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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5.11.08 믿어도 죄인인가? - 믿어도 죄인인가?

          믿어도 죄인인가?


                     믿어도 죄인인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에베소서 1:7).


   "예수님은 왜 죽으셨습니까?"

   "우리들의 죄 때문에 죽으셨지요."

   "그렇다면 당신은 죄인입니까?"

   "죄인이죠!"

   제가 현재 교회에 다니는 많은 교인들을 상대로 상담했던 대화 내용 중 일부입니다. 도대체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셨는데 왜 계속 죄인이란 말입니까?

   만약 어떤 사람이 얼마 전에 상당한 빚을 지고 고민에 빠져있었는데 그의 부모가 모든 빚을 대신 완전히 청산해 주었다고 하면 그가 계속 사람들을 향하여 자신은 빚쟁이라고 해야 하겠습니까? 너무나 쉽고 평범한 이 진리가 풀리지 않으므로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죄의 공포와 두려움 가운데 불안한 신앙생활을 계속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들의 상태를 보면, 첫째로, 죄를 용서받은 사실에 대한 기쁨이 없습니다. 죄수가 죄를 사면 받았을 때의 기쁨을 여러분은 상상해 보았습니까? 이것이 구원의 본질입니다.

   둘째로, 교회생활이 기쁘고 평안하기보다는 오히려 수많은 짐을 지고 괴로움과 고통과 번뇌 가운데 입으로는 "나의 맘속이 늘 평안해" 하고 찬송을 부르나 실은 그 반대 현상이 중심에 있는 채로 별다른 대책 없이 끌려 다니는 것입니다.

   셋째로, 사랑의 하나님, 용서의 하나님, 긍휼의 하나님보다는 공포의 하나님, 두렵고 무서운 심판의 하나님으로만 생각되어 교회생활이 불성실하면 심판하고 저주하며 헌금을 내지 않으면 당장에 복을 거두어 가는 듯한 하나님으로 착각하며 떨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사랑과 공의(公儀)의 하나님이시지만 균형 있는 깨달음이 없는 것입니다.

   구원이란 무엇입니까? "건짐 받는다" 는 것이 아닙니까? 절망적 상태인 멸망의 길에서 구원(구출) 받았다면 눈물어린 감사와 찬송과 기쁨이 있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첫 번째 증상은 왜 왔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인식(認識)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 3:17)고 함과 같이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해방시켜 주시기 위하여 예수님을 보내신 것입니다.

   죄를 짓게 하는 것은 마귀가 하는 일입니다.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으니라" (요한일서 3:8) 함과 같이 마귀는 죄를 짓게 하고 그 죄를 미끼로 죄인을 자기의 수하(手下)에 두고 종을 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죄를 짓는 것으로 인하여 정죄(定罪)하고 낙심하게 하고 그 가운데서 방황하게 하는 것입니다. 사단은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여러 가지 환경을 통하여 죄를 짓게 되고 죄의 종이 되게 합니다.

   또한 사단은 죄의 유혹으로 우리 중에 역사(役事)합니다. 그것은 달콤하고 또는 합법적일 때도 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은 죄로 썩고 있습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예레미야 17:9).

   이때 사단은 속삭입니다. 죄를 지었으니 선(善)을 행함으로 지탱해 보라고, 자신을 꾸미라고... . 이것이 오늘날 종교의 실체입니다. 본래 부패하고 썩은 죄인인데 선을 행하려고 하는 온갖 노력이 있다 하여도 의인(義人)이 될 수 없습니다. 사단은 심히 아름다운 모습으로, 광명의 천사(고린도후서 11:14)로 가장합니다. 그는 계속 속삭이기를 선을 행함으로, 노력함으로 우리는 완전해 질 수 있으며, 구원받을 수 있다고 속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 번째 증상인 기쁨이 없는 것입니다. 이룰 수 없는 것을 이루려고 헛된 종교적 열심에 빠져 있으니 당연히 기쁨과 평강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증상인 두려움은 자신이 설정한 종교적 수준에 이르지 못하니 자연히 두렵고 불안한 것입니다. 이것은 많은 종교인들이 가지고 있는 비슷한 현상입니다.

   그러면 이와 같은 불확실한 죄인들을 위하여 주님은 무어라 말씀하셨습니까? 마태복음 11장 28절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하고 친히 육성(肉聲)으로 말씀해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인생의 고뇌와 고통의 근본이 되는 죄의 무거운 짐을 모두 대신 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홀로 지고 고통하지 말고 대신 그 짐을 져주신 예수님께로 오라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본래 십자가는 중(重) 죄인을 처형하기 위한 로마제국의 사형틀이었습니다. 그런데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그 십자가 사형틀에 달려 죽으신 것은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당신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죽으신 것입니다. 모든 죄라 함은 세상의 모든 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당신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모든 죄를 대신하여 죽으셨다는 뜻입니다. 이제 그 무거운 짐을 당신이 질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대신 지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로마서 3:23).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義)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습니다(로마서 3:24). 이제 의인이 된 것입니다! 이제 의인이 되었다는 것은 곧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었다는 것(로마서 8:1)을 의미합니다.

   히브리서 9장 12절의 영원한 속죄는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이 예전에는 염소나 양, 송아지의 피로 말미암아 제한적으로 인간의 죄를 용서하셨으나 이제는 한 마리의 속죄양이 되신 예수님을 통해 우리의 모든 죄를 영원히 용서하셨다는 뜻입니다. 이러므로 죄인이 의인의 신분을 얻게 되었고 이 사실을 깨달은 자는 구원을받았으며, 지금 이 세상을 떠나도 당장에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있는 확실한 보장을 받았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죄로 말미암아 지옥 형벌의 두려움에 떨 것이 아닙니다. 다만 구원받은 이후의 실수로 짓는 죄에 대하여는 자녀의 신분으로 주님 앞에 자백함으로 주님과의 좋은 관계를 유지해 나가되 그와 같은 죄로 인하여 지옥 형벌의 두려움에 있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독자여!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예수님의 공로로 의롭게 되었다고 선언하신 말씀을 믿지 못하고 아직도 자신은 죄인이라 말하거나, 죄 용서 받은 기쁨을 경험하지 못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얼마나 비극적이며 잘못된 것인가를 아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주님의 십자가에 대한 불신(不信)임이 분명합니다. 믿는다 하면서 자신을 죄인이라 고백하는 것은 곧 주님의 십자가는 헛된 것이라고 외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2000년 전에 십자가 위에서 주님께서 " 다 이루었다! "고 외치실 때에 당신과 저의 모든 죄는 이미 해결되었습니다.

   그러함에도 어떤 사람은 "죽어보기 전에 어떻게 자신이 구원받았는지를 알 수 있겠느냐" 고 질문합니다. 저는 이에 대해 반문하고 싶습니다. 도대체 자신의 심중에 확신 없는 사실을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전할 수 있겠으며 중심에 확신이 없는데 어떻게 평안이 있겠습니까? 이것은 근본적인 문제요 기초적인 문제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자신이 구원받은 사실을 확실히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확신적으로 전파했습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에베소서 2:8).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우리의 일반으로 얻은 구원을 들어 편지하려는 뜻이..." (유다서 1:3).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들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사도행전 2:47).

   이와 같은 말씀들은 수없이 많이 있습니다.

   또한 어떤 사람들은 "천국에 갈 수 있느냐? "는 물음에 "가야지요" 하고 답변합니다. 이것도 아주 잘못된 답변일 수밖에 없습니다. 천국에 가는 것은 확률이 아닙니다. 구원 얻은 자에게는 명쾌한 소망입니다. 구원이란 천국이라는 목표를 향해 노력하는 과정이 아닙니다. 이미 얻은 사실을 인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죽어봐야 안다" 고 말하는 것은 얼마나 무책임하고 불안한 답변입니까! 하나님은 자기의 자녀를 불안하게 하지 않으십니다. 돌아온 탕자를 보십시오. 얼마나 사랑 해주었습니까! 얼마나 위로해주었습니까! 그는 얼마나 기쁘고 감사하며 포근하였겠습니까! 그는 잃었던 행복을 되찾은 것입니다. 우리는 잃었던 에덴보다 더 좋은 낙원을 얻은 것이니 이것이 구원이요 영생(永生)입니다! 탕자의 부모가 탕자를 용서하듯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셨습니다. 독생자의 속죄로 말미암아!

   십자가의 속죄는 결코 헛되지 않았습니다. 진정 우리의 모든 죄를 단번에 용서하셨습니다.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이것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것이 없느니라" (히브리서 10: 17,18).

   이것을 깨닫고 믿는 자는 멸망의 두려움 없이 확실한 구원을 얻었다고 성경은 증명하고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요한 복음 5:24).

   그렇다면 이 모든 사실을 믿는다고 하는데도 왜 구원의 확신이 없는 것일까요? 그것은 대부분 많은 교인들이 예수님이 원죄와 지난 죄는 용서하셨지만 지금 짓는 죄는 계속 회개하여야 용서받는다고 알고 있으므로 날마다 죄의 강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때문입니다.

   참된 회개란 우리가 날마다 지은 죄를 뉘우치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길에서 돌이킨다는 뜻이니, 죄인이 멸망의 지옥으로 가다가 어느 날 십자가의 속죄를 깨닫고 자신의 죄악(불신)의 길에서 돌이켜 천국의 소망을 얻을 때 있는 사건입니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실수의 죄에 대하여는 자백의 기도가 필요할 뿐입니다.

   독자 여러분! 이 시간 무릎을 꿇고 주 앞에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실을 단순히 받아들이고 죄 용서함 받고 구원을 받아들이기 바랍니다.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요한복음 6:47).


                                                                                                                                   - 전도자 허윤욱-

Posted by 행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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