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라카스 빈민가에서 지휘하고 있는 구스따보 두마멜

 

 

어둠 속 아이들이 음악으로 인생이 바뀌었다

 

 

1970년대 베네수엘라는 사우디아라비아와 같은 석유 부국을 꿈꿨다.

마라카이보 호수에서 솟아난 석유는 분명한 미래를 약속하는 듯했다.

1975년 사관학교를 졸업하면서 페레스 당시 대통령으로부터 지휘도를 받은 우고 차베스 역시 조국의 번영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때만 해도 그는 자신이 16년 뒤 페레스 대통령, 미국과 다국적 기업을 향해 칼을 빼들 반역의 주인공이 될 줄 몰랐을 것이다.

 

누구나 장밋빛 미래를 말하던 시기, 불가능한 혁명을 꿈꾸는 이들이 있었다.

그들의 눈에 베네수엘라는 탐욕스러운 제국들의 좋은 먹잇감일 뿐이었다.

그들의 귀에 민중의 신음과 통탄은 그치지 않았다.

1975년 엘 시스테마는 그렇게 탄생했다.

 

“우린 예술로 싸웁니다. 자라나는 아이들과 젊은이들이 음악이라는 기치 아래 하나가 되어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싸우는 거죠.”

엘 시스테마가 택한 건 총 대신 음악이었다.

 

 

 

 

 

엘 시스테마의 공식 명칭은 ‘베네수엘라 국립 청년과 유소년 오케스트라 시스템 육성재단’이다.

흔히 시스템을 뜻하는 ‘엘 시스테마’라 줄여 부른다.

가난은 당장 처치할 수 없지만, 조금씩 치유할 순 있다.

 

“여기 아이들은 열다섯이면 총 들고 마약을 하다가 3달 뒤엔 죽고 말아요.”

빈민가에서 마약과 총으로 허기를 달래던 아이들에게 엘 시스테마는 든든한 요새이자 꿈의 요람이다.

전과 기록으로 얼룩진 11명의 아이로 시작한 엘 시스테마는 현재 200여 개의 지역별 오케스트라와 26만 명의 단원을 거느린 초대형 오케스트라가 됐다.

역경에서 환희를 쏘아 올린 엘 시스테마는 특별한 재능이 기적을 일구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단적으로 모차르트의 부활이라는 찬사를 받는 지휘자 구스타보 두다멜 또한 엘 시스테마의 일원으로만 다뤄진다.

대신 종이로 만든 바이올린을 만지작거리던 코흘리개들이 어떻게 세계가 주목하는 오케스트라의 단원으로 성장할 수 있었는지를 되묻게 한다.

 

 

 

 

“한 명의 어려운 아이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 있다면 모든 어려운 아이들도 그런 기회를 가질 수 있어야죠.”

엘 시스테마의 창립자 호세 안토니오 아브레오의 말처럼, 엘 시스테마의 철학은 누구에게나 평등이다.

마에스트로와 비르투오소를 배출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음악을 즐길 수 있어야 한다는 엘 시스테마의 이념은 ‘변화는 이미 시작됐다.’는 스태프들의 확신에 찬 발언과 총을 맞고서도 웃으며 연주를 했다는 소녀의 진지한 표정에서도 읽힌다.


호세는 마약과 포르노에 찌들어 살던 베네수엘라의 뒷골목 아이들에게 악기를 쥐여줬다.

음악으로 아이들이 만들어갈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을까?

모험은 완전히 성공했다.

36년이 지난 후 베네수엘라는 세계적 음악 강국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으며, 엘 시스테마는 20대 나이에 LA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의 상임 지휘자가 된 구스따보 두다멜과 더블 베이시스트 에딕슨 루이즈 등 세계적 음악가들을 낳았다.

그들이 어린 시절 ‘엘 시스테마’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모든 어린이에게 악기를 사 줄 여력이 없는 엘 시스테마 센터는 처음 음악을 접하는 아이들에게 종이 바이올린과 종이 첼로를 준다.

종이 바이올린을 들고 입으로 노래를 부르며 부모님을 초청한 첫 발표회.

가난한 어머니들이 손수건으로 눈가를 닦을 땐 모두의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엘 시스테마의 수화 합창단이 펼치는 아베마리아 공연은 또 어떤가.

땅 밑과 같은 어둠 속에 살던 아이들이 천사와도 같은 표정으로 노래를 부를 때, 우리는 듣지 못하는 사람까지도 구원하는 음악의 힘을 믿게 된다.


엘 시스테마의 성과는 국내에도 알려져 최근 몇몇 지자체들이 저소득층을 위한 음악 교육 지원을 시도하고는 있으나, 장기적인 ‘시스템’이 되기엔 아직 갈 길이 멀다.

아이들에겐 국·영·수 뿐 아니라 예술이 있음을, 예술은 여유로운 사람들만의 전유물이 아님을 사람들은 깨달아야 할 것이다.

 

 

 

 

 

구스따프 두다멜이 지휘하는 시몬 볼리바르 오케스트라의 맘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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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우 박사의 이별 편지 '사랑합니다. 그리고 고마웠습니다.'

 

 

 

"아들아! 너희와 함께 한 추억이 내 맘속에 가득하기에 난 이렇게 행복한 마지막을 맞이할 수가 있단다. 여보! 아직도 봄날 반짝이는 햇살보다 눈부시게 빛나고 있는 당신을 난 가슴 한가득 품고 떠납니다."

시각장애인인 전 백악관 차관보 강영우 박사는 임종을 앞두고 아내와 두 아들에 편지를 남겼다.

강 박사는 지난해 10월 췌장암 말기 진단을 받고 차분하게 세상과 이별할 준비를 해왔고 가족들에게도 마지막 편지를 썼다.
최근 별세한 강 박사의 가족이 전한 편지는 그가 가족과 함께하며 행복했던 순간을 회고하고 부인 석은옥 여사와 진석, 진영 두 아들에 대한 사랑과 감사의 마음을 빼곡히 담고 있다.

 

 

 

 

 


'이제 너희와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구나.'로 시작되는 두 아들에 보내는 편지는 '내가 너희를 처음 품에 안은 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너희와 이별의 약속을 나눠야 할 때가 되었다니, 좀 더 많은 것을 나누고, 좀 더 많은 것을 함께 하지 못한 아쉬움이 밀려온다.'고 두 아들과 헤어지는 아픔을 담았다.
그는 '하지만 너희가 나에게 준 사랑이 너무나 컸기에, 그리고 너희와 함께 한 추억이 내 맘속에 가득하기에 난 이렇게 행복한 마지막을 맞이할 수 있단다.'라며 두 아들을 키우는 과정의 추억을 회고했다.

강 박사의 장남 진석 씨는 지난해 워싱턴포스트에 의해 '슈퍼 닥터'로 선정되기도 한 유명 안과 전문의이며, 차남 진영 씨는 백악관 선임법률고문으로 일하고 있다.

그는 '해 보기 전에는 정대 포기하지 말라는 나의 말을 가슴속 깊이 새긴 채로 자라준 너희가 고맙고, 너희의 아버지로 반평생을 살아왔다는 게 나에게는 축복이었다. 특히 지난해 연말 췌장암 판정을 받은 후 손자들까지 모든 가족이 함께했던 크리스마스가 너무나 소중한 선물이었다.'고 아들에 감사의 뜻을 표했다.
강 박사는 '내가 떠나더라도 너희는 혼자가 아니기에 너희 곁에 사랑하는 사람들이 늘 항상 함께할 것이기에 아버지는 슬픔도, 걱정도 없다. 나의 아들 진석, 진영이를 나는 넘치도록 사랑했다.'고 편지를 맺었다.

'사랑하는 아내에게'라는 제목이 붙은 부인에 보내는 편지는 젊은 시절 첫 만남부터 회상하며 시작했다.
"당신을 처음 만난 게 벌써 50년 전입니다. 햇살보다 더 반짝반짝 빛나고 있던 예쁜 여대생 누나의 모습을 난 아직도 기억합니다. 손을 번쩍 들어 나를 바래다주겠다고 나서던 당돌한 여대생, 당신은 나에게 날개 없는 천사였습니다."

1962년 서울맹학교 학생이던 강 박사는 맹학교 자원봉사를 나왔던 당시 숙명여대 1학년이던 부인 석은옥 여사를 처음 만났다.

강 박사는 대학생 누나였던 석 여사의 도움으로 대학 진학의 꿈을 키웠고 1972년 두 사람은 결혼했다.

강 박사는 '앞으로 함께 할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이 순간에 나의 가슴을 가득 채우는 것은 당신을 향한 감사함과 미안함'이라며 시각장애인인 자신과 결혼하고 보살펴준 부인의 헌신적인 삶을 떠올렸다.
미국 유학, 이민 생활의 어려움을 회상하며 '시각장애인의 아내로 살아온 그 세월이 어찌 편했겠느냐. 항상 주기만 한 당신에게 좀 더 잘해주지 못해서, 좀 더 배려하지 못해서, 너무 많이 고생시킨 것 같아서 미안하다.'고 회한도 담았다.

"지난 40년간 늘 나를 위로해주던 당신에게 난 오늘도 이렇게 위로를 받고 있습니다. 미안합니다. 더 오래 함께 해주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내가 떠난 후 당신의 외로움과 슬픔을 함께 해주지 못할 것이라서..."
강 박사가 '나의 어둠을 밝혀주는 촛불'이라고 지칭한 부인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는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그리고 고마웠습니다.'는 말로 맺었다.

 

 

 


1944년 경기도 문호리에서 태어난 강 박사는 13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이듬해 축구공에 눈을 맞아 망막박리로 시력을 잃었고 같은 해 어머니까지 세상을 떠나 10대 가장으로 생계를 책임지는 어려운 청소년기를 겪었다.
역경과 고난을 딛고 연세대를 졸업한 뒤 1972년 미국으로 유학길에 올라 피츠버그대에서 교육학 석사와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강 박사가 미국 유학 떠날 당시 문교부는 장애를 국외 유학의 결격사유로 규정했지만, 강 박사의 유학으로 이 조항이 폐지되면서 그는 한국 장애인 최초의 정규 유학생이 되는 기록도 세웠다.
그는 박사학위 취득 후 일리노이대 교수와 일리노이주 특수교육국장 등을 역임하다.

지난 2001년 조지 부시 행정부에서 백악관 장애인위원회 정책차관보로 발탁됐다.

당시 강 박사의 백악관 차관보 발탁은 미국 이민 1백 년 한인 역사상 최고위 공직이었다.

그의 자서전 '빛은 내 가슴에'는 7개 국어로 번역 출간됐고, 국회 도서관에 음성도서(talking book)로 소장되어 있을 뿐 아니라 드라마와 영화로 제작되기도 했다.
장애인 인권을 제도적으로 증진하기 위해 강 박사는 국제교육 재활교류재단을 창설했으며 유엔 세계 장애위원회의 부의장을 역임하며 루스벨트 장애인상 제정을 제안하고 창설하기도 했다.

 

 

 

 


Me t'aspro mou mantili (하얀 손수건)

Nana Mouskouri

 

 

단아하고 청순한 아름다움을 지닌 Nana Mouskouri는 1935년 그리스의 아테네에서 태어나 오페라 가수의 꿈을 꾸며 성장하였다.

어린 시절부터 음악에 대한 남다른 재능을 보인 그녀는 명문인 아테네 음악원에 입학하여 성악을 전공하게 된다.

그러나 음악원 졸업시험을 앞두고 우연히 접하게 된 재즈음악에 매료된 후 그녀의 인생은 새로운 전환점을 맞게 되었다.

재즈뮤지션들의 음악뿐만 아니라 포크와 샹송 등 대중들의 심금을 울리는 다양한 팝 음악을 섭렵하며 제 2의 Maria Callas가 되는 것을 과감히 포기한 것이다.
이로 인해 음악원을 졸업하지 못하는 불운을 겪게 되었지만 나나 무수쿠리는 그리스를 대표하는 세계적인 가수로 성장하게 된다.

번안 가요로 잘 알려진 '하얀 손수건’과 '아테네의 흰 장미’가 1960년 당시로는 경이로운 120만 장이라는 엄청난 판매고를 올리면서 나나 무수쿠리는 대형 가수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독일을 비롯한 유럽 전역에서 그녀의 인기는 급속히 퍼져나갔고, 본격적인 성공은 미국 대중음악의 거목인 Harry Belafonte가 그녀를 정식으로 미국에 초청하면서 이루어졌다.

미국인들의 뜨거운 환호를 받으며 펼친 나나 무수쿠리와 해리 벨라폰테의 1964년 카네기 홀 실황은 성황을 이루었고 유럽에 이어 미국에서도 그녀의 인기는 식을 줄 몰랐다.

나나 무수쿠리는 40년이 넘는 활동기간 동안 한결같은 모습으로 전 세계에 걸친 그녀의 팬들을 매료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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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츠와나 기술학교 학생들과

 

 

 

눈물을 희망으로 끌어올린 사람

 

 

 

첫아이가 딸이라 화가 난 아버지는 만취해 아이를 방바닥에 내던졌다.

척추를 다친 갓난아기의 키는 더디 자랐다.

공부는 초등학교가 끝이었다.

아버지의 자살, 정신질환을 앓는 엄마 대신 동생 넷을 키우기 위해 남의집살이를 시작했다.

겨우 열네 살이었다.

‘세상은 나를 좌절하게 했지만 나는 희망을 찾고 싶었다.’고 김해영 씨는 말했다.

‘대학 가기 위해 공부한 게 아니라, 살기 위해 공부했다.’는 그녀다.

직업훈련원에 들어갔다.

배움에 목마른 소녀는 뭐든 악착같이 배웠다.

편물 기술로 전국기능대회를 휩쓸었다.

1985년에는 세계 장애인 기능경기대회에서 기계편물 부문 1위를 차지했다.

 

아프리카 남부의 작은 나라 보츠와나로 간 게 스물여섯 살 때다.

어린 시절의 자신처럼 아무 희망도 없는 아이들에게 기술을 가르쳐주며 꿈꾸게 하고 싶었다.

14년 동안 보츠와나 직업학교에 봉사한 그녀는, 미국 나약(Nyack) 대학을 거쳐 2009년 미국 컬럼비아 대학 국제사회복지대학원에 입학한다.

주인집 창문 너머 교복 입고 지나가는 아이들만 보면 눈물이 솟았던 열네 살 식모는 이제 세계를 무대로 활약하는 국제사회복지사가 됐다.

 

 

 

세계의 그늘진 곳을 누비는 국제사회복지사 김혜영 씨

 

 

134㎝에서 성장을 멈춘 그녀는 굽 높이가 10㎝가량 되는 구두를 신고 있다.

 

―신발 굽이 굉장히 높다.

포 바이 포(4×4) 사륜구동이다. 이 신발을 신고 세상을 누볐다.”

―다리가 길어 보인다.

멋 때문은 아니다. 다리가 10㎝만 더 길었으면 하는 게 내 소원이었다. 의자에 앉으면 다리가 허공에 떠서 몸이 균형을 잡지 못한다. 구두가 그 10㎝를 채워준다.”

―몸이 얼마나 불편한 건가.

오른쪽 다리가 왼쪽보다 1인치 짧아서 늘 기울어진 채로 서 있다. 척추가 왼쪽으로 휘어져 있어 허리가 아프고, 20~30m 걸어가려면 서너 번 쉬어야 한다. 통증을 줄이려고 허리 복대를 13년 동안 감고 다녔다. 앉아 있는 게 힘들다. 공부는 엎드려서 하거나 누워서 한다.”

 

 

 

 


―책을 냈다.

 

청춘아, 가슴 뛰는 일을 찾아라.”

스승인 컬럼비아대학교 모이라 커튼 교수의 권유로 그간의 살아온 이야기를 책으로 썼다.

커튼 교수는 추천사에 이렇게 썼다.

그녀는 장애를 부정적인 방식으로 정의하지 않고 오히려 많은 사람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의미 있는 인생으로 창조해냈다.”

 

절망하는 20대를 위해 썼다. 자기 앞에 놓인 무수한 장애물을 뛰어넘지 못할 때마다 누구의 탓으로 돌리지 말고 가장 나답게 뛰어넘길 바라는 마음에서 썼다. 좌절하지 말고 자기만의 인생을 만들어가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20대인 그들이 ‘지금’을 놓고 절망한다면 그건 공짜 심보 아닐까. 자신의 인생에 말도 걸어보지 않고, 살아보지도 않고, 비싼 값만 받으려고 하는 거니까.”

 

―파란만장한 삶이었다.

쓸모없는 딸로 태어나 시작된 시련이었다. 엄마가 정신질환으로 운신을 못하니 아홉 살 때부터 내가 집안 살림을 했다. 고물상을 하시던 아버지는 당신이 짊어진 삶의 무게가 너무 버거워 스스로 세상을 버리셨다. 가난, 고생 다 견딜 수 있었지만 엄마가 나를 미워하는 건 이해할 수 없더라. 우리 집이 불행해진 게 다 내 탓이라고 하시면서 때리고 구박했다. 날 낳은 친엄마가 맞나 의심했을 정도니까. 그런데 나이 드니 알겠더라. 엄마는 나를 핍박함으로써 장애인 딸을 구하려고 하셨던 거다. 갖다버리라는 집안 어른들로부터 엄마는 그녀의 방식으로 나를 보호한 거였다.”

 

―엄마와 화해하셨나.

어느 해 명절인가. 편물기술자가 되어 직장생활 할 때인데, 명절 음식을 담아 계속 내 옆에 갖다 놓으셨다. 먹지 않았다. 내게 엄마에 대한 정이 있을 리 없었다. 그래도 계속 음식을 바꿔서 담아내 오시더라. 손도 안 댔다. 아침부터 밤 여덟 시까지 그 실랑이가 계속된 셈인데, 내가 졌다. 눈물이 펑 터지더라. 2시간을 울고 나서 부침개를 먹었다. 정말 맛있었다. 엄마가 나를 사랑한다는 걸 깨닫는 데 24년이 걸린 거다. 그때 결심한 게 있다. 나를 낳아준 엄마의 마음을 아는 데 20년이 넘게 걸렸다면, 앞으로 내가 살면서 만날 수많은 사람이 내 마음을 몰라준다고 해도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말자는 거였다.”

 

―배움에 대한 욕심이 상당했다.

 

“중학교에 입학한 친구가 영어책이라며 보여주는데 울컥했다. ‘I am a girl. You are a boy.’라고 읽는 거라며 가르쳐주길래, 두 번째 월급 받은 날 서점에 가서 국어 완전정복과 영어 완전정복을 샀다. 마침 내가 일하던 집이 한의원이어서 곳곳에 한자가 적혀 있었다. 무슨 뜻인지 궁금해했더니 주인 할머니가 천자문 책을 주시더라. 그때 시작한 한자공부가 사서오경까지 이어졌다. 그때나 지금이나 책을 읽을 때 나는 정말 행복했다. 책 속의 세상은 바르고 아름다웠다. ‘잘못한 것을 알고도 고치지 않는 것이 더 큰 잘못.’이란 글귀가 좋더라. 아버지와 엄마에 대한 미움과 증오, 슬픔의 감정들도 책을 읽으면서 치유했다. 공부를 왜 해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바르게 사는 것인지 책이 내게 가르쳐주었다.”

 

―식모를 그만두고 직업훈련원으로 갔다.

 

“반상회보에 무료 직업학교 훈련생 모집이라는 광고가 났다. 기술을 배우면 식모 월급 3만 원보다는 많이 벌겠다 싶더라. 양재를 배우고 싶었는데 그건 경쟁이 치열하다고 해서 기계편물로 지망해 6개월간 배웠다.”

 

―기술을 배우면서 검정고시도 치렀다.

 

“그때는 중졸, 고졸이라는 학력이 무척 갖고 싶었다. 낮에는 기술 배우고 밤에는 야간학원에서 검정고시를 준비했다. 책상이 높으니 의자에 책을 몇 권 깔고 앉아 공부했는데, 앉은 자세로 있으면 허리에 통증이 심해져 집에 돌아가 두 시간씩 울었다. 그래도 좋았다. 무언가를 새로 배울 땐 내가 살아 있는 것 같았다. 육체적 고통도 잊을 수 있었다.”

 

―국내외 기능대회를 섭렵했다. 1983년 전국장애인기능대회, 1984년 전국기능대회 편물 분야에서 금메달을 땄고, 1985년 콜롬비아에서 열린 세계장애인기능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손으로 뭔가를 하는 일에서는 뒤처진 적이 없는 것 같다. 허리와 다리가 약하지만 손의 힘이 상대적으로 발달했다. 뭘 새로 배우는 걸 겁내지 않았다. 음식을 만들어도 빠르고 정확하게 한다. 오래 서 있으면 허리가 아프니까 뭐든 빨리 빨리다.”

 

―책에는 직업훈련원 다니던 시절 신앙을 갖게 됐다고 적혀 있더라.

 

“아버지 돌아가셨을 때에도 울지 않았을 만큼 내 마음은 닫혀 있었다. 직업학교 들어갈 때 종교를 쓰라기에 ‘자신교’라고 썼을 정도다. 세상에 나밖에 믿을 사람이 없었으니까. 그런데 학교에 와보니 나를 위해 걱정해주고 내 앞날을 염려해주는 사람들이 있더라. 부모님도 걱정해주지 않던 내 앞날을 말이다. 하나님을 믿어서가 아니고, 나에게 관심을 둔 그들이 고마워 교회를 따라다녔다.”

 

―포기하고 싶을 때는 없었나.

 

“매일매일 포기하고 싶었지. 심지어 친구들 걸음 속도를 못 따라가 혼자 뒤처질 때도 죽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죽어 없어져도 세상은 돌아가지 않나. 내가 죽어서도 저 별이 빛날 텐데 죽으면 무슨 소용이냔 말이지. 그래서 결심했다. 좋아, 죽을 때 죽더라도 오늘까지만 살고 죽자!”

 

1990년 김해영 씨는 아프리카 극빈국 중 하나인 보츠와나로 떠난다.

한 선교단체의 회보에 실린 광고를 보았다.

보츠와나 직업학교에서 편물교사 단기 자원봉사자를 모집하고 있었다.

자타가 공인하는 기계편물의 장인으로 마음만 먹으면 월급 많이 받는 직장에 취직할 수 있었지만, 그녀는 모든 것을 버리고 아프리카로 간다.

“그곳에는 나처럼 비참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있는 아이들이 있었어요. 약간의 기회와 교육과 격려가 있다면 얼마든지 훌륭하게 성장할 청소년들이 있었어요.”

 

―사서 고생하기를 좋아하나 보다.

 

“실은 대학에 가고 싶어 학력고사를 봤는데 연거푸 떨어졌다. 실의에 빠져 있던 차에 우연히 거창고등학교 교장선생님께서 쓰신 글을 읽게 됐다. ‘직업선택 십계명’이란 제목인데 ‘아무도 가지 않는 쪽으로 가라. 한가운데가 아니라 가장자리로 가라. 내가 원하는 곳이 아니라 내가 필요한 곳을 택하라.’는 구절이 가슴을 파고들더라. 황무지 보츠와나가 내가 있어야 한다는 확신이 들었다.”

 

―칼라하리 사막의 ‘굿 호프’라는 곳이었다.

 

“우리나라 50~60년대 풍경이었다. 전기도, 전화도 없고 도로포장도 되지 않은 오지였다. 사막 한복판에 흰색의 일자건물이 덩그러니 놓여 있는데 암담하더라. 오전에는 수업하고 오후에는 교사 학생 모두 삽과 곡괭이를 들고 일을 했다.”

 

 

 

보츠나와 굿 호프 마을에서 14년 동안 아이들에게 기술을 가르친 김혜영 씨

 


―후회막심했겠다.

 

“처음에만. 먹을 게 없어서 배고플 때 제일 힘들더라. 하지만 나는 굿 호프에서 행복했다. ‘You are so beautiful.’이란 말을 거기서 처음 들었으니까. 키 작고 볼품없는 나를 그들은 예쁘게 봐주고 오히려 도와주고 싶어했다. 세면장, 싱크대 밑, 교실 칠판 아래에다 아이들은 나만을 위한 발판을 만들어주었다. 기적적으로 허리의 통증이 줄어들었다.”

 

―당신의 무엇이 그들을 매료시켰을까.

 

“나의 ‘잘나지 않음’ 때문이겠지. 많은 이가 선교를 명분으로 들어오지만 원주민들에 대한 고압적인 자세, 가르치려는 태도로 수많은 오해와 갈등을 낳는다. 나는 학교의 주인공은 원주민 학생들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림자처럼 그들 뒤에 서 있었다. 내가 옳고 뛰어나다는 생각을 버렸다. 한국의 제도권 교육을 받지 않은 게 큰 장점이 됐던 것 같다.”

 

―4년 만에 굿 호프 직업학교가 폐교됐다. 하지만 당신은 그곳을 떠나지 않았다.

 

“떠나려고 했다. 마지막으로 짐을 싸고 있는데 편물과 여학생 다섯 명이 찾아와 계속 공부하고 싶다고, 떠나지 말고 계속 가르쳐달라고 매달리더라. 꿈을 심어준 사람들은 떠났지만 뿌려진 꿈의 씨앗은 자라고 있다는 걸 보고 가슴이 뛰었다. 나를 선생이라고 믿고 찾아와서 가르쳐달라고 하는 아이들이 있으니 나는 이 텅 빈 사막에서 계속해서 살아야 할 의미가 있었다. 다시 운영진과 이사진을 꾸렸고 내가 교장을 맡았다. 10년간 교장으로 일하는 동안 학생 15명이 80명으로 늘었다.”

 

―의식주가 열악한 것은 물론, 권총 강도가 성행할 만큼 위험한 지역이라더라.

 

“어린 시절부터 온갖 험한 일을 겪으며 살아온 게 서바이벌할 힘이 돼주었다. 사막이 왜 좋은가 하면 텅 비어 있기 때문이다. 죽음 같은 고독, 텅 빈 땅에서 얻는 영성이 있다. 도덕, 신앙을 떠나 생명 그대로를 경외하고 존중하는 법을 나는 그 거대한 칼라하리 사막에서 배웠다. 비를 피할 지붕만 있으면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살아있음만으로 나는 아름다운 존재라는 것을 사막에서 깨달았다.”

 

―2004년 보츠와나를 떠나 미국으로 간다.

 

“내가 쿨쿨 잠만 자도 학교가 저절로 굴러갈 만큼 자리를 잡았다. 어느 날 그런 생활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뭔가를 간절히 소원하는 인생이어야 하는데 그게 아닌 거다. 잔잔한 호수처럼 열정과 재미가 없었다. 고생하며 살 운명이라 그런지, 어렵고 복잡한 일이 앞에 떨어지면 그걸 즐기며 도전하는 심리가 강한 편이다.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싶어서 미국으로 갔다.”

 

―서른아홉 살에 뉴욕에 있는 나약 대학교 사회복지학과에 입학한다.

 

“뉴욕 선교부에 계시던 목사님이 추천해주셔서 입학할 수 있었다. 대학에 들어가다니, 꿈만 같았다. 엄마의 건강도 좋아졌고 동생들도 일가를 이뤄 살고 있으니 이제 나 자신만 책임지면 되었다. 무일푼이었지만 맨해튼 한가운데 서 있어도 전혀 주눅이 들지 않더라. 아프리카 그 거대한 사막에서 살아온 내가 아닌가. 무서울 게 없었다.”

 

―제도권 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다. 외국에서 대학 공부가 어렵진 않았나.

 

“기술 연마라는 게 집중과 반복의 연속이라 학교 공부에 필요한 집중력, 학습력은 그때 이미 습득했다. 4년 내내 4.0 만점에 3.8점을 유지했다. 결석 한 번 하지 않았고 리포트를 날짜 넘겨서 내본 적도 없다. 성적 우수한 학생 명단에 늘 내 이름이 있었으니까. 나의 가장 큰 걱정은 학비였다. 첫 학기 학비만 오천 달러였다. 월급 없이 14년을 보츠와나에서 살았으니 내게 돈이 있을 리 없었다. 그런데 채워지더라. 내 사정을 전해 들은 교포들이 장학금을 대주시고, 휴스턴에 있는 한인교회 청년들은 500불씩 모아 생활비로 보내주셨다. 미국에서 공부한 7년 동안 등록금이 없어 중도 포기할 위기가 많았지만 그때마다 도움의 손길이 나타났다. 그래서 내 공부는 나를 위한 공부가 아니다. 가난한 나라의 어린이들, 청소년들에게 나를 선물로 보내려고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한다.”

 

―영어가 엄청난 장벽이었을 텐데.

 

“직업학교 졸업하고 용인의 편물 하도급공장에서 일할 때 내 영어공부는 시작됐다. 편물기계 옆에 영어 발음기호를 써 붙이고 보고 외우던 게 엊그제 같다. 영어에 익숙해진 건 보츠와나에 와서다. 영어를 쓰는 나라라 아이들을 가르치려면 맨땅에 헤딩하기로 영어를 배워야 했다. 그런데 영어보다 중요한 게 만국공통어다. 생각해보니 나는 그 공통어에 능했던 것 같다. 표정과 손짓, 눈빛이 전하는 뜻 말이다. 거기에 더 진심이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명문 컬럼비아 대학원에 진학했다.

 

“다들 불가능하다며 말렸다. 나도 기대하지 않았는데 합격해서 믿어지지 않았다. 이건 내 추측인데, 입학 에세이에서 높은 점수를 받은 것 같다. 1994년 5월 모든 사람이 보츠와나의 굿 호프 직업학교를 떠난 뒤 나 혼자 남았을 때의 이야기로 에세이는 시작된다. 동양에서 온 장애인 여성이 아프리카에서 14년 살다가 온 것만으로 컬럼비아대학에서 사회복지학을 공부할 이유가 충분하다고 생각해준 것 같다. 감사할 뿐이다.”

 

―컬럼비아 대학원까지 가서 석사과정을 밟을 필요가 있었을까.

 

“저개발국가일수록 네트워크를 중심으로 일하는 것이 굉장히 효율적이라는 것을 이미 아프리카 생활에서 경험했다. 장애인인데다 내세울 만한 가족적, 사회적 배경이 없는 내겐 컬럼비아 대학만큼 확실한 배경이 없다고 판단했다. 인턴활동 600시간을 채워야 하고 33학점을 이수해야 졸업할 수 있는 석사향상반 과정이라 하루 세 시간밖에 못 잤지만 원 없이 공부한 시절이었다.”

 

 

 

컬럼비아 대학 졸업식

 

 

 

―대학원을 졸업했다. 현재 어떤 일을 하고 있나.

 

“부탄 개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이르면 올가을부터 부탄 여성들에게 체계화된 편물기술을 교육하게 된다. 보츠와나에도 1년에 한 번은 들어가서 아이들이 잘 자라고 있는지 살핀다. 한국에 들어오면 제천에 있는 아동보호시설에 간다. 소년범죄에 연루된 아이들을 보호하는 곳인데 상담해주고 검정고시 특강을 해준다. 열두 살부터 스무 살 아이들에게 내 얘기를 들려준다. 아프리카의 이야기에 아이들은 귀를 쫑긋 세운다.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도 그걸 희망차게 해석하면 살아나올 수 있다는 믿음을 심어주려고 노력한다.”

 

―긍정하라? 너무 막연한 충고 아닐까.

 

“사람들은 나의 작은 키를 치명적인 약점이라고 생각하지만 나는 작은 키가 내 강점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내가 못나고 작아서 더 쉽게 마음 문을 열었다. 특히 아이들은 제 키와 비슷한 나를 무척이나 좋아한다. 저희를 내려다보거나 위협하지 않으니까. 부탄이든, 아프리카든, 한국이든 아이들이 나를 필요로 하면 언제든 달려갈 것이다.”

 

―당신을 움직이는 초인적인 힘은 무엇일까.

 

“엄마에게 매 맞고 자란 기억, 아버지의 죽음이 내겐 다이아몬드다. 거기에 빚을 지고 살고 있다. 행복한 것은 그냥 지나가지만, 아픔과 상처는 지나가지 않고 그 자리에 남아 반짝반짝 빛을 내더라. 다이아몬드처럼 빛나는 그 상처와 아픔의 힘으로 내가 계속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아프리카에서 생사를 넘나든 경험은 다시 미국 유학을 가능하게 한 다이아몬드가 되어 주었다.”

 

―다시 태어난다면 곧은 등, 긴 다리를 갖고 싶겠지?

 

“물론이다. 하지만 그래서 또 놓치는 것들이 있을 것이다. 내가 견뎌낼 만한 고통이 있다는 건 축복이다.”



김윤덕 기자

 

 

 

 

안개꽃(Des oeillets de poete), 나윤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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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에티오피아 커피

 

 

검은 대륙 아프리카 하면 뭐가 떠오르시나요.

'광활한 대자연'이나 '투자 가치 있는 신흥 경제대국'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빈곤·질병 그리고 차별·소외가 있습니다.

 

 

 

커피 열매

 

 

에티오피아에 입국해 딜라까지 장장 8시간을 달려 숙소에 도착했다.

우리가 묵게 될 곳은 딜라 한별학교 안에 있는 게스트 하우스와 사택.

한별학교 측에 부담이 되지 않기 위해 외부 호텔에서 먹고 자며 취재하려고 했지만 정순자 교장의 권유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여긴 식당도 호텔이라고 불러요. 호텔이라고 하지만 대부분 물도 잘 나오지 않고요. 무엇보다도 벼룩이 많아서 잠자기 어려우실 거에요. 벼룩은 어디에나 있지만 호텔은 더 많고요. 전기도 잘 들어오지 않고, 식사도 현지식이라 힘드실 테니 게스트하우스를 이용하세요. 밖에서 주무시게 하면 제가 마음이 편치 않을 것 같아요. 여자 분은 저희 집에서 주무시고 남자 분들은 학교 안에 있는 게스트하우스를 이용하시면 돼요."

일행이 한별학교에 도착한 시각은 오후 8시께.

학교가 가까워질수록 불빛도 사람도 사라지고 오직 자동차 전조등에 의지해 길을 달려야 했다.

가로등도, 신호등도, 심지어 가옥에서 새어나오는 불빛조차 없는 밤에 드디어 한별학교 교문을 열고 들어섰다.

아무 사고없이 도착한 것에 감사했다.

태양열 랜턴으로 어둠을 밝히며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은 한별학교에 근무하고 있는 한국인 선생님 세 분과 집안일을 돌보는 두 사람의 에티오피아 아가씨였다.

긴 여정으로 인해 지칠 대로 지친 우리는 안내에 따라 각자 방에 짐을 풀고 다시 거실에 모였다.

다음 일정에 대한 확인과 준비를 위한 회의를 하기 위해서였다.

이야기를 하다 보니 거실 한쪽에서 에티오피아 아가씨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

이 저녁에 무엇을 하는가 물었더니 손님을 환영하는 의미로 에티오피아식 환영행사 '분나마프라트'를 준비하는 것이란다.

말로만 듣던 분나마프라트를 이렇게 빨리 경험하게 되다니….

흥분한 일행들은 회의는 미뤄두고 카메라를 꺼내 세리머니를 준비하는 두 아가씨들의 모습을 담기에 바빴다.

 

 

 

분나마프라트를 준비하는 에티오피아 아가씨 아디스와

 

"에티오피아에서는 커피라고 부르지 않고 분나라고 해요. 분나마프라트, 영어로는 커피 세리머니라고 부르죠. 오지 주전자에 한약처럼 푹푹 끓인 에티오피아식 커피 드셔 보셨나요? 아마 한국에서 드시던 커피와 전혀 다른 맛일 거에요. 한번 즐겨보세요."

분나마프라트는 화려한 색으로 치장했다.

갓 따온 푸르고 싱싱한 나뭇잎과 크고 붉은 꽃으로 장식한 동그란 꽃방석 위에 흰 레이스 커버를 정갈히 덮은 앉은뱅이 찻상이 놓여 있다.

꽃방석 중심에는 꽃받침 모양의 작은 향로가 있고 그 옆 숯불을 담은 화로 위에는 목이 긴 토기 주전자 '제베나'를 올려놨다.

무엇에 쓰이는지 모르겠지만, 깨끗한 물을 담아놓은 플라스틱 그릇도 보인다.

 

 

  

분나마프라트의 시작을 알리는 분향

 


분나마프라트의 주인공인 에티오피아 아가씨 아디스와가 손님들이 꽃방석 주변에 둘러앉는 것을 보며 향로에 숯덩이와 함께 노란색 송진덩어리를 올려놓으니 흰 연기와 함께 진한 향내가 실내를 가득 채운다.

세리머니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였다.

차를 마시기 전 향을 피우는 풍습은 중국이나 한국·일본에도 있기에 그 이유를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향으로 주변의 잡냄새를 없애 차 본연의 향과 맛에 집중하도록 유도하기 위한 것이 그 하나이며, 연기를 피워 올리는 것으로 행사의 품위를 높이고 손님에게 극진한 존경과 예의를 표하기 위한 것이 또 다른 이유일 것이다.

송진과 나무껍질 그리고 알 수 없는 묘한 것들이 어울려 타들어 가며 뿜어지는 흰 연기가 찻상 주변으로 둘러앉은 우리를 포근하게 감쌌다.

긴 시간 비행에서 오는 피곤함 때문인지 진한 향냄새 때문인지 알 수 없지만 환각에 빠진 듯 잠시 정신이 몽롱해졌다.

"전통방식으로 빵을 쪘어요. 손님 중 가장 나이 많으신 분이 잘라주세요."

뜨베가 빵을 덮었던 보자기를 열고 칼을 건넨다.

누렇게 쪄낸 빵에서는 구수하고 달큼하며 시큼한 냄새가 난다.

밀가루와 옥수수가루에 효모를 넣어 발효시킨 후 찜통에 쪄낸 자연 발효빵.

우리에게도 익숙한 빵이다.

빵 위에 써진 '웰컴'이라는 글자에 눈길이 간다.

손님을 위한 여인들의 깨알 같은 정성이다.

손님들이 빵을 자르고 떼어 먹는 동안 아디스와는 제베나에 물이 끓는 것을 확인하고 커피 가루를 넣었다.

끓고 있는 물에 가루를 넣으면 거품과 함께 끓어 넘칠 것 같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마도 약탕기를 연상시키는 두꺼운 토기 주전자 제베나에 그들만의 과학이 숨겨져 있는 모양이었다.

제베나가 가진 또 다른 과학은 비등점이다.

대부분의 지역이 해발 2,000미터 이상인 에티오피아는 높은 고도 때문에 비등점이 낮아 95도 정도면 물이 끓는다.

하지만 두껍고 목이 긴 제베나의 경우 기압 차이를 줄여주는 효과가 있어 진하고 깊은 커피를 우려내는 데 효과적이다.

커피가 우러나면서 송진향을 압도하는 진한 커피 향이 집안에 가득하다.

커피 아로마의 손실을 최대한 막기 위해 제베나의 주둥이를 좁고 길게 만들고 뚜껑까지 덮었지만, 끓고 있는 커피의 향이 워낙 강하다 보니 밖으로 퍼지는 향도 예사롭지 않은 것이다.

 

그렇게 몇 분.

아디스와는 화로에서 제베나를 꺼내 똬리 위에 비스듬히 올려놨다.

물과 함께 끓어올랐던 커피가루가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

그리고 찻상 위에 올려진 손잡이 없는 작은 찻잔 '스니'에 넘치기 직전까지 커피를 따른다.

제베나 주둥이로 나오는 커피의 색과 농도가 예사롭지 않다.

진한 십전대보탕이나 쌍화탕 같은 한약 색깔에 뭔가 걸쭉한 느낌을 주는 농도….

심지어 취향은 묻지도 않고 듬뿍듬뿍 세 수저의 설탕을 넣은 후 손님들에게 잔을 돌린다.

"석 잔은 기본적으로 마시는 게 예의입니다. 첫 잔은 환영의 의미고요, 두 번째 잔은 행운, 세 번째 잔은 축복을 의미하죠. 부족마다 다 같은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비슷한 의미를 갖고 있어요."

 

 

 

에티오피아 분나마프라트는 석 잔 마시는 게 예의라고 한다.

 


환영의 의미를 담은 첫 잔을 들어 향기를 느껴본다.

신선한 원두로 만든 커피가 분명하지만 푹푹 끓여 내는 방식이다 보니 걸쭉하고 진한 아로마 향이 일품이다.

설탕 때문인지 달콤한 캐러멜향도 느껴지는 듯하다.

가루가 따라나와 커피 속에 부유물이 있을 것 같았지만 신기하게도 섞여 나오지 않았다.

가루가 따라나오지 않으면서 잔이 넘치지 않게 따르는 것이 기술이란다.

그녀의 놀라운 기술에 감탄하며 조심스럽게 맛을 본다.

TV에서 본 바리스타를 흉내내 한 모금을 입에 물고 향을 음미하며 삼키니 구수하고 진한 향과 쌉싸름하면서 시큼한 맛이 입안에 남았다.

다른 커피에서는 느낄 수 없는 풀 내음과 특유의 흙냄새가 독특하다.

천사처럼 달콤하고 악마처럼 쓴 첫 잔을 비우니 머리가 띵하고 속이 쓰려 온다.

다량의 카페인이 몸에 들어와 생기는 현상.

저절로 빵에 손이 간다.

분나마프라트에 빠지지 않는 게 바로 빵이나 팝콘이란다.

첫 잔을 비우고 나니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비운 잔을 돌려주니 옆에 있는 물그릇에 바로 헹궈 찻상 위에 올려놓는다.

네 잔 내 잔을 따지지 않고 돌려서 사용하다 보니 헹궈 쓰는 게 예의인 모양이었다.

처음 접한 본토 커피는 손님이 된 예의가 아니었다면 석 잔을 다 받아 마시기 어려울 정도의 맛이었다.

마일드한 아메리카노에 길들여진 내 입맛에는 진하고 텁텁한 본토 커피가 썩 맞지 않았던 것이다.

일곱 명이 둘러앉아 석 잔의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한 시간이 훌쩍 지났다.

한 시간이 흘렀을 뿐인데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처럼 부쩍 친해진 사람들.

이것이 바로 커피 세리머니의 효과이지 싶었다.

커피 세리머니가 끝나고 나니 뜨베와 아디스와가 제베나와 화로를 들고 밖으로 나간다.

손님들의 찬사와 감탄 속에 훌륭하게 분나마프라트를 마친 것에 대한 자부심과 만족감이 얼굴에 가득하다.

"커피는 에티오피아인들의 자부심이에요. 에티오피아가 커피의 기원이라는 것은 큰 자랑이죠. 하지만 수천 년 마셔온 커피를 요즘엔 잘 마시지 못해요. 커피 가격이 많이 올랐거든요. 물론 집집마다 커피나무를 키우고 지천에 커피나무가 있지만, 마시기보다는 내다 팔기 바쁘죠. 그나마 돈이 되는 게 커피밖에 없으니까요."

 

 

 

 


이천 년 넘게 커피를 마셔온 에티오피아인들은 대부분 조상 때부터 커피에 중독돼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이부터 어른까지 누구나 커피를 즐기며 커피를 뺀 에티오피아인들의 삶은 이야기할 수 없을 정도다.

역사학자들은 커피의 기원을 AD 500년께 에티오피아로 보고 있다.

커피의 기원으로는 '칼디설'이 가장 유력하다.

A.D. 500년께 에티오피아에 사는 칼디라는 양치기 소년이 커피를 처음 발견했다는 설이다.

아비시니아고원에서 양을 치던 소년 칼디가 어느 날 갑자기 흥분해서 날뛰는 염소를 보고 그 이유를 알아봤더니 고원 주변에 자란 나무의 빨간 열매를 먹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염소가 먹은 붉은 열매를 따 먹은 칼디도 기분이 상쾌해지고 몸을 가벼워지는 것을 느낀 뒤 마을에 있는 수도승에게 커피를 전했다.

커피맛을 본 수도승은 기분이 좋아지는 것은 물론 잠을 이겨내는 효과도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 뒤로 커피는 기분을 좋아지게 하고 잠을 극복하게 해주는 신비의 열매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신비한 열매 커피는 카라반의 행렬을 따라 아랍 세계에 전달되고 십자군 전쟁 과정에서 유럽까지 알려지게 된다.

매력적인 음료인 커피는 오래지 않아 차를 즐기는 유럽인들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커피 붐을 못마땅하게 여긴 일부 로마 가톨릭교회가 커피에 '악마의 음료'라는 누명(?)을 씌워 금지해줄 것을 탄원했지만, 교황청은 오히려 향기로운 맛과 향에 감탄하며 커피에 세례를 내렸다고 한다.

커피는 현대에 와서 전 세계인이 사랑하는 음료가 됐다.

세계는 매년 총 700만 톤의 커피를 생산하고 4,000억 잔을 마실 만큼 많이 마시고 있다.

이를 반영하듯 원두 거래 역시 활발해 석유에 이어 전 세계 무역거래량 2위를 차지하고 있다.

1,500년 전 에티오피아 목동이 발견한 작은 콩이 세계를 정복한 것이다.

에티오피아인들에게는 두 가지 큰 자부심이 있다.

그 하나가 커피이며 다른 하나는 최초의 인류인 호모사피엔스와 최초의 직립 보행인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의 화석이 발견된 인류의 기원지라는 것이다.

분나마프라트를 선보인 에티오피아 아가씨 뜨베와 아디스와 얼굴에서 빛나는 자부심이 느껴졌던 데도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자부심이 과거형이라는 데 문제가 있다.

안타깝게도 에티오피아는 세계 최빈국 중 하나로 국제 사회의 원조 없이는 살 수 없는 나라가 돼버렸다.

지속된 가난은 에티오피아인이 그렇게 좋아하는 커피마저 빼앗았다.

커피를 생산하는 그들이 돈이 없어 커피를 살 수 없게 된 것이다.

그것은 일자리가 있는 뜨베와 아디스와도 마찬가지다.

하루에 20비르(1비르는 한화로 약 60원)를 버는 그녀들에게 한 잔에 2비르짜리 커피는 일종의 사치다.

그래서 분나마프라트는 그녀들에게도 즐거운 행사다.

비록 손님들에게 대접하고 남은 것이지만, 그날만큼은 그동안 마시고 싶었던 커피를 실컷 마실 수 있기 때문이다.

 

 

 

현지인 가정의 커피잔

 

 

며칠 뒤 현지인 가정을 방문해보고 나니 그들의 현실이 더욱 이해됐다.

방문하는 집마다 집에서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커피 테이블과 찻잔을 놔뒀지만, 실제로 커피를 대접하는 집은 한 가정도 없었다.

물도 커피도 귀하다 보니 커피 도구를 장만해놓고도 인테리어용으로 밖에 쓸 수 없는 것이다.

"집에서 난 커피 중에 상품 가치가 떨어져 팔지 못한 것들을 끓여서 길에 앉아 팔기도 하고 일부는 명절 때 먹기 위해 아껴두기도 해요. 돈이 귀하다 보니 커피를 마시는 대신 파치먼트(커피 속껍질)를 끓여 먹거나 생강과 계피를 달인 차 '차이'를 주로 먹지요."

 

 

 

한적한 노천 카페

 

 

그러고 보니 길가에서 커피를 파는 분나 아줌마들이 눈에 들어온다.

거적 몇 조각으로 태양을 가리고 의자 몇 개와 커피 테이블을 놓고 하루 종일 손님을 기다리는 커피 아줌마들.

이들은 대부분 집에서 자란 커피나무에서 딴 커피콩으로 끓인 커피를 들고 나와 2~3비르를 받고 판다.

커피를 팔아 물도 사고, 옥수수 가루도 사고, 아이들 학비도 대주며, 빈둥거리며 놀고 있는 남편에게 환각 성분이 들어있는 나뭇잎 '짜트'도 사준다.

안타깝지만 이것이 에티오피아 여성들의 현실이었다.

2주일의 취재 일정을 마치고 한별학교를 떠나기 전날.

뜨베와 아디스와는 떠나는 손님들을 위해 또 한 번의 분나마프라트를 준비했다.

첫 만남의 서먹함과 어색함이 완전히 사라진 자리.

우리는 언제 다시 맛볼지 모르는 에티오피아식 커피를 조금씩 천천히 오랜 시간에 걸쳐 맛봤다.

커피를 따르는 그녀들도 마시는 우리도 눈가가 촉촉해졌다.

이별의 아쉬움이 담겨있어서 그런지 커피 맛은 더욱 진하고 그윽했다.

 

 

 


"고마워요, 뜨베. 고마워요, 아디스와. 우리에게 해준 분나마프라트는 절대 잊지 않을게요. 오늘 마신 커피 맛도 영원히 잊지 못할 거에요. 뜨베도, 아디스와도, 이곳 에티오피아에서 만났던 사람들 모두 잊지 않겠습니다."

"이그자베르 에스띨린!"('신의 축복을'이라는 에티오피아 말)

 

가난하지만 순수하고 착했던 에티오피아 사람들을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Malaika, Miriam Makeba & Harry Belafonte

 


말라이카는 천사라는 뜻으로 연인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아프리카에서는 예전에 청혼하는 남자가
신부의 집에 소나 염소 같은 재물을 주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은 이 재물이 부족하여
사랑하는 여인과 눈물의 이별을 할 수밖에 없었지요.
이 노래는 이들의 이루지 못한 사랑의 슬픔을 담고 있습니다.

이 곡은 동아프리카인이라면
거의 누구나가 다 알고 있는 대중적인 곡이며,
따라서 꽤 많은 가수들이 이 노래를 불렀습니다.
특히 읊조리는 듯이 흐르는
Harry Belafonte와 Miriam Makeba 의 목소리는
감미롭기 그지 없습니다.

 

 

 

Harry Belafonte



나의 천사여, 그대를 사랑하오
나의 천사여, 그대를 사랑하오
그대는 인생의 반려, 나는 어이하리
나에게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소
나의 천사, 그대와 결혼하고 싶지만
나에게는 아무 것도 없소
내 마음의 천사여,
그대와의 결혼을 갈망하지만...


 

 

 


Posted by 행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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