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믿음에 있는가

                      시험하고 확증하라


                              성경을 고치려는 신자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태복음 5:18).


   기독교의 생명을 무엇인가? 성경의 완전함이다. 성경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인가? 말씀은 곧 하나님이라 하셨다. 그런데 만약 성경을 고치려는 사람들이 있다면 하나님을 고치겠다는 사람들이 아닌가. 그런데도 오늘날 한국 기독교의 현실은 성경을 고치려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고 하면 지나치다 하겠는가. 필자는 오늘 이 문제를 생각하면서 한국의 기독교가 회개하기를 바란다.

   필자가 만나보는 기독교인들에게 필자는 다양한 질문으로 교제를 나누고 있다. 그 중에는 성경에 없는 교회의 여러 가지 형식과 가르침에 대해서 질문하면 그들은 성경에 없더라도 교회의전통을 중시하고 따라가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이 얼마나 무모한 말인가.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을 반대했던 유대인들과 그의 지도자들은 구약에 기록된 예언의 성취로 오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 말았다. 그들은 다양한 말로 주님을 대적했는데 그 중에는  자기들의 전통, 즉 장로의 유전을 지키지 않는다고 비방하기도 하였다. 물론 그것은 성경에는 없는 것들이었다. 그들은 구약성경에 새로운 자기들의 전통을 접목시키고 있었다. 이것은 얼마나 잘못된 일인가. 성경을 무시하는 일이며 고치려는 처사인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의 현실도 동일하다. 필자와 함께 성경이 말하지 않는 기독교 전통들을 생각하면서 진정한 믿음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자.

   첫째로 교회 건물을 성전이라고 부르는 문제이다. 성경 어떤 말씀을 인용하는지는 몰라도 성경은 교회 건물을 성전이라고 부른 적이 없다. 성경에 보이는 성전은 오직 예루살렘 성전만 있었을 뿐이다. 오히려 성경은 참된 성전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고린도전서 3장 16절에 보면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라고 하셨고, 6장 19절에 보면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진정한 성전은 신자들의 몸이다. 왜냐하면 죄인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어 거룩한 신분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죄인이 아니라 의인이다. 그러므로 의인의 몸에 성령님께서 거하시게 된 것이다.

   성령님은 누구신가.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이 아니신가. 그러므로 구원받은 성도들의 몸은 성전이다. 필자는 어렸을 때 건물을 교회라고 배웠는데 목사님에게 물어보니 교회는 유형교회와 무형교회가 있다 하였거니와 오직 교회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모인 무리일 뿐이다.

   절대로 건물은 교회도 아니요 성전도 아니다. 그러므로 성전을 짓는다든지 성전 봉헌식을 한다는 말들은 소경의 넋두리요 성경을 고치려는 처사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둘째로, 교회 구조를 성직자와 평신도로 나누는 문제이다. 성경 어떤 말씀을 근거로 성직자와 평신도로 나누는가? 성경은 오직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이 모여서 각양 지체로 한 몸을 이루어 그 지체의 기능에 따라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생명체가 교회임을 가르치고 있다. 교회 지도자가 성직자가 되어서 교회를 대표하고 평신도와 하나님 사이의 교량 역할을 하는 교리는 어떤 말씀에 근거하고 있는가? 마르틴 루터는 종교 개혁 당시 만인은(구원받은 자는) 다 같은 제사장이라고 외치지 아니하였던가. 성경 베드로전서 2장 5절과 9절에 단정코 말씀하셨다. 신부가 하나님과 사람의 중간 역할을 할 수 없다고 종교개혁을 하였는데 오늘날은 신부 대신 목사로 명칭만 바뀌었지 아니한가. 성경은 여기에 대해서 분명하게 증거하고 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디모데전서 2:5).

   예수 그리스도 외에 누가 중보일 수 있는가. 분명히 말하거니와 성직자와 평신도로 나누는 제도는 성경에 근거하지 아니한 잘못된 전통일 뿐이다.


   셋째로, 교파에 관한 문제이다. 이 문제는 한국의 기독교를 위해서 누군가는 외쳐야 할 중대한 문제라고 생각된다. 도대체 성경 어디에 교파를 나누어서 당을 짓고, 담을 쌓고, 경계선을 그리고, 명칭을 붙이고, 대표를 뽑고, 조직을 만들고, 조직을 운영할 헌법을 만들라고 가르쳤는가? 헌법이 성경을 대신하고, 대표가 예수님을 대신하며, 조직이 성령을 대신한다면 과장된 표현일까?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조직을 통하여 대신하면 하나님의 할 일은 무엇인가?

   1900여 년 전 하나님을 섬겼던 신실한 종 바울은 교파 문제에 관해서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다.

   "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 편으로 너희에게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 이는 다름 아니라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는 것이니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뇨"(고린도전서 1:11~13).

   바울은 당파를 짓는 것은 육신적인 것이라고 분명하게 경고하고 있다. 그것은 유아적 발상이며 시기와 질투의 소산이며 육신에 속한 사람들의 육신적인 정욕을 만족시키려는 발버둥이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고린도전서 3:1,3).

   말씀이 이와 같이 분명하게 당파에 대한 경고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종파주의를 주장하고, 종파에 속하고자 하지 아니하는 사람들을 핍박하는 이 사람들은 성경을 능멸하는 사람들이 아닌가. 분명히 말하거니와 교파는 성경에 없는 것이며 교파주의를 지향하는 한국의 기독교는 성경을 뜯어고치려는 사람들이라고 비판을 받아 마땅하다. 고린도 교회와 같이 오늘날도 사람을 중심으로 하여 교파로 모이는 것은 정확하게 닮은 모습이다.

   넷째로 헌금에 관한 문제이다. 기독교와 그의 지도자들은 대답해 보라. 오늘날 명단을 공개하는 헌금은 성경 어떤 말씀을 근거로 하고 있는가? 수많은 부작용을 일으켜 교회에 대해서 부정적인 사람들만 양산하는 헌금제도는 반드시 개혁되어야 한다. 시중에 돌고 있는 여론은 "돈 없으면 예수도 못 믿는다. 예배당에 나가도 돈 없으면 행세하지 못한다. 예수도 돈 있는 사람만 좋아한다" 하지 아니한가?

   헌금의 종류는 왜 그렇게 많은가? 그냥 헌금하면 되지 않는가?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생각하고 주님이 주신 물질의 분량대로, 믿음의 분량대로 헌금하면 되지 아니한가? 영원한 멸망의 지옥에서 건져주신 놀라운 은혜가 있는데 이름 쓰면 헌금하고 쓰지 아니하면 헌금하지 않는 믿음의 수준이겠는가? 필자가 속한 교회를 40여 년간 지켜보는데 한 번도 기명헌금을 하거나 강요하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예배당도 짓고 선교도 하고 교회도 잘 운영되고 불편 없이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 초대교회는 구제헌금을 할 때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였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희 아버지가 갚으시리라"(마태복음 6:1~4).

   이 말씀은 두 가지를 이야기하고 있다. 하나님을 섬김에 있어서 사람에게 보이려는 외식을 경계하고 있고, 하나님의 보심을 기억하여 은밀하게 할 것을 말하고 있다. 오늘날 한국의 기독교가 엄청난 헌금으로 인하여 많은 발전을 하며 거대한 예배당을 짓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지만 하나님이 거기 계시는지 필자는 확신할 수 없다. 아마 하나님은 산동네에 있는 가난한 자들과, 그들을 복음으로만 돌아보는 허름한 예배당의 허름한 차림의 주의 종들과 함께 할 것이다.


   다섯째로 복음의 변질이다. 성경이 말하는 정확한 복음을 지금 언급하고 싶다. 지옥에 대한 인식이 신자들에게 있어야 한다. 한국교회의 변질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대부분의 신자들이 지옥을 분명하게 깨닫지 못하고 있다. 막연하게 믿고 있을 뿐이다.

   지옥에 대한 깨달음이 없으면 하나님을 믿어야 할 필요성을 깨닫지 못한다. 그러기 때문에 기복신앙이 한국 기독교에 파고드는 것이다. 분명히 말하거니와 기복신앙은 한국 토속신앙의 산물이지 기독교의 본질이 아니다. 기복신앙이 기독교를 변질시키고 타락시켜도 누구 하나 외치는 사람을 보기가 힘들다. 기복신앙은 현실에 바탕을 둔 것이다. 정성껏 예수 믿으면 복 받고 잘된다고 한다. 이것은 성황당에 정성껏 빌면 복 받고 잘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지옥이 빠진 기독교는 토속신앙의 또 다른 모습일 뿐이다.

   지옥에 대한 깨달음이 분명하지 않으니 속죄에 대한 감격도 없다. 지옥의 절망을 뼈저리게 깨닫지 못했는데 지옥에서 건져주는 핵심 진리인 속죄에 대한 감사가 있을 리 있는가? 이것이 오늘날 기독교 신자의 가장 핵심적인 문제의 분석이다. 속죄를 그냥 교리로만 알고 있는 것이다.

   강단에서 지옥에 대한 끔찍한 사실을 많은 시간 사용하여 경고하여야 한다. 필자가 생각할 때는 모든 설교시간에 지옥을 언급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한번 지옥에 가면 영원히 나올 수 없다. 1200도가 넘는 펄펄 끓는 불 속에서 미친 듯이 뛰면서 영원히 고통을 당해야 하는데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지 아니한가. 지옥에 간 가룟 유다에 대해서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나을 뻔했다고 주님이 친히 말씀하지 아니하였던가. 이토록 무섭고 끔찍한 지옥을 오늘의 기독교 지도자들이 경고하지도 않고 지옥에 대한 대책을 풀어주지도 못하고 있다. 이것은 심각한 한국 기독교의 고질병이다. 이 고질병으로 인하여 영문도 모르고 지옥으로 떨어지는 수천만의 기독교인들을 생각할 때에 눈물이 있다.

   구원의 확신에 대해서도 말하고 싶다. 성경은 분명하게 구원의 확신을 가지게 된 경험을 말하고 있다. 그것은 능력 체험도 아니고 감정적인 어떤 경험도 아니고 환상이나 꿈이나 기타 기적을 경험하는 것도 아니다. 멸망의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불쌍한 자신의 처지를 깨닫고 고통하는 죄인이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통하여 죄 용서함 받고 천국에 갈 수 있는 확신을 갖게 되는 날이다. 존 뉴턴도 우리 찬송가 405장에서 이 놀라운 날을 간증하고 있지 아니한가?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골로새서 1:6).

   얼마나 분명한가. 여러분에게 이런 날이 있는가? 어떤 집사님은 구원받았는가 물으니 자기 교회 목사님이 자기 교회 교인은 다 선택받았을 뿐만 아니라 또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하였는데 다 믿음으로 교회에 나오니 전체로 구원받은 것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인가. 예정론에 대한 잘못된 인식은 얼마나 많은 영혼들을 지옥으로 내몰고 있는가. 이와 같은 경우는 극단적이지만 실제로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이 자기는 천국에 가겠거니 하는 막연한 믿음으로 예배당에 출입하고 있다. 이것은 오늘날 기독교의 어떠한 변질보다도 무서운 변질이다. 복음이 잘못되면 하나님과 아무 관계가 없을 뿐만 아니라 천국과도 관계가 없다. 복음이 잘못되면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근본적인 이유가 변질되는 것이다. 성경 핵심이 복음이요 성경 중심이 복음이며 결론이 복음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말씀을 떠난 기독교를 어찌 다 말하겠는가. 이외에도 필자는 한국의 기독교를 향하여 할 말이 많다. 성경을 고쳐가는 저들은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제 여러분에게 말하고 싶다. 진정한 진리는 성경뿐이다. 성경대로 믿고 성경대로 죄 용서받고 성경대로 구원받아 성경이 말하는 천국에서 함께 살 수 있게 되기를 바랄 뿐이다. 구원은 개인적이고 단회적이고 실제적이다. 교파를 초월해서 구원받은 사람은 누구나 천국시민이요 하나님의 백성이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는 다 같은 천국시민이요 하나님의 백성이다. 여러분 개인의 구원 문제에 대해 점검하는 기회가 되었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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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01 서론


   요절: 사도행전 1장 8절, 디모데후서 3장 16,17절

   요점:

   1.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성경의 모든 부분은 중요합니다.

   2. 사도행전은  우리에게 성령님의 사역에 대해 말해줍니다.

   3.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시므로 매일 우리를 도우실 수 있습니다.


  신약성경


   신약성경에는 여덟명의 서로 다른 사람들에 의해 씌어진 27권의 책들이 있습니다.그 중 다섯 권은 주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와(복음서) 초대교회에(사도행전)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21권은 교회 또는 개인에게 씌어진 편지 또는 서신입니다. 마지막권은 장차 될 일들을 말해주는 계시의 책입니다.

   사도행전은 교회의 시작과 성장에 대해 말해주고 있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책입니다. 복음서에서는 그리스도의 생애와 죽음에 관해(막 1:1), 또한 주님이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도처에 가서 복음을 전파하도록 말씀하신 것들을 보게됩니다(마 28:18-20). 바울과 다른 사람들의 편지는 세계 여러 지역에 있는 교회들에게 보내진 것입니다(고전 1:1, 2). 사도행전은 제자들이 복음을 확장하고 교회를 시작함에 있어서 어떻게 주님께 순종했는가를 보여 줍니다.


 사도행전


  이 책의 가장 오래된 이름은 단순히 "행전"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이 책을 사도행전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바울만이 두드러지고 다른 사도들은 다만 간략하게 언급되고 있습니다. 사도들 안에서 그리고 사도들을 통해서 행하시는 실제적인 인격체는 성령님으로 사도행전에서 70번 정도 언급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성령행전은 이 책의 훌륭한 또 하나의 이름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께서 성령님을 보내실 것이라고 약속하셨고(1:8) 이 약속은 몇 날이 못 되어 성취되었습니다(2:4). 베드로가 대제사장들 앞에 섰을 때 성령이 충만하였고(4:8), 스데반도 유대인들이 그를 죽이려 했을 때(7:55) 성령이 충만했습니다. 당신은 이 책이 성령의 행전임을 말해주는 더 많은 구절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도행전의 기록자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딤후 3:16).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벧후1:21). 이 구절들과 수많은 다른 구절들은 우리에게 성경을 기록한 여러 사람들에게 그 기록 내용을 말씀하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심을 보여줍니다. 그 기록자들에 관한 무엇인가를 배운다는 것은 여전히 흥미롭습니다.


   누가는 의사였고(골 4:14), 바울과 함께 몇몇 긴 여행에 동행했습니다. 누가는 이 여행에 관해서 말할때, 자신이 바울과 함께 무엇을 했거나 어느 곳을 갔을 때에는 "우리"라는 단어를 사용하였지만 다른 부분에서는 자연스럽게 "그", "그들"이 이것저것을 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16:10, 20:6, 27:1) .그는 바울이 복음을 위하여 죽음을 당하기 바로 전인 생애의 마지막 순간에도 바울과 함께 있었습니다.


사도행전의 기록이유


   누가는 데오빌로라 불리우는 한 고관에게 보내는 편지로써 누가복음을 기록했습니다. 그 누가복음에는 예수님의 행하심과 가르치심을 시작하신 것에 관한 이야기를 적고 있습니다(행 1:1). 당신은 복음에 관한 이야기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함께 끝나기 때문에 더 이상 말할 것이 없다고 생각할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누가는 예수님께서 죽음 이후에도 계속해서 행하시고 가르치신다는 것에 대해  데오빌로에게 말해주기 위해서 이 책을 기록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위해서 죽으셨을 뿐만 아니라 다시 살아나셨고 그 후에 하늘로 올라가셨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계신 주님은 여전히 제자들과 함께 일하고 계십니다. 마가복음 16장 20절을 보십시오. "주님께서 함께 역사하사"


   우리는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그리스도의 사역을 말할 때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은 주님께서 오늘날에는 하늘에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고, 이끄시고, 인도하시며, 우리와 함께 일하시는 영광스러운 "미완성의 사역"입니다. 누가는 자신의 두번째 책에서 주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신 후 그리스도의 이러한 사역에 관해서 말해 주려했습니다(히 7:25).


사도행전의 내용 


   우리는 이 사도행전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이 땅에 계속 남아있는 주님의 사람들을 통한 주님의 사역에 대해 말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1:8). 이 구절은 신구약 성경의 핵심 구절 중 하나입니다.

   예루살렘은 유대 땅에 위치한 유대인들의 거룩한 도시였습니다. 그 옆의 지방은 사마리아로, 유대 사람들과 사마리아 사람들은 별로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먼저는 현재 그들이 머물러 있는 곳에서(예루살렘), 그 다음에 그들의 고향지역에서(유대) 증인이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후에는 그들을 좋아하지 않을지라도 주위의 이웃들에게(사마리아) 가야했으며, 그후 그들은 전 세계로 흩어져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에 대해서 전해야 했습니다.마가복음 16장 15, 16절 그리고 누가복음 24장 46-48절을 보십시오. 진정으로 구원받았다면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이 어디에 있든 주님을 증거하기 바라며, 만일 주님께서 당신을 부르신다면 선교사로서 먼 지역이라도 기꺼이 헌신하여 가기를 기대하십니다.


사도행전의 등장인물


사도행전의 주요인물은 베드로(1-12장)와 바울(13-28장)이지만, 이 책에는 대략 80여명의 서로 다른 사람들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중 몇사람은 신약 성경에서 다섯 권의 책을 기록한 요한(3:1), 바울과 함께 이곳저곳을 여행한 젊은 청년 디모데(16:1-3) 등과 같은 매우 중요한 사람들이었으며 그 밖의 다른 사람들은 잘 알려진 사람들은 아니었지만 그들의 이름도 기록되어 있습니다(예를 들면 20:4). 이들 모두는 복음을 전파하는 위대한 사역의 일익을 감당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하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행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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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 경  개 요


                                                   제11과 바울 서신(2)


                                                                 에베소서


   본 서신서의 1-3장까지는 참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 부여해 주신 훌륭한 신분에 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에 따르면 참 성도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영접하시고 그리스도께 은총을 베푸시듯, 성도를 영접해 주시고 은총을 베풀어 주십니다. 또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세상에 있는 물질적인 부요를 축복해 주시는 대신,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축복을 내려 주셨습니다. 즉,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영접을 받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며, 성령께서 주시는 은사를 받은 것입니다.

   2-3장을 통해서 바울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의 구별없이 모든 성도는 교회의 지체가 되며, 그리스도께서는 교회의 모퉁이 돌이 되신다고 전파하고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이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서 정사(政事)와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신다고 기록했습니다.

   마지막 4-6장에서는 성도들에게 이처럼 훌륭한 신분에 합당하게 생활하라고 권면했습니다. 즉, 서로 화목할 것과 교회를 세우는 일에 그리스도께서 주신 은사를 활용할 것과 범사에 하나님의 교훈을 따르는 자들이 될 것을 가르쳤습니다.


                                                                 빌립보서


   빌립보서는 에베소서와 마찬가지로 로마 옥 중에서 씌어진 바울 서신입니다. 그러나 이 서신들 어디를 보아도 바울이 옥 중에 있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바울은 크게 기뻐하고 있어, 그리스도인의 즐거움은 세상 형편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달려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본서에서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이 충성스러운 에바브라를 통해서 보내 준 연보에 대해 대단히 고맙다고 표했습니다. 또한 바울은 자신이 투옥됨으로 말미암아 복음이 널리 전파되는 계기가 되었음을 기뻐하면서, 복음의 확장을 위해서는 유죄판결을 받을 뿐 아니라 죽는 것도 유익하다고까지 고백했습니다.

   이어 바울은 그리스도를 본받아 연합하고 겸손함으로 자신을 진정 기쁘게 해달라고 성도들을 권고하는 반면, 거짓 교사들에 대해 성도들에게 경고하였습니다. 또한 어떻게 믿음의 경주를 해야 할것을 경고하고, 자신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세상의 명예와 지식을 해로 여긴다고 고백했습니다. 이 위대한 사도는 마지막으로 연합할 것과 기뻐할 것, 자제할 것과 믿음으로 기도할 것, 그리고 언행심사가 순결할 것을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그는 빌립보 성도들이 보낸 연보에 대해 감사하면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고 확신했습니다.


                                                              골로새서


   당시 골로새 교회는 온갖 철학과 유전과 예식과 율법에 얽매여 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골로새 성도들이 이러한 것에 집착하는 대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화로우심을 간절히 상고하기를 갈망했습니다. 이에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창조주이시며, 만유를 붙들고 계시는 분이시며, 하나님의 형상이신 동시에 몸된 교회의 머리가 되신다고 강조했습니다. 또한 바울은 주님의 탁월하신 인격과 완전하신 사역에 대해서도 그들이 깨닫기를 바랬습니다. 이어 그들이 주님을 통하여 온전해 졌으므로 다시 인간적인 종교를 멘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오히려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사랑함으로, 주님과 함께 살리심을 받은 자 답게 살아가야 옳다고 하면서 마지막으로 실제적인 생활에 대해 가르치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전서


   본서는 바울 서신 중 최초에 기록된 것으로 보이며, 각 장마다 여러 면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각 장별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1장 : 그리스도의 오심은 회심한 모든 자들에게 복스러운 소망이다.

   2장 :  주님께서 오시면 주님을 위해 충성스럽게 봉사한 대로 상급을 받아 기뻐하게 될 것이다.

   3장 :  주님께서 재림하신다는 사실에 비추어, 성도들은 서로 사랑하며 거룩하게 생활해야 한다.

   4장 :  주님께서 재림하시면 죽었던 성도들이 살아나고, 살아 있는 성도들도 변화되어 주님을 모시고 영원히 살게 되는데, 이는 성도들에게 큰 위로가 된다.

   5장 :  그리스도의 재림은 불신 세상에 대한 주의 심판 날의 시작으로, 그들은 환난과 진노를 당하게 될 것이다. 이처럼 임박한 재림과 환난을 생각하고 성도들은 주님을 고대하며 근신하여 생활 해야 한다.


                                                         데살로니가 후서


   데살로니가 전서에서 주의 날에는 큰 환난이 있으리라고 바울이 말했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당시 성도들 중에 맹렬한 박해를 당하고 있던 이들이 이미 주의 날이 시작된 것이 아닌가 하고 염려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에 대하여 아직은 그 때가 아니라는 것을 지적해 주기 위하여 이 서신을 쓰게 되었습니다. 그는 주의 날이 이르기 전에 다음 세 가지 징조가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1. 그리스도께서 성도들을 먼저 데려 가실 것입니다.

   2. 세계적으로 믿음에서 떠나 배도하는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3. "죄의 사람" 곧 적그리스도가 나타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신다는 것은 모든 성도에게 위로가 되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기다린다는 구실로 생업을 중단해서는 안되며, 오히려 조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며 선을 행하고 낙심치 말아야 할 것입니다.


                                                              디모데 전서


   디모데 전서에는 주로 교회 내에서의 질서에 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곧 1장에서는 바른 교훈을 지켜야 할 필요성을 강조했고,

   2장에서는 기도의 문제와 아울러 여자들이 단정하게 입고 교회내의 공적 활동을 삼가할 것을 다루었고,

   3장에서는 장로들과 집사들의 자격에 관해 자세히 기록했고,

   4-6장에서는 바울이 디모데에게, 맡은 바 직분에 충성할 것과 장로들과 과부들을 우대할 것과 종된 자들이 그 의무를 다해야 할 것 들에 관해 교훈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다시금 디모데에게 맡겨진 직무에 충성하라고 권면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기원하고 있습니다.


                                                              디모데 후서


   디모데 후서는 바울이 로마 옥 중에 있으면서 최후로 기록한 책입니다. 당시 바울이 그의 주위를 바라보았을 때, 교회가 진리를 떠남으로 인하여 더욱 어려움을 겪고 있음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활 하에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자기의 임무를 완수함에 있어서 담대하고 좌절하지 말아야 한다고 권면했습니다. 흑암이 겹겹이 디모데를 에워싸고 있을 때, 바울은 디모데에게 그럴수록 교사로서 다른 사람들을 잘 가르쳐야 하고, 좋은 군사로서 고난을 견뎌야만 하고, 모든 불의에서 떠나야 한다고 권고했던 것입니다. 또한 바울은 장차 교리적으로나 실생활에 있어서 극악해지는 말세가 오리라고 예언하면서, 그 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가장 소중히 여겨야 한다고 권면했습니다. 끝으로 바울은 디모데에게 자신의 직무를 충성스럽게 이행하여 말씀을 전파하고 근신하며 인내함으로써 자신의 사역에 대해 인정을 받으라고 엄히 명하였습니다.


                                                                 디도서


   바울은 1차 투옥과 2차 투옥 사이에, 디도를 그레데에 머물게 하여 그 곳에 교회 질서가 확립되고 보존되어 가는가를 살피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디도서를 통하여 바울은 교회 질서를 위한 몇 가지 요건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1. 감독들 즉 장로들은 기본적인 자격을 갖춰야 한다.

   2. 악한 교사들은 더 이상 가르치지 못하게 해야 한다.

   3. 바른 교훈을 힘써 가르쳐 순종하게 해야 한다.

   4. 성도들은 정사와 권세잡은 자들에게 순종해야 하며, 공리 공론에 빠져 있지 말고 오히려 선한 일에 힘써야 한다.


                                                                 빌레몬서


   빌레몬서에서 우리는 빌레몬과 오네시모와 바울의 세 주인공을 볼 수 있습니다. 빌레몬은 골로새에 살던 성도로서 바울의 신실한 친구였으며, 주님을 위해 충성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네시모는 빌레몬의 종으로서 로마로 도망쳤다가 옥 중에서 바울을 만나 구원을 받게 된 사람이었습니다. 이 편지에서 바울은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이제 종으로 대하지 말고 주 안에 있는 형제로 영접해 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그리고 오네시모가 빌레몬에게 끼친 손해에 대해서는 "이것을 내게로 회계하라"고 제의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담당해 주심으로, 우리의 죄가 주님께로 회계된 사실을 상징해 주고 있습니다.

Posted by 행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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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교란 우리 영혼을 끌어 단순히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영향력에 불과합니다(Religion is a drag).

 

   오늘 이 시간 우리는 종교에 관한 문제를 직시해 보고자 합니다. 당신을 포함한 많은 사람에게 있어 종교적인 삶을 산다는 것은 사실상 시간 낭비에 지나지 않습니다. 종교에 관한한 당신에게 중요한 것은 참된 기쁨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종교적인 사람이 되고자 하는 노력은 기쁨을 안겨다 주기는커녕 자기 학대에 가까울 정도의 전혀 불필요한 고생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날 이 세상에는 종교적인 사람들이 수없이 많이 있습니다. 다행인 것은, 참 기쁨을 주는 생명을 향하여 더 현실적이고 실현 가능한 방법으로 올바르게 접근하는 사람도 많다는 것입니다.

 

   마약중독자는 상습적으로 마약을 투약하면서도 "나중에 치료만 잘 받으면 모든 것이 다시 좋아질 거야."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러는 동안에 마약은 마치 암과 같이 전신에 퍼져 몸을 망가뜨리고 말 것입니다.

 

   알코올중독자는 술을 끊지 못하고 "이 몇 잔을 마시면 한동안은 해방감을 느낄 거야".라고 말합니다. 과연 몇 잔 더 마신다고 해서 그렇게 되겠습니까? 오히려 그의 인격은 해방은 고사하고 보잘것없이 하찮은 인격으로 곤두박질치게 될 것입니다. 그의 가정은 파탄에 이를 것이며 마지막으로 가지고 있던 얼마 되지 않는 돈마저도 탕진할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섹스야말로 인간에게 유일하게 참 만족을 가져다준다."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자신의 심장이 욕망으로 타오르는 동안, 자신의 연인을 값싼 성적도구로 전락시키기도 하고, 심지어 결혼생활을 파괴하기도 합니다. 그들은 성적 만족을 위해 자신을 끊임없이 혹사하지만, 결코 만족함을 얻지 못한 채 계속적으로 더 많은 것을 추구합니다.

 

   심지어는 종교적인 모습에 가장 대표적으로 열심을 내는 유대인들 가운데에도 "나는 종교적 열심을 내고 있지만 내게는 여전히 평강이 없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종교적으로 매우 헌신 되어 있는 로마 카톨릭 신부 가운데서도 "나는 평생 종교적인 열심을 보이며 살아왔지만 여전히 죽음이 두렵다."라고 말한 사람이 있습니다. 종교적 열심을 내는 개신교 성도들 가운데도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이 모든 종교적 열심이 너무나도 헛된 것처럼 느껴진다."라고 말하는 것을 쉽게 들을 수 있습니다.

 

   종교란 영혼을 끌고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힘을 지닌 단순한 영향력에 불과합니다. 실제로 그러합니다. 종교적 열심만 가지고 교회를 다니는 것은 지루하고 따분하기 그지없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실제로 존재하지 않으신다면, 성경을 읽는 것도 기도를 하는 것도 당신의 일상 가운데 결코 중요한 일이 될 수 없습니다. 그것들은 단지 습관적으로 해야 하는 소소한 허드렛일 취급을 받게 될 것입니다. 결국 이 경우, 종교란 당신이 원하는 것을 위해 어떻게 '교회를 이용'할 것인가 하는 수단에 불과합니다. 많은 사람이 이런 사실을 잘 알고 교회에서 자신들이 기대한 결과를 얻어내고자 종교적 열심으로 여러 수단을 부지런히 동원해 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오늘날까지 늘 실패만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종교적 열심을 갖고 부지런히 명성을 추구하다가, 결국에는 "내가 도대체 무엇을 위하여 이런 일을 하고 있나?" 되묻기도 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목적을 위하여 엄청나게 많은 재산을 쏟아 부으면서까지 종교적인 열심을 내다가 극심한 압박감 때문에결국 좌절하기도 합니다. 오직 하나님께서만이 우리의 인생행로에서 참 만족을 주실 수 있으십니다. 당신은 당신이 만들어 가는 인생행로가 어떠한 모양으로 나타나기를 원하십니까? 이것이 결코 형식적이고 알맹이 없는 종교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종교란 하나님을 팔아서 종교가 원하는 곳으로 영혼을 끌고 가고 종교가 원하는 방향으로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힘을 지닌 단순한 영향력에 불과합니다. 그것은 시간 낭비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의 시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시간마저 낭비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에게 무언가 중요한 것을 주시길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주시고자 하는 것은 위조된 거짓 인생이 아니라 본래 당신에게 주어진 참 인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성경에 나오는 육백여 가지의 율법을 믿기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친히 성육신하시어 사람으로 오신 오직 한 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살아서 역사하고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당신이 알고 그분을 개인의 구주로 믿어 영접하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벌레 같은 인생으로부터 당신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 위에서 피흘려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심령과 당신의 삶 가운데로 들어가셔서 당신 안에 존재하는 모든 옛것을 비워 버리고 완전히 새롭게 당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충만하게 채우기를 원하십니다. 당신이 지금까지 모든 종교적 열심을 동원하고 온갖 노력을 기울여 얻고자 했지만 그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얻을 수 없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영으로 충만해 있지 않은 한 당신은 당신이 진정으로 얻기 원하는 참 기쁨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마음 가운데 살아서 역사하시며 당신의 삶을 주관하고 계시는 하나님과의 개인적이고 친밀한 사귐을 위해 창조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죄가 당신을 예수님께로부터 분리하였습니다. 당신이 진정으로 참 기쁨을 얻기 원한다면, 예수님께로 향하여 나아가지 않던 그 길에서 지금 즉시 멈춰 서십시오. 지금까지 해오던 그 모든 일을 예수님께 다 넘겨드리고 맡겨 버리십시오. 그리고 예수님께 말씀드리십시오. "예수님, 저는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저를 불쌍히 여기시고 제게 오셔서 저를 도와주세요." 예수님께서 여러분의 삶 가운데로 들어오게 하십시오. 예수님께서 당신의 삶 가운데로 들어오시도록 하는 일은 종교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으십시오. 또한 실존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는 일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경험적으로 배우도록 하십시오.

 

   기독교는 사람이 만든 종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생명의 근원 되시는 하나님께로부터 생명을 받고 소유하게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생명을 인식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을 인식할 수 있는 자만이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고 하나님을 예배하며 실제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인생은 하나님과 함께 있을 때만 참 기쁨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짐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무거운 짐들은 그 누구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께서만이 여러분에게 오셔서 이 모든 일을 해결하시고 쉼을 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그럼에도 여러분은 이분께로 나오지 않으시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또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고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당신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지금 당장 당신의 삶을 예수님의 손에 전적으로 맡기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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