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길 잃어도 좋은 파리..낭만 가득 시티 트레킹

몽마르트르 언덕, 센 강 지나 미술관·박물관 가는 트레킹 코스 추천월간 아웃도어 |

      글 사진 이두용 | 입력 2017.01.15 11:32




에펠탑은 야간에 시간대별로 조명을 밝혀 환상적인 장면을 연출한다.
“프랑스에 가면서 무슨 겨울 코트냐? 거긴 한겨울에 눈도 안 내려.” 파리 행 비행기 티켓을 끊었을 때 친구가 해준 얘기다. 한국은 연말 분위기에 한창 들떠 있던 시기, 프랑스의 겨울이 궁금했다. 두꺼운 옷을 여러 벌 챙겼다가 친구의 얘기를 듣고 도로 꺼냈다. 하지만 파리 샤를드골 공항에 도착했을 때 비행기 창밖으로 눈이 내리고 있었다. 전부 녹긴 했지만 처음 마주한 파리의 겨울은 생각보다 추웠고 모든 것이 새로웠으며 그만큼 아름다웠다.
에펠탑은 시간과 날씨, 보는 위치마다 다른 느낌이 들게 했다.
과거 왕궁이었던 루브르박물관은 건물이 곧 예술작품이라는 생각을 들게 한다.
에펠탑 봤음 파리의 절반은 본 것

유럽에서 3번째로 큰 나라 프랑스는 명실상부 세계인의 감성을 자극하는 곳이다. 수도 파리는 패션과 예술의 도시로 늘 많은 사람으로 넘쳐난다. 16세기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였던 카를 5세는 ‘파리는 단순한 도시가 아니라 하나의 세계’라고 말했다. 각 나라의 대도시가 저마다 소우주를 이루고 있지만, 특히 파리에는 인간이 꿈꾸는 모든 것이 존재한다는 의미였다고 한다.

파리 중심엔 에펠탑이 있다. 뉴욕의 ‘자유의 여신상’과 로마의 ‘콜로세움’ , 파리의 ‘에펠탑’만큼 도시를 대표하는 상징도 없을 것이다. 파리를 찾는 관광객들은 에펠탑과 함께 멋진 추억 하나씩을 꿈꾸며 날아온다. 나 역시 파리에 머무는 동안 에펠탑이 근사하게 보이는 풍경을 찾아다녔다.

야간에 가까이에 다가섰을 때 더욱 아름다운 빛을 보여줬던 에펠탑.
에펠탑은 파리 중심을 흐르는 센 강Seine의 서쪽 변두리 샹 드 마르스 공원 한편에 자리하고 있다. 프랑스혁명 100주년이던 1889년 개최된 파리 만국박람회 때 귀스타브 에펠이 설계해서 세웠다. 301m의 높이로 당시 세계 최고 높이였지만 당시엔 철골 덩어리라는 이유로 일부 지식인들의 비난을 받았다고 한다.

에펠탑은 내부에 3개의 전망대를 갖추고 세계인을 맞는다.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는 파리 시내는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된다. 에펠탑을 조망하기에는 센강 건너편 사요 궁전의 테라스가 명당이다.

높은 건물이 거의 없는 도시에 우뚝 서 있어 맑은 날, 흐린 날, 안개가 낀 날 등 기상의 변화에 따라 느낌이 다르다. 야간에는 시간대별로 조명을 밝혀 환상적인 장면을 연출한다. 춥다고는 했지만, 겨울이 우리나라만큼은 춥지 않으니 조명 점등시간에 맞춰 에펠탑을 찾는 것도 좋겠다.

걷는 것을 좋아한다면 노트르담Notre-Dame 성당이 있는 노트르담 지하철역에서 내려 성당을 구경하고 센 강을 따라 걸으며 영화 <퐁네프의 연인들>에 등장했던 퐁네프 다리Pont-Neuf Bridge를 비롯해 여러 개의 다리를 지나 에펠탑까지 오는 것을 추천한다.

파리는 거리마다 이정표가 잘 갖춰져 있어 걷기에 더없이 좋다.
파리가 시티 트레킹 천국?

얘기한대로 사진기 하나 들고 센 강을 따라 걷는 일은 약간(?)의 수고에 비해 얻는 게 많다. 가벼운 배낭에 간단한 간식과 음료, 지도 등을 챙겨 넣고 귀에는 샹송이 흘러나오는 이어폰을 낀 채 센 강을 따라 걸으면 마치 파리지엔이라도 된 것처럼 걸음마다 설렌다.

몇 개 안 돼 보여도 센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는 30여 개에 이른다. 비슷비슷해 보여도 서로 다른 매력을 가지고 있어 다리가 만들어진 1800년대 파리가 오롯하게 느껴진다. 야간에 강을 따라 걸으면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의 주인공이 되어 영화 속 1920년대로 돌아간 착각까지 든다. 우연히 ‘달리’나 ‘헤밍웨이’ , ‘피카소’를 마주칠지도 모르니 정신 바짝 차리자.

겨울이 더 화려한 파리 최고의 패션 거리 샹젤리제.
강가를 조금 걷다가 대중교통을 이용해 에펠탑까지 가려던 사람도 보통은 끝까지 걸어서 가게 된다. 강 건너로 보이는 건물과 조형물이 전부 그림 같아서 발걸음 돌리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사진 찍는 게 취미라면 숙소에서부터 워킹화나 트레킹화를 신고 나오는 게 좋다.

파리에 머물면서 사실 지도를 챙겨본 적이 없다. 우선 거리마다 이정표가 잘되어 있었다. 그리고 어딘가를 가던 중 막다른 곳을 만나도 그곳 풍경마저 멋있었기 때문에 맘이 상했던 적이 없었다. 고작 몇 주였지만 사람들이 파리를 좋아하는 이유를 도시의 거리와 건물, 평범한 사람들에게서 느낄 수 있었다.

샹젤리제 거리를 따라 야트막한 오르막을 따르면 만날 수 있는 개선문.
파리 거리 중 가장 유명한 곳은 누가 뭐래도 패션의 거리 샹젤리제Aux Champs-Elysees다. 겨울에는 화려한 트리 장식으로 더욱 아름답다. 이곳 역시 센 강을 따라서 갈 수 있는데 강의 북쪽에서 콩코르드 광장을 따라 북서쪽으로 이어져 있다. 총 1,880m 거리의 길엔 세계적인 명품매장들과 자동차 전시장, 호텔, 레스토랑이 즐비해 볼거리가 많다. ‘파리 개선문’으로 유명한 드골 광장까지 이어진다.

사실 파리는 시티 트레킹의 천국이다. 하루 정도 여유가 있다면 파리 보헤미안 예술가들의 아지트 몽마르트르 언덕Montmartre을 추천한다. 아기자기한 상점을 돌며 사크레 쾨르 대성당이 있는 정상에 올라 파리 시내를 내려다보고 뮤지컬과 영화로 유명한 댄스홀 ‘물랭루주Moulin Rouge’까지 걸어서 내려와도 좋다.

몽마르뜨 언덕의 사크레 쾨르 대성당의 야간 풍경도 운치가 있다.
몽마르뜨의 상점과 카페는 마치 영화 속 한 장면 같은 느낌을 선사한다.
몽마르뜨 인근에선 뮤지컬과 영화로 유명한 댄스홀 ‘물랭루주’를 빼놓을 수 없다.
최고와 최대를 아우르는 집대성

어떤 나라를 방문하든 그 나라의 문화와 역사를 알고 싶다면 박물관을 찾는 게 상책이다. 박물관은 전시된 내용에 따라 민속이나 미술, 과학, 역사박물관 등으로 나뉜다. 프랑스 파리에는 누구나 알고 있는 박물관이 하나 있다. 미술이 전시의 중심인 루브르박물관이다.

이곳은 영국의 대영박물관, 러시아의 에르미타슈미술관과 함께 세계 3대 박물관으로 손꼽힌다. 최초 1190년 지어졌을 당시엔 요새로 사용됐다고 한다. 16세기 중반 왕궁으로 재건축되면서 그 규모가 커졌다고. 덕분에 1793년 궁전 일부가 중앙 미술관으로 사용되면서 루브르는 궁전의 틀을 벗고 박물관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이후 5세기 동안 유럽을 비롯한 세계 곳곳에서 회화, 조각 등 수많은 예술품을 수집해 오늘날 30만 점가량에 이르게 됐다. 소장하고 있는 예술품의 숫자만으로는 세계 최대다.

고개를 돌리는 곳마다 세기의 대작이 걸려 있어 걸음이 조심스럽다.
값을 측정할 수 없다는 세계 최고의 명작 모나리자. 필수 코스다.
루브르박물관 전체를 꼼꼼하게 돌아보려면 며칠은 걸린다. 관심 있는 작품이 있으면 그 위치를 파악해 미리 동선을 짜두는 것이 좋다. 박물관 입구에는 유리로 된 피라미드가 설치돼 있다. 1989년 중국계 미국인 건축가 ‘에이오 밍 페이’가 설계한 것인데 당시엔 큰 반대를 불러일으켰지만, 지금은 루브르박물관의 상징이 되었다. 과거 궁으로 사용했던 곳이라 박물관 외관은 지금도 기풍이 느껴진다. 신기한 건 수백 년 뒤에 세워진 유리 피라미드도 궁합이 어색하지 않다는 것. 박물관 앞에 둘만 해서 만들어졌겠지 싶었다.

박물관 실내에 들어서니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어느 층 어느 코너를 돌아도 세기의 명작으로 가득했다. 그중 2층은 유명한 작품이 많아 항상 붐빈다고 한다. 이곳엔 19세기 프랑스 회화가 주로 전시돼 있는데 앵그르, 다비드, 들라크루아 같은 거장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더욱이 세계에서 가장 비싼 그림으로 불리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도 이곳에 전시돼 있다.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명작이라고 하니 루브르박물관에 가면 반드시 사진 한 장 찍어두자.

기차역이었던 과거 인테리어가 남아 있는 오르세미술관의 내부.
으뜸에 맞서는 버금, 오르세미술관

솔직히 프랑스를 여행하면서, 그것도 파리에 머무는데 단 며칠 일정으로 왔다는 건 참말로 아쉬운 일이다. 몇 년에 한 번씩 다녀갈 수 있는 여유가 있다면 모를까 몇 시간 둘러보기 위해 루브르박물관을 방문한다는 건 돌아서기 아까울 정도로 서운한 일이다.

며칠의 여유가 있고 걸으면서 도시를 충분히 만끽하고 싶다면 하루는 센 강을 따라 루브르박물관을 관람하고, 다음 날엔 다시 센 강을 따라 오르세미술관을, 그 다음 날엔 에펠탑까지 걷기를 추천한다. 몇 번을 반복해서 걸어도 지루하지 않은 풍광이 그대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루브르박물관이 처음부터 박물관 건물로 지어진 게 아닌 것처럼 오르세미술관도 마찬가지다. 이곳은 1804년 최고재판소로 지어졌으나 불타버렸고 이후 1900년 오르세 기차역으로 지어졌다고 한다. 하지만 오랜 기간 방치되었다가 1986년 12월에 미술관으로 개관했다. 그러고 보면 미술관 개관은 정말 최근이다.

이곳은 루브르박물관, 퐁피두센터와 함께 파리 3대 미술관으로 꼽힌다. 루브르 박물관이 고대에서 19세기 작품을 주로 전시한다면 오르세 미술관은 19세기 이후의 근대미술 작품을 위주로 전시하고 있다. 퐁피두센터가 보다 현대미술 작품을 전시하는 것을 볼 때 오르세 미술관은 시기적으로 중간 단계로 보인다.

미술관에 들어서면 둥그런 천장과 한쪽 벽에 붙은 커다란 시계가 이곳이 과거 기차역이었음을 알게 한다. 하지만 미술관에 맞게 리모델링 되어 있어 모르고 왔다면 모를 수도 있다. 이곳이 대단한 것은 역시 작품의 수준이다. 학창시절 미술책에서 들어봤음 직한 화가의 이름과 보았음 직한 그림들이 사방에 늘어서 있다.

지상 1층에는 밀레의 <이삭줍기>, 앵그르의 <샘> 등의 작품이 대표적이다. 3층에는 인상파와 후기 인상파 작가들의 작품이 전시돼 있는데 그 이름도 유명한 고흐, 세잔, 고갱 등의 작품이 이곳에 있다. 사진 찍기를 즐긴다면 그림을 깔끔하게 사진에 담아서 오자. 인화해서 본다면 더없이 생생한 사진엽서가 탄생할 것이다.

글 사진 이두용 / ryu@outdoornews.co.kr

Posted by 행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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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과 서커스', 로마 말기엔 일년의 반이 축제였다

[처음 만난 유럽④] 로마 ① 제국의 영광, 고대 로마 유적들

오마이뉴스 | 장호철 | 입력 2016.06.20 11:25




[오마이뉴스장호철 기자]

 고대 로마 중심부의 유적 포룸 로마눔. 포룸은 정치와 종교의 중심지 역할을 하는 광장이다.
ⓒ 장호철
넷째 날 밤, 우리는 로마 외곽의 낡은 호텔에서 묵었다. 유럽에 머무는 동안 아내는 늘 어두운 실내를 못 견뎌했다. 대낮에도 들어가는 방마다 등부터 켜고 보는 사람이니 침침한 조명은 곤욕 자체였던 것이다. 게다가 욕실의 거울은 또 왜 그렇게 높게 달려 있었는지...

로마, 제국의 영광과 쇠락

이튿날 아침, 우리는 로마(Roma)로 향했다. 로마는 현 시점에선 이탈리아의 수도에 지나지 않지만 세계사의 맥락 속에서 그 의미는 매우 중층적이다. 로마는 로마제국의 수도이면서 로마 가톨릭교회의 중심지로 서양 문명을 대표하는 도시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유럽에서 로마를 '세계의 머리', '영원한 도시'라고 부르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는 '팍스로마나(Pax Romana)'를 구가했던 제국(帝國)의 영광 시대를 기준으로 로마를 이해한다. 그것은 '모든 길을 로마로 통한다'나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로마에서는 로마법을 따르라'고 하는 따위의 로마 관련 격언이 이 땅에서도 자연스럽게 통하는 것으로 맥을 잇고 있다.

학창시절에 '세계사'를 배우긴 했지만 타국의 역사를 일관되게 꿰는 건 쉽지 않다. 무엇보다도 유럽이 오늘날의 판도로 재편되기까지 복잡한 왕가들의 계보 따위에 지레 질려 버리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로마를 이야기할 때 사람들에게 떠오르는 이미지는 지극히 단편적일 수밖에 없다.

'시저'로 더 잘 알려진 카이사르, '폭군' 네로, 기독교 박해와 지하묘지 카타콤(Catacomb), 콜로세움과 검투사 따위가 로마를 구성하는 이미지들이다. 물론 후기 스토아학파 철학자 세네카, 정치가 키케로, 안토니우스와 이집트 왕녀 클레오파트라도 있긴 하다. 그러나 이들 이미지들은 시대 구분 없이 우리의 기억 속에 혼재하고 있다.

전설은 로물루스와 레무스 형제가 테베레강 동쪽의 팔라티노 언덕 위에 로마를 건설한 것이 기원전(B.C) 753년이라고 전한다. 그러나 팔라티노 언덕에서 B.C 8세기부터 시작되는 철기 시대 유적이 발견된 것으로 미루어 보면 로마는 전설보다 더 오래된 도시다. 

건국 이후 왕정 체제로 이어지던 로마는 기원전 509년에 왕정이 끝나고 이후 450년간 공화정 체제로 운영되기 시작했다. 그 후 로마는 세 차례에 걸친 포에니 전쟁(B.C 264~B.C 146)과 마케도니아 전쟁에 승리하며 지중해의 패자로 등장한다. 로마의 장군 스키피오가 코끼리 군단을 이끌고 알프스를 넘은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을 꺾은 전쟁이 바로 포에니 전쟁이다.

이후 권력투쟁기를 거쳐 갈리아 전쟁과 폼페이우스와의 내전을 승리로 이끈 카이사르(B.C 100~A.D 44)가 종신 독재관으로 권력을 장악한다. 그러나 그는 공화파(그 유명한 '브루투스'도 포함)에게 암살당하고 기원전 31년 마침내 옥타비아누스가 '아우구스투스(존엄자)'라는 칭호를 얻어 로마제국 시대를 연다. '폭군' 네로(37~68)는 바로 이 왕조의 제5대 황제다.

로마의 황금기인 오현제(五賢帝) 시대(96~180)와 팍스로마나(로마의 평화, 전쟁을 통한 영토 확장을 최소화하면서 오랜 평화를 누렸던 시기) 시대(B.C 27~180)를 거치며 로마는 세계 최강국의 지위를 누렸다. 제국의 영토는 최대였고, 이 시기 로마는 인구 100여만 명으로 세계 최대의 도시였다.

서기 235년 이후, 로마 제국은 40여 년간 20여 명의 황제가 암살되는 혼란의 시기를 거치며 쇠망의 길로 들어선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사두(四頭) 정치로 제국의 위기를 막으려 했으나 쇠락의 추세를 멈추지 못했다.

그동안 박해 받아온 기독교가 공인된 것은 서기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밀라노 칙령을 내리면서다. 330년 콘스탄티누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명명한 비잔티움(현 이스탄불)으로 천도한다. 로마제국이 동서로 갈라진 것은 395년, 서로마제국이 게르만 족 용병대장 오도아케르에 의해 멸망한 것은 476년이었다.

로마, 현존하는 유럽의 역사 도시

 ‘모든 신을 위한 신전’ 판테온(Pantheon). 소석회 반죽과 화산의 부석(浮石), 주먹 크기의 돌들로 만들어진 콘크리트 돔의 중량은 자그마치 4,535톤에 이른다.
ⓒ 장호철
15세기 중반 이후, 교황령의 수도로 로마는 다시 번창해져 르네상스 문화의 중심지로 자리 잡았다. 교황의 치세 가운데 성벽 개수, 궁전 건설, 교회 수복 공사 등이 이루어지면서 로마는 유명 예술가나 건축가들의 활동 무대가 되었다. 15세기 말의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 등이 교황을 위해 예술 활동에 전념한 대표적 예술가들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로마는 급격히 성장하여, 밀라노를 제치고 이탈리아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도시가 되었다. 이탈리아의 행정수도이면서 로마 가톨릭교회의 본산인 로마 교황청이 있는 바티칸 시국(市國)을 품고 있는 로마는 유럽을 대표하는 관광도시가 되었다. 로마는 도시 자체로도 현존하는 유럽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아침 일찍 숙소를 나서 바티칸 관광을 마친 뒤에 우리는 이른바 '벤츠 투어'를 시작했다. 세 시간쯤 걸린 벤츠 투어는 벤츠 승합차를 타고 로마의 유적지를 도는 상품이었다. 짧은 시간 안에 가능하면 많은 곳을 들르다 보니 이 투어는 '수박 겉핥기'에 가까웠다. 어쨌든 보고들은 것을 명념하고 그 속내를 챙기는 것은 전적으로 여행자의 몫일 수밖에 없다.

벤츠 투어로 만난 첫 유적이 '모든 신을 위한 신전' 판테온(Pantheon)이었다. 최초의 판테온은 기원전 27년 아그리파가 건립하여 신에게 바쳤지만 서기 80년의 로마대화재(네로가 시를 읊은 배경이 되었다는 그 화재)로 불타 없어졌다. 현존하는 판테온은 서기 125년경에 하드리아누스 황제 재위 중에 세워진 것이다.

하드리아누스(76~138)는 동방을 널리 여행했으며, 그리스 문화에 경도된 국제적인 감각의 통치자였다. 그는 모든 신에게 바칠 신전으로 판테온을 건립했으며, 이는 로마제국 안에 로마의 신들을 믿지 않거나 다른 이름으로 로마의 신들을 섬기는 백성을 위한 것이었다.

판테온, 혹은 2천 년의 시간

판테온의 돔은 천 년도 뒤인 1436년 피렌체 대성당(두오모)이 완공될 때까지 이탈리아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것이었다. 소석회 반죽과 인근 화산에서 가져온 가벼운 부석(浮石), 주먹 크기의 돌들로 만들어진 콘크리트 돔의 중량은 자그마치 4535톤에 이른다. 판테온의 돔과 열주(列柱, 기둥) 양식은 르네상스 건축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판테온이, 중세 초기에 많은 고대 로마 건물들이 겪은 파괴와 약탈을 피해갈 수 있었던 것은 7세기 이후부터 이 신전이 로마 가톨릭교회의 성당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르네상스 시대 이래로 판테온은 무덤으로 사용되어 라파엘로를 비롯한 유명 화가, 작곡가, 건축가들이 묻히기도 했다.

판테온은 그 규모가 사람을 압도한다. 이 거대한 건물이 거의 2천 년 전에 세워졌다는 사실을 가늠하는 것조차 쉽지 않을 정도다. 2천 년이라는 시간의 무게 앞에 백 년을 사는 것도 쉽지 않은 인간 존재의 한계는 참으로 덧없는 것이다.

내부로 들어서면 전개되는 화려하다 못해 현란한 장식과 기둥들, 그림과 조각 등이 연출하는 실내 경관도 경이롭다. 원형의 천장 한가운데 뚫린 돔의 구멍에서 쏟아져 내리는 한 줄기 빛은 판테온이 빚어내는 신비로운 공간감의 절정을 이룬다.

 천정 한가운데 뚫린 돔의 구멍에서 쏟아져 내리는 한 줄기 빛은 판테온이 빚어내는 신비로운 공간감의 절정을 이룬다.
ⓒ 장호철
 판테온 신전 앞 로톤다 광장엔 이집트에서 옮겨온 오벨리스크가 세워져 있다.
ⓒ 장호철
판테온 앞의 로톤다 광장엔 신전 앞 광장을 장식하기 위해 이집트에서 옮겨온 오벨리스크가 세워져 있었다. 오벨리스크 기단부의 조각상에서 분수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고 광장 주변의 노천카페엔 관광객들이 <로마의 휴일>(1953)의 오드리 헵번처럼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다음으로 만난 유적은 '진실의 입'으로 유명한 산타 마리아 인 코스메딘 성당 뒤에 있는 치르코 마시모(Circo Massimo, '대형 경기장, 광장'의 뜻, 라틴어로는 키르쿠스 막시무스Circus Maximus)였다. 기원전 600년께 목재로 지은, 고대 로마제국에서 가장 큰 전차 경기장이었다는 거대한 타원형 광장엔 햇살이 따가웠다.

전차 경기장, 빵과 서커스

원래 이탈리아 중부의 고대 왕국 에트루리아(Etruria)의 왕들이 경기와 오락을 위해 지은 이 경기장은 기원전 50년께 카이사르가 약 2만 7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로 다시 지었다. 그 후 25만 명까지 수용할 수 있도록 확장되었으며 서기 549년에 마지막 전차 경기가 벌어졌다고 한다.

굽은 소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는 언덕 아래 펼쳐진 경기장에선 로마 시민들을 위무하기 위하여 1인승 2륜 또는 4륜 전차 경기가 벌어졌다. 야트막한 언덕과 계단 쪽이 객석이었는데, 거기 앉아서 로마 시민들은 손에 땀을 쥐고 목숨을 건 질주를 벌이는 전사들에게 열광하였을 것이다. 

기원전 50년에 이 경기장은 로마 시민 2만 7천 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 2천 년 후, 서울 잠실야구장의 수용 인원은 2만 6천이다. 서울올림픽 주경기장의 수용인원은 10만 명, 그런데 마시모는 25만 명까지 수용할 수 있었다고 한다. 로마제국은 왜 시민들을 위한 오락 시설을 이토록 거대한 규모로 건설했을까.

로마 황제들은 마시모의 시설을 확장하거나 더 화려하고 웅장하게 장식하는 데 애썼다. 이들은 화려하고 박진감 넘치는 전차 경기라는 볼거리를 제공함으로써 국정에 대한 시민들의 불만을 호도했다. 또 이를 황제 숭배 및 절대군주제를 강화하는 정치적 수단, 즉 우민화 정책으로 활용하였던 것이다.

 전차 경기장인 키르쿠스 막시무스Circus Maximus). 황제는 시민들에게 화려하고 박진감 넘치는 전차 경기라는 볼거리를 제공함으로써 국정에 대한 시민들의 불만을 호도했다.
ⓒ 장호철
대중을 지배하고 제국의 질서를 유지하는 데 전차 경기는 매우 유효한 수단이었다. 황제들은 전차 경기를 통하여 정세나 민심을 판단할 수 있었기 때문에 다양한 방법으로 경기를 후원하였다. 더 커지고 화려해진 전차경기장은 이들 황제들의 욕망의 표지이기도 했다.

매월 무상으로 지급받는 밀로 먹거리를 해결하고 전차 경기장이나 콜로세움에 무료입장하여 각종 축제와 공연을 즐기는 것은 로마시민의 특권이었다. 로마의 축제일 수는 카이사르 때는 연간 56일이었지만 오현제시대에는 120일,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던 5세기쯤에는 175일에 이르렀다.

결국 로마 시민들은 1년의 절반을 키르쿠스(circus, '서커스Circuses'의 어원)를 즐기면서 쉰 셈이었다. 그러나 대신 그들은 지배계급의 의도대로 비판의식이 마비된 채 정치에서 배제되었다. 기원전 1세기 로마 시인 유베날리스(Juvenalis, 55~140)는 자신의 권리를 물질과 향락으로 바꾼 로마인들을 다음과 같이 풍자했다. 로마 역사가 타키투스(Tacitus, 56~117)가 <연대기>에서 지적한 것도 다르지 않았다.

"레무스(로마를 건국한 로물로스의 동생)의 타락한 자식들 무리!... 이 전락한 백성은 타는 목마름으로 세상에서 단 두 가지만 희망하게 되었으니 빵과 키르쿠스다." - 유베날리스, <풍자시> 중에서

"아우구스투스는 먼저 하사금으로 군대를, 염가의 곡식으로 민중을, 또 평화의 즐거움으로 세계를 만족시키고 나서 조금씩 득세하기 시작하여 한 몸에 원로원과 장관과 입법부의 직능을 모았다. 반대파는 하나도 없었다. 가장 용감한 사람들은 전장에서 쓰러졌거나 공공의 적으로 분류되어 목숨을 잃었다." - 타키투스, <연대기> 중에서

경기장 건너편의 구릉지가 로마신화에서 로물루스 형제가 늑대와 함께 발견된 팔라티노(Palatino) 언덕이다. 로마의 기원인 이 신성한 언덕은 권력과 부를 가진 지배계급의 주거지였고 뒤에 아우구스투스 이래 티베리우스, 칼리굴라, 네로 등 황제들의 궁전(Palazzo)이 지어졌다.

 로마의 기원인 팔라티노(Palatino) 언덕은 권력과 부를 가진 지배계급의 주거지였고 로마 멸망 후 약탈의 표적이 되면서 오늘날의 폐허로 남았다.
ⓒ 위키백과
이 언덕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에 각각 콜로세움, 상업과 물류의 중심지이며 가축시장이었던 보아리움(Boarium) 포룸, 전차 경기장, 행정 중심지 포룸 로마눔(포로 로마노)이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전차 경기장에서 바라보는 팔라티노에는 과거의 영화 대신 넓은 정원과 허물어진 건축물의 잔해만이 쓸쓸하게 남아 있었다. 로마 멸망 이후, 황제와 귀족들의 궁전이 있었던 팔라티노는 약탈의 표적이 되었기 때문이다.

팔라티노 언덕의 폐허만 보이지 않았다면 전차경기장은 어디 한국의 한적한 시골 공설 운동장 같았을 것이다. 그러나 경기장 한복판에 황제의 권위를 상징하는 오벨리스크를 세운 중앙분리대와 경기장을 에워싼 3층의 관중석이 있었던 때를 상상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경기장을 가로지르는 한 쌍의 남녀를 바라보면서 판테온에서 압도되었던 시간의 무게가 시나브로 눈앞에서 증발하고 있는 것 같았다. 

콜로세움, 시민을 위한 최고의 복지시설

마지막 여정은 팔라티노 언덕 너머 콜로세움(Colosseum)이었다. 로마와 로마시대를 대표하는 건축물인 콜로세움의 정식 명칭은 플라비우스 원형 경기장이었다. 당시 대부분의 원형 경기장이 도시 외곽 지역에 있었던 것과 달리 콜로세움은 도시 중심부에 있었다. 이 경기장이 네로 황제가 지은 거대한 별장인 황금궁전의 인공호수를 메운 자리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콜로세움은 건립 당시에도 76개의 출입구로 5만여 명의 관중이 빠르게 출입할 수 있었고 곳곳에 식수대가 마련되어 있는 완벽한 시설이었다.
ⓒ 장호철
콜로세움이 세워질 때는 팍스로마나(Pax Romana)라고 불리는 로마 최고의 전성기였다. 1천 개가 넘는 공중목욕탕과 28개의 도서관, 수많은 신전과 대규모 원형 경기장 등 시민을 위한 공공시설이 넘쳐났고, 귀족과 부자들은 거대한 저택에서 호화 생활을 누리던 때였다.

콜로세움은 서기 70년 플라비우스 왕조의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착공하여 10년 후 그의 아들 티투스 황제 때에 완공하였다. 네로의 개인 공간을 공공시설로 바꾼 베스파시아누스의 정치적 의도는 분명했다. 그는 콜로세움을 통해서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고 로마 시민의 통합을 꾀하고자 했다.

직경의 긴 쪽은 188m, 짧은 쪽은 156m, 둘레는 527m의 타원형, 외벽은 높이 48m의 4층 구조인 콜로세움은 건립 당시에 이미 수용인원이나 편의시설 등에서 완벽한 시설이었다. 76개의 출입구로 5만여 명의 관중이 빠르게 출입할 수 있었으며, 내부에도 곳곳에 식수대가 설치되어 있어 오늘날의 스타디움과 비겨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원형 경기장은 전차 경기장과 마찬가지로 시민들을 위해 세워진 로마의 대표적인 공공 건축물이었다. 콜로세움은 시민들에게 검투사 경기 같은 여흥을 제공하고 전쟁 포로와 제국의 반역자들을 공개 처형하는 장소로 활용되었다.

경기장은 또한 해상 전투를 재현하거나 고전극을 상연하는 무대로도 사용되었다. 검투사들은 보통 노예나 전쟁 포로들 가운데 뽑은 용맹한 전사들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검투사끼리 또는 맹수와의 목숨을 건 싸움은 관중들에게는 최고의 구경거리였다. 콜로세움에서 벌이는 경기나 의식은 결국 로마 시민으로서의 자부심과 일체감, 공동체 의식을 느끼게 해주는 매체로 기능하고 있었던 것이다.

로마시민은 누구인가

최고의 통치자인 황제가 이처럼 여흥과 오락까지 제공하는 데 심혈을 기울인 로마 시민은 누구였던가. 로마 시민은 특권층이 아닌, 로마를 구성하는 자유민 전체를 가리키는 개념이었다. 로마 시민은 세금 납부 등의 책임뿐만 아니라 국가의 보호를 받을 권리를 갖고 있었다. 이들 자유민들은 황제와 권력층을 움직일 수 있는 중요한 세력이었다.

그래서 국가와 황제는 각종 정책에 대한 시민들의 여론을 수렴하고 이들의 반응을 민감하게 살펴야 했다. 지배계급이 공공 조형물과 건축물 건립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것도 로마 사회에서 시민이 그만큼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콜로세움은 그런 점에서 통치자와 피치자의 욕망이 만나는 공간이었다. 황제는 콜로세움을 시민들과 직접 소통할 수 있는 기회로 활용해 자극적인 볼거리를 제공하면서 자신의 생각과 의지를 시민들에게 알렸다. 또 시민들은 원형 경기장에서 열리는 다채로운 경기나 의식을 통하여 잠재된 욕망을 대리 충족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콜로세움의 내부. 콜로세움은 시민들에게 검투사 경기라는 여흥을 제공하고 전쟁 포로와 제국의 반역자들을 공개 처형하는 장소로 활용되었고 해상 전투를 재현하거나 고전극을 상연하는 무대로도 사용되었다.
ⓒ 위키백과
 영화 <글래디에이터(Gladiator)>(2000)의 한 장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와 콤모두스 황제 통치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검투사 영화다.
ⓒ 유니버설 스튜디오
그런 뜻에서 콜로세움은 시민들을 위한 최고의 복지시설이었다. 이 경기장에 한꺼번에 최대 5만 명이 입장할 수 있다는 사실이 뜻하는 바는 적지 않다. 제국의 영토를 최대 판도로 넓힌 트라야누스 황제 재위(98~117) 시기의 로마 인구는 100만이었다. 이는 산술적으로 보면 모든 로마시민들이 한 차례씩 콜로세움에서 경기를 즐기는 데 20일로 충분했다는 뜻이다.

콜로세움의 관람석은 계급에 따라 구분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는 시민과 노예에 대한 차별이 있었다는 것보다는 시민과 노예, 도시 빈민들도 무료로 콜로세움에 입장해 경기를 즐길 수 있었다는 뜻으로 읽어야 한다. 더 안락하게 자신의 저택에서 경기를 벌일 수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황제나 귀족들은 굳이 시민, 노예들과 함께 같은 공간에서 공연을 즐겼다.

이는 콜로세움이 시민 복지를 위한 공공시설이었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이다. 동시에 신분의 차이를 넘어 황제와 노예가 같은 공간에서 여흥을 즐기는 구조가 최하층의 로마 시민에게도 자긍심과 소속감을 느끼도록 해 주는 장치였다는 사실도 의심의 여지가 없다.

608년까지 경기장으로 사용되었던 콜로세움은 중세에는 군사적 요새로 이용되었다. 그 이후 이 거대한  경기장의 돌과 부재(部材)는 교회나 다른 건축물을 짓는 데 필요한 자재로 뜯겨나갔다. 한때 로마의 영광과 로마 시민의 자부심이었던 콜로세움이 오늘날과 같이 황폐한 모습으로 남은 이유다.

시민들이 누린 여흥의 피비린내와 로마의 쇠락

콜로세움 안으로 들어가는 대신 나는 맞은 편 언덕에 오르거나 주위를 빙 돌면서 여러 장의 사진을 찍었다. 따가운 햇살에 겉옷을 벗었는데도 땀이 배어났다. 콜로세움 앞쪽의, 312년 콘스탄티누스 1세의 서로마 통일을 기념해 세웠다는 콘스탄티누스 개선문 앞의 화단 턱에 앉아서 아내와 잠깐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판테온도 그렇고... 우리야 구경을 잘 하지만 저렇게 엄청난 건물을 짓는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피땀을 흘렸을까? 누구유? 노예?"
"그렇겠지. 노예 말고도 전쟁 포로도 있었을 테고. 세계 최강의 로마제국이었으니 인부 조달에는 전혀 지장이 없었겠지..."
"그런데 천 년 만 년 갈 것 같이 저리 대단했던 로마제국은 왜 망했우?"
"글쎄, 제국의 시스템이 변화된 사회를 따라가지 못했겠지. 어느 나라 없이 망하는 데는 다 합당한 이유가 있으니까 말이야."    

대제국 로마가 멸망한 원인을 들여다보는 것은 한가한 여행자의 몫은 아니다. 비잔티움 제국(동로마)을 포함할 경우 무려 2천 년 동안 존속했던 대제국 로마가 멸망한 원인을 어찌 한 가지로 제시할 수 있을까. 그것은 정치적, 사회적, 군사적 이유들이 종합적으로 맞물린 복합적인 문제였을 터였다.

그러나 전차 경기장이나 콜로세움 같은 공공시설에서 벌어진 전차·검투 경기를 통해서 로마 시민들이 누린 여흥의 피비린내도 그 멸망을 재촉하는 요소의 일부였음은 부정하기 어렵다. 이들 공공시설은 지배계급과 시민 대중들의 욕망이 교차하는 가운데 체제의 유지에 이바지한 공간이었던 것이다.  

 콜로세움 앞의 콘스탄티누스 개선문. 315년, 콘스탄티누스 1세의 서로마 통일(312)을 기념하여 원로원이 건조하여 봉헌했다.
ⓒ 장호철
콜로세움에서 제공된 갖가지 여흥은 당대 로마 사회가 맞닥뜨린 사회적 갈등과 모순을 회피하고 쾌락을 추구할 수 있게 해 주었다. 후대로 갈수록 로마의 시민 대중은 폭력과 잔인함에 기울어지면서 도덕적 타락으로 치달았다. 그것은 미로처럼 생긴 벽과 기둥이 있었다는 콜로세움의 바닥처럼 혼란스러운 상황으로 상승되면서 전개되었을 것이다.

어느새 해가 설핏 기울어져 있었다. 버스에 올라 내다보니 콘스탄티누스 개선문 너머 콜로세움의 허물어진 벽이 보였다. 나는 콜로세움 완공 후 100여 일 동안의 경기에서 희생되었다는 9천여 마리의 야생동물과 2천여 명의 검투사의 비명을 덮었을 시민들의 함성을 떠올려 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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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행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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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마추픽추를 발견하다

우주 여행자의 지구별 자전거 여행

월간 아웃도어 | 글 사진 정효진 | 입력 2016.09.28 16:41




스페인이 잉카제국을 정복할 당시 마추픽추만큼은 발견하지 못했다. 마추픽추는 20세기에야 미국인 빙엄에 의해 세상에 알려지게 된, 무려 400년 가까이 숨겨져 있던 공중도시다. 영원히 풀리지 않을 것만 같은 그 수수께끼를 찾아서 떠나기로 했다.

물이 없던 온천 마을기차를 타고 가고 싶었으나 가격이 비쌌다. 혼자서 가는 것과 여행사를 통해 가는 것을 비교했다. 혼자서 가는 게 20달러 정도 절약할 수 있지만, 매우 힘들다. 결국, 여행사를 선택. 가격은 1박 2일 130달러였다.

쿠스코에서 마추픽추 가는 길은 굉장히 험난하고 멀지만, 풍경만큼은 정말 아름답다. 아침부터 오후까지 차로 달렸다. 중간에 잠깐 들러서 점심을 먹었다. 차가 다닐 수 없는 길이 있어 걸어야 했다. 기찻길을 따라 걷고, 계단을 오르고, 아슬아슬 다리 위를 지나기도 했다. 마추픽추의 숨겨진 도시를 향해 걷고 또 걸었다.
순박한 웃음의 원주민과 라마.
400년간 숨겨진 도시 마추픽추.
밤늦게야 하룻밤 머물 마을에 도착했다. 그런데 가이드를 잘못 만났나 보다. 제대로 통솔 하지 않아서 같이 차를 탔던 사람들이 흩어지기도 했다. 우리가 머무르는 마을 이름은 아구아스깔리옌떼스. 뜨거운 물, 온천 마을이란 뜻이다.

그런데 황당하게도 숙소에 물이 안 나왔다. 가이드는 마을 전체가 단수라고 한다. 식당에선 2시간을 기다린 뒤 밥을 먹을 수 있었다. 그런데 그 곳에서 안 사실, 우리 숙소만 물이 나오지 않는 것이었다.
와이나픽추에서 바라본 마추픽추.
식사가 끝나갈 때쯤, 이번엔 가이드가 표가 매진이라는 소리를 한다. 돈을 더 내면 다른 방법으로 표를 구해주겠단다. 나는 이미 예매했기 때문에 상관없었지만, 다른 사람이 문제였다. 자정까지 다른 여행자들과 열심히 싸웠다. 결국, 모든 여행자가 표를 받아냈다.

다음날 새벽 5시. 와야 할 가이드가 안 왔다. 조식이 포함된 여행이었는데, 조식도 주질 않았다. 버스를 타고 가면 마추픽추까지 15분이 걸리지만 9달러나 내야 했다. 결국, 같은 숙소 여행자들과 걷기 시작했다. 시간이 너무 촉박하다. 서둘러야 한다. 해발 2,000m에서 시작된 계단은 2,400m까지 이어져 있다. 겨우 6시 45분 정도에 산 정상에 도착했다.
9달러를 아끼기 위해 걸은 길.
숨겨진 신비의 도시 숨이 멎을 것처럼 헐떡거리며 정상에 오르니, 정말 숨이 멎을 것 같은 풍경이 펼쳐졌다. 가이드 때문에 망친 기분이 순식간에 잊힐 만큼 아름다웠다. 이렇게 높은 산봉우리에 어떻게 이런 도시를 만들 수 있단 말인가?

1911년 미국의 빙엄은 산꼭대기에 숨겨진 도시가 있다는 것을 주민에게 듣게 되고, 11살짜리 꼬마 가이드를 따라 올라갔다. 빙엄이 발견할 당시의 모습과 지금의 모습은 다르다. 당시에는 숲으로 뒤덮여 있었으나, 오랜 복구 노력 끝에 당시의 모습 그대로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샤크사이와만의 웅장함.
사실 이곳은 잉카 도시라기보다는 케추아 도시라고 해야 한다. 잉카는 왕을, 케추아는 서민을 부르는 단어다. 천 명이 넘는 서민들이 여기에 살았으나, 나중에 아마존으로 피신했다. 1911년 발견 당시 케추아 두세 가족이 살고 있었다.

문제의 가이드 말고 다른 사람이 영어로 설명해주었는데 매우 흥미로웠다. 여러 그림을 들고 다니며 장소를 이동할 때마다 자세히 설명해줬다. 돌의 재질을 보면 이곳에 살던 사람들의 신분을 알 수 있다. 매끈하고 네모난 돌은 신분이 높은 사람, 정교함 없이 투박한 돌은 서민 케추아가 살던 집이다.
우연히 발견하게 된 온천탕.
며칠 전 시티 투어로 태양의 신전을 방문했다. 그곳엔 돌 사이의 틈이 전혀 없으며, 표면은 굉장히 매끈하다. 잉카가 머물던 곳이었기 때문이다. 케추아가 살던 곳, 당시의 호텔, 신전 등을 돌아다니다 보니 내게 초능력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물건에 손을 대면 그 물건의 모든 역사가 눈에 보이는 그런 초능력 말이다. 초능력은 없지만, 눈을 감고 그때를 상상해봤다.

마추픽추는 케추아어로 ‘오래된 봉우리’를 뜻한다. 와이나픽추는 젊은 봉우리다. 마추픽추 반대편 봉우리가 바로 와이나픽추이다. 나는 10달러를 더 내고 와이나픽추도 신청했다. 와이나픽추 정상에 올라 멀리서 마추픽추를 바라보았다. 중간에 가이드 때문에 고생은 했지만, 그래도 마추픽추를 처음 봤을 때, 심장이 멎을 거 같던 그 순간은 평생 잊지 못한다. 기차를 타고 편하게 버스에 앉아 올랐다면 감동이 이렇게까지 크진 않았을 거다.

차로도, 도보로도 가기 힘들었던 곳에 200톤이 넘는 돌들이 이 공중도시를 짓는데 쓰였다. 케추아들은 이곳에 삶의 터전을 마련했다. 세상 모든 사람이 발견하지 못했던 곳에서 그들만의 삶을 꾸렸다. 혹시 우리가 모르는 어딘가에 여전히 숨겨진 공중 도시가 있지는 않을까?
하룻밤 텐트 칠 곳을 제공해 준 원주민.
다시 시작된 고산 라이딩 앞으로 일주일간 해발 3,400m에서 시작해 3,000m까지 내려간 다음 무려 4,300m까지 다시 올라가야 한다. 내가 정말 이걸 할 수 있을까?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정이다. 고산병으로 고생한 내가, 안데스 산맥에서 무사히 자전거를 탈 수 있을까? 나도 잘 모르겠다. 우선은 시도해 보자.

쿠스코를 빠져나오는데 무지막지한 역풍이 불었다. 자전거를 탈 때 가장 위험한 것 중 하나가 바로 강한 바람이다. 자전거가 휘청거렸다. 트럭이라도 지나가면 더 흔들려 위험하다. 결국, 자전거를 끌고 가야 했다.

해가 지기 전 우르꼬스Urcos 마을에 도착했다. 성당에 들어가 텐트를 쳐도 되냐고 물었지만 거절당했다. 경찰서에서도 거절했다. 경찰서에 있던 사람이 어딘가를 추천해줘 따라갔다. 그곳에 텐트를 쳤다. 집주인은 스페인어를 할 줄 몰랐다. 케추아 사람이고 케추아 언어를 한다. 이름을 수첩에 적어달라고 했으나 고개를 저었다. 글을 모르는 거 같다. 갑자기 펜을 내민 내 손이 미안해졌다. 착한 집주인은 차와 빵을 주며 친절히 대해줬다.

달콤한 잠에 피로를 녹이고 다음 날, 시내를 벗어나던 내 눈에 신기한 장면이 들어왔다. 화사한 옷을 입고 끝이 노란 천을 머리에 쓴 원주민들이 단체로 서 있었다. 알고 보니 사회복지 시스템 중 하나였다.

페루 정부는 이곳에 있는 원주민에게 두 달에 한 번 200솔(77달러)을 준다. 모두 카드를 갖고 있었다. 은행 직원이 ATM에서 일일이 그들의 카드를 받아 돈을 꺼내주고 있었다. 정부가 케추아 원주민들을 위해 복지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다는 게 신기해 보이기도 했고 감사하기도 했다.
정부가 지급하는 보조금을 받기 위해 기다리는 장면.
아침은 길에서 감자와 달걀로 해결했다. 시내를 벗어나니 서서히 오르막이 시작됐다. 해가 뉘엿할 때까지 한참을 달렸다. 꼼바빠따Combapata 마을에 도착해 경찰서에 갔으나 이번에도 텐트를 칠 수 없단다. 아무래도 페루에선 경찰서에 텐트 치는 게 안 되나 보다. 마을의 한 슈퍼 주인에게 허락을 받아 창고에 텐트를 쳤다.

다음 날 아침 슈퍼 주인이 차와 빵을 줬다. 상쾌한 기분으로 마을을 빠져나왔다. 저 멀리 분홍색의 바탕에 노란색으로 쓰여진 ‘Feliz Viaje’란 글이 보였다. ‘행복한 여행 되세요’란 뜻이다. 오늘도 행복한 자전거 페달 길이 펼쳐지겠지.4,300m 고지를 넘다 페달이 힘든 만큼 풍경이 멋지다. 길옆에는 더벅머리와 어벙한 표정의 라마들이 내게 인사한다. 오늘은 해발 4,000m까지 올라가야 한다. 너무 힘들어서 자전거 끌고 가다가 잠깐 쉬었다. 그런데 문득 망가진 스포크가 눈에 들어왔다. 다음 도시는 언제 나올지도 모르는 상황. 히치하이크를 해야 할까? 우선은 시험 삼아 계속 자전거를 타고 가기로 했다. 오르막에선 끌고, 내리막에선 타기를 반복했다.

도대체 마을이 있는 건가? 하고 걱정 될 때쯤, 온천탕을 발견했다. 5달러짜리 숙소에 짐을 풀고 주변을 둘러보기로 했다. 물이 땅 밑에서 솟아나는 것처럼 거품이 일어나고 있었다. 냄새도 굉장히 이상했다. 야외에 큰 온천탕이 있고, 건물 안에도 개인 온천탕이 있었다.

숨쉬기 힘든 해발 4,000m에서 온천탕에 들어가니 호흡이 더욱 힘들었다. 얼마 있지도 못하고 샤워하러 갔지만, 찬물만 나왔다. 더워 죽다가 추워 죽는 줄 알았다.

저녁에 혼자 스포크를 갈아 보려 했지만 장비가 없어서 결국 포기했다. 숙소가 너무 낡아서 치안이 걱정됐다. 밤중에 누가 침입하려고 마음만 먹으면 가능해 보였다. 자전거를 문에 기대어 놓고 잠자리에 들었다.
폐가에서 가장 무서운 밤을 보냈다.
다음 날 아침, 해발 4,000m부터 자전거를 타기 시작했다. 오늘은 굉장히 중요한 날이다. 해발 4,300m 고지까지 올라가야 하기 때문이다. 안데스 산맥에서 자전거를 타다 보면 길이 점점 멀어질수록 포장도로가 풍경에 잠겨 안 보인다. 멀리 보면 길이 없는 것 같지만, 가다 보면 결국은 길은 있다. 결국, 내 생애 자전거로 올라간 가장 높은 곳에 도달했다. 해냈다는 성취감에 두 손 번쩍 들고 표지판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다음 도시에서 고장 난 스포크를 고쳤다. 다시 페달을 밟았다. 마을을 벗어나는데 길에 모래들이 잔뜩 뿌려져 있었다. 지나가는 차들이 모래를 뿜었다. 그런데 곧 모래를 깐 이유를 알게 됐다. 자전거 바퀴에 녹은 아스팔트가 겹겹이 싸여 있었던 것. 바퀴가 아스팔트인지, 아스팔트가 바퀴인지 구별할 수 없을 정도다. 충격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또 다른 문제가 날 기다리고 있었다. 밤이 찾아오고 있었는데 아직 길 한복판이다. 게다가 천둥번개가 몰아치고 있다.

다음 도시까지는 15km나 떨어져 있다. 밤에 자전거를 타지 않는 나로서는 불가능한 거리다. 우여곡절 끝에 한 현지인의 빈집에서 텐트를 치고 잘 수 있게 되었다. 폐가에서 자는 공포체험 같았다. 쥐가 계속 이상한 소리를 내는 바람에 더 무서웠다.

하지만 결국, 밤은 태양 빛에 걷히기 마련. 오늘은 세상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호수에 가는 날이라 마음이 부풀었다. 오늘 가야 할 곳이 바로 푸노라는 해발 3,800m에 위치한 곳이다.
현지 배를 타고 티티카카 호수를 즐기는 사람들.
티티카카 호수위에 사는 사람 “티티카카. 세상에서 가장 높은 호수래, 거기서 수영하면 세상에서 가장 높은 물 위에 떠 있는 거야. 언젠간, 꼭 해볼 거야.” 영화 <후아유>에서 이나영의 대사다. 그래서 한국 사람들에겐 세계에서 제일 높은 호수로 알려졌다. 하지만 사실 세상에서 가장 높은 호수는 남미 안데스 산맥의 ‘오호스델살라도’라는 화산의 분화구 호수다. 해발 6,890m다. 그다음은 티베트에 있는 호수, 그다음은 중국, 다다음도 중국, 다다다음도 중국이다. 티티카카는 순위 밖이다.

비록 세상에서 가장 높은 호수는 아닐지라도 티티카카에는 특별한 게 있다. 바로 호수 위에 사람이 살고 있다는 것. 이 호수에는 우로스라는 44개의 갈대로 만들어진 인공 섬이 있는데 이곳에 사람이 살고 있다. 갈대가 무려 3m나 쌓여 있어 물에 가라앉을 걱정이 없다. 갈대가 오래되면 그 위에 새로운 갈대를 얹는다. 그렇게 우로스 인공섬을 유지할 수 있다.

물 위에서 살고 있다니, 굉장히 독특했다. 배를 타고 우로스 섬 중 한 곳에 도착했다. 원주민들이 노래를 부르며 환영해줬다. 집들의 원래 목적은 방어용이었다. 그래서 위협이 닥치면 움직일 수 있다. 갈대로 만든 현지인의 배를 타고 느긋하고 주변을 구경하다가 다른 큰 인공 섬에 도착했다. 그곳엔 조그마한 양식장도 있었다. 심지어 고양이와 개도 살고 있었다. 내가 알지 못하는 세상이 이렇게나 신기하다.

푸노에서 12달러짜리 호텔을 발견해서 2주간 머물렀었다. 개인 화장실도 있고 방에 햇볕도 잘 들었다. 청소도 자주 해줬다. 내 아메리카 여행 중 최고의 숙소였다. 블로그에 밀린 여행기 작성 중 문득 볼리비아 비자가 궁금해졌다. 도대체 이 볼리비아 비자의 유효기간은 뭐지? 혹시나 해서 검색을 했는데, 이런 세상에!

비자 받은 후 30일 내로 볼리비아에 들어가야 했다. 오늘은 비자 받은 지 32일째 되는 날. 급한 마음에 근처 볼리비아 대사관 찾아갔으나 하필 토요일이다. 비자를 10월 10일 받았고, 오늘이 11월 10일. 어쨌든 한 달로 우기면 가능하지 않을까 싶어서 급한 마음에 버스를 타고 국경선까지 서둘러 가기로 했다.

그렇게 얼떨결에 볼리비아 국경에 와버렸다. 만약에 일이 최악으로 꼬여서 볼리비아 입국 못 하면 어떻게 하지? 남미까지 와서 그 유명한 볼리비아에 있는 우유니 사막도 못 보고 가는 건가? 에이 설마, 그럴 리 있겠어?

글 사진 정효진 / webmaster@outdoornews.co.kr
Posted by 행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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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웃도어

[박윤정의 웰컴 투 뉴질랜드] 원색의 하늘.. 청정한 공기.. 인생 최고의 소풍이었다

〈끝〉 뉴질랜드 여행을 마치며세계일보 | 이귀전 | 입력 2017.01.13 14:03




트레킹은 느림의 미학이다. 서두르지 않고 맥키논 패스의 정상에 한걸음 한걸음 내딛으며 자연을 만끽할 수 있다.
미세먼지로 하늘이 뿌옇다. 가시거리는 턱없이 짧고, 보이는 어느 것도 원색을 찾기 힘들다. 마스크를 쓴 사람들은 가쁜 숨을 몰아쉰다. 마음마저 갑갑하다.

어느 사이엔가 미세먼지는 우리의 일상이 됐다. 일기예보에서 미세먼지 농도가 주요한 내용이 된 지 오래다. 여름이면 가끔 들리던 폭염주의보나 겨울에 찾아오던 한파주의보가 전부였던 사람들에게 날마다 미세먼지주의보가 발령되고 있다. 몽골 지역의 사막화로 인한 황사, 중국의 공장들이 뿜어내는 스모그까지 이제는 매순간 들이마시고 내뱉는 공기마저도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

뉴질랜드 오클랜드는 공원이 잘 조성돼 있어 평화롭고 한가롭게 운동을 즐기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서울이 하늘빛을 잃어갈 때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뉴질랜드에서 올려다 본 원색의 하늘이다. 지친 몸을 억지로 침대에서 일으키는 아침이면 밀퍼드사운드 트랙에서 나를 깨워주던 맑은 아침 공기가 떠오른다. 그렇게 미세먼지가 내 주위를 감쌀수록, 뉴질랜드는 더욱 또렷한 기억으로 다가온다. 한번 다녀오는 것만으로도 뉴질랜드는 자연이 선물한 지상낙원의 상징으로 내 마음에 자리 잡았다.

여행은 뉴질랜드 최대 도시인 오클랜드에서 시작됐다. 공원이 잘 조성돼 초록으로 둘러싸인 대도시는 평화롭고 한가로웠다. 정복자였던 유럽과 원주민인 마오리족, 그리고 최근 이주가 늘어난 아시아의 문화까지 서로 다양성을 존중하며 공존하고 있었다. 뉴질랜드의 아름다운 햇살과 따듯한 공기가 대결과 다툼보다 존중과 포용으로 이끄는 듯했다.

글래드 하우스 환영 표지판 아래서 밀퍼드 트레킹에 참여한 여행객들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남섬의 관문 퀸스타운은 여왕의 도시다운 품격과 우아함으로 가득했다. 짙푸른 숲으로 둘러싸인 와카티푸 호수는 투명하고 깊은 품에 하늘을 모두 담을 듯했다. 호수와 어우러진 작은 도시는 레포츠와 트레킹을 즐기기 위해 전 세계에서 모여든 젊은이들로 가득했다. 천혜의 자연을 이용한 레포츠의 천국이 됐지만 그 많은 방문객 속에서도 한가로운 호반도시의 아름다움을 잃지 않았다.
밀퍼드 트레킹에 참가한 여행객들이 습지 지대를 걸어가고 있다.
그리고 시작된 밀퍼드사운드 트랙은 신들의 정원으로 초대받은 인생 최대의 소풍으로 기억될 것이다. 테아나우 호수를 건너 도착한 피오르랜드 국립공원은 사람 손길이 닿지 않은 태고의 자연이 그대로 보존돼 있었다. 습기를 머금은 신선한 공기는 상쾌한 아침을 맞게 해줬고, 몸과 마음을 언제나 가볍게 해 주었다. 최고점인 매키넌 패스를 넘으며 바라본 밀퍼드 트랙의 전경은 반지의 제왕을 비롯한 판타지 영화 속 주인공으로 만들어 주었다. 초록의 이끼와 짙은 숲이 어우러진 길은 당장에라도 호빗족이나 엘프들이 뛰쳐나올 것 같았다. 
밀퍼드 트레킹에 만난 푸른 이끼를 잔뜩 둘러쓴 원시의 숲길.
특히 여정 중반에 내린 비는 길 양측 절벽에 실타래를 걸어 놓은 것 같은 폭포들을 만들어냈다. 밀퍼드사운드 트랙 폭포들의 절정은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높은 서덜랜드 폭포였다. 전날의 강수량이 더해져 580m의 하늘에서 쏟아진 거대한 물줄기는 장관이었다. 세상을 천둥 같은 소리로 가득 채운 폭포는 용이 하늘에 오르듯 절벽을 굽이치며 하늘로 뻗어 있었다.
밀퍼드 트레킹에서 만날 수 있는 짙은 초록의 삼림과 대자연이 만들어 낸 환상적인 장관은 여행객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태고의 밀림과 수많은 폭포의 비경으로 가득했던 53㎞ 트레킹을 마치고 도착한 밀퍼드사운드는 수만년 전 빙하의 힘으로 만들어낸 자연의 경이로움을 선사했다. 바다에서 1000m 위로 솟아 오른 수십 개의 거대한 봉우리가 내륙으로 침입한 바다를 굽어본다. 하얀 빙하를 머리에 이고 선 절벽이 구름과 어우러진 모습은 다시 코발트 빛 바다에 그대로 투영된다. 수많은 폭포들은 하얀 물보라를 일으키며 절벽 위를 달음박질친다.

지구를 남으로 가로지르고 정반대의 계절을 날아 온 뉴질랜드는 자연이 인류에게 남긴 마지막 낙원이었다. 도시에서 나고 자라고 도시를 생활 터전으로 삼는 나에게 뉴질랜드 여행은 자연이 주는 선물이었다. 뉴질랜드 국기를 장식하는 네 개의 별, 남십자성이 북반구의 여행객을 매일 밤 축복해 주는 듯했다. 변화무쌍하다는 밀퍼드사운드 트랙도 화창한 날씨의 연속이었으며 밤사이 내린 비는 폭포들의 존재감을 더욱 돋보이게 해 주었다.

먹거리에 대한 즐거움이 역시 뉴질랜드 여행에서 빠질 수 없다. 특히 스테이크는 목축업이 발달한 뉴질랜드에서 가장 흔한 요리다. 질 좋은 쇠고기나 양고기를 저렴한 가격에 맛볼 수 있다. 청정바다를 자랑하는 섬나라인 만큼 신선한 해산물 요리도 유명하다. 그 가운에 그린홍합요리는 뉴질랜드 화이트 와인과 어우러져 그 풍미를 더한다. 쇠고기나 양고기도 저렴하고 질 좋은 뉴질랜드의 레드 와인을 곁들이면 더욱 맛있다.

물줄기의 흐름이 완만해 이뤄진 백사장과 에메랄드빛 강줄기가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을 만든다.
레포츠와 트레킹의 천국이라는 뉴질랜드에는 “꼭 해봐야 할 것”들 역시 많다. 그중 뉴질랜드에서 탄생했다는 번지점프와 아름다운 하늘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스카이다이빙을 경험하지 못한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남섬의 밀퍼드사운드 트랙 이외에도 뉴질랜드에는 다양한 트레킹 코스가 있다. 번지점프와 함께 다음 방문을 기약해 본다. 
트레킹은 느림의 미학이다. 서두르지 않고 맥키논 패스의 정상에 한걸음 한걸음 내딛으며 자연을 만끽할 수 있다.
바쁜 현대생활에서는 모든 것이 급하고 빠르다. 촌각을 다투어야 하는 중요하지 않은 것은 스쳐 지나가야 한다. 그렇지만 트레킹은 느림의 미학이다. 그 어원처럼 ‘서둘지 않고 느긋하게 소달구지를 타고 하는 여행’이다. 여행이 끝나면 다시 바쁜 일정으로 돌아가겠지만 우리네 인생이 조금은 느리고 여유롭게 흘러가기를 기대해 본다.

여행가·민트투어 대표

Posted by 행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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