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재정

교회가 성도들의 연보를 통해서 운영된 사실은 신약 성경 전체에서 볼

수 있습니다. 아울러 교회의 재정을충당하기 위하여 구원받지 않은 외부

사람에게서 기부를 받았다는 것은 암시조차 찾아 볼 수 없습니다. 그리스

도인의 연보는 일종의 예배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속함을

받은 사람만이 참여할 수 있습니다. 다른 교회나 교단이나 총회 등에서

어느 지역 교회에 재원을 제공해 주거나 보조금이나 원조금을 지급했다

는 어떠한 암시도 없습니다. 모든 지역 교회는 자급자족으로 운영되어야

합니다.

이 중요한 교회 재정의 주제에 관한 신약의 주요 가르침들은 다음과 같

이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1. 누구의 소유인가?

성도의 소유물은 모두 하나님께 속합니다. 성도는 청지기로서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최선의 방법으로 그 모든 것을 사용해야 합니다(눅16:1-12

참조). 마이어(F.B.Meyer)는 이 진리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우리

는 청지기로 부름받았다. 즉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삶의 수준에서, 주님의

돈을 우리 자신을 위해서 축적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자신과 사랑하는

이들의 생계에 필요한 것이외의 모든 것을 하나님을 위해 관리해야 한

다. 우리의 세상에서의 목표는 "우리 주님의 재물로 최대의 이익이 남도

록 투자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주님이 우리를 부르러 오

실 때, 기쁨으로 주님 앞에서 회계할 수 있을 것이다.>

2. 연보의 시기와 정도

주님은 성도들에게, 주님의 일을 위해 자원하는 마음으로 연보할 것을

가르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언제 드려야 할까요? "매주일 첫날에"(고전

16:2)드립니다. 또 얼마나 드려야 할까요? "각 사람이 이를 얻은 대로"(고

전16:2)(흠정 역에는"하나님이 번성케 하신 대로(as God hath prospered him)"

되었음[편집자주]) 드립니다.

그리고 주님이 드린 것처럼 드려야 합니다. 주님은 부요하셨습니다. 그

러나 가난하게 되심은 우리를 부요케 하려 함이었습니다(고후 8:9). 주님

은 우리의 본보기입니다.

우리는 구차한 중에도 드려야 하며, 풍족한 때에만 연보해서는 안 됩니

다(막12:44). 한마디로 그리스도인은 인색하지 않게 드려야 합니다. 십일

조는 이스라엘 사람이 드린 최소한의 연보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십

일조와 더불어 예물을 바쳤습니다. 은혜 아래 있는 그리스도인이, 율법이

요구했던 최소의 연보인 십일조에 만족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3. 연보의 자세

어떤 심령으로 연보해야 할까요? 먼저 자신을 주님께 드려야 합니다(고

후8:5). 그렇게 함으로써 모든 것이 주님께 속해 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

다. 사랑을 따라 연보해야 합니다(고전 13:3) 그렇지 않으면 가치 없는 일

입니다. 은밀하게 해야 합니다. 비유적 표현을 빌리자면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를 정도로 은밀하게 해야 합니다(마6:1-4). 마지못해 드리

는 것이 아니라 즐거움으로 드려야 합니다(고후9:7). 초대 교회 성도들은

자기의 소유를 팔아 서로 통용했습니다(행2:44,45, 4:31-37). 이것은

그들의 참된 영적 교제의 외적 표현입니다. 물론 신약 성경 그 어디에서

도 이러한 행위를 의무화하지 않았습니다. 사실상, 그리스도인의 연보에

관한 성경의 교훈은 사유 재산권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초대 교회의 이

러한 행위는 순전히 자원함으로 드린 것입니다. 수도원의 공동생활이나

오늘날의 "공산주의"와 혼동해서는안 되겠습니다.

4. 연보의 상급

연보의 상급은 무엇일까요? 불의한 재물의 사용에 있어서 우리의 물질

사용이 충성스러울 때, 하나님께서는 참된 부요(영적 보물)를 우리에게

맡기십니다(눅16:11). 연보하는 자에게는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빌

4:17). 결국 연보는 하늘에 보화를 쌓는 일입니다(마6:19-2). 왜냐하면

그의 연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

(빌4:18)이기 때문입니다.

5. 교회의 회계 담당

교회 재정을 다루는 사람은 흠잡을 데가 없어야 합니다. "이는 우리가

주 앞에서만 아니라 사람 앞에서도 선한 일에 조심하려 함이라"(고후

8:21). 헌금을 관리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두 사람 이상을 세워야 합니다.

사도행전 6장 1-6절을 보면 교회의 과부들에게 재정을 지출하기 위해

일곱 사람이 임명되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서신서에 정확히 몇 사람

이 재정을 맡아야 한다고 명백한 교훈을 주신 적은 없습니다만, 고린도전

서 16장 3,4절이나 고린도후서 8장 18,19절을 보면 이 책임을 두사람 이

상에게 맡기는 일이 보통이었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전자인

고린도전서의 말씀에서,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이 예루살렘에 연보를 보

내는 일에 대해 인정한 자들을 보내고 필요하면 자신도 가겠다고 말했습

니다. 3절의 "너희"와 4절의 "저희"가 복수라는 것을 주목하십시오. 후자

인 고린도후서의 말씀에서, 바울은 교회에서 보낸 연보를 나누어주는 일

에 동행하기 위해 다른 형제 한 명이 선택되었다고 설명합니다.

6. 재정의 사용

신약 성경은 교회 재정 지출의 세 가지 목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교회

의 과부들을 위해, 가난한 성도를 위해, 그리고 복음 전도와 말씀 사역에

헌신하는 자들을 위해 사용되어야 합니다. 교회의과부들을 위해(행6:1-

). 참 과부로서의 자격(딤전5:3-16)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무의탁 자

이어야 합니다. 그를 돌아볼 친척이 아무도 없어 주님만을 의지하고 사는

사람이어야 합니다(4,5,16절). 둘째, 육십 세 이상이어야 합니다. 셋째.선

한 증거가 있어야 하며, 자녀를 잘 양육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환난 당

한 자를 구제하는 자이어야 합니다(10절).

가난한 성도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통해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

라고 거듭 거듭 말씀하셨습니다(갈2:10, 롬12:13). 구약에서 주님의 백성

의 번영은 궁핍한 형제를 어떻게 구제하느냐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습니

다(신14:2). 주후 45년경 유대에 살고 있던 성도들은 가난에 찌들려 있

었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극심한 박해와 만연된 기근 때문이었을 것입니

다. 안디옥 성도들은 바나바와 사울의 편에 유대에 있는 성도들에게 부조

를 보냈습니다(행 11:2-30). 사도 바울은 고린도에 있는 교회에게도 이같

이 하라고 간절히 권했습니다(고전16:1-3, 고후8,9장). 우리도 이처럼 가

난에 시달리는 성도를 도와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주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막4:7). 교회

에 돌아보아야 할 가난한 성도들이 있다는 것은 경건의 연습을 위한 좋은

기회가 됩니다. 바네스(Barnes)는 <성도들을 연합시키고 분열과 시기와

다툼을 예방하기 위한 좋은 방법은, 성도들이 관심을 기울이고 모두 도울

수 있는 공통의 구제 대상을 갖는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하지만 일하

기를 싫어해서 가난하게 된 자에 대해서는 교회에게 아무런 책임이 없습

니다. 이런 경우에 대한 하나님의 판결은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살후3:10)입니다.

복음전도와 말씀사역에 헌신하는 자들을 위해. 복음을 전하거나 말씀

사역을 하는 자들이 성도들의 도움을 받는 것은 당연한 하나님의 원칙입

니다.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

라"(갈6:6, 고전9:4-13, 딤전5:17,18)하지만 사도 바울은 교회들의 도움

을 받기보다는 자기 손으로 일을 했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행

18:3). 에베소 성도들의 본이 되어 그들도 약한 자들을 돕고, 주는 것이 받

는 것보다 복되다(행20:33-35)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또 돈

을 목적으로 한다는 고린도 비판자들의 말을 막기 위해서였습니다(고후

1:7-12). 또한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함이었습니다(살

전2:9, 살후3:7-9). 그곳의 성도들은 가난할 뿐만 아니라 핍박까지 받고

있었습니다.

빌립보 교회는 바울을 도우라는 명을 받았습니다(빌4:10-19). 이는 바

울이 자기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에게 열매가 가득하기

를 원했기 때문이었음을 주목하기 바랍니다.

또한 사도바울은 자신의 개인적 궁핍을 결코 공론화시키지 않았지만,

다른 성도들의 필요를 알리는 일은 주저하지 않았음을 주목하기 바랍니

다(고후8,9장). 쉐이퍼(Chafer)박사가 지적한 것처럼, "알리는 것"과 "호

소하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알려야 한다는 데에 아무런 이의

가 있을 수 없다. 알지 못하고서야 어찌 도울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문

제는 알리는 것에 그치지 않고 간청하고 호소하는 데 있다.>

Posted by 행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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