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와 종교로부터의 자유


               저주 아래 있는 거짓 기독교인들이여!


   "무릇 율법의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갈라디아서 3:10).


   하나님께서 아담을 저주하셨는가? 그렇지 않다. 자비로우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담을 저주하시겠는가? 만약에 인생에 저주가 있다면 그것은 인생이 스스로 저주 아래로 걸어간 것으로 보아야 한다. 어리석은 인생들이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저버리고 자기의 고집과 욕심에 잡혀 저주 아래로 뚜벅뚜벅 걸어가고 있는 모습을 필자는 수없이 보아왔다.

   한 영혼도 멸망의 지옥에 빠지기를 원치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눈물겨운 사랑의 모습을 생각할 때 저주를 스스로 취하는 어리석은 인생들을 생각하며 가슴 아픈 심정을 억제할 수 없다.

   '저주'라는 단어가 창세기 3장 17절에 최초로 사용되고 있다.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이 때 하나님은 아담을 저주하지는 않으셨다. 그러나 저주받은 땅에서 살아야 하는 인생에게 고통은 시작되었다.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위하여 만드신 그 아름다운 동산과 좋은 과일들이 화염검에 의해 막혀진 채 그들은 떠나야 만 했다. 내보내는 하나님이나 쫓겨나는 인간이나 얼마나 슬프고 안타까웠겠는가! 슬프다 인생이여! 하나님의 사랑의 계명을 스스로 범하고 고통의 길로 들어서고 말았으니... .

   창세기 4장에 보면 가인에 대한 기사가 있는데 가인의 경우는 저주 아래 있는 죄인의 모습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가인은 저주 아래 있었다. 그는 저주를 받은 바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선한 사람을 한두 번 잘못했다고 저주하시므로 죄인이 회개할 길을 막으셨는가? 그렇지 않다. 가인을 자세히 분석해보면 쉽게 그 사실을 알 수 있다.

   첫째, 가인은 아벨과 함께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는 받으셨으나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아니하셨다. 이에 대해 어떤 설교자는 가인의제사가 하나님께 대한 열심과 사랑이 부족한 제사여서 하나님이 받지 아니하셨다고 말하는데 이 얼마나 우매한 소경 목자인가! 이러한 소경들에 의해서 오늘날 기독교는 점점 더 썩어 가는 것이다. 그러면 왜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아니하셨는가? 그것은 가인의 제사는 하나님의 방법, 즉 진리와 관계없는, 진리를 떠난 제사였기 때문이다.

   가인이 알아야 했던 진리는 무엇이었는가?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신 기록이 창세기 3장 21절에 나온다. 사실 이 때까지 아담, 하와는 무화과 나뭇잎으로 자신들의 수치를 가려보기 위하여 몸부림치고 있었다. 그러나 햇빛만 나면 말라버리는, 무화과 나뭇잎으로는 수치를 가릴 수 없었다. 그러한 아담에게 주어진 가죽옷은 지독한 가뭄에 소나기만큼이나 기쁜 일이었다. 이것은 신약의 구속의 복음인 바 가죽옷을 짓기 위하여 죽은 양은 예수님의 속죄를 가리킨다(요한복음 1:29 ; 히브리서 9:12). 이제 양을 잡아서 제사를 지내므로 인간의 죄는 가려지고(용서) 하나님 앞에 경배의 제사를 드릴 수 있는 진리가 그의 아들에게도 전수되었다.

   아벨은 이러한 가르침을 순종하고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피 흘림)으로 제사를 지냈으나 가인은 자기의 생각대로 진리를 거스르고 피 없는 제사를 지냈던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진리를 불순종한 가인의 제사를 외면할 수 밖에 없었다. 이 상황에서 가인은 즉시 하나님께서 왜 자신의 제사를 받지 아니하셨는지 깨닫고 회개했어야 했다.

아벨의 제사의 의미는 피로 말미암은 구속의 진리를 말하고 있다. 이 복음의 진리를 거스르고 다른 구원받을 길은 없다(사도행전 4:12). 피 흘림이 없은즉 죄 사함이 없는데(히브리서 9:22) 피 흘림의 진리를 거부하고 뉘우치지도 아니한 자에게 무슨 구원의 길이 있겠는가!

   가인은 오히려 안색이 변하고 불만을 품었다. 하나님은 이러한 가인에게 안색이 변함을 지적하고 두 번째 회개할 기회를 주셨다. 그러나 가인은 아벨을 쳐죽이므로 이 하나님의 충고와 깨우침을 정면으로 거부했다. 하나님이 가인에게 "동생 아벨이 어디 있느냐" 물으시며 회개할 기회를 주셨으나 그는 아벨의 일을 모른다고 말하면서 하나님을 속이려 했다. 이제 가인은 모든 회개할 기회를 다 버리고 끝까지 거역한 죄인의 길을 걸어가므로 저주 아래로 들어 간 것이다.

   하나님은 11절에서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라고 하심으로 "저주받은 가인" 을 말씀하셨다. 우리는 이와 같은 사실을 살펴보면서 다음 말씀을 생각하게 된다.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로마서 2:4,5).

   회개를 거부한 죄인이 저주 아래 들어가는 것은 당연하다.

   성경에는 저주에 해당되는 단어로 표현된 죄인의 모습들이 여러 군데 나온다. 그중 몇을 살펴보자.


   첫째,이사야 1장 4절에 "행악의 종자요" 하는 말씀이 있다. 이것은 돌이키지 않으면 저주받을 수밖에 없는 죄인을 가리키고 있는 것임에 틀림없다. 요한복음 8장 44절에 보면 인간은 누구나 마귀의 자식으로 출생하였음을 명백히 가르치고 있다. 그러므로 마귀 자식은 마귀를 따라서 지옥으로 갈 수밖에 없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날 때 저주 아래서 빠져 나오게 된다. 이 사건을 성경은 "거듭남" 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십 수년을 거듭남의 경험 없이 예배당 문턱만 밟고 다니며 교회에서 시키는 대로 열심히 행한다 하여도 근본적으로 종자가 바뀌는 것이 아니다.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이 죄악의 씨앗이 그대의 영혼을 주관하고 있는 한 저주 아래 있는 것이며, 구원받지 못한 지옥 자식임이 분명하다. 그러한 사람들 가운데는 교회의 중책을 맡고 있는 이들도 많다. 신앙은 흉내내는 것이 아니다. 근본적인 문제의 해결에 있는 것이다. 본질적으로 행악의 종자요 사단에 속한 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으로 말미암아 말미암아 새 생명(새 종자)으로 새롭게 출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으므로 그와 함께 장사 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로마서 6:4).

   필자는 수많은 기독교인 중 열심인 사람들이 새 생명으로 태어난 경험이 없이 하나님의 자녀 행세를 하느라고 고생하고 있는 모습을 수없이 목격하고 있다. 그들을 상담하여 보면 대부분 예수 믿는 것을 힘들어하고 있으며 계명과 조직과 사람(목사)의 권위에 눌려 겁먹은 표정으로 억지로 끌려가고 있다. 힘들어하는 이유는 흉내내는 것 자체가 힘든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마음에는 "분명 이것은 아닌데", "무엇인가 오늘의 기독교가 잘못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은 하지만 달리 묘책이 없으니 어쩔 수 없이 끌려가고 있다. 그들은 자신의 신앙 상태에 대해서도 무엇인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느끼지만 문제의 핵심을 진단할 수 없으니 포기한 상태로 현실에 적응하면서 끌려가고 있다.

   오, 불쌍한 죄인들이여! 하나님의 긍휼하심은 입으라. 근본적인 변화를 입으라.


   둘째로 저주로 표현된 죄인의 모습은 이사야 1장 4절에 기록된 대로 "행위가 부패한 자식" 이다. 행악의 종자가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으니 당연히 그들의 생활의 변화도 기대할 수 없다. 그러므로 그들은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 되는 것이다.

   행위의 부패함은 두 가지 면에서 생각할 수 있는데, 첫번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겸손히 순종하고자 하는 양심이 없다는 것이다. 진리의 말씀을 그대로 순종하고자 무릎을 꿇기보다 사람의 가르침과 교훈만 맹종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금세기의 기독교가 천주교에서 개혁하였다고는 하나 그들의 생각과 가르침을 비슷하게 따르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성경은 특정인, 즉 사제들만 보고 풀어야 하는 것이며, 일반인들은 함부로 성경을 풀거나 가르치면 안되는 것" 으로 생각하는 사상을 이어받아 그것을 답습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성경은 특정인(목사, 전도사)에게만 가르침 받아야 하는 것이며 평신도가 해석하면 큰 일 나는 것처럼 가르친다(금일에 변화된 교회들도 늘어나고 있는 추세이긴 하지만). 물론 성경 내용 중 풀기 어려운 부분이나 함부로 해석하기 위험한 부분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성경 전체가 그런 것처럼 가르침으로 마땅히 읽고 깨닫고 순종해야 할 성경을 교인들과 떼어놓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그 결과 오늘날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입으로는 주님을 따르나 실제는 사람을 따르며, 더 분명하게 말하자면 사단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

   두 번째로 행위가 부패함은, 사단을 따르는 그들에게서는 자동적으로 부패한 행위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필자는 오늘날 기독교인 중에서 차라리 믿는다고 말하지 아니하는 편이 나을 것 같은 사람도 수없이 만나 보았다. 필자뿐만 아니라 이 글을 읽는 독자들도 길거리나 가게나 직장에서나 "믿는 놈들이 행실이 틀렸다", "신자가 욕심은 더 많다...더 나쁘다" 는 등 비판의 소리를 귀가 따갑게 들었을 줄 안다. 왜 이와 같은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는가!

   그렇다면 필자는 본래 행실이 훌륭하고, 태어날 때부터 성품이 온화하여 여러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훌륭한 기독교인이겠는가? 슬프게도 그렇지 못하다. 필자도 성격적으로나 인격적으로나 기타 여러 면에서 너무도 허물이 많고 문제가 많은 사람임을 자인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도 필자는 이웃에게 "몹쓸 사람" 이라는 소리를 듣지 않고 살고 있다면 그것은 필자가 훌륭해서가 아니라 주님의 십자가의 보혈로 말미암아 죄 용서받은 십자가 사랑에 감격하여 변화된 때문이다. 또한 그 십자가 구속으로 말미암아 성령이 내안에 거하심으로 성령님에 의해 다스림을 받은 삶이 필자를 죄악의 구렁에서 건지고 허물의 거름더미에서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한가지 의문이 생길 것이다. 분명히 "오늘날 성령을 받았다고 말하는 수많은 사람들도 변화되지 못하고 비방의 대상이 되고 있지 않습니까?" 하고 말할 것이다. 맞다. 필자도 그런 경우를 수없이 목격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거짓 성령은 사람의 인격을 변화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거짓 영이 사람의 생각과 생활을 일시적으로 변화시키므로 그리스도인처럼 꾸며서 한때는 훌륭한 그리스도인처럼 행세하게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사람의 인격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능력은 주님에게만 있는 것이다(고린도후서 5:17).

   세상에 못되고 더러운 죄인의 생활을 청산하고 주님을 섬기노라고 간증했던 많은 자칭 그리스도인들이 결국 세상의 죄에 다시 빠진 경우를 보아왔다. 중생의 경험 없이 거짓 성령을 받아들일 수도 있다. 그들은 하늘나라의 의와 관계도 분깃도 없는 거짓 영을 받은 거짓 신자들일 뿐이다.

이러한 거짓 신자가 대부분인 한국의 교회들을 슬퍼하는 필자가 지나친 염려를 하는 것인가? "믿는 놈들"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는 거짓 교인들을 세례교인 삼을 뿐 아니라, 시키는 대로 열심히 맹종하고 물질적으로 잘 헌신하면 중요한 직책도 서슴없이 맡기는 기독교를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 중심의 신앙심이나 변화된 생활보다 외모를 취하는 이러한 잘못은 반드시 시정되어야 한다.

   행악의 종자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을 낳을 것이요 그들은 저주의 자식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며, 그들을 위하여 저주의 지옥불이 기다리고 있으니 우리는 슬퍼할 수밖에 없다.

   필자는 이제 본문 서두에 있는 갈라디아서 3장 10절을 중심으로 잘 믿는다고 하면서 어째서 저주 아래로 들어가는가 하는 근본적인 원인을 생각해 보고자 한다. 10절 말씀을 잘 분석해 보면 그들은 율법의 행위에 속하였기 때문에 저주 아래 있다고 말하고 있다. 도대체 율법의 행위로 완전할 수 있는 사람이 세상 어디에 있단 말인가! 인간이 자기 노력으로 의로워지고 천국 갈 수 있다는 말씀이 성경 어디에 나오는가? 성경에 행위의 완전함으로 천국에 갈 수 있다고 가르친 곳이 어디 있는가? 그런데도 오늘날 필자가 만나본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행위가 부족한데 대해서 그토록 떨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가 주님을 닮아가고 주님의 거룩한 삶이 우리 삶에서 나타나기를 소원하며 사는 것은 지당하다. 그러나 그 행위가 우리의 구원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필자는 교인들을 만나 상담할 때 "마태복음 25장의 열 처녀 비유 중 어리석은 처녀가 기름을 준비하지 못하여 잔치에 참여하지 못하였는데 집사님은 기름 준비를 다하셨습니까?" 하고 물으면 열 명 중 아홉은 "제가 부족해서..." 하고 말끝을 흐리고 있으니 울분이 터지지 아니할 수 있겠는가! 도대체 기름 준비도 안된 사람에게 무슨 세례를 주며, 집사, 장로의 직분을 맡긴단 말인가! 기름 준비가 되지 못하였으면 지옥의 형벌이 눈앞에 있으니 이 문제부터 해결해야 할 것이 아닌가!

   도대체 부족해서 구원받지 못하였다는 것이 무슨 궤변인가! 부족하니까 구원받아야 하는 것 아닌가! 수영을 잘하는 사람은 잘하니까 물에 빠져도 구원(구출)이 필요 없겠지만 수영을 못하는 사람(부족한 사람)은 그렇기 때문에 구원이 필요한 것이 아니겠는가! 이러한 웃지 못할 희극이 기독교인들에게 만연된 것은 바로 수많은 한국의 교회들이 행위로 구원받는 것처럼 가르치고 있다는 증거일 뿐이다. 이것은 수많은 사람들을 지옥의 저주 아래로 몰아넣고 있는 것이다.

   이제 하나님의 음성은 무엇인가? 죄로 말미암아 죄의 늪에 빠져서 헤어나올 수 없는 절망적인 죄인을 향해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태복음 11:28)고 하셨다. 예수님은 이제 그대의 죄 짐을 다 지셨다. 그대가 책임져야 할 죄는 아무 것도 없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대신 책임을 지셨기 때문이다(요한복음 19:30). 이것을 대속(代贖:대신할 '대', 죄속할 '속')이라하며, 그대의 죄를 대신 갚으셨다는 뜻이다. 그대가 할 수있는, 해야할 일이 있다면 그것은 "주여 감사합니다. 나의 죄를 이미 용서하셨으니 나는 오늘부터 죄인이 아닙니다" 이 한 마디를 외치는 것이다. 만약 그대가 중심으로부터 이렇게 깨닫고 외쳤다면 그대는 구원받은 것이요 거듭난 것이며 기름을 준비한 것이다. 그대가 지옥에 가야할 이유가 온전히 사라진 것이다.

   다시 말하거니와 그대의 종교적인 노력과 열심으로 죄를 해결하려는 것은 그대 스스로를 저주 아래로 끌고 가는 것이요, 예수님의 거저 주시는 속죄의 십자가를 순순히 받아 들이는 것은 그대를 저주의 지옥에서 건지는 것이다(갈라디아서 3:13). 문제는 그대의 선택에 달려 있다. 그대의 행위를 의지하고 지옥에 가는 것과, 예수님의 행위(십자가 속죄)를 의지하고 천국에 이르는 길이 그대 앞에 놓여 있다. 가인은 자기 행위(자기 생각대로의 제사)를 선택하였으나 아벨은 피(예수님의 피)를 선택했다.

   "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요한복음 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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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제 7 과

                       어린 자녀들과 아들들(4:1-16)


   4장의 첫부분에서 바울은 계속 율법 아래 있는 사람들과 은혜 아래 있는 사람들을 대조하고 있습니다. 그는 어린 자녀와 장성한 아들이라는 두 부류를 비유하고 있습니다.

4:1, 2 이것은 자기의 재산권을 그 아들이 어떤 성숙한 나이가 되면 넘겨주려고 하는 부유한 아버지의 어린 자녀에 대한 묘사입니다. (4:1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4:2 그 아버지의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있나니) 그러나 어린 자녀인 때에는 아직 미성년자로서 마치 종과 같은 상황에 있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이것은 하고 저것은 하지 말라는 말을 듣습니다. 그에게는 그의 재산을 관리하는 청지기와 그의 인격을 책임지고 있는 후견인이 있습니다. 그래서 비록 그 유산이 분명히 그의 것이지만, 그가 자랄 때까지는 그것에 관여할 수 없습니다.

4:3 이것은 율법 아래있는 유대인의 상태입니다. (4:3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 초등 학문 아래 있어서 종 노릇 하였더니) 그들은 어린 자녀들이며, 마치 종들처럼 율법에 의해 혹사 당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에 매여있는 것입니다. 이 표현은 유대 종교의 초보적인 원리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유대교의 예식과 의식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아버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을 위하여 계획된 것입니다. 조각들을 사용하여 산술계산의 기초를 배우거나, 그림들을 사용하여 사물을 알아 맞추거나, 알파벳을 배우는 어린 아이에게서 예를 찾을 수 있습니다. 율법은 완전한 그림자요, 묘사이며, 육체적이고, 외적인 것을 사용하여 영적인 의미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할례가 한 예입니다. 유대교는 육체적이요, 외적이며, 일시적인 것이고, 기독교는 영적이요, 내적이며, 영구적인 것입니다. 이러한 외적인 것들은 "자녀들" 에 대한 "속박" 의 한 형태입니다.

4:4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정하신 때는 2절의 예화에 있는 "아버지의 정한 때" 에 해당하는 시대를 말합니다. (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요컨대, 여기에서 우리는 구주의 신성과 인성에 대한 놀라운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주님은 여자에게서 나셨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단지 사람이셨다면, 주님께서 여자에게서 나셨다고 말하는 것이 아무 의미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사람으로 나실 수 있습니까? 우리 주님의 경우에는 그 표현 자체가 주님의 독특한 인성과 주님의 탄생의 독특한 방법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셨기 때문에 주님은 율법 아래에서 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드님으로서 주 예수님은 결코 율법 아래 계신 분이 아니시며, 율법을 주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자기를 낮추시는 은혜로 주님의 생명 안에서 율법을 존중하며, 주님의 죽음 안에서 율법의 저주를 담당하시기 위해 주님께서 만드신 율법 아래 자신을 놓으셨습니다.

4:5 율법은 그것을 어긴 사람에게 그 삯을 요구하는데 그 삯은 사망입니다. (5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 삯을 치루심으로 하나님 앞에서 사람들을 그 놀라운 아들의 신분으로 이끌어 들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주 예수님께서 인류의 한사람으로서, 유대 민족의 한사람으로서 세상에 오셔서 율법이 요구하는 삯을 치루셨습니다. 주님께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주님의 죽으심은 무한한 가치가 있으므로 아무리 많은 수의 죄인일지라도 충분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사람이시기 때문에 사람의 대속자로 죽으실 수 있었습니다. 고벳트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인자(사람의 아들)가 되심으로 사람의 아들들인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었다. 이 얼마나 놀라운 교체인가!" 라고 말했습니다.

   사람이 종이 된 동안은 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을 아들로 받으시기 위하여 그들을 율법의 구속에서 건져 주셨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과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의 차이점에 주목하십시오(롬 8:14과 16을 비교하십시오). 신자는 어린 자녀로서 하나님의 가족으로 태어납니다(요 1:12을 보십시오). 여기에서의 강조점은 아들로서의 특권과 책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탄생에 있는 것입니다. 신자는 아들로서 가족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즉시 아들이며 후사(상속자)로서 유업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신약성경에 있는 그리스도인에 대한 가르침들은 성도들 사이에서 아무도 어린자녀가 되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모두는 성숙한 아들들로 다루어집니다.

   영적인 의미에서의 양자됨은 현대 생활에서의 의미와는 다릅니다. 우리가 양자됨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다른사람의 자녀를 어떤 사람이 자신의 자녀로 삼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에서 양자됨의 의미는 신자들에게 성숙한 아들들이라는 신분과 함께 그 신분에 어울리는 모든 특권을 주는 것입니다.

4:6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그 신분의 위엄을 깨닫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그들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을 보내주셨습니다. (6 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성령님은 아들됨에 대한 자각을 하게 하시고 성도들로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문안하게 하십니다. "아바, 아버지" 는 다정한 문안의 형태이며, 아버지에 대한 아람어와 헬라어를 결합시킨 것입니다. 어떠한 종도 한 가정의 가장에게 이러한 방법으로 문안하지 않으며, 그것은 오직 가족 구성원들만의 것으로 사랑과 신뢰에 대한 표현입니다.

4:7 신자는 더 이상 종이 아니며, 율법아래 있지 않습니다. (7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 이제 그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하나님의 아드님이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모든 재산에 대한 후사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후사입니다. 하나님이 소유하신 모든 것은 믿음으로써 그의 것입니다.

   해리슨은 "주님의 사랑하시는 자녀여, 만유는 당신의 것이다. 당신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상상을 능가하는 재산의 실제에 대해 당신을 깨우기 위해 주님께서 고린도전서 3:22, 23에서 이것을 당신에게 말씀하셨다. 우주를 생각해 보라. 그것이 누구의 것인가, 주님의 것이기에 당신의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왕답게 살아가라" 고 말했습니다.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그리스도인의 어리석음(4:8-11)


   갈라디아인들은 우상과 신화적인 신들에 대한 속박 아래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이제 그들은 다른 형태의 속박에 속하였는데 그것은 율법의 속박입니다(4:8-11).

4:8 그들은 회심하기 전에 나무와 돌로 만든 거짓 신들인 우상을 섬기던 이교도들이었습니다. (8 그러나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 노릇 하였더니)

4:9 그러나 지금 갈라디아인들이 어떻게 자신들의 행위에 대해 변명할 수 있겠습니까? (9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더러 하나님의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저희에게 종 노릇 하려 하느냐) 그들은 하나님을 알았고, 혹 그들이 깊은 체험적인  방법으로는 주님을 몰랐을 지라도 최소한 그들은 주님께서 알게 하신 자들 즉, 구원받은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의 능력과 부 (그들이 상속받을)로부터 약하고 천한 일들로  돌아섰으며, 그일은 율법에 관련된 것으로, 할례나 성일, 식사에 대한 규칙들입니다. 그들은 다시 그들 자신을 구원하지도 부유하게 하지도 못하는 일에 속박시켰습니다.

   바울은 율법과 그 모든 예식들을 "약하고 천한 초등학문" 으로 분류했습니다. 이것은 바울이 하나님께서 주셨으며, 다른 곳에서 이 율법을 거룩하고 선한 것이라고 주장한(롬 7:12) 그 율법을 강한 어조로 묘사한 것입니다. 이 설명은 율법이 갈라디아서 3장에서 보여진 것처럼 어떤 목적과 어떤 시대를 위해 의도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죄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거룩함을 이룰 수 있는 사람으로서 율법을 사용하려는 것은 구원과 거룩의 유일한 길이신 그리스도를 대치하려는 것입니다. 율법을 그리스도와 견주어 본다면 그 율법은 약하며, 무익하고, 천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제정하신 율법은 그들의 시대와 장소에서는 아름다운 것이다" 하지만 그것들은 주 예수님으로 대치하려할 때 분명한 장애물입니다.

4:10 이것은 그리스도로부터 율법으로 돌아서는 우상숭배입니다. (10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그러나 갈라디아인들은 유대인의 안식일과 명절과 절기를 지켰습니다.

4:11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고백한 사람들이 아직까지 율법을 지켜서 하나님의 은총을 구하려 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표현했습니다. (11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도 날과 달과 해를 지킬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기쁜 얼굴을 구하기 위해 그들의 힘으로 그들이 무엇을 할 수 있다고 하는 율법을 지키는 것은 그들에게 강한 만족을 느끼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람이 어떤 능력을 가졌기 때문에 그 범위에서는 그들에게 구주가 필요 없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갈라디아인들에게 이러한 태도로 기록하였다면 오늘날 율법을 지킴으로 거룩에 도달하려고 하는 고백적인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어떻게 기록했겠습니까? 바울이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들어온 유전-사람이 임명하는 제사장, 제사장의 구별된 의복, 안식일 준수, 거룩한 장소, 초, 거룩한 물 등등-을 비난하지 않았습니까?


개인적인 호소(4:12-16)


4:12 분명히 갈라디아인들은 그들에게 처음 복음을 전하여준 바울에 대한 감사를 잊었던 것입니다. (12 형제들아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 너희가 내게 해롭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나 바울은 그들의 실패와 그들에 대한 근심 대신에 그들에게 "형제들" 이라고 문안했습니다.

   바울도 율법아래 있던 유대인이었습니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그는 율법에서 자유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율법에서 구출되었고 더 이상 율법아래에서 살지 않는 "나와 같이 되" 라고 말했습니다. 이방인인 갈라디아인들은 율법아래 있던 자들이 아니며, 지금도 율법 아래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유대인이었던 내가 너희와 같이 되어 이제는 이방인들이 늘 누리고 있었던 율법에서의 자유를 즐기고 있다" 고 말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내게 해롭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여기에서 사도바울이 무엇을 염두에 둔 것인지 아주 명확하지는 않습니다. 아마도 그는 갈라디아인들이 자신을 대우한 것에 어떠한 개인적인 침해도 느끼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일 것입니다. 그들이 바울로부터 거짓 선생들에게로 돌아선 것은 바울에게 개인적인 타격을 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에 타격을 준 것으로 그들 자신에게 해를 입힌 것입니다.

4:13 이 구절은 "육체의 약한 것으로" (다비역)라고 번역될 수 있습니다. (13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을 인하여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복음은 처음에 육체의 약한 것으로 그들에게 전해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종종 약한 것, 멸시받는 것, 가난한 것을 사람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하여 주님의 일을 이루는 수단으로 사용하십니다.

4:14 여기에서의 시험(temptation)은 시련(trial) 또는 검사(test)를 의미합니다. (14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바울의 병은 그 자신과 아마도 그에게서 듣는 사람들에게 시련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갈라디아인들은 바울의 육체적인 모습이나 언변 때문에 그를 거절하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그들은 바울을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즉, 하나님의 보내신 전도자로서, 그리고 심지어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영접하였습니다. 그들은 바울의 전하는 말씀을 바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습니다.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님의 전도자들을 대우하는 것에 관한 교훈이 됩니다. 우리가 그들을 진심으로 영접할 때 우리는 주님을 그렇게 영접하는 것입니다(눅 10:16).

4:15 그들이 처음 복음을 들었을 때, 그것이 그들의 영혼에 얼마나 부요한 복인지 깨달았습니다. (15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를 주었으리라) 그들의 감사가 너무도 커서 할수만 있었다면 그들의 눈이라도 바울에게 주었을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바울의 "육체의 가시" 가 안질이라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 감사의 정신이 어디에 있습니까? 불행하게도 아침 이슬과 같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4:16 바울에 대한 그들의 태도가 변한 것을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 (16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 그는 지금도 동일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으며, 정직하게 복음의 진리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만일 이것이 그들의 대적이 되었다면, 그들의 위치는 사실상 위험스러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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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제 2 과

                 바울의 사역에 대한 변증

                                                     (1:11-2:10)


   바울은 이제 그의 사역에 대한 변증을 시작합니다. 바울의 비판자들은 그에 대해 많은 신랄한 공격을 시작하였습니다. 의심할 것없이 그들은 바울의 메시지에 대한 신빙성을 부정하였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어느 곳에서도 바울이 할례나 다른 유대적인 의식을 제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전하는 것이 비 성경적이며 무지한 것이라고 비난했을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이력을 통해 여섯가지 효과적인 논지로 대답했습니다. 이 과에서는 그 중 다섯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1:11 첫째로, 그의 복음은 하나님께 계시로 받은 것이며 사람들과는 독립된 것입니다(1:11, 12) (1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려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 는 의미는 사람이 그 복음을 고안해 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잠시 이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12 바울의 복음은 사람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12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이것은 사람들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구원의 종류가 아닙니다. 바울은 그것을 어떤 사람에게서 받은 것이 아니며 책을 통해 배운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직접 계시받은 것입니다.

1:13, 14 둘째로, 바울이 그의 복음에 유대인의 율법을 포함하지 않았다고 해서 바울이 유대교에 대해 전혀 모른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13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핍박하여 잔해하고 14 내가 내 동족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유전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 나면서부터 또한 초등 교육에서부터 그는 율법에 젖어 있었습니다. 그는 교회에 대한 큰 핍박자가 되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는 조상들의 유전에 대해 여러 연갑자들보다 지나치게 열정적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율법을 제쳐놓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의 복음은 분명히 율법을 전혀 모르는 탓이 아닙니다. 그러면  왜 그는 복음을 전할 때 그것을 생략했습니까? 왜 그의 복음은 그의 배경과 그의 본능적인 기질, 그의 모든 종교적인 방향과 반대로 나아갔습니까? 간단하게 말하자면 그 복음이 자신의 생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에게 직접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1:15-17 셋째로, 바울의 사역은 처음 몇 년동안 다른 사도들과 독립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1:15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16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실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17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오직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바울은 이제 그의 복음과 관련해서도 다른 사람들과 독립되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가 회심한 후에 어떤 인도자들과 협의하거나 다른 사도들이 있던 예루살렘으로 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메섹으로 돌아왔습니다. 그가 예루살렘을 피하기로 한 결정은 다른 동료 사도들을 무시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는 부활하신 주님께로부터 이방인에 대한 특정한 사역을 사명으로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2:8). 그렇기 때문에 그의 복음과 그의 봉사는 사람들의 인정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으로부터 독립되었습니다.

   이 구절에 있는 몇가지 표현들은 주의깊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15절에서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라는 표현에 주목하십시오. 바울은 그가 태어나기도 전에 어떤 특별한 사역을 위해 하나님에 의해 구별되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또한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라는 말을 덧붙임으로 다메섹 도상에서의 자신의 회심을 나타내었습니다. 사실 그 때에 바울이 무엇을 받을만한 자격이 있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지옥에 던져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놀라운 은혜로 그를 구원하시고 그가 전에 잔해하려던 믿음을 전하기 위해 그를 이방인들에게로 보내셨습니다. 16절에서 그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작정하셨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이 세상에 주 예수님을 나타낼 수 있도록 우리 안에 하나님의 아드님을 계시하려는,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목적에 대한 놀라운 시각을 우리에게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우리 마음에 나타내시는 것은(16절)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통해 나타나시기 위함이며(16-23) 이러한 나타남으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기 위함입니다(24절).

   17절에서는 "아라비아로 갔다가"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모든 주님의 종들에게는 은둔과 묵상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모세는 40년간 사막 저편에서 보냈습니다. 다윗은 유대의 언덕에서 양들을 돌보는 동안 하나님과 단 둘이 있었습니다.

1:18-20 넷째로, 드디어 바울이 예루살렘을 방문하였을 때 그는 오직 베드로와 야고보만 만났습니다(18 그 후 삼 년 만에 내가 게바를 심방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저와 함께 십오 일을 유할 새 19 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하였노라 20 보라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이 아니로라). 그러한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그는 유대의 교회들에게 비교적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1:21-24). 자신이 다른 사도들과 독립적이라는 것을 더 나타내기 위해 바울은 회심후 거의 삼년동안 예루살렘을 방문하지 않았다는 것을 자세히 말하였습니다. 그는 게바(베드로)를 개인적으로 심방하려고 올라간 것이며 공식적인 방문은 아니었습니다(행 9:26-29). 그곳에 있는 동안 그는 주님의 형제 야고보도 만났습니다. 야고보는 열두 사도가 아니었으나 바나바처럼 아주 적은 의미로 사도처럼 여겨졌습니다(행 14:14). 그는 단지 15일을 머물렀으며 그 기간은 결코 훈련받기에 충분하지 못한 기간일 것입니다. 더욱이 본문은 그가 그 주님의 종들과 완전히 동등하였다고 나타내고 있습니다.

1:21, 22 이 후에 그는 길리기아(다소가 있는)와 수리아 지역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으며 그렇기 때문에 유대에 있는 여러 교회들이 그를 개인적으로 알지 못하였습니다( 21 그 후에 내가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에 이르렀으나 22 유대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들이 나를 얼굴로 알지못하고) 1:23 그들 모두는 전에 그리스도인들을 아주 잔인하게 다루던 사람이 이제 그리스도인이 되어 다른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한다고 알고 있었습니다( 23 다만 우리를 핍박하던 자가 전에 잔해하던 그 믿음을 지금 전한다 함을 듣고). 1:24 물론 이것은 바울의 삶에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행하신 것이기 때문에 그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만들었습니다 ( 24 나로 말미암아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니라). (우리의 변화된 삶으로 인해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까?)

   다섯째로, 후에 바울이 예루살렘을 방문했을 때 사도들은 그의 복음이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했습니다(2:1-10). 교회가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에 사도들은 다소간에 그 도성을 본부로 삼았고,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모교회" 로 여기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기가 예루살렘 사도 중 한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다소간 열등한 자라는 비난과 싸워야 했습니다.

2:1 몇몇 성경학자들은 이 예루살렘 여행이 사도행전 11:30-12:25 에 기술되어 있는 기근 방문이라고 믿습니다( 2:1 십사 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노니). 그러나 모든 증거는 갈라디아 2:1-10 이  사도행전 15:1-29 의 회의를 위한 방문과 연결되는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에서의 십사년이 그의 회심 후인지 첫 번째 방문 이후를 말하는 것인지 우리는 알 수 없지만 우리가 아는 것은 바울은 그리스도께 가도록 계시받았고 그의 동역자인 바나바와 바울의 사역을 통해 얻은 이방인 회심자인 디도도 함께 갔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계시를 인하여" 올라갔다고 하는 사실은 사도행전 15:2, 3절의 안디옥에 있는 교회가 그를 보내었다는 것과 모순되지 않습니다. 둘 다 사실입니다. 유대주의자들은 완전한 구원을 위해 디도가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사도바울은 복음의 진리가 걸려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완강히 반대했습니다. (후에 바울이 디모데를 할례한 때에는 중요한 원리가 연루되지 않았습니다 : 행 16:3)

2:2 E. F. 케반은 "바울은 의롭게 되는 할례는 생각이 없는 사람들이 그렇다고 받아들이는 것으로 전혀 깨끗케 하는 의식이 아니라고 보았다. 할례 아래로 들어가는 것은 율법준수라는 율법적인 방법으로 의롭게 되려고 하는 것이며 그것은 바로 은혜의 근거들을 부인하는 것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2절에서 사도는 자기가 예루살렘에 도착했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말하고 있습니다. (2  계시를 인하여 올라가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저희에게 제출하되 유명한 자들에게 사사로이 한것은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왜 바울은 온 교회에서 하지 않고 영적 인도자들에게 사사로이 말했을까요? 그가 전한 것에 어떤 잘못이 있는 경우에 그들에게 그의 복음을 인정받기 원했던 것이었을까요?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사도바울이 지금까지 말했던 것과는  전혀 반대되는 것입니다. 그는 그의 메시지가 하나님께서 그에게 계시로 주신 것이라고 주장햇습니다. 그는 그가 전한 교훈들이 진리임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참된 설명은 다른 면으로 봐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일반적인 예의에 대한 문제로서 인도자들에게 먼저 이야기한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의 복음에 대한 진실성을 충분히 납득시킬 수 있는 바람직한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어떤 질문이나 어려움들을 갖게 되었을 때, 바울은 처음에 그들에게 답을 하기 원했습니다. 그 후에 그는 다른 사도들의 전적인 지원을 받으면서 교회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을 다룸에 있어서는 항상 갑정적인 말들로 인해 무리가 요동될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처음에 그의 복음을 사사로이 제시하여 분위기 적으로 군중들의 흥분이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없애기 원했던 것입니다. 바울이 그렇게 하지 않고 다른 방법으로 행했다면 심각한 논쟁이 일어나 교회가 유대인과 이방인의 두쪽으로 나뉘었을 것입니다.

2:3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는 표현은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여행한 이유와 다른 면으로는 유대주의자들이 그의 사역을 심각하게 침해하고 있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것은 아마도 그가 먼저 유명한 자들에게 사사로이 나아간 것과 계명을 범함으로 그 여행을 위태롭게 하기 원치 않았다는 설명일 것입니다.

   율법주의자들의 질문은 디도의 경우에 절정에 달하게 되었습니다(3 그러나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라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아니 하였으니). 예루살렘 교회는 이 이방인 회심자를 교제권 내에 받아들일 것인지 아니면 먼저 할례를 받도록 주장할 것인지 결정해야 했습니다. (할례는 남성들에게 행하는 작은 외과 수술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그의 자손들에게 이 예식을 제정하셨을 때 그들과 언약의 표시 즉,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고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을 의도한 것이었습니다(창 17:1-10). 이것은 육체적인 표시일 뿐 아니라 영적인 상징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그가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표시로 할례를 행했습니다(롬 4:11). 유대인들은 이 할례의 영적 의미를 곧 잊어버렸고 이것을 단지 한 예식 또는 행사로 전락시켰습니다. 그래서 이 의식은 그들과 하나님과의 관계만큼이나 가치를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신약에서 할례는 하나님께서 이방인과 유대인을 동일하게 은혜로 다루실 때부터 더 이상 계명이 아니었습니다. 초대교회시대의 한 유대인 신자의 무리가 구원의 필요조건으로 할례를 주장했었습니다. 그래서 그 당파를 "할례당" 이라고 일컫게 되었습니다(갈 2:12).

   상당한 논의와 토론 끝에 사도들은 할례가 구원의 필요조건이 아니라고 결정했습니다. 바울이 이겼고 승리가 울려퍼졌습니다! (예루살렘에서의 이 회의에 대한 공정하고 자세한 설명이 사도행전 15장에 나와있으며, 이점에 대해 주의 깊게 상고해 보십시오)

2:4 4절은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이끌려 온 근본적인 이유를 제시하고 있습니다(4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 까닭이라 저희가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2절의 첫부분과 4절의 첫부분을 연결해 보면 우리는 "계시를 인하여 올라가...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 까닭이라" 고 읽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전에 안디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제시해 주는 것입니다(행 15:1,2). 예루살렘으로부터 온 몇 명의 유대인 선생들이 그리스도인의 태도를 취하며, 안디옥 교회에 어찌하든지 가만히 들어와서 구원의 필수조건으로 할례를 가르쳤습니다(행 15:1). 바울과 바나바는 그들에 대해 강력하게 반대했습니다.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바울과 바나바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가서 그곳에 있는 사도들과 장로들로부터 견해를 구하기로 하였습니다.

   바울은 유대주의자들과 정면으로 대항했습니다. 한 순간도 그들의 구원을 위한 할례의 주장에 대해 굽히지 않았습니다. 그는 복음의 진리가 위태롭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5 우리가 일시라도 복종치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로 너희 가운데 항상 있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이 길에서 믿음을 위해 싸운 사람들에게 얼마나 많은 빚을 지고 있는지요! 이 복음의 진리가 우리에게 이어진 것에 대해 그들에게 감사합시다.

2:6 예루살렘에서 인도자로 존경을 받는 그들은 바울의 메시지나 사도로서의 그에 대해 아무것도 덧붙이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사항인지요! (6 유명하다는 이들 중에 ..본래 어떤 이들이든지 내게 상관이 없으며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나니..저 유명한 이들은 내게 더하여 준 것이 없고) 유대인 인도자들은 바울을 동등하게 영접하였으며 그의 복음이 어떠한 면에서도 부족하지 않다고 인정했습니다. 비록 바울은 그들과 독립적이었고, 그들에게서 배우지 않았으며, 그들과 아주 적은 접촉만 있었지만, 그들이 전한 복음은 바울과 정확하게 같은 것이었습니다. (6절의 어투는 바울이 다른 사도들을 깎아 내리려고 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단지 "어떤이들이든지" 다시말하면, 주 예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주님의 제자들에게 그가 존중해야 할 어떤 뛰어난 권위도 주시지 않았다고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외적인 구분으로 사람을 받으시지 않습니다.)

2:7.8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은 베드로가 유대인들에게로 보냄을 받은 것과 같이 바울이 무할례자(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위임된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7 도리어 내가 무할례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기를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맡음과 같이 한 것을 보고 8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에게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두 사람은 동일한 복음을 전했으나 다른 민족을 대상으로 하게 되었습니다.

2:9 분명한 교회의 기둥인 야고보, 게바(베드로)와 요한 조차도 하나님께서 바울을 통해 일을 하신다고 자각했으며, 그와 바나바에게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부탁하는 교제의 악수를 나누었습니다 (또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기둥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나와 바나바에게 교제의 악수를 하였으니 이는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저희는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 이것은 공적인 안수식의 의미가 아니라 바울의 사역에 대한 그들의 사랑의 관심을 나타낸 것입니다.

2:10 한가지 그들이 바울과 바나바에게 제안한 것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하는 섬김이었으며 바울은 그것을 행하기를 항상 힘썼다고 말했습니다( 10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 생각하는 것을 부탁하였으니 이것을 나도 본래 힘써 행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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