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웃도어

절간이었다가 교회가 된 이색적인 건물

전형적인 일본식 건축양식.. 일본 불교사원에서 교회로 탈바꿈

오마이뉴스 | 오문수 | 입력 2017.03.03 15:23




[오마이뉴스오문수 기자]

 현 목포근대역사관 1관으로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영사관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쉽게 볼 수없는 건축양식이기 때문에 답사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영화와 드라마 촬영장소이기도 하다. 아픈 역사를 잊지 않기 위해 시민들이 입구에 세운 위안부 동상이 자그맣게 보인다
ⓒ 오문수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면 삼학도 파도 깊이 스며드는데 부두의 새악시 아롱젖은 옷자락 이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설움~"

위 노래 가사는 <목포의 눈물> 한 소절이다. 며칠 전 목포 중심가를 걷다 일본의 절 원형이 그대로 보존된 문화유산을 보고 깜짝 놀랐다. 내친김에 일제강점기 시절에 건축됐던 근대건축물을 둘러보기로 했다. 그 중에는 1930년대 가수 이난영씨가 불러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노래 <목포의 눈물> 배경이 된 목포근대역사관 2관도 있었다.

목포라는 지명은 <고려사>와 <동국여지승람> 등의 사서에 기록되어 있지만 명확한 유래는 없다. 다만 나무가 많은 포구라 하여 목포라고 불렀다거나 목화가 많이 난다고 하여 목포라고 불렀다는 설이 있다.

한편 영산강과 서남해가 만나는 지리적 조건으로 인해 바다로 나가는 길목이자 외적의 침략을 받는 길목이 되어 목포라고 불렀다는 설도 있다. 일제강점기 시절 일제에게 호남지방의 곡물과 군수물자를 수탈당한 입장에서 보면 후자에 더 근접하다는 생각이 든다.  

절간이 교회가 된 별난 이력을 지닌 동본원사 목포별원

 일제강점기 시절 목포에 세워진 일본불교사원인 동본원사 목포별원 건물이다. 광복이후 목포중앙교회에서 인수했다가 현재는 오거리문화센터가 되었다. 원도심활성화에 방해가 된다며 주차장으로 헐릴뻔했지만 시민단체의 반대로 살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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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에서 가장 유명한 빵집인 코롬방제과점 바로 옆에는 오거리문화센터가 자리하고 있다. 건물을 바라보다 깜짝 놀랐다. 일본에서는 흔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일본불교사원 모습이 그대로 살아있었기 때문이다.

오거리문화센터 건물은 1897년 목포가 개항된 이후 가장 먼저 건립된 일본 불교사원인 동본원사 목포별원이다. 동본원사는 전도활동을 위해 목포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의 교육 사업에 힘을 기울였다. 일본인들의 소학교인 심상소학교를 맨 처음 설치하여 운영하다가 거류민단에 운영권을 넘겼다.

현재 남아있는 석조건물이 언제 신축된 것인지에 대한 정확한 자료는 없지만 1930년대로 추정하고 있다. 건물은 장방형의 단층 건물로 전형적인 일본식 건축양식이다.

건물은 광복이후 정광사의 관리를 받다가 현 목포중앙교회에서 인수(1957년)해 오랫동안 교회로 사용되었다. 현재는 오거리문화센터로 활용되고 있다. 절간이 교회가 된 이색적인 이력을 지닌 이 건물은 목포를 찾는 일본 관광객들이 자주 찾는 곳이다.

입구에 있는 조그만 비석이 눈길을 끌었다. 이곳이 5·18광주민중항쟁을 비롯하여 민주화운동을 갈구하는 시민들의 시위가 끊이지 않던 당시에 경찰의 강제진압을 피하는 안식처 역할을 했던 곳이라는 기념석이 세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아픈 역사도 역사다. 아프다고 없애버리면 후손들은 지나간 역사를 망각하게 된다. 하마터면 이 문화재가 사라질 뻔했다. 목포문화재단 조로옥 사무국장의 말이다.

"7~8년 전에 원도심활성화에 방해된다며 주차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허물어버리자는 의견이 나왔으나 시민단체들이 반대해 살렸습니다."

 목포문화재단 조로옥 사무국장(왼쪽)과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원 이재언씨가 서있는 곳 뒤쪽에 목포의 명물인 코롬방제과점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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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목포문화원... 순수한 민족자본으로 세운 호남은행 목포지점

오거리문화센터를 나와 3분정도 걸어가자 목포문화원 건물이 나왔다. 붉은색 타일로 마감한 직사각형 2층 건물이지만 외관이 수려하다. 호남은행은 1920년에 순수한 민족자본으로 설립했다.
 현 목포문화원으로 1920년에 순수한 민족자본으로 설립했던 은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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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가 1928년 신은행령을 반포하고 민족계  금융기관에 대한 일본 자본의 지배체제를 확립하기 위한 식민지금융정책을 강화한 가운데서도 독자운영을 고수하다가 마침내 1942년에 합병당했다. 광복 이후에도 은행으로 사용되다가 현재는 목포문화원 건물로 사용하고 있다.

현 목포근대역사관 1관...목포 근현대사의 증인인 구 목포일본영사관

목포시 영산로 29번길 6에 있는 목포근대역사관 1관은 우리나라에서 쉽게 볼 수 없는 멋진 건물로 많은 답사객들이 찾고 있으며 영화와 드라마 촬영장소이기도 하다. 1900년에 일본영사관으로 지어진 건물은 목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국가사적 289호이다.

한동안 러시아공사관으로 알려졌지만 건물 벽면의 벚꽃 문양, 욱일승천기 모형 벽돌과 내부공사(1990년) 때 '한국목포일본영사관건축장'이라고 쓰여진 장목이 발견되어 일본영사관임을 뒷받침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인들이 한국인을 강제동원해 만든 방공호 시설로 보존상태가 양호하다. 현 목포근대역사관 1관 건물 뒤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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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말엽 일본은 전쟁에 대비해 동굴을 곳곳에 파놓았다. 일본영사관 뒤에는 당시 파놓은 방공호가 생생하게 보존되어 있다. 목포의 역사, 수탈과 독립운동 자료, 일제강점기 시절 생활용품 등이 전시되어 있는 역사관은 근현대사를 반영하는 것만큼이나 다양하게 사용되었다.

일곱 번이나 이름이 바뀐 이름을 거명하자면  일본영사관 → 목포이사청 → 목포부청 →목포시청 → 시립도서관 → 목포문화원 → 목포근현대역사관이다. 당시의 아픔을 잊지 않기 위함일까? 입구에는 시민들이 세운 위안부 동상이 목포시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목포근대역사관 2관... 일제수탈의 상징으로 구 동양척식회사 목포지점

동양척식주식회사는 1908년 3월 동양척식회사법이라는 것이 통과됨에 따라 만들어진 일본 국책회사이다. 일본은 목포가 개항지로 급성장하자 1920년 6월에 목포에  동양척식회사 목포지점을 설립했다.

동양척식회사는 온갖 악랄한 수법을 동원해 한국농민에 대한 수탈을 자행했다. 목포지점의 경우 전남 각지에 소재한 농장을 관리하여 동양척식회사 지점 가운데 가장 많은 소작료를 거두던 제1위 지점이었다.

 현 목포근대역사관 2관 모습. 일제 수탈의 상징인 동양척식회사 목포지점 건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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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경영뿐만 아니라 부동산 담보 대부를 통해 조선농민을 수탈하는 금융기관으로도 악명 높았다. 1930년대에 유행했던 이난영의 노래 <목포의 눈물>에 등장하는 목포의 설움을 만든 진원지가 이곳이다.

해방 후 해군이 사용하다 이전한 뒤 빈 건물로 방치되어 있다가 1999년에 시민들 뜻에 따라 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2007년 6월부터 목포근대역사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역사관에는 목포의 옛 사진뿐만 아니라 독립운동 관련 사진과 2차대전 중 일본군이 저지른 잔학상이 전시되어 있어 임신부나 노약자의 관람을 금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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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여수넷통에도 송고합니다
Posted by 행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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