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화진 외국인 묘지를 찾아서 旅游風情帖 / photolog

2010/08/22 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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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8월 21일, 오후 6시쯤 양화진 외국인묘지를 찾아갔습니다.

절두산과 양화진을 지나칠 적마다 언제고 한번 찾아가 보고자 하였으나 그기회를 못가졌었는데, 이번에

오유선생의 안내로 양화진 외국인 묘지를 탐방하고 사진도 찍고, 평소책이나 기록을 통해 비교적잘 알고 있었던 역사적 인물들의 묘소와 묘비도 찾아보았습니다.

양화진은 행적구역으로는 서울 마포고 합정동에 속하고 이곳에 있는 외국인의 묘역은,

일제때는 <경성 구미인 묘지>로 불리다가, 해방 후엔 <서울 외국인묘지>로 불리었습니다.

1986년 선교기념관이 건립되고 그와 함께 <서울 외국인 묘지공원>으로 개칭되어 현재에 이릅니다.

맨 처음 이곳에 묻힌 사람은 1890년 7월 26일 별세한 존 W. 헤론. 그는 고종의 시의였으며 선교사였습니다.

이후 이땅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많은 선교사들이 이 땅에 묻히기를 희망하였으며,

유명한 언더우드 집안, 아펜젤라 집안, 윌리엄 홀 집안 등은 가족들이 함께 묻히기도 했습니다.

이곳에 묻힌 사람들의 국적을 보면, 미국인이 가장 많고, 영국과 카나다, 러시아인들이 또한 많다. 한국인도 20여명이나 이곳에 묻혀 있다. 프랑스, 필리핀, 독일, 스웨덴, 이태리, 덴마크, 일본, 남아공, 호주, 폴란드, 뉴질랜드 사람들이 있고, 국적불명도 18명이나 된다.

위는 베델(한국명, 배설)의 묘비다. 영국인으로 대한매일신보 사장을 지냈던 사람이다.

한국의 독립을 위하여 많은 활동을 했던 호머 헐버트(한국명, 홀법)의 묘. 묘비에는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히기보다 한국에 묻히기를 원하노라>하고 쓰여 있다.

이곳에 묻힌 외국인들 중에는 한국명을 갖고 있었던 이들이 여럿 있었다. 언더우드 1세는 원두우, 언더우드2세는 원한경, 아펜젤러는 아편설라, 존 W. 헤론은 혜론, 로제타 홀은허을, 숭실대학 설립자 윌리엄 M. 베어드는 배위량, 헐버트는 홀법, 로버트 J.토마스 목사는 최란헌 등 많은 사람들이 한국명을 갖고 있었다.

어떤 묘비들은 아직도 총탄 자국이 선연한데, 한국전쟁이 있었던 1950년에 이곳에서 치열한 전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곳에 홀(Hall) 가족들이 묻혀 있다. 홀 가족의 숭고한 인류애 정신은 위와 같은 공적비를 세울만하다. 윌리엄 홀은 카나다 출신으로 의대를 마치고 처음엔 뉴옥의 빈민가에서 의료봉사를 하면서, 조선선교를 준비하였다. 그때 아내 로제타를 만나 서울서 결혼했다. 이들은 평양에서 의료봉사를 하고 교회를 개척하였다. 윌리엄은 1894년 평양에서 벌어진 청일전쟁의 부상자들과 환자들을 치료하기 위해 불철주야 애썼으나 전염병에 걸려 한국에 온 지 3년만에 1894년 타계했다. 로제타는 남편의 사후 두 자녀를 데리고 미국으로 돌아갔다가 1897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평양에 남편을 기념하는 기홀병원을 설립하였으며, 한 여성을 미국으로 유학시켜 한국 최초의 여의사(박에스터)를 길러내기도 했다. 로제타는 한글 맞춤법에 맞는 점자법을 개발하였고, 평양에 최초의 맹아학교를 세웠다. 그녀의 헌신은 45년이나 지속되었다. 이들의 아들, 셔우드 홀은 한국에서 태어나 자랐으며,토론토 의대를 졸업했고, 역시 의사이던 아내 마리안과 함께 한국에 와서 18년동안 의료 선교를 하였다. 그는 해주에 우리나라 최초의 결핵요양원을 세워 환자들을 돌보았으며, 크리스마스 실을 발행해서 결핵퇴치운동을 펼쳤다. 은퇴후 카나다에 가서 살다가 타계했으나 유언대로 한국땅에 묻혔다.이곳엔 모두 6명의 가족이 묻혀 있다.

윌리엄 홀과 로제타 홀의 아들인 셔우드 홀은 카나다에서 작고했으나 1992년 한국에 안장되었다.

배재학당 설립자였던 헨리 거하드 아펜젤라 추모비. 그의 딸 앨리스 아펜젤라는 이화여전 초대 교장을 지냈다.

묘비들 가운데는 전쟁의 상흔으로 아주 심하게 상한 것들도 있고, 어떤 묘비는 십자가가 떨어진 것들도 있다.

묘지에는 국적이한국인들도 있고, 일본인들도 있다. 숫자로는 미국인 선교사들이 제일 많다. 묘비명 중에는, <나에게 천의 생명이 주어진다 해도 그 모두를 한국에 바치리라>(R.R,켄드릭)고 쓴 것도 있다.

맨 처음 묘지는 존 헤론의 것이었다. 그는 고종의 시의로 활동했던 분인데, 1890년 7월 26일 급환으로 별세했고, 묘지를 어디다 쓸 것인지 문제가 되었다. 당시 도성 안에는 시신을 매장하는 엄격히 금지되었기 때문에 묻을 곳이 없었다. 인천항 해안 언덕에 이국인묘지가 있기는 했으나 한 여름 더위에 서울서 인천까지 시신을 운구할 수 없었고, 조정에서는 한강 건녀편 야산 기슭에 장소를 주긴 했으나 그곳은 모래밭이어서 묘지로 쓸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그러던 중 미국공사와 언더우드, 알렌 등이 나서 심사숙고 타협하여 서울에서 약 8km 쯤 떨어진 강언덕(양화진)에 적당한 장소를 지정해받았다.그렇게 되어 이곳 양화진 언덕에 외국인묘지가 들어서게 된 것이다.

세브란스 발전에 큰 공로를 세운, 에비슨 박사의 묘지

당시 외국 선교사들 중에는 개신교 목사들이 가장 많았다. 개신교 선교사로 가장 먼저 한국에 입국한 외국 선교사는 1832년 7월, 의사이며 목사였던 독일출신의 칼 귀츨라프(GUTZLAFF, KARL F. AUGUST) 목사라 할 수 있다. 그는 충남 고대도에서 성서와 교리서를 전달하고 홍주목사 이민희의 서생에게 주기도문을 한문으로 써주고 한글로 번역하게 하였다. 그는 또한 감자 씨를 섬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재배 방법까지 가르쳐주어 식량문제 해결에 도움을 주기까지 하였다.

언더우드 집안의 묘지와 묘비. 연세대학을 세운 호러스 그랜드 언더우드(한국명, 원두우) 부부와 그의 아들 호러스 호턴 언더우드(한국명 원한경 부부)의 묘비가 보인다.

언더우드 집안의 묘비들

김주항과 그의 아내 아그네스 데이비스 김의 묘비. <한국에 시집온 양키처녀>(1986, 뿌리깊은나무)라는 회고록을 펴내기도 했던, 아그네스 데이비스 김은 1900년에 미국에서 태어나 일리노어 여자대학을 나왔고 1927년에는 드루 대학교에서 뒷날 남편이 될 김주항씨를 만났다. 1930년에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같은 대학 사범대학의 링컨 스쿨에서 교편을 잡았다. 1934년에 김주항씨와 결혼하여 한국에서 혼인했다. 한국과 미국에서 살았고, 1953년에 <한국에 시집온 양키처녀( I Married a Korean)를 출간했다. 1961년에 한국에 돌아와 영자신문에 칼럼도 쓰고, 한국의 여러 대학에서 영어회화 등을 가르쳤다. 1979년 전재산을 연세대에 기증하였고, 1982년에 두번째 저서인 <미처 깨닫지 못한 도전(Unrealized Challenge)을 출간한 바 있다.

양화진 묘지를 처음 관리한 분은 최봉인이었다. 그는 묘역 관리인의 인연으로 예수를 믿어 서교동교회의 창립교인과 제1대 장로로 피택되어 인생을 교회와 묘역관리를 위항려 봉사하다가 이곳에 묻혔다.

이 지역은 한강의 아름다움을 조망할 수 있는 곳이고, 또 옛날부터 정자가 많았다. 초기 천주교도들이 순교한 곳(절두산)이기도 하고, 김옥균이 다시 능지처참 당한 역사적 사건의 현장이기도 하지만, 한말부터 한국의 개화에 공헌하고, 누구보다도 한국과 한국인을 사랑했던 사람들이 영원한 안식을 취하는 곳이기도 하다.

헐버트박사의 묘비. 헐버트 박사는 1886년(고종23년) 소학교 교사로 초청을 받고 내한, 육영공원(育英公院)에서 외국어를 가르쳐다. 1905년 을사조약 후 한국의 자주독립을 주장하여, 고종의 밀서를 휴대하고 미국에 돌아가 국무장관과 대통령을 면담하려 했으나 실패하였다. 1906년 다시 내한 <한국평론>을 통해 일본의 야심과 야만적 탄압을 폭로하는 한편, 고종에게 화란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보내도록 건의하기도 했다. 1908년엔 미국 매사추세츠에 정착하면서 한국에 관한 글을 썼고, 1919년 삼일운동을 지지하는 글을 서재필이 주관하는 잡지에 발표하였다. 대한민국 수립 후 1949년 국빈으로 초대를 받고 내한하였으나, 병사하여 양화진에 묻혔다. 저서에 <한국사>(2권), <大東紀年>(5권), <대한제국멸망사(The Passing of Korea> 등이 있다.



Posted by 행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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