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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6.01.07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시험하고 확증하라 - 거듭났느냐?

                너희믿음에 있는가

                              시험하고 확증하라


                                거듭났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한복음 3:3).


   "거듭난 적이 있습니까?" 필자가 최근에 어떤 장로님을 만나서 물었다. 그는 대답하기를 "학창 시절에 교회에 입문했습니다만 군대에 가서 신앙이 나아졌습니다. 뭐, 거듭났다고까지야 말할 수 있겠습니까마는 아무튼 군대에서 신앙의 진전이 있었다고 봐야지요." 우물쭈물 허둥대는 그를 바라보며 처량한 생각이 들었다.

   오늘의 수많은 기독교 신자들에게 거듭남을 수없이 묻고 있지만 대부분 횡설수설하며 거듭남의 의미도 모른 채 방황하고 있다. 얼마나 슬프고 안타까운 현실인지 모른다.

   여기서는 거듭남에 대한 오늘의 기독인들의 생각들을 살펴보고 거듭남의 본질에 대해서 생각해 봄으로써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이 거듭나는데 도움을 주고자 한다.이해를 돕기 위해서 필자가 질문했을 때의 반응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거듭남을 질문했을 때의 첫 번째 반응은 "그럼요. 거듭나지 않고 어찌 교회에 다닙니까?" 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거듭났느냐"고 물으면 대답은 여러 가지다. 그들은 거듭남을 자신의 변화된 모습으로 설명하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어떤 이는 자기는 불교 신자였는데 수십 년간 믿던 불교를 정리하고 왔으니 거듭난 것 아니냐고 대답한다. 불교 신자가 우상을 정리하고 하나님을 믿기로 결정하였다면 이는 대단한 변화임에 틀림없다. 불교가 무엇인가? 십계명 중에 첫 계명과 둘째 계명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즉 기독교 신앙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종교 아닌가? 그와 같은 종교를 정리하고 하나님께 귀순하였다면 당연히 칭찬 받아야 할 간증거리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이것이 거듭남의 근거는 전혀 아니다. 그는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인가? 하나님 아버지를 모르고 살다가 하나님 아버지께 돌아오기로 결심하고 행동에 옮긴 위대한 결단이다. 그는 이제 하나님께 왔으니 정식으로 등록해야 할 것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다니는 회사를 옮기기로 결심했다면 다른 회사에 이력서를 내고 입사절차를 밟아야 한다. 이것을 성경에서는 거듭남이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또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두 번째로 그들의 대답을 들어보면 자기는 예수 믿기 전에 술에 중독되었던 사람인데 지금 술과 담배를 정리하여 온전히 새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도 엄청난 변화임에 틀림없다.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술과 담배를 즐기고 있다면 누가 들어도 가짜라고 할 것이다. 이것은 비단 한국뿐만 아니라 미국을 비롯한 외국도 마찬가지다. 필자가 알고 있는 여러 외국의 신실한 성도들은 한결 같이 술과 담배 근처에도 가지 않는다.

   오늘날 한국의 상당수 기독인들이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술 담배를 하는 것을 보는데 이것은 전적으로 잘못된 것임에 틀림없다. 성경에서도 술을 금하거니와 실제 술 담배는 의학적으로나 간증적으로도 잘못된 것이다.

   술 이야기가 나왔으니 경험담 한마디 하고 싶다. 오래 전에 어떤 구도자가 "술을 적당히 먹으면 되지 왜 꼭 금해야 되는가?" 하고 계속 물었다. 아무리 이해시키고 말씀을 보여줘도 막무가내였다. 필자는 할 수 없이 이렇게 물었다. "당신에게 이렇게 성경공부를 해주니 나를 좋게 생각하고 있지요?" 하니 그렇다고 대답하였다. 나는 또 묻기를  '그런데 만약 그대가 여기서 가다가 보니 내가 어느 술집에서 술을 먹으며 담배를 피우는 것을 보았다면 내일 나에게 성경 배우러 오겠소?" 하니 그 때부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와 같은 이야기는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깊이 생각해 보아야할 이유가 있다고 생각된다.

   필자의 아는 성도들이 현재 직장에서 얼마나 고통을 당하고 있는지 아는가? " 김 과장님은 장로라도 적당히 술을 드시는데 당신이 뭐 잘났다고 혼자만 술잔을 안 받느냐?" 하고 핍박받는 이야기를 나는 수 없이 들어왔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도 이런 경험이 있으리라.

   그와 같은 오늘의 기독교 현실에서 술 담배를 끊고 주님을 섬기기로 결심하고 실천하여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실로 대단한 신앙의 결단임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자기는 거듭난 사람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일리는 있다. 그는 생각할 것이다. "나는 다른 사람보다 확실하게 정리하고 분명한 간증으로 믿으니 거듭난 삶이 아니냐? 내가 새로운 삶을 살고 있는데 어찌 거듭나지 않았단 말인가. 나는 술 담배뿐만 아니라 옛날의 습관과 행실도 다 바뀌고 전혀 다른 사람으로 사는데 왜 거듭나지 못했다고 하는가? 옛날의 나를 알고 있는 사람은 요즘 내 모습을 보고 얼마나 놀라는지 아는가? 나는 요즘시간만 나면 전도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버렸는데 내가 거듭나지 못했단 말인가" 하고 항변할 것이 분명하다.

   필자도 독자들의 이런 마음을 다 헤아리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의 거듭났다는 항변에 동의할 수 없다. 그 이유는 이 단원의 마지막에 거듭남이 무엇인가를 밝히면 다 이해되리라고 생각된다.


   세 번째로 거듭남의 질문에 대한 답변은 무엇인가? 어떤 권사님의 답변인데 그는 말하기를 "날마다 거듭나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생각하여 보자. 어떤 아이에게 아빠를 가리키며 "너의 아빠니? 너를 낳아주었니?" 하고 물었다면 뭐라고 대답해야 하겠는가? 만약 아이가 "네! 나는  날마다 태어나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이야기인가. 거듭남은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 나는 것일 진데 결단코 여러 번 날 수 없는 것 아닌가?

   그에게 더 이상 교제는 못했지만 만약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면 아마 그는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고린도후서 4:16) 하는 말씀 정도로 답변하였을 것이 분명하다. 거듭난 성도가 주님과 함께 살아가면서 날마다 새로운 기쁨, 새로운 깨달음, 새로운 힘을 받아서 살아가는 일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것은 날마다 때마다 이루어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가끔 이루어짐이 안타까운 것이다. 그럼에도 이것은 이미 거듭난 사람의 삶을 이야기하는 것이지 거듭나는 것은 이것과 전혀 다른 경험이다.


   거듭남에 대한 오류는 또 있다. 네 번째 이야기를 해보자. "거듭남이요? 우리가 어떻게 감히 거듭났는지 아닌지 말하며, 또한 그것을 알 수 있단 말입니까?" 필자의 질문에 대한 어떤이의 답이다.


   성경은 여기에 대하여 무어라고 말하고 있는가? 베드로전서 1장 23절에서 베드로 사도는 적절한 답변을 해주고 있다. "...너희가 거듭난 것이...". 분명하게 거듭난 사실을 피차에 알고 있었다는 것을 확실하게 말하고 있지 아니한가. 누가 무어라고 해도 신자가 거듭난 사실은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우리는 세속 종교처럼 알지 못하는 우상을 막연한 믿음으로 섬기는 사람들이 아니다. 우리의 믿음은 분명한 사실에 근거하여 믿는 것이니 그러므로 참된 진리이다. 거듭난 사실도 확인 못하고 믿는다면 나무 밑에 단을 쌓고 복을 줄 수 있는지 아닌지도 모르고 복 달라고 절하는 샤머니즘과 무엇이 다른가? 알지 못하고 믿거나 분명치 않게 믿는 것은 진정한 기독교 신앙이 아니다. 여러 번 강조하거니와 기독교는 진정한 의미에서 종교가 아닌데 요즘은 종교화되어 타락의 늪에 이미 깊이 빠져있음을 탄식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분명히 밝히거니와 종교는 사람의 영혼을 건지지 못한다.  종교에는 희망이 없다. 그들은 거짓으로 희망을 준다고 말하며 희망이 있는 것처럼 꾸미는 것이다. 기독교가 종교의 늪에서 회개하고 성경으로 돌아오지 아니하면 결코 희망이 없고 수많은 사람들을 예수님 이름 팔아서 속이는 사기 행각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다섯 번째를 말해보고자 한다. "나는 집사(혹은 장로)이며 열심으로 섬기고 있는데 왜 거듭나지 못했겠느냐"고 화내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억울하고 원통하여 필자에게 대들기까지 한다. 참으로 안타깝고 불쌍한 모습이다. 그들이 그 상태로 하나님의 심판대까지 간다면 얼마나 원통하겠는가.

   분명히 말하거니와 교회에 헌금을 많이 바치고 삶을 드려 헌신하고 죽도록 충성한 사람들일지라도 열심 없는 사람들보다 천국에 가는데 있어서 조금도 도움 되는 것이 없음을 알아야 한다. 그들은 차라리 열심이나 없었으면 절망 중에 겸손하여 십자가를 붙들고 거듭났을지도 모르리라. 그들의 열정이 오히려 그들을 지옥에 끌고 가는 무기가 되다니, 얼마나 애통한 일인가. 바울은 여기에 대하여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의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다"(로마서 10:3)고 깨우치고 있다.

   거듭난 사람에게는 "열심"이 상급이 되지만 거듭나지 못한 죄인의 열심은 지옥에 가게 하는 자살무기가 되는 것이다. 표현이 좀 과격해도 사실이니 어찌할 수 없다.

   또 한 사람의 이야기만 더 말하고 싶다. "거듭남이요? 그것은 목사님이나 장로님들이나 가능한 이야기지 우리 같은 사람들이 어찌 감히 거듭남을 말하겠습니까?"  이와 같은 사람들은 거듭남을 믿음의 높은 수준으로 이해하고 있는 경우이다.  그러나 알 것은 거듭남은 믿음의 높은 수준이 아니라 가장 기초요 시작이다.

   그렇다면 거듭남은 무엇인가? 거듭남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앞에 열거한 예를 생각하며 살펴보는 것이 좋으리라고 생각된다. 열거한 내용을 분석해보면 거듭남을 생활의 변화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결심하고 좋지 못한 습관이나 행동을 버리고 새 사람이 되면 사람들은 그들을 칭찬하게 마련이다. 다시 말하면 개과천선(改過遷善)하여 사는 것을 거듭남이라고 착각한다.

   개과천선은 세상에서나 신앙 안에서나 대단히 좋은 일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개과천선과 거듭남은 분명 다르다. 이것을 착각하여 진짜 같은 가짜 그리스도인들이 수없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개과 천선은 거듭남을 경험한 사람들의 열매이다.

   개과천선은 행위를 이야기하는 것인데 거듭남과 행위는 전혀 관계가 없다. 다음 말씀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디도서 3:5).

   이 말씀에서 보듯이 거듭남, 즉 중생은 행위가 아니다. 거듭남은 두 번 태어난다는 뜻으로서 이 세상에 마귀의 자녀로 태어난 인생이 하나님의 자녀로 두 번째 태어난다는 말이다. 태어난다고 하는 것을 생각해 보라. 어미가 낳아주는 것이지 자신이 스스로 자기 노력으로 자기를 만들어 가는 과정이 아니지 아니한가.

   거듭남의 특징은 그 과정이 우리의 노력에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에게 있는 것이다. 요한복음 1장 13절에 보면 자녀 되는 과정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오늘날 모태교인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많은데 집안이 다 기독교 집안이라고, 어려서부터 그속에서 자라났다고 하여 거듭난 것은 아니다. 이는 다 혈통을 좇아가는 것이다. 또 힘을 다하여 열정적으로 주님을 섬기느라 좇아 다니는데 이것은 육정을 따르는 것이다. 예배당에서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울면서 금식 기도한다고 거듭난 것이 아니다. 이것은 다 육정적인 것이다.

   거듭난 증거를 물으면 간증할 것이 없으니 교파 자랑, 목사님 자랑, 교회 규모 자랑, 교인 수 많은 것 자랑 등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허탄한 자랑만 늘어놓는 거짓 신자들은 모두 지옥에 가는 줄 알라. 이것이 다 사람을 좇아가는 것이다. 사람을 좇아가는, 사람에게 잡혀있는 오늘의 불쌍한 기독교인들이여, 지옥을 향하여 가고 있는 그대의 슬픈 운명을 하루 빨리 깨달으시라.

   거듭남을 다시 이야기 하여보자. 먼저 말한 대로 하나님의 아들로 두 번째 태어나는 것이다. 그것은 요한복음 8장 44절에 보면 우리는 마귀 자식으로 태어났다고 깨우치고 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 인간은 누구나 마귀 자식으로 태어난다. 그러기 때문에 그 상태 그대로 죽으면 아비된 마귀 따라 지옥에 간다. 그런데 아비를 바꿔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면 그것이 거듭(두 번) 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거듭남은 출생사건이다. 사실이 이러한데도 거듭났느냐를 물으면 행위에 속한 이상한 이야기만 늘어놓으니 답답하지 않겠는가? 결국 하나님의 자녀로 두 번째 태어난 적이 있느냐 하는 질문인데, 여러 말 필요 없이  아니면 아니고 맞으면 맞는 것이지 다른 말이 필요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난 경험이 없이 날마다 무턱대고 하나님을 향하여 아버지라고 불러대니 하나님도 참 난처할 것이리라. 분명히 하나님은 그들을 심판 날에 모른다 하실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거듭나는가? 성경은 인간을 마귀 자녀로 태어났다고 하였지만 또 다른 곳에서는 죄인으로 태어났다고 증거하고 있다(시편 51:5). 그러므로 죄인이라는 뜻은 마귀 자녀라는 뜻인바 예수님의 피 공로로 죄 용서함 받아 죄에서 자유를 얻는 것이 거듭나는 것이다. 죄인으로 태어나 마귀 자식의 신분으로 지옥에 갈 불쌍한 인생이 예수님의 피 공로로 죄 용서함 받아 천국에 갈 의인의 신분이 되었다면 이는 거듭난 것이 분명한 것이다. 십자가에서 당신의 모든 죄가 해결된 사실이 당신의 것이 되었는가? 그러면 당신은 죄인도 마귀 자식도 아니며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이것을 네가 믿느냐?"  당신은 어떻습니까?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한복음 1:29).

Posted by 행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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