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교육이 미래" 9개 국가에 학교 113개 세워준 '구호천사'

[중앙일보] 입력 2015.04.25 00:22 / 수정 2015.04.25 00:26

[세계 속으로] 자선사업하는 수퍼모델 넴코바
20세 때 길거리 캐스팅으로 데뷔
베네통·불가리 등 명품 광고 모델
36세인 올해도 속옷 브랜드와 계약

 
세계적 수퍼모델 페트라 넴코바(36)에겐 생일이 두 개다. 하나는 6월 24일. 그는 1979년 이날 체코의 카르비나에서 태어났다. 또 하나는 12월 26일. 2004년 태국의 카오락에서 ‘다시’ 태어난 날이다. 둘째 생일이 없었다면 그는 그저 그런 모델에 불과했을 거다. 할리우드 배우 숀 펜, 영국 가수 제임스 블런트, 영국 배우 제이미 벨만과의 스캔들로 가십을 장식하거나 지난해 칸 국제영화제 레드 카펫에서 실수로 드레스가 흘러내릴 뻔한 해프닝의 주인공이거나.

 그는 2004년 12월 26일 인도양 쓰나미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이후 부상과 트라우마를 털고 재기했다. 계기는 자선활동이었다. 쓰나미 1년 후인 2005년 해피하츠펀드(Happy Hearts Fund·HHF)를 만들었다. 자연재해로 무너진 제3세계에 학교를 다시 짓는 사업을 펼치는 단체다.

 넴코바는 지난 16일(현지시간)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열린 세계여행관광협회(WTTC) 글로벌 총회에서 HHF의 대표로 참석했다. ‘자선을 통한 재창조’라는 주제로 자신의 비전을 밝혔다. 미국 방송사 CBS의 피터 그린버그와의 대담 형식이었다. SNS를 통해 질문을 미리 받았다. 15~16일 이틀간 열린 행사는 ‘관광업계의 올림픽’이라 불린다.

페트라 넴코바는 “예전엔 늘 무거운 게 어깨를 짓누르는 기분이었다. 2004년 이후 그 짐을 덜었고 지금 더 행복하다”고 말했다. [사진 WTTC 사무국]

 -당신의 자선사업은 응급구호(first response)와 다르다.

 “맞다. 응급팀이 철수하면 보통 자연재해 피해 지역에 대한 지원이 끊긴다. 이런 모습을 너무 많이 봐왔다.”

2013년 칸 국제영화제 레드 카펫 위의 페트라 넴코바. 그는 필리핀과 인도네시아에서 자연재해로 부서진 학교를 다시 짓는 사업을 벌이고 있다. 지난해 아이티의 전 총리 로랑 라모트와 교제 중인 것으로 보도됐다(위부터). [HHF·AP=뉴시스]
 HHF는 2005년부터 24일 현재까지 9개 국가에서 113개의 학교를 재건했다. 5만 명의 학생이 혜택을 봤다. 학교 하나를 짓는 데 16만 달러(약 1억7300만원)가 든다. 그는 ‘행복한 마음들(Happy Hearts)’이란 이름에 대해선 “다른 사람을 도우면 그들의 마음을 행복하게 만들고, 동시에 당신의 마음도 행복해진다”고 설명했다.

 HHF가 지금까지 1430만 달러(약 155억원)의 기부를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톱모델로서 넴코바의 브랜드 파워 덕분이다. 스위스 시계 쇼파드와 화장품 크리니크 등 명품 브랜드가 HHF와 협업한다. 그는 20세 때 길거리 캐스팅을 통해 모델이 됐다. 2002~2006년 ‘스포츠일러스트레이티드(SI)’의 수영복 모델로 선정됐다. SI의 수영복 모델은 그해 패션계 최고의 모델이 뽑힌다. 베네통·불가리·카르티에·클라린스 등의 광고 모델로도 활동했다. ‘엘르’ ‘코스모폴리탄’ 등 패션잡지 표지에도 그의 사진이 실렸다. 올해로 모델로선 나이가 많은 편인 36세이지만 영국의 속옷 브랜드인 얼티모와 계약했다. 2013년엔 ‘비 더 라이트 NY(Be The Light NY)’란 인테리어 소품 브랜드를 론칭했다. 수익은 HHF의 사업에 쓰인다.

 -학교는 지역사회에 어떤 의미인가.

 “학생들은 학교에서 트라우마를 치유할 수 있다. 미래를 위해 교육을 받는다. 학생들이 학교에 다니면 학부모는 일을 나갈 수 있어 가족을 부양할 수 있다. 괜찮은 학교를 다시 세우면 다른 곳에서 사람들이 몰린다. 피해 지역은 점점 경제적으로 나아진다. 이 모든 게 학교 재건이 가져오는 효과다.”

 이어 넴코바는 교육의 힘을 이렇게 설명했다. “2004년 영국 소녀 틸리 스미스는 태국에서 가족과 있었다. 스미스는 지리 수업에서 지진과 쓰나미에 대해 배웠다. 그래서 쓰나미 징조를 본 뒤 가족과 해변에 있던 100여 명에게 경고해 모두의 목숨을 구했다. 교육의 힘은 이런 거다. 교육의 힘은 당신의 아이들뿐만 아니라 부모나 가족이 없는 아이들, 학교에 가지 못하는 아이들에게도 나눠져야 한다. 그 아이들이 우리의 미래이기 때문이다.”

 -재해 복구가 중요하지만 재해 예방이 더 중요하다는 걸 사람들이 자주 잊는다.

 “중요한 과제는 집과 학교를 더 안전하게 지어야 한다는 점이다. 세계은행에 따르면 재해 예방에 쓰인 1달러는 재해 복구에 쓰이는 7달러의 값어치를 한다고 한다. 2004년 이후로 자연재해는 더 늘었고, 앞으로 더 많이 늘어날 거다. 사전(proactive) 대책이 필요하다.”

 -한 개의 학교를 다시 세우려면 무엇이 필요하나.

 “피해 지역의 개인과 회사 차원의 파트너십이다. 비정부기구(NGO)와 지방정부의 협력도 필요하다. 우리는 입찰을 통해 피해 지역의 업체에 공사를 맡긴다. 피해 지역은 공사를 통해 경제적 이익을 얻는다. 만일 적절한 파트너를 찾을 수 없다면 그 지역엔 안 간다. 또 가장 중요한 일은 지역 주민들이 동참하는 거다. 새 학교를 지을 땅을 알아보거나 지역에서 모금을 해야 한다. 그 학교는 우리의 학교가 아니라 지역 주민들의 학교이기 때문이다.”

 -9개국이 어딘가.

 “처음 태국에 한 학교로 시작했다. 점차 인도네시아·필리핀·페루·멕시코·칠레·아이티·콜롬비아로 늘렸다. 2012년 허리케인 샌디로 피해를 본 미국의 학교도 도왔다.”

 2004년 12월 26일 태국의 카오락 해변. 넴코바는 약혼자인 영국의 사진작가 사이먼 애틀리와 휴가를 보내던 중이었다. 그는 후에 이렇게 말했다. “쓰나미에 대해 들어본 적도 없었다. 갑자기 거대한 물결이 몰려왔다. 가까스로 지붕으로 올라갔다. 사이먼이 멀어져 가는 걸 지켜봤다. 물이 더 차올라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그때 ‘지금이 죽을 때라면 어쩔 수 없지’라고 생각했다. 마음이 편안해졌다. 기적적으로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바다 쪽으로 휩쓸려 가자 손을 뻗쳐 야자나무를 간신히 잡았다. 많은 이가 야자나무를 놓쳤다. 야자나무에 매달린 사람들도 시간이 지나면서 힘에 부쳐 버티지 못했다.”

 8시간 만에 넴코바는 구출됐다. 당시 28만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사이먼의 시체는 석 달 후 발견됐다. 넴코바는 청중에게 “자연재해를 겪은 뒤 당신은 뭐든지 할 수 있게 된다. 대자연 속에 한낱 작은 존재라는 걸 깨닫게 된다”고 말했다.

 -지원 국가를 더 늘릴 생각인가.

 “지난달 인도네시아 반둥에서 2개의 학교를 새로 열었다. 이 학교들은 2009년 지진 때 무너졌다. 6년 전 일이다. 두 학교의 교장 선생님들은 개교식장에서 울었다. 교장과 교사, 학생, 학부모 모두 지진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다. 집과 학교도 부서졌다. 그런데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그 후 6년간 더 큰 고난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은 가건물에서 교구나 학용품도 없이 힘들게 학교를 지켰다. 6년이라면 초등학교 교육기간이다. 당분간 9개 국가에 집중할 계획이다.”

 -요즘 자원봉사 관광(volunteer tourism)이나 봉사활동(volunteerism)을 떠난 사람이 많다.

 “우리 사업 중 하나는 가족과 함께 자원봉사 휴가를 떠나는 거다. 이를 통해 아이들에게 진짜 세상을 보여줄 수 있다. 아이들은 한 주나 반 주 정도 지역의 학교에서 문화를 배우고 재건사업을 도우며 그곳 아이들과 논다. 이런 기회를 더 늘리려고 한다.”

 넴코바는 “지금이 아니라 더 먼 장래를 위해 의식 있고 현명한 결정을 해야 한다”며 이렇게 강조했다. “앞으로 더 많은 재해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일어날 것이다. 이제 자연재해는 우리 모두의 문제다. 더 이상 제3세계의 어느 이름 모를 해변의 문제가 아니다.”

마드리드=이철재 기자 seajay@joongang.co.kr

[S BOX] 헵번·졸리·키드먼 … 자선활동 미녀 배우들 많아

왼쪽부터 오드리 헵번, 다이애나 비, 앤젤리나 졸리.

아름다움은 세상을 바꾼다. 유명인(celebrity)이자 자선가(philanthropist)로 불리는 미녀의 원조는 오드리 헵번(1929~93)이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때 식량난을 겪었다. 이 경험 때문에 아프리카·남미·아시아의 어린이를 적극적으로 도왔다고 한다. 유니세프의 대사로 활약했다. 대장암 투병 중인 92년 소말리아를 찾아 봉사활동을 했다. 노년의 헵번이 젊었을 때보다 더 예쁘다고 불리는 이유다.

 영국의 다이애나 왕세자비(1961~97)도 자선에 적극적이었다. 87년 4월 에이즈 환자의 손을 잡는 모습이 전 세계 언론에 실렸다. ‘손만 대도 에이즈에 감염된다’는 오해를 불식시켰다. 국제적십자사의 지뢰 제거 운동에 참여했다. 이런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전 세계인 모두 아쉬워했다.

 앤젤리나 졸리(39)가 자선가로 변신한 건 2001년 영화 ‘툼 레이더’를 캄보디아에서 찍으면서다. 그는 촬영지에서 전쟁의 후유증을 목격한 뒤 유엔 난민기구(UNHCR)에 연락했다. 이후 전 세계의 난민 캠프를 찾아다녔다. 유니세프 긴급구호에 100만 달러를 기부했다. 브래드 피트와 결혼해 세 아이를 낳았지만 캄보디아·베트남·에티오피아에서 세 아이를 입양했다. 곧 시리아 국적의 소녀를 일곱째 아이로 입양할 계획이다. 졸리는 “영화 한 편을 더 찍고 은퇴한 뒤 인도주의 활동과 정치·사회적 문제에 더욱 힘쓰고 싶다”고 말했다.

 니콜 키드먼(47)은 전 세계 어려운 형편의 어린이를 위한 모금에 참여했다. 이 공로로 2004년 유엔 ‘세계의 시민’으로 선정됐다. 샌드라 불럭(51)과 미국 드라마 ‘위기의 주부’에 출연한 에바 롱고비아(40)도 자선활동에 열심인 배우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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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사고로 도레미도 못하던 그가 웃었다

[중앙일보] 입력 2015.04.24 00:41 / 수정 2015.04.24 01:03

성악 남자 1위 서준호
“노래 포기 못한다” 혹독한 재활
“오페라 무대에도 도전할 것”

           

소프라노 조수미, 베이스 연광철 등 클래식 스타를 배출한 중앙음악콩쿠르. KT&G와 함께 하는 제41회 대회가 22일 막을 내렸다. 7개 부문 561명이 참가해 22명이 수상했다. 음악계를 주도하게 될 영광의 얼굴들을 만났다.



성악 남자 부문 1위를 차지한 서준호씨. 그는 “마지막이라 여기고 도전했다”고 말했다. [김상선 기자]
“성악 남자 1위, 서준호!”

22일 중앙음악콩쿠르 시상식에서 그의 이름이 불렸다. 서준호(31)씨는 불편한 걸음걸이로 무대에 올랐다. 다리를 절었고 표정은 침착했다. 그러나 “마음 속으로 끝없이 울고 있었다”고 했다.

 2004년 큰 교통사고로 목 이하의 몸이 마비됐다. 추계예대 성악과 2학년 때다. 기계의 도움을 받아야 숨을 쉴 수 있었던 기간이 100일이다. 병원에서 “평생 누워 살아야할 것 같다”는 진단을 받았다. 그러나 100일 만에 발가락을 움직였고, 그는 일어났다. 설명할 수 없는 이유로 신경이 살아났다고 했다. 그리고 다시 노래했다.

 퇴원 직후에는 ‘도레미’도 못 불렀다. 목뿐 아니라 호흡과 관련된 모든 근육이 말을 듣지 않았다. 발성의 기본으로 돌아가 매일 혹독한 연습을 했다. “못 일어날 거란 진단을 받고서도 노래를 그만하겠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노래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발성 재활 4년 만에 다시 노래를 했다.

 무대의 문턱은 높았다. 지난해엔 중앙음악콩쿠르에 도전했다가 1차 예선에서 탈락했다. 또 불편한 걸음걸이 때문에 오페라 무대는 스스로 포기했다. 서씨는 “스승 김영미 선생님이 내 인생을 바꿨다”고 말했다. 한국예술종합학교(한예종) 대학원에서 만난 스승이다. 김영미 교수는 서씨의 잘못된 버릇을 고치고 소리에서 힘을 빼 자연스럽게 노래하도록 가르쳤다. 그러나 더 큰 가르침은 음악에 대한 것이었다. 서씨는 “노래 내용 속의 캐릭터를 해석해 몰입하는 방법을 배웠다”고 말했다. 이번 콩쿠르에서도 이 방법이 큰 힘이 됐다고 했다. 지난해 1차 탈락자가 올해 우승자로 올라섰다.

 “행동이 불편하지만 오페라 무대에도 못 설 이유가 없다는 생각도 스승에게 배웠다”고 말했다. 그는 한예종 대학원에서 오페라 공부를 본격적으로 하고 있다. “무대 위 동선에 대해 남들보다 4~5배 많이 생각하고 먼저 움직인다. 무엇보다 나는 내 몸을 사랑하고, 오페라는 몸으로만 하는 게 아니라는 깨달음을 얻게 됐다.” 그는 대학원 졸업 후 미국 유학을 떠날 계획이다. “인간에 관한 수많은 이야기가 있는 오페라 무대를 목표로 다시 한 번 기적을 이루고 싶다.”

  김호정 기자 wisehj@joongang.co.kr

“무대 공포증 이기려
더 지독하게 연습했다”
바이올린 1위 배창훈


배창훈(20)씨는 무대 공포증에 시달린다. “전력 질주할 때만큼 심장이 뛰고, 활을 끝까지 누를 수 없을 정도로 떨린다”고 한다.

증상은 고등학교 시절 시작됐다. “김남윤 선생님을 사사하게 됐는데 같이 배우는 친구들이 잘하는 것을 본 후로 무대가 두려웠다.” 이번 콩쿠르에서도 엄청난 긴장감과 싸웠다. 하지만 이제 공포증을 인정하고 함께 가는 법을 배운 듯하다.

“무대 위에서 실력 발휘를 70% 정도 밖에 못하기 때문에 연습을 엄청나게 한다. 또 긴장감을 잊으려 음악에 집중하려 더 노력하게 된다.” 콩쿠르 본선에서 땀이 바닥에 떨어질 정도로 긴장했지만 1위를 차지했다. 그는 “오히려 떨리는 것에 감사해야할지도 모르겠다”며 웃었다.

팔에 이상 생길 만큼 연습
대학생들 제친 당찬 고3
첼로 1위 허자경


고3인 허자경(18)양은 대학생·대학원생 본선 진출자들을 제치고 1위에 올랐다. 게다가 콩쿠르를 한 달 앞두고 독주회까지 열었던 ‘강심장’이다. 콩쿠르에 집중할 시간은 상대적으로 부족했다.

허양은 “미리 잡혀있던 독주회여서 어쩔 수 없었다”며 “슈베르트부터 쇼스타코비치까지 네 작곡가의 소나타를 한 무대에서 연주했다”고 말했다.

무리한 연습 탓에 팔에 이상까지 왔다. 양팔 모두 힘을 잘 줄 수 없어 연주가 어려웠다. 허양은 “팔이 아프다 보니 본선 무대에서 오히려 마음이 비워지더라”며 “점수·등수에 상관하지 않고 음악에 집중하게 됐다”고 말했다. “연습은 괴롭지만 무대 위에서 박수 받는 게 정말 좋다”는 연주자다.

2년 전 도전 땐 3위
“지치지 않는 체력 강점”
플루트 1위 이주형


이주형(24)씨는 2년 전 중앙음악콩쿠르에서 3위를 한 후 두 번째 도전해 1위에 올랐다. “당시 군대 제대 전이어서 콩쿠르 준비를 마음껏 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남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혼자 음반만 들으면서 연습해 출전했었는데 제대만 하면 정말 잘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이번 대회에서 2위 없는 1위로 실력을 입증했다. 경남 마산이 고향인 이씨는 덕원예고에 진학하면서 ‘서울 유학’을 와 혼자 생활했다. “흔히 음악 공부엔 부모 뒷바라지가 중요하다고 하지만 혼자서도 잘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10시간씩 연습해도 지치지 않는 체력이 가장 큰 장점”이라는 이씨는 졸업 후 미국·독일 유학을 고려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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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시계 멈추고 떠난 배용연·오빛나 부부, 2년간의 안식년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2015.04.24 00:01

Case 1 2012, September. 배용연·오빛나 부부

            

[여성중앙] Time Poor or Rich "당신도 시간 빈곤자인가요?"




배용연·오빛나씨 부부는 2012년 9월부터 2014년 5월까지 세계 일주를 했다. 여행을 떠나기 전 남편 배용연씨는 포스코 계열 회사인 소프트웨어 마이다스아이티에서 7년 차 대리로 일했고, 아내 오빛나씨는 LG전자에서 5년 차 대리로 근무하며 남부럽지 않게 바쁜 일상을 살았었다.

오전 9시에 출근해서 빨라 봐야 밤 11시였고, 평균 새벽 1시가 되어야 퇴근하곤 했다. 주말에도 출근하는 날이 많았고, 휴가라도 내려고 하면 눈치가 보여 연차 한번 속 편히 쓸 수가 없었다. 여름휴가도 주말을 포함해 사나흘 가는 게 고작이었기 때문에 직장 생활 7년 만에 녹다운이 되었다.

얻은 것이라곤 10kg 가까이 불어난 체중뿐이었다. 그러다 기계처럼 돌아가던 시간을 멈추기로 결심했다. 여러 가지 사정이 맞아떨어졌다. 그즈음 아내 오빛나씨 또한 전에 다니던 외국계 회사와 비교해 합리적이지 못한 일들이 잦아 스트레스가 커 지쳐 있었던 것.

국내 대기업으로 이직할 때만 해도 일을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이쯤에서 잠깐 쉴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결혼하고 6개월쯤 됐을 때의 일이다.

“그날은 일이 그나마 일찍 끝나서 밤 11시쯤 집에 갔어요. 아내는 역시나 그날도 회사 얘기를 하기 시작했어요. ‘연차를 쓰는데 왜 사유와 목적지를 적어내야 해? 이해할 수 없어’ 이러면서요. 저한테는 이미 당연한 일이었는데 아내는 아직도 이해를 못 하겠다며 불만을 토로했죠(웃음). 그러더니 더 이상은 이렇게 못 살겠다면서 ‘다 집어치우고 여행이나 가자’고 하더라고요. 저는 졸려서 잠기운에 그러자고 했어요.”

정신을 차리고 진지하게 고민을 시작한 건 그다음이었다. “일단 현실적인 상황을 따져봤어요. 저 같은 경우는 회사에서 팀장을 시키니 마니 할 때였고, 아내도 다른 회사로부터 이직 제안을 받은 상태였어요. 그대로 진행된다면 앞으로 몇 년간은 전보다 더 열심히 일해야 할 테고, 그러다 그 사이에 아이가 태어난다면 평생 배낭여행을 가기는 글렀다 싶었죠. 결론은 책임이 조금이라도 작을 때 떠나자는 것이었어요.”

경비는 전세금과 두 사람의 퇴직금으로 충당하기로 했다. 계산은 간단했다. 하루에 10만원씩으로 계산한 예상 경비에 비상금 1000만원을 더해 약 9000만원을 세계 일주 비용으로 잡았다. 그 돈을 뺀 나머지 돈은 남겨두었다가 돌아와서 원룸을 구하는 데 쓰기로 했다.

“아직 아이가 없고 젊으니까 돌아와서 구직 활동을 하면 어렵지 않게 재취업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남들보다 몇 년 뒤처지는 게 아닐까도 걱정되긴 했지만, 2년이라는 시간을 투자해서 앞으로의 삶을 바꿀 수 있다면 충분히 선택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 더 컸어요.

2년간 스스로의 힘으로 세계 일주를 해낸다는 것 자체로 큰 성취감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았고, 그 힘으로 뭐든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어요.”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 중동을 거쳐 북아프리카에 머무는 동안 1년이 지났다. 그다음에는 3개월간 스페인에서 지내며 어학연수를 했다. 그 뒤에 있을 6개월간의 중남미 코스에 대비한 것이었다. 언어가 통하면서부터는 여행의 질이 전과는 확연히 달라졌다.

“스페인에서 미국인 커플을 만났는데 그들도 직장을 그만두고 아이들과 여행 중이라고 하더군요. 각각 변호사와 회계사로 일하느라 아이들과 하루 1시간 이상 놀아준 적이 없어서 처음엔 직장을 그만두고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게 힘들었대요.

그런데 여행을 하며 아이들과의 관계가 조금씩 좋은 쪽으로 변해가는 것을 느끼고 있다더라고요.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가 그때 떠나지 않고 계속 살던 방식대로 살았다면, 돈은 많이 벌었을지 몰라도 아마 이들과 똑같은 고민을 하며 살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두 사람은 현재 세계 일주를 마치고, 네덜란드에 정착해 살고 있다. 남편 배용연씨가 그곳에 있는 회사에 취업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회사 다니던 시절, 네덜란드에 있는 협력 업체에 파견 근무를 간 적이 있어 세계 일주를 하는 중에 당시 함께 일했던 동료들을 찾았어요.

함께 식사를 하는데, 여행을 마치면 뭘 할 거냐고 묻더라고요. 계획 없다고 했더니 자기들 회사로 올 생각이 있으면 연락하라는 거예요. 이후 한국에 돌아와 구직 활동을 하는데 고민이 되더군요. 다시 한국에서 회사 생활을 할 것인가, 아니면 네덜란드에 있는 회사로 갈 것인가.

아내와 상의한 끝에 네덜란드에 가기로 결정했어요. 여행하는 것과 사는 것은 또 다르잖아요. 외국에서 살아볼 수 있는 새로운 기회라고 결론을 내린 거죠. 세계 일주를 하지 않았다면 얻지 못했을 기회예요.”

가방 4개로 2년간의 세계 일주를 해낸 경험자답게 네덜란드행 이삿짐도 아주 단출했다. 경험을 통해 많은 짐이 필요하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과 비교하자면 몸도 마음도 가볍게 살고 있는 느낌이에요. 네덜란드에서 지낸 지 6개월째인데 남편이 출근해서 일하는 동안 저는 집에서 책을 써요. 여행 이야기를 정리해서 엮어보려고요. 부지런히 마무리하면 6월에는 출간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여러모로 일상이 많이 달라졌죠.”

두 사람에게 ‘만약 2년 전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다면’ 어땠을지 물었다. “5kg쯤 살이 더 쪘을 테고, 건강도 많이 안 좋아졌을 거예요. 부부 사이도 지금만큼 좋지 않았을 것 같고요. 2년 동안 하루 24시간을 붙어 있다 보면 정말 대화를 많이 하게 되거든요. 아마 5년간의 연애 시절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눈 것 같아요.

몰랐던 점도 알게 되고, 이해하게 되는 것도 많아지고…. 정말 특별하고 끈끈한 사이가 되지 않을 수 없더라고요.” 여행지에서 마주치게 되는 상황들은 일상적이지 않은 것이 많다. 그러한 상황들을 함께 헤쳐 나가면서 이런 생각을 했단다. ‘배낭 메고 전 세계를 떠돌아다녔는데 뭔들 못 하겠어!’

배용연·오빛나 부부는… 대기업에 다니다 결혼 후 회사를 그만두고 세계 일주를 감행. 2년간의 세계 여행을 마치고 지난여름 한국으로 돌아왔는데 이후 남편이 네덜란드에 있는 회사에 취업하면서 현재 두 사람은 네덜란드에 머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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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환자 꼭 살린다"…확고한 신념으로 일군 시골병원의 기적

[중앙일보] 입력 2015.04.20 00:01 / 수정 2015.04.21 07:29

화순전남대병원은 국내 톱5의 수술 실적, 빠른 진료와 수술, 숲을 배경으로 한 자연환경 등 암 치료에 최적화된 병원이다. 사진은 병원 ‘치유의 숲’을 거니는 의료진과 환자의 모습.


가족이나 가까운 지인이 갑자기 암 진단을 받았을 때 어느 병원을 떠올릴까. 병상당 암 수술 건수 국내 최다(最多), 암 치료 분야 모든 적정성 평가 1등급, 국내 톱5의 6대 암 수술 실적 …. 국내 최고의 타이틀을 보유한 병원이 서울의 대형병원이 아니라면 고개를 갸우뚱할지 모른다. 그것도 시골 한적한 곳에 자리잡고 있는 병원이라면 더욱 그렇다. ‘화순전남대병원’. 실력만으로 빅5 병원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암 치료 분야의 숨은 강자다.

글=류장훈 기자 ryu.janghoon@joongang.co.kr, 사진=서보형 객원기자

대장암 복강경 수술 중인 의료진. 대장암 5년 생존율은 수도권을 훌쩍 넘어선다.
서울 용산역에서 KTX를 타고 광주 송정역에 내려 다시 30여 분을 달려 도착한 곳. 한적한 산자락에 화순전남대병원이 보인다. 최근 서울~광주 간 KTX 개통으로 서울에서 병원까지 두 시간으로 줄었다. 병원으로 들어가는 3㎞가량의 길 양편으로 벚꽃이 흐드러지고, 병원 뒤편으로 무등산과 만연산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다. 들이마시는 공기만으로도 힐링이 되는 느낌이다. 병원 입구에 들어서면 넓은 진료 공간이 한눈에 들어온다. 모든 치료 과정이 한 층에서 이뤄질 수 있게 환자 편의를 고려한 설계다. 한적한 주변 환경과는 대조적으로 병원 안은 환자로 북적거린다. 그러나 대기환자는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검사·진료 프로세스가 막힘이 없고 물 흐르듯 진행된다. 환자 밀도가 가장 높은 암병원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다. 그래서 화순전남대병원은 단순히 암병원이 아닌 ‘암 치유병원’으로 불린다. 수도권에서도 환자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이유다.

한국인 6대 암 수술 빅5

실제로 화순전남대병원은 위암·폐암·간암·대장암·유방암·갑상선암 등 한국인 6대 암 수술 실적이 한 해 2474건(2010)에 달한다. 진료 실적 면에서 국내 최고 수준이다. 서울 4대 병원에 이은 전국 다섯 번째다.

병원 규모를 더하면 이 수치의 의미는 확 달라진다. 서울 4개 대형병원의 병상 수는 2000병상 내외. 반면에 화순전남대병원은 700병상 규모다. 병상당 암 수술 건수가 연 3.5건으로 전국 1위다.

심평원 평가 1등급 행진

과거엔 ‘암환자는 서울로 가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있었다. 이러한 공식을 깬 것이 화순전남대병원이다. 환자가 대기하지 않고 치료 성적도 좋으니 굳이 시간과 경비를 지출하면서 서울의 대형병원을 찾을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경기도 파주에 사는 김모(63)씨. 그는 인근 병원에서 대장암 3기 진단을 받은 뒤 최근 화순전남대병원에서 수술을 받았다. 병원 선택을 고민했지만 주위의 권유로 화순행을 택했다. 김씨는 “암 진단을 받고 초조했는데 신속하게 수술을 받았다”며 “수술 결과도 만족스럽고, 자연과 인접해 있어 수술 경과도 더 좋은 것 같다”고 말했다.

의료의 질도 뛰어나다. 수술 성적은 병원과 의료진의 치료 경험을 의미하고, 높은 의료의 질로 이어진다. 화순전남대병원은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전국 43개 상급 종합병원을 대상으로 실시한 진료량 평가(2014)에서 위암·간암·췌장암·식도암 수술 모두 최고등급인 1등급을 받았다. 특히 고난도로 알려진 조혈모세포 이식수술(혈액종양 치료법)은 사망률이 전국 상급 종합병원(5.46%)의 5분의 1 수준인 1.16%에 불과했다.

심평원이 매년 발표하는 암별 치료적정성 평가에서도 1등급 행렬은 계속된다. 대장암 분야에서 2012년 암 치료 적정성 평가가 도입된 이후 3년 연속 1등급을 획득했다. 유방암은 2년 연속, 폐암은 첫 평가에서 각각 1등급을 받았다. 생존율은 당연히 높다. 대장암이 대표적이다. 화순전남대병원의 대장암 환자 5년 생존율은 평균 68.2%다. 수도권 병원(65.0%)보다 높은 수치다. 수술 환자의 5년 생존율(79.8%)도 수도권 병원(74.7%)보다 높다.

당일 검사, 1주일 내 수술

화순전남대병원은 신속진료시스템을 가동했다. 지금은 많은 병원이 도입하고 있는 협진시스템을 2004년 개원 당시부터 시작했다. 빠른 진료와 수술을 최우선 목표로 삼았다.

CT(컴퓨터단층촬영)·MRI(자기공명영상촬영)·PET(양전자단층촬영)·내시경·혈액검사·병리검사 등 모든 검사를 하루에 받을 수 있도록 했다. 또 수술이 시급하면 1주일 안에 수술을 마치고 퇴원할 수 있도록 했다. 기존 의료진의 관행과 시스템을 획기적으로 개선해 진료 지연 시간을 최소한으로 줄였다.

국립대병원 첫 JCI 인증

화순전남대병원은 2010년 전국 국립대병원 중 최초로 JCI(국제의료기관평가위원회) 인증을 받았다. JCI 인증은 1300여 개 항목에 대해 평가한다.

환자의 안전과 진료의 품질을 결정하는 진료의 전 과정을 글로벌 표준에 맞추도록 검증한다. 외국 환자들이 국내에서 진료를 받을 때 JCI 인증 여부부터 확인하는 이유다. 2013년에는 JCI 재인증까지 받았다.

병원이 자기검열시스템을 갖췄다는 의미다. 이런 성과로 외국인 환자가 늘면서 해외 환자 유치 증가율 1위(2013)를 달성했다.

‘치유의 숲’서 심신 안정

화순전남대병원은 암 치료 병원으로는 이례적으로 도시에서 벗어났다. 화순은 75%가 산림지대다. 자연에 인접한 환경은 암환자의 면역력 강화와 심리적 안정을 돕는다. 항암치료와 함께 휴양을 겸할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이다. 환자는 자연 속에서 불안한 마음을 내려놓는다.

병원이 보유한 3만9669㎡에 달하는 ‘치유의 숲’이 병원 산책로와 연결된다. 환자는 휠체어를 탄 채 숲 속을 산책할 수 있다. 주변 환경과 의료수준 때문에 화순전남대병원은 ‘한국의 메이요클리닉’으로 불린다.


인터뷰 화순전남대병원 조용범 원장
“7년 연속 우수병원 평가 … 미국 유명 미디어에서도 추천하죠”


화순전남대병원은 2004년 암 치료를 위해 탄생한 병원이다. 지역 암환자를 수도권으로 빼앗기던 시기다. 우려도 많았다. 접근성이 다소 떨어지는 곳에서 과연 성공하겠느냐는 눈초리도 있었다. 하지만 전화위복이 됐다. 환자에게 집중하는 시스템과 의료진, 치유가 가능한 자연환경은 암병원으로 최적의 요건을 만들어줬다. 화순전남대병원은 공공병원의 대표적인 혁신사례·성공신화로 꼽힌다. 조용범(사진·이비인후과 교수) 원장에게 암 전문병원으로서의 원동력과 향후 계획에 대해 들었다.

-화순전남대병원의 이력이 화려한데.

 “개원 당시에는 고민이 많았다. 지역 개인병원들의 반발도 컸다. 하지만 결국 진료 대상이 달라 협조가 잘됐다. 암 특화병원이라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환자들이 찾기 시작했다.”

-성공할 수 있었던 힘은.

“의료진의 의지가 강했다. 가장 열정적이고 왕성한 활동을 하는 40~50대 의사들이 포진했다. 밤늦게까지 암 수술이 이어졌다. 수술 성적이 높아졌고, 환자가 잇따랐다. 치료를 잘한다는 입소문이 퍼져 ‘화순=암’이라는 공식이 생겼다. 친절함도 한몫했다. 점차 의료진에 대한 환자의 충성도가 높아졌다.”

 -진료 철학이 있다면.

 “병원장에 취임하자마자 신속진료를 추구했다. 빨리 환자를 보고, 빨리 결과를 알려주는 거다. 암환자는 절박하고 급하지 않나. 그걸 덜어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신속진료센터를 만든 것도 이 때문이다. 의료진엔 부담이지만 환자를 위해서라면 필요하다. 기획재정부 공공기관 고객만족도 조사에서 7년 연속 우수병원으로 선정됐다. ‘빠르고, 친절하고, 안전하게’라는 슬로건은 우리가 추구하는 시스템이다.”

-타 지역 암환자도 많이 찾는데.

“전체 환자 10명 중 1명은 다른 지역에서 온다. 수도권·충청·경상·강원 등 각지에서 온다. 외국인 환자도 찾아온다. 러시아·중국·미국 환자가 치료를 받는다. 외국에서도 평가가 좋다. 지난해 미국 유명 인터넷미디어인 ‘PR 웹’이 ‘아시아를 대표하는 암 전문병원’으로 우리 병원을 추천하기도 했다.”

-앞으로의 계획과 전망은.

“최근 KTX 호남선 개통으로 수도권의 암환자도 자연치유 환경의 암병원에서 치료받기가 수월해졌다. 수도권 환자가 더욱 늘 것으로 기대한다. 조만간 우리 병원에 전남대 의대가 들어온다. 또 독일 프라운호퍼연구소와 항암제 개발 공동연구를 진행 중이다. 이런 연구기반을 바탕으로 화순백신산업 특구와 연계해 바이오메디컬 클러스터의 핵심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류장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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