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정국 칼럼] 불교인들이 느끼는 두려움, 수치심 그리고 죄의식
한정국(KWMA 사무총장) l 등록일:2015-12-20 14:16:21 l 수정일:2015-12-21 17:53:02

 

▲한정국 목사ⓒ뉴스미션
필자는 샤머니즘 불교 가정에서 태어나 대학 1학년 때 예수님을 영접하고 거듭났다. 따라서 불교 배경의 불신자를 만나면 자연스럽게 내가 경험한 간증을 생생하게 나누면서 복음을 제시하곤 한다. 많은 공감대를 갖고 이야기를 나누니 여간 전도 효과가 좋은 게 아니다.

선교지에서 만난 불교인들도 전혀 낯설지 않다. 특히 동남아시아를 여행할 때면 탁발 수도 장면을 본다든지 사찰을 방문해 그들의 종교행사를 눈여겨보곤 했다. 현지 선교사의 동역으로 사찰의 스님을 인터뷰할 기회도 있었다.

따라서 필자는 앞으로 몇 차례에 걸쳐 불교권 선교를 다루고자 한다. 학문적 접근보다는 생생한 현장 속에서 발견한 영감과 삶 속에서 전개되는 불교도의 내면을 조망해보기로 한다. 특히 불교도들이 느끼는 근본적 두려움에서 출발해 그들이 갖는 죄의식과 수치심의 부분을 다루면서 그들의 내면세계를 들여다보기로 하겠다.

따라서 이 글은 한국 불교도를 이웃으로 두고 사는 우리들이 참고할 만한 좋은 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수치와 죄의식 문화

두려움. 수치심. 죄의식. 이 세 단어를 놓고 볼 때 두려움이라는 단어보다 수치와 죄의식이라는 단어가 먼저 필자에게 다가오는 이유는 30년 전의 데니스 레인이 한 말이 기억나서다. 당시 필자는 OMF 국제본부가 있는 싱가포르에서 신입 선교사 오리엔테이션을 받을 때 선배 선교사인 데니스 레인의 ‘동서양인의 의식구조’ 강의를 인상 깊게 들었다.

그는 말레이시아에 있는 중국인 선교의 경험을 포함해 30년간 동아시아에서 사역하면서 느낀 점을 이야기했는데, 그때 나누었던 이야기 중 하나가 동양은 수치(shame) 문화이며, 서양은 죄의식(guilt) 문화라는 것이다. 이 문화가 기독교적인 견해를 만날 때 어떻게 기독교를 수용하는가는 상당히 재미있는 발견이었다. 그 후 인도네시아를 비롯해 한국본부 등에서 31년간 일하면서 필자는 데니스 레인의 의견에 상당히 동조하게 되었다.

그는 훗날 이를 정리하여  라는 책을 집필했는데, 그 책에서 죄를 짓거나 윤리적 규범을 어겼을 때 서양인과 동양인 개인이 보이는 반응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서양적 접근: 유죄 또는 죄의식(guilt)

웹스터의 영어 새단어 사전은 guilt를 ‘도덕법을 어긴 것, 또는 그렇다는 유죄의식’이라고 설명한다. 서양 사람들은 비록 하나님을 상관없는 존재로 밀어내기는 했지만 아직도 도덕적인 개념은 가지고 있다. 자기가 잘못을 하면 누구든 그 대상이 있어서, 그에게 상처를 주었다는 느낌을 가지고 있다. 도덕법을 어긴 것은 그 법을 세운 존재(누군지는 몰라도)에게 잘못한 것이다. 그는 이 죄책감에서 벗어나고 자기가 한 일을 보상하기 위해 여러 가지 일을 할 수 있다. 자기의 잘못에 대해 속죄하고 다시 안녕과 평화의 감정을 누리고 싶은 것이다.

△동양적 접근: 수치(shame)

웹스터는 수치를 ‘선하다고 용납될 수 있는 기준에 따라 행동하고 처신하고 생각하지 못하여 갖는 고통스러운 감정’이라고 정의한다. 콜린스는 동양적인 경험에 더 가까운 정의를 내렸는데 수치가 ‘자신이 예의범절, 정숙, 또는 품위를 지키지 못해 웃음거리가 되었다는 의식에서 비롯된 굴욕적인 느낌’이라고 하였다. 특히 이 정의의 전반부가 동양적 생각에 적용된다.

“수치는 참을 수 없는 고통으로 그것을 느끼는 사람을 극단으로 몰아가게 할 수 있다. 때로는 동양에서 돈을 빌렸던 가난한 사람이 그 꾸어준 사람에게 돈을 더 빌려야 했을 때 절망스러운 나머지 그 사람을 총으로 쏘아 죽이는 경우도 있다. 그 사람이 죽으면 채무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채주를 죽임으로써 채무자는 수치감에서 해방 받는다.” (<지구촌에서 살기(One World, Two Minds)>, 데니스 레인, 로뎀북스, 2007, p.110-111.)

나는 데니스 레인의 참여적 관찰에 박수를 보내며, 특히 그가 서양인으로 동양을 바라보았다면, 나는 동양인으로서 서양인의 관점을 많이 차용하여 혼합적 시각으로 살아왔다고 볼 수 있다. 나는 한국이라는 불교 문화권에서 자라왔고, 지금도 나에게는 수치 문화가 뿌리 깊은 나무임을 고백한다. 그러나 나는 서구 교육, 그리고 OMF라는 서구 선교단체에서 13년 동안 동역했고, 지금도 서구ㆍ비서구권을 아우르는 글로벌 사고로 선교를 하고 있기에, 동ㆍ서양적 사고를 통해 수치와 죄의식을 바라보고 있다.

데니스 레인도 이 부분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오늘날 모든 문화는 유동적인 형태로 존재한다. 날마다 변화가 일어난다. 서양 문화는 아시아의 종교적 이단과 사상에 물들어 있고 아시아 사회는 과학적 사고를 하지 않고는 경제적으로 발전할 수가 없다. 과학적 사고는 논리적인 것으로 그 기초를 서양에 둔 것이다. 그러므로 둘 사이의 차이점은 그렇게 확연한 것이 아니다. 영어를 쓰며 영어로 교육받은 싱가포르 사람은 동양과 서양의 혼합체이다. 뉴에이지에 빠진 서양 사람은 주로 불교적인 용어로 사고한다.”

“동시에 변화는 피상적이다. 싱가포르 과학자를 헤집어 살펴보면 내면 깊이 유교적 전통에 물들어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한국의 기업가는 경제 문제나 사업의 경영에 대해서 완벽하게 꿰뚫고 있지만 그 속에 들어가 보면 아직도 아시아식으로 행동하고 반응한다. 불교를 믿는 서양 사람도 마찬가지로 대부분 자기의 조상들처럼 행동하고 있다. 우리는 태어나서 자란 문화의 영향을 깊이 받고 있다.” (같은 책 p.9-10.)
 
두려움

불교인들의 마음 속 기저에 있는 감정은 바로 이 두려움이다. 왜냐하면 불교의 세계관은 이 세상에 대한 고해적 사고와 번뇌에서 탈출하고자 하는 시도 속에서 현세와 미래의 사후세계에 대한 두려움으로 점철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의 유혹 즉, 색(色)에 대한 두려움이자, 공덕을 쌓는 데 방해되는 모든 것이 두려움의 대상이다. 그리고 지옥이라는 사후세계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심지어 불교 사찰에 들어갈 때에도 사찰을 지키는 사천대왕의 모습이 사뭇 위협적인 모습이라는 것을 보면, 그들의 피난처라 할 수 있는 사찰까지도 넘보는 존재에 대한 두려움은 가히 위력적이다.

이 두려움을 잊기 위해 불교인들은 절대적인 존재, 특히 자신과 같은 연약하지만 해탈한 부처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을 매일의 생활의 연속선상에서 반복적으로 추구해야 한다고 소승불교에서는 이해하고 있다. 소승불교 지역인 인도차이나와 스리랑카에서 나타나는 큰 특징으로, 그들은 해탈한 부처가 21세기에도 그들을 도울 수 있다고 믿는다.

대승불교에서도 자신만이 아닌 중생 전체의 위협적인 두려움에서의 해방을 말하기에, 그 기저에 두려움이 있음을 말한다. 소승불교의 세계관은 힌두교의 세계관과 비슷하며, 그리하여 매일 사찰을 찾아 일상적인 두려움에서 보호를 받고자 부처에게 의지하고자 한다. 그리고 탁발승에게 보시하는 것에서 나아가 의식적인 공덕을 쌓음으로써 두려움에서 해방되고자 하는 그들의 열망이 삶 속에 반영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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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행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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