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을 위한 갈라디아서  


                             죄와 종교로부터의 자유

                                                                                                    - 허윤욱-

                                           서문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로 인하여 십 년 전에 횃불에 연재된 채 묻혀 있었던 이 글이 다시 빛을 보게 됨에 한없는 감사와 눈물이 있다.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기록한 때는 학자들에 따라 차이는 있으나 대략 서기 55년경으로 본다.

   순수하고 깨끗하고 너무도 아름다운 교회가 성령님에 의해서 시작되었으나, 2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어느 날 하나님을 순전하게 사랑했던 갈라디아 지방의 교회들에게 사단의 역사가 시작되니, 지도자들이 변질된 교리를 받아들이고 양들이 그것을 좋게 여겨 급속도로 썩어 가고 있었다. 이것은 사단이 가라지를 뿌린다고 하신 주님의 예언의 성취였다.

   이 때에 바울은 하나님의 거룩한 분노를 대변하는 대변인이 되어 악을 제거하고 진리를 확실하게 드러내는 이 서신을 쓰게 되었다. 이 분노는 이스라엘의 음행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분노가 일어날 때에 창으로 시므리와 고스비를 찔러 악을 제함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케 하여 영원한 제사장 직분을 받았던 아론의 손자 비느하스의 분노와 같다(민수기 25장).

   오늘날은 갈라디아 시대보다도 더 혼탁하여 복음을 듣고자 하여도 정직한 복음을 듣기 힘들며, 진리를 왜곡하여 성경과 전혀 관계없는 종교로 만들고, 그 집단 속에서 순응하지 아니하면 이단으로 정죄 당하는 슬픈 현실이 되었다. 정직한 그리스도인들이 아무리 성경적으로, 양심적으로 진지하게 믿으려 발버둥쳐도 거대한 종교 집단에 순응하지 아니하면 정죄 당하는 현실 아닌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말씀이 곧 하나님이라고 가르치기도 부끄러운 현실이 아닌가? 성경의 권위는 땅에 떨어져서 성경의 가르침보다 자신의 종파의 헌법을 더 주장하면서 사람의 가르침을 더 따르지 아니한가?

   필자는 썩을 대로 썩어 가는 한국 기독교 현실을 바라보면서 갈라디아서를 중심으로 쓰여진 이 글들이 길을 잃고 방황하는 양떼들의 길잡이요 등불이 되기를 기도할 뿐이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이글을 읽는 모든 분들과 함께 하시어 이글을 읽고도 구원받지 못하고 지옥에 떨어지는 비극은 없었으면 하는 기도와 바람이 있다.

   다소 직설적이고 강력한 책망의 표현이 있을지라도 비느하스가 가졌던 거룩한 분노로 받아서 소화하여 주기를 바란다.

   이 글이 다시 빛을 보기까지 기도해 주신 동역자들에게 감사하고 전도출판사 직원들에게 감사드린다.

                                                                                                                             2001년 8월


             사람을 따라 몰려다니는 기독인들이여!


   "사람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갈라디아서 1:1)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성경도 사람이 기록한 책이 아니냐?" "단순한 이스라엘의 역사책이 아니냐?" "특별한 지능을 가진 사람에 의해서 만들어진 책이 아니겠느냐?" 하며 근거도 없는 자신의 외고집 생각만가지고 질문하는 것을 보게 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성경은 단순한 이스라엘의 역사책이 아니다. 절대로 아니다. 성경은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의 진실은 하나님이 보장하시고(여러 가지 방법으로), 하나님의 실존에 대한 증명은 성경이 담당하고 있다. 성경 없이 하나님을 믿을 수도 없고, 알 수도 없으며, 하나님의 깨우치심 없이 성경을 깨달을 수 없다.

   우리는 말씀이 하나님 자신인 것을 요한복음 1장 1절을 통해 알고 있다. 또한 말씀은 모든 사람들을 심판하시는 주체가 된다고 요한복음 12장 48절에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성경의 말씀은 모든 신자가 읽고 순종하고 높이고 신앙의 지표로 삼아야 마땅하다.

   그러나 오늘의 기독교인들의 상태는 어떠한가? 사람에 의해서 좌우되고, 사람 중심으로 모여지며, 사람에 의해서 건설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본래 초대교회는 사람에 의해서 시작되지 않았다. 교회는 하나님의 계획과 역사하심으로 시작되었다.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계획하신 계획을 이루기 위하여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그분을 통하여 죄인을 구원하기 시작하심으로 초대교회가 시작된 것이다. 주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은 창세전에 계획되었으며, 구약에서 예언되고 준비되어 신약교회 시작 전에 이루어져 신약교회를 이루는 초석이 되었다. 이것은 순전한 하나님의 경륜 속에서 이루어졌으며, 주님께서는 이 일에 사람을 사용하셨을 뿐이다.

   금일의 교회들은 어떠한가? 사람의 이름과 가르침을 중심으로 종파를 만들어 여기에 소속하면 잘 믿는 것이고 이 종파에 소속하지 않으면 잘못된 것처럼 가르치고 있으니 얼마나 슬픈 일인가? 각 종파들은 대부분 불과 3,4백년을 넘지 않는 역사를 가지고 있으나 그들만이 순수하고 정통인 것처럼 착각 속에서 주장하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그렇다면 그들 전에 순수하게 믿었던(종파와 소속없이) 사람들은 무엇이었던가? 초대교회의 12제자들을 비롯한 수많은 성도들은 금세기에 있는 아무 종파에도 속하지 아니하였는데, 그렇다면 그들 모두는 잘못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란 말인가?

   오늘날 수많은 기독교인들 중에 필자를 슬프게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은 성경의 순수한 진리를 잘 설명하여 주어도 자기가 소속한 교회의 목사님의 말은 무조건 따르지만 성경말씀은 따르지 않는다.

   슬프다, 현실이여! 어쩌다 성경의 권위가 이토록 떨어졌단 말인가? 성경이 사람의 말보다 못하단 말인가? 성경을 사람의 말과 가르침보다 푸대접하는 이 세대는 정죄 받아 마땅한 세대다.

   사람을 무조건 따르다가 망한 사람들의 교훈이 구약에 기록되어 있어 소개하고자 한다.

   사무엘하 15장부터는 압살롬의 반역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다윗을 반역한 압살롬이 자기의 세력을 넓히고 다윗을 몰락시키기 위하여 사전에 헤브론으로 사람을 모을 때, "청함을 받은 200명이 그 사기를 알지 못하고 아무 뜻 없이 예루살렘에서 저와 함께 갔으며..."(사무엘하 15:11)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들은 왜 가야하는지, 자기를 청한 압살롬이 무엇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아무 뜻 없이" 사람만 보고 몰려갔던 것이다. 압살롬은 그 외모가 다른 왕자보다 뛰어났으며, 그는 다윗의 왕자였으니 차마 아비를 배반하랴 생각하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 생각은 얼마나 잘못된 생각인가? 외모와 상황과 신분만 보고 바보처럼 따라갔던 이 사람들의 말로가 처참했다. 이 사건은 오늘날 기독교의 상황을 잘 예언하여 주고 있는 한 폭의 그림이요 거울이다.

   금일에도 하나님을 가장 잘 섬기는 자로 위장하는 자칭 하나님의 종들 중 거짓 종들이 얼마든지 있다. 그들은 오늘날 각 종파들이 만들어놓은 모든 절차를 다 밟아서 정상적으로 목사의 직분에 이르렀으나, 성경은 그것만 가지고는 부족하다고 증언하고 있다. 그들 중 거짓 종들이 얼마든지 섞여 있을 수 있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마태복음 7:15).

   조심하여야 한다. 반드시 조심하여야만 할 것이다. 어린 양떼들이여! 저들이 지극히 거룩하게 보일지라도 거짓 목자이며, 거짓 그리스도인일 수 있다. 말씀은 거짓일 수 없으니 "양의 옷을 입고 나아오는 이리"라는 말씀을 잘 묵상하기 바란다. 자식된 압살롬이 아버지를 배반할 줄 생각하지 못한 것처럼, 오늘에도 입만 열면 하나님을 높이고 거룩한 하나님의 종처럼 보이는 그들이 어찌 거짓 종일 수 있느냐고 의심할지 모르나 압살롬을 따랐던 자들처럼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아버지를 반역하여 모반한 압살롬과 다윗의 싸움은 18장에 나오는데, 그 싸움이 얼마나 치열하였는지 모른다. 2만을 헤아리는 백성이 희생되었으며, "그 날에 수풀에서 죽은자가 칼에 죽은 자보다 많았다"는 기록이 주는 교훈이 크다고 생각한다(사무엘하 18:8).

   오늘날 영적인 세계의 혼탁한 상황은 수풀을 가리키는바, 이 영적인 세계의 수풀 속에서 사람을 따라 방황하다가 죽어 가는 불쌍한 양떼들을 말함이 아닌가? 그들은 진리를 찾아 이 교회, 저 교회 이 종파, 저 종파로 몰려다니며 방황하다가 하나님을 원망하고, 사람을 원망하며 죽어간 것이다. 자신들은 잘 믿는다고 알았는데 왜 지옥에 갔는지 그 이유를 지옥에 가서야 비로소 알 게 될 것이다. 성경은 그들이 "울며 이를 간다"고 기록하고 있다(마태복음 13;50).

   오늘의 기독교인들이여! 양떼들이여! 사람을 따르지 말고, 사람을 의지하지 말라. 주님의 말씀을 따르라.

   "이 땅에 괴이하고도 놀라운 일이 있도다.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그 결국에는 너희가 어찌 하려느냐"(예레미야 5:30,31).

   이와 같은 일은 전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다고 보여진다. 성경을 멋대로 해석하여 자기 욕심대로 가르치고 인도하여도 사람들은 분별없이 따르니 도대체 어찌 하려는가? 선한 양떼들이여, 불쌍한 소경들이여!

   이 말씀에서 가르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첫째로 그들의 행위는 괴이하고 놀라운 일이라는 것이다. 이 말은 그들의 가르침이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금일의 기독교계서 행해지고 있는 사례들을 보면 기본 상식과 이치에도 맞지 않는 것을 양심의 가책도 없이 따르고 있다. 비성경적인 방법으로 헌금을 강요하고, 육신적인 방법으로 교회를 운영하여 교회가 물질화, 인본주의화 되어도 그대로 수용하고 있는 모습은 지극히 안타까운 현실이다. 그들은 에서의 망령된 길을 스스로 따르고 있다.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처럼 스스로 팔린 사람들이다. 사람의 생각대로 믿으며, 이권을 따라 움직이는 현실은 신구약 여러 곳에서 지적하는 죄악이다.

   둘째로, 그들은 거짓 것을 예언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많은 거짓 선지자들이 예수님의 재림 날짜를 발표하였다가 부끄러움을 당했는데 아직도 그러한 거짓 것을 따라가는 우매한 교인들이 있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마태복음 24:36).

   그들이 거짓 것을 예언하는 것은 예수님을 잘못 알고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어떤 이들은 예수님을 해방자라 하여 폭력적 권력이나 독재자들로부터, 억압자나 가진 자들로부터 해방시켜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러한 사람들이 오늘날 기독교의 가면을 쓰고 정치운동을 하거나 사회운동을 하여 예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한다.

   예수님께서 해방자인 것은 성경도 가르친다(로마서 8:1,2). 그러나 예수님은 죄와 사망(지옥)으로부터의 해방자이시지, 독재자나 착취자로부터 해방자가 아닌 것을 알아야 한다. 또 그들은 거짓 것을 가르치되, 열심히 노력하고 교회 제단에 충성하면 은혜 받고 천국에 갈 것처럼 가르치나 성경에는 그런 가르침이 없다. 오직 성경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불쌍히 여기시는 은혜와 사랑을 통해서 거저 주시는 선물로 구원을 받을 뿐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다만 이 엄청난 구원을 단번에 선물로 받은 사람들이 감격, 감사하여 자의적 충성으로 주님을 섬기고, 말씀대로 살아가고자 하는 성도들의 무리인 교회가 있을 뿐이다.

   셋째로, 그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는 자들이라는 것이다. 옛날 타락된 제사장들은 제사장직을 하나의 권력으로 생각하여 권위주의를 발전시켜 나갔었는데, 금일의 기독교 상황은 목사를 공공연하게 제사장으로 비유하여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처럼, 가르치는 것은 절대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진다"는 마태복음 15장 4절 말씀을 읽지 못하였는가? 성경은 구원 받은 자면 다 제사장이라고 선포하고 있지 아니한가! 루터가 만인제사장주의를 부르짖은 지가 얼마나 지났다고 벌써 잊었는가!

   "너희도...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시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베드로전서 2:5).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베드로전서 2:9).

   누구에게 하신 말씀인가? 베드로전서 1장 2절에 있는 대로 예수님의 피로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하신 말씀이 아닌가? 금일의 수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이 자신을 제사장처럼 가르쳐 교인들 위에 군림하여 자신을 잘 섬기면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이며, 자신의 말을 불순종하면 하나님께 저주 받는다고 협박하여 양떼들을 공포에 떨게 하는 무서운 죄악이 백주에 자행되고 있다.

   인간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가 될 수 없다. 그리고 생각하여 보라. 하나님께서 자신을 잘 섬기면 복 주고 자신의 마음에 안 들면 저주해 버리는 독재자인가? 무서운 심판자 하나님만이 하나님의 모습인가? 물론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또한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이 양면의 조화가 필요한 것이다. 공포에 사로잡혀 성수주일 안 하고 십일조나 기타 헌금실적이 부실하면 당장에 저주를 퍼붓는 무서운 하나님으로만 보이게 하는 현실은 탄식할 일임에 틀림없다.

   오늘날 기독교를 병들게 한 권위주의, 즉 일인목회주의는 반드시 타파되어야 한다. 성경은 그와 같은 가르침을 동조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디모데전서 2:5).

   예수님은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는 유일한 중보이시다. 이 일에 필요하다면 사람이 쓰임 받을 수 있겠으나 중보는 한 분 예수님뿐이시다.

   첫째로 예수님은 우리의 죄사함에 대한 중보이시다. 그분은 인간 편을 바라보실 때 죄 속에서 죽어서 죄값으로 멸망의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인간의 딱한 처지를 보셨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죽을 때까지 자기의 죄 문제와 싸우다 죽어 가는 슬픈 존재인 것을 주님이 보셨던 것이다.

   또한 주님께서 하나님의 편을 바라보실 때 인간을 사랑하시나 죄는 사랑하실 수 없고, 인간과 같이 계시고 싶으시나 죄와 함께 하실 수 없으신 거룩하신 공의와 사랑의 하나님을 보셨다. 다시 말하자면 인간을 천국에 데려가고 싶으시나 죄와 한 덩어리가 되어있는 죄인을 데려가실 수 없는 하나님의 입장을 보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 주심으로 인간의 모든 죄를 단번에 해결하셔서 하나님의 입장과 인간의 입장을 다 충족시켜주신 완전한 중보자(중재자)가 되셨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히브리서 9;12)

   영원한 속죄! 독자여, 이 말씀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깨달은 적이 있는가! 만약 그대가 마음속 깊이 이 말씀을 깨달았다면 그대는 구원 얻은 사람임에 틀림없다고 성경은 약속하고 있다. 그대의 과거, 현재 그리고 앞으로 지을 미래의 모든 죄가 영원히 해결 되었다.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피가 모든 죄를 씻었다! 말끔히 씻었다! 이제 그대가 할 일은 이 십자가의 속죄를 단순히 감사하여 받아들이기만 하면 구원을 받았으며, 거룩해졌다고 성경은 이미 선포하고 있다.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내)가 거룩함을 얻었노라"(히브리서 10;10)

   이 글을 읽는 그대는 이 말씀으로 의로워졌고 구원받았기를 바란다.

   둘째로 예수님께서 중보가 되신 것은 천국의 하나님과 우리를 만나게 해주실 분이시기 때문이다. 잠시 후에 주님은 공중에 오셔서 우리를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데려가셔서 하나님 아버지 앞으로 인도하실 것이다(데살로니가전서 4:15~18). 구원받은 모든 하나님의 자녀가 그 자리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비록 어떤 성도는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모습일지라도 구원받은 모든 자가 이 영광의 자리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복스러운 영생의 소망이다. 주님은 친히 약속하셨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한복음 14:2~3).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이 이 영광스러운 자리에 동참하게 되기를 기도한다. 아멘.

Posted by 행복자
,

             속아사는 인생들이여!


                      나아만의 육체 구원과  영혼 구원


   " 나아만이 가로되... 이제부터는 종이 번제든지 다른 제든지 다른 신에게는 드리지 아니하고 다만 여호와께 드리겠나이다" (열왕기하 5:17).


   " 나는 예수 믿고 그 지긋지긋한 관절염 고치고 건강하게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릅니다."

   구원받았느냐는 필자의 물음에 신앙생활을 10년이나 했다는 어느 집사님의 대답이었다. 집사님의 대답이 하나님 앞에서 왜 잘못되었는지 나아만의 경우를 살펴보면서 교훈을 받기를 원한다.


   나아만 장군이 처음 하나님 앞에 나오게 된 동기는 문둥병 때문이었다. 인간의 방법으로 치료가 불가능한 문둥병을 고치지 못하여 괴로워하고 있다가 계집종이 전해준 선지자의 소식을 듣고 먼 거리를 찾아와 고침받게 되지 아니하였던가! 나아만의 이 과정은 인간의 눈으로 볼 때 우연으로 생각되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분명한 계획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비록 적국의 장수였지만 하나님을 믿을만한 양심이 그 속에 있는 것을 보시고, 한 소녀가 포로로 잡히게 하시고 그 소녀를 통해 선지자의 소식을 듣게 하신 이 모든 과정은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오늘날에도 수많은 죄인들이 죄악의 깊은 잠을 자고 있는동안 하나님은 자기의 종들을 부르시고 그들을 통하여 자기 일을 진행하고 계신다. 죄인들이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와 사랑스런 음성을 깨닫지 못하고 멸망의 지옥으로 가고 있음을 생각하고 슬퍼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 나아만에 대한 하나님의 경륜을 더 생각해 보자. 하나님께서 나아만을 부르사 병을 고치신 것은 병 자체를 고치시는 것보다 그 역사를 통하여 창조주 하나님을 발견케하사 그분을 섬기며 그분을 통하여만 구원받음을 알게 하는데 목적이 있으셨던 것이다.

   서두에 말씀을 소개한대로 나아만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따라 하나님을 발견하고 구원받은 후 돌아갔다. 다시 말하면 나아만이 문둥병을 고친 것은 육체적 구원인데 하나님의 뜻은 이 육체적 구원을 통해 영혼의 구원을 목적하셨던 것이다.

   그는 그의 육신의 고침받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역사하심을 깨닫고 큰 충격을 받았음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그는 큰 물질을 아낌없이 선지자에게 바치려 했다 (열왕기하 5:15,16). 선지자가 받기를 거절했을 때 그는 선지자를 통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분께 감사하며 예배하기 시작한 것이다.

   필자는 이 장면에서 두가지 중요한 사실을 말하고 싶다.

   첫째는 나아만에 대한 계획이 2단계, 즉 육체 구원을 통한 영혼 구원이었으며, 금일의 수많은 구도자들도 이러한 경험을 거쳐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깨닫게 되는 과정은 다양할 수 있다. 병고침이나, 기도 응답이나, 능력 경험, 혹은 교육을 통해서 다양하게 하나님의 실존을 경험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경험 자체가 곧 구원이 될 수는 결코 없는 것이다. 슬픈 사실은 필자가 상담한 많은 경우의 교인들이 이러한 경험을 붙들고서 구원받은 자로 착각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아니다. 결단코 아니다. 이 경우는 구원으로 가는 과정이지 구원은 결코 아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육체적 구원이나 표적을 주러 오시지 않고 당신의 영혼을 구원하러 오셨다.

   바울도 표적만 찾는 유대인, 지식만 추구하는 헬라인을 책망하고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강력하게 증거하고 있다 (고린도전서 1:22,23).

   독자여, 누가복음 17장 11절 이하를 보라. 열 문둥병자가 다 병고침 받았으나 구원받는 자는 사마리아인 한 사람이었음을 명심하시라. 만약 당신이 하나님을 믿게 된 것으로만 구원받은 것으로 여긴다면 당신의 믿음도 검토해 보아야만 할 것이다.

   놀랄 일은 주님 나라에 갈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대다수의 사람 중에 천국에 이르지 못할 자가 생각보다 많다는 것이 성경의 증거이다 (마태복음 7:13~23). 당신이 지신의 영혼을 진정 사랑한다면 위의 말씀을 찾아 살피고 겸손히 당신의 영혼을 검토해 보라. 이 일이 중요한 것은 만약 당신이 버리운 자라면 당신의 그 훌륭한 신앙 경력에도 불구하고 영원히, 영원히 꺼지지 않는 지옥 불에서 통곡하고 있을 것임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둘째로 이 장면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나아만이 하마터면 병만 고치고 영혼 구원에 이르지 못하였을 뻔하였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으로 사려 하였기 때문이다. 만약 엘리사가 그 물질을 받았다면 나아만은 자기의 병고침에 대한 값을 치렀다고 당당한 생각을 하며 하나님을 경배하지는 못하였을 것이 분명하다. 엘리사야말로 훌륭한 하나님의 종의 모습이다. 엘리사는 영안이 온전히 열려있는 거룩한 하나님의 종이었던 것이다.

   구원의 문제, 영생의 문제에 돈이나 기타 인간의 생각이 개입하면 하나님의 선물인 영생이 훼손되는 것이다. 영생은 온전히 선물로만 주어진다. 그 아무것도 우리들의 댓가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며 순전한 하나님의 선물인 것이다(에베소서 2:8). 나아만을 감동시킨 이 하나님의 선물이 교회 역사 2,000년 동안 수많은 죄인들을 변화시켜, 주 앞에서 주님을 사랑하여 순교의 자리까지 이르게 하지 아니하였던가?

   영생은, 돈으로나 기타 아무것이나, 심지어는 하나님을 사랑하여 순교하였다 하는 신앙 경력으로도, 그 어떤 댓가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순수하게 거져주시는 선물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 놀라운 구원의 그림자를 구약에 두신 것은 온전한 자비이다. 오늘을 사는 우리가 이 나아만 장군에게 임한 하나님의 역사를 거울 삼아 하나님 앞에 갈 수 있는 길을 찾는다면 얼마나 기쁜 일인가!

   나아만이 자기의 잘못된 생각을 버린 것처럼 당신도 그러하기를 바라며, 나아만이 겸손해진 것처럼 당신도 그러해야 될 것이며, 나아만이 하나님을 경배한 자가 된 것처럼 당신도 구원받은 성도로 하나님께 알려졌기를 바란다.

   거듭 말씀을 드리지만 당신의 생각을 버리지 않는 한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

   "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베드로전서 1: 8,9).

   당신은 분명히 영혼 구원을 받았는지 아니면 육체 구원만 받았는지 겸손하게 점검해 보시기 바란다.

                                                                                                                        - 전도자 허윤욱 -

Posted by 행복자
,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여   성


                                            제 11 과


                            진정한 의미의 여성 해방


   여성 해방 운동을 주장하는 사람들 중에는, 사회 생활, 일상 생활, 가정 생활과 관련된 여성의 역할에 대해서 각기 다른 입장을 취하는 두 부류가 있는 것 같습니다.

   불신 여성 해방 운동자들은 성서적인 견해를 전혀 무시합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노예 제도 폐지론' 과 '부인 참정론' 을 주장하던 시대를 여성 해방 운동의 초기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운동의 근본적인 목적은 노예에게도 인간적인 권리를 부여하는 것과, 정치적으로는 여자들도 남자와 다름없이 선거권을 갖는 것이었습니다. 이 목적이 달성되자 이제는 여성들이 동등한 교육과 취업의 기회를 획득하는 데 집중하게 되었습니다. 이 운동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모든 여성들도 모든 남성들과 마찬가지로 지성적임을 인정하고, 이를 계발하고, 사용할 기회를 제공해 주기를 원했습니다.

   아울러, 여러 가지 여건들이 여성 해방 운동을 부채질했습니다. 즉 남자들이 군에 입대하게 되어 일손이 달리게 되자 회사들은 여성들을 채용하게 되었습니다. 또 경제적인 위기가 오자 가정의 궁핍을 면하기 위해서는 여성을 통한 부수입이 절대적으로 필요했습니다. 어떤 창의적인 여성들은 출판을 하기 위해서 가명을 쓰기도 하며 예술을 통해서 자기 표현을 하게까지 되자, 정치적인 압력이 입법자들에게 가해지게 되었습니다.

   한편 이 운동이 대중의 인기를 끌게 되자, 여성들은 직장을 가진 가정 주부의 역할을 비롯하여 그들의 생활 전반을 재검토하게 되었습니다. 여자들은 "만일 내가 남편과 똑같은 시간을 일하게 되면 남편이 퇴근할 때와 마찬가지로 나도 피곤하게 되므로 가사도 분담해야 되지 않겠느냐?" 라고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그래서 남편들에게 장보기, 부엌일, 아기보기, 집안청소 등의 가사의 균등한 분담을 요구했습니다. 이로써 결정에 있어서나 책임에 있어서 부부의 임무를 구분하지 않는, 이른바 결혼생활의 평등사상을 초래하게 되었습니다. 가장 중심의 가정이라는 개념은 해방적인 여성들에게 굴레처럼 느껴졌습니다. 이제 여성들은 자신이 갖고 싶은 직장을 마음대로 갖게 되었고, 가정 주부의 역할에서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여자를 경시하거나 가정 주부로서만 제한하려는 남성들을 가리켜 '남성 옹호주의자' 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물론 어떤 여성 해방 운동자들의 목적은 바람직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남녀간 같은 일을 했을 때, 동일한 임금을 받아야 한다는 데에는 여러분도 모두 동의하실 것입니다. 이처럼 여성의 지위를 향상시킬 목적에서 추진되고 있는 것도 많이 있습니다.

   반면 기독교 여성 해방 운동자들은 불신 운동자들의 많은 견해를 수긍하면서, 이에 대한 성서적 근거를 제시하려고 합니다. 어떤 이들은 성경에서 남녀평등 사상을 옹호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는 아전인수격(我田引水格)으로 어떤 성구를 제시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성경은 다만 기본적인 원칙을 제시할 뿐, 이것들은 현대적인 상황에 맞게 해석 적용해야 하며, 주후 1세기의 교회나 성도에게 주신 명령을, 상황과 문화가 다른 20세기의 성도들에게 적용할 필요는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때때로, 성경은 점진적이어서 바울과 같은 저자도 여자들에 관한 생각이 '성숙함' 에 따라 바뀌어졌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이 성경의 영감에 관해서는 침묵을 지키고 있으니 이상한 일입니다(딤후 3:16).

   기독교 여성 해방 운동자들은 여성들에게 교회에서의 설교를 허락하지 아니하기 때문에 여성의 은사 활용의 기회가 없다고 불쾌해 합니다. 이들은 여성인 자신들이 교회에서 소외되고, 차별대우를 받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성경이 영적 은사에 있어서 남녀를 차별하지 않는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참으로 옳은 말입니다. 성경 어디에도 신령한 은사와 관련해서 어떤 은사도 남자에게만 주셨다는 대목은 없습니다(고전 12장 참조). 그러나 교회의 주인이신 주님께서는 주의 자녀들이 모이는 곳에서의 은사 사용에는 남녀의 구분을 두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주인이시기에 그렇게 하실 권리가 있으십니다. 신령한 은사에 관해서는 12과에서 보다 상세하게 다루게 되겠기에 그 때까지 설명을 보류하기로 하겠습니다.

   기독교 여성 해방 운동의 대변자들은 가부장적(家父長的)인 결혼 제도 하에서 아내에게 순종이 강요되는 것을 특별히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이들은 남성 우위를 반대합니다. 그들은 모든 성도간 상호 복종하는 것 이외의 복종은 비성서적이라고 주장합니다. 결국 그들은 에베소서 5장 21절은 받아들이면서도 22절은 거절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현행 결혼제도를 일방통행로처럼 보고 있습니다. 여자란 언제나 남자에게 주기만 하고, 복종하기만 하고, 양보만 하며, 자기의 권리는 포기하는 것으로 봅니다. 그들은 결혼이든 사업이든 직업이든 목회이든 생활의 모든 분야에서 동등을 부르짖고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최근에는 여자의 성직 안수를 요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모든 여성 해방 운동자들의 일반적 주장은 소년 소녀들이 어려서부터 남녀 유별을 배워 왔고, 또 그렇게 처신하도록 세뇌를 받았기 때문에 남녀가 다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남녀에 대한 이러한 가르침은 유행에 뒤떨어진 견해에 근거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즉 여성은 우아하고, 정서적이며, 모성적이고, 남성세계에 대해서는 다소 무력해 보이는 반면에, 남성은 가족의 부양자로서 스포츠에 있어서나, 기계에 있어서나, 재정적 안목에 있어서 강인하고 우세하고 탁월하다는 견해는 고루하고도 인공적인 견해라는 것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그렇다고 해서 실질적으로 생리적인 차이점까지 해소되는 것일까요?

   '해방' 은 그 의미를 신중하게 검토해야 할 어휘입니다. 여성들은 구태의연한 남녀유별에서, 남성의 지배에서, 전형적인 주부의 임무에서 해방되어야 하며, 여성들은 생활의 모든 분야에서 '천부적 능력' 을 자각해야 한다며, 기독교 여성 해방 운동자들은 이에 대해서 성서적 근거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바울이 남성 옹호론자요 유대식 교육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갈 3:28)고 한 말씀을 보면, 그가 점차 남녀의 차별이 없다는 생각으로 기울어졌다고 주장합니다.

   어떤 이들의 주장대로 과연 사도 바울이 심경에 변화가 있어서 이 편지에는 이렇게 쓰고, 다른 편지에는 다르게 쓴 것일까요? 아니면 그가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기록한 것일까요? 여성 해방 운동자들이 어찌 바울의 말을 취사 선택하여 이것은 인정하지만, 이것은 인정할 수 없다고 말할 수가 있을까요? 어느 누가 감히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어떤 말씀은 하나님께로서 왔고, 어떤 말씀은 바울에게서 왔다고 분별하거나 비판할 권리가 있겠습니까? 성경 전체가 신뢰할 만한 것이 아니라면, 그 성경은 우리의 인생의 토대로  삼을 만한 권위가 없습니다. 여성 해방 운동자들이 인용하고 있는 구절들을 문맥적으로 주의 깊게 상고해 보면, 사도 바울의 가르침에는 일관성이 있으며, 모두 주님의 말씀임을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고전 14:37).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여성 해방은 성경 말씀 전체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명령을 문자 그대로 따르기를 힘쓰는 여성이 발견하게 되는 자유입니다. 참된 해방은 순종에 따른 결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에 이의를 제기할 권리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마침표를 찍으신 곳에 물음표를 할 수 있는 권리가 없다는 말입니다.

   중국에는 예로부터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두 사람이 강둑을 거닐다가 한 사람이 유난히 아름다운 나무 한 그루를 보았습니다. 그는 '이 자리에서 꼼짝할 수 없는 이 나무가 참으로 불쌍하다." 고 탄식했습니다. 이에 또 다른 사람도 '이 나무에게도 자유가 있어야 해!' 라고 동의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함께 이 나무를 뽑아 나무에게 자유를 주었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교훈해 주려는 바는 너무나도 분명합니다. 나무는 정해진 장소에 있었을 때 자유로왔고 아름다왔지만, 뽑힌 후에는 말라 죽었습니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계획을 따르고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소임을 감당하게 될 때,, 참으로 자유로울 수 있는 것입니다. 열차가 선로를 따라서만 제 기능을 효과적으로 발휘할 수 있으며, 돛단배도 바람의 원리에 순응할 때에만 영광스러운 자유를 보장받게 됩니다.

   남녀의 경우에도 동일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무한하신 지혜로 남자를 지도자로, 여자를 돕는 배필로 정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남녀 각자에게 적합한 임무를 구상하시고 계획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모든 면에 있어서 우리로 하여금 만족하게 임무를 완수할 수 있도록 그 내용을 정해 놓으셨습니다. 전지전능하시며 사랑 그 자체이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계획하신 것 중에 불완전한 것이 있을까요? 결국 우리가 완성되는 비결은 하나님의 경륜을 받아들이는 데 달려 있습니다. 만족하는 심령이야말로 참된 자유가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그렇다면 여성에게는 창의력이 없다는 뜻일까요? 그리고 여성의 소임이 가사에만 국한된다는 뜻일까요? 그저 가정에서 여성의 존재가 문 앞에 놓여 있는 흙털이개와 같은 것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이미 살펴본 대로 신구약 성경은 한결같이 여성의 활동이 가사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은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잠 31장 참조). 하나님을 앙모하며, 말씀을 경청하며, 순종하는 여성은 비록 최악의 극한 상황에서도 측량할 수 없는 만족을 누립니다. 무한하시고 영원하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막막하고 답답한 일을 당하게 할 필요가 있다고 하신다면 어찌 이를 사양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기를 힘쓰는 여성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를 기뻐하며,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께 초점을 맞춘 삶을 살기에 하나님께서는 그의 심령의 소원을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시 37:4).

   요컨대,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자아 완성을 도모한다면 반드시 어떠한 목적도 달성할 수도 없을 뿐더러, 독선적인 이기주의에 빠지게 되고 맙니다. 진정한 행복과 자아 완성에의 길은 이기적인 추구가 아니라 사랑의 자아 희생입니다.

Posted by 행복자
,

성 경 개 요

                                                               윌리암 맥도날드


                                     머리말


      이 책을 공부하시는 분들에게


   많은 사람들이 진지한 마음으로 성경을 공부하려고 하다가도 워낙 분량이 많고 개략적이나마 내용을 모르기 때문에 낙심하게 됩니다. 이 강좌는 바로 이렇듯 스스로 성경을 읽고 이해하려는 분들을 돕기 위해 마련된 강좌입니다.

   성경을 전연 모르는 분이나, 시간의 여유가 별로 없는 분, 또는 역사적 배경을 잘 모르는 분에게도 충실한 성경의 안내서가 되어 줄 것입니다.

   아울러 각 권의 개요를 공부하실 때마다 해당되는 성경을 직접 읽으셔서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계기가 되시기 바랍니다.

                                                                                                                                                     


                                       제1과 역사의 기원


                                       창세기


   성경은 세계사가 아니며, 더군다나 어느 민족의 역사도 아닙니다. 성경은 다만 우리 인생들에 대한 당신의 뜻이 어떻게 펼쳐지게 되는가를 보여 주시기 위하여 필요한 사건들만을 하나님이 골라 뽑아 기록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역사적인 중대 사건이 빠져있기도 하며, 역사적으로는 사소하지만 하나님의 경륜과 관계가 있는 사건은 상세히 기록되어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러한 성경의 맨처음에 있는 창세기에는 창조, 타락, 홍수, 바벨탑,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에 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서 먼저 인간의 기원과 인간이 살고 있는 우주의 기원에 관한 사실이 창세기 1장과 2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어서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로 말미암아 죄가 인간에게 들어 오게 된 경위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시에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실 것을 약속 하셨습니다(창 3:15). 구약 성경을 계속 상고 해 가노라면 이와같은 세상의 구주께서 오실 것에 관한 계시를 많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3장 15절의 말씀은 가장 중요한 사건의 실마리가 됩니다.

   이렇게 범죄한 이후에도 인간은 계속 타락해 가고 있었으며, 마침내 하나님께서는 세상에 홍수를 보내어 노아와 그의 가족들을 제외한 모든 인간을 전멸시키셨습니다. 이 사건은 아담이 창조된지 최소한 1600년 이후에 일어났었을 것입니다.

   노아 홍수 사건 후에도 인간은 거듭 거듭  하나님께 반역하였으며, 바벨탑을 쌓아 하나님께 도전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언어를 혼잡케 하시고 인류를 땅 끝까지 흩으심으로 심판하셨습니다.

   창세기 12장에는 노아 홍수가 있은 지 400년 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 내신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갈대아는 성경에서 후에 바벨론으로 불리우고 있는데, 오늘날의 이라크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불러 내셨다는것은, 지상 선민(選民)인 이스라엘 민족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로서 극히 중대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큰 민족의 조상이 될 것이며, 그의 후손을 통하여 구주를 보낼 것과 가나안 일경을  그들에게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후 구약 성경의 대부분은 선민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다루시는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아울러 13장을 기점으로 하여 주목할만한 두 차례의 방랑을 제외한 대부분의 사건은 가나안 땅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다음에는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의 출생과 모리아 산에서 죽음을 모면하게 되었던 사건, 그리고 리브가와의 결혼 등의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이삭에게는 에서와 야곱이라는 쌍동이 아들 둘이 있었는데, 동생 야곱이 형 에서의 장자권을 빼앗고 이삭에 이은 새 주인공으로 등장하게 됩니다.

   야곱의 생애에 대해서는 많은 사건이 기록되어 있으며, 그 사실들 모두 귀중한 교훈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기할 만한 사건은 후에 그가 이스라엘 12지파의 조상이 될 12아들을 낳았다는 점일 것입니다. 이들의 이름을 출생순으로 열거하면, 르우벤, 시므온, 레위, 유다, 단, 납달리, 갓 아셀, 잇사갈, 스블론, 요셉,베냐민입니다.

   다음으로 등장하는 인물이 요셉입니다. 그러나 요셉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인 것은 아닙니다. 메시야는 오히려 그의 형인 유다의 후손으로 오셨습니다. 그렇지만 그의 생애와 활동은 구약 성경의 어느 누구보다도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잘 묘사해 주고 있습니다. 이 요셉은 아버지에게서 특별한 사랑을 받음으로 인해, 그의 형들에게 미움을 받아 애굽으로 가던 대상(隊商)들에게 팔려 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애굽의 바로 통치 하에서 갑자기 두각을 나타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수년 후 가나안에 흉년이 들게 되자 야곱의 아들들은 애굽에 식량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내려갔다가 마침내 전가족이 애굽으로 이주하게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창세기는 아브라함이 소명을 받은 때로부터 270년 정도 지나 요셉이 애굽에서 죽는 것으로 끝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요셉이 죽은 후에 다른 바로가 집권을 하게 되었는데, 그는 히브리인에게 불친절했고, 이들을 노예로 부리게 되었습니다. 이때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모세는 바로에게 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으로 돌아 가는 것을 허락하라고 요구했습니다. 이에 바로가 거절하자 하나님께서는 아홉 가지 재앙을 차례로 내리셨습니다. 그러나 바로는 끝내 돌이키지 않았고, 이스라엘을 돌려 보내려하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하나님께서는 유월절 양의 피로 살아남지 않는 한, 모든 애굽 가정의 장자가 죽게 되는 열 번째 재앙을 내리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응하지 아니한 애굽 사람들은 집집마다 죽음을 맞게 되었지만, 문에 피를 발랐던 이스라엘 가정은 생명을 보존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기적적으로 홍해를 가르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널 수 있게 하시고, 추격하던 애굽 군대를 수장(水葬) 하셨습니다.

   이렇듯 아브라함의 후손은 이삭과 애굽과 이후 증손, 고손을 거치는 동안에 200만을 헤아리는 민족으로 성장하였으며, 약속의 땅을 향하여 여행하는 동안에 조직적으로 단결되었습니다. 가족과 가축들을 이끌고 광막한 사막을 행진하며, 도중 여러 지점에서 진을치고 유숙하는 수백만의 무리를 상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이 무리를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인도하셨고, 밤에는 불 기둥으로 인도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기적적으로 만나를 비오듯 내려 보내사 그들에게 먹을 것을 공급하셨습니다. 이 만나는 작고 둥글며 흰 것인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매일 아침 지면에서 이 만나를 구하여 만나로 빵이나 과자를 만드는 데 사용했습니다. 그리하여 애굽을 떠난 지 3개월만에 이스라엘은 시내 광야에 도착하여 잠시 동안 유진(留陣)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내 산 근처에 진을 치고, 근 일 년 동안 머물러 있었습니다.  당시 시내 산은 호렙 산이라고도 불리웠으며, 지금의 사우디 아라비아에 있었습니다. 출애굽기 19장에서 민수기 10장 11절까지의 기록은 모두가 이 시내 산에 있을 때에 일어 난 사건들입니다.

   한편 아브라함의 후손은 이제 한 민족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에 앞서 그들의 행동규범이 될 율법의 체계화가 절실히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것보다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관해서나 그들의 죄악에 관해서나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방법에 관해서, 이 백성들에게 가르쳐 주고자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선적으로 이스라엘을 위하여 모세에게 십계명을 반포하셨습니다. 이 십계명은 지금까지 인간 정치 제도의 초석(礎石)이 되고 있습니다. 이 외에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과의 관계상 책임이나, 인간 관계상 상호 간의 책임에 관해서 많은 법률을 따로 제정해 주셨습니다.

   다음으로 하나님께서는 성막의 건축에 관해 아주 상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성막이란 천막과 비슷한 구조물로서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만나시는 처소였으며,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종교 생활의 중심지였습니다. 더구나 성막을 만드는 데에 쓰인 모든 자재와 모든 기구는 장차 오실 주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을 잘 상징해 주고 있습니다.

    제사장 제도는 바로 이 성막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성막의 교훈에 이어, 레위 지파를 택하시고 그 가운데서도 모세의 형인 아론의 가계(家系)를 택하여 제사장의 반차를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제사장의 직무를 말씀하시면서 이에 관련하여 제사장의 의복과 활동과 예식에 관해서도 간단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모세가 하나님께 율법을 받으면서 시내 산에 머물고 있는 동안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경배함으로써 그 율법을 범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모세가 돌아와 이를 보고 노하여 율법을 기록했던 두 돌판을 깨뜨린 후, 이 백성들을 멸망시키지 말아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 그 후에 하나님께서는 시내 산에서 은혜와 긍휼을 약속하는 율법을 다시 모세에게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백성들은 이제 자원하여 예물을 가져왔고, 성막 건축 공사를 착수했습니다. 그리고 성막이 완성되자, 제사장들이 따로 세워지고 그들에게 제복이 입혀짐으로써 모든 일이 완료되었습니다. 그러자 밝게 빛나는 구름이 성막을 덮어 하나님의 임재를 보여 주었습니다.

   이 출애굽기에는 우리의 실생활에 교훈이 되는 사건들이 많이 있습니다.

   1. 유월절은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는 구원을 상징해 줍니다.

   2. 홍해를 건넌 사실은 그리스도인이 세상과 작별하고 실제로 거룩하게 살아갈 것을 교훈해 줍니다.

   3. 성막이나 성막에서의 봉사는 성도가 어떻게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는가를 교훈해 줍니다.

   4. 제사장 제도는 하나님 보좌 앞에서 우리를 대변해 주시는 대제사장이신 주 예수님의 사역을 상징해 줍니다.

Posted by 행복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