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교회 안에서의 성령님

The Holy Spirit in the Church

지역 교회는, 가르침에 있어서나 실제적으로나, 성령님께서 교회 안에

서 그리스도의 대리자라는 절대적인 진리를 고수해야 합니다. 언뜻 보기

에 이사실은 이전에 토의된,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라는 진리와 겹치거

나 모순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두 진술 모두 참입니다. 그

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이신데, 성령님을 지상에 보내어 그리스도의 대

리자 또는 대표가 되게 하셨습니다. 따라서 모든 지역 교회는 성령님께

합당한 자리를 내어 드려야 합니다.

실제적인 인도(행13:1-4)

교회는 말씀 증거를 위한 집회장소의 선택, 집회들의 형식을 정하는

일, 하나님의 말씀 사역의 도구로 사용될 사람들의 분별, 재정의 사용, 경

건한 징계를 수행하는 일 등의 모든 일에서 성령님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

다.

성령님의 절대적 주권(고전12:11)

지역 교회는 성령님의 절대적 주권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로써 성령님

께서는 그 기뻐하시는 뜻대로 행하실 수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말씀에 어

긋나는 일은 결코 하시지 않지만, 반드시 똑같은 방법으로 모든 일들을

결정하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성령님을 불이나 물이

나 기름이나 바람에 비유하여, 유동적이고도 예측할 수 없는 그분의 활동

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지혜로운 성도는 성령님의 이 신성한 주

권을 그분에게 내어드리는 것에 충분히 신축적일 것입니다.

초대 교회 당시에는 그러했으나, 얼마 못 가서 사람들은 "자유롭고 교

제가 풍성하고 형식이 거의 없는" 집회에 대해 불안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점점 제약이 더해졌고 마침내 형식주위와 의식주의 일색으로

변질되어 버렸습니다. 성령님은 소멸되었고, 교회는 성령님의 능력을 상

실하게 되었습니다.

성령님을 소멸함(살전5:19)

제임스 데니(James Denny)는 성령님의 자유가 어떻게 인간에 의해 제

한 받게 되었는가를 설득력 있게 기술했습니다. 비록 데니가 쓴 글이 상

당히 긴 글이지만, 주의 깊게 연구할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그는 "성령을

소멸치 말라"는 구절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오순절 날 성령님께서 교회에 강림하셨을 때,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었고, 그들은 하나님의 위대

하신 일을 선포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이러한 놀라운 은사를 받은 사람

은 문자 그대로 성령으로 펄펄 끓는 것으로 묘사했다. 초대교회 시대의

거듭남은 참된 거듭남이었고, 그것은 그 때까지 생소했었던 것에 대해 그

심령과 감정을 타오르게 하였으며 새로운 능력에 대한 의식을 불러일으

켰고,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거룩함에 대한 새로운 열정, 성경과

인생을 보는 새로운 식견, 때로 불타는 듯하고 열정적인 설교의 새로운

힘이 되었다.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초대교회를 묘사하였다. 그들 중

에 잠잠한 자는 없었다. 그들이 함께 모일 때 모든 사람은 찬송, 계시, 예

언, 통역을 하였다. 성령의 말하게 하심은 덕을 위하여 각 사람에게 주어

졌으며, 모든 사람이 소유한 성령의 불은 불타 번져 나가기 위해준비되

었다. 사도들의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 즉. 기독신앙으로의 회심은 사람을

약간 다르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의 모든 본성을 깊은곳 까지 흔들어

놓는 것이며, 전과 같은 자가 아니고, 모든 열정과 타오름으로 그 안에 새

로운 삶을 가진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이다.

일반적으로 본성과 다른 상태는 반드시 부자유함을 느끼게 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비록 그가 성령의 은사를 받은 경우라도 여전히 한 사람에

불과하며, 헛된 것에 대하여 투쟁하기만 하는 사람이 아닌, 어리석고, 야

망을 가진 자며, 모든 종류의 이기심을 가진 자인 것이다. 처음 보기에는

그의 열정이 본성적인 잘못들을 제거하기보다는 더욱 악화시키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이 열정은 그가 잠잠히 있는 것이더 나을 때조차도 말하

도록 몰아갈 수 있다(초기 교회에서의 말하기를 좋아했던 사람들처럼).

또한 그것은 지성인을 자처하는 사람들이 탄식할 수밖에 없는 방식으로

기도나 찬양이나 권면을 하도록 그를 이끌어 갈 수도 있다. 그리고 스스

로 지혜로운 것처럼 생각하는 지성인들의 판단과 같이 모든 영적인 은사

의 활용이 방해되기 쉬울 수도 있다. 지성인들은, 속에서 타는 듯한 마음

을 가진 그리고 그 불꽃이 다른 사람의 눈 에 띌 정도로 열정적인 사람에

게 "자제하라"고 말할 것이다. "자제하라, 절제하는 것을 연습하라, 그런

식으로 하는 것은 이성적인 사람에게는 무가치하다" 라는 등... .

이와 같은 상황이 데살로니가의 교회 안에서도 자주 일어나는 일이었

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들의 나이 차이와 기질적인 차이로 불가피

하게 발생된 것이다. 그리고 의심할 여지없이 구식이고 냉담한 사람들은

젊고 정열적인 사람들에 비하면 자연적이고 천부적으로 예리하다. 그러

나 경험이나 기질에서 나온 지혜는 열정적인 영을 가진 사람과 비교했을

때 열등하다. 그것은 차갑고 냉담하며, 확장시키지 못하며, 아무 것도 불

붙이지도 못하고 퍼뜨리지도 못한다. 본인이 사람의 마음을 열정으로 고

무시키는데 대해 무능력하므로 인해 다른 사람의 불길과 같은 말이 갑자

기 튀어나올 때 그러한 열정에 찬물을 끼얹어서는 안 된다. 이것이 "성령

을 소멸치 말라"는 의미이다. 이 말씀은 성령이소멸될 수 있다는 것을 전

제로 하고 있다. 냉담한 표정, 모욕적인 말, 침묵, 고의적인 무시 등이 성

령을 소멸시키는 첩경이며 매정한 비평 역시 그렇다.

모두 알다시피 불이 처음 붙었을 때 연기가 가장 많이 난다. 하지만 연

기를 없애는 방법은 찬물을 끼얹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잘 타오르도록 장

애물을 치워주는 것이다. 만약 당신이 지혜롭다면 땔감을 다시 놓거나 통

풍이 잘되게 하는 등, 잘 타오르도록 충분히 도와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

나 모닥불을 잘 타오르도록 하는데 있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할 수 있

는 가장 지혜롭다고 하는 방법은 건드리지 않고 그대로 놔두는 것으로,

불과 같이 타는 열정을 가진 제자를 만났을 때 역시 대부분 사람들의 현

명한 방침이다. 그렇게 연기가 그들의 눈을 아프게 할 것 같지만 연기는

금방 사라져 버리고, 그 동안 잘 참아준다면 활활 타오를 것이다. 때문에

"성령을 소멸치 말라"는 사도의 교훈은, 그리스도인이 선한 일 즉, 세상에

서 가장 훌륭한 일인 영적 열정을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이는 무지하거

나 미숙한 것일 수도, 모든 실수를 범할 수도 있다. 또한 생활의 의식주

문제가 사람의 풍성한 희망을 속이는 제한적인 것에 대해 놀랄 정도로 둔

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열정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며, 광대하고, 감동

적이며, 모든 세상의 지혜보다 더 가치있는 영적인 힘과 같은 것이다.

나는 성령님이 소멸될 수 있는 것을 전제했는데, 교회사가 성령님에 대

한 반역의 기나긴 연속이라는 견해로 평가되고 있음은 슬픈 일이다. 다른

곳에서 사도는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고 말했다. 그

러나 어떤 사회에서의 자유는 어느 정도 질서를 갖고 있는 동시에 위험성

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질서를 지키는 사람들은 자유에 대해 너무 인정

치 않으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훌륭한 질서에 대한 관심 속에서 성령

의 자유가 교회에서 간단하게 억눌려지는 일이 초대교회 당시에도 발생

되었던 것이다. "다스리는 은사"는 "다른 은사들을 다 삼켜버리는 아론의

지팡이처럼" 여겨졌다. 교회의 다스리는 자들은 일반적인 성도들과는 완

전히 별개의 계급이 되어, 교회를 세우기 위한 모든 영적인 은사의 활용

은 그들에게서 제한되어졌다. 아니 오히려, 때때로 말해지는 것같이 그들

만이 은혜와 복음의 진리를 위탁받은 자요 관리자이며 그들을 통해서만

사람들이 성령님과 연관될 수 있다고 하는 기괴한 사상들이 고안되었고,

신조와 같이 가르쳐졌다. 쉬운 말로 하면, 그리스도인들이 예배하기 위해

모였을 때 성령님께서 소멸되었다는 것이다. 형제들의 심령에서 타오르

는 불꽃 위에 하나의 커다란 소화기가 놓여졌는데 그소화기는 그들 자신

을 드러내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것과 "찬양이나 기도 또는 뜨거운 권고

가 튀어나옴으로 거룩한 집회의 품위와 질서를 깨뜨려서는 안 된다"는 등

의말이다. 나는 초대교회 시대부터 그리스도인의 예배를 떨어뜨리는 조

건들이 있었고, 불행하게도 그러한 조건들이 지금까지도 대부분의 지역

에서 존재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이러한 것으로 인해

유익을 얻었다고 생각되는가? 나는 그렇다고 믿지 않는 다. 이것은 때로

견딜 수 없는 것이 되었다. 2세기의 몬타니스트나 중세의 이단적인 종파

로 오해된 무리들, 영국의 공화정 시기의 독립교회와 퀘이커 교도들, 웨

슬레파의 평신도 설교자들, 구세군, 플리머스 형제단, 그리고 오늘날 우

리에게 있는 복음적인 기관들 모두는 다양한 각도에서 성령님에 관하여

증거하였다. 그리고 이것은 성령을 소멸시키고, 성령을 소멸시킴으로 교

회를 무력하게 하는 권위에 대항한 올바르고 꼭 필요한 증거였다.>

그러므로 교회는 비성경적인 규범이나 고정된 계획, 예식 또는 예배식

순으로 성령님을 속박해서는 안 됩니다. 집회는 정해진시간에 끝나야만

하고, 봉사는 항상 어떤 틀에 박힌 일에만 속해야 하고, 예배를 위한 모임

이 어떤 강단사역이라는 것은 정말 받아들일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직된 이해로 성령님이 이해되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 이러한 규칙들은

다만 성령의 능력에 대한 손실을 초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성령님께서 마음껏 활동하신다면

잠시 멈추고 참으로 성령님을 주님이 보내주신 인도자로 의지한다면

우리 지역 교회들은 어떤 모습이 될지 생각해 봅시다.

매킨토쉬는 이러한 이상적인 상태를 생생하게 묘사해 주고 있는데 여

기에 소개합니다. <우리 각자가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하며, 오직

예수님을 바라보고 모여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러

한 집회에 대하여 활기가 없고 침체해 있으며, 유익도 없고 시시하다고

불평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본성적으로 무엇인가 하려는 버릇, 예를 들

어 마음에도 없이 형식적으로 기도한다든지, 말하기 위해 말한다든지, 침

묵을 메우기 위해 찬송을 택하는 등등으로 거룩한 예배가 침해를 받지 않

도록 해야 한다. 우리 모두가 바로 주님을 대면하고 있음을 깨달아야 하

며, 주님의 손에 의해 채워지며 합당하게 사용되어야 한다. 각자의 시선

은 주님을 향해야 하고 각자의 심령은 주님께 사로잡힌바 되어야 한다.

성경 한 구절을 읽게 될 때 그 구절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한 말씀, 한 말씀을 듣게 될 때에 그 심령에 능력을 체험할 수 있어

야 한다. 한 성도가 기도하게 될 때에는 우리의 심령이 주님을 대면할 수

있어야 한다. 찬송을 부르게 될 때에 우리의 심령은 주님께 올라가서 하

늘나라에 있는 비파를 연주하듯 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소에 있는

것처럼 느낄 수 있어야 하며 우리가 이별이 없는 하늘나라에서 예배드릴

그 날의 즐거움을 맛볼 수 있어야 한다.>

Posted by 행복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