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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치즈 대부 지정환 신부 불모의 땅에 피워낸 기적

박경은 기자 입력 2018.08.25. 14:49

[경향신문] “전 단지 그들과 함께 한 것뿐입니다. 함께 배우고 사랑하면서 뭔가가 이뤄지는 것이지요. 공수신퇴(功遂身退). 제가 이 말 때문에 노자를 좋아합니다. 누구나, 특히 지도자라면 이를 새겨야지요. 내가 내세울 수 있는 건 없어요. 공을 이루었다면 이내 물러나야 합니다”

한국 땅에 치즈의 싹을 틔운 지정환 신부는 “치즈공장 문을 열었는데 우유는 쌓여 있고 직원은 아무도 없어서 당황스러운 그런 꿈을 지금도 가끔씩 꾼다”고 말했다. / 우철훈 선임기자

전북 임실이 치즈의 대명사가 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하긴, 시간이 대수인가. 그저 임실이 치즈의 고장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하다. 올해 87세인 노 신부 디디에 세스테벤스. 벨기에 브뤼셀에서 태어나 1959년 한국 땅을 밟은 그는 60년간 ‘지정환’이라는 이름으로 살았다. 민둥산에 풀밖에 자라지 않던 척박한 땅. 밑 빠진 독에 물 붓듯 막막한 심정으로 시작했던 치즈 만들기는 임실 치즈, 그리고 국내 치즈산업의 오늘을 일궈냈다.

2016년 이 같은 공으로 한국 국적을 ‘선물’받은 그를 인터뷰하려 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병들고 쇠약해진 몸에 뇌경색이 들이닥치면서 몸을 가누기도, 말하기도 힘든 상황이었다. 지난해부터 조금씩 건강을 회복한 노 신부는 지난봄에야 인터뷰를 허락했다. “적어도 2박3일간은 내가 사는 모습을 보며 천천히 이야기를 나눌 수 있으면 좋겠다”는 조건이었다. 오래 앉아 인터뷰하기 힘든 건강상의 이유가 컸다.

지난 8월 19일 지정환 신부가 살고 있는 전라북도 완주군 소양면을 찾았다. 마흔에 발병한 다발성신경경화증 때문에 주로 휠체어에 앉아 지내는 신부는 “멀리서 손님이 왔다”며 지팡이를 양손에 짚은 채 문 밖에 나와 있었다. 신부의 안내로 들어선 작은 거실에는 주이라크 교황청 대사를 지냈던 작은 외할아버지 사진부터 몇 년 전 지 신부가 직접 컴퓨터로 작업을 마무리한 1800년대 프랑스 선교사 자필문서 자료집까지 차곡차곡 정돈돼 있었다. 노 신부는 서랍 한편에서 빛 바랜 빨간 노트를 꺼내 왔다. 50여년 전 치즈 만들기에 도전할 때 적어둔 메모들이다. “그때 벨기에에 계신 부모님에게 치즈공장을 지어야 하니 좀 도와달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아버지가 ‘그렇게 치즈를 싫어하더니 제정신이냐’고 되물었지요.”

임실치즈 협동조합을 시작한 마을사람들과 함께한 지정환 신부(가운데). / 지정환 신부 제공

-치즈를 싫어하다니요.

“한국 사람들이 김치 먹는 것처럼 유럽 사람들도 치즈를 먹지만 저는 어려서부터 치즈를 좋아하지 않았어요. 그런 아들이 한국 사람들과 치즈를 만들겠다고 하니 의아하셨던 거지요.”

-1964년에 시작한 건데, 한국에선 치즈에 대한 개념도 없던 시절이네요.

“부안에 있다 임실 성당으로 옮겼을 때였어요. 다들 어려웠던 시절이죠. 특히 임실은 농사도 짓기 힘든 산골이라 굶주림이 더 심했어요. 다른 신부님에게 선물로 받았던 산양을 키우고 있었는데 이 젖을 짜서 팔면 농가가 소득을 올려 자립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팔 곳이 많지 않다보니 남은 산양유가 버려졌어요. 그걸 어떻게 처리할까 고심하다 치즈를 떠올렸지요. 유럽에는 집에서도 치즈를 만들어 파는 곳이 많으니까 큰 시설비용을 들이지 않고도 가능하겠다 싶었어요. 사람들에게는 한국의 두부랑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된다고 설명했어요.”

-무작정 도전한 거네요.

“벨기에에서도 관심 없던 치즈를 만들겠다고 덤빈 거죠. 산양유를 그저 굳히면 되는 줄 알고 처음엔 두부에 넣는 간수를 부었다니까요. 될 턱이 없죠. 약탕기도 사용해 보고. 나중엔 간장이며 누룩을 넣어 온갖 시도를 해봤는데도 실패의 연속이었어요.”

마을청년들과 협동조합을 만들어 치즈 제조에 도전한 지 신부는 부모에게 2000달러를 받아 치즈를 만들고 숙성시킬 수 있는 작은 공장을 만들었다. 하지만 3년 넘게 시행착오를 거쳐야 했다. 숙성실을 만드느라 청년들과 굴을 파고 있던 중 동네 어른들에게서 “한창 농사일을 도와도 모자랄 판에 땅이나 파고 있다”며 무수한 지청구를 들어야 했다. 청년들도 지쳐갔다.

-결국 유럽으로 직접 치즈 제조법을 배우러 가셨다고요.

“방법이 없었으니까요.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치즈공장을 3개월 동안 다니며 무작정 묻고 또 물었어요. 대충 흉내는 낼 수 있었지만 핵심 기술을 얻기는 쉽지 않더군요. 아무리 사정하고 부탁해도 원칙상 안 된다는 답만 들었지요. 포기하다시피 했는데 기적같은 일이 생겼어요. 제 사정을 들은 한 이탈리아 기술자가 비법을 적은 노트를 저에게 내놓더군요. 먼나라에서 고생하는 신부님에게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 싶다면서요.”

-기대감에 차서 귀국하셨겠네요.

“와보니 한 명 빼고는 다들 산양을 팔아 치우고는 떠났더라고요. 그들 입장에선 앞날을 기약할 수 없었겠죠. 제가 돌아올지도, 치즈 만들기에 성공할지도 불투명했을테니까요. 얼마나 절망적이었는지 몰라요. 하지만 포기할 수 없었어요. 이탈리아에서 받은 기적같은 선물이 있었으니까요. 그 비법 덕분에 균일한 치즈를 만드는 데 성공했고 다시 사람들을 모을 수 있었어요.”

지정환 신부(왼쪽에서 두 번째)가 조선호텔에서 요리사들에게 치즈를 선보이고 있다. / 지정환 신부 제공

1969년. 본격적인 임실치즈의 시작이었다. 이후 치즈 생산과 판매는 순풍을 탔다. 지 신부는 서울로 가 호텔과 남대문 외국인 전용상점으로 판매망을 넓혔다. 당시만 해도 치즈는 미군부대에서 나와 불법적으로 유통되는 것이 전부였지만 임실에서 직접 농민들이 손으로 만든 신선한 치즈라는 점이 매력으로 작용했다. 조선호텔의 입맛 까다로운 주방장도 임실치즈와 계약했다. 한국에서 최초로 문을 연 명동 피자가게도 임실에서 만든 모차렐라 치즈를 주문했다.

임실치즈가 성장가도를 달리는 동안 지 신부에겐 다발성신경경화증이라는 불치의 병이 찾아왔다. 지 신부는 그동안 일궜던 치즈산업의 기반을 모두 협동조합에 넘기고 1981년 치료를 위해 벨기에로 떠났다. 3년 뒤 휠체어를 탄 채로 귀국한 지 신부는 중증장애인을 위한 재활에 헌신하기로 하고 재활공동체 ‘무지개가족’을 만들었다. “내가 장애인이 됐으니 그들의 고통과 재활에 동참할 수 있게 됐어요.” 전주 인후동의 작은 아파트에서 시작된 무지개가족은 전주교구의 지원으로 완주에 자리를 잡았다. 지금까지 이곳을 거쳐 재활하고 자립한 중증장애인이 100명을 넘는다. 2002년엔 치즈산업을 일구고 장애인 복지에 힘쓴 공로로 호암상을 받았다. 상금 1억원을 기반으로 재원을 마련해 2007년 설립한 무지개장학재단은 사각지대의 장애인과 그 가족들에게 도움을 주고 있다. 장학재단에서 일하며 지 신부를 보좌하는 오선씨(56)는 무지개가족을 통해 제2의 삶을 개척했다. 체조선수 출신인 그는 가슴 아래로는 감각이 없는 중증장애인이다. 전동휠체어에 몸을 의지하고 양쪽 엄지손가락만으로 키보드 자판을 두드리며 장학재단의 대소사를 꼼꼼히 챙긴다.

사제서품을 받고 한국으로 오기 전 벨기에에서 부모와 함께한 지정환 신부. / 지정환 신부 제공

-무지개가족은 언제까지 돌본 건가요.

“2004년 은퇴했지요. 후임 신부님이 잘 돌보고 계시니 저는 그저 마음으로 응원하는 거죠. 출가외인이란 말이 있잖아요(웃음). 2학기가 곧 시작될 예정이라 요즘 장학재단 업무가 바쁩니다.”

-상금외에 재원은 어떻게 마련한 건가요.

“임실치즈가 잘 되면서 피자 브랜드까지 생겼어요. 그러다 나한테 와서 얼굴과 이름을 빌려달래요. 난 성직자일 뿐인데 무슨 사업이냐고 반대하다 피자가 잘 팔리면 임실치즈 소비에도 도움이 된다는 설득에 나중에 마음을 바꿨어요. 체인이 우후죽순 생기고 장사가 잘 되다보니 이권을 놓고 싸움이 벌어졌어요. 내가 이름 사용료를 받는 것도 아닌데 야단법석 통에 괴롭더라고요.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변호사와 당사자들을 불러놓고 내 이름을 사용할 거면 사용료를 내놓으라고 했습니다. 처음엔 매달 130만원씩, 5년 전부터는 매달 250만원씩 받는 돈이 장학재단에 큰 보탬이 됐습니다.”

지 신부가 살고 있는 소양면 집에는 무지개가족 시절부터 봉사자로 헌신했던 박남숙, 최미자씨가 이웃해 산다. 지 신부가 거주하는 집에는 ‘별아래’라는 이름이, 최미자씨가 사는 맞은편 집에는 ‘달아래’라는 문패가 걸려 있다. 지 신부는 “춘천 교구에서 번역을 요청해 온 옛날 문서를 보다가 발견한 이름”이라면서 “마음속에 간직했다가 집을 지으며 이름을 붙였다”고 했다. “별아래, 그래서 옆집은 달아래예요. 얼마나 예뻐요. 이걸 한자로 표기하면 성하리잖아요. 말 맛이 전혀 없어요.”

-한자에도 조예가 깊으시네요.

“1960년대에 연세대 어학당에 다니면서 한자도 공부했어요. 그때 독일에서 온 목사님들과 함께 한글을 배웠는데 아무래도 가족 없이 마을사람들과 살다보니 제 한국어 실력이 그분들보다 빨리 늘었어요.”

지 신부는 벨기에 귀족 가문에서 3남2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가톨릭 신자들이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사회였고 해외에 나가 봉사하는 선교사들도 많았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사제의 꿈을 품게 됐다. 그가 아홉 살이던 해 발발한 한국전쟁은 어린 그에게 한국이라는 나라를 각인시키는 계기가 됐다. “미국과 소련, 중국이 한반도에서 치르는 전쟁이었잖아요. 제 아버지는 1·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는데, 당시 주변에선 다들 3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거라고 생각했어요.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며칠 사이에 상점에선 성냥 한 갑도 사기 힘들 정도였으니까요. 어른들은 공포에 질려 있었지만 제겐 한국이라는 나라에 대한 관심이 시작됐지요.”

-처음에 한국에 온 게 1959년이었습니다.

“전주에서 보좌신부로 있다가 1961년 부안 성당으로 갔어요. 그곳에서 농민들과 3년간 바다를 간척해 농지를 만들었어요. 염분 때문에 인내심을 갖고 농사를 지어야 하는데 당장 먹고살 돈이 없는 농민들이 그 땅을 헐값에 넘겼어요. 그동안 흘렸던 피와 땀이 실패로 돌아간 거지요. 어찌나 실망이 컸던지 다시는 한국인들 사는 데 개입하지 않겠다고 결심하기까지 했다니까요. 그때 몸이 상해 쓸개 제거수술도 받았습니다. 한마디로 쓸개 빠진 놈입니다(웃음).”

그렇게 결심하고 임실로 왔지만 가난의 굴레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농민들의 삶을 외면할 수 없었다. 부임 당시 문필병 군수가 지 신부의 손을 잡고 “임실 군민 전체에게 뭔가 하나쯤은 꼭 남겨달라”던 당부도 가슴에 걸렸다.

-지정환이라는 이름은 어떻게 지은 겁니까.

“전주교구 부주교이던 김이환 신부님이 지어주셨어요. ‘지’는 제 이름 디디에에서, 그리고 신부님의 ‘환’자를 따서 적당히 만든 거죠. 나중에 보니 깊은 뜻이 있더라고요. 정의가 환하게 빛날 때까지 ‘지랄’한다. 한동안 그렇게 소개했는데 진짜로 지씨 성을 가진 분을 만나고 보니 괜히 미안해지더라고요. 올 초엔 창성창본을 신청해서 지금은 임실 지씨의 시조가 됐어요.”

-독재정권 시절 시위하느라 추방될 뻔하기도 하셨죠. 정의가 환하게 빛날 때까지 지랄한다는 건 당시 경찰들에게 하셨던 말씀이라고요.

“인혁당 사건 때 서울까지 와서 시위를 했지요. 추방될 뻔했는데 제가 임실에서 치즈를 만들던 활동이 당시 정권이 보기엔 긍정적이었나봐요. 농촌을 발전시키는 활동이었으니까. 추방은 면한 대신 경찰의 감시대상이 되긴 했지요.”

-광주 민주화운동 때 우유트럭을 몰고 광주로 가셨다던데요.

“제가 갔을 땐 진압이 된 뒤였어요. 몸과 마음을 다친 그분들에게 달리 해드릴 게 없으니 우유라도 드리고 오고 싶었지요. 병원에 들어갔는데 외부인을 경계하며 공포와 원망에 가득 차 있던 그분들 눈빛을 잊을 수 없어요.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내내 눈물을 흘렸어요.”

지정환 신부가 임실치즈연구소에서 방문객들과 치즈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우철훈 선임기자

3년 전 찾아온 뇌경색 때문에 한국사람보다 더 유창하던 지 신부의 한국어는 좀 어눌해졌다. 그래도 구수한 사투리는 여전하다. 걷는 것은 불편하지만 운전은 직접 한다. “내가 이래 봬도 70년 무사고여”라며 능숙하게 운전대를 돌리던 지 신부는 깜빡이를 켜지 않고 옆차선에서 불쑥 들어오는 차를 향해 “저런 썩을 눔” 하며 호통을 치기도 했다.

요즘 지 신부가 관심을 쏟고 있는 것은 임실 고추씨에서 추출한 캡사이신을 섞어 만든 매운맛 치즈다. 몇 달간의 실험 끝에 시제품 개발에 성공한 지 신부는 21일에도 임실치즈연구소를 찾아 본격 출시계획을 상의했다. 이상천 소장은 “오는 10월 초 열리는 임실치즈축제 기간에 시중에 선보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치즈연구소가 있는 임실치즈테마파크는 연간 20만명이 넘게 찾는 관광지다. 이날도 지 신부를 보고는 함께 사진 찍을 것을 요청하는 어린이와 청년들을 꽤 만날 수 있었다. 지난해 임실초등학교에서는 지 신부의 일대기를 연극으로 만들어 몇 차례 공연했던 터라 이 지역 초등학생들 사이에서도 지 신부는 유명인사다.

-지난 60년 중 언제가 가장 기억나세요.

“종종 그런 질문을 받는데 내 답은 항상 같아요. 지금 이 순간. 나에겐 지금이 가장 좋은 시간이고, 내겐 오늘밖에 없어요.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 뭐냐고도 물어요. 지금 내 앞에 놓여 있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입니다.”

-평생 베풀며 사셨는데요.

“그렇지 않아요. 누구를 위해서 한 건 없어요. 누군가를 위한다는 건 그들을 무시하는 거예요. 전 단지 그들과 함께 한 것 뿐입니다. 노자가 이런 말을 했어요. 앉아서 기다리지 말고 그들에게 가라, 그들과 함께 살아라, 그들을 배우고 사랑하라. 그들이 알고 있는 것부터 시작해 그것으로 무언가를 이루어라. 사제든 목사든, 특히 지도자라면 누구나 이를 새겨야 합니다. 공수신퇴(功遂身退). 내가 내세울 수 있는 건 없어요. 공을 이루었다면 이내 물러나야 합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작은 바람 같은 건 없으신가요.

“음…, 하나 있긴 해요. 내 장례식에 노사연의 ‘만남’을 불러줬으면 좋겠어요. 우리들의 모든 만남은 하나라도 우연이 없거든요. 그렇게 귀하게 만났으니 서로 사랑해야지요.”

<박경은 기자 kin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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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한 레이스 '고비사막 마라톤' 20대 부문 1위, 열혈 울산 남아

현대차 빈준석씨 "축구선수 꿈 포기한 아쉬움 극지 마라톤 우승으로 풀어"
레이스 중 근육파열 등 부상 딛고 6박 7일간 250㎞ 완주

'고비사막 마라톤 대회'에 참가해 레이스를 펼치는 빈준석씨. [빈준석씨 제공]


(울산=연합뉴스) 허광무 기자 = 축구선수가 되는 꿈을 접고 생활 전선에 뛰어들었던 20대 청년이 인간 한계에 내몰리는 극지 마라톤 대회에 도전, 연령별 우승을 차지했다.

현대자동차 울산공장에 근무하는 빈준석(23) 씨는 학창 시절 촉망받던 축구선수였다.

초등학교 5학년에 시작한 축구는 중학생 시절 발군의 실력을 인정받아 '유망주'라는 평가를 받았고, 주변의 기대를 받으며 경북지역의 고등학교로 진학했다.

그러나 예고 없이 찾아온 발목 부상, 심각한 허리측만증과 축농증 등이 선수로 성장을 더디게 했다.

고질적 부상과 부진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그는 스무 살에 축구선수의 꿈을 접고 특전병으로 입대했다.

2016년 전역 후 직장생활을 시작했지만, 축구선수라는 무게를 스스로 버티지 못했다는 생각에 후회도 많았다.

미련과 응어리를 해소하는 탈출구로 그는 울트라마라톤을 택했다. 일반 마라톤보다 2배 이상 긴 100㎞를 뛰는 이 종목에서 빈씨는 4회 완주와 함께 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기도 했다.

그러던 중 극지 마라톤이라는 종목을 접하게 됐다.

끈기와 지구력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동시에 직장생활과 병행하기 어려운 준비 과정, 참가 비용 등 현실적인 한계도 컸다.

7월 30일부터 8월 5일까지 중국에서 열린 '고비사막 마라톤 대회'에 참가한 빈준석씨가 사막을 달리고 있다. [빈준석씨 제공]


빈씨는 도전을 택했다. 극한에 도전해 여전히 사라지지 않은 축구에 대한 아쉬움을 날리고 싶었다.

그때부터 대회 참가비와 항공료 등을 모으고, 극한 종목에 버티도록 몸을 만들었다. 퇴근 후 하루 10㎞ 이상을 뛰었다.

대회를 두 달가량 남기고는 훈련량을 늘렸다. 근무하는 날에는 매일 20㎞씩, 주말에는 30㎞ 이상을 달렸다.

대회 코스나 환경을 고려해 10㎏ 이상의 배낭을 메고, 일부러 험한 산길을 찾아다녔다. 산길을 달려 내려가다가 넘어져 엄지손가락 뼈가 부러지기도 했다.

7월 말 중국으로 건너간 그는 '고비사막 마라톤 대회'에 출전했다.

6박 7일간 총 250㎞를 달리는 방식으로 진행되는 이 대회는 아타카마 사막 마라톤, 남극 마라톤, 사하라 사막 마라톤 등과 함께 세대 4대 극지 마라톤으로 꼽힌다.

빈준석씨가 레이스 도중 촬영한 자신의 발.[빈준석씨 제공]


레이스는 7월 30일부터 8월 5일까지 6박 7일간 이어졌다. 대회는 식량, 침낭, 점퍼 등 필수품이 든 12㎏짜리 배낭을 멘 채 매일 아침 출발해 정해진 구간을 시간 내에 완주하는 식으로 진행됐다.

기온이 40도가 넘는 사막과 고지대 초원을 달리면서 이미 체력은 바닥이었다. 발톱은 깨졌고, 배낭끈에 쓸려 어깨 통증도 상당했다.

70㎞에 달하는 코스로 일명 '롱데이'로 불리는 4일차 구간에서 결국 다리에 탈이 났다.

다리를 절뚝거리면서도 진통제와 테이핑으로 버티며 죽음의 사선을 넘는 최악의 코스를 완주했다. 이 부상이 허벅지 근육파열과 무릎 인대 염증이라는 사실은 대회 후 진료에서야 알게 됐다.

빈씨는 총 30시간의 기록으로 총 250여 명의 참가자 중 21위로 골인했다.

특히 40여 명의 20대 참가자 중에 1위를 기록해 연령별 우승을 차지했다.

빈씨는 10일 "지금까지 나는 가능한 일만 시작하는 사람이었지만, 이번 대회를 계기로 시작하면 가능할 수 있다는 점을 배웠다"면서 "축구선수 아들을 뒷바라지한 부모님의 노고에 보답하는 동시에 스스로는 그런 기대를 이루지 못했다는 자책감을 덜 수 있는 소중한 경험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앞으로도 국내외 울트라마라톤은 물론 4대 극지 마라톤 대회에 계속 도전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빈준석씨가 레이스 완주 후 대회 참가자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빈준석씨 제공]


hkm@yna.co.kr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2018/08/10 07:35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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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탕물 차오르는 상황에서.. 꼭 껴안고 마지막 길 함께한 老부부

입력 2018.07.27. 03:02

7일 일본 오카야마현 구라시키시에 쏟아진 폭우로 집 안으로 물이 쏟아져 들어오는 와중에도 마지막 순간까지 남편 니시하라 도시노부 씨를 지켜주었던 아내 니시하라 아키코 씨. 유족 제공
‘오후 3시 20분.’

폭우가 덮쳤던 7월 7일. 벽시계는 여기에 멈춰 있었다. 남편이 취미로 만들었던 나무 그릇은 흙 속에 묻혀 있었다. 아내가 이웃들과 차를 마시던 방은 다다미가 넘어간 채로 무너져 있었다. 이들이 살던 단층집 천장까지 흙이 묻어 있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단란했던 80대 노부부의 공간이었다.

올해 스물다섯 살의 손자에게는 몇 달 전까지 할머니가 끓여주는 차를 마시러 가던 곳이었다. 사건 발생 다음 날, 구조 보트를 타고 현장을 찾은 손자는 말을 잇지 못했다.

“할아버지! 할머니!”

부엌으로 들어간 손자의 앞에는 할아버지를 두 손으로 꼭 껴안은 할머니가 있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시신은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식탁 옆에서 마지막까지 함께한 두 사람이었다. 손자의 눈에서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졌다.

○ 남편을 꼭 껴안은 아내

이달 6일부터 8일까지 서일본 지역에 쏟아진 폭우는 218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7일 가장 많은 비가 내렸다. 히로시마(廣島)와 함께 큰 피해를 입은 오카야마(岡山)현 구라시키(倉敷)시 마비(眞備)정 근처에서 흐르던 1급 하천 다카하시(高梁)강의 지류인 오다(小田)천 제방이 붕괴된 것도 이날 낮이었다. 넘쳐흐르는 물은 인근 4600채의 집을 순식간에 집어삼켰다.

“물이 차오르고 있다. 구청에 전화가 안 된다.”

오후 1시 20분경 니시하라 아키코(西原明子·84) 씨는 자신의 집에서 약 25km 떨어진 곳에 살고 있는 둘째 아들(54)에게 황급하게 전화를 걸었다. 이날 아침까지만 해도 둘째 아들의 안부 전화에 “괜찮아. 집에 물이 차오르는 일은 없을 거야”라고 말했던 아키코 씨였다. 어머니의 다급한 전화를 받은 둘째 아들은 관공서와 경찰 등에 구조를 요청했다.

흙탕물은 집 안으로 들어와 삽시간에 가재도구를 삼켰다. 가만히 있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아키코 씨는 몸이 불편한 남편 니시하라 도시노부(西原俊信·86) 씨를 식탁 위로 올렸다. 남편을 살리기 위해 조금이라도 높은 곳에 올린 것이다. 앞이 잘 보이지 않는 남편이 쓰러질까 봐 아내는 식탁 옆에서 남편을 두 손으로 감싸며 지탱했다.

“빨리 와서 우리 좀 살려줘.”

둘째 아들의 구조를 받지 못한 아키코 씨는 이번엔 더 먼 곳에 사는 장남(58)에게 전화를 걸어 소리쳤다. 오후 3시경 현장에 가고 싶었지만 이미 잠겨버린 마을에 들어갈 수 없었던 두 아들은 정신 나간 듯 구조 요청을 했다. 하지만 그것이 부모님과의 마지막 통화가 됐다. 몸이 성치 않은 남편을 끌어안은 아내, 그런 아내의 품에 안겨 있는 남편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서일본 폭우로 침수됐던 니시하라 부부의 집을 정리하고 있는 차남(오른쪽)과 손자. 아사히신문 제공
○ 남편 곁을 떠나지 않은 아내

이 노부부의 사연은 아사히신문, 마이니치신문 등을 통해 일본 전역에 알려졌다. 두 아들이 결혼해 나간 뒤 노부부는 구라시키시 마비정에 집을 얻어 살았다. 대형 철강 업체에서 퇴직한 남편 니시하라 씨는 목각 작품을 만드는 것을 좋아했다. 다도(茶道)가 취미인 아내는 이웃들을 초대해 함께 차를 마시는 것을 좋아했다.

2년 전 남편은 식도암 수술로 입원한 뒤부터 다리 근력이 나빠졌다. 지팡이를 짚고도 잘 걸을 수 없어 아내의 부축을 받으며 지내야 했다. 망막에도 문제가 생겨 시력도 점차 잃게 됐다. 남편에 대한 아키코 씨의 극진함은 변함이 없었다.

집을 정리하러 온 둘째 아들은 동네 주민들에게 사고 당일 아침 이야기를 듣게 됐다. 이웃들이 “피난소로 가자”고 했지만 아키코 씨는 “남편 눈이 잘 안 보인다. 집이 더 편하다. 피난소에는 불편해서 안 갈 것”이라며 남편 곁을 지키겠다는 뜻을 밝혔다.

두 아들은 부모의 장례를 마쳤다. 노부부의 흔적이 남아있는 집도 청소했다. 청소를 마친 장남은 이렇게 말했다.

“두 분은 점점 차오르는 흙탕물이 얼마나 무서웠을까요. 그래도 어머니는 아버지 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늘 사이가 좋았던 부모님은 끝까지 행복한 인생을 사신 것 같습니다.”

도쿄=김범석 특파원 bsis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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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걀보다 단백질 많이 든 음식 8

입력 F 2018.06.15 17:32 수정 2018.06.15 17:32



달걀에는 단백질이 풍부해서, 삶은 달걀 하나에는 단백질 6그램 들어 있다. 그러나 세상에는 달걀 외에도 매력적인 고단백 식품이 많다. 미국의 위민스 헬스(Women’s Health)가 ‘달걀보다 단백질이 풍부한 8가지 식품’을 추렸다.

◆ 말린 호박씨= 호박씨는 원래 마그네슘이 풍부하기로 유명하다. 그러나 단백질의 보고이기도 해서 호박씨 1/4컵에는 단백질 10그램이 들어 있다. 샐러드 위에 뿌려 먹어라. 입이 심심할 때 주전부리로도 그만이다.

◆ 두부= 100그램당 단백질 9그램이 들어 있는 두부. 구워도 맛있고, 끓여도 맛있는 이상적인 고단백 식품이다. 여덟 가지 필수 아미노산을 모두 함유하고 있으며 마그네슘, 구리, 아연, 비타민 B1까지 풍부하다.

◆ 스피룰리나= 바다로 눈을 돌려보자. 생선에만 단백질이 풍부한 게 아니다. 조류의 일종인 스피룰리나 2 테이블스푼에는 단백질 8그램이 들어 있다. 샐러드에 넣거나, 채소를 볶을 때 양념처럼 사용하면 좋다.

◆ 아몬드= 고단백 식품이면서 훌륭한 간식거리. 아몬드 1/4컵에는 단백질 7.5그램이 들어 있다. 아몬드에는 또한 구리, 마그네슘, 그리고 비타민 E도 풍부하다

◆ 그릭 요거트= 근육 회복에는 그릭 요거트가 최고. 작은 통 하나에 단백질 17그램이 들어 있다. 단 무지방, 플레인을 골라야 한다는 점을 명심하자.

◆ 병아리콩= 병아리콩에는 뼈를 구성하고 튼튼하게 유지하는데 필수적인 철, 망간, 칼슘, 인산염, 마그네슘, 아연, 그리고 비타민 K가 풍부하다. 단백질도 마찬가지. 병아리콩 1컵에는 단백질 12그램이 들어 있다.

◆ 으깬 귀리= 으깬 귀리에 물이나 우유를 부어 걸쭉하게 끓인 오트밀은 아침 식사로 그만이다. 으깬 귀리 1/2컵에는 단백질 7그램이 들어 있으며, 섬유소도 풍부하기 때문. 다양한 비타민과 미네랄, 항산화 물질은 덤이다.

◆ 그뤼에르 치즈= 즐겁게 단백질을 섭취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방법. 스위스의 일정 지역에서만 생산되는 이 둥글고 무거운 치즈에는 28그램당 단백질 8그램이 들어 있다.

[사진=jv_food01/gettyimagesba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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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재 기자 (youngchaeyi@kormed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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