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강단]
성경적 역사관
-한 봉 래-
"저희가 그를 죽이려 할 때에 온 예루살렘의 요란하다는 소문이 군대의 천부장에게 들리매 저가 급히 군사들과 백부장들을 거느리고 달려 내려가니 저희가 천부장과 군사들을 보고 바울 치기를 그치는지라. 이에 천부장이 가까이 가서 바울을 잡아 두 쇠사슬로 결박하라 명하고 누구며 무슨 일을 하였느냐 물으니 무리 가운데서 어떤이는 이 말로 어떤 이는 저 말로 부르짖거늘, 천부장이 소동을 인하여 그 실상을 알 수 없어 그를 영문 안으로 데려가라 명하니라. 바울이 층대에 이를 때에 무리의 포행을 인하여 군사들에게 들려가니 이는 백성의 무리가 그를 없이 하자고 외치며 따라 감이러라" (행 21:31-36).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고자 하고, 이같은 소동을 목격한 천부장이 질서유지 차원에서 수습하다 바울을 구출하게 됩니다. 이는 바울을 살리려는 의도라기보다 적법적인 절차를 밟기 위한 것입니다. 어쨌든 이로 인해 바울은 로마로 가게 됩니다. 이같은 사건을 통해 우리는 "역사란 무엇인가?"를 묻게 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 할 수 있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종 바울의 구원의 복음이 전해지는 것을 방해합니다. 이스라엘을 군사적 힘으로 정복한 로마가 결과적으로 복음을 수호하는 역할을 맡게 됩니다. 이는 주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로마 총독 빌라도는 주님을 살리려 했고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죽이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같은 사건을 통해 우리는 역사에 대해 폭넓은 관점을 가질 필요성을 느끼게 됩니다.
하나님의 일하시는 범위가 광대한 스케일임을 이해하고 우리 믿음이 적극적이고 활력 있게 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흔히 개인적인 경건, 하나님과 관계 등에는 많은 관심과 노력을 기울이나, 세상과 역사에는 부정적인 태도를 갖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세상과 그 역사는 악한 자가 힘을 갖고 현실적으로 승리하며, 결국 세상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멸망할 것이라는 한 측면만 붙들고 있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세상과는 최소한의 관계만 유지하고 개인적인 경건에 몰입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은 그렇게 좁지 않습니다. 또한 우리가 중요시하는 개인적 (영혼의) 구원도 이같은 하나님의 일하심과 모순되지 않습니다. 구원이 개인적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일하시는 범위가 (폭 좁은) 개인적 차원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는 다른 누구도 대신할 수 없고 그 본인의 인격 가운데 일어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개인적 영혼의 구원에 관심을 두더라도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시는 스케일을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구속사역은 사람을 대상으로 하고, 인격을 그 핵심으로 삼으나, 그 범위는 전 우주적입니다.
이는 사람의 범죄가 미치는 범위에서도 나타납니다.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창 3:17-18). 하나님은 우주를 아름답게 지으셨습니다. 그 핵심인 사람이 범죄하자 모든 우주가 저주를 받았습니다. 사람의 타락이 전 우주에 영향을 미친 것입니다.
구속도 사람을 핵심으로 하나, 그 결과 저주받은 우주가 회복될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이 스케일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롬 8:19-21). 지금 자연계는 "썩어짐의 종노릇"을 하고 있기에 (우리가 보기에는 평화롭거나 혹은 먹이사슬의 순환고리를-감정을 느끼지 않은 채- 이어가고 있다고 생각되나) '탄식'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궁극적인 구속이 이루어질 때, 사람이 그 몸까지 영광스럽게 변화될 때, 자연계도 함께 영광의 자유에 이를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속도 우주적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엡 1:10).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골 1:20).
이같은 넓은 관점을 의식하지 못하면 자연과 역사에 대해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생각을 갖기 쉽습니다. 구원을 죄악된 세상과 썩어질 자연계에서 탈출하는 것으로만 생각하게 됩니다. 어느 새 우리는 "세상, 정치, 역사가 어디로 가든 난 모른다. 단지 예수님만 잘 믿으면 된다"는 식의 생각을 갖고 살고 있습니다. 물론 정치 참여나 사회 정의를 성경이 지지하지 않지만, 하나님의 통치는 세상과 전 역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같은 사실은 사람의 역사를 살펴볼 때 더욱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역사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룬 사람이 꼭 하나님의 사람이 아닌 경우가 자주 나옵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하게 된 것은 바사 왕 고레스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물론 그는 정치적 이유로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만, 그 배후에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고레스를 하나님의 종이라 부릅니다. "고레스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그는 나의 목자라 나의 모든 기쁨을 성취하리라 하며"(사 44:28). 고레스가 그같이 불리는 것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께 헌신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용하셨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경우로,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에 속하긴 했지만, 하나님의 신실한 종이 아닌 자기 욕심대로 잘못 행했는데 결국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된 경우도 있습니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창 50:19-21). 형들이 요셉을 시기하여 미디안 상인에게 팔아버렸습니다. 형들이 하나님을 위해 그렇게 한 것은 물론 아닙니다. 이 행위는 결코 잘 했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어쨋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사용되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건의 의미를 판단할 때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표를 고려해야 합니다. 선악의 기준도 어느 시점을 선택하는가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깊다는 것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우리 눈에는 절망처럼 보이고 하나님이 일하지 않는 것 같아보여도,역사에는 내용과 방향이 흐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개인적인 경건, 영혼과 마찬가지로 시대와 역사에 대해 똑같이 책임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역사를 의도와 목적을 갖고 진행시키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 현실적 세력이 되어 기독교적인 가치를 실현시키고자 하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역사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게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의도한 대로 역사가 진행될 것임을 압니다. 역사의 끝은 종말이나 재앙이 아닙니다. (물론 7년 환난이 있습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천년왕국,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지금 현재의 상태를 지속적으로 발전시켜서 궁극적인 상태를 만들어내지 못하기에 근본적인 변화를 동반하는 종말이 있게 될 것입니다. 이는 자연계를 포함할 것이며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같은 최종 목적을 가지고 하나님은 지금도 역사를 주관하고 계십니다. 궁극적으로는 온 우주 만물이 하나님을 찬송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같은 감각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역사는 우리를 완성시키는데 기여할 것이다."
본문에 나오는 대로, 바울을 죽이고자 하는 유대인도, 바울을 보호하는 로마도, 결국 하나님의 뜻, 사도 바울이 로마의 황제 앞에서 복음을 증거하는 것을 이루는데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 행동이 지금 시점에서 적대적인가 우호적인가는 그리 중요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는데 기여하고 있는가가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이같은 관점을 바울은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담담하게 이일을 당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죽이고자 하는 유대인들을 싫어하거나 미워하지도 않으며 자신을 돕는 로마 군인들을 의지하지도 않습니다.
우리도 이와 같은 역사관을 함께 갖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이같은 태도가 우리가 섬기는 모임에서 풍성하게 드러나기를 원합니다. 이같은 영성으로 세상을 대하는 성도와 모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다음의 말씀이 우리 심령에 메아리치기를 원합니다. "누가 여호와의 신을 지도하였으며 그의 모사가 되어 그를 가르쳤으랴? 그가 누구로 더불어 의논하셨으며 누가 그를 교훈하였으며 그에게 공평의 도로 가르쳤으며 지식을 가르쳤으며 통달의 도를 보여주었느뇨? 보라, 그에게는 열방은 통의 한 방울 물 같고 저울의 적은 티끌 같으며 섬들은 떠오르는 먼지 같으니 레바논 짐승들은 번제 소용에도 부족하겠고 그 삼림은 그 화목 소용에도 부족할 것이라. 그 앞에는 모든 열방이 아무 것도 아니라. 그는 그들을 없는 것 같이, 빈 것 같이 여기시느니라" (사 40: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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