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간증]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주셨습니다.

 

                                                                               -신 일 용 (안양동부교회)-


   오직 사랑으로 저를 구원하신 주 하나님 아버지를 찬양합니다. 제가 구원을 받게 된 과정을 돌이켜 보면 주님의 사랑과 세심한 계획에 그저 놀라울 뿐임을 고백드립니다.

   구원받기 전 저도 기독교에 어느 정도 연관을 갖고 있었습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어머니를 따라 집에서 1시간 반 거리에 있는 장로교회를 다녔습니다. 서울에 있는 작은 교회인데다 목사님은 맹인이셨습니다. 지금 생각해보아도 그 교회는 세상적으로 볼 때 경건한 분위기를 갖고 있었고, 장애인들을 구제하는 봉사활동에도 열심이 있었습니다. 중학생이 되면서 멀기도 한데다 교회에 흥미가 없어졌고 자연히 교회로부터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고등학교때도 친구 따라 잠시 교회를 다녔지만 직책을 맡기려고 하는 것이 부담스럽고 또 입시문제로 교회를 중단하였습니다.

   비록 꾸준히 열심히 다닌 것은 아니지만 이것저것 주워들은 이야기가 많아서 나름대로 교회에 대한 비판적인 견해를 갖게 되었고 교회는 멀어져갔습니다.

   원하던 대학에 들어가는데 실패하고 오직 고시만을 목표로 법대에 들어갔고, 이후 철저하게 혼자생활하며 학교의 다른 이들과 전혀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대학 1학년을 마치고 본격적인 공부를 하기 위해 휴학을 하고 학교 고시반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2002년 7월 여름, 공부하고 잠시 쉬는 시간에 갑자기 오른쪽 가슴이 결리며 숨이 막혔습니다. 처음에는 근육통인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증상은 점점 심해졌고 불길한 생각이 든 저는 학교 근처 의원으로 향했습니다. 그 때는 너무 심하게 아파서 겨우 걸어서 가까운 의원에 도착을 했는데 종합병원으로 가라고 했습니다. 혼자서 종합병원까지 기다시피 하면서 가는데 저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죽음을 느꼈습니다. 응급실에서 증상을 얘기했을 때 의사가 걸어서 거기까지 온 것에 놀랐습니다. 기흉이라고 하면서 가슴에 구멍을 내어 공기를 빼내야한다고 했습니다. 저는 황당했습니다. 지금껏 건강 하나만은 자신하고 있었고 며칠 전까지도 1000미터가 넘는 산을 거뜬히 올라갔다 왔는데 가슴에 튜브를 박고 있는 내 모습을 보면서, 저는 꿈을 꾸고 있나 싶었습니다. 내 안에 있던 자신감과 교만이 일순간에 무너지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렇게 한 달여 요양을 하고 다시 고시반에 왔을 때는 삶의 태도가 많이 변해있었습니다. 같이 공부하는 형들과 친해지려 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조의석'형제를 만나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밖에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해 겨울 시험을 두 달 앞두고 기흉이 재발하여 수술하자는 의사의 말에 따라 폐 기포를 절제하는 수술을 받게 되었습니다. 시험을 한달 여 남기고 퇴원한 후 공부를 했지만 그 해 시험에서 떨어졌습니다.

   겨울이 지나고 2003년 봄, 그동안 꽤 친해진 학교 선배가 교회에 나가자고 계속해서 재촉했습니다. 예전 같으면 단호하게 싫다고 했을 테지만 이미 생각이 많이 바뀐 저는 뭔가 기대를 갖고 그 선배를 따라 삼일교회에 나갔습니다. 매 집회마다 천여 명이 넘는 청년들이 모이는 삼일교회는 제가 알던 다른 교회와 달리 무척 개방적이고 현대적이었습니다. 그렇게 그 교회를 서너달 다니는 중에 서서히 의석 형제가 제게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의석 형제와는 학교 고시반 숙소의 방을 같이 썼기때문에 얘기할 기회는 많았습니다. 밥을 먹을 때나, 간식 먹을 때, 잠깐 걸을 때 조금씩 조금씩 저에게 성경에 대한 이야기를 건넸습니다.

   그 때만 해도 저는 나보다 나이 많은 형이 하는 이야기니까 그냥 들어주면서 넘어갔습니다. 그러다가 또 다시 제 몸에 배가 땡기면서 손에 무언가 만져지는 증상이 나타났습니다. 한 번 크게 아파 보았기 때문에 민감하게 되었고 걱정이 되어서 병원에 가보려던 중에 의석 형제가 책자 하나를 주면서 집에 가서 읽어보라고 하였습니다. 그 때가 추석 전이었는데 책을 받자마자 그 자리에서 다 읽어버렸습니다. "생각하는 자는 믿지 않을 수 없다"라는 책이었는데, 다 읽고 나니 그 때까지 대충 알고 있었던 성경에 대한 것들이 정리가 되면서 "아! 이런 것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되었습니다.

   책을 돌려주면서 의석 형제에게 뭔가 와 닿는 것이 있다고 했더니, 의석 형제는 그 때부터 본격적으로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죄의 문제, 지옥에 대한 이야기, 구원에 대한 이야기까지... . 저는 추석 때 집에 와서 먼지 묻은 성경책을 펴서 요한복음을 읽어보았습니다.

   그 후 병원에서 진찰결과 별다른 이상이 없다고 밝혀졌고 추석연휴가 끝나고 다시 학교 숙소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의석 형제와 이어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사실 그 때까지 구원이란 문제에 대하여 그렇게 질문하며 상세하게 알려주는 사람은 만나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이야기하면서 새로웠습니다. 한 번 이야기하면 두세 시간은 금새 지나갈 정도로 집중했고 이야기가 끝나고 나면 마음이 꽉찬 느낌이었습니다.

   제가 가장 궁금했던 것은 율법문제였습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 중에서 다니지 않는 사람보다도 못한 이들이 많았고, 불교나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중에도 좋은 사람들이 많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교회와 소위 기독교인들이 참 이기적으로 보였고, 겉과 속이 다른 사람들로 보여지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이 점에 대해서 의석 형제에게 물어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마음 한켠에는 만약 이 질문에 만족할 만한 대답을 못 들으면 어쩌나 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때 전 이미 구원을 받고 싶다는 간절함이 생겼기에 그나마 열려있던 마음이 닫혀버릴까 두려웠던 것입니다. 그러나 쓸데없는 걱정이었습니다. 성경에는 없는 것이 없었습니다. 의석 형제는 율법이 생기게 된 배경을 성경을 통해 설명해주면서 로마서 3장 20절 말씀을 보여주었습니다.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그것으로 제 모든 궁금증은 일거에 해결되었지만 저는 아직 구원을 받지 못했습니다. "나는 지금 죽어도 천국에 간다" 는 의석 형제의 말에 "그것을 어떻게 아냐고, 그건 죽어서 하나님이 알아서 할 일이지 형 마음대로 하는 것이냐" 라는 질문을 했습니다. 그 때 분명히 의석 형제가 성경을 펴주면서 대답을 해주었는데 그것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그 후 4일 동안 밤낮으로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학교 수업시간에도 듣는 둥 마는 둥 가슴이 꽉 막힌 것이 정말 답답하고, 잡힐 듯 말듯 하는 것이 정말 머리가 아팠습니다.

   고민이 4일째 계속 되던 날 그 날도 수업은 뒷전이고 창밖을 보면서 고민을 하던 중 어느 순간 죄에 속해있는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사랑이 느껴짐과 동시에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셨다는 요한복음 5장 24절 말씀이 떠오르면서 꽉 막혔던 가슴이 뻥 뚫리는 듯했습니다.

   "아! 그래 옮길 것이다가 아니라 옮기셨구나!" 그리고 뭔지 모를 기쁨 같은 것도 있었는데 저는 그것이 구원받은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어 의석 형제에게 구원받았다고 말했지만 그게 아니었습니다. 저는 아직 그것을 예수님과 연관짓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런 저에게 의석 형제는 고린도전서 15장 3,4절 말씀을 알려주었고 저는 그 말씀으로 비로소 구원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기쁜 날 기쁜 날 내 죄사함 다 받은 날." 잊을 수 없는 그 날이 2003년 9월 18일입니다.

   구원을 받은 것을 확신하자 의석 형제는 그제서야 교회에 대해서 얘기를 꺼냈습니다. 그전까지는 교회 이야기는 일절 하지를 않았습니다. 모임에 대한 대강의 이야기를 듣고 그 주일에 안양동부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렸습니다.자매들이 머리에 흰 천을 쓴 것과 떡을 떼는 모습이 생소했지만 거부감이 들거나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아! 이것이 예배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아무문제가 없었는데 제가 달라진 모습을 보이자 어머니를 비롯하여 주위사람들의 말과 지금껏 보아왔던 교회의 모습이 복합되면서 제 마음이 복잡해졌습니다. 그래서 제 스스로 진정한 예배가 무엇인지 깨달아보고자 주일에 안양동부교회의 예배를 마치고 전에 다니던 삼일교회 오후 예배도 참석해보았습니다. 오전에 예배를 드리고 기쁜 마음으로 삼일교회에 참여했는데 예배의 형식도 주님이 기뻐 받으실 것이 없지만 시작이 되었는 데도 여기저기 자유분방하게 웃고 떠드는 모습이 마음에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믿기 전에는 그렇게 활기차고 신세대처럼 좋아 보였는데 이제 그게 아니었습니다. 기도 시간에도 내내 경건치 못한 모습들, 특히 옆에 있는 분의 다리를 꼬고 앉아 있는 모습, 경건치 못한 모습을 보며 더 이상 그 자리에 앉아 있고 싶지 않았습니다. 더 있다가는 마음이 터져 버릴 것 같았습니다. 그런 기분은 처음이었습니다. 멍한 상태로 교회를 뛰쳐나와 집에 돌아왔습니다. 한동안 회개와 감사의 눈물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뭐든 성경에 기준을 두고 생각해야하고 아직 믿음 안에서 어린아이이기 때문에 제대로 된 교회에서 제대로 커나가야 한다고 한 의석 형제의 충고가 떠오르면서 반성을 주님 앞에 거듭했고, 이 일로 더욱 확고한 진리에 거하게 되었음을 생각할 때 주님께 감사가 됩니다.

   제가 구원에 이르게 된 일을 곰곰이 생각하면 할수록 주님의 저를 향한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오직 사랑으로 저를 낮추시는 수고로움을 행하셨고 주님을 알지도, 찾지도 않는 저를 위해 계획을 세우셨고 그 계획대로 저를 이끌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얼마 전 읽은 시편 107편 말씀은 나를 구원하신 주님의 말씀입니다.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임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함이라. 그러므로 수고로 저희 마음을 낮추셨으니 저희가 엎드러져도 돕는 자가 없었도다. 이에 저희가 그 근심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구원하시되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그 얽은 줄을 끊으셨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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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법정

횃불 2016. 4. 14. 12:51


                                          그리스도인의 법정


   '너를 송사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송사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주고 재판관이 관예에게 내어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마 5:25).


   이 말씀에서 우리가 배우는 표면적인 교훈 중 하나는 그리스도인들은 가급적 법적인 분쟁에 관여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남에게 입은 손실에 대해 보상을 받기 위해 법정에 달려가는 것은 자연스런 반응입니다. 그러나 신자는 자연적인 반응보다 훨씬 높은 원칙의 지배를 받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종종 자연적인 원칙을 뛰어넘습니다.

   오늘날 법정은 각종 사고, 횡령,이혼, 유산상속 등의 소송으로 쉴 날이 없습니다. 많은 경우에 사람들은 어서 빨리 부자가 되려는 기대를 가지고 변호사에게 달려갑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법의 조력으로가 아니라 사랑의 힘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어떤 이가 말한 대로, "만일 당신이 법의 조력을 얻기 위해 간다면, 거기서 도움을 얻을 것이나 당신이 가진 모든 소유를 남김없이 지불하게 될 것입니다."

   그 문제를 확실히 해결할 사람은 변호사뿐이며, 그는 그에 따른 비용을 요구합니다. 어떤 화가가 이런 관계를 그림으로 묘사했는데, 원고는 소의 머리를 잡아당기고, 피고는 꼬리를 잡아당기고, 그리고 변호사는 소에게 우유를 먹이고 있었습니다.

   고린도전서 6장에서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문제가 생겼을 때 법정에 가는 것이 밝히 금지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교회 내의 지혜로운 사람에게 그들의 문제를 가져가야 합니다. 그들은 이 세상 제도의 판관들 앞에서 법으로 다스림 받기보다는 차라리 불의를 당하고 속임을 당하는 것이 더 나은 것입니다. 여기에는 그리스도인 부부간의 이혼 문제도 포함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자와 불신자간의 문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리스도인이 자기의 권리를 찾기 위해 법정에 나아가야 할까요? 그 답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삶을 주관하신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는 것이 더 좋다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잘못을 행한 사람을 법정에 고소하는 데는 경건한 삶이 필요치 않습니다. 그러나 그 문제를 하나님께 맡기고 그 일을 그리스도의 구원하는, 변화시키는 능력을 증거하는 기회로 사용하는 데는 경건한 삶이 필요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가능한 한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한 가운데 살아야 합니다(롬 12:8).

   "어떤 사람이 자기와 자기 이웃 사이에 담을 쌓기 시작했습니다. 이웃이 와서 말했습니다. '담을 쌓으려거든 당신 땅에나 쌓아요. 내 땅을 지금 5피이트나 침범하고 있는데요.' '미안하군요. 저는 제 곁에는 항상 좋은 이웃만 있는 줄 알았는데요. 그러면 제가 제안을 하지요. 당신이 원하는 곳에 담을 쌓고 비용을 청구하면 제가 지불하겠습니다.' 그 담은 결코 세워지지 않았습니다. 그럴 필요가 없었습니다1" (E. 스탠리 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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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서 부르시면

횃불 2016. 4. 14. 12:46

     

                                    주님께서 부르시면

                                                                                - 이 명 옥


                                  주님께서 부르시면

                                  언제든지 달려갈 준비를 순간으로 합니다.


                                  하루 하던 모든 것을

                                  다하지 못한 채 접어두고라도

                                  주님께서 곁으로 부르시면

                                  언제든지 달려 갈 것입니다.


                                  매일로 주님에게 갈 준비를 합니다.

                                  가진 모든 것을 기쁘게 정리하며

                                  짐을 가볍게 하고 부르시면 주님 곁으로

                                  달려갈 준비를 단단히 매일로 합니다.


                                 그리워 눈물 뿌리시는 주님에게

                                 천년으로 기다리시는 내 사랑에게

                                 부르시면 주님 곁으로 달려가기 위해

                                 가진 모든 것 아낌없이 버려두고


                                 언제든지 주님 곁으로 지체 없이 가려고

                                 오직 주신 사랑과 믿음과 소망만을

                                 챙겨 가방에 담아두어 매일로

                                 주님 곁으로 부르시면 속히 갈 준비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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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횃불칼럼]      

                      "...아버지여 내가 ...죄를 얻었사오니..." (눅 15:21).


   아버지가 그를 맞으러 달려나가서 그의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춘 것은 탕자가 회개하고 돌아올 때 비로소 이루어졌습니다. 회개가 있기 전에 먼저 용서를 베풀었다면 그것은 의로운 처사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성경의 원칙은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입니다(눅 17:3).

   탕자가 먼 나라에 있는 동안 아버지가 그에게 도움을 보냈다는 기록은 일절 없습니다. 만일 그렇게 했다면, 그것은 그 거역자의 삶 속에서 행해질 하나님의 역사를 방해했을 것입니다. 주님의 목적은 그 완고한 자를 철저히 무력한 상태로 끌어내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분은 탕자가 자기 포기 상태에 이르러야 한다는 것과, 그는 밑바닥에 내려가기 전에는 결코 올려다 볼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 방황자가 그런 상태에 속히 이르면 이를수록 그는 속히 회복할 준비를 갖추게 됩니다. 이에 아버지는 그의 아들을 주님께 맡기고 그러한 철저한 참회의 순간이 오기를 기다려야만 했습니다.

   이것은 부모에게-특히 어머니들에게-가장 하기 어려운 일 중 하나입니다. 우리의 본성은 거역한 아들 딸을 주님께서 내리신 모든 징계조처에서 구제해 주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부모들이 해내는 일은 주님의 목적을 방해하고 그 사랑하는 자녀의 고통을 연장시키는 것뿐입니다.

   스펄젼은 말하기를, "잘못을 행한 자들에 대한 가장 진실한 사랑은 그들과 친근히 지내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일에 예수님께 충성하는 것이다" 라고했습니다. 범죄한 사람을 계속 그 가운데 머물게 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그 사람을 주님께 맡기고 "주님, 어떤 희생이 있더라도 그를 회복시켜주십시오" 라고 기도합니다.

   다윗이 범한 가장 큰 실수 중 하나는 압살롬을 회개하기 전에 데려온 것이었습니다. 얼마 후에 압살롬은 백성들의 마음을 얻으면서 그의 부친에게 반역할 음모를 꾸미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그는 그의 부친을 예루살렘에서 쫓아내고 자신이 그 자리에 올랐습니다. 그가 군대를 거느리고 다윗을 죽이려 나섰을 때에도 다윗은 그의 군사들에게 압살롬을 죽이지 말라고 일렀습니다. 그러나 요압은 생각을 바꾸고는(압살롬을 데려오자고 왕에게 권한 자가 요압이었음-역주) 압살롬을 살해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아들 딸을 비참한 삶 가운데 처하게 하시는 것을 바라보는 고통을 기꺼이 견디는 부모들은 종종 보다 큰 슬픔을 면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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