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와 종교로부터의 자유


                             초등학문 아래 갇혀 있는 불쌍한 기독교인들이여!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저희에게 종노릇하려 하느냐"(갈라디아서 4:9).


   에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 강하게 책망하셨던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바리새인들이다. 주님은 때때로 그들과 진지하게 대화하기도 하셨지만 성경 여러 곳에서 그들을 질타하시며 책망하시곤 하셨다. 그러면 그들은 왜 책망을 받아야 했던가? 마태복음 23장에 보면 여기에 대하여 비교적 자세히 서술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저들은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하며"(마태복음 23:3).

   첫째로 이 말씀에서 보는 것같이 그들은 모든 것에 대하여 말로만 하고 행함이 없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다른 사람을 시키는 데는 잘 훈련되어 있었으나 자신은 그런 일을 하려 들지 않았다. 그들은 섬기는 자로 있지 아니하고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자들이었다. 쉽게 말하면 그들은 양들을 위하여 고난 당하는 목자의 모습이 아니라 양들 위에 군림하며, 행세하는 선생의 자리에 있었으며. 양들을 자기 이익을 위해 이용하고 있는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내용은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을 책망하는 말씀 중에 이미 지적되어 있다.

   "...주 여호와의 말씀에 자기만 먹이는 이스라엘 목자들은 화있을 진저, 목자들이 양의 무리를 먹이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냐? 너희가 살진 양을 잡아 그 기름을 먹으며 그 털을 입되 양의 무리는 먹이지 아니하는도다"(에스겔 34:2~3.

   주님이 에스겔을 통해서 지적한 이 목자상은 예수님 당시에도 바리새인들에 의해서 나타났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 시대에도 쉽게 볼 수 있는 목자상이 아닌가?

   여러분이 주의 깊게 에스겔 34장 나머지 말씀들을 살펴보면 오늘날 기독교의 큰 문제점 중 하나를 알게 되리라 믿는다. 그것은 무엇인가? 사람이 사람위에 군림하여 사람을 임의로 다스리고 있는 것이다. 마치 한 사람이 하나님과 인간을 중보하는 중요한 교량역할을 하는 것처럼 행세하는 모습은 얼마나 가증한 모습인가?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디모데전서 2:5).

   어떤 신령한 자라도 인간으로서 예수님의 중보의 자리를 대신할 수 있는 위치에 있을 수는 없다. 이와 같은 거짓 목자가 자기의 이익만을 추구하며 양떼를 이익의 도구로 삼는 일이 오늘날 기독교계에서 자행되어도 이상하게 보지 않으니 이 얼마나 슬픈 현실인가? 가슴 아플 따름이다.

   둘째로, 바리새인들이 지적 받은 것은 그들의 심한 형식주의였다.

   "저희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하나니 곧 그 차는 경문을 넓게 하며 옷술을 크게 하고"(마태복음 23:5).

   바리새인들은 이와 같은 말씀 외에도 많은 형식과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성경에 기록된 절기와 기록되지 않은 절기를 만들어 지키되 알맹이는 빼고 형식주의에 빠져서 사람들을 속이고 있었다.

   필자가 여기에서 다루고자 하는 내용은 이 부분, 즉 초등학문의 내용 중 "달과 날과 절기를 삼가 지키므로"(갈라디아서 4:10) 바울을 근심케 하였던 부분이다.

   갈라디아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모든 죄가 용서되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이 밝히 보였거늘(갈라디아서 3:1) 사단의 간계로 율법주의와 형식주의에 빠져서 점점 복음의 초점이 흐려져 가고 있었다. 그 율법주의는 사람이 믿음으로만 구원받기에 부족해서 행위도 필요하다고 주장하므로 하나님께서 온전히 '선물로 주시는 구원'을 훼손시켰던 것이다.

   오! 독자여, 부디 하나님을 자존심 상하시게 하지 말라. 하나님이 무엇이 부족하여 인간의 행위를 조금 받고 구원을 반쪽 선물로 주시겠는가? 신성하고 거룩한 하나님의 구원은 하나님께로부터 인간에게 주어지는 온전한 선물이다.

   또한 그들이 빠졌던 형식주의는 신앙의 핵심인 "마음의 중심으로부터 하나님과 십자가의 도를 깨달아 구원을 받아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기"보다 형식과 외식에 치우침으로 구원받는 길을 막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이와 같은 날과 달과 절기 등은 형식적으로 피곤하게 지켰지만 그들의 중심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구속의 도리를 따르는 데는 약해지고 있었다.

   이제 바리새인들이 지켰던 절기를 생각하여 보자. 그들은 유월절을 열심히 지켰고 대대적인 행사를 행했지만 실제로 유월절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을 다락방으로 내몰아버리지 아니하였던가? 그들은 안식일을 열심히 지켰지만 안식일의 주인 되는 예수님(마태복음 12:8)을 몰라볼 뿐만 아니라 십자가에 못박지 아니하였던가?

   필자는 한국의 기독교 상황을 보면서 예수님 당시의 모습과 상당히 흡사한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만약 신자의 가슴에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야만 했던 이유가 새겨져 있지 아니하다면 크리스마스가 무엇 때문에 필요하겠는가? 만약 크리스마스가 이방인을 전도하지 못한다면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크리스마스만 되면 왜 청소년들은 거리에서 방황하며 밤새 돌아다니는 것인가? 예수님의 탄생하심과 12월 25일이 1년 중 술이 제일 많이 팔리는 것과는 무슨 관계가 있는가?

   심지어 어떤 잡지에서는 "크리스마스 베이비"라는 신조어마저 생겼음을 이야기 해주고 있다. 이와 관련된 한 산부인과 의사의 말에 의하면 크리스마스 후 정확히 10개월 후에는 부모 없는 사생아가 갑자기 늘어난다는 것이다. 오! 이 얼마나 탄식할 일인가? 성탄절이라고 하는 이 절기가 오히려 세상을 타락시키는데 한 몫을 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슬픈 현실인가?

   또한 오늘날 부활절마다 초교파적으로 대대적인 행사를 하고 있는 것이 기독교의 현실이지만 필자가 만나본 수많은 기독교인 중에는 예수님이 왜 이 세상에 오셨는가? 왜 죽으셔야만 했는가? 예수님의 부활은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에 대한 시원스러운 해답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만나기가 쉽지 않았다. 부활의 의미를 질문하면 단순히 다른 종교 창시자는 다 죽고 그후에 소식이 없는데 예수님만이 죽음을 극복하셨다고 하는 위로가 고작이다. 만약 예수님의 부활의 의미가 그대의 양심에 새겨지지 않았다면 부활절 행사에 몇 십 번 참석하였다 할지라도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오! 기독교가 쉽게 망하는 지름길은 형식과 절기에만 집착하여 참된 믿음의 의미를 신자의 마음에 심는 일을 버리는 것이다. 예수님 당시 대적자들이 가이사에게 세 바치는 것이 옳은가 물었을 때 예수님의 대답은 무었이었는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누가복음 20:25) 하지 아니하셨는가?

   하나님의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양심이요 마음이요 영혼이 아니겠는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외모와 형식이 아니라 그들 중심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었던 것이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세아 6;6).

   이제 계속해서 마태복음 23장을 통해서 주님께서 지적하신 바리새인의 문제점을 살펴보기로 하자.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마태복음 23;23).

   이 십일조 문제를 잘 분석해 보면 형식과 내면의 문제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창세기 14장 17~20절에 십일조가 처음으로 언급되어 있다. 아브람이 조카 롯을 사로잡아갔던 왕들을 파하고 조카 롯과 모든 사로잡힌 사람들과 물건을 찾아 가지고 돌아오던 길에 살렘 왕 멜기세덱이 나와서 이김의 근원은 하나님께로부터임을 강조했다.

   "너의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창세기 14:20).

   이 말씀을 정밀하게 분석하여 보면 먼저 아브람이 깨달은 것은 이 전쟁이 아브람이나 그의 군대들의 용맹으로 승리한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아마 아브람이 멜기세덱을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그 중심의 상당 부분이 자만에 빠져서 자기의 능력으로 이긴 것처럼 생각하였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멜기세덱은 아브람에게 전쟁의 승리의 원인을 깨우쳐 주었으며 아브람은 이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를 깨닫고 감격하여 그에게 10분의 1을 드렸다. 이것은 주님의 베푸신 은혜에 대한 넘치는 감사의 표시였던 것이다. 이 멜기세덱은 예수님을 상징적으로 나타내주고 있는바(히브리서 7장 참조), 오늘날 우리가 주님께 어떤 자세로 헌금과 헌물을 드려야 할 것인가를 깨우쳐주는 말씀이기도 하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에 십일조는 형식만 남고 그들 중심에 이루어져야 할 내면적 깨달음, 즉 의와 인과 신은 사라졌던 것이다. 아브람이 멜기세덱에게 드릴 때에 가졌던 하나님을 경외하던 믿음은 사라지고 만 것이다.

   말라기 시대에도 역시 하나님은 경외하지 아니하고 외식적으로 드렸던 십일조와 헌물 때문에 차라리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다"(말라기 1:10)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중심이 빠진 형식적 절기와 의식은 주님의 마음에 얼마나 고통을 주고 있는가를 생각해 볼 수 있는 말씀이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마태복음 23:27~28).

   바리새인들의 또다른 문제점은 외형적인 것을 너무 꾸미고 단장하였으나 내면적인 것은 썩어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특별한 옷을 지어 입었으며 경문을 차고 다녔다.

   오늘날 한국의 기독교가 100년의 세월을 흐르면서 양적 팽창과 물질적 부요에는 성공하였으나 신자의 마음 중심에 믿음의 본질을 심어주어 내적인 변화를 일으키는데는 무관심하였다고 생각되지 않는가? 물질이 풍요하기 때문에 수 십, 수 백억을 들여 거대한 예배당을 지어 몇 부로 나누어 예배를 드리고 있다. 실로 그 숫자와 그 외형적 장중함에 있어서 엄청난 발전이다. 한국 기독교 100년 사에 이와 같은 양적 팽창은 세계 어느 나라 기독교사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일이다.

   그러나 생각하여 보라. 예수님이 이 거대한 예배당에서 성가대의 아름다운 멜로디를 들으며 예배를 진행하고 헌금자의 명단을 일일이 불러서 드러내어가며 에배하는 곳에 기쁨으로 동참하실 수 있다고 보는가?

   가난한 신자들은 돈 몇 푼이 없어 자식들 학업을 중단하고 공장으로 보내야만 하지 아니한가? 소년 가장의 눈물어린 호소나 불쌍한 이웃의 호소를 교회가 외면하고 형식주의, 외형주의에 빠져서 거대한 건물 짓는 데만 혈안이 되어도 괜찮다고 보는가? 한국의 기독교가 이와 같은 길로 계속 치닫는다면 스스로 자멸하고 있음을 어찌 알지 못하는가?

   신앙의 본질은 외적인 꾸밈이 아니라 내적인 변화를 통해서 나타나는 것 자체가 아닌가? 찬송가에 "주 예수 내 맘에 들어와 계신 후 변하여 새 사람되고..."(찬송가 208장)라는 가사가 있는데 참으로 신앙의 본질을 잘 말하여 주고 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린도후서 5:17)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이 죄인의 마음에 깨달아지게 될 때 그는 전혀 새 사람으로 변화된다. 왜냐하면 복음이 그의 영혼을 변화시켰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죄를 짓고 죄인의 신분으로 지옥을 향하여 가고 있던 저주받은 자들에게 복음은 이제 그가 모든 죄에서 벗어났음을 가르치고 있다. 이제 그는 죄인의 신분에서 벗어나 의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천국의 소망을 가지며 당당한 성도가 되었다는--"머리털보다도 더 많던 내 죄가 눈보다 더 희어졌네" (찬송가 208장)--사실을 깨달을 때 그의 중심은 기쁨으로 가득 채워질 수밖에 없다. 그의 중심에 있었던 의심과 근심의 구름이 모두 사라지고 만 것이다-- "의심의 구름이 사라져 버림은 주 예수 내 맘에 오심"(찬송가 208장).

   날과 달과 절기에 대하여 결론적으로 한 가지만 생각하여 보자. 만약 한국인이 너무 부모에 효도하여 효심이 지나치므로 나라 발전 및 공업 발전에 지장이 있을 정도라고 하자. 쉽게 말하여 부모님께 효도하느나 너무 많은 사람들이 결근하고 직장에 불성실한 상황이라면 구태여 "어버이날"을 따로 만들어서 부모에게 효도하라고 가르칠 필요가 있겠는가? 오히려 너무 부모를 등한시하고 돌아보지 않기에 어버이날을 정한 것이리라.

   기독교 절기도 이와 같아서 신자의 내면에 이 놀라운 변화와 깨달음을 통해서 주님의 오심을 기억하고 감사하며,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므로 내 죄를 용서하신 주님을 눈물로 날마다 감사하는 신자에게 부활절이 따로 필요하겠는가?

   신앙의 본질은 여기에 있다. 독자여! 그대의 마음에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모셔 들이라. 그리하면 그대의 죄가 십자가에서 완전하게 해결된 사실을 깨달을 뿐만 아니라 날마다 주님의 오심과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찬양하여 1년 365일이 날마다 성탄절, 부활절이 될 것이다. 그대의 마음에 이와 같은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졌기를 기도드린다.

   오, 독자여! 주님의 오심은 그대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며(요한복음 3:16), 주님의 죽으심은 그대의 죄를 다 용서하셨으며(요한복음 19:30), 그분의 부활하심은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그대를 구원하신 증인으로서 부활하신 것이다.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로마서 4:25).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가 그대의 마음 중심에 자리 잡았는가? 그대의 마음으로 믿어졌는가? 그렇다면 그대는 구원 받은 자라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로마서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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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라디아서


                                 제 9 과

                             율법주의의 위험(5:2-15)


   바울은 갈라디아인들에게 종이 되기 위해 자유를 버리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보여주었습니다. 이제 그의 음성을 변하여 신자들이 율법에 조금이라도 의지하려는 것은 분명한 죄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5:2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 율법주의는 그리스도를 무가치하게 만듭니다. 유대주의자들은  이방인 신자들에게 구원을 위해 할례를 받는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사도의 권위로 말하고 있는 바울은 할례에 의지하려는 것은 그리스도를 무익한 것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의 상황에서 바울에게 할례는 외과적인 수술이 아니며, 더욱이 종교적인 의식도 아니었다. 그것은 선한 행위로 말미암는 구원의 체계를 나타내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제쳐놓은 사람의 노력이라는 복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것은 율법이 은혜를 대신하는 것이며, 모세가 그리스도를 대신하는 것이고, 그리스도에게 무엇을 더하여 그리스도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것이다. 부족한 그리스도는 그리스도를 밀어내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단 하나이시며, 유일하고, 독보적인 구주이시다. 할례는 그리스도에게서 베어냄이라는 뜻이다"(J. 헌터)

5:3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거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율법주의는 사람들에게 온 율법을 지킬 것을 요구합니다. 율법아래 있는 사람들은 쉬운 계명들은 받아들이고 다른 것들은 버릴 수가 없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할례를 행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한다면 그는 모든 율법을 다 지켜야하는 의무 아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은 전적으로 율법아래 있든지 아니면 전혀 율법아래 있지 않든지 하는 것입니다. 그가 전적으로 율법아래 있다면 그리스도는 그에게 아무 가치도 없는 것이 분명합니다. "주님은 단 한분이신 완전한 구주이실 뿐아니라 독보적인 분이십니다." 바울은 이 구절에서 과거에 할례를 받은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완전한 의로움을 위해 필요한 것으로 이 의식을 행하는 사람들인 하나님께 받아지기 위해 율법을 지켜야할 의무가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율법주의는 의로움에 대한 유일한 소망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포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5:4 (율법 안에서 의롭다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자로다) 이 구절은 주목할만한 논란을 일으켰습니다. 서로다른 수많은 해석이 제시되었으나 크게 묶으면 다음과 같은 세부류가 될 것입니다.


   1. 많은 사람들은 여기에서 바울이 참으로 구원받은 사람이 죄에 빠지게 되면 은혜에서 떨어지게 되어 영원히 잃어버린 자가 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가르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타락에 대한 교리" 로 알려지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해석이 건전하지 않은 것이라는 것을 다음과 같은 강력한 두가지 이유로 인해 확신합니다. 첫째, 이 구절은 죄에빠진 구원받은 사람을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다. 사실 여기에는 죄에 빠진다는 언급이 없습니다. 오히려 이구절은 도덕적이며, 선하고, 정직한 삶과 그것으로 구원받으려는 소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단락은 타락에 대한 교리를 지지하려고 그것을 사용한 사람들에게 부메랑과 같이 되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이 반드시 율법을 지켜야 하며 구원받은 자로 남기 위하여 완전한 삶을 살든지 그렇지 않으면 죄를 짓지 않도록 억제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율법의 행위로나 자신의 노력으로 의롭게 되려고 하는 모든 사람은 은혜에서 떨어진 자라고 주장합니다.

   둘째, 이 해석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참 신자들은 영원한 구원을 받았다는 의미에 대해 신약성경이 일관적으로 증거하고 있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어떠한 양도 멸망하지 않으며, 구원은 인간의 연약한 노력에 달린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구주의 이뤄 놓으신 사역에 의존된다는 전반적인 것에 모순이 됩니다(요 3:16, 36; 5:24; 6:47; 10:28).


   2. 이 구절에 대한 두 번째 해석은 원래 주 예수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지만 그 후에 그들의 구원을 유지하거나 거룩을 이루기 위해 자신을 율법아래 놓은 사람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다른 말로하면, 그들은 은혜로 구원을 받았지만 이제 율법으로 그 구원을 지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은혜에서 떨어진 것은 "외적인 의식과 예식들을 지킴으로 목적을 이루려고, 그들 안에 있는 성령의 사역에 의해 주님의 성도들을 완전하게 하는 하나님의 방법에서 돌아서는 것으로, 그들은 하나님의 성도들뿐 아니라 의식을 지킬 수 있는 육에 속한 사람들이다"(필립 마우로).

   첫째로 우리는 이 구절이 거룩함이나 성화를 구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율법을 지킴으로 의롭게 되려고 하는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을 묘사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비성경적인 견해를 거절합니다. "율법 안에서 의롭다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이라는 말에 주의하십시오. 둘째 이 구절에 대한 이러한 설명은 구원받은 사람들이 그 후에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암시한 것이며,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올바른 시각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3. 세 번째 해석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고백은 하였지만 참으로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을 말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율법을 지킴으로 의롭게 되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사도바울은 그들이 두 구원자를 가질 수 없으며, 그들이 그리스도이든지 율법이든지 선택을 해야만 한다고 그들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만일 그들이 율법을 선택한다면 그들은 의로움의 유일한 소망이신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는 것이며, 그들은 은혜에서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사람에게 모든 것이든지 아무 것도 아니든지여야 하며, 제한된 신뢰나 나뉘인 충절은 주님께 받아들여질 수 없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의롭게된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며,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아니다" (호그,바인).


5:5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좇아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사도바울은 참된 신자의 소망은 율법주의자들의 것과는 매우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의의 소망을 기다립니다. 그는 주님께서 오실 때, 그가 영화로운 몸을 입게 될때 그리고 그가 더 이상 죄를 짓지 않게 될 때를 기다립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의롭게 되기를 소망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며, 그는 이미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신분을 가지고 있습니다(고후 5:21). 그러나 그는 자신 안에 의가 완전하게 될 그때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는 그가 할 수 있는 어떤 것으로 말미암아 의에 도달하기를 소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령으로 믿음을 좇아" 소망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그 모든 것을 하실 것이며, 신자는 단순히 그것이 이루어지도록 믿음안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에 반하여 율법주의자는 자신의 행위로, 율법준수 또는 종교적인 의식들에 의해 의롭다함을 얻기를 소망합니다. 의로움은 이러한 방법으로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에 이것은 헛된 소망입니다.

   바울이 4절에서는 율법의 행위로 의를 구하는 사람들을 말하는 "너희" 라는 대명사를 사용한 반면에 이 구절에서는 참된 그리스도인들을 말하는 "우리" 라는 대명사를 사용한 것에 주목하십시오.

5: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율법주의는 아무 효력이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즉, 그리스도인)에게는 할례가 그를 더 나은 자로 만들어 주지 않으며, 무할례가 그를 더 악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신자 안에서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을 기대하시겠습니까! 믿음은 하나님께 완전히 의지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빈둥거림이 아니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사심없는 봉사로서 자신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러한 모든 봉사의 동기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것이며, 율법이 아닌 사랑에 의해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의식에 관심을 두시는 것이 아니라 경건한 삶의 실제에 두신다는 것은 여러 시대동안 성경안에서 발견된 진리입니다.

5:7 ( 너희가 달음질을 잘하더니 누가 너희를 막아 진리를 순종치 않게 하더냐) 율법주의는 이 진리에 순종하지 않습니다. 갈라디아인들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에서 좋은 출발을 하였으나 누군가가 그들을 막았습니다. 그 사람은 유대주의자요, 율법주의자요, 거짓 사도들입니다. 그들의 잘못된 가르침을 받아들임으로써 성도들은 하나님의 진리에 순종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5:8 (그 권면이 너희를 부르신 이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율법주의는 하나님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권면" 은 여기에서 신앙이나 교훈을 의미합니다. "너희를 부르신 이" 는 하나님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할례와 율법준수의 신앙은 하나님께로서 나온 것이 아니라 마귀에게서 나온 것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에 더해진 것입니다.

5:9 (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 율법주의는 점점더 악한 것으로 이끌어갑니다. 성경에서 누룩은 일반적으로 악을 상징합니다. 여기에서도 누룩은 유대주의자의 악한 교훈을 말하고 있습니다. 누룩 또는 효모의 본질적인 특성은 그것에 접촉하는 모든 가루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여기에서는 작은 잘못이 어쩔 수 없이 더 큰 잘못으로 이끌어간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악은 멈추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신의 거짓을 변호하기 위해 더 큰 거짓을 더합니다. 만일 어떤 교회에 잘못된 교훈을 주장하는 몇 명의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이 엄격하게 다루어지지 않는 한 그들은 더욱 더 많은 추종자를 얻게 될 것입니다.

5:10 (나는 너희가 아무 다른 마음도 품지 아니할줄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그러나 너희를 요동케 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으리라) 율법주의는 그것을 가르치는 자에게 심판을 가져옵니다. 사도바울은 갈라디아인들이 그 거짓 가르침들을 배척할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의 확신은 "주 안에서' 였으며, 그것은 주님께서 그 문제에 있어서 바울에게 보증해 주신 것이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또는 그는 목자장께서 잃어버린 양을 회복시키실 것을 확신하였고, 아마도 바울이 그들에게 기록한 편지를 통해서도 주님께서 그렇게 하실 것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거짓 선생들에 관하여는 그들은 하나님께서 벌하실 것입니다. 잘못을 가르침으로 한 교회를 파괴하는 것은 심각한 일입니다(고전 3:17). 예를 들면 자신이 술주정꾼이 되는 것보다 술마시는 것을 허용할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이 더 악한 것입니다. 거짓 선생은 수백명의 다른 사람들을 자신과 같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5:11( 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하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핍박을 받으리요 그리하였으면 십자가의 거치는 것이 그쳤으리니) 율법주의는 십자가의 거치는 것을 치워버렸습니다. 이제 바울은 그가 때때로 할례의 필요성을 전했다는 것 조차도 터무니없는 비난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유대인들에 의해 핍박을 받고 있었습니다. 만일 그가 할례를 전했다면 십자가를 전하는 것을 포기한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그 핍박은 즉시 멈추었을 것입니다. 십자가는 사람에게 거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구원을 얻기 위해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다고 말하기 때문에 십자가는 사람을 화나게 하거나 넘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육체와 육체의 노력에게 어떠한 여지도 주지 않습니다. 십자가는 사람의 행위가 끝났음을 의미합니다. 만일 바울이 할례를 전함으로 행위를 소개했다면 그는 십자가의 모든 의미를 버린 것입니다.

5:12 ( 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이 스스로 베어 버리기를 원하노라) 이것은 사도바울이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들이 스스로 거짓 선생들을 출교하기를 바라는 표현일 것입니다. 또는 아마 그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할례의 짐을 지웠기 때문에 그들 스스로 할례를 행하라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전자를 더 선호합니다. 그러나 만일 후자라면 의심할 것없이 바울이 풍자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한 참된 의미


   은혜의 복음은 언제나 자기가 좋은 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는 비난을 받아왔습니다. 사람들은 "만약 구원이 믿음으로만 얻는다면 그 후에 사람들의 행위를 제어할 아무 것도 없지 않느냐" 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죄에 대한 방종이 아니라고 신속하게 지적하였습니다. 신자의 표준은 주 예수님의 삶이며,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가 죄를 미워하고 거룩을 사모하는 것을 암시합니다.

   이것은 바울이 그의 독자들에게 이러한 방종에 대해 경계하기 위해 특별히 필요했을 것입니다. 사람들을 얼마동안 율법의 구속에 두었다가 자유하게 해준다면 거기에는 항상 속박이라는 극단에서 경솔함이라는 극단으로 흐르게 되는 위험이 있습니다. 올바른 균형은 율법과 방종사이에 놓인 자유일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율법으로부터 자유한 자이지만 무법자는 아닙니다.

5:13 (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죄를 허용하지 않으며, 오히려 사랑의 섬김을 격려합니다. 사랑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행동에 대한 동기로 보이지만 반면에 율법 아래에서는 형벌에 대한 두려움이 동기입니다. 핀들레이는 "사랑의 노예는 참된 자유인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것이며(2:4), 이것이 죄를 짓는 자유를 의미한다는 어떠한 생각도 배제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자유를 육체를 위한 행동의 기지로 삼아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마치 침투군이 더많은 점령지를 얻기 위한 작전 기지로서의 상륙거점을 확보하려고 애쓰는 것과 같아서, 육체는 자기 영역을 더 넓히려고 아주 작은 방종을 사용하려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자유에 대한 올바른 출구는 "다른 사람의 종이 되는 습관을 기르는 것" 입니다.

   A. T. 피어슨은 "참된 자유는 올바른 구속에 대한 순종 안에서만 찾을 수 있다. 강은 두 강둑 사이에서만 흐를 자유를 찾을 수 있고, 강둑이 없이는 진흙 속으로나 고여있는 웅덩이로 퍼져나갈뿐이다. 혹성들이 법칙에 지배를 받지 않는다면 혹성 자체 뿐 아니라 우주의 파멸을 가져온다. 우리가 담장 안에 있으면 다른 사람들은 담장밖에 있는 것은 같은 법칙이다. 구속은 우리의 자유를 단속하며 자유를 보증하고 보호하기도 한다. 이것은 통제가 아니라 통제의 올바른 종류이며 자유한 사람을 만들어주는 즐거운 순종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5:14 (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 처음에는, 바울이 신자는 율법 아래 있지 않다고 서신전체를 통해 강조한 후에 여기에서 율법을 소개하려는 것이 이상하게 보입니다. 바울은 그의 수신자들에게 율법으로 돌아가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며, 율법이 요구했지만 이룰 수 없는 것을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행함으로 얻을 수 있는 결과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5:15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율법주의는 한결같이 불화로 이끌며, 율법주의가 행한 것은 갈라디아에서처럼 명백합니다. 얼마나 이상한 일입니까? 여기 율법 아래에 있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율법은 이웃을 사랑할 것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바로 이것에 실패하게 됩니다. 그들은 피차 물고 뜯었습니다. 이러한 행동은 율법이 행동하도록 내어준 장소에서 육신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Posted by 행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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