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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5.12.27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시험하고 확증하라 - 믿음 좋은 집사님들

너희믿음에 있는가

                                        시험하고 확증하라


                                          믿음 좋은 집사님들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마태복음 3:10).


   이 말씀은 한국교회가 새겨야할 추상(秋霜)같은 경고의 말씀이다. 한국교회는 이 말씀 앞에서 울어야한다. 떨어야 하며 통곡하며 자신을 점검해야 한다.

   당연히 천국에 갈 것으로 생각했던 수많은 교회 지도자들, 직분을 맡아 충성을 다했던 사람들이 지옥으로 떨어졌을 때의 모습을 상상해보라. 반드시 천국에 간다고 자타가 공인하는 사람들이 무더기로 지옥에 떨어져 이를 갈며 서로 싸우고 증오하며, 또 뜨거운 불 고통을 견디면서 영원히 살아야 할 것을 생각해보라. 평생을 하나님만 사랑하며 온갖 고난과 슬픔을 참으면서 인내로 견디어온 불굴의 신앙인들이 지옥에 갈 수도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생각해 본적이 있는가.

   결혼을 반납하고 평생 처녀와 총각으로 지내면서 일평생 하나님을 위하여 충성을 다 바치고 하나님에게 버림받을 수 있다는 말이 독자들에게는 어떻게 들리는가.

   그러나 이와 같은 일이 이 글을 읽는 그대의 현실일 수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라. 하나님의 판단은 냉정하다. 동정이나 치우침이 없음이 분명하다. 하나님은 공의롭기 때문이다.

   공의의 기준은 무엇인가? 셩경말씀이다. 하나님은 말씀대로 심판하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 기독교 지도자들이나 그 추종자들은 말씀을 두려워하지 않는 경향이 있으니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필자는 제목을 "믿음 좋은 집사님들"로 정했다. 왜 이 제목을 선정하였는가? 한국의 기독교 사회에서 "믿음이 좋다"는 말은 흔하게 쓰일 뿐만 아니라 이것이 믿음의 척도를 나타내는 말로 쓰이고 있음에 틀림없다.

   먼저 알 것은 "믿음이 좋다"라는 단어가 신구약에 전혀 보이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성경에 없는 단어가 한국의 기독교를 휘젓고 다닌다고 하는 것은 한번쯤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가 아닐까?

   물론 신앙생활에 있어서 성경에 있는 단어만 구사해야 된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는 간과하기에는 너무 중요한 문제이다. 필자는 사전을 두루 찾아보아도 믿음이 좋다는 말이 도무지 없음을 보고 충격을 받은 지 오래다.

   한국의 기독교에서 믿음이 좋은 집사님이라는 말은 널리 쓰이고 있는데, 그러므로 필자는 어떤 분들이 믿음이 좋다는 말을 듣는가 깊이 생각해 보았다.


   첫째는 믿음 좋은 집사는 예배당에 잘 출석하는 사람들이다. 신자가 예배당에 잘 출석하는 일은 당연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내면에 믿음이 성숙하지 못한 상태에서 열정적으로 출석만 한다고 하여 믿음이 좋다고 말할 수 있는가? 진실로 믿음이 좋다고 하는 어떤 집사님에게 물어보았다.

   "20여 년간 주일성수하고 계시다는데 성경의 주제가 무엇입니까?"

   "글쎄요 무어라고 말을 못하겠네요. 배우기는 배웠는데 기억이 잘 안 나네요."

   이와 같은 비슷한 답변을 수없이 듣는다. 성경의 주제도 파악하지 못하고, 내 죄가 어떻게 되었는지 깨닫지도 못하고 성경책만 들고 열심히 자리만 지킨다고 믿음 좋은 집사님인가? 예배당 출석하는 일이 대단히 중요하지만 믿음의 본질도, 성경의 주제도 깨닫지 못하면서 출석만 잘하면 그러한 사람을 천국에서 만나볼 수 있을까? 슬픈 일이다.


   두 번째로 믿음 좋은 집사는 목사님 말씀에 순종 잘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종을 순종하는 일은 대단히 중요하고 성경의 가르침이기도 하다. 필자도 목회하면서 주의 종들의 가르침에 순종해야 한다고 수없이 가르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 말씀을 따라서 순종하고 복종해야 할 것이다. 주의 종이 성경 말씀과 관계없이 잘못된 길로 가르쳐도 맹종하라는 뜻은 아니다.

   신앙은 인격적인 것이다. 그리고 생명의 활동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이해하는 능력이다. 교회는 이와 같은 생명들이 모인 유기체이다. 그래서 생명의 교제를 나눈다. 그 중심에는 성경이 있다. 성경의 범위 안에서 교제하고 내용을 따라서 즐거워하고 인도하심 따라서 살아가고 역사하심을 따라서 그 열매를 누리는 축복된 삶의 현장이다.

   그러므로 가르치는 자도 성경의 범주 안에서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생명력이 있는 말씀을 가르쳐야 하며, 듣는 자도 성령님의 가르침에 따라 생명력 있는 귀로 들으며 교제하는 현장이 되어야 한다. 교회는 사람들의 인격적인 교제를 나누는 곳이 아니다. 그러므로 목사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필연적인 것이지만 가르치는 자도 말씀 중심이어야 하고, 순종하는 자도 말씀 안에서 분별하여 순종하여야 한다.

   다시 한번 말하거니와 교회는 성경을 중심으로 모여서 성경 안에서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잔칫집이요 아름다운 교제의 현장이다.

   어떤 사람이 필자에게 말하였다. 자기는 진리를 알고자 하여 친구를 따라서 교회에 상당 기간 출석하였으나 진리를 알 길은 없고 설교 내용은 늘 설교자의 자랑이나, 잘 믿으면 축복 받는다는 축복론이나, 헌금 내면 잘 된다는 헌금 강조론이 대부분이었다고 했다. 그는 답답한 마음으로 교회를 그만 두었다고 했다.

   어떤 성도는 어떻게 하면 천국에 갈 수 있느냐 물으니 목사님 대답이 "새벽 기도를 열심히 나오시오" 하는 것이었다. 이런 말을 어찌 순종할 수 있는가.


   세 번째로 믿음 좋은 집사는 헌금 많이 내는 사람이다. 일반적인 교회는 대부분 기명헌금을 하기 때문에 누가 헌금을 내는지 다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큰 헌금을 내고 교회재정을 넉넉하게 하는 집사는 당연히 목사님의 사랑과 칭찬을 독차지하기 마련이다.

   교회가 운영되는데 있어서 돈의 역할은 상당히 중요하다. 돈으로 전도하는 것은 아니지만 전도하는 데는 돈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헌금 많이 내는 사람은 곧 믿음 좋은 사람의 등식은 맞지 않다고 본다. 그렇다면 가난한 자의 설 땅이 어디 있는가. 가난한 자는 하나님이 버리시는가? 가난한 자는 하나님도 섬길 수 없는가?

   예수님은 가난한 자의 친구가 되셨는데 오늘날 기독교는 가난한 자에게 친구가 되기는커녕 오히려 그들에게 상처를 주고 고통을 주고 눈물을 주어 울면서 기독교를 등지게 하고 있다. 기독교를 등지는 그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은 계시지만 하나님을 섬길 방법을, 장소를 찾지 못하는 것이다. 참으로 슬픈 일이다.

   한국의 기독교가 양적으로 팽창하여 엄청나게 큰 건물을 소유하고 그 안에 비싼 장식물로 치장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하나님을 예배한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수많은 사람들을 실족시키고, 순수하게 하나님을 믿고자 하는 사람들을 실망시킨 죄악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보라, 저 거리를 방황하는 불쌍한 영혼들을! 그들은 한때 하나님을 사랑하고 눈물을 흘리며 찬송을 불렀고 주님 없이는 살 수 없다고 간증하였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힘을 다하여 헌금을 냈으며 피곤한 가운데도 정규예배에 빠지지 않고 참석했으며 한때는 새벽기도도 열심히 했던 자들이다. 지금은 하나님을 믿지만 교회에는 나가고 싶지 않다는 고백과 함께 슬픈 눈물을 흘리는 자들이다.

   한국 교회는 이 사람들을 책임져야 할 것이다. 믿음 좋은 집사님들을 헌금의 액수로 판단하고, 그들의 직업으로 판단하고, 사회적 수준으로 판단하는 냄새나는 기독교는 개혁되어야 한다. 그들의 마음속에 지옥이 있는지 조차도 알지 못하는 빈 깡통인데 웬 감투는 그렇게도 많은지!

   얼마 전 필자가 만난 구도자는 아무것도 모르고 하나님을 믿어 볼까 하여 교회에 출석하였는데 얼마 나가지 않아서 집사를 하라고 하여 혼비백산하고 놀라며 못하겠다고 하니, 왜 못하느냐고 묻더란다. 그는 말하기를 내가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데 무슨 집사를 한단 말인가 하니, 집사 직분을 하다보면 다 알게 된다고 하였단디. 마지못하여 집사를 하고 있는데 그때부터 직접, 간접 방법으로 헌금을 강요하기 시작하여 마음속에 부담을 갖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더 고통스러운 것은 나 자신의 신앙도 감당하기 힘들고 이제 불과 몇 년 다녔지만 무엇이 무엇인지 모르겠는데 구역장으로 임명하여 가르치라 하니 참으로 힘들고 어려워서 하루하루 버티기가 고통스러웠다고 했다.

   예수 믿는 것은 기쁨이요 안식이라 하는데 나는 왜 이렇게 예수 믿기가 힘든가. 차라리 하나님도 십게명도 몰랐을 때는 평안하게 살았는데 어설피 알고 보니 버릴 수도 없고 따라갈 수도 없고 눈물의 나날을 보내다가 결국은 결심하고 하지 않아도 될 이사를 하면서 교회를 졸업하였다고 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기독교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생각하여 보자. 서두에도 말했듯이 믿음이 좋다는 말은 성경에 없는 말이다. 무슨 믿음이 좋은 믿음이 있고 나쁜 믿음이 있는가. 이것은 사단이 교묘하게 속이기 위하여 만들어낸 단어가 분명하다. 오늘날 수많은 신자들이 이 단어에 속아서 자신은 하나님을 잘 믿으며 구원을 받았으며 틀림없이 천국에 간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한 사단의 속임수다. 왜 속임수인가?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믿음이 좋다는 사람들의 상태는 사실상 믿음이라고 하는 포장 속에 잘 감추어진 행위들이다. 그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깨달음과, 깨달음으로 인한 변화와 성장 속에서 신앙의 인격으로 말미암은 삶의 모습이 아니고, 믿어보겠다고 뛰어들어 잘 믿으려고 열심히 뛰어다니는 행위에 불과한 것이다.

   믿음은 진리에 근거해야 한다. 진리는 영원히 변하지 않기 때문에 진리에 근거한 믿음은 상황에 따라서 흔들리지 않는 것이다. 생각하여 보라. 영원한 멸망의 지옥에서 우리를 건지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단번에 용서하여 지옥에서 건져주신 은혜를 깨달은 그리스도인이 어찌 변할 수 있는가. 그 은혜의 복음에 기초하여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며 모든 실족케 하는 일을 극복하고 어려운 환경에서도 주님을 섬겨 나가는 것이다.

   그러나 행위에 붙잡힌 사람들은 그들의 상태가 좋을 때는 천국에 소망을 두지만 그들의 신앙 상태가 나빠지면 곧 무너질 수밖에 없다.

   최근에 60여년 신앙생활을 한 여인이 구원을 받았다. 필자가 그녀에게 묻기를 "지금 죽으면 천국에 갈 수 있는가, 아니면 지옥에 갈 것인가" 물었다. 그의 대답은 "내 지은 죄가 많은데 어떻게 천국에 가겠는가" 하는 것이었다. 필자는 믿음이 좋다는 것과 믿음이 있다는 것의 차이를 설명하며 성경이 말하는 십자가 속죄를 증거하였을 때 그녀는 크게 기뻐하며 구원을 받았다. 그는 말하기를 "내 신앙생활 60년은 헛것이었으며 내가 이제야 천국에 가게 되었다"고 기뻐하였다. 지금 그녀는 주님 나라에 가고 없지만 그녀의 외침을 한국교회는 새겨들어야 할 것이다.

   성경은 여기에 대하여 잘 말해주고 있다.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라디아서 2:16하).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갈라디아서 3:10상).

   이와 같은 말씀에서 보는 것처럼 행위에 잡혀서 고민하고 갈등하는 신자들은 구원받지 못한 것이 분명하다. 믿음은 행위가 아니요 사실에 근거를 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죄로 말미암아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불쌍한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셔서 나의 모든 죄를 해결해 준 사실을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 것이다. 여기에는 우리의 행위가 1%도 포함되지 않는다. 다만 이 사실을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 여기에는 아무런 조건도 없다. 우리들의 수고는 더욱 없다. 온전한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

그런데 필자가 슬프게 생각하는 것은 믿음이 좋다는 어정쩡한 말에 속아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자기도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고 말은 하면서 실상은 행위에 잡혀 지옥으로 가고 있다는 것이다. 필자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그들이 자신의 실상을 깨닫지 못하고 이와 같은 사실을 지적해주는 필자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믿음 좋은 집사님들이여, 여러분은 정말 구원받았는가? 이렇게 물으면 "구원받았다. 그리고 지금 행위를 하고 있는 것은 구원을 받았기에 하고 있는 것이다"고 강변할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알고 있다. 그대들의 뒤범벅된 신앙상태를... 어디까지가 믿음이고 어디까지가 행위인가 자신도 분간 못하고 있음을... .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로마서 4:5).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분명하니 이는 의인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였음이니라"(갈라디아서 3:11).. 

  

Posted by 행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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