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왕에 대한 예비(마태복음 1, 2장)-3
5. 베들레헴-애굽-나사렛
2장의 첫절과 1장의 끝절 사이에는 시간적 간격이 있습니다. 박사들의 여
행은 적어도 여러 주가 걸렸음이 분명하기 때문에 아기 예수님은 이미 성전
에 드려졌던 것입니다. 1절의 원래의 표현은 "예수께서...나셨으매입니다.
베들레헴의 두 살 아래 사내 아이들에 대한 헤롯의 사형집행은 그 별의 처
음 출현 이후에 상당한 기간이 지났던 사실을 말해 줍니다.
분명히 이 별은 주님께서 탄생하셨을 때 박사들에게 나타났지만 그들을
수도인 예루살렘까지 내내 인도했던 것은 아닙니다. 그들이 그곳에 도착했
을 때 좀더 인도를 받았는데, 별이 다시 나타나서 그들을 베들레헴까지 인
도했던 것입니다(9절).
7세기 전에 이사야는 이방인 예배자들이 원방에서 오며, 이스라엘과 그
영광의 주님께 나아올 것이고, 열국에서 온 사자들 가운데 금과 유향을 가
지고 올 것이라는 예언을 했습니다(사 60 :1-7). 이 장면은 그것에 대한 참
된 예고입니다.
이 동방의 방문자들이 수도인 예루살렘으로 가려고 한 것은 자연스러운
생각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분명히 왕은 수도에서 태어나실 것이기 때문입
니다. 더욱이 그들은 그 도시가 큰 축제가 한창일 것이고, 기쁘게 왕가의 경
사를 축하하고 있을 것을 의심치 않고 기대했을 것입니다. 이 소식을 들은
현재 군림하고 있는 군주인 에돔 사람 헤롯의 약하고 불안해 하는 모습을
발견하고 얼마나 놀라고 실망했겠습니까! 헤롯은 두려워했고 암울한 소문
들이 온 도시에 퍼지고 있었습니다(3절).
헤롯은 좀더 정확한 정보를 얻기 위해 종교 지도자들을 불렀고, 하나님의
선지자가 베들레헴을 메시야가 탄생할 곳으로 지적했음을 알게 되었습니
다. 그들의 인용구절은(6절) 예언인 미가서 5 :2에 대한 자유로운 해석이었
습니다. 어쨌든 이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인성과 신성을 나
타냅니다. 그러나 비록 이 서기관들이 구원자가 태어날 곳을 나타낼 수는
있었지만 그들은 그 예언의 성취 여부를 조사하기 위해 베들레헴까지 고작
6마일을 여행하는데에는 너무도 무관심했습니다.
사실 여기에는 세 가지의 독특한 반응들이 나타나있습니다. 헤롯과 그 왕
궁의 염려, 서기관들의 무관심, 박사들이 보여준 경배입니다. 이 세 가지 태
도들은 오늘날의 사람들이 나타내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 야기에는 창조(별)와 계시(성경)가 들어있는데 모두 그리스도를 가
리키고 있습니다. 그분은 창조(별)에 대해서는 창조자이시며 또 계시(성경)
의 주제이십니다. 과학과 성경은 항상 일치된 증거로 그분께 연결되어 있습
니다.
헤롯이 별이 정확히 나타난 때를 묻고 자기도 가서 경배를 드리겠다는 제
안은 아마 그가 박사들의 희망과 존경을 같이 한다는 것을 믿게하려는 의도
였을 것입니다(7, 8절).
다시 나타난 별은 기쁨으로 이끌었지만(9, 10절) 아이를 대면하는 것은
경배로 이끌었습니다(11절). 박사들이 구유 안에 있는 아기(Babe)께 경배한
것이 아니라(누가복음에서 처럼) "집"에 있는 "아이"(Child ; 한글 개역성경
에는 "아기"로 되어있음-역주)께 경배했다는 것은 주목할만 합니다. 일반
적인 크리스마스의 모습은 이것과 상당히 다릅니다.
이 경배의 장면에는 요셉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11절). 그는 분명히 없
었습니다. 더욱이 마리아와 아이가 함께 있을 때 동방의 방문객들은 다만
그분께만 경배와 예물을 드렸습니다. 무릎과 마음을 하나님의 왕이신 그분
앞에 꿇었습니다. 황금이 가지고 있는 본질적인 가치는(돈으로써의 가치가
아니라) 우리 주님의 본질적인 신성과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유향은
빻아져서 모두 제단에서 태워지는, 하나님께서만 흠향하실 수 있는 주님의
인성에 대한 완성을 의미하는 소제 위에 부어진 것을 기억하게 합니다(이것
은 주님의 완전한 인성에 대한 묘사입니다. 레위기 2장). 몰약은 항상 죽음
과 시체 보존과 연결되어 있고 우리에게 이 거룩하신 아이가 결국 죽을 것
이라는 것을 생각나게 합니다. 그들의 사역은 그들의 경배가 끝나자 마쳐졌
습니다. 그들은 다른 길을 통해 그들의 나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이 새
로운 길은 헤롯의 명령을 무시하라는 하나님의 경고로 인해 취해진 것입니
다(12절). 정상적인 환경 아래서 우리는 정부의 명령에 복종해야 합니다. 그
러나 우리가 그렇게 하지 못할 때가 있는데, 하나님의 권위에 불복종하게
만들 때입니다(행 4 :17-20을 보십시오). 그들의 명령이 가장 높으신 분명
한 하나님의 명령에 어긋나지 않는 한 우리는 항상 이 땅의 권세자들에게
복종해야만 합니다.
애굽으로의 피신과 귀향(2 :13-23)
하나님께서 꿈으로 지도해 주신 후에 요셉은 마리아와 아이를 데리고 애
굽으로 갔습니다. 이 여행에는 보호해 주는 어떤 호위병도 없었고, 박사들
이 주었던 금은 이 여행의 경비로 쓰여졌을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
도께 경배하는 것은 우리의 물질을 드리는 것 뿐만 아니라 찬미를 드림으로
나타내져야 하고 이러한 물질은 그분의 목적들을 이루는데 사용되어져야
합니다.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15절)는 말씀은 호세아 11 :1에서 인용된 것
입니다. 성령님이 없이 우리는 결코 이 말씀을 그리스도께 적용할 수 없었
을 것입니다. 이 말씀의원래 의미는 이스라엘에게 돌이키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어린시절에 대한 매력은 곧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여호
와께서 애굽에서 찾으시고, 그 나라에서 불러내시고, 실패하지 않으신 또다
른 아들인 예수님이 계십니다. 아들로써 그분께 머물러 있던 사랑은 아주
짧은 순간이라도 희미해지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구약성경의 사용은 성경
적용의 넓은 가능성에 대해 보여줍니다. 우리는 항상 성경의 해석과 적용의
차이를 구분해야 합니다. 전자는 항상 아주 좁고 후자는 아주 넓습니다.
마태는 지금 그의 관심을 격분한 헤롯이 베들레헴의 사내아이들을 향한
비참한 앙갚음에 맞추었습니다(16-18절).
세번째 구약의 인용구절은(18절) 예레미야31 :15입니다. 이 본문의 주 배
경은 베냐민 지역의 예루살렘 북쪽 마을인 라마에서(수 18 :25) 이루어진 유
대인을바벨론의 포로로 끌고가기 위해 사로잡음에 대한 가슴이 아픈 경험
과 관련되어 있습니다(렘 40 :1). 라헬은 베냐민의 어머니로 그녀는 베들레
헴 근처에 장사되었습니다(창 35 :19). 예레미야는 타락한 베냐민과 유다지
파가 바벨론의 정복자들에 의해 찢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어머니 라헬이 자
기의 자녀들로 인해 비통하게 소리쳐 외치는 것으로 묘사했습니다.
그러나 마태는 이 옛 애도를 새롭게 적용했습니다. 라헬은 새로운 이유로
울었습니다.이 때의 재난은 훨씬 더 가까운 곳인, 북쪽에 있는 라마가 아니
라 바로 베들레헴에서 일어났습니다. 이 잔인한 칼은 타락한 어른들을 친
것이 아니라 순진무구한 아이들을 쳤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그녀
는 자신의 희망없는 슬픔을 눈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녀는 위로를 받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하나님으로부터 진정한 위로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네소리를 금하여 울지 말며" , 또 조언하기를 "...그들이 그 대적의 땅에서
돌아 오리라"(렘 31 :16)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70년후에 그들의 땅으
로 돌아왔던 것입니다. 이 병행구절은 완전합니다. 베들레헴의 어머니들은
그들의 학살된 사내아이들이 궁극적으로 멸망당한 것이 아니라 영광스런
불멸의 옷을 입고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보증된 말씀 안에서 평안함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 죽음으로 아이들을 잃은 모든 사람에게 평안함이 있
습니다. 왜냐하면 구원자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영원한 삶을 살 것
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요셉은 또다른 중요한 꿈을 꿉니다(1 :20; 2 :13, 19, 22을 보십시
오). 천사는 그에게 헤롯의 죽음을알리면서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갈 것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 합법적인 다윗의 왕위 상속자는 아직 왕 위
에 오르지 못하고 기다려야만 했습니다. 그 동안에 그분은 경멸받는 갈릴리
사람들의 마을에서 유배당한 사람처럼 기거해야만 했습니다(요 1 :46). 그분
이 나사렛인이라 칭함을 받으리라는 말씀은 구약성경의 확실한 예언이 아
니라 마태가 일반적인 방법으로 사용한 것입니다. 나사렛이란 단어는 히브
리어 어근으로부터 파생된 "싹이 나다" , "새싹" , "가지를 뻗게하다" 를 의미
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이사야 11 :1에서 성령님께서 사용한,
이새의 줄기에서 나오는 왕의 싹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분은 초라하게 이
도시에서 거의 30년동안 자신의 삶을 드러내지 않고 보냈습니다. "나사렛
인"이라는 말은 초라함과 생명 모두를 암시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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