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믿음에 있는가

                                    시험하고 확증하라


                                천국에 갈 수 있느냐?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빌립보서 3:20).


   "천국에 갈 수 있습니까?" 이와 같은 질문은 필자가 수없이 해온 고전적인 질문이다. 필자뿐만 아니라 바른 전도자라면 당연히 했을 질문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전도함은 천국에 감을 목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땅위에 있는 기독교 신자에게 " 왜 하나님을 믿는가"라고 물으면 당연히 "천국에 가려고 믿는다"고 대답해야 할 것이다.

   성경 요한복음 3장 16절에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신" 이유는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시고 있다. 멸망의 지옥에 가지 않고 영생을 얻어 천국에 가게하기 위하여 예수께서 오신 것이 사실이라면 당연히 천국가기 위하여 예수 믿는다고 말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한국의 기독교 현실은 이와 같은 질문을 하면 일단은 이상한 사람 취급하는 것이 현실이다. 이것은 슬픈 일이요 비극적인 모습이다.


   여기서는 "천국에 갈 수 있느냐"는 질문을 중심으로 이어지는 여러 가지 상황들을 살펴보면서 구원의 진리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먼저 천국에 갈 수 있느냐는 질문은 지옥을 전제로 하는 것인데 상당한 기독교인들이 지옥을 믿지 않는다. 그들도 지옥을 믿는다고 대답은 한다. 그러나 실제로 그들은 입으로는 인정하나 행위로는 부인한다. 오늘날 기독교가 샤머니즘의 영향을 받아 내세보다는 현세의 복을 중심으로 발전한 결과 지옥에 대한 강조가 약해진 까닭이리라. 그러므로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현세의복에 관심을 두고 지옥에 대한 관심이 점점 없어진 것이다.

   성경말씀이나 찬송들은 하나같이 현실의 복보다는 내세의 복에 대한 소망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언제부턴가 천국에 대한 소망의 가르침이 약해지면서 현실의 축복에만 매달려 있다. 그리고 사람들의 뇌리에서 지옥에 대한 관심이 점점 사라져갔다. 결국 지옥을 믿지 않는 교인은 이렇게 만들어진다. 이것이 사단의 전략이다. 한국의 기독교는 이러한 절차를 거쳐 사단에게 먹힌 것이다. 지옥이 빠진 기독교는 더 이상 사단에게 두려움을 주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사단의 친구가 된 기독교, 사단의 도구나 노리개가 된 기독교가 되는 것이다.

   직선적으로 이야기한다면 예수님은 사람을 지옥에서 천국으로 데려가는 것이요, 사단은 지옥으로 데려가는 것이다. 지옥에 대하여 관심 없는 기독교는 사람을 지옥에 데려가기 위해 분주한 사단의 전략을 착실히 수행하는 종으로 전락한 모습이다.

   지옥을 믿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자주 만난다.  그러나 필자가 그들에게 지옥이 어떤 곳이냐고 물으면 자신 있게 대답하는 신자들을 거의 만나보지 못했다. 지옥이 얼마나 끔찍한 곳인데 믿는다고 하면서 구체적으로 설명도 못할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은 지옥을 믿지 않는 것이다. 필자는 감히 말하고자 한다. 우리나라 기독교인들의 상당수가 지옥을 안 믿는다. 참으로 슬프고 비통한 현실이다.

   천국에 갈 수 있느냐는 질문은 이와 같은 관점에서 대단히 중요한 질문이요 기독교인들을 향한 중요한 도전이 되고 있다. 이 질문은 수많은 기독교인들을 살릴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필자가 "천국에 갈 수 있느냐"는 질문을 하였을 때 나온 반응들을 함께 생각해보며 구원의 진리를 생각해보고자 한다.

   첫 번째 반응은 "그것을 어떻게 미리 알 수 있느냐"는 것이다. 우리가 열심히 주님을 섬기며 살다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가면 그때에 가부간 결정되는 것 아니겠느냐는 것이다. 어떤 이는 지금 천국에 간다고 확신하고는 있지만 앞으로 신앙생활을 잘 하지 못하면 탈락하고 말 터인데 어떻게 천국 간다고 함부로 확신 있게 대답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성경은 "믿는자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요한 복음 6:47)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러한 말씀에 관심이 없거나 무지한 신자들이 의외로 많아 천국의 소망을 불확실하게 생각하고 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자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한복음 5:24).

   얼마나 명확한 하나님의 약속인가! 천국에 가는 것을 확실하게 알고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천국의 소망에 잡혀 날마다 당하는 어려움을 극복하며 한 걸음 한걸음 믿음으로 나아가는 것이 성도의 삶이다. 천국에 갈 수 있는 확신도 없이 교회에 다닌다는 것은 학교에 입학한 적도 없이 학교에 날마다 나가는 학생처럼 불행한 것이다. 그는 졸업식날 울어도 졸업장을 받지 못할 것이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열심히 다닌 학교생활이 졸업장을 받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은 기가 막힐 일이다.

   그대는 입학식과 같은 구원을 받은 적이 있는가? 냉정히 그대의 신앙을 점검해 보라. 진정 양심적으로 생각해보라! 천국에 대한 소망에 부풀어 있는가? 그리고 그 소망은 말씀에 확실한 근거를 가지고 있는가? 성경에 근거도 없는 자기 확신은 스스로 속는 것임을 명심하라! 스스로를 냉정하게 점검해 봄이 그대의 생명을 진정 사랑하는 것임을 명심하라. 한 번 더 강조하거와 자신에 대해서 관대하지 말라. 대충 넘어가지 말라.

   이 질문에 대한 두 번째 반응을 들어보자. "나는 천국에 가려고 예수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교회에 다니지만 자신은 사람답게 사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는다는 것이다. 기독교가 사회를 위해 소금의 역할을 하며 불쌍하고 소외당하는 사람들을 돌아보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가. 소위 말하는 해방신학이라고 하는 이 사상은 억압당하고 소외당하는 사람을 위해서 투쟁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와 같은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폭력 투쟁도 사용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세상을 밝게 아름답게 하는 사회 사업에 힘써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세상을 낙원으로 만들어야지 어디 새로운 낙원이나 천국이 있겠느냐는 것이다.

   그들의 말은 상당히 매력이 있어 보인다. 그러나 거기에는 허점이 있으니 그들의 이상은 좋으나 이루어질 수없는 이상, 즉 허상에 불과한 것이다. 성경은 모든 인생이 다 죄인이라고 증거하고 있다. 죄인들이 모여서 어떻게 낙원을 만들 수 있는가? 수많은 사상가들이 만든 이론으로 세상을 고쳐보려 하였으나 모두 실패로 끝나지 아니하였던가.

   기독교 사상으로 세상을 낙원으로 만들 수 없다. 예수님은 천년왕국을 약속하셨지만 하나님의 특별한 역사로 천년낙원을 만드시는 것이지 인간을 서서히 개조하여 만드는 것이 아니다.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빌립보서 3:20).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마태복음 5:3).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은 필자가 사회사업이나 복지사업을 필요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것들은 필요하나 천국복음을 위해서 해야만 함을 말하는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한 세 번째 반응을 보면 "당연히 갈 수 있지요" 하는 것이다.  물론 합당한 말씀이다. 그러나 필자의 두 번째 질문에 그는 막히고 만다. "무슨 근거로 천국에 간다고 말합니까?" 하고 질문하면 "그냥 믿으니까 가는 것 아닙니까?" 하는 대답이 대부분이다. 물론 원칙적으로 믿음으로 간다고 하는 말에 모순이 없다.

   어떤 이는 그냥 예수를 믿으면 되는 것이지 왜 그렇게 복잡하게 말하는가 하고 물을 것이다. 그러나 믿음을 논할 때 그렇게 막연한 것이 아니다. 무엇을 어떻게 믿느냐 하는 문제가 있는 것이다. 마태복음 7장21절 이하의 말씀에는 믿음이 막연한 것이 아님을 명백히 말해주고 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이 얼마나 두렵고 무서운 주님의 경고요 엄숙한 선언인가! 그들은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평생을 살았던 헌신적인 신자였다. 분명하게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그들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천국에서 볼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하나님의 공의는 두려운 것이다. 성경은 진실하고 완전한 책이다. 분명하게 성경에 있는 구속의 진리를 따라서 거듭난 성도가 아니면 평생을 주님을 위하여 산 순교자라 할지라도 멸망의 지옥에 갈 수밖에 없다.

   오늘날 주여 주여 하면서 막연하게 천국에 갈 거라는 생각만 가지고 교회에 출입하는 수많은 허수아비교도들은 자신의 영혼을 생각하여 정신을 차리고 구원을 받아야 할 것이다.

   오늘의 많은 신자들은 믿음을 단순히 "신앙의 행위"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래서 교회의 모든 모이는 시간에 열심히 참여하고 신자로서 모범된 행실로 살기 위하여 노력하고 교회에서 맡긴 직분에 충실하고 헌금을 성심을 다하여 내고 목사님의 말씀에 순종 잘하는 그런 모습이 믿음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믿음이며 좋은 믿음을 가졌다고 말하는 것 아닌가. 그리고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하였으니 결국 천국에 가지 않겠느냐고 그들은 곧잘 말한다. 이들은 "나는 이미 믿고 있으니 나에게 전도하지 말고 다른 사람에게 전도하시오 왜 잘 믿고 있는 사람에게 전도하시오?" 하면서 불쾌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알 것은, 이런 반응을 나타내는 사람은 자신이 구원 받지 못했음을 실토하고 있는 것이다. 죄송하지만 정상적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의 눈에는 한국의 대부분의 기독인들이 구원받지 못한 자들로 보인다는 현실이다.

   한국의 영적 현실은 이교도들에게 전도하는 것보다 기독교인들에게 먼저 전도하여서 기독종교인에서 거듭난 그리스도인으로 만들어야 한다. 바울도 지적했듯이 자기의 말하는 내용이 무엇인지조차 깨닫지 못하는 종교인들, 그들은 종교 속에 갇혀 자기가 무엇을 믿는지조차도 알지 못하며 지옥에 가고 있다.

   "사람들이 이에서 벗어나 헛된 말에 빠져 율법의 선생이 되려 하나 자기의 말하는 것이나 자기의 확증하는 것도 깨닫지 못하는도다"(디모데전서 1:6).

   이러한 사람들은 사도신경을 잘 외우며 주기도문을 잘 말하지만 그 뜻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방황하는 자들이다. 아무 뜻도 모르고 종교적으로 경을 외우는 사람들은 사도시대에도 있었으며 그들은 소경이 되어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 "예루살렘에 사는 자들과 저희 관원들이 예수와 및 안식일마다 외우는바 선지자들의 말을 알지 못하므로 예수를 정죄하여 선지자들의 말을 응하게 하였도다"(사도행전 13:27).

   아무 의미도 모르고 종교적으로 외우는 경전, 앵무새의 말과 무엇이 다를까? 그들은 종교적으로 그 알지 못하는 것을 믿을 뿐 아니라 그 알지 못하는 것들을 훼방하기도 한다.

   앞에 인용한 사도행전의 말씀을 보아도 그들은 성경 속에서 태어나서 성경을 늘 외우면서 자라고, 또한 성경을 가르치는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은 성경대로 오신 예수님을 대적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 얼마나 이상하고 우스운 이야기인가. 참으로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어처구니없는 이와 같은 일이 초림 예수 때에 일어났고 재림 예수 때에 또 일어나는 것이다.

   예수님이 성경을 사랑하고 믿는다는 종교인들에 의해서 죽임당함 같이 오늘날도 거듭난 사람들이 기독교 정통이라는 사람들에 의해서 핍박을 받고 있다. 이 시대에 참으로 거듭난 아름다운 무리들이 성경의 진리를 따라 모이는 순수한 교회를 주님이 감추어두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소수이지마는 행복한 사람들이다.

   이외에도 이 질문에 대한 기이한 대답들이 많다. 그러나 지면 관계로 그칠 수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천국에 가는 진리를 소개하며 마치고 싶다.

   천국은 거룩한 곳이요 하나님이 계시는 곳이다. 그러므로 죄인은 천국에 데려갈 수 없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이다. 털끝만한 죄만 있어도 지옥에 떨어질 수밖에 없는 무서운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누가 당당히 설 수 있겠는가? 아무도 없다. 그러므로 교회에 다니면서 자신이 아직도 죄인이라고 하거나, 의인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죄 문제를 하나님 앞에서 명쾌하게 해결 받지 못했다면 지옥에 갈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은 무서운 심판 아래 있는 인생들을 누가 살릴 수 있겠는가?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로마서 3:19).

   주님께서는 이와 같은 죄인의 현실을 보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셔서 죽으시므로 우리의 모든 죄를 온전히 해결하셨다. 죄인들의 모든 죄, 곧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를 대신 담당하심으로 죄인을 죄에서 해방시키셨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로마서 3:23,24).

   모든 죄를 해결하신 주님을 믿는 자는 죄에서 해방되었다. 그는 천국에 들어갈 시민권을 얻은 것이다. 그에게는 정죄가 없되 영원히 없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로마서 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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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희믿음에 있는가

                              시험하고 확증하라


                                거듭났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한복음 3:3).


   "거듭난 적이 있습니까?" 필자가 최근에 어떤 장로님을 만나서 물었다. 그는 대답하기를 "학창 시절에 교회에 입문했습니다만 군대에 가서 신앙이 나아졌습니다. 뭐, 거듭났다고까지야 말할 수 있겠습니까마는 아무튼 군대에서 신앙의 진전이 있었다고 봐야지요." 우물쭈물 허둥대는 그를 바라보며 처량한 생각이 들었다.

   오늘의 수많은 기독교 신자들에게 거듭남을 수없이 묻고 있지만 대부분 횡설수설하며 거듭남의 의미도 모른 채 방황하고 있다. 얼마나 슬프고 안타까운 현실인지 모른다.

   여기서는 거듭남에 대한 오늘의 기독인들의 생각들을 살펴보고 거듭남의 본질에 대해서 생각해 봄으로써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이 거듭나는데 도움을 주고자 한다.이해를 돕기 위해서 필자가 질문했을 때의 반응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거듭남을 질문했을 때의 첫 번째 반응은 "그럼요. 거듭나지 않고 어찌 교회에 다닙니까?" 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거듭났느냐"고 물으면 대답은 여러 가지다. 그들은 거듭남을 자신의 변화된 모습으로 설명하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어떤 이는 자기는 불교 신자였는데 수십 년간 믿던 불교를 정리하고 왔으니 거듭난 것 아니냐고 대답한다. 불교 신자가 우상을 정리하고 하나님을 믿기로 결정하였다면 이는 대단한 변화임에 틀림없다. 불교가 무엇인가? 십계명 중에 첫 계명과 둘째 계명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즉 기독교 신앙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종교 아닌가? 그와 같은 종교를 정리하고 하나님께 귀순하였다면 당연히 칭찬 받아야 할 간증거리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이것이 거듭남의 근거는 전혀 아니다. 그는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인가? 하나님 아버지를 모르고 살다가 하나님 아버지께 돌아오기로 결심하고 행동에 옮긴 위대한 결단이다. 그는 이제 하나님께 왔으니 정식으로 등록해야 할 것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다니는 회사를 옮기기로 결심했다면 다른 회사에 이력서를 내고 입사절차를 밟아야 한다. 이것을 성경에서는 거듭남이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또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두 번째로 그들의 대답을 들어보면 자기는 예수 믿기 전에 술에 중독되었던 사람인데 지금 술과 담배를 정리하여 온전히 새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도 엄청난 변화임에 틀림없다.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술과 담배를 즐기고 있다면 누가 들어도 가짜라고 할 것이다. 이것은 비단 한국뿐만 아니라 미국을 비롯한 외국도 마찬가지다. 필자가 알고 있는 여러 외국의 신실한 성도들은 한결 같이 술과 담배 근처에도 가지 않는다.

   오늘날 한국의 상당수 기독인들이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술 담배를 하는 것을 보는데 이것은 전적으로 잘못된 것임에 틀림없다. 성경에서도 술을 금하거니와 실제 술 담배는 의학적으로나 간증적으로도 잘못된 것이다.

   술 이야기가 나왔으니 경험담 한마디 하고 싶다. 오래 전에 어떤 구도자가 "술을 적당히 먹으면 되지 왜 꼭 금해야 되는가?" 하고 계속 물었다. 아무리 이해시키고 말씀을 보여줘도 막무가내였다. 필자는 할 수 없이 이렇게 물었다. "당신에게 이렇게 성경공부를 해주니 나를 좋게 생각하고 있지요?" 하니 그렇다고 대답하였다. 나는 또 묻기를  '그런데 만약 그대가 여기서 가다가 보니 내가 어느 술집에서 술을 먹으며 담배를 피우는 것을 보았다면 내일 나에게 성경 배우러 오겠소?" 하니 그 때부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와 같은 이야기는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깊이 생각해 보아야할 이유가 있다고 생각된다.

   필자의 아는 성도들이 현재 직장에서 얼마나 고통을 당하고 있는지 아는가? " 김 과장님은 장로라도 적당히 술을 드시는데 당신이 뭐 잘났다고 혼자만 술잔을 안 받느냐?" 하고 핍박받는 이야기를 나는 수 없이 들어왔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도 이런 경험이 있으리라.

   그와 같은 오늘의 기독교 현실에서 술 담배를 끊고 주님을 섬기기로 결심하고 실천하여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실로 대단한 신앙의 결단임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자기는 거듭난 사람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일리는 있다. 그는 생각할 것이다. "나는 다른 사람보다 확실하게 정리하고 분명한 간증으로 믿으니 거듭난 삶이 아니냐? 내가 새로운 삶을 살고 있는데 어찌 거듭나지 않았단 말인가. 나는 술 담배뿐만 아니라 옛날의 습관과 행실도 다 바뀌고 전혀 다른 사람으로 사는데 왜 거듭나지 못했다고 하는가? 옛날의 나를 알고 있는 사람은 요즘 내 모습을 보고 얼마나 놀라는지 아는가? 나는 요즘시간만 나면 전도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버렸는데 내가 거듭나지 못했단 말인가" 하고 항변할 것이 분명하다.

   필자도 독자들의 이런 마음을 다 헤아리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의 거듭났다는 항변에 동의할 수 없다. 그 이유는 이 단원의 마지막에 거듭남이 무엇인가를 밝히면 다 이해되리라고 생각된다.


   세 번째로 거듭남의 질문에 대한 답변은 무엇인가? 어떤 권사님의 답변인데 그는 말하기를 "날마다 거듭나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생각하여 보자. 어떤 아이에게 아빠를 가리키며 "너의 아빠니? 너를 낳아주었니?" 하고 물었다면 뭐라고 대답해야 하겠는가? 만약 아이가 "네! 나는  날마다 태어나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이야기인가. 거듭남은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 나는 것일 진데 결단코 여러 번 날 수 없는 것 아닌가?

   그에게 더 이상 교제는 못했지만 만약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면 아마 그는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고린도후서 4:16) 하는 말씀 정도로 답변하였을 것이 분명하다. 거듭난 성도가 주님과 함께 살아가면서 날마다 새로운 기쁨, 새로운 깨달음, 새로운 힘을 받아서 살아가는 일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것은 날마다 때마다 이루어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가끔 이루어짐이 안타까운 것이다. 그럼에도 이것은 이미 거듭난 사람의 삶을 이야기하는 것이지 거듭나는 것은 이것과 전혀 다른 경험이다.


   거듭남에 대한 오류는 또 있다. 네 번째 이야기를 해보자. "거듭남이요? 우리가 어떻게 감히 거듭났는지 아닌지 말하며, 또한 그것을 알 수 있단 말입니까?" 필자의 질문에 대한 어떤이의 답이다.


   성경은 여기에 대하여 무어라고 말하고 있는가? 베드로전서 1장 23절에서 베드로 사도는 적절한 답변을 해주고 있다. "...너희가 거듭난 것이...". 분명하게 거듭난 사실을 피차에 알고 있었다는 것을 확실하게 말하고 있지 아니한가. 누가 무어라고 해도 신자가 거듭난 사실은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우리는 세속 종교처럼 알지 못하는 우상을 막연한 믿음으로 섬기는 사람들이 아니다. 우리의 믿음은 분명한 사실에 근거하여 믿는 것이니 그러므로 참된 진리이다. 거듭난 사실도 확인 못하고 믿는다면 나무 밑에 단을 쌓고 복을 줄 수 있는지 아닌지도 모르고 복 달라고 절하는 샤머니즘과 무엇이 다른가? 알지 못하고 믿거나 분명치 않게 믿는 것은 진정한 기독교 신앙이 아니다. 여러 번 강조하거니와 기독교는 진정한 의미에서 종교가 아닌데 요즘은 종교화되어 타락의 늪에 이미 깊이 빠져있음을 탄식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분명히 밝히거니와 종교는 사람의 영혼을 건지지 못한다.  종교에는 희망이 없다. 그들은 거짓으로 희망을 준다고 말하며 희망이 있는 것처럼 꾸미는 것이다. 기독교가 종교의 늪에서 회개하고 성경으로 돌아오지 아니하면 결코 희망이 없고 수많은 사람들을 예수님 이름 팔아서 속이는 사기 행각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다섯 번째를 말해보고자 한다. "나는 집사(혹은 장로)이며 열심으로 섬기고 있는데 왜 거듭나지 못했겠느냐"고 화내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억울하고 원통하여 필자에게 대들기까지 한다. 참으로 안타깝고 불쌍한 모습이다. 그들이 그 상태로 하나님의 심판대까지 간다면 얼마나 원통하겠는가.

   분명히 말하거니와 교회에 헌금을 많이 바치고 삶을 드려 헌신하고 죽도록 충성한 사람들일지라도 열심 없는 사람들보다 천국에 가는데 있어서 조금도 도움 되는 것이 없음을 알아야 한다. 그들은 차라리 열심이나 없었으면 절망 중에 겸손하여 십자가를 붙들고 거듭났을지도 모르리라. 그들의 열정이 오히려 그들을 지옥에 끌고 가는 무기가 되다니, 얼마나 애통한 일인가. 바울은 여기에 대하여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의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다"(로마서 10:3)고 깨우치고 있다.

   거듭난 사람에게는 "열심"이 상급이 되지만 거듭나지 못한 죄인의 열심은 지옥에 가게 하는 자살무기가 되는 것이다. 표현이 좀 과격해도 사실이니 어찌할 수 없다.

   또 한 사람의 이야기만 더 말하고 싶다. "거듭남이요? 그것은 목사님이나 장로님들이나 가능한 이야기지 우리 같은 사람들이 어찌 감히 거듭남을 말하겠습니까?"  이와 같은 사람들은 거듭남을 믿음의 높은 수준으로 이해하고 있는 경우이다.  그러나 알 것은 거듭남은 믿음의 높은 수준이 아니라 가장 기초요 시작이다.

   그렇다면 거듭남은 무엇인가? 거듭남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앞에 열거한 예를 생각하며 살펴보는 것이 좋으리라고 생각된다. 열거한 내용을 분석해보면 거듭남을 생활의 변화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결심하고 좋지 못한 습관이나 행동을 버리고 새 사람이 되면 사람들은 그들을 칭찬하게 마련이다. 다시 말하면 개과천선(改過遷善)하여 사는 것을 거듭남이라고 착각한다.

   개과천선은 세상에서나 신앙 안에서나 대단히 좋은 일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개과천선과 거듭남은 분명 다르다. 이것을 착각하여 진짜 같은 가짜 그리스도인들이 수없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개과 천선은 거듭남을 경험한 사람들의 열매이다.

   개과천선은 행위를 이야기하는 것인데 거듭남과 행위는 전혀 관계가 없다. 다음 말씀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디도서 3:5).

   이 말씀에서 보듯이 거듭남, 즉 중생은 행위가 아니다. 거듭남은 두 번 태어난다는 뜻으로서 이 세상에 마귀의 자녀로 태어난 인생이 하나님의 자녀로 두 번째 태어난다는 말이다. 태어난다고 하는 것을 생각해 보라. 어미가 낳아주는 것이지 자신이 스스로 자기 노력으로 자기를 만들어 가는 과정이 아니지 아니한가.

   거듭남의 특징은 그 과정이 우리의 노력에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에게 있는 것이다. 요한복음 1장 13절에 보면 자녀 되는 과정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오늘날 모태교인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많은데 집안이 다 기독교 집안이라고, 어려서부터 그속에서 자라났다고 하여 거듭난 것은 아니다. 이는 다 혈통을 좇아가는 것이다. 또 힘을 다하여 열정적으로 주님을 섬기느라 좇아 다니는데 이것은 육정을 따르는 것이다. 예배당에서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울면서 금식 기도한다고 거듭난 것이 아니다. 이것은 다 육정적인 것이다.

   거듭난 증거를 물으면 간증할 것이 없으니 교파 자랑, 목사님 자랑, 교회 규모 자랑, 교인 수 많은 것 자랑 등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허탄한 자랑만 늘어놓는 거짓 신자들은 모두 지옥에 가는 줄 알라. 이것이 다 사람을 좇아가는 것이다. 사람을 좇아가는, 사람에게 잡혀있는 오늘의 불쌍한 기독교인들이여, 지옥을 향하여 가고 있는 그대의 슬픈 운명을 하루 빨리 깨달으시라.

   거듭남을 다시 이야기 하여보자. 먼저 말한 대로 하나님의 아들로 두 번째 태어나는 것이다. 그것은 요한복음 8장 44절에 보면 우리는 마귀 자식으로 태어났다고 깨우치고 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 인간은 누구나 마귀 자식으로 태어난다. 그러기 때문에 그 상태 그대로 죽으면 아비된 마귀 따라 지옥에 간다. 그런데 아비를 바꿔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면 그것이 거듭(두 번) 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거듭남은 출생사건이다. 사실이 이러한데도 거듭났느냐를 물으면 행위에 속한 이상한 이야기만 늘어놓으니 답답하지 않겠는가? 결국 하나님의 자녀로 두 번째 태어난 적이 있느냐 하는 질문인데, 여러 말 필요 없이  아니면 아니고 맞으면 맞는 것이지 다른 말이 필요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난 경험이 없이 날마다 무턱대고 하나님을 향하여 아버지라고 불러대니 하나님도 참 난처할 것이리라. 분명히 하나님은 그들을 심판 날에 모른다 하실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거듭나는가? 성경은 인간을 마귀 자녀로 태어났다고 하였지만 또 다른 곳에서는 죄인으로 태어났다고 증거하고 있다(시편 51:5). 그러므로 죄인이라는 뜻은 마귀 자녀라는 뜻인바 예수님의 피 공로로 죄 용서함 받아 죄에서 자유를 얻는 것이 거듭나는 것이다. 죄인으로 태어나 마귀 자식의 신분으로 지옥에 갈 불쌍한 인생이 예수님의 피 공로로 죄 용서함 받아 천국에 갈 의인의 신분이 되었다면 이는 거듭난 것이 분명한 것이다. 십자가에서 당신의 모든 죄가 해결된 사실이 당신의 것이 되었는가? 그러면 당신은 죄인도 마귀 자식도 아니며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이것을 네가 믿느냐?"  당신은 어떻습니까?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한복음 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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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죄와 종교로부터의 자유


              죄인도 의인도 아닌 기독교인들이여!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나타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갈라디아서 2:17).


   "성경은 왜 기록되었는가? 예수님은 왜 이 땅에 오셨는가?" 필자가 교회에 열심히 다니는 기독교인들을 만나면 흔히 던지는 질문들이다. 시원스럽게 깨닫고 대답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하여 기록된 책이라는 것을 필자가 지면을 통하여 증거한 바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왜 오셨는가?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켜 주시기 위해 오셨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마태복음 1:21).

   성경을 믿고 예수님을 진실로 믿는 거듭난 성도라면 당연히 죄를 용서받고 해방된 놀라운 간증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증거하게 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다. 이 글을 쓰면서 찬송가 405장의시자가 기억난다.

   죤 뉴톤은 아프리카 노예상인이었으며 탕아였고 이교도였다. 그러나 그가 더럽고 추악한 죄악의 사슬에서 용서받고 해방 받은 기쁨을 찬송시로 간증하고 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큰 죄악에서 건지신 주 은혜 고마워

    나 처음 믿은 그 시간 귀하고 귀하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이와 같은 간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필자가 오늘날 우리 주변의 여러 교인들을 만나서 "죄인인가요, 의인인가요" 라는 질문을 할 때, 어떤 사람은 "우리 모두가 죄인이지요" 라고 말하며, 어떤 사람들은 "의인이 되었어요" 라고 말하고, 혹은 "의인이 되었지만 죄인이라고 말해야 하지요" 라는 답변까지 듣게 된다.

   잠깐 멈추어서 묻건대, 이글을 읽고 있는 그대는 어떠한가? 무어라 답변하겠는가? 성경이 씌어진 목적도,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이유도, 수많은 전도자들이 피를 흘리며 전도한 목적도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피로 죄인이 의인이 된 진리를 전파하고 수호하기 위해서가 아닌가!


   인간은 출생 때부터 모두가 구조적으로 생리적으로 죄인일 수밖에 없다. 수많은 종교적 노력과 인격적 수양과 교육을 통해서도 의인이라는 호칭을 들을 수 없으며, 멸망당할 수밖에 없는 불행한 죄인들에게 십자가의 영원한 속죄는 긴 가뭄에 단비처럼 충격적인 기쁜 소식임에 틀림없다. 이것이 복음의 실체가 아닌가!

   도대체가 의인이면 의인이고 죄인이면 죄인이지 "의인이 되었으나 죄인이라고 불러야 한다" 는 것은 또 무엇인가? 생각하여 보라! "빚을 다 청산하여 빚은 없으나 빚쟁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말한다면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죄에서 해방시켜 의인의 신분으로 만들뿐 아니라, 의인된 기쁨에 동참시켜 주시기 위하여 십자가의 고난과 수치를 당하셨다고 성경에 수없이 기록되었거늘, 수 십년 교회에 다녔다는 사람들이 이 같은 고백을 늘어놓으니, 도대체 그들은 성경을 보는 것인가, 보지 않는 것인가? 성경을 믿는 단 말인가, 부정한단 말인가? 얼마나 우습고 안타까운 일인가!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이사야 53:5).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로마서 8:1).

   필자는 이러한 부류의 사람들이 왜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해 그 몇 가지 이유를 여기에 나열하고자 한다.

   첫째, 그들이 죄인과 의인의 문제에 대하여 분명하지 못한 이유는 그들 중의 상당수가 지옥에 대하여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은 입으로 지옥을 부정하거나 믿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오히려 지옥을 인정하고 있다고 장담하고 있다. 그러나 막상 지옥에 대해서 어떤 곳인지 아는 대로 말해보라고 하면 그냥 무서운 곳이라느니 불타는 곳 정도로 막연하게 대답하기 일쑤다. 또한 그들에게 지옥에 대해서 진지하게 들어본 적이 있느냐고 물어보면, 설교 때 잠시 듣거나 다른 기회에 지나가는 말로 약간 들은 경우 말고는 정말 지옥의 무서움과, 내가 왜 지옥에 가야만 하는가 등에 대한 심각한 깨달음이 없었다.

   그대는 어떠한가? 혹시 지옥에 대해서 피상적으로 생각하고 있지는 않는가? 입으로 지옥을 믿으나 실제로는 지옥을 두려워하지 않고 있지는 않는가?

   지옥은 끔찍한 곳이다. 마가복음 9장 43절 이하에 보면 지옥은 끔찍한 곳임을 주님께서 친히 경고하셨다. 예수님은 사역 초기부터 지옥에 대해서 증거하시고 회개하여 천국에 들어가야 할 것을 가르치셨다.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처음으로)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태복음 4:17).

   예수님은 이 땅에 왜 오셨는가? 요한복음 3장 16절에서 잘 증거된 것처럼, 죄인이 멸망당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하여 오시지 않았는가? 사람이 멸망의 지옥에 떨어지는 일이 얼마나 끔찍하고 무서운 일인가를 누구보다도 우리 주님은 친히 잘 알고 계셨다. 그러므로 주님은 기회 있을 때마다 천국과 지옥을 증거하셨고 지옥에 가지 말 것을 경고하셨다(마태복음 4:17, 5:22, 7:13, 10:28, 18:8,9 등).

   성경의 주제는 천국이요, 지옥이다. 예수님은 눈물로 지옥을 경고하셨다. 슬픔과 애절한 음성으로 아픈 가슴으로 지옥을 경고하셨다. 성경은 이 지옥과 천국을 증거하기 위하여 씌어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을 믿고 따르며 교인이라고 하는 상당수 사람들이 지옥을 피상적으로, 지식적으로 알거나 관념적으로만 생각하여 자신이 지옥에 갈 수도 있다는 가능성마저 무관심하고, 자기 나름대로는 믿는다고 하면서 교회나 교파의 가르침만 맹종하고 있으니 얼마나 슬픈 일인가!

   독자여! 그대가 만일 지옥에 대하여 두렵게 깨달아 본적이 없다면 그대의 구원을 검토하여 보라고 권하고 싶다. 왜냐하면 그대가 열심이 있는 기독교인이라 할지라도 지옥에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지옥의 문제가 내 속에서 분명하게 깨달아지면 자연적으로 내가 죄인이냐 의인이냐 하는 문제는 우리의 관심사가 되어져서 이 문제의 분명한 해결을 통한 거듭남, 곧 구원을 받게 될 것이다.


   둘째, 그들이 죄인과 의인의 문제에 대하여 분명하지 못한 이유는 그들 중에 상당수가 자신이 죄인임을 진정으로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입으로는 죄인임을 물론 시인한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미워하기만 하여도 이미 살인한 자가 되었다고 하고, 혹은 음욕만 품어도 이미 간음하였다고 하니, 죄인 아닌 사람이 있으랴. 그러니 나는 죄인이지 아니한가"라고 생각하거나, 또는 "로마서 3장 10절에 있는 대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라고 하신 것을 보아도 내가 죄인이지 아니한가" 하는 막연한 생각으로 죄인이라고 인정하고 있다. 그들이 처한 상태가 분명치 못하기 때문에 죄로부터의 구원이 분명치 못한 것이며 죄인과 의인의 규정도 분명치 못한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무엇을 증거하고 있는가? 인간을 가리켜 심히 부패하고 썩은 죄인이라고 말하고 있지 아니한가! 스스로는 구제불능의 추악한 죄인이, 자신의 노력으로 자신을 죄에서 구원할 수 없으므로 겸손하게 구원자 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할 터인데, 이 구원의 길을 거절한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자멸하는 죄인으로 규명하고 멸망의 지옥에 던지시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생을 보시는 관점은 심히 더러운 구더기 같은 인생이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눈에는 달이라도 명랑하지 못하고 별이라도 깨끗치 못하거는 하물며 벌레인 사람 구더기인 인생이랴"(욥기 25:5,6).

   독자여, 그대는 구더기처럼 더럽고 심판 받아 마땅한 죄인임을 깨닫고 주님 앞에 나와서 속히 죄 씻음 받고 구원을 얻으시라.

   결론적으로 자신이 끔찍하고 무서운 심판의 목전에 놓인 가련한 죄인임을 양심적으로 깨달은 사람은 자연히 죄인의 사슬에서 벗어나고자 몸부림칠 것이며, 그러한 사람은 '죄인과 의인의 문제'를 분명히 하여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이다.


   셋째, 그들이 죄인과 의인의 문제를 분명히 하지 못하는 것은 성경에서 말하는 죄인과 의인의 개념을 분명히 모르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죄인은 단순히 죄를 짓는 사람 정도가 아니다. 죄인의 개념은 마귀의 자식이라고 하는 두려운 뜻이 있다. 요한복음 8장 44절에서는 "너희는 마귀에게서 났으니 죄를 짓는다"고 하셨고, 요한일서 3장 8절에서는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라고 말씀하고 있다.

   거듭났다는 뜻은 마귀의 자식이 하나님의 자식으로 다시 태어났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또한 죄인의 신분이 의인의 신분으로 변화된 것을 의미한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로마서 3:23, 24).


   넷째, 그들이 의인과 죄인에 대해서 분명치 못한 것은 자신들의 행위와 노력으로 의로워지려는 종교적 고뇌에 붙잡혀 있기 때문이다.

   서두에 기록된 갈라디아서 2장 17절과 갈라디아서의 다른 말씀들을 검토하여 보면, 갈라디아 교회도 예수님을 믿는다고는 하지만 실제로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고 가르치는 이단적 가르침에 미혹된 자들이 있었다.

   성경은 분명하고 힘있게 믿음으로만 의로워지고 구원받는다고 증언하고 있다(갈라디아서 3:1; 에베소서 2:8 ; 로마서 3:28).

   생각하여 보라! 자신의 행위를 의지하고 있는 기독교인이 허물과 죄가 수없이 드러나고 있는 자신을 외식과 거짓으로 꾸미지 않고 진실하게 드러낼 때 어찌 감히 의인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겠는가! 율법적 사고를 가진 사람이 자신을 의인이라고 주장한다면 자신과 하나님을 속이고 있거나, 어떤 착각에 빠져 있음이 분명한 것이 아닌가!

   구원받는 것은 온전한 하나님의 선물이며 이것을 단순히 받아들이는 믿음뿐이지 행위는 전혀 관계되지 않는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에베소서 2:8,9).

   혹자는 말할 것이다. "야고보서 2장 26절에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행위도 필요한 것이 아니냐"라고... .

   그러나 여러분이 야고보서 2장 14~26절까지 자세히 살펴보면 의롭다함을 받고 구원받는 것은 믿음으로 되는데, 그 믿음에 거짓이 없는가 하는 문제는 믿음을 통한 행위가 증명한다는 것을 말함이 분명하다.

   다시 말하자면 확실하고 분명하게 믿음으로 구원받는 사람, 즉 의롭다 함을 얻은 사람은 십자가의 속죄를 믿은 사람이며, 그 믿음의 진실 여부는 변화된 모습(행위)을 통해서 증명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한가지 조심하여야 할 것은 믿음 후에 오는 행위는 자신의 인격과 능력을 의지한 인위적 행위가 아니고, 거듭난 이후에 우리 속에 임재하신 성령을 통한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를 뜻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독자여! 이제는 문제가 자명하여지지 않았는가! 죄인의 결국은 멸망이요, 의인의 결국은 영원한 소망인 천국이 아닌가! 그대의 믿음을 확실히 하시라.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대의 모든 죄를 이미 다 용서하였으니 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고귀한 피의 가치를 깨닫고 그리스도의 흘리신 피로 의인이 된 사실을 깨닫기 바란다. 그대도 부디 하나님의 자녀의 영광에 동참하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죄(죄인)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선물)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로마서 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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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죄와 종교로부터의 자유


                    다른 복음으로 고통받는 기독교인들이여!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갈라디아서 1:6).


   바울은 갈라디아의 여러 교회들이 진리에서 떠나 급속히 변질되어 가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슬프고 탄식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쓰고 있음이 분명하다. 앞에서 필자는 사람을 따라 다니는 불쌍한 갈라디아인들을 생각하며 오늘날 우리의 신앙 상태를 점검하여 본 바 있다.

   여기서는 다른 복음에 병들어 있는 갈라디아인들을 생각하면서 우리의 신앙을 진단하여 보고자 한다.

   다른 복음! 이것은 분명 복음은 복음인 것 같은데 다른 복음이다. 쉽게 생각할 때 복음과 비슷한 가르침이지만 실상은 그 질과 내용에 있어서 가짜 복음인 것이다.

   그렇다면 다른 복음이 무엇인가를 알기 위하여 다른 복음에 병들어 있는 사람들의 증상을 살펴봄으로 우리의 신앙을 진단하여 확실한 깨달음이 있기를 원한다.

   참 복음을 듣지 못하고 다른 복음에 붙잡혀 있는 사람들의 첫 번째 증상은 교회에 다니나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기독교가 다른 종교보다 뛰어난 것이 많은데 그 중에 폭포수같이 쏟아져 내리는 큰 기쁨이 신자들 중심에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요한복음 14장 27절에 약속하시기를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하셨다.

   이 약속은 신실하여 오늘날 예수님을 통하여 진실로 거듭난 성도들에게는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세상 종교들의 특성은 인생의 모든 고뇌와 죄악과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 자신의 육체를 학대하거나 심신을 단련하는 등, 스스로의 부단한 노력을 권장하고 있다. 자신의 인격과 능력을 의지한 자기 노력으로 평안을 이루려고 고생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구원을 이루기 위해 자신을 수양하는 과정에 있는 종교인들에게 무슨 평강과 기쁨이 있겠는가? 종교인의 얼굴은 세월이 갈수록 심각하여지고, 거듭남으로 그리스도인답게 사는 사람의 얼굴은 날이 갈수록 기쁨으로 가득 찬 밝은 모습이다. 우리 자신의 인격이나 성격, 그리고 육신을 들여다 볼 때 기쁨과 소망이 있을 수 있을까? 아니다! 오히려 근심과 절망이 있을 뿐이다.

   어떤 종교는 참 도를 찾아서 방황하다가 죽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여 심지어는 순교자의 반열에 서는 것을 보게 된다. 생각하여 보라! 아무리 종교적 업적을 훌륭히 쌓고 종교적으로 높은 수준에 이르렀다 하여도 그의 중심에 참 평안이 없다면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또는 세상 종교는 그렇다하여도 주님을 믿는다는 기독교인이 참 평강을 가지지 못하였다면 이것은 껍질만 있는 쭉정이에 불과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다! 다른 복음에 잡혀있는 종교인의 모습은 쭉정이 그 자체다. 쭉정이의 특징은 겉으로는 알곡처럼 보이는데 속은 텅 비어있는 가짜다. 겉으로는 주님의 제자인 듯하나 속에는 내적인 변화가 없이 스스로 자신을 속이고, 하나님을 속이고, 세상을 속이는, 변화된 기쁨이 없는 쭉정이 기독교 교인은 물론이요 지도자들도 포함되고 있다고 성경은 증언하고 있음을 주목하기 바란다(마태복음 7:21~23).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마태복음 3:12).

   최근에 그리스도 안에 들어온 어떤 성도는 죽기 위하여 자살 장소로 가다가 친구 집에 잠시 들러 구원받고 주님을 만난 후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화되어 큰 기쁨 중에 주님을 섬기고 있다.


   다른 복음에 붙잡힌 자의 두 번째 증상은, 기쁨이 없을뿐만 아니라 거듭난 확신이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입술로는 천국에 갈 수 있다고 하지만 그들의 생활에서는 천국의 소망에 붙잡혀 사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은 찾아 볼 수 없다. 입으로만 그리스도인이지 실제로는 세상 일에 빠져서 천국에 대한 확신과 소망 가운데 사는 모습이 전혀 없는 것이다. 죄 용서받는 십자가의 진리를 기독교 교리 중 하나로 이해하고 있을 뿐 구원의 근원, 즉 생명의 근원이 되는 천국의 열쇠로 깨닫지 못하고 있다. 예수님의 피로 속죄 받고 천국에 가는 진리는 성경의 주제이며 모든 믿는 자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깨달아야 하며 늘 감사해야 할 놀라운 말씀이다.

   이와 같이 확실한 구속의 진리를 믿음으로 거듭난 성도는 거듭남의 기쁨을 바탕으로 하여 하나님과의 사귐 속에서 확신 중에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면서 천성을 향하여 살아간다. 이것을 정상적인 신앙생활이라 한다. 이말은 가정이나 직장이나 사회생활에 무책임하거나 무관심해도 된다는 뜻이 아니니 오해 없기 바란다.


   다른 복음에 붙잡혀 지옥에 가는 자들의 세 번째 증상은, 성경과 전혀 관계없는 생활을 할뿐만 아니라 성경에 대한 깨달음이 없다는 것이다.

필자는 최근 상담 중 18년 동안 교회에 다녔다는 한 종교인을 만나 성경의 주제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으니 "말씀이지요" 하고 대답했다. 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대답인가!

   12년 동안 교회에 다닌 어떤 사람에게 구약은 "옛날에 주신 약속", 신약은 "새로 주신 약속" 이라고 말하니 " 그 말이 그 뜻입니까?" 하고 눈이 휘둥그레지는 것이다. 기가 막힐 일이다. 거듭나지 못하였으니 성령이 그 속에 없는 것이요, 그 속에 성령이 없으니 성경이 깨달아지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

   그들은 성경을 도대체 읽지 않는다. 성경은 예배당에서 설교 때 한두 번 찾아보기 위하여 소지하고 있을 뿐 도대체 읽지 않는다. 바빠서도 그렇지만 그들의 중심에 주님의 영이 없으니 성경을 읽을 의욕이 없는 것이다.

   불쌍하고 불쌍하다. 안타깝고 불쌍하다. 그들은 생각하기를 성경은 교회 지도자나 기타 특정 자격이 있는 사람만 깨달아지는 책으로 치부하고 있으며. 그들의 지도자 또한 그렇게 가르치는 경우가 허다하다.

   또한 그들은 성경을 읽어도 깨달음이 전혀 없다. 사실 그들이 소경이기 때문에 깨달음이 없는 것이 당연하다. 정상적인 성도라면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과 교제하고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문제나 잘못을 깨닫고 바른 생활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성경은 신자들을 바른 길로 깨우치고 인도하는 지침서이다. 모름지기 거듭난 신자라면 부지런히 성경을 읽고 깨닫고 실천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디모데후서 3:16).

   성경에 대한 정상적인 깨달음이 없으니 내적인 기쁨과 평강이 없을 뿐 아니라 외적인 변화도 없는 것이다.


   다른 복음에 붙잡혀 있는 종교인들의 네 번째 증상은, 기도응답을 몇 번 경험한 것으로, 혹은 광신적인 체험을 경험한 것으로 구원 얻었다고 착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 그들 중에는 양보할 수 없는 구원의 확신이 있으나 자세히 분석하여 보면 어려운 상황에서 기도할 때 주님의 도우심을 몇 번 경험한 것으로 구원받았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알 것은 구원받지 아니한 이방인도 하나님이 돌보신다는 사실이다. 그러한 기도응답이 구원의 궁극적인 증표가 될 수 없다.

   또 어떤 사람들은 방언이나 기타 신비한 체험을 가지고 구원으로 주장하고 있는바 이것은 다 위험한 신앙관임을 알아야 한다. 초대교회에 특수한 목적으로 주어진 방언이 오늘날 그러한 목적성이 사라진 때에도 존재한다고 보기 힘들다. 방언을 통해서 초대교회 성도들이 계시 받고 하나님을 섬겼고 그러한 섬김의 모습 속에서 서신서들이 기록되었다. 오늘날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고 증거할만한 분명한 근거도 없거니와 그것이 구원의 증거는 더더욱 될 수 없다.

   신비한 체험들이 구원의 증거가 될 수 없으니 이러한 것들 또한 다른 복음에 잡혀 있는 불행한 현상이다.


   다른 복음에 붙잡혀 지옥으로 가고 있는 종교인들의 다섯 번째 증상은 그들 마음에 있는 무거운 짐을 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떤 집사님과 대화한 내용을 소개해 보겠다. 그 집사님은 자신의 신앙을 나에게 관철시키려고 변론하는 가운데 있었다. 그는 필자에게 "우리가 구원에 이르는 길은 얼마나 험난하고 힘든 길이며, 고난의 길이며, 어려운 길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필자는 그에게 마태복음 11장 28절을 펴서 보여 주면서 "내가 믿는 예수님은 이렇게 모든 짐과 인생의 짐을 다 풀어 주셔서, 나는 기쁘고 평안하게 주님을 섬기고 있는데 당신이 믿는 예수님은 무슨 짐을 오히려 지워줍니까? 그 예수님은 나의 예수님과 다른 이상한 예수님이네요?" 하고 말하니 그 후에는 대답을 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렇다. 예수님은 인생의 모든 고뇌를, 모든 죄를 다 담당하셨다. 주님은 거짓말하실 리가 없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태복음 11:28).

   이 얼마나 놀라운 말씀인가! 이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자비인가! 죄의 짐에 눌려 웃을 날이 없고, 평강이 없으며, 고통 가운데 살던 자에게 주신 기쁜 소식이 아닌가!

   예수님이 그대의 죄를 짊어지고 죽으셨다는 것을 지식적으로나 교리적으로는 알지만 그 말씀이 그대의 생활을 변화시키지 못하였다면 그대는 구원받은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그대의 모든 죄를 친히 담당하심으로 그대를 죄와 죄의 고통에서 실제로 해방시켜주셨다. 이제 죄의 굴레가 결단코 그대를 고통스럽게 하지 못한다.

   우리는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분명히 설정하여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궁극적 신앙의 대상이다. 그분에게 우리는 기도하는 것이며 예배하는 것이며 그분의 뜻 안에서 살아야 한다. 우리는 궁극적으로 그분 뵈올 날을 기다리는 것이다. 천국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거하게 될 것이다.

   "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요한계시록 21:3).

   우리는 잠시 후에 하나님의 영광의 자리에 함께 동참하게 될 소망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예수님은 무슨 역할을 하고 계시는가? 하나님이 궁극적 신앙의 대상이라면 예수님은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시는 구원자요, 인도자이신 것이다.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께 예배하며, 기도하며,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들림 받을 때에도 예수님께서 친히 공중까지 마중 나오셔서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실 것이다(데살로니가전서 4:16 ; 요한복음 14: 2,3 참조).

   그런 관점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왜 십자가에서 보혈을 흘리셔서 인간의 죄악을 담당하셔야만 하였던가 하는 사실을 이해하게 된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데 있어서 최대의 걸림돌이며, 유일한 걸림돌이 되는 것은 죄악이다.

   "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이사야 59:2).

   이 말씀과 같이 인간의 죄악이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교제를 끊는 걸림돌이 되었으니 주님의 십자가의 속죄는 인간에게 최고의 복음(기쁜 소식)이 아니겠는가!

   이 단번에 이루신 십자가 사역으로 인간의 모든 죄가 완전하게 청산되었고 그러므로 죄인이 하나님 앞에서 떳떳이 고개를 들 수 있게 되었다. 또는 아주 악질적인 죄인도 천국의 소망을 가질 수 있는 길이 활짝 열리게 되었다. 인류 역사 6,000년에 최고의 경사가 있다면 주님의 십자가 사역이다. 이일로 말미암아 죄인이 그의 죄로 인하여 지옥에 갈 그 어떠한 이유도 사라졌다. 다만 완전한 속죄와 영원한 속죄(히브리서 10:17~18, 9:12)를 믿지 아니함으로만 지옥에 가는 것이다.

   그대가 만약 영원한 속죄로 말미암아 죄인의 굴레를 벗어버린 사실을 심령으로 깨닫고 믿었다면,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을 힘입어 말씀드리건대 그대는 의인이 되었으며 구원을 받은 것이다(히브리서 10:10~18 ; 요한복음 5:24 참조). 그러므로 지옥과 인연이 끊어졌고 죄악과도 인연이 끊어졌다. 하나님은 그대의 영원한 아버지와 보호자가 되신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는 그대의 영원한 구원자가 되신 것이다.

   그분은 세상에 계실 때에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한복음 14:6)고 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참 복음의 실체다. 당신에게 참된 기쁨을 주실 수 있는 구세주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을 그대도 받아들이고 주님의 참 제자가 되었기를 바란다.

Posted by 행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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