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 새로운 출생(BORN TO WIN)

                                                                            -윌리암 맥도날드

                                               제 8 과

                 본문 : 마태27:37-66 마가 15:26-47 누가23:38-56 요한 19:19-42


                                          인류 최대의 범죄

                     (The Greatest Crime Ever Committed)


   범죄 장면은 예루살렘 성 밖에서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일반적으로 그곳은 사형수들이 끌려와 처형당하는 장소였습니다. 당시 팔레스타인을 지배하던 로마인들은 사형수들을 나무 십자가 위에 달아 처형하고 있었습니다. 그날도 그곳에서는 죄수들의 처형식이 시행되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곳을 골고다(Golgotha)라 불렀고, 로마인들은 갈보리(Calvary)라 불렀습니다. 오늘 날에는 해골의 언덕(Hill of a Skull)이라 불리고 있습니다. 이곳은 예루살렘 성 시내로 들어가는 중심가 곁에 위치해 있습니다.

   그 날은 금요일 오전이었습니다. 로마 병사들은 죄수 하나를 처형하기 위해 그곳으로 그를 끌고 왔습니다. 그는 이제 30대가 갓 넘은 젊은이었습니다. 그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이곳 골고다로 끌려 올 때 길가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었습니다. 어떤 여인들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으며, 또한 그의 뒤를 계속 따르며 그를 향하여 온갖 조롱과 저주와 모욕과 욕설을 퍼붓고, 이를 갈면서 그에 대한 극한 증오심을 들어내는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마침내 처형장소에 이르렀을 때, 무리들은 더욱 큰소리로 일제히 "십자가에 못 박아라" "십자가에 못 박아라" (crucify, crucify!) 라고 외쳤습니다. 궁극적으로 그들이 원하는 것은 그의 피를 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날 범죄자로 이끌려 온 이 사람의 정체는 과연 누구였을까요? 그의 이름은 예수(Jesus)였습니다. 그는 다윗 왕의 후손으로, 다윗의 고향 베들레헴에서 출생하였고, 나사렛에서 성장하였습니다. 그는 그의 의부 요셉의 뒤를 이어 목수가 되어 그의 식구들을 돌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30세 쯤 되었을 때 그는 홀연히 자신의 목공 연장들을 내려놓고, 현대인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전도단(Crusade)의 사명을 띠고, 이를 위해 전적으로 헌신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운동은 초기부터 순탄하지 못하였습니다. 그의 가르침과 자신의 신성에 대한 주장은 당대의 기존 종교지도자들과 심한 충돌을 일으키기 시작하였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날로 대중들이 날로 그의 가르침과 기적에 이끌리고 있음을 보고 극한 시기와 증오심으로 여러 번 그를 죽일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 계획은 번번이 실패했지만 그의 제자 중 하나인 배반자 가룟 유다의 도움을 받아 마침내 그를 체포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모여 그를 죽일 구실을 찾으려고 노력했으나 자신들 간에도 의견 일치를 보지 못하였습니다. 결국 그가 하나님과 자신이 동등하다고 주장한다 하여 신성모독 죄를 구실 삼아 로마인들에게 그를 넘기며 그의 사형을 요구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에게는 사형 판결권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죄수를 넘겨받은 로마 총독 빌라도는 그를 심리한 결과, 그에게서 아무 죄도 발견할 수가 없었습니다. 단지 그들 유대인들 간의 종교 문제임을 깨닫고 무죄를 선언하였습니다. 그러나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굽히지 않고, 그의 처형을 강력하게 요구하였습니다. 총독은 자신의 양심에 따라 그를 살리려고 힘써 보았지만 자칫 민란이 일어 날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그들의 요구에 굴복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물을 담은 대야를 가져오게 하고 자신의 손을 씻으며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마 27:24)고 선언한 후, 그를 사형 집행자들에게 넘겼습니다. 이상이 예수의 생애에 대한 개략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누구이며, 그는 왜 죽어야 했는가? (Who Was The Man? Why Did He Die?)


   우리 모두는 이 분에 대해서 좀 더 정확히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들과 같은 단순한 인간이 아니십니다. 그는 바로 하나님의 아들(Son of God)이십니다. 그는 온 우주를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만물은 그에 의해 창조되었으며, 그는 그가 만드신 온 우주와 만물을 붙들고 계시는 분이십니다(요 1:10 ; 골 1:17, 히 1:3). 그러나 그는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를 찾아오셨습니다.

   그가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목적은 우리를 죄악으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함 이었습니다. 그는 오셔서 우리의 대속 제물(substitute)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우리가 마땅히 지불해야 할 모든 죄 값을 대신 다 지불하여 주셨습니다. 그는 우리들이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그와 함께 살 수 있는 길을 준비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인간들은 그를 죽일 만반의 채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그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누구에게 돌려야 할까요? 그의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들에게 돌리라" (마 27:25)고 맹세하며 그의 십자가 처형을 요구했던 종교 지도자들과 그에 동조했던 모든 유대 사람들에게 일차적인 책임이 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일입니다. 다음에는 그의 무죄함을 알면서도 그를 처형하도록 허락한 로마 총독 빌라도와 로마 병사들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나 에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바로 우리들 모두에게 그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진정으로 깨닫지 않는 한 신비한 그 십자가의 완전한 의미를 우리는 결코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입니까?" 많은 사람들은 의아해하며 이의를 제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기록된 말씀들을 자세히 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요 1서 2;2)하였고 "그리스도께서 한 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벧전 3;18)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말씀들을 통하여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사실은 그는 어떤 사람들에게 타의적으로 죽임을 당하신 것도 아니며 또한 그 자신의 죄나 잘못 때문에 죽임을 당하신 것도 아닌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바로 우리 모든 인간들의 죄를 위한 화목 제물로 죽으셨습니다. 우리 모든 인간은 범죄함으로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진 상태였습니다. 성경에 이르기를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하였다"(이사야 59:1-2)고 하였습니다. 또한 사도 바울은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더불어 화목 되었다" (롬 5:10)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자신의 죽으심을 통하여 하나님과 우리 인간들 사이에 가로 막혔던 죄의 담을 영원히 제거해 주셨습니다. 그는 이 일을 위하여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시고 십자가의 죽음을 스스로 택하셨습니다(빌 2:8 ;히 5:7-9). 그는 십자가를 앞에 두고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히 10:7, 10).

   또한 그는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요 10:17-18).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 10;15). 또한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 물로 주려 함이라" (마 20;28)고 거듭 거듭 그 자신의 죽으심에 대해서 밝히 말씀하셨습니다. 세례 요한은 그를 증거 하기를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요 1;29)고 외쳤고, 선지자 이사야는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위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이사야 53:5)라고 그의 죽음을 예언으로 증거 하였습니다. 그 외에도 시편 22편과 다른 여러 곳에서도 그의 죽으심을 예언한 사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또한 구약의 모든 제사 제도와 규례 등은 다 그의 죽으심을 예표하는 그림자들이었습니다. 죄를 속죄하기 위해 수많은 짐승들의 희생 제물들의 피를 요구했던 그 모든 제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단 한번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완성되었습니다. 진실로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하여 우리의 완전한 구원을 성취하셨습니다.

   그러면 이처럼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친히 당하셨던 형언할 수 없는 그 십자가의 죽으심과 그 모든 고통에 대해서 좀 더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오늘날 성지 순례자들의 코스 중에 하나인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가 있습니다. 일명 고통의 길(the way of sorrows) 혹은 통곡의 길(the way of tears)이라 불리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으시던 곳으로부터 이 길을 따라 골고다 언덕까지 자신의 십자가를 지시고 가신 길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 길이는 약 1km이며 폭은 약 3-5m 가량입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고 약 세번 가량 쓰러지신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가 쓰러지실 때마다 로마 군병들의 채찍이 사정없이 그의 등을 내리쳤습니다. 그 채찍은 쇠붙이가 달려 있어 맞을 때마다 그의 등은 무참히 찢기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성경은 이렇게 예언되었습니다. "밭가는 자가 내 등에 갈아 그 고랑을 길게 지었도다" (시129:3)

   마침내 그가 골고다 언덕에 이르렀을 때 그의 십자가 처형식은 이렇게 이루어 졌습니다. 군병들은 먼저 예수께  쓸개 탄 초(vinegar and gall)를 권했습니다. (주- 여기에서 식초는 아마 발효된 포도주를 의미하는 듯 싶음) 이는 사형수에게 고통을 덜어주기 위한 마취의 기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를 받아 마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수행하는데 반 마취 상태(half-drugged condition)로 임하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오전 9시, 병사들은 나무 십자가 위에 그를 누이고 그의 양손과 발에 쇠못을 박은 후 이미 파 놓은 구덩이 속으로 십자가를 던져 넣었습니다. 그때 그의 손과 발이 찢기는 고통을 어찌 능히 다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오후 3시 가까이 이르렀을 때 갈증과 그 고통은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그 때 그는 외치셨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창조주 하나님께서 자신의 손으로 만드신 피조물들의 손에 의해 죽임을 당하시다니! 이는 인류 최대의 범죄 사건이었습니다.


   우주 만물의 창조주께서

   한 인간으로서 인간을 위해 저주가 되셨네.

   그의 거룩한 손가락으로 지음을 받은 그 가지들은

   가시덩굴로 자라 그 이마를 찌른 가시관이 되었네.

   그의 설계를 따라 신비 속에 깊게 감취였던,

   그 손으로 만드신 광물은 그를 찌르는 못이 되었네.

   그가 만드신 아름다운 수풀 속에서 자라난 나무들,

   그 나무 십자가위에 그 몸 달리셨네.

   그가 우리를 지극히 사랑해 달리셨던,

   그의 나무 십자가 서있던,

   그가 만드신 저 언덕,

   예처럼 지금도 그대로 서 있네.


   사형수의 옷을 나누는 것은 병사들의 관습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옷을 제비를 뽑아 나누어 가졌습니다. 이는 일찍이 다윗에 의해 예언된바 있습니다,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 (시 22:18).

   예수님의 머리위에는 그의 범죄 푯말을 달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단순하게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 이라고 쓰인 푯말을 달았습니다. 많은 백성들은 이를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빌라도에게 "자칭 유대인의 왕" 이라 바꿔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죽을 때, 그의 가족이나 친척들 그리고 친구들은 그가 임종 시에 남기는 마지막 말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됩니다. 예수께서는 그가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일곱가지 중요한 말씀을 남기겼습니다. 그 첫 번째 말씀은 "아버지여,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는 저들을 용서해 주소서" (눅 23;34)라고 하는 기도였습니다.  원수들을 위한 이러한 예수님의 기도는 그의 놀라운 은혜를 나타냅니다. 그 기도는 주님을 배척하는 자들이 훗날 자신들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여 주께 돌아오게 될 때, 그들을 구원하여 주실 것을 간구하는 기도입니다. 실제로 사도행전 2장 37절 이하를 보면 그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고 주님께로 돌아왔던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마땅히 예수님처럼 원수의 영혼을 위해서라도 기도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주님의 마음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 대신 벌을 받다 (Taking The Rap For Others)


   이처럼 아무 죄도 없는 사람을 죽음으로까지 몰고 간 성난 군중들은 조금도 자신들의 만행을 참회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향해 "성전을 헐고 삼 일 만에 다시 세울 수 있다고 했지, 만일 네가 정말로 하나님의 아들이면 이제 십자가에서 내려와 너 자신을 구원해 보라." 라고 조롱했습니다. 또한 종교 지도자들 역시 그를 희롱하기를 "너는 거짓으로 남을 구원한다고 한 자다. 이제 너 자신을 구원해 보라. 십자가에서 내려옴으로 네가 참 이스라엘의 왕인지 증명해 보라. 그러면 우리도 믿겠노라. 너는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했다. 좋다. 네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참아들이면 하나님께서 너를 구원하시게 하라. 그러면 모든 진실은 드러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예수께서는 물론 그가 당장 십자가에서 내려와 그 자신을 구원하실 능력도 있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예수님께서 사십 일간 광야에서 금식기도를 마치셨을 때, 마귀가 그에게로 다가와 세 가지 시험을 했던 사실을 기억할 것입니다. 마귀는 의심 없이 예수님께서 초능력적인 기적을 행하실 수 있는 신성을 지니신 분이심을 믿고 있었습니다. 마귀는 예수께서 돌을 떡으로 만드실 수도 있는 분이심을 믿었으며, 높은 성전 꼭대기에서 아무런 해를 입지 않고 밑으로 뛰어내리실 수도 있는 분임을 믿었습니다. 우리가 분명히 깨달아야만 할 중요한 포인트가 있습니다. 십자가는 고통스럽고 수치스러운 것임이 분명했지만, 예수께서는 그 십자가를 자신이 감당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그 자신의 사명을 알고 계셨습니다.

   한번은 학교 교실 안에서 다른 학생의 물건을 훔친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담임선생님은 그 문제의 학생이 누구인지 반드시 가려내려고 작정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선뜻 자백하고 나서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자 담임선생님은 강하게 엄포를 내렸습니다. "내가 범인을 반드시 찾아내기 전까지는 오늘 한 사람도 집에 돌아 갈 생각을 말라" 이미 해는 지고 교실 창밖이 어둑어둑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러다가는 30여명의 무고한 학생들까지 꼬박 벌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그때 반장 윤군이 당임선생님 앞으로 나아왔습니다. 그는 선생님 앞에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말했습니다. "선생님, 제가 물건을 훔친 범인입니다. 부디 저를 처벌하시고, 이제 다른 친구들은 모두 집으로 돌려보내 주십시오." 모든 학생들뿐만이 아니라 담임선생님도 그가 그럴 학생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담임선생님은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자신의 입으로 범인임을 자백한 자를 지금 벌하지 않으면 다음에도 똑같은 일이 반드시 다시 생기리라 생각한 선생님은 아무 죄도 없는 그를 회초리로 사정없이 때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온몸에 상처를 입으며 매를 맞으면서도 끝까지 참고 견디고 있는 모습을 본 학생들은 마치 자신이 채찍을 맞는 것처럼 모두 고통과 아픔을 느꼈습니다. 그 때 한 사람이 큰 소리로 울부짖으면서 앞으로 달려 나왔습니다. "실은 제가 그 나쁜 범인입니다. 저를 벌해주세요. 선생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교실 안은 갑자기 울음바다가 되었습니다. 선생님도 울었습니다. 벌을 대신 받고 아픔을 참던 학생도, 자신의 죄를 진심으로 깨닫고 용서를 비는 학생도 더 이상 죄인이 아니었습니다. 여기에서 선생님은 하나님을, 다른 학생들을 위하여 대신 벌을 자청한 사람은 예수님을, 그리고 나중에 눈물을 흘리며 자기 자신의 잘못과 죄를 깨닫고 그 죄를 고백한 사람은 우리 모든 죄인들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은 바로 이와 똑같은 원리입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이천 년 전, 예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갈보리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하나님 앞에서 심판의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 앞에 나아가 우리의 죄를 고백해야 합니다.

   "하나님, 저는 정말 죄인입니다. 저는 하나님 앞에 형벌을 받아야 마땅한 죄인입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께서 저를 사랑하심으로 당신의 외아들을 보내주시고, 그가 나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당하시며, 고난의 십자가를 지신 사실을 깨닫고 믿습니다. 하나님, 이제 저의 죄를 회개하오니 예수님의 보배로우신 그 피로 저의 모든 죄를 씻어주시옵소서. 지금까지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악한 죄악 중에 이 세상을 살아왔던 저를 용서해 주시옵소서. 이제 예수님을 진심으로 저의 마음과 저의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기를 원합니다. 제 마음 문을 열고, 이제 주님을 구주로 영접합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저를 대신하여 죽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 주신 이유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주 예수께서는 이제 갈보리 십자가 위에서 거룩한 희생의 죽음을 감당하셨습니다. 원수들의 조롱대로 그가 십자가에서 내려오셔서 그의 십자가를 포기하셨다면, 우리 모든 인류의 소망은 영영히 끊어졌을 것입니다. 육신을 지니신 예수님인들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으셨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다가오는 죽음을 앞에 두시고, 겟세마네 동산으로 오르셔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그는 심히 놀라고 슬퍼하시면서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이렇게 말씀하시고, 그는 홀로 앞으로 나아가셔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하실 수 있다면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가 그처럼 기도하실 때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방울 같이 되더라." 고 복음서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그의 기도가 간절하셨던가를 우리는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주의 이름에 감사, 찬양을 드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세 번째 기도에서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이뤄지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의 고통이 아무리 고통스럽고, 수치스럽고, 괴로울지라도 예수께서는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귀중한 생명을 우리를 위한 대속제물로 내어주셨습니다.

   또한 그는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의 순간에서도 구주로서 자신에게로 나아오는 오른 편 강도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주 예수님을 향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여 주소서." 라고 간구하는 강도를 향하여 예수께서는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오늘 너는 낙원에서 나와 함께 있으리라." 이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과에서 더욱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말할 수 없는 슬픔에 잠긴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도 군중들 틈에 서 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의 동정어린 눈길로 자신의 어머니를 내려다보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사랑하는 제자 요한에게 그의 어머니를 부탁하였습니다. 이처럼 그는 자신을 위해서는 동정하지 않았지만 그러나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는 넓고 큰 바다처럼 한없는 사랑과 동정을 쏟으셨습니다.

   정오로부터 오후 3시까지, 태양은 빛을 잃고 온 세상은 깊은 암흑으로 덮이게 되었습니다. 이는 자연과 온 만물마저 처참한 십자가의 광경에 슬픔을 드러낸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옛 찬송가의 한 구절처럼,


   인간을 위해, 

   피조물 되어 그들의 죄를 지시고

   그리스도, 전능자께서 죽음을 당하실 때

   밝은 태양마저 어둠속에 숨어

   그의 영광을 가리 우네.


   이 세 시간 동안은 주 예수께서 우리들의 죄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의 진노를 담당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의 고통은 장차 우리가 지옥으로 가서 영원토록 당해야 할 모든 고통을 함축한 고통이었습니다. 그는 끝까지 인내하며 우리를 위해 참으셨습니다. 그가 겪으셨던 그 모든 고난을 어찌 그 누가 능히 다 측량하리요! 또한 예수님에게는 우리 인간들의 손에 의해 당하신 어떠한 고통도 하나님 손에 의해 당하는 고통에 비교하면 부드러운 손길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당신과 나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가 성취하신 일은 무엇인가? (What It Took to Finish The Job)


   암흑의 세 시간이 끝날 무렵, 예수께서는 큰 소리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라고 외치셨습니다. 우리는 그와 같은 그의 기도의 의미를 알고 있습니다. 그 순간은 우리들의 모든 죄가 예수님의 양 어깨 위에 모두 지워졌던 순간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공의와 의로움은 모든 죄에 대한 완전한 심판을 요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사랑하시는 아들 위에 얹혀진 우리들의 죄를 보셨을 때 그의 아들을 버리셨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렇게 우리들의 모든 죄를 담당하시고 죄 값을 다 지불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내가 목마르다"라고 부르짖으셨습니다. 우리는 두 가지 면으로 이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 째로, 그는 적어도 여섯 시간 동안, 뜨거운 태양 아래서 피를 흘리심으로 인한 극심한 육체적 갈증을 느끼셨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 그의 목마름은 모든 사람의 구원을 위한 영적 갈증의 표현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목마름의 호소를 육체적 갈증으로 생각한 한 병사는 스폰지 달린 장대에 초(신 포도주)를 적셔 그의 입가에 대었습니다.

   그는 초를 조금 맛보신 후 "다 이루었다!" (It is finished)라고 외치시고 운명하셨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우리들의 구원을 위한 모든 사역을 그가 마침내 다 이루신 것을 나타내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 죄인들을 위한 완전한 구원의 길을 친히 예비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리들의 죄에 대한 대가를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그 모든 요구를 완전하게 만족시키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들의 구원을 위한 일을 마치셨기 때문에, 우리는 더 보탤 것도 없고, 우리에게 더 필요한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만 이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구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통하여 이미 다 완성해 놓으신 그 "구원의 선물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일" 뿐입니다.

   최후로, 구주께서는 "아버지여, 아버지의 손에 내 영혼을 부탁하나이다." 라고 외치신 후 그의 영혼을 하나님께 의탁하시고 운명하셨습니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그는 자신의 죽음의 시간을 스스로 주관하고(controlled) 계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 시간이 오면 우리는 죽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생명을 스스로 버릴 수 있는 권세를 가지신 분이셨습니다(요 10:18).

   예수께서 운명하셨을 때, 두 가지 놀라운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예루살렘 성전 안에 있는 성소와 지성소 사이를 가로막는 성전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졌습니다. 이는 우리들에게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길이 열리게 된 것을 의미합니다(히 10:19-20). 또 다른 사건은, 지진이 일어나 무덤들이 열리며, 많은 죽은 자들이 다시 살아났습니다. 이는 예수께서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신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모든 사실들을 직접 자신의 눈으로 목격한 로마 장교(백부장)는 심히 놀라며 "이는 분명 무죄한 사람이었도다. 그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고 놀라운 증언을 했습니다.

   관례에 따라, 병사들은 죄수들의 죽음을 더욱 촉진시키기 위하여 두 강도의 다리를 꺾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미 운명하신 것을 알고 그의 다리를 꺾지 않았습니다. 한 병사가 그의 창으로 예수님의 옆구리를 찌르매 피와 물이 흘러내렸습니다.

   예수님의 숨은 제자 중 한 사람이었던 아리마대 요셉은 십자가에서 예수님의 몸을 내려, 바위 속에 판 그의 새 무덤에 그를 장사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야기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삼 일이 지난 후, 예수께서는 무덤으로부터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늘나라로 다시 오르셔서 우리의 왕과 구주로서 지금 하나님 우편 보좌 위에 앉아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신 것은 분명한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이는 기독교가 참된 종교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게 하는 것입니다.

다른 모든 종교의 창시자들은 죽었고, 그들의 시신은 여전히 무덤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하늘나라에 지금 살아 계십니다. 오직 어리석은 자들은 죽은 사람을 자신들의 신(神)으로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자들은 살아계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그의 신(神)으로 믿습니다.

   생명과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은 우리 인간들의 인류 최대 범죄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크신 자비로 말미암아 이것을 우리의 영원한 복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이제 누구든지 그리스도께서 나의 대속자로 죽으신 사실을 깨닫고, 참된 믿음으로 자신의 삶 가운데 그분을 영접하면 하나님은 진정한 복을 그의 생애 가운데 임하게 해주실 것입니다.

  

Posted by 행복자
,

                         성 경  개 요 


                        제9과 그리스도와 그의 몸된 교회


                                                       복음서


   복음서는. 과거나 현재나 미래를 통틀어 중심되는 분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하고 있기 때문에 성경의 심장부라 할 수 있겠습니다. 또한 역사 그 자체가 주님에 관한 기록(History is His Story)이기는 하나, 특별히 복음서에는 하나님께서 친히 기록해 주신 주님의 사적을 볼 수 있습니다.

   구주의 지상 생활은 33년에 불과했습니다. 우리는 그 33년 중 초반 곧, 주님이 베들레헴 마굿간에서 동정녀에게 탄생하셨고, 양친은 애굽으로 피했다가 나사렛에 돌아왔던 사실을 복음서의 첫머리에서 읽게 됩니다. 또한 예수께서 열 두살 되던 해의 유월절에는 예루살렘에 올라 가신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이후 30세가 될 때까지에 관해서는 아무런 기록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30세에 주님께서는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40일 동안 광야에서 사단의 시험을 당하셨습니다. 이후에 주님께서는 비로소 대중적인 활동을 시작하셨습니다. 주님의 공생애 기간은 편의상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유대에서 약 1년간 지내셨고,

   2. 갈릴리에서 약 1년 9개월을 지내셨으며,

   3. 베레아에서 약 4,5개월간 머무셨습니다.

   또한 주님의 사역에는 몇 가지 뚜렷한 특징이 있었습니다.

   1. 주님께서는 많은 기적을 행하심으로 당신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이스라엘의 왕이심을 입증하셨습니다.

   2.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위대한 진리를 백성들에게 가르치셨습니다. 이를테면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자가 갖추어야 할 바람직한 품행은 어떤 것인가 등에 관한 진리를 가르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이같이 하나님의 나라를 가르치시기 위하여 비유나 실화를 사용하시기도 했고, 구약을 인용하시기도 하셨습니다.

   3. 주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시기 위하여 열 두 제자를 부르사 훈련시키셔서 보내셨습니다.

   그러다가 주님의 말씀이 점점 백성들의 반대에 부딪히고 배척을 받게 되자, 주님께서는 그 사역의 대상을 이방인에게로 확대하셔서, 당신 자신을 믿음으로 영접하는 모든 사람의 구주가 되실 것을 선언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여러번 자신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해 미리 말씀하셨고, 주님을 배척하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무서운 고난이 있으리라고 예언하셨습니다.

   한편 베레아에서의 사역이 끝날 즈음에 주님께서는 예루살렘에 개선의 입성을 하셨으며, 백성들의 열광적인 환호를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종교 지도자들은 주님을 모함했고, 유다와 더불어 주님을 체포할 것을 흥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주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은 제자들과 더불어 유월절을 지키려는 것이었고, 나아가서는 주님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주의 만찬을 분부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주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고난을 겪으셨으며 유대인들에게 체포되어 시련을 당하시고 빌라도와 헤롯 앞에서 로마인들에게 희롱과 멸시를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무죄하심이 명백함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거짓 증인들에게 에워싸여 송사를 당하셨고, 주님의 죄를 찾지 못한 빌라도마저 백성들의 요구에 못이겨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도록 넘겨 주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주님께서는 두 강도 사이에 매달려 고통을 당하시고 피를 흘리신 후 죽으셨습니다. 이런 외형적인 사실만을 보면 주님께서는 악한 자들의 손에 죽임을 당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실은 주님께서는 당신을 믿는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담당하시려고 친히 십자가로 나아가셨던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뒤 주님의 몸은 아리마대 요셉의 새 무덤에 장사되었다가 삼 일 만에 죽음에서 살아나셨습니다. 그 후 승천하여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으실 때까지 40일 동안이나 제자들과 여러 성도들에게 당신 자신의 모습을 밝히 드러내셨습니다.

   이러한 생애동안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을 모두 복음서에 기록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만일 주님의 생애에 있었던 일을 낱낱이 기록한다면 세상이라도 그 책을 두기에 부족할 것입니다(요 21:25).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 20:31)

   네 권의 복음서가 각기 다른 면에서 흠도 없고 죄도 없는 완전한 한 인간을 증거하고 있다는 사실은, 어떤 문학에서도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일입니다. 주님의 생애가 이처럼 역사적으로 엄연한 사실이기 때문에 마치 우리 인생과 전혀 다를 바가 없다고 느껴지지만, 주님의 생애는 우리와는 달리 완전하셔서 전혀 흠을 찾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죄많은 인생으로서는 어느 누구도 감히 죄 없으신 분의 생애를 기록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성령님께서는 네 권의 복음서를 우리에게 기록해 주신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필이면 복음서가 네 권이나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한 권으로 충분하지 않았을까요? 이에 대해서는 네 사람의 저자가 저마다 다른 관점에서 다른 방법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다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마태는 주 예수님이 다윗의 후손으로서 유대인의 왕이라고 증거했습니다. 그리하여 마태복음에서는 메시야로서의 탄생, 메시야에 대한 세례요한의 증거, 시험을 받으시고 세상에 알려지셨다가 배척을 당한 메시야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또한 마태가 가장 관심을 가지고 있던 것은  그리스도를 유대인의 왕으로 증거하는 것이었으므로, 주님의 족보를 다윗과 아브라함에서부터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마가는 하나님의 아들을 아버지의 뜻을 행하려고 세상에 오신 종으로 묘사했습니다. 주께서 종으로서 하나님을 섬기신 사실이, 주님의 신분을 알려주는 선조에 관한 사실보다 더 중요했기 때문에, 족보 이야기는 전혀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누가는 주 예수님을 인자로 증거하고자 했습니다. 그러기에 누가가 밝힌 족보는 최초의 사람이었던 아담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누가복음에서는 뭇사람 중의 한 사람으로, 뭇사람을 섬기시며, 그들을 찾아 구원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요한복음은 위의 세 복음서와는 전혀 다릅니다. 요한복음에서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적인 족보를 기록하기 보다는, 주님을 태초에 계신 말씀으로 영존하시는 하나님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 특이한 점은 홀로 요한만이 유대에서의 주님의 활동이나 베레아에서의 활동을 주로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에게는 주님을 각기 다른 관점에서 기록한 네 권의 복음서가 있기에, 주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 가까이에서 직접 모시던 제자들보다도 주님을 더욱 완전하고도 정확하게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영원한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도행전


   사도행전은 초기 기독교의 형성과 성장에 관해 간략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사도행전에는 전적으로 성령님께서 인도하신 사실들이 기록되어 있으므로 어떤 이는 성령 행전이라고도 부르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사도행전에는 베드로와 바울의 활동이 주로 기록되어 있어 두 사도의 행전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의 활동은 1-12장에서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성령님께서 강림하심으로 교회가 탄생되었을 때부터 베드로는 활동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베드로는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으며, 만주의 주가 되신다는 사실을 특별히 강조하여 전파하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시작되었던 예루살렘 교회는 대부분 유대인 신자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그후 핍박이 일어나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는 최초의 순교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신자들은 유대와 사마리아로 흩어지게 되었는데,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파하였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도 본의와는 무관하게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게 되자, 이제 복음은 더 이상 유대인에게만 국한되지 않게 되었습니다. 유대인에게 국한되기는 커녕, 유대인들이 계속해서 복음을 배척함으로써 오히려 이방인들이 교회의 지체로 더해지게 되었습니다.

   한편 사도행전 13장 4절에서부터 사도행전의 마지막까지에는 바울이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기 위하여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구원을 받게 된 바울은, 베드로가 주로 유대인의 사도로 봉사했던 것처럼, 이방인의 사도로서 봉사하는 총책을 맡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활동은 세 차례에 걸친 전도 여행과 죄수로서의 로마 여행을 핵심으로 하고 있습니다.

   제 1차 전도 여행에서는 수리아의 안디옥에서 출발하여 구브로와 소아시아의 여러 도시로 가서 복음을 전파하였습니다.

   제 2차 전도 여행에서는 재차 소아시아를 방문하고 나서 마게도냐와 그리이스로 건너갔다가 에베소와 가이사랴를 경유하여 안디옥으로 올라 왔습니다. 이 시기에 바울은 데살로니가 전 . 후서를 썼습니다.

   제 3차 전도 여행에서는 소아시아와 마케도냐와 그리이스를 거쳐 소아시아의 서남 해안으로 돌아 예루살렘에 돌아왔습니다. 이 시기에 바울은 고린도 전 . 후서로마서갈라디아서를 썼습니다.

   제 3차 전도 여행에서 돌아오는 도중에 바울은, 예루살렘에 가면 체포와 구금을 당하거나 심지어 죽임을 당할지도 모르니 돌아 가지 말라는 경고를 받았는데, 그래도 그는 그 모든 만류를 뿌리치고 예루살렘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시아에 살던 유대인들이 바울이 성전을 모독하고 있다고 무고하게 고소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바울은 산헤드린 공회와 벨릭스와 베스도와 아그립바 왕에게 심문을 당하다가, 바울이 황제에게 재판을 받겠노라고 상고하여 가이사에게 재판을 받기 위해 로마로 이송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을 실은 배가 항해 도중 멜리데에서 파선하게 되어 승무원과 승객들은 그곳에서 겨울을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뒤 마침내 바울이 로마에 도착했을 때에는, 자기의 셋집에서 살 수 있는 자유가 허락되었습니다. 그곳에서 바울은 2년 동안 머물면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고 옥중 서신으로 불리우고 있는 에베소서빌립보서, 골로새서빌레몬서를 썼습니다.

   사도행전의 기록은 여기에서 끝나고 있지만, 사도 바울이 1차 투옥에서 풀려나 다시 전도 여행을 했다는 믿을 만한 증거가 있습니다. 이 시기에 바울은 디모데 전서디도서를 썼을 것이며, 바울이 히브리서의 저자일진대 역시 이 시기에 히브리서를 썼을 것입니다.

   그뒤 바울은 재차 로마로 잡혀가서 투옥되었던 것으로 분별되며, 디모데 후서는 순교 직전에 씌어졌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Posted by 행복자
,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Christ is All)

 

   그리스도께서는 땅과 하늘을 통틀어 우리의 모든 것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그분께서 하나님의 자녀들 가운데 마땅히 취하셔야 할 자리 곧, 만유 되시는 분으로서의 위치를 확보하지 못하고 계시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마땅히 차지하셔야 할 절대적인 믿음의 대상의 자리에 오르지 못하고 계시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가 아닌 우리 믿음의 대상이란, 그리스도 본체와는 다른 어떤 것을 말하는데 그것은 교리가 될 수도 있고, 신조가 될 수도 있으며 하나의 교권 형태의 당파가 될 수도 있고, 혹은 우리 인간의 개인적인 영적 체험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변화산에서 베드로로 하여금 "우리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겠습니다 (마 17:4, 막 9:5, 눅 9:33)라는 말을 하도록 부추긴 것과 같은 영에 사로잡혀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그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와 더불어 말하는 것이 그들에게 보이거늘 베드로가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시는지라. 제자들이 듣고 엎드려 심히 두려워하니 예수께서 나아와 그들에게 손을 대시며 이르시되 일어나라 두려워하지 말라 하시니 제자들이 눈을 들고 보매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마 17:1-8).

 

   사랑하는 형제여, 여러분은 한 번이라도 하나님과 함께 몰려오는 빛난 "구름(cloud)"속에 들어가 본적이 있습니까? 이 구름 속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음성(voice)"을 들어 본적이 있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엎드려" 본 적이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손 대심(touch)"을 느껴 본 적이 있습니까? 그 후에 예수께서 여러분에게 "일어나라."고 하시는 또 하나의 음성을 들어 본 적이 있습니까? 여러분도 제자들처럼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는 일을 경험해 본적이 있습니까? 그 때에도 아마 많은 사람이 산의 정상까지는 따라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주 극소수의 사람만이 "구름(cloud)"속에 들어갔고, 아주 소수의 사람만이 이 구름 속에서 나오는 "음성(voice)을 들었고, 아주 극소수의 사람만이 일어나 "오직 예수님"만을 본 것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골 3:11) 우리는 그리스도를 모든 면에서 우리의 만유가 되시는 분으로 만들어 드리고 있습니까? 이 질문이 나의 구원에 관한 문제입니까? 성경은 구원에 대하여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행 16:31)고 말합니다. 이 질문이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관한 문제입니까? 성경은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갈 3:26)라고 말합니다. 이 질문은 나의 경험에 관한 문제입니까? 성경은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빌 1:21)라고 말합니다.이 질문은 나의 섬김과 봉사에 관한 문제입니까? 성경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라고 말합니다. 이 질문이 나의 인생행로에 관한 문제입니까? 성경은 "내가 곧 길이요"(요 14:6)라고 말합니다. 이 질문이 천국 또는 나의 인생행로의 종착지에 관한 문제입니까? 그리스도께서 직접 그 곳을 "나 있는 곳"(요 14:3)이라고 정의해주셨습니다. "오직 예수"(마 17:8)만 바라보는 것이라는 말은 "오! 오직 그리스도가 만유가 되게 함으로서 오는 그 풍성한 복을 더 많이 알기를 원합니다."와 같은 말입니다. 우리의 부르짖음이 - "오, 내가 그리스도를 알고."(빌 3:10)와 같은 부르짖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이기심 때문에 복을 달라고 부르짖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참으로 필요로 해야 하는 복은 복을 주실 수 있는 분, 바로 그리스도 자신이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의 마음에서 나오는 기쁨 그 자체이신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에게서 취하시는 그 기쁨을 우리도 하나님과 함께 맛보기를 원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교리나 우리의 탁월한 영적 체험보다도 무한히 높고 고상하신 분이십니다. 우리의 탁월한 영적 경험이란 우리가 마땅히 소유할 수는 있는 것이지만 오직 그리스도와 함께한 경험만이 우리의 심령으로 하여금 참된 기쁨에 사로잡혀 그리스도께로 이끌어 가도록 하는 것입니다.

 

   왜 우리는 "영광에서 영광으로"(고후 3:18) 더 많이 변화되어 있지 않습니까? 이제는 성소의 휘장이 찢어졌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보혈이 뿌려졌습니다. 또한 이제는 우리에게 성령이 주어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변화되지 않는 이유는 우리 자신이 예수님 한 분께만 사로잡혀있지 않고 오히려 우리 자신에게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며 또한 성령의 일이라고 주장하지만 사실은 자기 스스로의 일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광범위하게 퍼져 있으면서도 많은 부분에 있어 피상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경건운동이 가지고 있는 약점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이 흘러나오도록 수건을 벗은 우리 주님의 얼굴을 바라보아야 합니다(고후 3, 4장). 우리가 수건을 벗은 우리 주님의 얼굴이 있는 그 곳에 있기만 한다면 그 밖의 다른 모든 것은 빛을 잃어버리고 사라져버릴 것입니다.

 

   여기에서 꼭 말씀 드리고자 하는 것은 -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님께서는 성령 자신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사로잡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성령 자신의 사역에 사로잡혀 있다 할지라도, 우리가 그 일 자체에 사로잡혀 있다면, 성령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 밖에서 성령의 주위를 맴돌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은, 우리 안에 내주해 계시는 성령님께서 무엇을 하고 계시는 분인지를  분명하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성령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요 16:13) "성령 그가 내(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리니"(요 16:14) 성령님께서는 결코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 우리 주님의 영광만을 나타냅니다(요 16:5-15).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그리스도의 사역 역시, 실로 놀라울 정도로 복된 사역이기는 하지만, 결코 그리스도의 사역, 그 일 자체가 우리 심령을 만족시키는 믿음의 대상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사역이 나의 양심에 평안, 아니 그보다 더 달콤한 평안을 가져다주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삼위 하나님 가운데 제2의 위를 가지고 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그분 자신만이 우리의 심령을 만족시켜주실 수 있는 우리의 믿음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이분께서 우리의 심령을 얼마나 놀라울 정도로 만족시켜주시는지요! 영원히 우리 주님을 찬양하기 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의 주의를 주님께로만 항하도록 명하십니다(마 17:5).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시는지라"(마 17:5).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요 6:39).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그분만이 우리 믿음의 대상이십니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그분만이 우리의 사랑의 대상이십니다. 그분만이 우리의 소망의 대상이십니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우리의 믿음 소망 사랑의 대상으로 하지 않는, 믿음 소망 사랑은 거짓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인생행로에서 모든 것 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섬김과 봉사의 모든 것 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예배의 의 모든 것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찬송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지금 십자가 위에 계시지 않습니다. 또 무덤 속에도 계시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지금 보좌 위에 계십니다. 얼마나 놀라운 사실입니까?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영광중에 계시는 분이라니요! 그븐께서 바로 한 분 뿐인 나의 구주, 곧 우리의 구세주라니요! 또 그분께서는 나의 대제사장이십니다. 그분께서는 나의 보혜사(대언자, 변호자, 중재자, 보호자, 조력자, 위로자, 상담자)이십니다. 나를 위해 죽으시고, 살아나시고, 나를 위해 다시 오실 바로 그 유일하신 구주이십니다. 아, 바로 이분께서 교회의 신랑이 되실 바로 그분이십니다.

 

   베드로가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벧전 2:7)라고 말한 것도 사실은 그렇게 놀랄 일이 아닙니다.

 

   종교적인 세계의 사람들은 물론 경건치 않은 세상 사람들도 똑같이 주님을 그들 자신에게서 완전히 내쫓아버리는 일에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경건치 않은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불사르기 위하여 보존하여 두신 것입니다(벧후 3장, 계3장).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 두 부류 모두를 가까이하지 말고 멀리해야합니다. 만일 우리가 그들을 멀리 하고 있지 않다면, 지금이라도 서둘러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히 13:13) 나아가야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한분만으로 충분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우리의 모든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우리의 구주되시는 그리스도를 기쁘시게 하는 일입니다.

 

   그리스도, 그리스도, 그리스도 오직 그분께서만 우리와 함께해 주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에게 주시는 것보다 더 좋은 분깃이나 장소를 소유할 수 없습니다. 이 땅이 주는 여러분의 분깃은 "먹을 것과 입을 것"(딤전 6:8)이 전부이고 여러분이 거하는 장소는 "그리스도 밖" 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믿음 가운데 있을 그곳에서 여러분의 분깃은 "모든 신령한 복" 입니다. 여러분이 거할 장소는 "그리스도 안" 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여, 이제 여러분의 모든 애정과 모든 욕망과 모든 생각 그리고 모든 목적이 그리스도께로 향하고 그리스도로 집중 되도록 합시다.(F.C.B.)   EMMAUS 

Posted by 행복자
,

                       Good News       세가지 중요한 사실

 

 

   인문학자이자, 인문주의자인 마르가니타 라스키(Marganita Laski)는 영국의 공영 방송인 B.B.C.에서 특별 연설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습니다. "우리 모두는 유죄성의 죄책을 가지고 있는 죄인입니다. 우리는 외롭고도 고독한 존재이며, 우리 모두는 결국 다 죽습니다. 우리는 이 엄숙한 세 가지 사실을 지금 당장 직면해야 합니다."

 

   지금 당장 당면하고 있는 이 세 가지 중요한 사실을 우리 모두 함께 직시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첫째, 우리 모두는 유죄성의 죄책을 가지고 있는 죄인입니다.

 

   "이 세상에 완전무결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라고 우리는 말합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위대한 인물도 죄를 범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나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아"라고 말하면서 죄에 대한 생각 자체를 없애버리거나 아예 잊어버리고 인식조차 하지 않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종교적 열심을 내거나 선을 열심히 행함으로서 유죄성 있는 죄책을 외투로 덮어버리듯이 덮어버리려고 합니다. 그들은 이런 일들이 자신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좋은 관계 속에 있게 해 줄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덮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에도 그들이 하나님을 생각해서라거나 하나님을 염두에 두고 있어서가 아니라, 단지 세상을 살아가는데 자신의 것과 다른 의견과 태도도 공존공영을 위하여 서로 받아들이고 사는 게 좋다는 생각과 태도로 그와 같이 행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죄에 대하여 그리고 유죄성이 있는 우리의 죄책에 대하여 어떠한 태도를 가지고 있든지간에,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는 한 우리는 하나님의 법에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한 우리는 죄책을 가지고 있는 죄인인 것입니다.

 

   죄책에 대한 해결책은 사면 곧 용서입니다. 이것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많은 사람을 위한 몸값(속량)으로 자신의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이 세상으로 내려오셨습니다(마 20:28).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죄를 담당하셨다는 말입니다(벧전 2:24). 그리고 성경은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6)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죄가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 죄 있는 모든 인류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무죄하신 분께서 유죄성이 있는 죄책을 가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2. 둘째, 우리 모두는 고독한 존재입니다.

 

   사람이란, 죽음이 우리의 친지나 친척을 갈라놓는 이별로 인해서 고독할 수도 있고, 군중 속에서도 고독할 수 있습니다. 억굴에 환한 미소를 짓고 있는 사람 중 많은 사람이 미소로 자신의 아픈 마음을 감추고 있습니다. 그러나 구약에 나오는 인물 중 시편기자는 하나님께서 늘 함께 하심을 경험한 사람으로서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라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시23"4).

    제프리 불(Geoffrey Taylor Bull)은 중국 선교사로 1950년대에 티베트가 공산국가였던 중국에 점령당하고 독립을 상실했을 당시 티베트 국의 멸망을 목격한 증인의 입장에 있었습니다. 이 당시 스파이라는 누명을 쓰고 독방에 홀로 감금되어 극한의 고독 속에서 있었던 제프리 불(Geoffrey Taylor Bull)의 경험처럼, 21세기인 오늘 날 우리에게 있어서도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임재는 얼마나 생생한 현실 속에 실존하는 사실입니까? 그는 독방 속에서 공산국가에서 있을 수 있는 엄청난 세뇌 교육을 받았지만, 그와 함께 하고 계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이와 같은 무시무시한 세뇌교육으로부터 자신의 정신세계가 완전히 파괴되는 것을 막아낼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독방에서 3년 동안 고독과 싸워 이기고 난 후에야 홀콩에 있는 영국 정부 당국으로 인도되었습니다.

 

   이보다는 훨씬 덜 두려운 환경 속에 있지만, 우리 역시도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을 개인의 구주로 영접한 모든 거듭난 그리스도인과 함께하시며 영원한 친구가 되신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함께하시는 한 그리스도인은 결코 외롭거나 고독하지 않습니다.

 

   3. 셋째, 우리 모두는 결국 다 죽는다는 사실입니다.

 

   인생이 걸어가는 수많은 길에서 죽음으로 가는 이 길이 우리가 직면하게 될 문제들 중 가장 큰 문제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흔히 문제를 직면하기보다는 무서워하고 뒷걸음질하다 멀리 도망을 치고 맙니다. 혹자는 무덤에 관해 다음과 같은 글을 썼습니다. "나는 죽음을 기다려왔다 그러나 아직 죽음을 기대하고 있지는 않다."

 

   다음 이야기는 영국출신의 저널리스트이자 토크쇼 진행자였던 데이빗 프로스트가 담당했던 TV 쇼 프로그램에서 소개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 곳 강당에 참석하고 있던 많은 청중 가운데서 1/3은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1/5은 죽음 이후에도 우리의 생명이 계속된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죽음 이후를 생각해본 사람은 고작 10명밖에  되지 않았고, 죽음 이후의 생을 고대하고 기다리는 사람은 단 한 명에 불과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고전 15:56)라고 하는 성경의 말씀 속에 물음에 대한 답이 나와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양심은 우리 모두를 죽음에 대한 겁쟁이로 만든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우리 모두가 죽음에 대한 분명한 해답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대체로 우리 인생 앞에 놓여 있는 모든 중요한 문제에 관하여는 정면으로 부딪치지 않아야 문제가 더 쉽게 느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실 수 있고, 또 우리에게 존재하는 유죄성의 죄책을 말끔히 없애버릴 수 있으십니다. 그리하여 위에 있는 그분의 아버지의 보좌 앞에 흠이 없는 존재로 우리를 세우실 수가 있습니다. 단순히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그분을 개인의 구주로 영접하는 사람 누구에게나 예수님께서 이일을 행하여주십니다.

 

   이제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위의 세 가지 문제를 직시 해본 후,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앞에서 유죄성이 있는 우리의 죄책을 인정합니다.

 

   우리는 십자가 위에서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로부터 우리를 깨끗하게 하여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삶 가운데서 주님과 주인으로 구주와 친구로 모십니다.

 

   모든 시대에 걸쳐 가장 탁월한 지성인 가운데 한 사람인 사도 바울도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이러한 사도 바울의 경험과 고백이 우리 모두의 고백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MMAUS

Posted by 행복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