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 세상에 왜 존재하는가?


                                      영원히 존재하도록 지어졌다


   현재의 삶이 존재의 전부는 아니다.

   이 땅에서의 삶은 실제의 공연을 위한 최종 연습에 불과하다.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 보내고 있는 시간보다 훨씬 긴 시간, 즉 영원한 시간을 이땅을 떠난 뒤에 살게 될 것이다. 지구 위에서 산다는 것은 영원한 삶을 위한 중간 지점, 예비 학교이며, 연습장에서 실제 경기에 임하기 전에 갖는 연습이나 몸풀기 운동을 하는 것과 같다고 말할 수 있다. 지금의 삶은 다음 삶을 위한 준비 과정이다.

   우리는 이 땅에서 길어야 100년 정도 살 수 있지만, 그 후에 영원이라는 시간 속에서 영원히 살게 된다. 토마스 브라운 경(Sir Thomas Browne)이 말했듯이 지구상에서의 우리의 시간은 "영원이란 시간 사이에 끼어 있는 짧은 기간에 불과하다." 우리는 영원히 존재하도록 지어졌다.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전도서 3:11). 이 말은 우리 안에는 영원한 삶을 바라는 본능이 있다는 것이고, 하나님이 그분의 형상을 따라 영원토록 살도록 우리를 만드셨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모든 사람이 죽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항상 부자연스럽고 불공평한 것으로 받아들이곤 한다. 우리가 영원히 살고 싶어하는 마음을 갖고 있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심어놓으셨기 때문이다.

   어느 날 우리의 십장은 더 이상 뛰지 않을 것이다. 그것으로 우리의 육체는 지구상에서의 시간과 결별을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우리 존재의 마지막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육체를 '장막' 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미래의 몸은 '집'이라 부른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고린도후서 5:1).

    이 땅에서의 삶에는 많은 선택 사항들이 있지만 영생이 제시하는 것은 두가지뿐이다. 천국과 지옥. 우리가 지구상에서 하나님과 어떠한 관계를 맺느냐에 따라 우리가 어디에서 영생을 보낼 것인지가 결정된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신뢰하는 법을 배운다면 우리는 영생을 그분과 함께 보내게 될 것이다. 하지만 만일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 용서 그리고 구원을 거부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과 떨어져 살게 될 것이다.

   옥스퍼드 대학교의 뛰어난 석학이자 작가인 C.S. 루이스(C.S. Lewis)는 말했다.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한 부류는 하나님께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기 원합니다' 라고 말하는 사람들이고, 또 한 부류는 하나님이 '좋아, 그렇다면 네 마음대로 해' 라고 말씀하시는 사람들이다. 슬프게도 많은 사람들은 이 땅에서 하나님 없이 살기로 선택했기 때문에, 하나님 없이 영생을 살아야 할 것이다.

   우리가 지금 이곳에서 사는 것이 존재의 끝이 아니고 그 후에 영원이라는 것이 있으며, 지금의 삶이 영생을 위한 준비 과정이란 것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날마다의 삶을 지금과는 다르게 살기 시작할 것이다. 이러한 것을 깨달았을 때 우리는 영원의 빛 가운데서 살 것이고, 그것은 우리가 관여하고 있는 모든 관계, 우리에게 맡겨진 임무 그리고 처해 있는 모든 상황에 대처하는 모습을 올바르게 선택하게 될 것이다. 이런 깨달음을 갖게 되면 지금 하고 있는 많은 활동과 멋지고 대단했던 목표 그리고 중요하게 여기던 많은 문제들이 한순간에 의미 없고, 사소하며, 가치없는 것으로 여겨질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과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그 외의 다른 모든 것은 더 작아보일 것이다.

   영원의 빛 가운데 살면 우리의 가치관이 변한다. 시간과 돈을 더 현명하게 쓰게 되고, 명예나 부, 또는 일의 성취감이나 쾌락보다 인간 관계와 인격에 더 많은 비중을 두게 된다. 또한 유행을 따르고 대중적인 가치관을 받아들이는 것이 별 의미 없는 하찮은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나는 한때 이 모든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해주신 것 때문에 그것들을 아무 쓸모 없는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 (빌립보서 3:7, NLT)라는 성 바울의 고백처럼 우리는 삶의 우선순위를 분명히 알게 될 것이다.

   현재 이 땅에서의 삶이 우리 삶의 전부라면 나는 이제부터 인생을 즐기라고 제안할 것이다. 착하고 도덕적으로 살아야 하고, 자신의 행동에 반드시 책임감을 가지는 의식 따위는 생각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가져올 결과에 대해서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우리의 행동들에는 장기적으로 아무런 영향력도 없기 때문에 완벽히 자기 중심적인 삶을 누려도 된다는 말이다. 하지만 죽음이 우리 존재의 끝이 아니고 영생으로의 전환이기 때문에 우리가 이 땅에서 하는 모든 행위에는 영원한 결과가 따른다. 우리 삶에서 이루어진 모든 행동이 영생에서도 계속 영향을 미친다는 말이다.

   현재의 삶에서 가장 파괴적인 면은 근시안적인 사고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삶을 하나님과 함께하는 영생에 이르도록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서 우리는 머리 속에 계속해서 영생에 대한 그림을 그려야 하고, 그 소중함과 가치를 마음에 새겨야 한다. 오늘의 삶은 물 위에 떠 있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고, 영생을 사는 그곳은 지금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그러나 분명히 존재하는 바다 속에 잠겨 있는 빙산의 덩어리같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하는 것은 어떨까? 솔직히, 우리 머리로는 천국의 위대함과 불가사의함을 이해할 수 없다. 개미에게 인터넷 사용법을 아무리 설명해도 개미가 이해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개미가 우리의 말과 인터넷의 작동 원리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영원토록 산다는 것을 인간의 언어로써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는 이렇게 쓰여져 있다.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고린도전서 2:9).

   그래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분의 말씀을 통해서 영원의 모습을 아주 조금이나마 보여주신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영원한 집을 예비해놓으신 것을 안다. 더 이상 고통과 아픔이 없는 천국에서 우리는 사랑하는 믿음의 형제 자매와 재회하고 우리가 좋아하는 일들을 하게 될 것이다. 구름 위에서 가야금이나 타며 신선놀음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깨어지지 않는 하나님과의 끝없는 사랑의 관계를 맺고 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예수님은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마태복음 25:34)고 말씀하신 것이다.

   C. S. 루이스는 [나니아 연대기(The Chronicles of Namia, 전7권으로 구성된 아동용 도서, 역주)]의 마지막 장에서 영생의 개념을 제시했다. "우리 모두에게 이것이 이야기의 끝이다. 하지만 그들에게 그것은 진정한 이야기의 시작일 뿐이었다. 이 땅에서 그들의 삶은 모두 표지와 제목에 불과했다. 이제 드디어 그들은 위대한 이야기의 제 1장을 시작한다. 이 땅에서는 그 이야기를 읽은자가 아무도 없다. 이 이야기는 계속될 것이고, 새로 쓰여지는 장이 그 전 장보다 항상 나을 것이다.

   하나님은 이 땅에서 우리의 삶에 대한 목적을 가지고 계시지만 그것이 이곳에서 끝나는 것은 아니다. 우리를 향한 그분의 계획은 우리가 이 지구라는 행성에서 보낼 몇십 년보다 훨씬 많고, 우리에게 평생토록 매일 기회가 주어진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 이상의 많은 기회를 우리에게 주신다.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여호와의 계획은 언제까지나 한결 같고, 그분의 뜻은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시편 33:11, 쉬운성경).

   사람들이 영생에 대해 생각하는 유일한 시간은 장례식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이것조차도 대부분이 무지에 바탕을 둔 얄팍하고 감상적인 생각들이다. 우리는 죽음이 그저 무섭고 두렵기만 할 뿐이고, 가급적 죽음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으려 한다. 하지만 죽음을 부인하거나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고 사는 것은 건강하지 못한 삶의 모습이다(전도서 7:2, CEV).왜냐하면 결국 언젠가 일어날 사실에 대해 준비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은 가장 어리석은 자의 삶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영생에 대해서 더 많이 생각해야 한다.

   우리가 어머니의 자궁에서 보낸 9개월의 시간이 그 자체로 끝이 아닌 또 다른 삶을 위한 준비였듯이, 현재의 삶은 다음 삶을 위한 준비 과정이다. 만일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다면,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바로 그것이 영생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이 땅에서 보내는 마지막 순간이 되겠지만, 그것이 우리 존재의 마지막 시간은 아닐 것이다. 삶의 끝이 아닌 영원한 삶을 새롭게 시작하는 날이 될 것이다.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 세상은 우리의 집이 아니다. 우리는 하늘에 있는 우리의 영원한 집을 기대하고 있다" (히브리서 13:14, LB).

   영원에 비교하면 이 땅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눈 깜짝할 순간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에 따른 결과들은 영원히 남을 것이다. 이 땅에서의 행동은 다음 삶의 운명을 결정한다. 우리는 "우리가 육체를 입고 지내는 매 순간이 하늘에서 예수님과 함께 영원한 집에서 사는 것으로부터 떨어져 있는 시간임을 깨달아야 한다" (고린도후서 5:6, LB). '남은 인생의 첫날 (The first day of the rest of your life))' 이라는 슬로건이 몇 년 전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유행한 적이 잇다. 하지만 매일을 인생의 마지막 날처럼 여기고 사는 것이 더 지혜로운 삶의 모습이다. "우리의 마지막 날을 준비하는 것이 매일의 일이 되어야 한다" 고 쓴 매튜 헨리(Matthew Henry)의 말을 기억하자.


   생각할 점 : 현재의 삶이 존재의 전부가 아니다.


                                  삶으로 떠나는 질문


   하나님이 왜 우리를 영원히 존재하도록 지으셨다고 생각하는가?


   왜 우리는 영원토록 존재할 영원을 위한 준비는 거의 하지 않으면서 한 순간에 지나지 않는 것들을 걱정하면서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가?


   지금 이 순간 영원을 준비하기 위해 당신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Posted by 행복자
,

       나는 왜 이세상에 존재하는가?


                                          삶의 원동력


   모든 사람은 무엇인가에 이끌려 살고 있다.

   대부분의 사전은 '이끌다(drive)' 는 동사를 '길을 인도하다. 통제하다, 또는 방향을 제시하다' 라고 정의 내리고 있다. 자동차를 운전하든, 못을 박든, 골프 공을 치든 우리는 그 순간 그것을 인도하고, 통제하며, 그것에게 방향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의 원동력은 무엇인가?

   우리는 지금 특정한 문제, 중압감 혹은 마감 시간에 쫓기면서 끌려가듯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과거의 기억, 계속 떠오르는 두려움, 혹은 입 밖으로 내보내지 못한 잘못된 믿음에 의해 끌려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수백 가지의 상황, 가치 그리고 감정이 우리의 삶을 이끌 수 있다. 그 가운데 가장 보편적인 것 다섯 가지를 살펴보자.


   많은 사람들이 죄의식에 의해 끌려다닌다

   이렇게 과거의 죄의식에 의해 끌려다니는 삶은 후회에서 벗어나고 수치심을 감추기 위해 결국 삶 전체를 허비하는 것이다. 죄의식에 의해 끌려다니는 사람들은 기억에 의해 조작된다. 그들은 과거가 미래를 지배하도록 내버려둔다. 그리고 때때로 무의식적으로 자신들의 성공을 파괴함으로써 스스로를 처벌하려고 한다.

성경에서 가인이라 불리는 한 남자가 그의 동생을 죽였을  때 그의 죄의식은 자신을 하나님의 임재로부터 멀어지게 했고, 하나님은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창세기 4:12)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목적 없이 헤매는 오늘날 많은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그려주고 있다.

   우리는 과거의 산물이지만 과거에 갇힐 필요는 없다.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의 과거로 인해 제한받지 않는다. 그분은 모세라는 살인자를 지도자로 바꾸셨고, 기드온이라는 겁쟁이를 용감한 영웅으로 바꾸셨다. 또한 우리의 남은 삶을 통해서도 엄청난 일들을 하실 수 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새롭게 시작할 수 있도록 해주시는 데 전문가이시다. 성경은 말한다.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시편 32:1).


   많은 사람들이 원한의 쓴 뿌리를 씹으며 살아간다.

   그들은 상처를 입은 곳에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 용서를 통해 고통에서 벗어나는 대신 머리 속에서 고통의 순간들을 계속 되풀이한다. 원한을 품고 사는 사람들은 여러 가지 모양으로 분노를 나타낸다. '침묵하며' 분노를 내면화하는 사람도 있고, 자신의 감정을 폭발시켜 다른 사람들에게 그 분노를 '쏟아붓기도' 한다. 두 반응 다 건전하지 않으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분노할 때 우리는 우리가 분개하고 있는 그 사람보다 우리 자신을 더 아프게 한다. 우리에게 상처를 입힌 사람은 이미 자기가 한 일을 잊고 살아가고 있는데, 우리는 과거를 붙잡고 계속 고통 속에서 괴로워하고 있다.

   기억하라. 우리가 원한을 품고 상처를 계속 싸매고 있는 한 우리의 상처는 계속 상처로 남고, 그 상처는 결코 아물 수 없다. 과거는 과거일뿐이다. 아무것도 우리의 과거를 바꿀 수 없다. 우리는 원한을 품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에게  상처를 주고 있다. 우리 자신을 위하는 가장 좋은 길은, 과거에서 교훈만 얻고 잊어버리는 것이다.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분노가 미련한 자를 죽이고 시기가 어리석은 자를 멸하느니라" (욥기 5:2).


   많은 사람들이 두려움에 이끌려 살아간다

   두려움이란 매우 충격적인 경험, 비현실적인 기대 그리고 엄격한 가정 환경으로 인해 생길 수도 있고, 또 유전적인 요인으로 생길 수도 있다. 그 원인에 상관없이 두려움에 의해 이끌려서 사는 사람들은 종종 좋은 기회들을 놓친다. 이는 그들이 모험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대신 그들은 안전한 방향으로,위험을 피하고 현재 상태를 유지하려고 한다.

   두려움은 스스로를 가둬놓는 감옥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 감옥은 우리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이 되는 것을 막을 것이다. 두려움을 물리치는 유일한 방법은 영적 무기인 믿음과 사랑을 가지고 맞서 싸우는 것이다.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요한 일서 4:18).


   많은 사람들이 물질에 이끌려 살아간다

   무언가를 획득하고자 하는 욕구가 삶의 목표가 된다. 항상 더 많은 것을 얻고자 하는 욕구가 삶의 목표가 된다. 항상 더 많은 것을 얻고자 하는 이 욕구는 더 많이 가지면 더 행복해지고, 더 중요한 사람이 되며, 더 안전할 것이라는 잘못된 생각에서 온다. 하지만 이 세 가지 모두 사실이 아니다. 소유물은 일시적인 행복만을 준다. 사물이 변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결국 그것에 싫증을 느끼고, 보다 새롭고 더 크고 나은 것을 원하게 된다.

   더 많은 것을 가지면 더 중요한 사람이 될 것이라는 것도 잘못된 믿음이다. 자아가치(self-worth)와 소유 가치(net- worth)는 동일하지 않다, 우리의 가치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물건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들은 물건이 아니라고 말씀하신다.

   돈에 대한 가장 흔한 오해는 돈이 많을수록 더 안전하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 부는 통제할 수 없는 요인들로 한순간에 잃을 수 있다. 진정한 안전은 그 어느 누구도 앗아갈 수 없는 것에서만 발견할 수 있다. 바로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다.


   많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의 인정을 받기 위해 살아간다.

   그들은 부모나 배우자, 혹은 자식이나 스승, 또는 친구들 그리고 수많은 다른 사람들의 기대가 그들의 삶을 주관하도록 내버려둔다. 성인이 된 후에도 도저히 만족하지 않는 부모를 만족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주변의 압력에 끌려간다. 다른 사람이 자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항상 걱정한다. 불행하게도 군중을 따라가는 사람은 군중 속을 헤매며 길을 잃게 된다.

   나는 성공으로 이끄는 모든 길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지만 한가지 분명히 아는 것은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은 실패로 가는 길이라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의견에 의해 통제받는 것은 우리의 삶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을 놓치게 만드는 길이다. 예수님은 "한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마태복음 6:24)라고 말씀하셨다.

   이 외의 여러 가지 우리의 삶을 이끄는 많은 원동력들이 있다. 즉 사용하지 않은 잠재력, 불필요한 스트레스 그리고 충족되지 않은 삶이 그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원동력들은 결국 삶을 막다른 골목에 이르게 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을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기 때문이고, 그 목적을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그 어떤 것도 보상해줄 수 없기 때문이다. 성공, 부, 명성 또는 쾌락도 그것을 보상해줄 수는 없다. 목적 없이 사는 삶은 의미없는 행동, 방향 없는 활동 그리고 이유 없는 행사들의 끊임없는 연속밖에는 될 수 없다. 목적 없이 사는 삶은 하찮은 삶이요 무의미한 삶이다.

   이 소책자는 우리가 창조된 다섯 가지 목적을 보여줄 것이다. 그렇지만 우선, 목적이 이끄는 삶에 따르는 몇 가지 실제적인 유익을 살펴보자.


   목적을 아는 것은 삶에 의미를 부여해준다

   인간은 삶의 의미를 갖고 살도록 만들어졌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점성학이나 심령술과 같은 모호한 방법들을 통해서라도 삶의 의미를 찾으려고 한다. 삶의 의미가 있다면 인간은 거의 모든 것을 견딜 수 있지만, 반대로 삶의 의미가 없으면 그 어떤 것도 참을 수 없다.

   하나님이 없다면 삶에는 어떤 목적도 있을 수 없고, 목적이 없는 삶은 의미가 없다. 의미가 없다면 삶의 중요함이나 소망도 없다. 성경에도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절망감을 표현했다. 이사야는 "내가 헛되이 수고하였으며 무익히 공연히 내 힘을 다하였다" (이사야 49:4).라고 말했고,욥은 "나의 삶은 절망적인 나날들의 연속이다" (욥기 7:6, LB)라고 고백하고 있다. 욥은 이 외에도 "나는 포기한다. 사는 것이 지겹다. 그냥 나를 혼자 두라. 내 삶은 말도 안된다" (욥기 7:16, TEV)라고 절규하기도 했다. 인간에게 가장 큰 비극은 죽음이 아니라 목적 없는 삶이다.

   한 20대 청년이 이렇게 썼다. "나는 무엇이 되려고 발버둥치고 있지만 진정으로 무엇이 되려고 하는 줄 모르기 때문에 실패자임에 틀림없다. 오직 내가 할 줄 아는 것은 대충 살아가는 것 뿐이다. 언젠가 내 삶의 목적을 발견할 때에야 비로소 나는 살기 시작한다고 느낄 것이다."

   소망은 우리의 삶에 공기와 물만큼 중요하다. 삶의 역경을 극복해나가기 위해서 소망이 필요하다. 버니 시걸(Bernie Siegel) 박사는 "100세까지 살고 싶습니까?" 라는 질문을 그가 돌보고 있는 암 환자들에게 물어보면 누가 병마를 이기고 회복할 수 있는지 알 수 있다고 말한다. 삶의 목적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는 사람들은 "네" 라고 대답을 했고, 이들이 생존할 확률이 가장 높다. 소망은 목적을 갖는 것에서부터 온다.

   지금 절망을 느끼고 있다면 조금만 기다리라. 목적을 가지고 삶에 임하기 시작하는 순간 당신의 삶에 멋진 변화들이 일어나기 시작할 것이다.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 (예레미야 29:11). 지금 불가능한 상황에 직면했다고 느끼고 있는가?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은...우리가 상상하거나 요구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일들을 하실 수 있다. 우리의 가장 큰 기도, 욕구, 생각 그리고 희망을 훨씬 뛰어넘는 일들을 하신다" (에베소서 3:20, LB).


   목적을 알면 우리의 삶은 단순해진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지를 명확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우리의 목적은 꼭 필요한 활동과 그렇지 않은 것들을 평가하는 기준이 된다. 일을 하기 전에 간단히 "이  일이 나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을 달성하는데 도움이 될까?" 라고 자문하면 된다.

   명확한 목적이 없으면 우리는 왜 그런 결정을 내렸으며, 어떻게 시간을 투자하고 자원을 활용할 것인지에 대한 근거를 잃게 된다. 그저 상황, 압력 그리고 그 순간 우리의 기분에 따라 결정을 내릴 뿐이다. 자신의 목적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너무 많은 것을 하려 하고, 또 이 때문에 스트레스, 피로 그리고 관계에 있어서 갈등을 겪게 된다.

   사람들이 원하는 모든 것을 해주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뜻만을 행할 시간이 주어졌기 때문에 만약 모든 것을 다할 수 없다면, 우리는 분명 하나님이 의도하신 것보다 훨씬 많은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아니면 어떤 면에서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것이다.  목적이 이끄는 삶은 더 단순한 삶의 방식과 분별 있는 계획을 갖게 한다.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삶은 공허한 삶이다. 평범하고 단순한 삶이 풍성한 삶이다" (잠언 13:7, Msg).또한 이러한 삶이 마음에 평화를 준다. "주님, 당신은 목적을 굳게 지키고 당신을 신뢰하는 자들에게 완전한 평화를 주십니다" (이사야 26:3,TEV).


   목적을 알면 초점을 맞춘 삶을 살게 된다

   이는 우리의 노력과 에너지를 중요한 것에 집중하게 해준다. 우리가 선택적으로 살게 되기 때문에 모든 것이 효율적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사소한 일들로 마음이 산란해지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다.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사소한 것들을 추구한다. 헨리 데이빗 소로우(Henry David Thoreau) 는 사람들이 '조용히 자포자기하는 삶' 을 산다고 말했지만, 오늘날 이에 대한 더 적합한 설명은 '목적 없는 산만함' 이다. 많은 사람들이 회전판이 돌아가는 것처럼 정신 없이 계속 회전하기만 할 뿐 그 어디로도 가지 못한다.

   명확한 목적 없이 우리는 계속 방향을 전환하고, 직업, 관계, 교회 그리고 그 외의 외부적인 것들을 끊임없이 바꾼다. 그것이 우리 마음의 혼란스러움을 안정시켜주고 공허감을 채워주기 바란다. 우리는 "이번엔 다를 거야" 라고 생각하지만, 그 기대가 초점과 목적의 결여라는 진정한 문제를 해결해주지는 못한다.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에베소서 5:17).

   초점은 맞추는 것의 힘은 빛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넓게 흩어진 빛은 힘이나 영향력이 거의 없다. 하지만 빛의 초점을 맞추면 에너지를 모을 수 있다. 돋보기를 통해서 태양빛을 모아 잔디나 종이를 태울 수 있다. 레이저 광선처럼 빛이 더 강하게 한 초점으로 모아지면 강철도 뚫을 수 있다.

   목적이 있고 초점이 맞춰진 삶만큼 강력한 것은 없다. 역사상 가장 큰 변화를 이루어낸 사람들은 가장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산 사람들이었다. 성경에 나오는 가장 영향력 있는 지도자들 가운데 한 사람인 성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나의 모든 에너지를 이 한 가지에 집중시키고 있다. 과거를 잊고 미래를 기대한다" (빌리보서 3;13, NLT).

   삶이 영향력을 갖길 원한다면 삶의 초점을 맞추라. 그만 첨벙거리라. 모든 것을 하려는 것을 멈추라. 적게 하라. 유익하다고 생각되는 활동도 잘라내라.그것이 유익하고 좋은 활동일지라도 가장 중요한 것들만 하라. 활동과 생산성을 활동일지라도 가장 중요한 것들만 하라. 활동과 생산성을 혼동하지 말라. 무엇 때문에 목적 없이 바쁘게 살고 있는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가지고 계신 모든 것을 원하는 사람들은 그 목표를 계속 바라보자" (빌립보서 3:15, Msg) 라고 성 바울은 말하고 있다.


   목적을 알 때 삶의 동기가 유발된다

  목적은 열정을 낳는다. 뚜렷한 목적만큼 힘이 되는 것은 없다. 반대로 목적이 없으면 열정은 소실된다. 침대에서 일어나는 것도 엄청난 부담이 될 수 있다. 의미 없는 별것 아닌 일들이 우리를 지치게 하고, 우리의 기운을 빼앗으며, 기쁨을 앗아간다.

   조지 버마드 쇼(George Bernard Shaw)는 이렇게 썼다."이것이 삶의 진정한 기쁨이다. 위대한 목적이라고 여겨지는 것을 위해 사용되어지는 것, 세상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이기적인 아픔과 슬픔의 덩어리보다 자연스러운 힘이 되는 것이다."


   목적을 앎으로써 영생을 준비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은 이 땅에서의 영원한 유산을 만드는데 인생을 보낸다.그들은 죽은후에 기억되고 싶어한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들이 우리의 삶에 대해 어떻게 이야기 하느냐가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느냐이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가 평생 이룩한 것 이상으로 이룩할 것이고, 기록은 깨어지며, 명성은 사라지고, 공로는 잊혀진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깨닫지도 못한다. 나는 학교 테니스 챔피언이 유일한 목표였던  한 대학생에 관한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그는 열심히 노력했고 자신의 트로피가 학교 트로피 전시장에 놓여 졌을 때 너무 자랑스러웠다. 그런데 몇 년 후 어떤 사람이 그 토로피를 우편으로 보내왔는데 학교 재건축 당시 쓰레기통에서 발견한 것이었다. 그는 말했다. "얼마간 시간이 흐른 뒤에 당신 삶의 모든 트로피는 누군가에 의해서 버려지게 된다." 그의 말은 옳다.

   지구상에 유산을 남기기 위해 사는 것은 근시안적인 목표일 뿐이다. 영원한 유산을 남기는 삶을 사는 것이 시간을 더 유용하게 쓰는 방법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기억되기 위해 이땅에 보내진 것이 아니다. 우리는 영생을 준비하기 위해서 이땅에 보내졌다.

    어느 날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서고, 그분은 우리의 삶에 대해 조사하실 것이다. 영생에 들어가기 전 마지막 시험인 것이다.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기억하라. 우리 각자는 하나님의 심판대에 서게 될 것이다.... 그렇다. 우리 각자는 하나님께 자기 삶에 대한 셈을 해야 할 것이다" (로마서 14:10, 12, NLT). 그러나 다행히도 하나님은 우리가 이 시험을 통과하기 원하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물으실 질문을 미리 가르쳐주셨다. 성경을 통해 하나님이 두 가지 중요한 질문을 하실 것임을 알 수 있다.

   첫번째 질문은 "너는 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무엇을 했느냐?" 이다. 그분은 우리의 종교적 배경이나 교리에 대한 생각을 묻지 않으실 것이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하신 일들을 받아들였고, 예수님을 사랑하고 신뢰하는 것을 배웠느냐는 것이다.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한복음 14:6)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주시고, 우리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보내신 독생자 예수님을 우리가 알고, 사랑하고, 신뢰하는 것이다.

   두번째 질문은 "내가 너에게 준 것들로 너는 무엇을 했느냐?" 이다. 너는 삶을 통해 무엇을 했느냐? 내가 준 은사와 재능, 기회, 에너지, 인간 관계 그리고 자원들로 무엇을 했느냐? 스스로를 위해 썼느냐? 아니면 내가 너를 창조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사용했느냐?

   이 두 질문에 대해 대답할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것이 이 소책자의 목적이다. 첫번째 질문은 우리가 영생을 어디에서 보낼지를 결정해줄 것이다. 즉 하나님과 함께 거하거나,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이다. 두번째 질문은 우리가 영생에서 무엇을 할지를 결정해줄 것이다. 이 소책자의 마지막 장을 넘길 때 우리는 두 질문 모두에 대해 대답할 준비가 되어 있을 것이다.


   생각할 점 : 당신 삶의 원동력은 무엇인가?


                             삶으로 떠나는 질문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당신 삶의 원동력이 무엇인지 묻는다면 그들은 어떤 힘이나 동기들에 대해 언급하겠

   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들이 생각하고 있는 삶의 목적을 따라 살아가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

   가?


   하나님이 당신의 삶을 위해 계획하신 목적을 누리지 못하고 살아가는 당신의 습관이나 고통, 약점 또는 공

   포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Posted by 행복자
,

               나는 이 세상에 왜 존재하는가?


                        우리는 우연의 산물이 아니다


   우리는 우연의 산물이 아니다.

   우리의 출생은 실수도 불운도 아니며, 우리의 삶 또한 우연히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혹 부모님의 계획 없이 우리가 태어났을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계획하지 않으셨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실수, 실패에서조차 역사하신다. 따라서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에 대해 당황해하지 않으신다. 사실 하나님은 그것을 기대하고 계셨다.

   우리가 지금 숨쉬고 있다는 사실은 갑작스럽게 이루어진 의미 없는 운명도, 우연의 결과도 아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창조하기 원하셨기 때문에 당신은 지금 살아 있는 것이다.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여호와께서 내게 관계된 것을 완전케 하실지라" (시편 138:8).

   하나님은 우리 신체의 가장 작은 부분까지도 선택하여 만드셨다. 우리가 속한 인종, 피부색, 머리 그리고 우리가 갖고 있는 모든 특징들을 숙고하여 선택하셨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 그대로 우리를 맞춤 제작하셨다. 그러니까 우리의 재능과 독특한 성격까지도 모두 하나님의 결정대로 만들어진 것이다.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당신(하나님)은 나의 내면과 외면 모두를 아십니다. 내 몸속의 모든 골수 조직도 아십니다. 내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내가 어떻게 무에서 유가 되었는지 모든 것을 정확히 알고 계십니다." (시편 139:15, Msg).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신 이유가 있기 때문에 그분은 우리 삶의 모든 것을 미리 계획해놓으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출생과 죽음의 시기도 이미 결정해놓으셨다.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당신은 내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나를 보셨고 내가 숨쉬기 이전부터 내 삶의 매일매일을 계획해놓으셨습니다. 모든 날들이 당신의 책에 기록되어 있습니다."(시편 139:16, LB).

     또한 하나님은 우리가 어디에서 태어날 것과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거주할 곳까지 계획해놓으셨다. 다시 말해 우리가 이 나라에서 태어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며, 아주 작은 부분조차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모두 하나님의 목적에 따라 계획되어 있다는 말이다. 성경은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으로부터 세계 모든 인류를 만들어 땅위에 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살 시대와 지역의 경계를 정해 주셨습니다." (사도행전 17:26, 쉬운성경). 즉 우리 삶의 어떤 부분도 합당한 이유와 목적이 있다는 말씀이다. 

   가장 놀라운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이 세상에 어떻게 보내실지도 모두 결정해놓으셨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출생 상황이 어떠하든, 부모님이 어떤 분들이든,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할 계획을 가지고 계셨다. 부모님이 훌륭하든 평범하든 상관이 없다. 그리고 하나님이 계획하고 있는 우리를 만들기 위해서 필요한 정확한 유전자들을 우리의 부모가 될 두 사람의 남녀가 모두 소유하고 있음을 하나님은 알고 계셨다.

   부적절한 부모는 있어도 부적절한 자식은 없다. 일부 아이들이 부모의 계획과 상관없이 태어날 수는 있지만, 하나님의 목적 없이 태어날 수는 없다.

    하나님은 인간의 실수와 죄까지도 모두 고려하여 계획을 세우신다. 이것은 하나님이 죄나 악한 일이 일어나게 하시거나 묵과하신다는 것을 의미 하는 것이 아니다.오히려 하나님의 선한 뜻을 위해 그것들을 사용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떻게 이 세상에 태어났는지에  상관없이 하나님이 우리를 지금의 모습으로 만드셨다는 사실에 기뻐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어떤 일도 우연히 하지 않으시고 절대 실수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것에는 이유가 있다. 모든 식물, 모든 동물도 하나님의 게획에 따라 만들어졌고, 모든 사람 하나하나 하나님의 목적에 따라 만들어졌다. 이렇게 하나님이 우리를 계획하고 만드신 동기는 바로 그분의 사랑이다. 성경은 말한다. "그가 땅의 기반을 마련하기 훨씬 이전에 그는 우리를 계획하셨고 우리를 그의 사랑의 대상으로 정해놓으셨다" (에베소서 1:4, Msg).

   그 분은 세상을 만들기 이전부터 우리에 대해 생각하고 계셨다. 더 나아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이유가 바로 우리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가 살 수 있도록 지구의 환경을 계획하셨다. 우리는 그분의 사랑의 대상이고 그분의 창조물 가운데 가장 값지다. 성경은 말한다. "그가 그 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야고보서 1:18). 하나님은 우리를 이토록 사랑하고 아끼신다.

    하나님은 무작정 움직이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정확하게 게획하셨다. 물리학자, 생물학자, 그리고 그 외 다른 과학자들이 우주를 연구하면 할수록 우리는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것들이 우리의 존재에 꼭 맞도록 얼마나 독특하게 만들어졌는지 감탄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러한 조건들이 인류의 생존을 가능하게 하는 데에 얼마나 정확한지 놀랄 수밖에 없다.

    뉴질랜드 오타고 대학의 인간 분자 유전학 수석 연구자인 마이클 덴튼 박사(Dr. Michael Denton)는 이렇게 결론을 지었다. "생물 과학에서 얻을 수 있는 모든 정보는 그 핵심 사안, 즉 우주는 삶과 인류를 근본 목표와 목적으로 가진 전체 그리고 현실 의 모든 것이 각각의 의미와 이유가 있는 전체로 특별히 설계된 것이라는 사실을 뒤받침한다."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여호와는 하늘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시며 땅도 조성하시고 견고케 하시되 헛되이 창조치 아니하시고 사람으로 거하게 지으신 자시니라" (이사야 45:18).

    하나님은 왜 이 모든 일을 하셨을까? 왜 우리를 위해서 우주를 만드는 수고를 하셨을까? 그분은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 정도를 도무지 가늠할 수 없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신뢰할 만하다. 우리는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특별한 대상으로 만들어졌다. 하나님은 사랑하시기 위해 우리를 만드셨고, 우리는 그 진리 위에 우리의 삶을 만들어나가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요한일서 4:8) 라고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 "하나님은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계신다" 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분은 사랑이시다. 사랑은 하나님 인격의 본질이다. 하나님은 완벽하시고 그분 안에 모든 것을 갖추고 께신다. 그래서 그분은 우리를 창조할 필요가 없으셨다. 그분은 외롭지 않으셨다. 하지만 그분은 사랑을 표현하기 위하여 우리를 창조하셨다. 하나님은 "배에서 남으로부터 내개 안겼고 태에서 남으로부터 내게 품기운 너희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내가 그리하겠고 백발이 되기까지 내가 너희를 품을 것이라 내가 지었은즉 안을 것이요 품을 것이요 구하여 내리라" (이사야 46:3-4)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없다면 우리 모두는 '우연의 산물'이 될 것이며, 우주의 천문학적 경우의 수 가운데 하나로 남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사실이라면, 지금 당장 이 책을 덮어도 좋다. 그럴 경우 삶에는 어떠한 목적도, 의미도, 소중함도 없으며, 옳고 그름도 없고, 지구상에서의 짧은 삶 이외에는 아무런 희망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인생은 의미 없는 존재가 될 것이고, 죽음이 그 마지막이 될 것이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존재하시고, 우리를 만든 이유가 있으며, 우리의 삶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과 관계를 맺기 시작할 때만이 우리 삶 속에서 그 의미와 목적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 자신을 이해하는 가장 정확한 방법은 하나님이 누구시고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하시는지를 아는 것이다" (로마서 12:3, Msg).


   생각할 점 : 우리는 우연의 산물이 아니다.


                            삶으로 떠나는 질문

   당신의 삶에서 당신이 특별한 목적을 위해서 창조되었다는 것을 암시하거나 보여주는 사건이나 경험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진정으로 느껴본 적이 있는가?


   하나님이 당신을 깊이 사랑하시고 당신의 삶을 위한 목적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확신하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면 당신의 삶은 어떻게 변하겠는가?

Posted by 행복자
,

              나는  왜 이세상에 존재하는가?

                  What on Earth Am I Here For?

             사랑하는 사람에게 전하는 [목적이 이끄는 삶] 소책자

                                                                                                                                      릭 워렌(RICK WARREN)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었으니


   이것은 우리에 관한 것이 아니다.

   삶의 목적이란 우리 개인의 성취감, 마음의 평안과 행복감 이상의 것이며, 가족과 직업 그리고 우리의 가장 큰 꿈과 야망보다도 훨신 더 큰 것이다. 우리가 이 땅에 살고 있는 이유를 알고 싶다면, 모든 생각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분의 목적에 의해서 그분의 목적을 위하여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삶의 목적에 대한 고민은 수천 년 동안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했다. 혼란의 이유는 우리가 그러한 고민들의 출발을 우리 자신으로부터 시작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자기 중심적인 질문을 던지곤 한다. '나는 무엇이 되기를 원하는가?'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나의 목표, 나의 야망, 나의 미래를 위한 나의 꿈은 과연 무엇인가?' 하지만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만 초점을 맞춘다면 결코 삶의 목적을 찾을 수 없다.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생물들의 혼과 인생들의 영이 다 그의 손에 있느니라" (욥기 12:10).

   대중에게 인기 있는 수많은 책과 영화 또는 어느 강연회에서 말하는 것과는 달리 우리는 우리 자신 안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할 수 없다. 우리는 이미 그런 시도를 해보았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창조하지 않았기에 우리가 무엇을 위해 창조되었는지 알 길이 없다. 만일 내가 당신에게 한 번도 보지 못한 발명품을 건넨다면 당신은 그것의 목적을 알지 못할 것이고, 더군다나 그 발명품이 스스로 말해주지도 못할 것이다. 발명자 혹은 사용 설명서만이 발명품의 목적을 가르쳐줄 수 있다.

   나는 산에서 길을 잃은 적이 있다. 가던 길을 멈추고 야영지로 가는 길을 물었을 때, 나는 이런 말을 들었다. "여기서는 그리로 갈 수 없습니다. 산의 반대쪽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스스로에게 초점을 맞추고 시작한다면 삶의 목적에 도달할 수 없다. 삶의 목적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 하나님을 위해서 창조되었고, 우리가 누구이며, 삶의 의미와 목적 그리고 이를 통한 삶의 소중함, 더 나아가 우리가 궁극적으로 나아가는 목적지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 외의 다른 모든 길은 결국 막다른 골목으로 인도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려고 한다. 그들은 자신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이 그들의 개인 '심부름꾼' 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는 일이고 필연적으로 실패하게 되어 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지 우리를 위해 하나님이 존재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삶이란 하나님이 그분의 목적에 따라 우리를 사용하시는 것이지 우리의 목적을 위해 그분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자신에 대한 집착은 막다른 골목에 이르게 하고, 하나님께 집중함은 탁 트인, 광대하고 자유로운 삶으로 우리를 이끈다" (로마서 8:6, Msg).

   나는 삶의 목적을 발견하게 해준다는 여러 가지 방법을 제안한, 일종의 자기 지침서(self-help)와 같은 책들을 많이 읽어보았다. 이러한 책들의 한결같은 공통점은 모두 자기 중심적인 관점에서 주제에 접근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자기 지침서들은 삶의 목적을 발견하는 단계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일반적인 방법들을 제시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당신의 꿈을 생각하라. 무엇을 잘 하는지 파악하라. 가치관을 명확히 하라. 목표를 설정하라. 목표를 높게 설정하라. 목표를 이룰 수 있다고 믿어라. 꾸준히 자신을 훈련시켜라. 절대 포기하지 말라.

   물론, 이러한 권고들은 모두 유익한 것이고 이것들 덕분에 큰 성공을 아루는 경우도 종종 있다. 목표를 이루기 위해 전심으로 노력하면 일반적으로 그 목표에 성공적으로 도달할 수 있다. 하지만 성공한다는 것과 삶의 목적을 충족시키는 것은 절대 같지 않다. 개인적인 목표를  모두 달성하고 세상의 기준에 따라 엄청난 성공을 이룬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을 놓칠 수 있다. 우리에게는 자기 지침서가 제안하는 것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마태복음 16:25).

   이 소책자는 자기 지침서가 아니다. '어떻게 하면 가장 좋은 직업을 찾을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하면 꿈을 실현하거나, 더 나은 삶을 계획할 것인가',  와 같은 주제를 다루는 책이 아니다. 또한 이미 너무 과중한 일에 파묻혀 있는 우리에게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일을 효율적으로 할 수 있는지를 알려주는 책도 아니다. 오히려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에 초점을 맞추고 우리의 삶의 목적을 알아가는 것이 우리로 하여금 삶에서 일을 적게 하도록 이끌어줄 것이다. 이 소책자에서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신 목적에 맞는 사람이 되는 것에 관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창조된 목적을 어떻게 발견할 것인가?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첫번째는 추리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방법을 사용한다. 사람들은 삶의 목적에 관하여 짐직하거나 추측하거나 또는 이론화한다. 사람들이  "나는 항상 삶의 목적이...이라고 생각해왔어" 라고 말한다면, 이것은 "이러이러한 것들이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삶의 모습이야" 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수천 년 동안 철학자들은 삶의 의미에 대해 토론하고 그 의미를 조명해보았다. 철학은 그 나름대로의 용도가 있는 중요한 과목이다. 하지만 삶의 목적을 결정지을 때는, 가장 현명한 철학자라 하더라도 그저 추측할 뿐이다.

   노스이스턴 일리노이 대학의 철학 교수인 휴 무어헤드 박사(Dr. Hugh Moorhead)는 세계의 저명한 철학자, 작가 그리고 학자 250명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 "삶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그리고 그는 정말로 실망스러웠던 그 응답들을 모아서 책으로 출판했다. 이 유명한 사상가들 중 몇몇 사람들은 가장 좋은 답을 제시했다고 자신했고, 일부는 확신하지는 않지만 삶의 목적을 자신의 생각에 따라 만들었다고 인정했으며, 또 몇몇은 삶의 목적에 대해서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솔직하게 시인했다. 그 뿐만 아니라 그 학자들 가운데 몇 몇은 무어헤드 교수에게 그가 답을 발견하거든 자신들에게 알려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다행스럽게도, 삶의 의미와 목적에 대해 추리하는 것보다 더 나은 대안이 있다. 발명품의 목적을 알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은 그것을 만든 사람에게 물어보는 것이다. 동일한 방법이 삶의 목적을 발견하는 데에도 적용된다. 우리는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그분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 삶에 대하여 우리에게 보여주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계시는 언제나 추론을 능가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궁금해하면서 추측하도록 우리를 어둠 속에 두지 않으셨다. 그분은 우리 삶의 다섯 가지 목적을 성경에 명확히 제시해주셨다. 이것이 우리의 진정한 사용 지침서다. 우리가 왜 살아 있는지, 삶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무엇을 피해야 하고 미래에 무엇을 기대해야 하는지를 설명해주고 있으며,우리가 앞에서 말한 자기 지침서나 철학책을 통해서는 결코 알수 없는 것들을 알려주고 있다. "우리가 말하는 지혜는 하나님의 비밀 가운데 있는 지혜입니다. 이것은 감춰졌던 것이며,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광을 위해 창조 전에 미리 정하신 지혜입니다" (고린도전서 2:7, 쉬운성경).

   하나님은 우리 삶의 시작일 뿐만 아니라, 우리 삶의 근원이시다. 삶의 목적을 발견하기 위해서 우리는 세상의 불확실한 것들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는 언제든지 변할 수 있는 대중의 이야기나 대중 심리학, 또는 성공을 위한 동기로 이루어지는 토론회가 아닌  영원히 변하지 않는 진리에 바탕을 두고 삶을 이루어나가야 한다.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 그리고 우리가 무엇을 위해 사는지를 알 수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알기 전에, 어떤 소망을 갖기 전에 하나님은 이미 우리를 눈여겨보셨고 만물과  만인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목적의 한 부분으로서의 영광스러운 삶을 이미 계획해놓으셨다" (에베소서 1:11, Msg). 이 구절은 삶의 목적에 관한 세 가지 통찰을 제시해 준다.


   1.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우리의 정체성과 목적을 발견할 수 있다. 만일 그런 관계 를  맺고 있지 않다면, 어떻게 그 관계를 맺을 수 있는지에 대해 나중에 설명하겠다.

   2.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생각하기 훨신 이전부터 하나님은 우리에 대해 생각해오셨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의 생각에 앞서 오늘까지 진행되어왔고 우리의 도움 없이, 이미 우리가 존재하기 이전부터 계획되어 있었다. 직업과 배우자 그리고 취미와 삶의 많은 부분들에 대해 우리가 스스로 결정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우리의 목적은 스스로 선택할 수 없다. 그것은 하나님이 이미 결정해놓으신 것이기 때문이다.

   3. 우리의 삶의 목적은 하나님이 영원을 위해 계획해놓으신 보다 큰 목적의 한 부분이다. 이 소 책자는 그것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러시아의 소설가 안드레에 비토프(Andrei Bitov)는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정권 아래에서 성장했다. 하지만 어느 우울한 날 하나님은 그의 눈길을 사로잡으셨다. 그는 이렇게 회상한다. "스물일곱 살 되던 해 어느 날 나는 레닌그라드(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지하철을 타고 있었다. 그 당시 나는 너무나도 절망하여 그 순간 삶이 멈춰버릴 것 같았고, 나의 미래는 통째로 없어질 것 같았다. 삶의 의미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그 때 갑자기 한 구절이 눈에 띄었다. '하나님 없이는 삶을 이해할 수 없다(Without God life makes no sense)'. 나는 그 구절을 계속 되새기며, 그 구절을 계단 삼아 절망 속에서 빠져나와 하나님의 빛 가운데로 한 걸음씩 들어가게 되었다".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 보다 깊이 생각해보고 싶다면 www.purposedrivenlife,com을 방문해보기 바란다.)

   우리는 누구나 삶의 목적에 대해 고민하며 암담함을 느껴본적이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간에 '축하한다' 라는 말을 우리 자신에게 해주자. 왜냐하면 이제 우리는 빛 가운데로 들어가는 바로 그 길목에 서 있기 때문이다. 이 소책자를 계속 읽어보라.

생각할 점 : 하나님이 존재하시지 않고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아무런 게획이나 목적없이 존재한다면, 우리의

                   삶에는 어떤 목적도 존재 하지 않을 것이다.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삶으로 떠나는 질문


   삶의 목적에 대해 궁금했거나 혼란스러웠던 적이 있는가?


   아직 이루지 못한 삶의 목적을 찾기 위해 어떤 방법들을 시도해보았는가?


   왜 사람들이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은 채 삶의 목적을 찾으려 한다고 생각하는가?

Posted by 행복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