 황급히 보석만 챙겨온 유대인들은 이곳에서 보석유통업을 일으켰다.

이어 암스테르담으로 옮긴 유대인들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를 세워 향료 무역으로 막대한 부를 쌓았고, 인도·동남아·중국·일본·서인도제도의 무역, 아프리카 노예무역도 주도했다.

청교도혁명을 일으킨 크롬웰은 아예 런던의 일정 면적을 유대인들을 위한 자유경제지구로 지정해줬다.

'더 시티'의 원조다.

유대인들에게 미국은 더할 나위 없는 기회의 땅이었다.

 

바빌론 시절 고대 중국과 비단 교역에 나섰고 소금 정제업, 다이아몬드 가공과 유통 독점, 석유산업에 이어 현대 금융업을 장악하고, 중세시대 '궁정 유대인'처럼 미국의 재무장관과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을 줄줄이 배출하는 유대인 파워는 현대로 올수록 더욱 압도적이다.

Posted by 행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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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직장에서 백 살에 퇴직

 

 

2006년 3월 미국 로스앤젤레스 대중교통국에서는 아주 특별한 퇴직 행사가 열렸다.

주인공은 지난 81년 동안 이 회사에서 일해 온 아서 윈스턴.

그날은 그의 100번째 생일이기도 했다.

100년 전 남부 오클라호마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 버스 운전기사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하지만 인종차별이 심한 1920년대 미국에서 흑인인 그에게 그 꿈은 멀기만 했다.

 

 

 

 


그러다 열여덟 살 되던 해에 당시 퍼시픽전철이었던 로스앤젤레스 대중교통국에 입사할 수 있었다.

버스를 깨끗이 닦고 기름을 치는 단순한 일이었지만 그는 꿈을 이룬 듯 성실하게 일했다.

늘 새벽 6시면 어김없이 출근했고, 단 하루도 결근하지 않았다.

아니, 딱 하루 병가를 낸 적이 있다.

그날은 1988년 어느 월요일, 지난 토요일에 아내 프랜시스를 먼저 떠나보냈기 때문이다.

그에게 직장은 네 아이를 키우고, 아내와 아이들이 모두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의 삶과 함께한 평생의 동반자였다.

1996년 빌 클린턴 대통령은 그를 '세기의 일꾼'으로 표창했다.

한 사람이 같은 직장에서 몇 십 년 동안 신임을 받으며 나이가 들어서도 열성적으로 일을 계속할 수 있다는 것에 모두가 놀랐다.

로스앤젤레스 대중교통국은 1997년 그가 담당하던 5구역을 그의 이름을 따서 '아서 윈스턴 구역'이라 이름 붙여 줬다.

 

 

 

 


100세의 나이로 생일날 퇴직하는 그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평범한 버스 수리공인 나에게 이런 특별한 일이 일어나다니, 모두에게 감사합니다. 앞으로 무슨 일을 하든 쉬지 않고 움직일 거에요. 내 나이에 누웠다가 못 일어나면 큰일이니 말이오.”

 

 

 

 

 

Amazing grace 백파이프 연주

 

Posted by 행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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