뜬금없이 “고맙다”... 그땐 몰랐던 자살의 징후
입력 F 2016.01.26 15:33 수정 2016.01.26 15:34
40대 가장인 A씨는 친화력 있고 다정다감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빠지지 않던 동창회도 발길을 끊고, 즐겨하던 SNS 활동도 접었다. 입던 옷이 헐렁해질 만큼 살도 크게 빠졌다. 아내의 권유로 받은 건강검진에서는 만성피로증후군만 의심됐다. 최근 회사에서 '명예퇴직' 권고를 받고 제대로 잠 못 이루던 A씨는 ‘죽고 싶다’거나 ‘나 없으면 뭐 먹고 살래’라며 뜬금없는 말을 아내에게 건네기 시작했다. 아내와 아이들 앞에서 갑자기 눈물을 보이며 ‘고맙다’고도 했다.
사실상의 강제 퇴직에 울분을 삼키며 우울증 증세를 보이던 A씨는 극단적인 선택을 해 세상을 등졌다. 그가 보인 이상 징후는 숨지기 6개월 전부터 나타났다. A씨와 같은 자살자의 심리에는 공통점이 있다. 생전에 죽음을 직접적으로 언급하거나, 주변을 정리하는 등 언어와 행동, 정서에서 변화를 보인다. 하지만 유가족 대부분은 사전에 이를 못 알아챈다. 이러다 우울증 등 정신건강 문제가 음주, 경제적 문제 등 다양한 위험요인과 복합적으로 얽힐 때 돌이킬 수 없는 선택에 이른다.
보건복지부가 지난해 자살자들의 심리부검 결과를 발표하고, 분석 결과를 바탕으로 자살예방을 포함한 종합적인 정신건강증진대책을 추진하겠다고 26일 밝혔다. 심리부검은 중앙심리부검센터가 광역정신건강증진센터, 경찰청, 기타 유관기관과 상호 협력해 자살사례를 분석한 것이다. 중앙심리부검센터가 자살자 121명(20~60대 이상)의 유가족 151명을 구조화된 심리부검 조사도구로 면담하고, 이를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와 정신보건 전문가들이 분석했다.
분석 결과를 보면 자살자의 93.4%가 자살 전 경고신호를 보냈으나, 유가족의 81%는 사전에 알아채지 못해 적절한 도움을 주지 못했다. 또 자살자의 88.4%가 정신건강에 문제를 가졌고, 이 중 우울증이 74.8%로 가장 많았다. 그런데도 정신질환이 있는 자살자 중 꾸준히 치료를 받은 비율은 15%에 불과했다. 자살자 중 사망 한 달 이내에 정신의료기관이나 정신건강증진센터를 이용한 경우는 25.1%에 그쳤다. 이보다 신체적 불편이나 수면 곤란 등을 치료하기 위해 의원이나 한의원을 찾은 경우가 28.1%로 더 많았다.
자살 예방을 위해서는 알코올 문제에 대한 적극적인 개입이 필요해 보였다. 사망 당시 자살자의 39.7%는 술을 마신 상태였다. 술을 너무 많이 마셔 대인관계에서 갈등을 겪거나, 직업적 곤란, 법적 문제가 있었던 사람은 전체의 25.6%였다. 특히 사망자 본인 이외에 가족이 알코올 문제를 가지고 있는 경우가 53.7%로 매우 높았다. 자살자가 생존했을 당시 가족 중 자살을 시도하거나 자살한 사망자가 있는 비율도 28.1%로 나타나 유가족에 대한 심리적 지원 방안도 마련돼야 할 것으로 분석됐다.
이번 심리부검을 위한 면담에 유가족들은 대체로 만족했다. 유가족의 88%가 ‘심리부검 면담 뒤 삶에 긍정적인 변화가 있었다’고 답했다. 사망원인 분석 뿐 아니라 심리부검을 통한 유가족 면담이 고인의 죽음을 객관적이고 통합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며, 막연한 죄책감과 자기 비난에서 벗어나 유가족들이 건강한 애도를 시작할 수 있도록 돕는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평가다.
실제 핀란드에서는 대대적인 심리부검 결과를 근거로 국가 차원의 자살예방대책을 수립해 자살률을 낮추는 뚜렷한 성과를 냈다. 지난 1987년 4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1년간 핀란드 국립보건연구원의 주도 아래 4백개 지방자치단체, 30개 거점병원, 5개 대학병원이 심리부검사업에 참여했고, 심리학자, 정신보건 간호사, 사회복지사, 의사 등 245명의 전문가가 투입돼 자살자 1397명에 대한 유가족 면담과 경찰 수사기록, 유서, 정신과 등 의료정보를 분석했다.
그 결과, 자살자의 93%에서 정신질환이 있었고, 59%가 우울증, 43%가 알코올 사용 장애를 보였다. 핀란드는 이 결과를 근거로 1991년에 국가 차원의 자살예방 대책을 수립해 추진했다. 우울증 등 정신질환 조기발견과 치료, 정신건강 서비스 접근성 강화, 자살언론보도 기준 강화, 자살수단 차단 등을 통해 1990년 인구 10만명당 30.2명이던 자살률은 2012년 15.8명으로 절반 가까이 감소했다.
보건복지부 차전경 정신건강정책과장은 “심리부검을 확대 실시해 자살원인을 지속적으로 분석하고, 유가족에 대한 심리지원을 강화하겠다”며 “전 국민 정신건강증진, 우울증 등 정신질환 조기발견과 치료 활성화, 자살예방 등의 내용이 포함된 중장기적인 범부처 차원의 정신건강증진종합대책을 다음 달 중 수립하겠다”고 밝혔다.
배민철 기자 (mcbae2000@kormed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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