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누구신가? (요1:1~18)

조준안 여주교회


구약 신명기에 하나님은 오직 하나이신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면서 성자와 성령하나님이 계시다. 우리의 이성이나 논리로 이해하거나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다. 우리가 이것을 이해하거나 설명할 수 있다면 하나님의 수준에 이르러야 한다. 그러나 한 가지 하나님께서 하나라는 말은 숫자적인 개념보다 본질에 있어서 하나라는 말이다. 하나님만이 가지실 수 있는 본질을 세분이 가지고 계시다. 부부가 하나라는 말은 본질에 있어서 하나라는 말이다. 인격은 서로 구별되고 다르다.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하여 많은 오해를 한다. 예수님을 잘못 알고 있다. 자기 좋을대로 예수님을 믿고 있다. 예수님을 정확히 모르면 모든 것은 허사다. 인간의 가장 큰 문제는 죄 문제이다. 우리의 죽음과 함께 영원을 지옥에서 보낼 것인가, 천국에서 보낼 것인가를 해결해 주는 분이 예수님이시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을 한 훌륭한 분으로만 알고 있어서 그분이 하나님 되심을 부정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그 예수님이 하나님이신 것을 말씀하신다. 이 믿음이 천국과 지옥을 가른다. 인간은 믿음 없이 삶을 이룰 수가 없다. 그런데 성경에서 나타난 믿음이란 영적인 진리를 수용하는 믿음이므로 하나님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다면 반응할 수 없을 것이다. 요한복음에 믿음이라는 단어가 많이 나타난다. 믿음이란 무엇인가? 믿음은 사람을 두 부류로 갈라놓는다.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는 사람과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는 사람으로 구분한다.

1. 믿음의 기능과 역할은 무엇인가?

믿음이란 어떤 요소들이 있는가? 첫째로 앎의 요소가 있다. 둘째로 동의하는 요소가 있다. 셋째로 의뢰하는 요소가 있다. 롬10장17절에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다고 하였다. 믿음은 하나님 말씀에 나타난 진리를 믿는 것을 말한다. 믿음의 기능과 역할은 무엇인가? 믿음을 설명할 때 가장 중요한 단어가 요1장14절에 ‘본다’는 말이다. 믿음은 보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영적으로 본다는 의미이다. 믿음은 영혼의 눈이다. 우리의 몸의 지체 중에 하나를 잃는다면 큰 손실이다. 그러나 모든 지체 중에 가장 큰 손실을 시력을 상실하는 것이다. 눈은 가장 고귀하고 중요한 지체이다. 보는 것은 놀라울 정도로 빨리, 멀리까지 신속히 볼 수 있다. 이 강단에서 전체를 동시에 볼 수 있고, 산 위에서 멀리까지 전체를 눈 깜짝할 순간에 볼 수 있다. 눈은 달과 태양과 별들까지 볼 수 있다. 믿음은 신속하다. 단번에 주신 믿음이다. (유1:3) 천국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지만 믿음은 말씀의 묵상과 함께 단번에 그곳까지 간다. 믿음은 일순간 죽은 영혼을 살려낸다. 믿음은 과거, 현재, 미래를 포착하고 장악하는 능력이 있다. 믿음은 육신의 눈이 볼 수 없는 곳까지 보고 무한한 곳을 본다. 믿음은 하나님까지도 본다. 나의 지각으로 파악할 수 없는 거대한 신비의 세계를 본다. 믿음은 생각에 영향을 미치고 계시를 통하여 사물을 인식하게 하는 능력이 있다. 본다는 것은 단순하다. 배운 자나 못배운 자나 어른이나 아이나 즉각 볼 수 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으면 보게 되는 것이다. 요1장12절에 그 분을 영접하고 믿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2. 믿음의 대상은 누구인가?

우리의 믿음의 대상은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다. 본문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를 말씀해주고 있다. 요1장1절에 ‘태초에’라고 말한다. 이것은 창1장1절에 나오는 ‘태초’보다 훨씬 거슬러 올라가는 영원을 두고 하는 말이다. 우주가 존재하기 전, 시간이 존재하기 전, 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시는 분이시다. 이 우주는 그 시작이 몇 억년이 될지 모르지만 거기엔 시작이 있다. 예수님은 시작이 없으신 분이시다. 그가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시작은 있어도 그 분이 하나님으로서 존재하는 시작은 없으시다. 출3장에 그는 스스로 존재하는 분이시다. 그 누구에게 제한을 받지 않으시는 분이시다. ‘하나님과 함께 계신다.’라는 말은 동등한 위치에서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분이시라는 말이다. ‘여호와증인’들은 여기서 말씀을 God을 그들의 번역인 신세계번역에서 소문자 god로 번역하였다. 그들은 하나님 아버지는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예수님은 많은 신들 중에 피조된 신으로 생각한다. 그들은 성경을 바꿔버린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함께 영원하고 또한 만드신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신데 그 예수님을 그 단어를 바꿈으로 인해서 하나님이 아닌 것으로 여기게 하였다. 창조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을 말한다. 그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지어졌다. 오늘 날도 많은 성경의 내용을 바꾸려고 한다. 세상의 모든 학설은 요동하고 끊임없이 바뀐다. 이 세상에는 진리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 바꿀 수 없고 변할 수 없는 진리들이다.
(1) 예수님을 말씀으로 소개한다. (요1:1) 왜 말씀으로 소개하였을까? 말은 마음의 표현의 수단이다. 또한 전달과 대화의 수단이다.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모든 심중에 있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오신 것이다. 그러므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모든 영광, 사랑, 계획 등을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통하여 계시함으로서 예수님의 별명을 말씀이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 전자제품에 보면 사용 설명서가 있듯이 하나님을 가장 잘 설명하시는 분이 예수님이시다. (요1:1,14,18)

(2) 예수님을 생명으로 소개한다. (요1:4)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니 하나님보다 못하다고 오해를 한다. 그러나 예수님안의 생명은 하나님과 동등한 생명을 가지고 있다. 이 생명은 초 자연적인 생명이요, 본질적인 생명이요, 무한하신 생명이다. 있다 없다 하는 것이 아니다. 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신 생명이다. 헬라어에 비오스라는 단어는 생명을 말하는데 ‘동물, 식물, 사람의 육신의 생명을 말할 때’를 말한다. 그러나 헬라어의 조에라는 말은 ‘하나님안의 생명’을 말한다. 우리가 구원받을 때 얻게 된 영생의 생명을 말한다. 대저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할 때 쓰는 생명이다. (시36:9) 하나님은 부족함이 없으시다. 완벽하시다. 추가할 것이 없는 분이시다. 하나님의 모든 존귀, 영광, 권세를 돌리실 분이다.
(3) 예수님을 빛으로 소개하고 있다. (요1:5) 이 빛은 본질 되고 근원된 빛이시다. 비췄다 안비췄다 하는 것이 아니다. 영원히 비추는 빛이다. 하나님은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하나님은 빛으로 옷을 입으셨다고 하셨다. 하나님은 빛이시니 그에게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 성경은 빛을 완전한 지식을 의미한다. 어둠은 무지를 말한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요, 모든 진리이시다. 또한 하나님께서 빛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거룩을 의미한다. 그 안에 죄가 전혀 없다는 말이다.
1장6절에서 하나님께서 이러한 자신을 하나님의 사람들을 계속 보내서 자신을 계시하셨다. 세례요한을 보내서 예수님을 전파하고 계시다. 그러나 세상은 예수님을 깨닫지도 못하고 영접하지도 않았다. 빛이 어둠의 빛이 되어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요1:5) 주님께서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치 아니하였다. 또한 세상은 그를 알지 못하였다.

3. 믿음이 가져온 놀라운 축복들은 무엇인가?

믿음이란 성령의 주권적인 역사를 말할 때 중생이라고 표현한다(요1;13). 성령이 그 죽은 영혼을 살리시므로 그가 영적인 감각이 살아나고 눈을 뜨고 보게 되고 귀가 열려 들리게 된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고 그분이 하신 사역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 그래서 믿음은 놀라운 은혜이다. 믿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눈을 떠서 봄으로 믿어진다. 또한 믿음이 우리 인간편에서 보면 주님을 영접하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님께서 하나님 되심을 다 보여주었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고 거절하고 십자가에 못박았다.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하나님 되심을 증거하는 말씀과 능력과 부활을 다 보면서도 예수님을 거절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가 그 이름을 믿는다는 것은 그 분이 하나님 되심과 (신성) 그 분이 육신을 입고 오신 것을(인성) (요1:14) 믿는 것이요, 그 분의 은혜로 우리 죄가 다 사해졌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요1:29)

(1)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게 되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새로운 생명과 성품을 물려받게 되었고 하나님을 닮게 되었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 가운데 거하시므로 우리를 진리 가운데 인도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모든 기업을 상속받게 된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마음을 품고 주님의 자녀답게 살아야 한다. 나 중심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을 위해 살아야 한다. 또한 아버지 하나님께서 사랑의 하나님이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하며 살아야 한다. (요13:34~35, 고후4:5)
(2) 주님과 더불어 교제하는 복을 얻게 되었다. (요1:14, 고전1:9) 구약 상징의 시대는 지나가고 이제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의 장소가 성전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인격이다. 그분이 내 안에 내가 그분 안에 거하므로 주님의 은혜와 진리가 충만함을 받게 된다.

(3) 주님의 영광스러운 모든 충만을 누리게 되는 복을 얻게 되었다. (요1:14,16) 주님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이시다. 그에게 하나님의 모든 속성들이 나타나있다. 전능, 전지, 편재, 자비, 공의, 사랑. 이 모든 것이 충만하게 나타나있다. 그의 인간됨에 있어서 모든 성질을 지닌 부족함이 없다. 죄의 성질을 유전받지 않은 순수한 동정심이 가득하다.
(4) 이런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제 자신을 위해서 살지 않고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 자신을 기쁘게 하지 않고 주님을 기쁘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지금 이순간 수많은 사람이 지옥을 향하고 있다. 그들을 인도해야할 책임이 있다. 이 모든 일을 위해서 나를 포기해야 한다. 내가 살아있는 한 이런 모든 일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 그리스도가 주님이시다. (갈2:20) 또한 작은 일들에 충성해야 한다. 가정과 교회와 직장 안에서 나를 버리고 주님의 이름을 높이는 삶을 살아야한다. 사업하는데도 정직해야 한다. 주님을 따르는 믿음의 길은 그 자체가 고난의 길이다. 십자가의 길이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다른 사람으로 살 것을 요구하신다. 우리가 세상 속에서 이러한 삶을 살기위해 먼저 교회정기집회에 잘 참석해야 한다. 작은 하나하나 일을 해나가야 한다. 상황과 환경이 어렵더라도 믿음으로 나아갈 때 주님이 길을 여신다. 작은 실천들이 큰 일을 이루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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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느웨에 대한 주의 심판 (나3)

이세중 의정부동부교회


궤휼과 강포와 늑탈이 가득한 성이여
피 흘리는 도성에 화가 있을찌라

휙휙하는 채찍소리, 굉굉하는 바퀴소리
뛰는 말, 달리는 병거의 덜컥대는 소리
충돌하는 기병, 번쩍이는 칼
번개같은 창, 살륙당한 큰 떼
큰 무더기 주검, 무수한 시체로다

앗수르의 죄악이 주의심판 불렀나니
아리따운 기생이 음행 많이 한것처럼
그가 그 음행으로 열국을 미혹하고
그 마술로 여러족속 미혹함이라

만군의 여호와가 그들의 대적되어
그 치마를 걷어올려 수치를 드러내며
가증하고 더러운 것 네게 던져 능욕하고
온 세계에 너로 구경거리 삼으리라

너를 보는자가 다 놀라 도망하니
황무해진 니느웨를 누가 애곡하며
앗수르를 위로할 자 어디서 구하리요

애굽의 노아몬이 철저히 망함처럼
니느웨도 침을받아 철저히 망하리라

앗수르 왕이여 네 목자가 자고
너의 귀족들은 누워서 쉬나니
네 백성들이 흩어지나 모을자가 없구나

너의 중한 상처 고칠 수 없고
네 소식 듣는자가 다 손뼉치나니
이는 네 악행을 안 받은자 없음이라

성이 견고해도, 빗장이 튼튼해도
백성이 중다해도, 돈이 많아도 소용없네

세계를 호령하며, 강성했던 앗수르가
포학을 행하며 죄에 죄를 쌓더니만
여호와의 심판으로 졸지에 망했도다

메뚜기떼 울타리에 깃들었다가
해가 뜨면 멀리 날아감 같고
상고를 별 보다 많게 하였어도
황충이 날개펴서 날아감 같나니
주 안에 있는자의 생각이 깊어지고
공의의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는도다

범죄한 나라를 주께서 심판하고
교만한 인생들을 주께서 징계하니
거룩하신 하나님께 순복함이 옳고
높으신 주님께 경배함 옳도다

앗수르가 졸지에 망한 것 처럼
죄로 가득한 세상도 곧 망할찌니
영원한 주의나라 바라보게 하시고
말씀대로 순종하며 섬기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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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훈련

   조준안 여주교회


♥미국의 저명한 은행의 은행장인 다우링이란 사람이 상이용사들의 초청을 받아 특강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특강을 하면서 상이 용사들을 심하게 공격했습니다.

"당신들은 패배주의자들, 남을 의지하고 국가의 연금을 축내며 되는 대로 먹고 마시며 놀기만 하는 나쁜 사람들입니다. 왜 열심히 일하지 않고 자꾸 의지하려고만 하십니까?"

나라를 위해 싸우다 부상당한 상이 용사들을 위로하고 격려해 주기는커녕 면전에서 그렇게 공격하니 그들은 화가 나서 그에게 맥주병과 재떨이를 던지며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그래도 그는 "당신들은 잘못하고 있고, 당신들의 자세는 잘못된 것입니다."라고 계속해서 공격했습니다.

그러자 상이 용사들이 미친 듯이 일어섰습니다.

그때 그는 자신의 한쪽 옷소매를 걷어 올렸습니다. 그러자 쇠갈고리가 나왔습니다.

다른 소매도 걷어 올렸습니다. 양팔 모두 가짜 팔이었습니다.

그는 바지도 걷어 올렸습니다. 양다리도 다 나무다리였습니다.

갑자기 분위기가 숙연해졌습니다.

"여러분, 저의 무례를 사과드립니다. 저는 열두 살 때 교통 사고를 당했는데, 눈 위에 10시간 동안 버려져 있었습니다.

그 바람에 두 팔과 두 다리를 다 잘라야만 했습니다. 저는 열두 살에 두 팔과 두 다리를 다 잃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살아야겠다는 의지로 '이대로 최선을 다하며 살리라. 남에게 신세지지 않고 살리라. 나는 성공하리라.'라고 각오하고 최선을 다해 살아서 이렇게 은행장이 되었습니다.

양팔과 양다리가 없는 저도 노력해서 은행장이 되었는데 당신들은 저보다 낫지 않습니까? 왜 그냥 먹고 놀기만 합니까? 왜 낙오자라는 패배주의에 사로잡혀 여러분의 삶을 낭비하십니까? "

모든 상이 용사들은 입을 닫았고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빌립보서 1: 6]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전쟁에서 부상을 입는 것보다 더 무서운 것은 마음의 ‘패배의식’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병은 ‘절망’이라는 병입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마음과 생각이 먼저 무너지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은 자신의 생각보다 더 크게 되지 못합니다. 생각에서 승리한 사람이 성공합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가복음 9: 23]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아무리 현실이 어려워도 “하나님이 최선의 길로 인도해주신다! 나는 반드시 비전을 이룰 수 있다!”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처럼 75세가 되어도 희망을 잃지 말고, 모세처럼 80세가 되어도 희망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출애굽기 14:11~12]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 우리를 내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냐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출애굽기에는 노예의식, 패배의식에 가득 찬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옵니다.

불과 삼일 전에 열 재앙의 기적을 체험하고 바로가 항복하는 기적을 체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조금 불편하고 힘들자 바로 패배주의의 멘탈을 드러내며 애굽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것보다 낫다고 불평했습니다.

‘하나님 믿어봐야 뭐하나? 기도 응답도 못받는데.. ’‘신앙생활 열심히 해봐야 뭐하나? 10년전이나 지금이나 변한게 없는데.. ‘ ‘훈련 받아야 뭐하나? 어차피 금방 원래대로 돌아올텐테..’ ‘열심히 봉사하고 헌신해봐야 뭐하나? 알아주는 사람도 없고 나만 힘들지..’

이런 생각들이 패배의식입니다.

이런 패배의식에 사로잡히면 열등감이나 무력감에 빠지고. 숙명론의 노예가 되며, 신앙생활도 적당히 하고, 새로운 훈련이나 교육을 받으려고 하지 않으며, 도전이나 개척이나 전진을 위한 노력을 포기하고, 내일에 대한 비전과 계획이 없이 무사 안일주의자, 선데이 크리스찬, 종교인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패배주의가 만연하면 허무주의와 불신주의가 피어나고, 신앙생활에 있어 냉소적 비판주의나 간교한 율법주의가 나타납니다.

이러한 영적 패배의식을 극복하는 것이 영적 훈련입니다.

신앙생활은 패배주의가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영적 쾌거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산소호흡기로 겨우 연명하는 생활이 아니라, 훈련과 연단을 통해 성령의 은혜를 깨닫고 영적 쾌거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영적 쾌거는 ‘내가 처한 환경이 얼마나 어려운가, 나라와 사회와 경제가 얼마나 어렵고 힘든가? 내 손에 무엇을 들고 있는가’ 하는 환경이나 조건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 쾌거는 ‘환경지수’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 지수’에 의해 결정됩니다.

믿음의 훈련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지수를 더 깊어지게하고, 내 속에 계시는 예수그리스도를 나의 삶의 주인으로 체질화하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4:4]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그들을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심이라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패배주의에 빠지지 말고, 진정한 승리를 가져다 주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환경에 흔들리지 않고 강력한 하나님의 임재지수를 높여 하나님의 깊은 은혜를 경험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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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하시는 하나님 (미7)

이세중 의정부동부교회


오직 나는 여호와를 우러러 보며
나를 구원하는 주를 바라 보나니
나의 하나님이 나를 들으시리로다

나의 대적이여 나로인해 기뻐하지 말찌니
나는 엎드러질찌라도 반드시 일어나며
어두운데 앉을찌라도 주께서 빛이 되시리

범죄한 나를위해 주께서 징계하사
징계받는 그날까지 주의노를 당하지만
주께서 광명으로 다시 인도 하시리니
소망중에 내가 그의 의를 보리로다

이스라엘 징계받고 이방에 끌려갈 때
네 하나님 여호와가 어디있냐 조롱하던
이스라엘 대적들이 부끄러워 하겠으며
그들은 거리의 진흙처럼 밟히겠고
유다민족 주께서 구원하여 높이시리

주와같은 신이 어디에 있나이까
주께서는 죄악을 사유하시며
그 기업 남은자의 허물을 넘기시며
인애를 기뻐하사 항상 노를 품지않네

다시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죄를 깊은바다 던지시리

주의 맹세대로 야곱에게 성실을 베푸시고
아브라함에게 인애를 더하시리

뼛속까지 죄인인 소망없는 자를위해
십자가를 져주신 주님을 찬양하네
내 모든죄 도말하사, 기억도 아니하니
그 은혜 그 사랑 이해할 수 없는사랑!

구원의 반석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어미품에 있는 젖뗀 아이와도 같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참 평안 맛보며
구원이신 나의주를 소망중에 기다리네

죄를 용서받은 사람이 행복한 자이며
구원받은 인생이 제일 행복할찌니
구원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십자가를 지신 주께 모든 영광 돌리며
영원하신 주의 사랑 감격하여 찬양하네

Posted by 행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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