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하여

                                                                         존 필립스

                                 CHAPTER   6


                        믿음을 증거하는 삶

                     Sharing Your Faith


   A.D. 33년 나사렛 예수는 예루살렘 근처 골고다 언덕에서 로마의 형틀인 십자가에 그 손과 발이 못 박혀 말할 수 없는 고통속에서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그의 원수들은 십자가 곁에 모여 그를 조롱하였고, 가장 가까운 그의 제자들마저 모두 그를 버리고 도망하고 말았습니다. 극심한 고통 속에서 모든 피를 흘리며 그는 홀로 죽었습니다.


   기적 (The Miracle) 


   그런 일이 있은 지 불과 50년 후, 바로 그 예수는 로마 제국의 거의 모든 도시에서 하나님으로서 경배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수천수만의 사람들이 그를 자신의 주와 구주로 고백하며 혹독한 핍박 속에서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들의 믿음을 담대히 전파했습니다. 이와 같은 기적의 배후에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실제적인 접촉을 경험했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들의 변화된 삶과 그들의 생생한 증거와 전적인 헌신과 그들의 확고한 회심의 역사는 온 세상을 뒤집어 놓았습니다(행 17:6). 그 길을 앞장서서 이끈 사람은 당대 최고의 율법사 가말리엘의 문하생으로, 어찌하던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전파하는 제자들을 모두 없애기 위해 갖은 방법으로 교회를 핍박하던 사울 곧 훗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한 사도로 변한 바울이었습니다.


   동기 (The Motivation)


   사도 바울은 그가 기록한 위대한 로마서에서 어째서 자신이 순교를 각오하고 영광스러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증거하고자 하는지, 그 동기를 이렇게 천명합니다.

   "나는 헬라인들에게나, 야만인들에게나, 지혜자들에게나, 어리석은 자들에게나 모두 빚진 자라" (롬 1:14). 바울에게 있어서 인간은 문명적이거나, 미개하거나, 그리고 총명하거나, 어리석거나 별 차이가 없었습니다. 주인을 버리고 도망친 노예 오네시모에게나, 오만한 아그립바 왕에게나 그는 똑같은 열정과 애정으로 그리스도를 증거하였습니다. 우리는 모두 바울처럼 모든 사람들에 대하여 복음에 빚진 자들입니다. 마치 저 옛날 네 명의 문둥이들이 굶주림에 허덕이다가, 아람군대들이 그 진영에 남기고 간 엄청난 양식을 발견한 후, 성안에서 양식이 떨어져 굶어 죽어가는 자기 백성을 생각하며, 자기들끼리 "이날은 기쁜 소식이 있는 날이어늘 우리가 잠잠하고 있는 것은 그 소위가 좋지 않도다." (왕하 7:9)라고 말했던 것과 같습니다.

   바울은 "나는 로마에 있는 여러분들에게 이 복음을 전할 준비가 되었다" 고 말하였습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전 세계는 그의 교구였습니다. 바울은 세계 종교 중심지였던 예루살렘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폭도들에게 피격을 당하였고, 세계 문명의 중심지였던 아덴에서는 복음을 전하면서 조롱을 당하였으며, 세계 정치의 중심지였던 로마에서는 복음을 전하다가 끝내 순교를 당하였습니다. 바울의 그러한 복음 전파에 대한 열정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는 폭군 네로의 앞에서도 담대히 그리스도를 전파하였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부끄러워 하지 않는다. 복음은 모든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이다" (롬 1:16 역자 의역). 바울은 인간의 근본적인 갈망의 해답은 복음뿐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무식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우주적 비전을 가진 범세계적 인물이었고, 편견 없는 교육자였으며, 뛰어난 지적 능력과 웅대한 포부를 품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츨중한 문장가였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다른 사람들에게 성공적으로 전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복음의 능력을 참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세상의 가장 큰 필요는 더 나은 교육제도도 아니요, 더 나은 사회적 개혁도 아니요, 새로운 종교적 발상도 아닙니다. 복음은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고, 양심을 찌르며, 가슴을 따뜻하게 하며, 영혼을 구원하고, 인생을 거룩하게 만듭니다.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할 때, 그들의 생애는 변화됩니다. 술주정뱅이를 성실한 자로 만들며, 부정직한 자를 정직한 자로 만들며, 창녀를 정숙한 여인으로 만듭니다.

   다음과 같은 것들은 무관심의 죄에 해당합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집에 불이 난 것을 보고도 소리쳐 알리지 않는다면 그는 무관심의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한 어린 아이가 복잡한 길거리를 방황하는 것을 보고도 그아이를 안전한 곳으로 옮기지 않는다면 그는 무관심의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이웃이나, 친구나, 직장동료나, 친척이 불신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멸망의 길로 달려가는 것을 보고도 아무런 경고도 하지 않는다면 그는 무관심의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밀레도에서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남긴 그의 고별사를 통하여 "나는 모든 사람들의 피에 대하여 깨끗하다" (행 20:26)고 말하였습니다. 이는 그가 모든 사람들에게 주의 복음을 전파하는 일을 완수했음을 의미합니다. 사도행전 20:17-38 말씀은 그리스도인들의 책임에 대한 대단히 중요한 계시입니다.

   사람이 그의 동기를 행동으로 나타내는 데는 다음과 같은 정신적 유형들이 있습니다.


   훈련적 정신  A Sense of Discipline

   의무적 정신  A Sense of Duty

   헌신적 정신  A Sense of Devotion


   훈련(Discipline)은 "나는 이를 무조건 해야만 한다." (I have to do it)는 것이고, 의무(Duty)는 "나는 이를 마땅히 해야 한다." (I ought to do it)는 것이며, 헌신(Devotion)은 "나는 이를 사랑하기 때문에 한다." (I iove to do it)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다른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증거하려면 그는 반드시 이상의 정신적 충동 중에 그 어느 하나를 따라야 합니다. 어떻습니까? 당신은 훈련적 정신이나 의무적 정신으로 말씀을 전하려는 것은 아닙니까? 복음 전파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임무입니다. 바울은 "만일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 (고전 9;16)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파하는 가장 고귀한 동기는 헌신적 사랑이어야 합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 하는도다" (고후 5;14).


   우리는 영원한 멸망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해 주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하고, 그를 사랑하며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 그를 자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는 자들입니다. 한 소녀가 한 청년과 깊은 사랑에 빠지게 될 때, 그녀는 사랑의 기쁨을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기를 원하게 될 것입니다. 그녀는 사람들에게 그녀의 삶 가운데 찾아온 놀라운 사람(lover)에 대해서 자랑스럽게 이야기 할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의 강권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이야기하게 되는 진정한 동기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전파하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어떤 사람이 영접하는 것을 보게 될 때, 우리의 마음에는 기쁨이 홍수처럼 밀려오게 될 것입니다.


   필수 조건 (The Mandate)


   여기에는 몇 가지 필수적 전제조건이 있습니다. 첫 번째 필수조건은, 예수 그리스도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기 전에 먼저 자신이 확고한 구원의 확신을 가지는 것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목사가 강단에 서는 것보다 더 슬픈 일은 없습니다. 자신이 잃어버린 죄인이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종교적인 영향을 끼치려고 애를 쓰는 것보다 더 안타까운 일은 없습니다. 주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저희는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그 둘은 필경 다 함께 구덩이에 빠지리라." (마 15:14 *역자 의역).

   둘째로, 경건한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요구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언행의 불일치는 불신자들이 그리스도인의 위선과 비현실성을 보고 복음을 거절하게 만듭니다. 따라서 자신의 믿음을 효과적으로 나누고자 하는 자들에게는 완전하고도 실제적인 성경지식이 필요합니다. 사람들은 그런 그리스도인들을 통해서 사람의 견해가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사람들과 그들의 문제에 관련된 지식과 주님에 의해 인도 받는 자원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본과는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 구주를 증거하는 적절한 방법을 소개할 것입니다.


   접근 방식 (The Approach)


   그리스도를 증거 하기 위한 효과적인 접근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상대방의 개성을 고려하고, 기회를 적절히 얻으며, 주님의 인도하심을 전적으로 의지해야 합니다. 이제 일반적인 몇 가지 접근 방법들을 소개합니다.


   1. 평범한 접근법 (The Casual Approach)


   평범한 접근은 흔히 사용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가령 열차, 비행기, 혹은 배 안에서 함께 동행하게 된 사람들이나 혹은 대합실에서 함께 출발시간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가벼운 인사와 함께 일반적인 내용으로 시작하여 차츰 영적인 주제로 대화를 이끌어 가는 방법입니다. 당신은 이처럼 질문할 수 있습니다. "현대에도 성경의 필요한 사실을 인정하십니까?" "성경이 러시아의 미래에 대해서 매우 심도 있게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혹은 "빌리 그레이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혹은 그 외의 유사한 질문들로 상대방에게 접근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대화가 친숙해졌을 때, 차츰 구체적으로 대화를 진행하여 상대방이 개인적으로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도록 이끌어야 할 것입니다.


   2. 단도직입적 접근법 (The Curt Approach)


   단도직입적 접근법은 사전에 다른 예비대화 없이, 곧바로 본론적인 이야기를 시작하는 방법입니다. 전도에 큰 성과를 올리는 그리스도인들이 흔히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어느 전도자는 비행기가 활주로를 벗어나 막 상공으로 이륙하는 순간 옆 좌석에 앉은 부인에게 이렇게 질문합니다. "부인, 전에 비행기 여행을 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초행이라고 그 부인이 대답할 때, 그는 비행기의 이륙순간이 대개의 경우 가장 위험한 순간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키며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만일, 이 비행기가 추락한다면 당신은 어디로 갑니까? 하늘나라입니까? 아니면 지옥입니까?" 이와 같은 방법은 대화의 상황을 적절하게 이끌어 갈 수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만 사용될 수 있습니다. 또한 진심으로 상대방이 영혼의 복을 얻기를 원하며, 순수하고 분명한 동기가 아니면, 대부분의 사람들로부터 더 이상의 대화를 거절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가 만난 영혼들을 향한 사심 없는 관심과 사랑의 동기와 거짓 없는 태도를 가진 전도자는 그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게 되고, 그들로 하여금 깊은 죄의식을 갖게하며, 그릇된 자신의 길에서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이켜 구원에 이르도록 인도하여 줍니다.


   3. 우정을 통한 접근법 (The Comradely Approach)


   이러한 접근법을 위해서는 사전에 상대방과의 끈끈한 친분관계가 필요합니다. 끈끈한 우정으로 다져진 친분은 장차 상대방을 주께로 인도하는데 아주 유용한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우정관계를 위해서는 여러 가지 다양한 행실이 필요합니다.

   어려운 일을 만나 도움이 필요할 때 상대방을 방문하여 격려와 위로를 한다거나, 적절한 시기의 식사 초대나 커피 타임 등의 교제를 통해 먼저 우정을 깊이 쌓아갑니다. 낚시에 초대하거나, 스포츠 활동을 함께 하거나, 눈치우기를 도와주거나, 집의 페인팅 작업을 도와주거나, 재봉틀 옷 만들기를 함께 하는 일 등 여가시간이나 취미 활동을 통한 우정 관계 속에서 자연스럽게 그들의 영혼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우정관계는 진실해야 하며, 단순히 복음이란 약을 전달하기 위한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4. 가호방문 접근법 (The Canvass Approach)


   가호방문 접근법은 특정 이단종교들이 흔히 사용하는 방법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령의 성과를 올릴 수 있는 훌륭한 접근방법의 하나입니다. 가가호호를 방문하여 소책자나 전도지 등을 배부하기도 하며, 혹은 영적인 문제에 관한 설문지를 배부하여 사람들의 관심을 파악할 수도 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이러한 방법을 적용할 수는 없지만 이런 방법으로 큰 성과를 거두는 이들도 많습니다. 물론 때로는 야유와 문전 박대를 당하기도 하고, 혹은 언쟁이나 트집을 잡으려는 태도로 맞서는 사람들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또한 엉뚱한 질문을 받을 경우 문밖에서 즉각적으로 합당한 대답을 해 주는 일도 쉽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어떻든 일단 접근이 이루어진다면, 훗날을 위한 전화 약속을 하던지, 혹은 추후 방문을 약속하여 가정에서 정기적인 성경공부를 시작할 수도 있습니다.


   5. 통신을 통한 접근법 (The Correspondence Approach)


   어떤 이들은 우편이나 통신을 통하여 영혼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기도 합니다. 이를 위하여 펜팔(Pen Pals)을 고려할 수도 있습니다.또한 떨어져 있는 친구나 친척들에게 이런 방법을 통해 복음을 전할 수도 있습니다. 한 가지 조심할 점은 지나친 미사여구나 설교조 보다 복음의 핵심을 소개하는데 치중해야 할 것입니다. 또 내용이 너무 길면 읽는 이가 싫증을 느낄 수도 있으며, 특히 읽기 어려운 필체일 경우 더욱 그렇습니다. 반드시 깨끗한 필체여야하며, 흥미를 줄만한 전도지나 책자들을 함께 사용하면 좋습니다. 종종 어떤 사람들은 간단한 전도지 한 장을 통하여 깊은 감화를 받고 영적 도전을 받아 구원 받기도 합니다. 이런 전도지들은 기독교 출판사들을 통하여 얼마든지 구할 수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성경통신 학교에서 제공하는 통신과정을 공부하다가 구원 받는 역사가 전 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습니다(참고: 인터넷으로 ECS Ministries를 확인해 보기바람).


   6. 상담 접근법 (The Consultation Approach)


   이것은 매우 성공적인 접근방법 중의 하나입니다. 특별히 전도 집회가 끝난 후에 구원에 관한 문제나 기타 영적인 문제에 관한 개인적인 상담을 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상담은 즉석에서 이뤄질 수도 있고 혹은 약속을 통하여 차후 합당한 시기에 좀더 시간을 가지고 상담이 필요한 문제에 관해서 대화함으로써 그 영혼을 구원과 참된 진리로 이끌 수 있습니다.


   7. 문화적 접근 (The Cultural Approach)


   동족이나 같은 종교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에게 사용 가능한 접근법입니다. 또는 외국에서 온 유학생들이나 직장인들 가운데 외로워 하는 이들을 방문하거나 초대하여 교제할 수도 있습니다. 또 비기독교국에서 온 사람들이나 다른 종교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 중에는 기독교에 대한 관심을 갖거나 자신들의 종교와 비교해 보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금은 글로벌 시대라서 다양한 인종들이 직업이나 교육을 위해 심지어 결혼을 통하여 국경을 초월해 함께 어울려 살아가고 있습니다. 따라서 문화적 접근방법에 대한 연구와 관심이 더욱 요구되고 있습니다.

   이상의 방법들 이외에도 다양한 접근법들을 찾아내고 시도할 수 있습니다. 각 사람은 자신에게 맞는 최선의 방법으로 영혼 구원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전도자 자신의 어떤 방법이나 수단을 의지하기 보다 그 영혼 스스로 우리 주님을 열망하는 마음을 갖게 하여 자기의 의지로 분명하게 믿음을 고백하게 하는 일입니다.


   준비 작업 (The Appraisal)


   낚시꾼들은 자신들의 취미활동을 위해 오랫동안 많은 시간을 들여 사전 준비와 연구를 합니다. 그들은 각종 물고기들의 습성과 서식처에 대하여 연구하고, 어떻게 하면 그것들을 잘 잡을 수 있는가를 궁리합니다. 그들은 고기를 유인하는 미끼에 대해서도 연구합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같은 심정으로 베드로와 안드레 형제를 그의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나를 따르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마 4:19).

   인간은 저마다 개성과 배경이 모두 다르기 때문에 각 사람에게 가장 적합한 접근법을 적용해야 하며 특히 한번 접촉했던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여야 하는지를 연구해야 합니다. 이제 복음을 전할 때 흔히 만날 수 있는 보편적인 네 가지 다른 부류의 사람들에 대해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1. 반항적인 사람 (The Defiant Person)


   이러한 부류의 사람은 복음에 대해 반항적이거나 범종교적 경향이 있습니다. 이들은 무신론자, 불가지론자, 공산주의자, 급진주의자이든지 혹은 종교적인 배경에서 자랐으나 이제는 모든 종교에 대해 식상해 버린 사람일 수 있습니다. 이들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것을 부인하기도 합니다. 성경은 타락한 인간의 본성은 죄를 사랑한다고 말합니다(시 14:1-3). 진정한 문제는 의지(意志)에 있습니다. 바로 인간이 하나님을 믿을 수 없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으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경시하고 믿지 않으려는  무리들을 말씀 앞으로 이끌어 내는 일이 필요합니다. 가령, 어떤 사람은 스몰팍스(small-pox 천연두) 예방주사의 예방 효능에 대해서 불신합니다. 그렇지만, 그들의 불신이 그 예방주사의 실질적 효능을 무효화 시킬 수는 없는 것입니다.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능력이 있으며, 양날의 칼보다 더 예리하여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며, 마음의 생각과 의지를 감찰하시는도다. 그의 앞에 숨겨진 피조물이 하나도 없으며, 그분 앞에서 우리가 고백해야할 모든 것들이 벌거벗고 열려진 것 같이 모두 드러나느니라" (히 4:12-13 *역자 의역).

   이는 우리의 지혜가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거룩하신 성령님께서 각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을 수 있도록 감화시키심으로써 구원에 이르도록 친히 역사하심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전도자의 사역을 위한 필수적 도구는 바로 하나님 말씀임을 항상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마음이 굳고 완강하던 불신자가 어느 날 하나님 말씀으로 인해 영혼에 찔림을 받고 마음에 깊은 감화를 받아 눈물을 쏟으며 주님의 발아래에 엎드려 죄를 회개하고 거듭나서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되는 모습을 우리는 수없이 봅니다. 거기에는 제왕(帝王)이나 종과 같은 신분적 차이가 없으며 억만 장자나 가난한 자의 구분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의 유일한 소망이시고, 구원과 평강이시며 안식이십니다. 그를 부인하며 거절하는 자는 악한 죄 때문에 어둠을 사랑하는 자이거나, 지혜롭다 여기지만 사실은 어리석은 자입니다(시 14:1; 고전 1:18). 그들은 영원 진리를 부인하는 어리석은 자이며, 자신이 검불 같은 존재임을 망각한 자들입니다. 인간은 그 어리석음으로 인해 자기의 영혼의 귀중함을 깨닫지 못하고, 하루살이처럼 헛된 세상의 바람 같은 것들을 붙들다 영원한 멸망에 휩쓸려가며 자신의 운명조차 자각하지 못할 만큼 어리석으며 하찮은 존재입니다.


   2. 무관심한 사람 (The Disinterested Person)


    이런 성격의 사람들은 복음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를 드러내지는 않습니다. 그들은 단순히 복음에 대해 무관심할 뿐입니다. 이 세상 신(사탄)에 의해 그들은 본질상 영적 소경인 자들입니다(고후 4:3-4). 그들은 이 세상에 속한 것들을 사랑하고, 그에 집착하여 어려움과 씨름하며, 쾌락을 좇고, 정치적인 일들이나 개인적 활동에 너무 분주하여 하나님이나, 영혼의 구원, 혹은 영생에 관하여서는 생각할 겨를이 없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사람들을 영적으로 각성시켜줄 수 있는 것도 하나님 말씀뿐입니다. 죄는 인간의 영혼에 비극을 초래한 본질적인 원인입니다. 죄는 인간에게 죽음을 가져왔습니다.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그리스도 밖에 있던 우리들의 과거 상태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들이었었노라"(엡 2:1-3).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은 죄인들을 각성시키어 멸망에 처한 자신들의 상태를 깨닫도록 하며, 또한 내세에 천국과 지옥 중 자신들이 어느 곳을 택해야 옳은가를 깨닫도록 인도해 줍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죽을 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깨닫기 전에는 의사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합니다. 예수께서는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마 9:12)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전연 관심을 가지지 않는 사람은 그 영혼이 병들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자신들의 영혼 구원문제에 대해 무관심한 자들에게도 자신이 잃어버린 죄인이라는 사실과 자신이 구원받아야 하는 필요성을 깨닫도록 살아서 역사하십니다.


   3. 미혹된 사람 (Deluded person)


   이런 이들은 거짓 종교에 얽매인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거짓 종교들이 있습니다. 사탄은 교묘한 방법으로 사람들의 영혼속에 역사하여 그들을 미혹하고 귀중한 영혼을 멸망의 길로 훔쳐가는 마귀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종교나 심지어 기독교 내의 거짓 종파(이단)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구원을 얻기 위해서 어떤 희생제물이나 고행이나 참회나 선행과 같은 인간적 행위와 노력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참된 복음은 이와는 정반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엡 2:8-9). 또한 복음은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라" (롬 6:23)고 밝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미혹된 자를 대할 때, 특별히 그가 무엇에 어떻게 잘못 얽매어 있는가를 깨우쳐 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이 있어서 비록 미혹으로 어두움 속에 있는 영혼일지라도, 그 속에 빛을 가져다주는 강력한 힘이 있습니다(고후 4:6). 대양 위를 항해하는 선장은 바다 속의 모든 지형 곧 어느 곳에 모래톱이 있고 바위들이 있는지 다 알 필요는 없습니다. 그가 알아야 하는 것은 깊은 물이 있는 곳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이단 종교들의 그 복잡한 교리에 대해서 능통한 지식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당신은 어디에 하나님의 진리가 있는가를 알아 당신이 대하는 영혼을 그 진리의 대양으로 안내하는 법을 알아야 합니다.


   4. 불안정한 사람 (The Disturbed Person)


   이러한 사람은 성령에 의해 깊은 죄의식과 갈구하는 심령을 가진 각성된 사람일 수 있습니다. 바른 말씀을 필요로 하는 준비된 사람을 만나는 일은 당신에게 놀라운 도전과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구주를 찾는 죄인과 죄인을 찾는 구주가 함께 만나면 항상 구원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죄 용서함과 영생을 얻는 복음을 전파함으로써 불신자들이 구원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 때 한없는 기쁨을 맛보는 것입니다.

 

   초청 (The Appeal)


   복음을 전하고 자 할 때 언제나 유의해야 할 것은, 분명한 복음으로 접근해야 하며, 복음을 증거 한후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하는 초청의 기회를 주는 일입니다. 초청할 때는 양심, 지각, 감정, 의지 등 네 가지 인간적인 감성을 고려해야 합니다. 때로는 그의 양심에 호소해야 하고, 때로는 그의 지각을 일깨워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냉정하고 계산적이고 어떤 이는 따뜻하고 감정적이며, 또 어떤 사람은 부드럽고 양심적이며, 어떤 사람은 아주 쉽게 인도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마지못해 아무 것이나 받아드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몇 가지 중요한 호소의 방법을 다뤄 보겠습니다.


   1. 절망감의 필요 (Need to Despair) - 양심 (the Conscience)


   모든 사람은 절망적인 존재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모든 인간은 죄인이며, 그 종말은 지옥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반드시 죄에 대한 깊은 각성이 필요합니다. 양심은 우리를 복음에 다가가도록 우리 안에서 역사합니다. 우리의 양심은 매우 연약한 길잡이지만, 성령의 도움을 힘입어 구원에 이르게 하는 훌륭한 자극제입니다. 전도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의 양심을 향해 들려 줌으로써 그 자신의 노력이나 공로로는 구원 받을 수 없으며 그가 하나님의 진노아래 있는 사실을 깨닫게 해 주어야 합니다.

   인간의 본성적인 죄에 대하여,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임박한 진노의 심판에 대하여 그 양심안에서 깊이 깨닫도록 해야 합니다(요 16:8-11).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하여(사 6:1-5; 시 22:2-6; 단 10:2-8; 계 1:12-17) 인간의 죄에 대하여(욥 42:1-6; 롬 1:18-3:20; 엡 2:1-3) 다가올 심판에 대하여(마 13:40-42; 계 20:11-15; 21:8) 성구들을 인용하기 바랍니다.


   2. 분별의 필요 (The Need of Discern)- 지성 (The Intellect)


   사람이 구원을 얻고자 하면 지성적 분별이 필요합니다

   1) 하나님의 구원의 단순성에 대한 가르침이 필요합니다.

   2) 구원은 우리의 어떠한 공로로서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엡 2:8-9; 롬 3:19-20; 갈 2:16; 3:10-13; 약 2:10).

   3) 나를 사랑하사 친히 모든 영화를 버리시고, 이 세상에 내려오시어, 아무 죄도 없는 자신을 속죄 제물로 드리시고자 갈보리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담당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마 1;21; 고전 15:1-3; 딤전 1:15; 벧전 2:21-24; 사 53:5-6; 고후 5:20-21).

   4) 반드시 회개가 필요합니다. 실제적으로 그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마음의 변화가 필요합니다(마 3:8; 행 17:30).

   5) 확실한 의지로 예수 그리스도를 그 자신의 개인적인 구주로 영접해야 합니다(요1서 1:11-13; 계 3:20; 요 1:12, 16).

   6)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보내신 유일한 구주이심을 믿어야 합니다(행 4:12; 딤전 2:5; 요 14:6).

   7)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로 영접한 이후에도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요구하시는 삶을 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롬 5:6; 요 15:4-5).


   3. 갈망의 필요 (The Need tp Desire) - 감정 (The Emotions)


   구원을 얻고자 하는 사람은 또한 감정적 갈망이 필요합니다. 그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유지하기 원합니다. 사랑, 기쁨, 평화, 경외심, 감사, 미움 등은 모두 인간의 강한 감정입니다. 영혼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다 보면 사람마다 각기 다른 모양으로 그 감정을 표출합니다. 어떤 사람은 구원을 받을 때 감정을 아주 적게 드러내고 어떤 이들은 그간의 악한 죄와 불의한 행동들을 뉘우치며 눈물을 억제하지 못하기도 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형용할 수 없는 흥분과 기쁨과 자유로움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큰 감동을 보이든지 혹은 그렇지 않든지 간에 그들 모두는 반드시 구원을 얻고 자 하는 갈망이 필요합니다.

   다윗은 자신이 범한 죄를 생각하고 큰 슬픔을 맛보았으며(시 51:1-17), 바리새인 시몬의 집에서 연회가 열릴 때, 한 여인은 예수님께 나아와 그 발에 향유를 붓고 눈물을 흘리며, 그녀의 머리털로 주님의 발을 씻었습니다(눅 7:36-50). 빌립보 간수는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갈때, 두려움과 경외심과 감사함이 가득했습니다(행 16:26-30). 나다나엘은 호기심을 가지고 예수님께로 나아왔습니다(요1:45-51). 우물가에 물을 길러 나왔던 여인은 삶의 공허함을 깨닫고 보다 나은 것을 갈망하였습니다(요 4:6-49). 이처럼 구원은 동일하지만 각 사람들이 체험하고 표출하는 감정의 정도에는 많은 차이가 있음을 전도자는 이해해야 합니다.


   4. 결단의 필요 (The Need to Decide) - 의지 (The Will)


   마지막으로, 구원을 얻고자 하는 사람은 의지적 결단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의지를 주셨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의지로써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든가 혹은 거절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찌하랴?" (마 27:22)고 묻던 빌라도의 절규는 모든 세대의 모든 사람이 해야 하는 질문입니다. 자신을 거절하는 자들을 향해 예수께서는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치 아니하도다"(요 5:4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은 인간의 의지에 호소합니다. "목마른 자는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수를 받으라"(계 22;17). 선지자 이사야는 번번이 옳은 길의 선택을 거절하는 그의 백성들을 향해 엄숙하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의 길을 택하며 그들의 마음은 가증한 것을 기뻐한즉 나도 유혹을 그들에게 택하여 주며 그 무서워하는 것을 그들에게 임하게 하리니 이는 내가 불러도 대답하는 자 없으며 내가 말하여도 그들이 청종하지 않고 오직 나의 목전에 악을 행하며 나의 기뻐하지 아니하는 것을 택하였음이니라"(사 66:3-4).

   결단을 미루고 그리스도를 거절하는 것은 어리석고 위험한 일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긴다면, 우리가 어찌 피하리요"(히 2:3)라고 성경은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인내심을 가지고 그리스도에 대해 자신의 결단을 미루는 사람들을 향하여 분명하고 진지하게 그들을 일깨울 책임이 있습니다(잠 27:1; 고후 6:2; 잠 29:1).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널리 알려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인도 선교사였던 에이미 윌슨 카마이클(Amy Wilson Carmichael)은 그녀가 자신의 한 꿈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녀는 밝은 햇빛이 가득한 넓은 들판에 수많은 군중들이 무리지어 앉아 있는 광경을 보았습니다.그들은 모두 눈을 크게 뜨고 있었고 그리고 그들은 나무 그늘 아래에서 소풍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으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양쪽으로 큰 입을 벌린듯한 아주 깊고 험한 계곡이 보였습니다. 얼마 후 그녀는 그 수많은 군중들이 소풍 장소를 떠나고자 제각각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모두 소경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무리지어 계곡이 있는 쪽을 향하여 곧바로 가까이 다가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 계곡 근처에 가까이 이르러서야 자신들의 위험을 깨닫고 비틀거리며 공포스런 비명을 지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절벽가의 여기저기에는 몰려오는 군중들에게 경고하고 있는 정상적인 남녀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수는 너무 적어서 그들의 경고 소리는 소경 군중들의 비명소리에 파묻히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게다가 밀려온 군중들은 소경일 뿐만 아니라 귀머거리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경고 소리는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에이미 카마이클은 꿈속에서 왜 소풍 나온 사람들을 도와 줄 사람들이 그곳에 오지 않는 것일까 의아해 하였는데 그들은 오직 자신들의 일에만 하나같이 분주할 뿐이었습니다. 그녀는 잠에서 깨어난 후 귓가를 울리는 천둥 같은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대는 무엇을 하였느냐?"

   이 비유에는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만일 우리가 눈 뜬 사람들이라면,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혹시 자신의 일에만 분주한 무리 중의 하나는 아닌지요?


   "오직 단 한번의 인생,

   쉬 지나가지만,

   다만 그리스도를 위해 살았던

   그 일들만 길이 남으리."


   젊은 그리스도인들이여 기억하기 바랍니다. 성령 충만하고 그리스도를 사랑하십시오. 신학교를 졸업하여 머리 속은 체계적인 신학적 지식이 가득하여도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참된 삶을 살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비록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은 부족할 찌라도 주님을 의지하면 다른 사람들에게 주를 증거 하는 일에 있어서 훨씬 효과적 일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그대들을 부르셨고 사랑하시고 그대들의 삶 속에서 열매가 풍성히 맺히기를 원하십니다(요 15:1-5; 갈 6:22; 빌 4: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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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고보서


                      제11과

                     기도와 병고침 (야고보서 5:13-15)


   야고보서 5장을 마무리하는 구절들의 주제는 기도입니다. 이 기도는 명사나 동사의 형태로 일곱 번 나타나고 있습니다.


언제나 할 수 있는 기도(5:13)


   삶의 모든 환경 속에서 우리는 기도로 주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고난 중에 있다면, 우리는 간절히 구함으로 주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기쁨 가운데 있다면, 우리는 찬송으로 주님께 우리 마음을 높여야 합니다. 주님은 모든 우리 생활의 환경에 변화를 일으키기 원하십니다.

   우리는 삶 속에서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의 위대한 근원-창조주-으로서 하나님을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것을 러더포드(Rutherford)가 말한 "이차 원인으로 이루어진 바퀴들의 혼란한 회전" (우연한 결과로 일어나는 일들)이라고 여겨서는 안됩니다. 이것은 좌절하여 자신이 환경에 의한 희생자라고 인정한다든지 환경이 변화하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방법 외에는 아무 방법도 보지 말아야 합니다.


병든 자와 기도(5:14-15)


   이 구절들은 야고보서 가운데, 아마도 신약성경 가운데 가장 논란이 많은 부분일 것입니다. 그러한 논란은 오늘날 신자들의 삶 속에서 병 고침의 현장에서 우리가 직면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구절들을 자세히 살펴보기 전에 성경에서 병든 자와 병 고침에 대해 어떻게 가르치고 있는지 짚고 넘어가는 것이 도움이 될 것입니다.


   1. 우리는 일반적으로 모든 병이 세상에 있는 죄의 결과라는 것을 인정합니다. 만일 죄가 들어오지 않았다면 병도 없었을 것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2. 어떤 병은 사람이 생활 가운데 범한 죄의 직접적인 결과일 수도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1:30에서 어떤 고린도사람은 자기 생활 가운데 있는 죄를 판단하지 않은 채, 즉 죄를 고백하고 용서받지 않은 채 주님의 만찬에 참여했기 때문에 병이 들었습니다.


   3. 모든 병이 사람이 생활 가운데 범한 죄의 직접적인 결과는 아닙니다. 욥은 그가 가장 의로운 사람이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병이 들었습니다(욥 1:8). 날 때부터 소경이 된 것은 그가 범한 죄로 인한 고통이 아니었습니다(요 9:2,3). 에바브로디도는 주님의 일에 대한 그의 지칠 줄 모르는 활동으로 인해 병이 들었습니다(빌 2:30). 가이오는 육체적으로 건강치 못했으나 영적으로는 강건했습니다(요삼 2절).


   4. 어떤 병은 사단적인 활동의 결과이기도 합니다. 욥의 온 몸을 뒤덮은 부스럼은 사단이 일으킨 것입니다(욥 2:7). 누가복음 13:10-17의 여인을 꼬부라지게 한 것은 사단이기 때문에 그 여인은 스스로 펼 수 없도록 두 번 꼬부라진 것입니다. 16절의 "십 팔 년 동안 사단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 이라는 것에 유의해야 합니다. 바울은 사단에 의해 생긴 육체의 연약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것을 "...육체의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내게 주셨으니..." (고후 12:7)라고 불렀습니다.


   5. 하나님은 치료하실 수 있으시고 또 치료하십니다. 아주 실제적인 의미로, 모든 치료는 하나님께로 온 것입니다. 구약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이름 중 한 가지는 여호와 로페카로서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 (출 15:26)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모든 치료의 경우에 있어서 하나님을 인정해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치료하는데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하신다는 것을 분명하게 해줍니다. 때로 하나님은 몸의 자연 치유 과정을 통해 치료하시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몸에 놀랄만한 회복의 능력을 두셨습니다. 어떤 때 하나님은 약으로 치료하십니다. 예를 들면, 바울은 디모데에게 그의 비위와 자주 나는 병을 위하여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고 조언하였습니다(딤전 5:23). 또 어떤 때 하나님은 의사들을 통하여 고치십니다. 예수님은 병든 자에게는 의사가 필요하다고 분명하게 가르치셨습니다(마 9:12). 바울은 누가를 "사랑 받는 의원" (골 4:14)이라고 말함으로 그리스도인들 사이에도 의사가 필요하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치료의 사역에 의사를 사용하십니다. 유명한 프랑스 외과의사인 듀보이스(Dubois)는 "외과의사는 상처를 손질하고, 하나님은 그것을 치료한다" 라고 말했습니다.


   6. 또한 하나님은 기적적으로 치료하시기도 합니다. 복음서에는 이에 대한 많은 예가 들어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늘 기적으로 치료하신다고 하는 것은 옳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결코 기적으로 치료하시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더욱 없습니다. 성경에는 오늘날도 하나님께서 기적으로 치료할 수 있다는 것을 믿지 못하게 하는 것은 없습니다.


   7.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해야 하는 것은 치료하는 것이 늘 하나님의 뜻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드로비모가 병듦으로 밀레도에 두고 떠났습니다(딤후 4:20). 주님께서는 바울의 육체의 가시를 치료하시지 않으셨습니다(고후 12:7-10). 만일 항상 치료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그 누구도 늙거나 죽지 않을 것입니다.


   8. 하나님께서는 모든 경우마다 치료하시겠다고 약속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치료해 달라고 요구할 수 없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2:27에서는 치료를 우리가 정당히 요구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긍휼과 같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9. 일반적인 의미로 치료가 "속죄" 에 들어있다고 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주님의 속죄에 속한 모든 복이 아직 우리에게 다 주어진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몸의 구속은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사역에 들어 있지만 그리스도께서 그의 성도들을 데리러 오실 때까지 우리는 또한 모든 질병에 대해 완전하고 궁극적인 치료를 받게 될 것입니다.


   10. 치료가 되지 않는 것이 믿음의 부족을 나타낸다는 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만약 그렇다면 어떤 사람은 무한히 살아야 한다는 의미가 되는데 그러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바울도 드로비모와 가이오도 치료되지 않았지만 그들의 믿음은 강하고 적극적이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야고보서 5장의 본문으로 돌아가서 그것이 치료에 대해 가르치고 있는 성경의 나머지 부분과 얼마나 일치하는지 보겠습니다.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

   만일 치료에 대한 성경 구절이 이 구절들 뿐이라면, 여기에 기록된 조건을 만족하기만 하면 그리스도인들의 생활 속에 찾아오는 모든 병이 치료된다는 확신을 가져도 될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언제나 치료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을 다른 성경에서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야고보가 모든 병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특별한 환경의 결과로 오게된 어떤 형태의 병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이 구절을 이해할 수 있는 열쇠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 는 말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 구절에 있는 치료는 죄사함과 연관된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한 사람이 아마도 지역교회의 간증과 연관된 어떤 죄를 범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후 얼마 안되어 그가 병이 들었습니다. 그는 이 병이 자기가 범한 죄의 직접적인 결과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자기 죄를 뉘우치고 하나님께 자백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죄는 교회의 공적인 간증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장로들을 초청하여 그들에게도 완전히 자백해야 되었습니다. 장로들은 그를 위해 기도하면서 주의 이름으로 그에게 기름을 바릅니다. 그 믿음의 기도는 그 병든 자를 구원하며, 주님께서는 그를 일으키실 것입니다. 이것은 죄의 직접적인 결과로 오게된 병에만 한정적으로 하신 주님의 약속이며, 여기에 기록된 방법으로 죄를 자백하면 용서되며, 주님께서 그를 치료하실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 사람이 죄를 범했는지 어떻게 알며 그가 회개하고 자백하였는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 그 대답은 15절 끝 부분에서 그 사람의 죄가 용서되었다고 하는데 있습니다. 우리는 죄가 오직 자백함으로써만 용서되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요일 1:9).

   어떤 이는 " 여기에서 그가 죄를 범하였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라고 말하고 있다" 라고 반대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전체 문맥은 죄의 고백과 타락한 자의 회복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구절에 유의하십시오. "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16절). 17절과 18절에 언급된 기근은 이스라엘의 죄로 인한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이 기근은 그들이 여호와를 참된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그분께로 돌이켰을 때 거두어졌습니다(왕상 18:39).  이제 우리가 보게될 19절과 20절은 타락한 자의 회복을 다루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야고보서 5:13-20의 전체 문맥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치료가 죄의 결과로 병든 자로서 장로들에게 그 죄를 고백한 자를 위한 것임을 보여줍니다. 그 장로들의 의무는 그를 위해 기도하는 것과 기름을 바르는 것입니다. 혹자는 야고보가 이 서신을 기록할 당시에는 기름이 약의 형태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여기에서의 기름이 의약적인 수단들을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했습니다.(눅 10:34). 다른 견해는 기름이 의미하는 바는 의식적인 사용이라는 것입니다. 이 견해는 "주의 이름으로" 라는 말씀에 의해 지지됩니다. 다른 말로 하면, 기름을 바르는 것은 주님의 권위에 의해 또한 주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행해지는 것입니다. 기름은 종종 기적적인 치료약으로 사도들에 의해 사용되었습니다(막 6:13). 그 기름에 치료하는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고 그 기름은 성령님과 그분의 치료의 사역을 나타내는 것입니다(고전 12:9).

   어떤 사람은 기름을 의식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은혜의 시대와 또한 은혜의 시대가 의식과 예식을 강조하지 않는 것과 모순된다고 하며 반대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떡과 잔을 주님의 몸과 피의 상징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또한 교회에서 여자들이 머리를 가리는 것은 그들이 남자에게 속했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의식적으로 기름을 사용하는 것에 반대합니까?

   "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라고 야고보는 말했습니다. 그러한 믿음의 기도에 응답하심으로 하나님께서 그 병든 자를 치료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약속에 기초한 기도이기 때문에 믿음의 기도입니다. 이것은 그 장로들이 얼마나 큰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 또는 그 병든 자가 얼마나 큰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 장로들은 하나님께서 앞에서 말한 조건들을 온전히 만족하면 그 사람을 일으키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에 완전한 확신 가운데 기도 할 수 있습니다. "...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 이는 그 사람이 죄를 범하였다고 못박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강하게 시사하는 것입니다. 또한 죄사함은 자백에 달려있기 때문에 그 사람이 자기 죄를 자백했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입니다(잠 28:13).

   이제 요약하면, 14절과 15절은 어떤 죄의 직접적인 결과로서 병든 사람의 경우에 적용된다고 믿습니다. 그가 이것을 깨닫고 회개하면 교회의 장로들을 청하여 그들에게 완전히 자백해야 합니다. 그러면 장로들은 그를 위해 기도하며 주의 이름으로 그에게 기름을 바릅니다. 장로들은 하나님께서 그를 치료하신다고 여기에서 약속하셨기 때문에 믿음으로 그의 회복을 위해 기도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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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05 두 사람의 회심(9-10장)


요절 : 사도행전 9장 16절, 10장 35절

요점 :

1. 그리스도는 그분의 모든 백성들과 하나입니다.

2. 그리스도인들은 박해에 대한 준비가 되어있어야 합니다.

3. 기적에 관한 성경의 이야기는 완벽한 사실입니다.

4. 전 세계의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5. 하나님을 제외하고 산 자든 죽은 자든 사람에 대해 경배하는 것은 죄입니다.

6. 우리는 주 예수님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을 사랑해야 합니다.


사울이 그리스도를 믿음


1. 사울이 빛을 봄(9:1-9)


하나님을 위한 맹목적인 열정과 유대인 가운데에 위대한 사람이 되고자 했던 욕망을 가진 사울은 지금 그리스도인들이 어디에 있든지 핍박하려고 찾아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에서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남녀를 불구하고 체포하여 예루살렘으로 끌어 올 수 있는 허가를 요청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단의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다메섹에 가까이 갔을 때, 아주 강렬한 빛이 정오의 찬란한 태양보다 더 밝게 그들 주변을 비추었습니다. 그때 왜 나를 핍박하느냐고 물으시는 주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사울은 "저는 단지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고 있을 뿐입니다."라고 말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가 주님의 사람들을 공격함으로써 주님을 공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바울이 오랜 후에 기록했던 것처럼 몸된 교회의 머리셨습니다(엡1:22-23). 사울은 예수님께서 진실로 주님이시고 하늘의 영광 안에 앉아계신 것에 너무도 놀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그 성으로 들어 가라고 하시고 그 후에 그가 무엇을 해야할지를 듣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울은 강한 빛에 의해 눈이 어두워져서 그와 함께 있는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 다메섹으로 갔습니다.


2. 사울이 침례를 받음(9:10-19)


그후에 주님은 아나니아라 이름하는 주님의 신실한 종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어떤 집으로 들어가서 사울이 다시 시력을 회복하도록 그의 머리에 안수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나니아는 처음에 사울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체포하려고 왔다는 것으로 알았기 때문에 두려워했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그에게 사울은 그리스도의 종이 되어 많은 나라에 복음을 전파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래서 아나니아가 사울에게 가서 안수하며 "형제여"라고 불렀습니다. 즉시 사울이 시력을 되찾았고 성령으로 충만했습니다. 우리는 이 아나니아에 관해서는 이곳에서 보여진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런 어려운 명령에 순종할 만큼 주님과 매우 친밀하게 동행하고 있었음에 틀림 없습니다. 그래서 사울은 주님께서 교회의 머리이실 뿐아니라 종들에게 말씀하실 수 있고 그들은 기꺼이 순종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또한 최근까지 자신이 박해하고 있던 모든 사람들이 이제는 "형제" 라는 것도 배웠습니다. 이것은 중요한 교훈들입니다. 즉 교회는 하나이고 각 지체는 머리의 명령에 순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3. 사울이 다메섹에서 복음을 전파함(9:20-25)


사울은 즉시 주 예수님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몇 몇 초신자들이 범하는 실수로서 그들은 처음에 자기 친구둘에게 그리스도에 관해서 말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그후에는 시작하기가 훨씬 더 힘들게 됩니다. 그리고 매일 그것을 미루게 되어 점점 더 어럽게 됩니다.

   그런데 그러한 일이 사울에게는 위험을 초래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신앙을 바꾸는 누구에게나 심한 핍박을 하기 때문입니다. 사울 자신이 그러한 그리스도인들을 이미 핍박했었는데 이제 그가 회심했다면 유대인들에게서 무엇을 기대할 수 있었겠습니까?

   아니나 다를까 여러 날이 지난 후에 유대인들은 사울을 죽이려는 음모를 꾸몄고 그가 도망치는 경우를 대비해 밤낮으로 성문을 지켰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사울을 성벽 꼭대기에서 광주리에 달아내려서 도망치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경건하게 살려는 모든 사람들은 고난을 겪어야 할 것입니다.


4. 사울이 예루살렘에서 복음을 전함(9:26-31)


예루살렘에 도착한 후에도 사울의 어려움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아나니아가 처음에 주님의 명령에 복종하기를 주저했던 것처럼 그를 영접하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나 4장 36절에서 읽은대로 바나바가 와서 사도들에게 그에 관한 이야기를 함으로써 그를 도왔습니다. 이제 그들은 사울을 영접하였고 그는 또 다시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에 우리는 헬라파 유대인들이 사울을 죽이려했던 것을 보게 됩니다. 스데반이 그들과 논쟁을 하여 그들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보였을 때 그들은 스데반을 공회로 끌고 가서 그를 고소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사람들이 똑같이 사울을 죽이려고하는 것입니다. 사울이 도착한지 15일만에(갈 1:18) 제자들은 그가 다시 도망하도록 도왔고 이번에는 가이사랴를 향해서 떠났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고향인 다소로 갔습니다. 이후에 주님은 사울에게 고요하고 평화로운 기간을 주셨습니다. 그 사이에 교회들은 성장하고, 그 수가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사울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살기 위해 그 대가가 얼마나 컸는지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도 우리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주신 그리스도를 위해 살기도하고 죽기도 할 준비가 되어있어야 합니다.


5. 베드로가 애니아를 치유함(9:32-35)


우리는 사도행전 후반부인 13장 이후의 대부분이 후에 바울로 알려진 사울의 활동이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사울의 이야기로 되돌아 가겠지만, 지금은 주님께서 유대 지역에서 증거하라고 하신 주님의 명령을 이루는 사도들로서 베드로의 사역 몇가지에 관해 듣게 될 것입니다.

   베드로는 룻다에서 8년동안 앓던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를 치유하신다고 말하자 즉시 그 사람이 일어나 걸어갔습니다. 이 일이 룻다에 거하는 모든 사람과 그 옆의 사론 마을이 주님께 돌아오도록 커다란 영향을 미쳤습니다.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옛 기적들 중 대다수가 그저 상상이며 그 사람이 전혀 아프지 않았던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그곳의 모든 사람들이 그가 수년 동안 아팠던 것을 알고 있었고 그들이 베드로가 행한 기적을 보았을 때 그들이 함께 주님께 돌아왔던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이 진리를 말하고 있으며, 말하는 그대로 이루어진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6. 베드로가 도르가를 살림(9:36-43)


이제 베드로에게 도르가를 죽음에서 살리는 훨씬 더 큰 기적을 행하는 권능이 주어졌습니다. 도루가가 죽었을 때 베드로는 여전히 룻다에 있었지만 제자들을 베드로에게 보내어 욥바로 오게 했습니다. 그가 방에 혼자 들어가 기도한 후 그녀에게 일어나라고 말했습니다. 이 기적 역시 많은 사람들에게 베드로가 하나님의 진리를 전파하고 있음을 확신시켰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을 죽은 자로부터 일으키는 것보다 베드로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영생을 얻은 사실이 더욱 중요합니다.


고넬료의 가정


1. 고넬료가 천사의 환상을 봄(10:1-8)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그 자손들에게 특별히 복을 주시겠다는 놀라운 약속을 하셨지만 유대인들이 죄에 빠졌을 때 하나님은 그들에게 벌을 내리셔야 했습니다. 그 당시는 로마인들이 유대인들을 지배하고 있었고 그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민족을 이루시겠다고 하신 그러한 특별한 약속으로 인해 자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 결과 유대인들은 그들이 이방인이라 부르는 모든 다른 사람들에게 비우호적이었습니다.

   그런데, 고넬료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많은 구제로 가난한 사람들을 도왔으며 매일 기도하는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가 복음을 믿을 준비가 되어있다는 것을 아시고 그 방법을 알려주려고 천사를 보내셨습니다. 천사는 그에게 욥바에 가서 베드로를 청하여 어떻게 해야 하는지 부탁하라고 알려 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른 여러 나라에 주님을 경외하며 주님의 뜻을 행하려 하는 많은 사람들을 갖고 계신 것을 아는 것은 놀라운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중심을 살피시며 믿음을 가지고 주님을 참으로 사랑하는 자들에게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마음에서 무엇을 보실까요?


2. 베드로도 환상을 봄(10:9-16)


고넬료는 즉시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세 사람을 보내 베드로에게 오도록 청하였습니다. 가이사랴에서 욥바까지 가는 유일한 방법은 걷는 것이었으며, 하루에 갈 수 없을 만큼 먼 곳이었습니다. 그들이 가고 있을 때, 베드로는 식사 준비를 기다리고 있는 동안 하늘르부터 환상을 보았습니다.

   베드로는 그 환상 속에서 여러 종류의 동물이 들어있는 커다란 그릇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에게는 유대인이 아닌 사람들과 교제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고기들이 먹도록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서 그 짐승 중 하나를 잡아먹으라고 했을 때 베드로는 그렇게 하기를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그 소리는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셨다면 깨끗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확실하게 깨달을 수 있도록 세 번 행해졌습니다.

   베드로가 음식에 대해 주린 것처럼 또한 그리스도를 위해 영혼 얻기를 갈망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베드로가 깨끗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오늘날도 동일합니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주 예수님에 대해 신실하게 말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3. 베드로가 성령님께 순종함(10:17-22)


처음에 베드로는 이 환상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었지만 고넬료로부터 세사람이 도착했을 때 성령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의심치 말고 그들과 함께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날 전까지만 해도 베드로는 세 이방인들과 동행하는 자로 보여지는 것을 주저했겠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환상을 통해서 어느 누구라도 평범하다거나 부정한 자로 여기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즉시 자신을 알리고 그들의 원하는 것을 물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여섯명의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가이사랴로 긴 여행을 떠났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가 처음에 깨닫든 못깨닫든 간에 성경에서 배운 것처럼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할 준비가 되어있는 것이 잘하는 것입니다. 어린 자녀들은 아버지께서 행하라든지 말라든지 말씀하신 것들에 대해 항상 그 이유를 아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후에 그가 이해하게 되며 자기를 인도해 준 현명하고 사랑하는 아버지께 감사할 것입니다.


4.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 도착함(10:23-33)


고넬료는 베드로가 올 것을 확신했기 때문에 많은 친구들을 불러 말씀을 듣게했습니다. 그들은 베드로가 도착했을 때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고넬료는 하나님을 사랑했지만 성경은 잘 알지 못했기 때문에 베드로가 어떤 위대한 사람임에 틀림없다고 느껴 그를 경배하려고 엎드려 절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즉시 자기가 하나님이 아니며 사람일 뿐이라고 말하면서 경배를 받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다른 사람 앞에 엎드려 경배하는 것은 심각한 죄입니다. 수 백 만의 사람들이 오늘날에도 조상들이나 살아있는 사람들을 경배하는 일을 행하고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베드로가 그런 일을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고넬료도 배우게 되자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베드로에게 자신이 어떻게 천사를 보게 되었으며 왜 사람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를 불렀는지를 다시금 말해 주었습니다.


5. 베드로가 그리스도를 전파함(10:34-43)


이제 베드로는 자신이 본 환상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나라를 다른 나라 보다 더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어디에서든지 그 중심에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는 사람을 찾으시며 그 사람을 받으시고 그의 죄를 용서하십니다. 그리스도에 관한 이야기와 죄인들을 위한 주님의 죽으심에 대해 알지 못할지라도 누구든지 그것을 받아들인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인하여 죄를 용서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으로써 우리의 책임은 만일 그들이 우리에게서 주님에 관해 듣게 된다면 주님을 사랑하는 것을 배울 수 있기 때문에 비록 그들이 듣기를 싫어하더라도 그들에게 그리스도에 관해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고넬료와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께서 얼마나 선한 일을 행하셨는지 그러나 사악한 사람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셨고 하나님께서 삼일만에 부활시키신 놀라운 사랑 이야기에 대해 말해 주었습니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이 이러한 일에 증인이었고 구약성경에서도 하나님의 선지자들은 그러한 일들이 임할 것을 예언했습니다.


6. 고넬료가 성령을 받고 침례받음(10:44-48)


그런데 베드로가 말하려고 했던 것을 끝내기도 전에 듣던 모든 사람들은 말씀을 믿었고 그리스도를 그들의 구주로서 영접했으며 성령님께서 그들에게 임하셨습니다. 베드로와 함께 온 여섯사람들도 진실로 하나님의 성령님께서 처음에 그들 위에 임하셨던 것처럼 이방인들에게 임하신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것이 주님께 속한 것임을 알았기 때문에 어떤 사람도 고넬료와 또한 그와 함께 있던 모든 사람들에게 침례 주는 것을 거절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마음이 죄와 타락으로 가득찬 사람에게 성령님을 주신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참으로 믿었으며 그들의 죄가 씼겨졌기 때문에 즉시 침례를 받았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 예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은 비록 우리와 전혀 다른 민족일지라도 영접할 준비가 되어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서로 사랑하도록 말씀하셨고 이는 우리가 주님께 속하였음을 세상이 알게되는 증거가 될 것입니다. 

Posted by 행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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