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 새로운 출생 (BORN TO WIN)

                                                                            윌리암 맥도날드(前 미국엠마오성경학교교장)

                                            제1과

                          본문 : 마태복음 18장12-14절, 누가복음 15장1-7절


                                      잃어버린 양

                               (The Lost Sheep)


   잃어버린 양에 대한 비유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너무나 잘 알려진 이야기 중에 하나입니다. 어떤 사람이 양 일백 마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중 한 마리 양이 길을 잃고 홀로 광야를 헤매이게 되었습니다. 그 때 목자는 어떻게 했을까요? 아직도 우리에 남아 있는 아흔 아홉 마리 양으로 그는 만족해야 했을까요? 아닙니다. 목자는 아흔 아홉 마리 양을 우리에 남겨두고 잃어버린 그 한 마리 양을  찾기 위해 길을 나섰습니다. 마침내 잃은 양을 다시 찾은 목자는 친히 어깨에 그 양을 메고 기쁘게 집으로 돌아와 친구들을 불러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그리고 모인 친구들 앞에 그는 말했습니다.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 거기 군중들 중에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 하나는 사람들로부터 죄인이라고 손가락질 받는 세리들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자신들은 결코 죄인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바리새인(유대인 분리주의 자)들과 서기관(율법 기록과 해석자)들 이었습니다. 잃어버린 양은 죄인 취급을 받는 세리들을 상징하는 것이었고, 아흔 아홉 마리 양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 비유 말씀을 통하여 스스로 자신을 의롭다고 여기고 회개를 거절하는 아흔 아홉 마리 양들보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과 같은 죄인 하나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을 하늘에서 더욱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깨우쳐 주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역시 우리 자신들에게도 적용시킬 수 있습니다. 우리는 광야에서 길을 잃고 방황 하는 양과 같습니다. 이 양은 매우 어리석으며 힘이 없습니다. 길을 잃어 버렸고, 희망을 잃었고, 위험에 처했으며, 스스로 되돌아가는 길을 알지 못했습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우리 모든 사람들을 비유하여 이르기를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다" (사 53:6)고 하였으며, 사도 베드로 또한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다" (벧전 2:25)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물론 우리의 목자십니다. 그는 우리의 "선한 목자 (Good Shepherd)가 되시며(요 10:11), "큰 목자" (Great Shepherd)가 되시며(히 13;20), 우리의 "목자 장" (Chief Shepherd)이 되십니다(벧전 5:4).

   이제 구체적으로 예수님과 잃은 양을 찾아나선 목자의 특성을 비교하여 살펴보겠습니다.


   비교할 수 없는 아름다운 사랑 (Love is more than a song)


   첫째로, 예수께서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아주 오래 전, 우리가 아직 그를 알기도 전에 그는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이 세상이 창조되기 전부터 그는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와 같은 사랑은 이 세상에 일찍이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피조물을 사랑하심으로 자신의 하늘나라를 떠나셨습니다. 그가 반드시 이 세상에 오셔야 할 다른 이유는 없었습니다. 하늘나라에서 그와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는 완벽했으며 그는 완전한 행복을 누리고 계셨습니다. 그 어느 것도 하늘나라로 들어 와서 그를 불쾌하게 하거나 방해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곳 하늘나라는 가장 완전한 안식과 평화가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아름답고 높은 하늘나라를 떠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이 땅위에 있는 잃은 양과 같은 우리를 보셨기 때문입니다. 그의 사랑과 잃은 양에 대한 깊은 동정심으로 인하여 그는 이 죄악의 소굴인 세상으로 내려오시도록 자신을 강권하셨습니다. 크리스마스는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드님께서 겸손히 그 자신을 낮추시고 영화로운 하늘나라로부터 이 비천한 땅위에 자신의 발걸음을 내어 딛기 위해 베들레헴 마구간에 연약한 한 갓난아기로 태어나셨다는 사실은 우리 인간의 생각이나 상상의 한계를 초월하는 신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절대적으로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사람이 되어 죄악으로 가득 찬 이 부패한 세상에 내려와 사시게 된 사실이 어떤 의미인지를 솔직히 우리는 다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부(富)하신 자가 그처럼 가난한 자가 되신 것이 그분에게 무슨 가치가 있는 일이었는지 우리로서는 도대체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제 목자의 이야기로 되돌아가 봅시다. 이 땅에 내려오신 예수께서는 잃어버린 양을 찾아 길을 떠나셨습니다. 그는 여러 번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하심이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거절했지만 그는 쉬지 않고 죄인을 찾으셨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그를 핍박했지만 그는 멈추지 않고 죄인을 찾으셨습니다. 심지어, 그의 친구들마저 그를 버릴찌라도 그는 변함없이 죄인을 찾으셨습니다. 그는 결코 실망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결코 그의 사명을 잊어버리거나 저버리지 않으셨습니다. 결단코, 그는 절대로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잃은 양을 찾아 구원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목자의 연민과 크신 사랑이 양을 위하여 그의 목숨을 버리도록 하셨습니다. 그는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요 10:11).

   사실 이는 매우 모순적인 일입니다. 본래 양이 주인을 위해 목숨을 버려야 합니다. 양이 자신의 털과 고기를 목자에게 내주어 그 주인의 생활을 윤택하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해 대신 죽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갈보리 언덕 십자가 위에 달려 죄악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대신 죽으셨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지불해야할 우리의 모든 죄 값을 대신 갚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잃은 양을 찾아 구원 하시기 위해 그가 당하신 고통은 어느 누구도 가히 다 측량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이유는, 그는 잃은 양을 지극히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와 같은 희생의 값을 대신 치루 어 주셨습니다.


   어찌하여야 내가 죄사함을 받을 수 있을까요? (How To Get a Pardon)


   이제 오늘 날, 이 목자께서는 온 세상에 이처럼 그의 복음을 전하고 계십니다.

   "죄인들아 다 내게로 오라. 누구든지 너 자신의 모든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너 자신의 주와 구주로 영접하라. 그리하면 모든 죄를 사함 받고 구원을 얻으리라."

   참으로 믿음으로 이와 같은 사실을 받아들이게 될 때, 당신은 모든 죄를 완전하게 용서함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그 보배로운 피가 당신의 추악하고 더러운 죄를 흰 눈처럼 깨끗하게 씻어 줄 것입니다. 이제 영생을 선물로 받게 될 것입니다 (롬 6;23).

   사랑하는 여러분, 그러므로 구주께서 우리를 찾으셨을 때, 우리는 지체하지 말고 주님께 부르짖어야 합니다. 문둥병자들이 예수님을 향하여 부르짖었던 것처럼 "주님 나를 구원 하소서." 라고 외쳐야 합니다.

   우리는 성경 본문에서 목자가 잃었던 양을 구원하여 그의 어깨에 메고 돌아오는 모습을 볼 수 잇습니다. 어깨(shoulders)는 성경에서 능력을 상징합니다. 양을 어깨에 메고 오는 목자의 모습은 한 폭의 그림처럼 얼마나 놀랍고 아름답습니까! 이와 같은 사실은, 우리들에게 목자는 단지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만이 아니라 우리를 지켜 보호 해주시는 분임을 일깨워줍니다. 우리 구주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요 10:27-30).

   목자는 잃은 양을 안전하게 집으로 다시 데려오기까지 결코 쉬거나 멈추지 않으십니다. 목자는 그 자신이 값주고 사신 양들을 안전하게 하늘나라에 데려가실 때까지 결코 쉬지 않으십니다. 언제나 그 마음에 가장 큰 기쁨은 그의 사랑하시는 자들이 강 건너편 저 언덕으로 안전하게 건너는 것입니다.

   오래 전, 다윗 왕은 선한 목자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아름다운 시를 바치었습니다. 만인의 사랑을 받는 시편 23편입니다.


   주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노라.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눕게 하시고,

   그가 나를 물가로 인도하시는 도다.

   그가 나의 영혼을 소생케 하시고,

   그가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나를 인도하시는 도다.

   실로,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내가 해를 두려워하지 않음은 주가 나와 함께 하심이라.

   그의 막대기와 지팡이가 나를 안위 하나이다.

   주께서 나의 원수들 목전에서 내 앞에 상을 베푸시고,

   주께서 내 머리 위에 기름 부으시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진실로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내 평생에 나를 따르리니.

   내가 주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이 시편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1) 행복한 삶의 비결 - "주는 나의 목자시다!"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는 한 목자이시다." (The Lord is a Shepherd) 혹은 어떤 이들은 "주는 유일한 목자시다." (The Lord is the Shepherd)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마음속 중심으로 이렇게 고백해야 합니다 "주는 나의 목자시다." (The Lord is my Shepherd)


   2) 행복한 죽음의 비결 - "실로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내가 해를 두려워하지 않음은 주가 나와 함께 하심이라."

   사람이 죄를 범하였을 때, 그 죄를 고백하지 않고 또한 그 죄를 용서받지 못하였다면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그러나 믿는 자는 하나님 만나기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죄가 이제 이미 하나님의 앞에서 다 사라진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예수께서 그와 함께 하셔서 죽음의 골짜기를 지날 때 안전히 인도하여 주실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3) 영원한 행복의 비결 - "진실로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내 평생에 나를 따르리니 내가 주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하나님의 자녀의 장래는 안전하고 확실합니다. 주님은 지금 분명히 하늘나라에 계십니다. 그 목자는 분명히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결코 그 약속을 바꾸실 수 없습니다.

   수년 전, 생키(Ira D. Sankey) 는 선한 목자와 그리고 그가 잃은 양을 찾아 구원하시는 여정을 묘사하는 찬송 시에 곡을 부쳐 노래하였습니다.


   양 아흔아홉 마리는 우리에 있으나 

   한 마리양은 떠나서 길 잃고 헤매네.

   험하고 거친 산길로 목자를 멀리 떠났네.

   목자를 멀리 떠났네.


   양 아흔아홉 마리면 넉넉지 않나요?

   종에게 목자 하는 말 그 양도 나의 것.

   그 길이 멀고 험해도 내양을 찾아 가리라

   내양을 찾아 가리라


   그 길고 험한 물 건너 갈자가 없건만

   내 목자 홀로 밤새워 그 양을 찾았네.

   그 양의 울음소리를 목자가 들으셨도다.

   목자가 들으셨도다.


   산길에 흘린 피 자국 그 누가 흘렸나

   길 잃은 양을 찾느라 목자가 흘렸네.

   그 손발 어찌 상 했나 가시에 찔리셨도다.

   가시에 찔리셨도다.


   높은 산 깊은 골짜기 울리는 메아리

   내잃은 양을 찾았다 다 기뻐하여라.

   저 천사 화답하는 말 목자가 양을 찾았다.

   목자가 양을 찾았다.

Posted by 행복자
,

                너희믿음에 있는가

                                        시험하고 확증하라


                                           돈으로 천국을 사려는 신자들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라"(누가복음 16:14).


   오늘날 한국의 기독교가 몽땅 바리새인이 되었다고 하면 지나칠까? 지나치다 할 것이다. 왜냐하면 진실하게 살고자하는 목자들이나 신자들도 있으니까. 그러나 왠지 그런 경우는 가뭄에 콩 나듯 드물고 모두가 바리새인이 되어 버린 것 같은 생각에 아픈 가슴을 어찌할 수가 없다.

   예수께서 오시기 700년 전에 이사야 선지자는 "너희가 돈 없이 팔렸으니 값없이 속량되리라"(이사야 52:3) 하였거늘, 분명히 말하거니와 오늘의 한국 기독교에는 돈으로 천국을 사는 일이 벌어졌다. 물론 그들도 값없이 의롭다함을 얻으며, 값없이 구원받는다고 가르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가르친들 무엇 하랴. 현실은 돈 없으면 예수를 믿을 수 없는 세상인데...

   좀 심하게 말하자면 예수님을 머리요, 주인의 자리에 앉혀야 할 교회가 예수님을 몰아내고 돈을 그 자리에 앉혀 놓고 있는 현실이다. 돈에 의해서 교회의 직책이 정해지고 직분과 질서가 정해진다면 기가 막히지 않는가?

   세상의 타락을 배금주의라 하여 돈에게 절하는 풍토를 말하지 않는가? 작금의 기독교 상황은 돈이 교회 주인이요, 돈이 하나님이요, 돈이 천국 가는 차표가 된다.

   어떤 구도자는 교회에 나갔다가 놀라서 그만 두었다고 고백하였다. 왜냐고 물으니 그 대답이 슬프다. 모름지기 하나님 말씀을 듣고 예수 믿어보고자 참석하였는데, 상당 시간 헌금에 관한 광고를 하더니 또 한 사람 한 사람 헌금자의 이름을 발표하는데 나중에는 시간에 쫓겨서 정작 말씀은 짧게 끝나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 기막힌 모습을 보고 그는 말했다. 자기는 불우이웃을 도울 때도 이름을 숨기고 도왔다는 것이다. 이 구도자는 교회를 이상한 단체로 보고 있었다.

   세상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모든 부정한 죄악에는 돈이 개입되어 있다. 돈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인격이 썩고, 양심이 썩고, 행동이 썩어간다. 돈으로 사람을 팔고 사고, 돈 앞에서 자존심도 던져버리고, 심지어 아내나 자식들까지도 팔아넘기는 무서운 세상이다. 인간 세상의 모든 계급이 돈에 의해서 결정되고, 인간 사회의 모든 체계가 돈으로 결정되지 아니한가. 공산주의는 돈을 공동관리 하자는 것이요, 자본주의는 개인관리 하자는 것 아닌가.

   국제질서도 돈에 의해서 결정되지 아니한가. 미국의 힘은 돈에 있다. 큰 경제력으로 세계를 지배하지 않는가. 일본은 인도보다 작은 나라지만 돈이 있으니 큰 소리 치고 있지 아니한가. 돈으로 모든 질서가 결정되는 세상, 돈에 의해서 우방이 원수가 되기도 하고, 원수가 우방으로 바뀌기도 한다. 세상의 구조는 돈으로 말미암아 엮어져 있다.

   돈은 사람을 추하게도 만들고 귀하게도 만들며, 강하게도 하고 약하게도 한다.

   돈이 교회를 정복했다. 돈이 교회를 농락했다. 돈에 의해서 교회가 무너졌다. 부하든지 가난하든지 상관없이 중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진실이 주님의 뜻을 순종하는 신실한 신자가 평가받는 교회가 되어야 할 터인데, 헌금 실적이 어떠하냐에 따라서 평가되고 있는 현실이 아닌가. 이것은 교회의 구조적인 문제도 있고, 지도자들의 인격적인 문제도 있다.

   필자는 수십 년간 목회를 해오면서 한번도 기명헌금을 강요한 적이 없다. 언제나 한결같이 무기명으로 헌금하게 하였다. 예배당 건축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큰 돈이 필요해도, 순수한 무기명 헌금으로 빚 없이 예배당을 완공하여 하나님께 드렸다.

   성경에는 물질과 연관되어서 하나님의 책망을 받거나 심판을 받는 경우가 많다.

   여호수아 7장 1절 이하에 보면 아간이라는 사람이 몰래 하나님의 물건을 도적질하다가 심판 받는 장면이 있다. 그는 물질에 대한 욕심 때문에 하나님의 것을 두려움이 없이 훔쳤다가 무서운 심판의 형벌을 받았다.

   열왕기하 5장을 보면 게하시라는 사람이 물질 욕심이 나서 자기의 주 엘리사를 속이다가 문둥병의 저주를 받게 된 일이 기록되어 있다.

   물질은 참으로 사람을 비참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신약에서도 가룟 유다가 은 삼십 냥에 예수님을 팔아넘긴 사실은 너무도 잘 알려진 사건이 아닌가? 오늘날 기독교 안에도 또 다른 가룟 유다들로 채워져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돈으로 진리를 팔고 사며, 양심을 팔고 사며, 인생을 팔고 사는데 결국은 영혼을 팔아먹는 타락한 오늘의 한국의 기독교여! 정신을 차려야 한다. 회개하여야 한다.

   가룟 유다의 경우는 얼마나 슬픈 모습인가. 돈에 눈이 어두워 예수님의 그 주옥같은 설교를 직접 듣되 3년 동안을 듣고도 결국은 지옥에 갔으니, 돈이 얼마나 무서운 사단의 무기인지, 끔찍하고도 끔찍하다. 이 돈이 한국의 기독교를 잡아먹고 있는 것이다. 가룟 유다는 돈에 의해서 귀가 막히고 눈이 가려지고 모두가 막혀 지옥에 들어갈 때까지 깨닫지 못하다가 지금 지옥에서 깨닫고 울어본들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기독교인들이여! 부정하게 번 돈을 하나님 앞에 몇 푼 바치면 하나님이 갸륵하게 여기어 죄를 용서해 줄 것 같은가? 세상의 더러운 돈 몇 푼으로 천국을 사려는 간사하고 악한 무리들이 예배당 안을 채우고 있으니 슬픈 현실이 아닌가.

   가룟 유다는 예수께서 그 많은 기적을 행하실 때 현장에서 보지 않았던가? 물위를 걷는 기적, 죽은 자를 살리는 기적, 소경의 눈을 뜨게 하는 기적 등 수많은 기적들을 그의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인간의 지혜로, 힘으로 불가능한 역사, 상식을 초월한 놀라운 기적을 현장에서 보고도 주님을 믿지 못했다. 돈에 눈이 멀면 이렇게 되는 것이다. 오늘의 기독교가 돈으로 말미암아 마비상태가 되었는데, 얼마나 비참하고 불쌍한 모습인가!

   집사, 권사, 장로 취임하는데 일정한 돈을 내어야만 하고, 모든 행사나 절기에 특별헌금을 해야 하며, 모든 명목으로 만든 헌금들을 해야 한다. 그것도 모자라서 약정헌금을 내야하며, 월정헌금, 주정헌금을 내야하며, 그 외에도 공사석에서 필요에 따라 돈을 써야만 한다. 현실이 이러하니 자연적으로 돈 없는 사람은 교회에서 행세할 수가 없고 멀어지다가 떨어져 나가게 되는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어떤 이가 있다. 그는 오래 전에 헌금을 약정했는데, 사업이 망하여 낼 수가 없게 되었다. 집도 처분하고, 변두리에 초라한 집을 빌려 사는데 거기까지 약정헌금을 받으러 찾아오는 것도 보았다. 세금 징수하듯이... .

   이와 같은 슬픈 현실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교회가 돈을 많이 거두어 엄청난 규모의 예배당을 짓고 기업적으로 움직여 몇몇 사람의 배나 채우고 가난한 자들에게는 약간의 생색내기 봉사를 한다면 이게 될 말인가?

   하나님께 쓰임 받은 종들을 잘 살펴보면 물질에 대해서 청렴하였음을 알 수 있다. 아브라함이 그러했다. 그는 소돔성의 인민과 재산을 연합군의 포로된 가운데에서 되찾아왔을 때 사람 외에 모든 재산을 가지라는 제의를 거절하고, 실오라기 하나도 취하지 않았다. 그는 치부하지 않았으며, 하나님의 하신 역사를 돈과 바꾸려 하지 않았다. 그는 분명 영적인 사람이었다. 하나님의 선물을 돈으로 계산할 수 없는 것이며, 하나님의 역사에 돈이 개입되면, 하나님의 하신 일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어리석음의 행동임을 알았던 것이다. 어찌 성령의 역사를 돈으로 계산하랴(창세기 14장 참조).

   엘리사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는 나아만 장군의 문둥병을 고쳐주었다. 나아만이 사례의 뜻으로 엄청난 양의 물질을 주었지만 거절했다. 그는 진실로 하나님의 사람이요, 영적인 사람이었다(열왕기하 5장 참조).

   신약성경에도 하나님의 선물을 돈으로 사려던 어리석은 사람이 있었다(사도행전 8:14~24). 베드로와 요한이 안수함으로 성령 세례받은 것을 보고 시몬이라는 사람이 돈을 들여 자기도 안수하는 사람이 세례를 받도록 해달라고 요청하다가 사도들에게 무섭게 책망받은 장면이 있다. "베드로가 가로되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줄로 생각하였으니,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사도행전 8:20).

   사랑하는 독자여! 돈으로 직분을 사고, 돈으로 교회 안에서 일정한 위치를 확보하고, 돈으로... , "돈! 돈! 돈!" 돈으로 하나님의 선물들을 농락하다가 돈과 함께 망하여 지옥에 가면 어찌 하시려는가?

   회개하라. 오늘의 기독교 상황은 회개하지 아니하면 돈과 함께 망하게 되어 있다. 진정으로 회개하여 은혜로 주신 선물을 받으라.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에베소서 2:8)고 하셨다. 구원은 조건 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죄로 말미암아 지옥에 던져질 불쌍한 죄인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은 아무 조건 없이, 온 인류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하셨다.

   이렇게 말하니 어떤 집사님은 "믿는 자들에 한하여 용서하지 않았는가" 하는데, 성경은 모든 죄인들의 죄를 일방적으로 이미 용서하셨다고 선언하셨다. 하나님을 모르는 죄인들까지도... .

   "다 이루었다"(요한복음 19:30 참조).

   모든 죄, 과거, 현재, 미래의 죄가 이미 다 용서되었다. 이 사실을 믿음으로 천국 가고, 믿지 아니함으로 지옥에 던져지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로마서 3장 23,24절에서도 반복하여 말하고 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값없이"라고 하지 아니하였는가. 예수님 당시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해졌다고 하였는데, 오늘의 현실은 부한 자들, 넉넉한 자들에게만 복음이 전해지는가? 도대체 무슨 일인가?

   누가복음 17장 11절 이하에 보면 열 명의 문둥병자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들이 예수님 앞에 나왔을 때 다 병이 나았다. "제사장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는 말씀을 순종하러 가다가 나았는데, 그 중 한 명만 돌아와서 예수님께 사례하였다. 그 때 예수님께서 이 사람에게 말씀하시기를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하셨다. 아무것도 드릴 것 없는 이 불쌍한 문둥병자, 그가 주님 앞에 단순히 회개하고, 사례함으로 구원받았다. 그의 행위는 전혀 참작되지 아니하고, 선물로만 구원받았다. 물질은 더욱 아무것도 없는 불쌍한 이 사람 문둥병자가 선물로 구원을 얻은 것이다.

   이 글을 읽는 그대가 만약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죄를 통하여 모든 죄를 다 용서받음으로 이제는 죄인이 아니라 의인이 되었으며,마귀의 자녀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실을 깨달았다면 구원받은 것이다. 멸망의 지옥에 가지 않고 천국에 가게된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구원이다. 천국을 가는 데는 아무 조건도 물질도 행위도 상관없다.

   이렇게 값없이 구원받은 성도가, 지옥에서 건짐 받은 너무도 놀라운 사실을 깨닫고 지옥에 갈 뻔했던 끔찍한 사실을 생각하며, 고마운 마음으로 성의를 표시하는 헌물, 헌금, 봉사 이것이 진정한 헌금이요, 신앙이다. 제도에 의해서 내는 헌금이 아니고, 주변의 분위기와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고, 하나님이 두려워서가 아니고, 구원에 의해서 드리는 헌금이다. 나를 영원한 멸망의 지옥에서 건져내기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은혜를 평생 갚아도 다 갚지 못하여 눈물로, 행위로, 물질로 섬기는 섬김, 이것이 진정한 헌신이요, 헌금인 것이다.

   헌금을 내지 않으면 하나님께 저주받거나, 사업 망할까 무서워서 드리는 헌금, 복 받기 위해서 조건적으로 드리는 헌금, 이것들은 다 가증한 것이다. 우주와 바다와 만유를 지으신 하나님이 무엇이 부족하여 헌금을 강요하겠는가.

   "깨어라, 정신을 차려라." 사람에게 속지 말라. 우둔한 자들이여! 평생 예수 믿고 목숨 바쳐 죽도록 충성하고 지옥에 가면 얼마나 원통하겠는가. 깊이 생각하시기 바란다.

   성경은 좁은 문을 이야기하고 있다. 오늘날 대다수가 쫓아가는 이 넓은 문을 따라가다가 지옥에 떨어지는 날 그대들의 눈물과 통곡과 비참한 처지에서의 후회는 영원할 것이다.

Posted by 행복자
,

로마서


                                        8과 구원의 확신

                                               (8장 1절~39절)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거룩한 생활을 할 수 있는가?


   죄의 정욕을 억제하는 것이 우리 자신의 힘으로 될 수 없음을 우리는 이미 배웠습니다. 8장은 모든 신자 안에 내재하시는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삶 전체를 그에게 의탁하고 그에 의해 주관을 받을 때, 우리는 그리스도로 충만하게 되어 그의 형상으로 변화 받아서 죄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됩니다.

   ... 이제 성령님의 내재하심으로 받게 되는 축복된 결과들을 살펴 봅시다 ...


   1. 새로운 자유가 있습니다(1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율법을 준수하는 것은 속박을 의미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의 생활은 완전한 자유를 뜻합니다.

   (- 초기의 여러 성경 사본에는 4절 상 반절 말씀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이란 말씀이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2. 새로운 생명의 법이 있습니다(2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을 대신하였습니다. 이것은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습니다. 즉 돌을 공중으로 던져 올리면, 그것은 곧 땅으로 떨어집니다. 이것은 인력이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살아 있는 새 한 마리를 공중으로 띄우면, 그것은 하늘을 날아다닐 것입니다. 생명의 법이란 이런 것입니다. 이와 같이 모든 그리스도인에게는 자신을 항상 죄로 유인하고자 하는 인력의 법과 같은 법이 내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임재하시고 계시는 성령님은 능히 우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켜 주실 수 있습니다.


   3. 새로운 힘이 있습니다(3,4절). 사람의 성품이 타락하였기 때문에, 율법으로는 의를 이룰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사람의 성품에 나타나는 육신의 죄를 이기시고, 그 죄의 세력을 끊어 놓았습니다. 이제 그리스도인은 성령의 능력으로 율법의 의를 능히 이룰 수 있습니다.


   4. 새로운 의욕이 있습니다(5절). 성령님은 성도의 마음을 돌이켜 육신을 즐겁게 하지 않고, 대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 마음을 두게 됩니다.


   5. 새로운 열매가 있습니다(6절). 생명과 평안이 믿는자의 분깃이 됩니다. 이것은 참된 생명이고, 살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속에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생명입니다.


   6.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태도가 있습니다(7절). 사랑 안에서 순복함이 적의와 반역을 대신합니다.


   7. 새로운 삶의 영역이 있습니다(8,9절). 육신의 생활에서 벗어나 성령님의 보호 안에서 생활합니다. 육신에 따라 사는 사람은 자신의 욕망과 안일을 도모함으로 마치 자신의 몸과 재산만이 중요한 것처럼 행동합니다. 그러나 성령님의 보호 안에서 생활하는 사람은 성령님이 아무런 장애 없이 자유로이 역사하실 수 있도록 그의 생활을 하나님께 의탁합니다.


   8. 새로운 보증이 있습니다(11절). 성령님이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임재하고 있음은, 성도의 몸이 그리스도처럼 죽은 자들 가운데 부활하리라는 확증입니다.


   9. 새로운 충성이 있습니다(12절). 우리는 육신에 대해서 빚진 것이 없기 때문에 육신에 대해 충성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성령님께 충성할 따름입니다.


   10. 새로운 살길이 있습니다(13절). 죄의 본성에 따라 산다면  우리는 죽을 것이기 때문에,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 몸의 악한 일을 죽여야 합니다.  이 말은 주님께 욕이 되는 모든 생각이나 행위를 부정해야 함을 뜻합니다.


   11. 새로운 인도함이 있습니다(14절)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영의 인도함을 받는 특권이 있습니다. 목표 없이 방황하지 않고 전진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12. 하나님과 새로운 교제를 나누게 됩니다(15절). 그것은 종으로서의 위치가 아니라, 자녀로서 누리는 자유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 분을 "나의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13. 새로운 관계가 있습니다(16,17절). 성령님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자녀이며, 하나님의 후사이며,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임을 가르쳐 줍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적 가족이기 때문에 우리는 자연히 그리스도와 함께 아버지의 모든 풍요를 누리게 됩니다.


   14. 새로운 특권이 있습니다(17,18,20~23절). 그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 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처음에는 별로 특권처럼 보이지 않으나, 주 예수께서 우리가 당하는 모든 고난에 동참하신다는 사실을 알게 되며, 오히려 이것이 축복임을 깨닫게 됩니다.


   15. 새로운 소망이 있습니다(23,24절). 그것은 몸의 구속을 바라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역사하는 하나님의 일은 그가 우리의 몸을 죄의 권세와 존재로부터 해방시키실 때까지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16. 새로운 전망이 있습니다(17~19절).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영화롭게 될 것입니다. 생물계를 비롯한 모든 피조물들은 우리가 영광 중에 하나님의 자녀로 나타날 때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세상에서 고난과 탄식으로 보내지만, 희망의 그날은 올 것입니다. 우리는 그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17. 새로운 도움이 있습니다(26,27절). 내주하시는 성령님은 우리가 간구할 때 도와주십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은 우리로 하여금 그 뜻을 기도하도록 도와주십니다.


   18. 새로운 담대함이 있습니다(28~30절). 아무도 대적하여 이길 수 없습니다. 우리는 승리하는 하나님 편에 속해 있기에 항상 넉넉히 이깁니다.


   8장 33~39절의 말씀은 동서고금을 통해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즐겨 암송해 온 유명한 말씀입니다. 여러분들도 이 말씀을 묵상하신다면, 여러분의 신앙생활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Posted by 행복자
,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사 1:18)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 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사 1:18).

 

   이 말씀을 듣고, 당신은 즉시 "그러나'라는 말로 시작해서 다음과 같이 대답할 것입니다. "저는 그 정도로 심각한 죄를 지어 본 적은 없습니다. 저와는 무관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대답하는 당신에게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라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은 또한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라는 말씀을 더해 주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말씀으로 널리 알려진 요한복음 3장 16절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어서 요한복음 3장 17절에서는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요 3:17)라고 말씀하십니다. 계속해서 요한복음 3장 18절에서는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 11절과 12절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요1:11),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베드로후서 3장 9절에서는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성경은 또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요 6:37).

 

   그러나 성경은 이러한 사실들과 상반된 면에 대해서도 말씀하십니다. 성경은 사람들에게 믿고 구원 받으라는 말씀만 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초청에 응하지 않고 믿지 않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는 말씀도 함께 하십니다.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계 21:8).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는 더 이상 믿어야 할지 또는 믿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지 마십시오. 바로 지금, 주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나아와, 당신을 용서해 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신 예수님께 여러분의 모든 죄를 고백하도록 하십시오.

 

   이 결정은 바로 당신 자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바로 지금 예수님께 나아오십시오!!! 결코 지체하지 마십시오!

   만일 당신이 예수님을 당신의 주와 구주로 영접하기로 결정하셨다면, 저희에게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시면 당신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 자라가는 것을 도울 수 있는 문서를 무료로 보내 드리겠습니다. 무료 문서를 요청하는 메일(emmausbible@hotmail.com)이나 우편을 저희 한국 엠마오성경학교에 보내 주시기 바랍니다.   EMMAUS

Posted by 행복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