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 매킨토시의

                           완전한 구원

                                                           

                                      1장

                        영광스러운 진리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안위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롬 15:4)


   이 구절에는 명백한 한 가지 목적이 있습니다. 즉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광범위한 구약성경을 통해 자신의 영적분량과 영적 필요의 성격이나 깊이에 따라 교훈과 위로를 얻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이를 뒷받침하는 또 다른 신약성경의 구절은 이것입니다.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고전 10:11) 

  

   신약성경을 읽을 때와 같이 구약성경을 읽을 때에도, 성경을 기록하도록 성경기자들의 마음에 감동을 주신 성령님의 직접적인 가르침에 의지하며 게속해서 주의 깊게 자신의 생각을 비우고 읽어야 합니다. 상상을 함부로 할 때, 잘못된 생각이나 제멋대로의 해석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유익을 얻기는커녕, 우리 영혼에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해야 할 말씀의 능력을 약화시켜 영적인 성장을 방해할 뿐입니다.


   우리는 또한 로마서 15장 4절에 우리를 위해 기록된 하나님의 뜻, 즉 "무었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 이라는 말씀을 한 순간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 말씀의 능력 안에서, 이제 독자들을 여호수아서의 서론 부분으로 인도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제시되어 있는 놀라운 교훈들을 함께 상고해보고, 거기에 계시되어 있는 귀한 영적인 가르침을 받고자 합니다. 만일 성령님이 도우신다면, 요단강변에서 몇 가지 고상한 영적인 교훈들을 배우게 될 것이며, 영적인 성장을 위한 건강하고도 상쾌한 길갈의 체험을 갖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다 요단강을 죽음에 대한 모형, 즉 신자의 죽음(이 세상을 떠나 하늘나라로 가는)으로 보는데 익숙해져 있습니다. 독자들은 다음과 같은 찬송가를 읽거나 들어본 일이 있을 것입니다.


모세가 서 있던 곳에 서서

그가 보았던 곳을 내려다 볼 수만 있다면

요단강물이나 죽음의 찬 물결이

우리를 두렵게 하지 못할 것이라네.


   하지만 이 소절에 나타나 있는 생각이나 느낌, 그리고 경험은 참된 기독교의 신앙보다 훨씬 낮은 수준의 것입니다. 성경이 우리 영혼에 비추는 참된 빛 가운데서 잠시만 생각해보아도, 이런 요단강에 대한 대중적인 생각이 얼마나 절대적으로 성경적인 통찰력이 부족한가를 생각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요단강을 건너는 것을 신자의 죽음으로 볼 때, 그렇다면 신자가 죽어서 천국에 가게되면, 그는 전쟁을 하라는 부르심을 받은 것일까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천국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신성하고도 영원한 평안과 안식이 있는 곳입니다. 바다에는 잔물결조차 없고, 그 순결하고 거룩한 곳에는 우리를 놀래킬 만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전쟁이 없기에 갑옷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옷이 편하기 때문에 허리띠도 필요 없습니다. 의의 흉배도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신성한 의로움이 항상 머물기 때문입니다. 신발도 필요 없습니다. 그 아름답고 행복한 곳에는 거친 길이나 가시밭길도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곳에는 무서운 화살이 날아다니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방패 또한 필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신성하고 영원한 구원이 우리에게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에 구원의 투구도 필요 없습니다. 그 복되고 햇빛 찬란한 천국의 어느 곳에도 원수나 악한 일은 없을 것이기 때문에 검도 필요 없습니다.


   그러므로 요단강은 신자들이 죽어서 천국에 가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너자마자 전쟁이 시작된 것을 보아도 그렇습니다. 광야에서 아말렉과 싸우기는 했지만 그들의 진짜 전쟁이 시작된 것은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부터입니다. 이것은 조금만 생각해보면 금새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요단강이 죽음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란 말인가요? 물론 요단강은 죽음을 상징합니다. 그러면 신자들은 그것을 건너지 않아도 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반드시 건너야 합니다. 그들이 건너려고 했을 때 그들은 요단강이 마른 땅이 된 것을 발견합니다. 왜냐하면 생명의 주님께서 가장 깊은 곳으로 내려가셔서 자기 백성들을 위해 그들의 영원한 기업으로 인도하는 길을 열어놓으셨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비스가 산꼭대기에 서서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을 내려다보기만 했듯이, 그리스도인들도 그렇게 하나님의 신령한 복을 그저 바라보기만 하고 누릴 수 없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서도, 그리스도의 복음에서도, 또는 신성한 기독교 신앙 전체를 훑어보더라도 찾을 수 없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치리 아래 있는 경륜에 의해서 요단강을 건너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모형적으로 볼 때, 모세는 율법을 상징하기에 율법은 사람들을 영적 가나안으로 인도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참된 여호수아이신 그리스도는 요단강을 건넜습니다. 그뿐 아니라 구속함을 받은 무리들이 하늘의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도록 마른 땅으로 통과하도록 길을 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과연 건너갈 수 있는지를 의심하며 죽음의 강둑에 떨며 서 있으라고 부르심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강물은 믿음이 있는 자에겐 마른 땅에 불과합니다. 그 세력은 사라졌습니다. 우리의 찬양을 받으실 주님은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딤후 1:10)" 셨습니다.


   이것은 우리를 자유롭게 해주는 영광스러운 진리입니다! 이것을 인해 주님을 찬양합시다. 우리를 구원하신 그 큰 능력을 인해 주님을 경배합시다. 사망의 쏘는 것을 제하시고 사망의 권세를 가진 자인 마귀를 멸하신 주님을, 생명과 빛과 썩지 않음과 영광으로 충만한 곳으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주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는데 우리의 온 마음을 다 합시다. 우리의 실제적인 삶으로 주님께 영광을 돌립시다.


   우리는 이제 이 위대한 주제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좀 더 자세히 상고해보고자 합니다. 성령님께서 우리를 친히 가르치시는 교사가 되어 주시길 빕니다.


   "여호수아가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서 이스라엘 사람들로 더불어 싯딤에서 떠나 요단에 이르러서는 건너지 아니하고 거기서 유숙하니라 삼 일 후에 유사들이 진중으로 두루 다니며 백성에게 명하여 가로되, 너희는 레위 사람 제사장들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궤 메는 것을 보거든 너희 곳을 떠나 그 뒤를 좇으라. 그러나 너희와 그 사이 상거가 이천 규빗쯤 되게 하고 그것에 가까이 하지는 말라. 그리하면 너희 행할 길을 알리니 너희가 이전에 이 길을 지나보지 못하였음이니라."(수 3:1-4)


   이스라엘 역사에는 독자들이 깊이 생각해야만 하는 세가지 매우 중요한 요소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애굽 땅에서 집문 좌우 설주와 이방에 바른 피, 둘째로는 홍해, 그리고 세 번째로는 요단강입니다.


   이 세 가지 모두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대한 모형입니다. 각각은 매우 중요한 진리를 담고 있는데, 이는 그리스도의 고귀한 죽음에는 다양한 측면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이 그리스도의 죽음이 가지고 있는 심오한 비밀을 연구하는 것보다 더 유익한 일은 없습니다. 또한 여기엔 엄청난 비밀이 담겨 있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을 끄는 다른 일이 있어서도 안됩니다. 이런 비밀은 영원세계에서만 풀릴 수 있는 깊이와 높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제 성령님의 강력한 역사 아래서, 성경의 완전한 빛 안에서, 우리 속사람을 강하게 하고 안위를 받도록 해주고, 또한 우리 영혼이 새롭게 되는 역사를 기대하면서 이러한 것들을 상고해 본다면, 우리의 기쁨은 넘치도록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서 모형화된 그리스도의 죽음을 생각해보도록 합시다. 그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에서 우리를 가려주는 효력을 보게 됩니다.


   '내가 그 밤에 애굽 땅에 두루 다니며 사람과 짐승을 무론하고 애굽 나라 가운데 처음 난 것을 다 치고 애굽의 모든 신에게 벌을 내리리라. 나는 여호와로라.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의 거하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출 12;12-13)


   굳이 말씀드릴 필요도 없지만, 죄에 익숙하고 의식적으로 죄를 짓는 영혼에게 장차 올 진노와 심판으로부터 하나님이 피난처를 예비하셨음을 아는 가장 의미심장한 순간에 이르렀습니다. 성경적인 복음을 합당하게 잘 배운 사람이라면 단 한 순간이라도,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대한 이런 측면을 과소평가하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라)"


   이스라엘 민족이 안전한 상태에 있는 것은 하나님이 피에 그 가치를 두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너희가  피를 볼 때에"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심판자가 피를 보았습니다. 심판자는 피의 가치를 알았고, 그 집은 심판을 면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어린양의 피에 의해서 죄가 가려졌고 심판을 면했습니다. 즉 피에 대한 우리의 판단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판단에 의해서 된 일입니다. 이 얼마나 귀한 사실입니까!

   그리스도의 피에 대해 생각 할 때 하나님의 생각보다는 우리의 생각으로 가득차기가 얼마나 쉽습니까! 우리는 그 보배로운 피에 대해 마땅히 귀하게 여겨야 할 만큼 여기지 않는지도 모릅니다. 누가 그 피에 대한 정당한 가치를 산정했습니까? 또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일까요? 슬프게도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한 정당한 평가를 내리는데서, 또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한 애정을 품는 일에서 실패하는 우리를 보면서, 과연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안전한지 의문을 품기 시작합니다.


   만일 우리의 안전이 비록 지극히 적은 정도일지라도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한 우리의 평가나 또는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한 우리의 사랑에 달려 있거나, 아니면 율법준수 여부에 달렸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매우 심각한 위험 가운데 처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제 중요해지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해 정당한 평가를 해야만 하고, 또 우리가 그리스도를 마땅히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과연 누가 그 사실을 부인할 수 있을까요? 하지만 만일 이 모든 것이 의롭게 되는 것의 근거가 된다면, 그리고 우리의 안전이 그 요구에 대한 우리의 반응에 달려 있다면, 그렇다면 우리가 율법을 범한 터 위에 서 있는 것보다 우리는 더욱 큰 위험 가운데 처하게 되며, 더욱 공의로운 정죄 아래로 떨어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요구가 모세의 율법의 요구보다 더 높은 만큼, 또 기독교 신앙의 수준이 율법의 수준보다 더 높은 만큼, 우리의 상황은 더 나빠지고, 더 큰 위험에 빠지게 되며, 평안과는 더욱 거리가 멀어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의 안전이 이같이 더 높은 요구에 대한 우리의 응답에 달려 있다면 정말 그렇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그러한 요구에 대해 응답할 필요가 없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 대해서 주목해야 합니다. 우리는 반드시 응답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한 적이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요구에 직면해있는 한, 그리고 우리가 이에 관련되어 있는 한, 우리의 타락과 범죄는 다만 더욱 현저히 드러나게 되며 우리를 정죄하는 정죄는 더욱 공의로운 것이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러한 요구에 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의 가치에 대한 우리의 판단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요구에 대한 우리의 응답에 따라서, 그리고 그분의 사랑에 대한 우리의 감사여부에 의해서 구원을 받는다고 할 것 같으면, 우리는 모세 율법의 공의로운 요구 아래 있을 때보다 더욱 나쁜 상황에 빠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찬송합시다. 우리는 그런 상황 아래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은혜로 구원받았습니다. 거저 주시는 은혜,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 그리고 신성하고도 영원한 은혜에 의해서 구원받았습니다. 은혜에 대한 우리의 느낌에 의해서가 아닙니다. 피에 대한 우리의 평가에 의해서가 아니라, 피 자체에 의해 보호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 무섭고 두려운 밤에, 여호와 하나님은 "너희가 피를 볼 때에, 피에 대해 너희가 바른 평가를 할 때에, 너희를 넘어 가리라.' 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보호하기를 원하셨고 그들이 완전하게, 즉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 문제를 전적으로 신성한 기반 위에 두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문제를 그들의 손으로부터 취하셔서, 그들로 하여금 그들의 안전이 단순하면서도 전적으로 피에 있으며, 피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에 있음을 확신토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직접 피난처를 준비할 필요가 전혀 없음을 깨닫도록 하셨습니다. 피난처를 준비하는 것은 하나님의 몫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누리는 것은 우리들의 몫입니다.


   따라서 기념할만한 그 밤에 여호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피가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하나님과 이제 예수님을 단순히 믿고 신뢰하는 영혼 사이에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사랑이나 우리의 평가나, 우리의 그 어떤 것에 의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에 의해서 구원받으며, 피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에 의해서 구원을 받습니다.


   피를 바른 좌우 문설주와 인방 안에서 심판으로부터 가려줌을 받고, 심판하는 자의 칼에서 안전하게 되어 불에 구운 어린양을 먹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신자들도 장차 올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완전하게 보호를 받아 모든 위험으로부터 절대적으로 안전하게 되어, 심판으로부터 가려줌을 받고 주님 자신의 모든 귀중함 속에서 안전을 누리며 그리스도로 만족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더 놀라운 것이 있습니다.


   혹시라도 아직까지 장차 임할 심판으로부터 자신이 안전한지에 대한 확신이나 평안을 얻지 못한 독자라면 우리가 지금까지 다루어온 이 주제에 대해 깊이 생각하시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주제는 그리스도의 죽음이 우리를 위해 이루신 일 가운데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물론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귀중한 것이지만) 또한 아시길 바랍니다. 회심 후에도 우리는 참으로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자기 의(義)라는 누룩이 들러붙어 있는 지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것이 얼마나 우리의 평안과 은혜에 대한 누림을 방해하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우리의 행위에 의해 구원받았다는 생각을 버렸을 때 우리는 자기 의를 끝냈다는 착각을 합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악은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이 모든 것 가운데 우리가 살펴본 대로, 우리가 마땅히 생각해야 할 만큼 피의 가치를 제대로 생각하지 못했다는 느낌 때문에 우리의 안전을 의심하게 되는 것보다 더 교묘한 것은 없습니다. 이 또한 자기 의의 열매입니다. 우리는 자아를 끝내지 않았습니다. 참으로 우리는 우리의 행위가 우리의 구주가 될 수 없음을 알지만 우리의 느낌이나 감정들로는 그렇게 하려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그리스도께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명분 때문에 우리에게 무슨 자격이 좀 있지 않을까 하고 우리도 모르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제 이 모든 것은 포기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단지 그리스도의 피와 그 피에 대한 하나님의 증거에만 의존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피를 보십니다. 하나님은 그 피에 합당한 가치만을 인정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만족하십니다. 이 사실이 우리를 만족하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네가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볼 때, 또 내가 무교병과 쓴 나물과 허리에 띠를 띠고 신발을 신은 것을 볼때에, 내가 너희를 넘어가리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확실히 이 모든 것들은 다 합당한 자기 위치가 있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그 합당한 위치는 안전에 대한 근거가 아니라, 교통의 비밀에 대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절기를 지키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보호받은 백성으로서 절기를 지키라는 것이지, 그런 백성이 되기 위해서 지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아주 다른 것입니다. 그들이 절기를 지킬 수 있게 된 것은 바로 그들이 심판으로부터 하나님의 보호를 받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더 이상 심판이 없다는 확신을 하나님 말씀의 권위를 통해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그 말씀을 믿는다면, 그들은 평안과 안전 가운데서 절기를 기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를 정하였으니 이는 장자를 멸하는 자로 저희를 건드리지 않게 하려 한 것이며"(히 11:28)


   여기에 모든 문제의 깊고도 귀중한 비밀이 담겨 있습니다. 그들이 유월절을 지켰던 것은 믿음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라"고 말씀하셨고, 또 그런 자신을 부인하실 수 없으셨습니다. 그 두렵고 무서운 밤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머리카락 한 개라도 심판을 받았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자신의 인격과 성품을 부인하는 것이 되었을 것이고, 하나님 자신이 계획한 자신의 복된 치유책을 부인하는 것이 되었을 것입니다. 반복하지만 이스라엘의 구원은 이스라엘의 상태나 그들이 그에 합당한 자격을 갖추는 것에서 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그리고 전적으로 하나님이 보시는 피의 가치에 의한 것이었고, 하나님 자신의 말씀의 진실성과 말씀의 권위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의 안전이 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평안과 안식인지요! 여기에 우리 확신의 견고한 근거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피와 하나님의 말씀! 이 두 가지는 신성한 진리로서 참된 것입니다. 이것을 잊거나 잃어버리지 않도록 합시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수 있고, 또 그리스도의 피를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성령님의 은혜에 달린 것입니다. 또한 다가오는 심판의 문제를 생각 할 때 우리 마음에 평안을 주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스도의 피에 의한 것이며 다른 것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바로 심판이 이미 집행되었다는 완전한 증거로서 피가 은혜를 베푸는 보좌인 시은좌(the mercy-seat)에 뿌려져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나무에 달려 나를 위해 심판을 받았네.

이제 죄인이 주님과 함께 자유케 되었네."


   그렇습니다. 모든 찬송을 그분의 이름에 돌려드립시다. 이제 단순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믿고, 또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를 의지하는 모든 영혼에게 하나님은 영원히 함께 하십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자신의 모든 죄를 사했음을 믿고 의지하는 영혼이 심판을 받는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심판받을 수 없는 것처럼 절대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피로써 보호를 받는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안전하신 것만큼 하나님께서 안전하게 보호하십니다. 이는 심판받아 마땅한 가련한 죄인조차도 믿음으로 그런 말을 할 수 있음을 생각할 때, 참으로 경이로운 일입니다.


   참으로 복된 사실은 바로 이 방법이 아니면 아무런 방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만일 신자의 안전에 관하여 어떤 문제가 제기된다면 그리스도의 피가 시은좌에 뿌려져 있지 않거나, 아니면 하나님의 심판에서 그 피가 중요치 않은 것이 될 것입니다. 만일 안전이 우리의 상태, 우리의 가치, 우리의 감정, 우리의 경험, 우리의 행함, 우리의 사랑, 우리의 헌신, 그리고 우리의 그리스도에 대한 감사 등에 달려 있다면,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라"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선언은 이제 더 이상 아무 능력도, 아무 가치도, 또한 아무 진실성도 없는 것이 됩니다. 그렇게 된다면 하나님의 말씀은 전적으로 바뀌어야 하며, 어둡고 냉랭한 그림자가 천상세계를 뒤덮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은 "내가 피를 보고 또 거기에 추가하여 (.......)을 볼 때에"와 같이 변해야할 것입니다.


   하지만 구원을 갈망하는 사랑스런 독자 여러분, 결단코 그런 일은 없습니다. 심판자이신 하나님의 요구를 완전하게 만족시켜드렸으며, 하나님이 친히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것을 단순하게 믿는 모든 영혼을 온전히 보호해주는 보배로운 피에 더하여 아무 것도 더할 것이 없습니다. 깃털하나의 무게만큼도, 머리카락의 넓이만큼도, 심지어는 눈썹의 움직임만큼도 더할 것이 없습니다. 만일 의로우신 재판장이신 하나님 자신이 만족했음을 선언하셨다면, 죄를 범한 죄인 또한 확실히 만족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에수님의 피로써 만족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영혼도 만족될 때, 모든 것이 해결된 것이고, 심판의 문제에 관한한 평안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롬 8:1)


   그리스도께서 이미 죄인을 대신해서 정죄를 다 받으셨는데 어떻게 정죄함이 남아 있을 수 있을까요? 신자가 심판으로부터 면제되었다는 사실을 의심하는 것은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피의 효력을 무효화하는 것입니다.


   독자들은 지금까지 구원의 문제(매우 중차대한 문제인)만 다루어왔음을 주목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로부터 자유를 얻는 축복(그 자체로서도 매우 복된 것인)보다 우리를 위해 훨씬 더 많은 다른 축복들이 이루어졌음을 살펴보게 될 것입니다. 비할 데 없는 그리스도의 희생은 심판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우리를 건진 것보다 더 많은 일들을 이루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잠시 멈추어 서서 다음 장으로 넘어가기 전에, 다음과 같은 엄숙하고도 진지한 질문을 독자에게 드리고자 합니다.


   "당신은 진정 예수님의 피로써 보호를 받고 있는 사람입니까?'


   사랑하는 독자여, 당신이 분명하게 조금의 주저도 없이 "네 그렇습니다." 라고 말할 수 있을 때까지 결코 마음을 놓지 말기를 바랍니다. 당신이 피에 의해 보호를 받고 있든가 아니면 영원한 심판의 두려움에 놓여 있든가 이 둘 중 하나에 속해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Posted by 행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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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아사는 인생들이여!


                         부귀영화가

                인생의 목적이 될 수 있는가?


   "아람 왕의 군대 장관 나아만은 그 주인 앞에서 크고 존귀한 자니 이는 여호와께서 저로 아람을 구원하게 하셨음이라 저는 큰 용사나 문둥병자더라" (열왕기하 5:1).


   부귀영화가 인생의 목적이 될 수 있는가?

   구약성경 열왕기하 5장에 보면 아람 사람 나아만 장군에 관한 기사가 나온다. 그는 그 주인 왕 앞에서 총애를 받는 존귀한 자였다.

   그는 국가를 위기에서 건진 유명한 장수였다. 왕에게 대단한 신뢰와 사랑을 받고 있음은 물론이요, 온 국민들에게 영웅적 대접을 받고 있는 장군이었다. 그는 전쟁에 능한 장수였기 때문에 백성들의 생명의 은인이라는 뜻인 것이다.

   그러므로 백성들로부터 받는 영웅적 대접이 어떠했겠는가? 그는 더이상 출세할 필요가 없는 대단히 행복한 사람이었다. 인간의 수준에서 그렇게 보였으리라. 그는 그의 이름이 뜻하는 것처럼 즐거운 사람이요 세상의 부귀영화를 거머쥔 사람임에 틀림없었다.

   그럼 나아만(즐거움)이 가졌던 것이 무엇이었는가를 생각하며 오늘을 사는 지혜를 주님 앞에서 생각해 보자.


   나아만이 가졌던 첫번째 즐거움은 뭇사람들이 그토록 갖고 싶어하는 권세를 가진 것이었다. 왕에게 절대적으로 신임을 얻은 장군이었기에 그의 권세는 하늘을 찌르고 땅에 충만하였지 않겠는가?

   인간이 세상에서 평생에 추구하는 것이 많은데 그 중에 하나는 권세를 갖는 것이다. 권세의 핵심을 자세히 살펴보면 사람을 다스리는 것이다. 인간은 두 사람만 있어도 한사람이 한사람을 주관하고자 하는 욕망이 생긴다. 사실 주관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 때문에 수많은 인류의 비극이 생기는 것이다. 소수의 무리가 다수를 마음대로 지배하려는 권세욕이 얼마나 많은 비극을 몰고 왔는가?

   어찌 되었든 수많은 인간이 그토록 갖고 싶어하는 권세를 나아만 장군은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두번째로 나아만이 가졌던 즐거움은 명예이다. 사람들은 명예를 중요시한다. 인류 역사가 진행되는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명예를 얻기 위하여 수고하고 고생하였다. 어떤이들은 명예를 위하여 죽음도 불사한다. 실제로 수많은 사람들이 명예를 위하여 죽음을 택하기도 하였다. 그들은 죽어가면서 "나는 명예롭게 죽는다" 라고 말한다.

   나아만은 이 명예를 얻었고 누리고 있었으며 그러므로 그의 삶은 즐거움 그 자체였던 것이다.


   셋째로 나아만의 즐거움은 물질적인 것에 있었다. 그는 종을 부리며 물질적으로 부족함 없이 살았다. 인생들의 삶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돈을 삶의목표로 삼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어떤이들은 돈 때문에 명예를 훼손시키며, 돈 때문에 형무소에 가는 일도 수없이 보아왔다. 예나 지금이나 돈은 인간의 생활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음을 부인할 수 없다.

   디모데전서 6장 10절에 "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라고 말씀하셨다.

   성경이 이와같이 가르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돈이 인생의 목표요, 모든 문제의 해결 수단이요, 행복의 열쇠인 것처럼 생각하고 모든 인간관계나 모든 가치 기준의 최고의 자리에 두는 것이다.

   돈 때문에 형제도 버리고, 돈 때문에 부모도 원수가 되고, 돈 때문에 사랑하는 연인을 내어버리는 경우를 얼마든지 볼 수 있지 아니한가?

   이토록 귀하고 중요한 재물에 관해서는 아무런 부족함이 없었던 나아만이었다. 나아만이 이스라엘 왕 앞에 가지고 간 선물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나아만은 인생들이 추구하는 이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었으며, 인생을 즐길 수 있는 행복의 조건을 다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문둥병이라는 죽음의 병으로 인해 그 모든 좋은 것들은 아무것도 아니며 가치를 잃고 말았던 것이다.

   그는 죽음의 그림자가 자신을 덮었을 때 이 모든 것이 자기에게 아무런 가치도 없다는 참담한 사실 앞에 절망해야 했다. 문둥병으로 죽어가는 마당에 그 모든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필자는 여기서 나아만 보다 수백년 후에 세상에 계셨던 한 분을 소개하고자 한다.

   그분은 평강의 왕이라고 소개된 분이다(이사야 9:6). 그분은 세상에 계셨으나, 또한 사람의 모양을 입었으나 실상은 하나님의 아들이셨다. 그분이 평강의 왕이라고 소개된 것은 그분은 인생의 모든 경우에 있어서 평강을 주실 수 있으신 전능자라는 뜻이다. 국가와 사회와 개인에게 있어서 참된 평안은 그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다.

   나아만의 병을 고친 능력도 사실은 그분의 것이다. 또한 그분은 그 어깨에 정사를 메었다고 소개되고 있다(이사야 9:6). 모든 권세가 그분으로부터 말미암는 것이다. 모든 기쁨, 평화, 문제 해결의 근본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다는 것이다.

   생각해 보라. 사람이 권세를 얻어 천하를 호령한들 그것이 그 사람을 진정 행복하게 해주겠는가? 사람이 명예를 얻어 뭇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한몸에 받는다고 한들 그것이 그 심령으로부터 던져지는 고독과 고통을 해결해 주겠는가? 사람이 재물이 주체할 수 없이 많아 물쓰듯 돈을 쓰며 세상에서 돈으로 못할 일이 없다고 한들 그 육신이 죽음의 문턱을 넘을 때 그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나아만을 보라. 그가 누린 그 권력과 명예와 부를 보라. 그것이 그 심중의 고통, 점점 죽음으로 몰아넣는 그 문둥병의 고통에서 건져주었는가? 누가 그를 그 심중의 고통에서 해방시켜 주었는가?

   나아만의 근본적인 고통을 해결하여 주신 분이 바로 예수그리스도가 아닌가! 그분은 과거와 미래를 초월하여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분이 이 땅에 계실 때 이렇게 말씀하셨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 11:28).

   오 독자여, 예수님 앞에 나아오라. 그분에게 참된 평안이 있나니 그분 안에서 쉼을 얻으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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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제 5 과


                       율법과 약속(3:10-18)


   4과에서 우리는 이 서신의 네 주요 부분을 살펴보기 시작하여, 복음의 위대한 진리(3:1-18), 갈라디아인들의 경험에 대한 고찰(3:1-5), 그리고 구약성경의 증거(3:6-14)를 살펴 보았습니다. 구약성경의 증거에 대해서 10-14절에서 계속해 살펴보겠습니다.

3:10 바울은 성경에서 율법은 결코 복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오직 저주할 뿐임을 보여주었습니다. (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책에 기록된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 구절은 "율법을 범한 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 행위에 속한 자"를 말하는 것으로, 율법에 순종하는 것을 근거하여 하나님의 은총을 얻으려고 애쓰는 모든 자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저주아래 있는 자"는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입니다. 신명기 27:26절에는 "기록된바...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자"라고 말씀되었습니다. 이는 하루나 한달 혹은 일년동안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그 율법을 항상 행해야 하며 완전하게 지켜야 합니다. 다만 십계명을 지키는 것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모세오경에 있는 모든 율법을 다 지켜야 합니다.

3:11 거짓 선생들은 다시한번 구약성경으로 반박되었습니다. (11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니라) 바울은 하박국 선지자의 성경을 인용하여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율법으로써가 아니라 믿음으로써 사람을 의롭게 하셨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신약성경에 있는 원어로 그 인용구절을 문자적으로 읽어보면 "믿음에 의한 의인은 살리라"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믿음으로써 의롭다고 여기심을 받은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가지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람은 살 것입니다.

3:12 율법은 사람에게 믿으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12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라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또한 그 계명들을 지키도록 노력하라고도 요구하지 않습니다. 율법은 엄격하고 완전하고 완벽하게 레위기에서 가르치고 있는대로 분명하게 지키라고 요구합니다. 이것은 믿음의 원리와는 대조됩니다. 율법은 "행하라 그리하면 살리라" 고 말합니다. 믿음은 "믿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고 말합니다. 바울의 논증은 다음과 같습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삽니다. 율법 아래 있는 사람은 믿음으로 살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는 구절은 이상적인 말씀입니다. 그러나 완벽한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에, 이러한 이상에 도달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준수를 통해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3:13 속량(deliver)은 다시 사다 또는 구하다, 대가를 지불하다라는 말입니다. (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계명을 어긴 것에 대한 형벌인 율법의 저주는 사형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에 의해 요구된 사형의 형벌을 갚으심으로  율법아래 있는 자들을 구하셨습니다. (바울이 "우리" 라는 대명사를 사용했을 때 비록 유대인들이 모든 인류를 대표하지만 우선적으로 믿는 유대인들을 말한 것은 의심할 바가 없습니다.)

   킨들란 존스는 "갈라디아인들은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반정도만 샀다고 생각했기에 그 나머지 부분을 그들의 할례와 다른 유대 절기와 의식들에 복종하여 사야만 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거짓 선생들과 기독교와 유대교를 혼합한 것에 속히 이끌려 들어갔던 것이다. 바울은 여기에서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완전히 속량하셨다' 고 말한 것이다' 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을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죄에 대한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를 참으심으로 그들을 속량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저주는 사람들의 대속자이신 주님께 임하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죄인이 아니셨지만 사람들의 죄가 주님께 놓여졌습니다.

   그리스도의 생애 동안 십계명을 완전히 지키심으로 율법의 저주에서 사람들을 속량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에 주목하십시오. 성경은 우리에게 주님께서 율법을 완벽하게 지키신 것으로 여기심을 받았다고 가르치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께서는 그 무서운 사형의 저주를 참으심으로 사람들을 율법에서 건지셨습니다. 주님의 죽으심이 없는 곳에는 어떠한 구원도 결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율법은 특히 죄인으로 나무에 달린것이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는 자의 표시라고 가르칩니다(신 21:23). 성령님은 그 구절을 구주께서 피조물들을 위해 저주를 받으시고 죽으실 예언으로 보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 어느쪽에서도 인정을 받지 못하신 채 하늘과 땅 사이에 달리셨습니다.

3:14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시며 또한 그를 통해 온 세상에게 복을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1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이 아브라함의 복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참된 은혜의 구원입니다. 그러나 먼저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죽음의 형벌이 치뤄져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은혜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에게 다가올 수 있기 위해 주 예수님은 저주받은 자가 된 것입니다. 이제 그리스도(아브라함의 후손) 안에서 모든 족속이 복을 받았습니다.

   창세기 12:3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은 성령님을 말한 것이 아니며 바울이 여기에서 하나님의 감동으로 말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조건 없는 구원의 언약 안에 포함 되어 있는 성령님의 은사입니다. 이것은 시작입니다. 성령님은 율법이 막고 있는 한 오실 수가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성령님이 오시기 전에 죽으시고 영화롭게 되셔야 했습니다(요 16:7).

   사도바울은 다음과 같이 율법이 아닌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에 대해 나타냈습니다. (1) 갈라디아인들의 경험과 (2) 구약성경의 증거, 사도바울은 이제 일상 생활로부터 한 예를 들었습니다.


단순한 인간 약속에 대한 의무(3:15-18)


   이 단락에 대한 바울의 논증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 12:3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속한 지상의 모든 가족에게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이 구원의 약속에는 유대인과 마찬가지로 이방인들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또한 창세기 22:18에서 하나님은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씨" (단수)라고 말씀하시고 "씨들" (복수)로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직계후손인(눅 3:34) 주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유대인과 마찬가지로 모든 족속에게 복을 주실 것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이 약속은 조건이 없는 것으로 선한 행위나 율법을 지키도록 요구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믿음으로 받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 단순한 약속입니다.

   430년 후에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율법은 이 약속에 어떠한 조건을 더하거나 어떻게든지 바꿀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사람의 일에서도 옳지 않은 일인데 하나님의 일에는 더욱 생각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이방인에게 주시는 복의 약속은 율법 준수로써가 아니라 믿음으로써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집니다.

3:15 사람의 일에서도 어떤 언약이나 뜻에 서명을 하고 인을 치면 누구도 그 문서를 바꾸거나 더하려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15 형제들아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나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하느니라) 만일 사람의 언약도 어기지 못할진대 하나님의 언약은 얼마나 더 어렵겠습니까!

3:16 유대주의자들은 비록 그 약속이 원래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들에게(이스라엘 백성) 믿음에 의해 주어진 것이지만 그 동일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후에 율법아래 놓이게 되었다고 주장한 것이 분명합니다. (16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그래서 갈라디아인들도 원래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지만 이제는 십계명을 지켜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 약속은 아브라함과 그의 씨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이 "씨" 라는 단어는 단수입니다. 그 단어가 때때로 군중을 가리킬 때도 있지만 여기에서 그 단어는 한 사람인 바로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약성경을 읽을 때 이러한 것을 보지 못할 지라도 하나님의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조명해 주십니다)

3:17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은 조건이 없는 것으로 어떠한 행위에 의존된 것이 아닙니다. (17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의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없이 하지 못하여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아브라함과 그 씨(그리스도)에게 주실 것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비록 아브라함이 자식이 없었지만 그는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오실 그리스도를 믿은 것이며 그러므로 그가 의롭게 된 것입니다. 사백년이 지난 후에 주어진 율법은 이 구원의 약속에 어떻게든 영향을 미칠 수 없습니다. 율법은 그 약속을 폐하거나 어떠한 조건도 더할 수 없습니다.

   아마도 유대주의자들은 그 약속을 한지 사백 삼십년 후에 율법이 온 것은 그 약속이 무효가 되었기 때문에 주어진 것이라고 제안했을 것입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은 "약속은 뜻과 같은 것이며, 죽음으로 확증된 것입니다(희생의 언약으로 창 15:7-11과 히 9:15-22을 보십시오). 이것은 결코 폐하여질 수 없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3:18 이 430년은 언약이 제정된 때로부터 계산된 것이 아니라 이 언약이 마지막으로 확증된 때 즉 야곱에게서부터 계산된 것입니다(창 46:1-4).

(18 만일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리라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은혜로 주신 것이라)

   유업은 믿음에서 나지 않으면 행위에서 난 것입니다. 그것은 두가지 모두에서 날 수 없습니다. 성경은 아브라함에게 조건없는 약속을 주심으로 그것을 분명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믿음에서 난 유업은 구원을 동반합니다. 그것은 조건없는 선물로 주어진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 어떠한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은 배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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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07 건너편 지역들(13-15장)


요절 : 사도행전 13장 39절, 15장 11절

요점 :

1. 구약성경은 그리스도에 대한 많은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2.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복음을 거절했습니다.

3. 핍박은 우리가 주님을 섬기는 것을 막을 수 없습니다.

4. 선행은 아무도 구원할 수 없습니다.

5. 선행은 구원받은 어떤 사람도 지켜줄 수 없습니다.

6. 선행은 구원해 주신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나타내는 필수요소입니다.


바울의 1차 전도 여행


1. 바울과 바나바가 파송됨(13:1-12)


안디옥 교회에는 바울과 바나바 이외에도 세명의 다른 성경 교사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기도하며 주님을 섬기고 있을 때, 성령님께서 그들을 위해서 시킬 특별한 일을 위해 그 두 사람을 파송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의심의 여지없이 바울과 바나바는 이 부르심에 대해 준비가 되어 있었고 교회의 다른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방법으로 그들을 파송하는 것을 기뻐했습니다. 전도자들과 교회가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했습니다.

   그들이 방문한 첫번째 장소는 구브로 섬이었고 마가 요한은 수종자로 그들과 함께 갔습니다. 그들이 복음을 전파하며 온 섬 가운데로 지나갈 때, 그들은 서기오 바울(Sergius Paulus)이라 불리는 그 지방을 관리하는 사람에게 갔습니다. 그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이 있었지만 박수 엘루마가 진리를 듣지 못하도록 방해했습니다. 결국 바울이(Paul : 이때부터 계속 이 이름으로 불리워짐) 엘루마를 얼마동안 소경이 되도록 벌함으로 복음의 빛을 방해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서기오 바울이 주님을 믿었습니다... 진리의 빛을 방해하는 것은 무서운 일입니다.

얼마 후에는, 사람이 진리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게 되어 마치 소경과 같이 되므로 더 쉽게 사단의 거짓말을 믿게 될 것입니다.


2.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바울의 증거- 그리스도의 죽으심(13:13-29)


그들은 구브로에서 더 위험한 지역인 대륙으로 돌아왔으며 이곳에서 마가 요한은 예루살렘으로 되돌아 갔습니다. 우리는 마가가 왜 돌아갔는지 알 수 없지만, 많은 젊은 사람들이 주님의 사역을 아주 용감히 시작하지만, 곧 떠나게 되는 것이 현실입니다. 주님께서 신실한 일꾼을 사랑하시는 것에 비하면 이일은 매우 슬픈 일입니다.

   곧 두 사람은 비시디아 땅에 있는 안디옥이라 불리는 다른 도시에 도착했습니다. 바울은 언제나 회당으로 먼저가서 유대인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할 기회를 가졌습니다. 우리는 이곳에서 바울이 전한 말씀에 대한 기록을 가지고 있고, 다른 장소에서도 자주 그와 같은 방식으로 전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먼저 스데반이 했던 것처럼 그들에게 구약 내용을 제시하고는 가능한 빨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서 말하기를 시작했습니다(23절). 바울은 주님께서 다윗 왕의 직계였다는 것과 주님의 선구자인 세례요한, 유대인들이 주님을 배척한 것, 그분이 바로 보내심을 받은 분이라는 것, 그리고 그분의 죽으심 자체가 구약성경의 예언의 성취임을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해 잘 말하려면 구약성경과 신약성경 모두를 잘 알아야 합니다. 그 두가지는 우리의 구원자에 대한 놀라운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3. 바울이 전한 말씀 :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심(13:30-41)


물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것을 듣는 것만으로 사람이 행복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바울은 즉시 주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영광스런 부활하심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사실에 대해서는 많은 증인들이 있었으며 바울은 그 사실이 분명함을 입증하기 위하여 구약성경의 시편을 인용했습니다. 그후에 바울은 그분을 통해서 그들의 죄를 용서받을 수 있으며 만일 이러한 하나님의 제안을  거절할 경우에 대한 경고를 하였습니다. 실제로 구원에 대해 주님을 믿지 않고도 그리스도께서 놀라운 분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믿지 않는 자들은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4. 안디옥에서 바울이 전한 말씀에 대한 결과(13:42-52)


그 다음 안식일에 유대인과 하나님을 믿는 이방인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바울의 설교를 다시 듣기 원했기 때문에 거의 온 성이 그에게 들으려고 나왔습니다. 이것은 믿지 않는 유대인들에게 들으려고 그런 큰 무리가 모인 적이 없었기 깨문에 그들에게는 너무도 대단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바울과 논쟁을 시작했고 변박하고 비방했습니다. 그래서 바울과 바나바는 주님께서 그들에게 명령하셨기 때문에 이방인들에게로 향하겠다고 말했습니다. 물론 이것은 이방인들을 기쁘게 했지만 유대인들을 더욱더 분노하게 했고 결국 매우 큰 소란이 일어나 사도들은 그 성을 떠나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구원받은 것을 기뻐하는 한 무리의 행복한 제자들을 뒤에 남겨두었습니다.

   은혜의 때가 주어질 때마다 사단이 소동을 일으키고 할 수 있다면 주님의 사역을 방해하려 한다는 것을 학신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받는 것을 기뻐하였으며 그 후로 특히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오직 우리의 증거를 통해서만 주님을 알게 된다면 믿지 않는 몇몇 사람들로부터 받을 약간의 모욕을 염려하시겠습니까?


5.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 바울이 처음에는 경배를 받았지만 후에는 돌에 맞음(14:1-18)


사도들은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이고니온으로 가서 복음을 전파하고 병자를 치유하면서 아주 오랜 기간동안 머물렀으며 그 결과는 매우 비슷했습니다. 즉 많은 사람들이 믿었지만 유대인들은 대적했고 사람들에게 바울과 바나바를 죽이게 돌을 던지라고 선동했습니다. 그러나 그때 그것을 알고 피신하여 이웃한 큰 성 루스드라로 도망했습니다.


   루스드라에서 바울은 나면서 앉은뱅이된 자를 치유했는데 이것이 사람들에게 바울과 바나바가 사람의 형상으로 내려온 두 이방신임에 틀림없다는 인상을 주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믿음으로 바울과 바나바에게 짐승을 희생제물로 드리려고 했습니다. 물론 고넬료가 베드로 앞에서 절하려고 했을 때 그에게 일어서라고 말한 것과 같은 이유로 바울과 바나바는 받지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이든지 신적인 경배를 받는 것은 매우 죄악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해 그렇게 선하신데도 왜 사람들은 하나님이 아닌 어떤 피조물을 그렇게 자주 기꺼이 경배하려 하는 것일까요?


6. 루스드라를 떠나 안디옥으로 돌아옴(14:19-28)


그러나 루스드라의 군중들은 주위에 의해 곧 변화되어 유대인들이 바울에 반대하도록 선동시켰을 때, 분노하여 바울을 돌로 쳐 죽이려고 했습니다. 바울이 죽었다고 생각되자 버려두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그에게는 아직 주님을 위해  해야할 큰 사역이 남아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무서운 경험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주님만을 섬겨 나가기 원했습니다. 그들은 더베로 갔었지만 그곳에서 다시 안디옥 교회로 돌아가는 여행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를 가혹하게 취급했던 이 성들을 결코 피하지 않고 그들이 그곳에 있을 때 구원받았던 몇 사람들을 굳게 하면서 바울은 그 모든 성들을 다시 지나서 곧장 나아갔습니다. 그는 또한 각처에 세워진 작은 교회들을 보기 원했기 때문에 그곳의 그리스도인들을 만났고 서로를 도울 수 있었습니다. 마침내 그들은 본 교회로 돌아와 하나님께서 많은 영혼들을 구원하신 놀라운 일에 관하여 말하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의 공회의


1. 유대 그리스도인들과 논쟁(15:1-5)


우리는 11장에서 믿은(적어도 믿었다고 말하는) 유대인 지도자들 중의 일부는 베드로가 이방인들과 교제했다는 것 때문에 그와 논쟁했다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베드로가 주님께서  자기를 어떻게 인도 하셨는지 설명하자 그들은 더이상 할말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그들이 다시 문제를 일으키고 있으며 안디옥까지 가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할례는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복을 구한다는 구약 시대의 표시였습니다. 이 일은 그 당시에는 선한 일이었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다른 사람들에게 그렇게 하도록 명령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구약의 모든 의식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어졌고 폐해졌습니다. 더욱이 구원의 필수적인 요소로서 그리스도의 사역에 어떤 것을 더하려는 것은 전적으로 잘못된 것입니다. 구원받기 위한 유일한 필요사항은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주님께서 이루신 사역뿐입니다. 자신의 죄를 깨달은 비참한 죄인은 하나님의 사랑외에는 하나님께 아무것도 바랄 수 없지만 할례. 세례, 또는 교회 출석과 같은 자신의 어떠한 선한 행위도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에게 필요한 모든 것은 그리스도이며, 믿음에 의해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삼을 수 있습니다. 당신은 그리스도의 보혈을 신뢰하십니까? 아니면 이것에 당신의 공로를 덧붙이겠습니까?

   안디옥에 있는 성도들은 이 잘못된 가르침에 혼동되었고 바울과 바나바는 그것이 참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시켰지만 그래도 그들은 예루살렘에 가서 교회 지도자들과 상의해야 한다고 결정했습니다. 사도들은 바울과 바나바를 매우 반갑게 영접했지만, 믿는 바리새인 중 일부는 모든 사람이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2. 베드로가 어떻게 성령님이 이방인 신자들에게 주어졌는지를 말함(15:6-11)


그래서 그들은 함께 모이기로 결정하여 철저하게 그 문제에 대해 토론했습니다. 대부분의 문제와 논쟁들은 함께 모여 끝까지 대화한다면 해결될 수 있습니다.

   처음에 많은 논쟁이 있었지만 베드로는 어떻게 하나님께서 그들의 믿음에 근거해서 사실상 이방인들을 받으셨는 가를 단순하게 상기시켰습니다. 이것은 고넬료와 다른 여러 사람들에게 성령님이 주어졌기 때문에 증명된 것입니다. 그런데 왜 바리새인들이었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아무런 조건없이 받으신 사람들에게 율법 준수라는 짐을 지우려고 애쓰는 것입니까? 유대인 자신들도 율법을 준수함으로써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된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유대인들도 지키지 못한 것을 이방인들에게 행하도록 강요하는 것입니까?


3. 바울, 바나바 그리고 야고보가 말함(15:12-21)


그후에 바울과 바나바는 루스드라에서 앉은뱅이가 나음을 받은 것과 같은 예를들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방인들 사이에서 놀라운 표적을 행하셨는지 말했습니다. 더욱 더 놀라운 것은 수백명의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구원받았다는 것입니다.

   마침내 야고보는 하나님께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이방인들을 받으셨다는 베드로의 진술을 지지하기 위해서 아모스의 예언을 인용했습니다. 이것으로 논쟁이 해결되었고 우리에게 구약성경과 신약성경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임을 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다시금 보여주었습니다.

야고보의 결론은 이방인들에게 할례와 모세의 법을 지키도록 요구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사도들은 이방인들에게 편지를 써서 음행과 우상과 어떤 음식들로 인한 죄를 피하도록 했습니다.

   이것은 모든 이방인들에게 온 율법을 지키는 것은 짐이 되기 때문에 매우 좋은 소식이었습니다. 또한 금지된 네가지 일들 조차도 구원의 방법이라고 언급되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그것은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자녀이며, 그런 행위가 그를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어 주지 않기 때문에 피해야 할 것들이라는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잘 이해하지 못하는 매우 중요한 구분이 있습니다. 선행은 구원의 열매이지 구원의 도구가 아닙니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고 이제 내가 구원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기 원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내 자신의 구원을 지켜주는 것도 아니고 단지 나를 먼저 사랑하신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것입니다.


4. 이방인 신자들에게 쓴 서신(15:22-29)


야고보의 제안은 모든 교회에 잘 받아들여졌으며 그들은 그 서신을 가지고 안디옥으로 돌아갈 유다와 실라 두 사람을 택했습니다. 이 두 사람은 "형제 중에 인도자"(22절)로 표현되었습니다. 틀림없이 그들은 이 영광스러운 칭호를 받을 가치가 있었지만, 그보다 더 나은 표현을 25절에서 보게됩니다.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유명해지려고 애쓰는 것보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데 자신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것이 더 나은 것입니다. 그러나 몇몇 그리스도인들은 명성을 얻기 위해 그들의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 서신에서 사도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사람들에게 할례를 받아야 될 것을 전하라고 그 사람들을 보낸 것이 아님을 나타냈습니다. 그들은 네가지 필수적인 일들 이외에는 그들에게 어떠한 짐도 지우지 않았습니다.


5. 이방인들이 기쁨으로 그 서신을 받음(15:30-35)


그들이 안디옥에 도착하자 온 교회를 모아 서신을 읽어 주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잘못된 가르침에 의해 실제로 괴롭힘을 당했습니다. 이제 그들은 바울의 가르침이 결국 옳았으며 누구든지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아야 한다는 것을 듣고 크게 안심했습니다. 더우기 유다와 실라도 그 사람들을 가르치며 그들의 믿음을 굳게했습니다. 얼마 후에 형제들이 그들을 예루살렘에 돌려 보냈지만, 실라는 계속 머물며 주님의 사역을 돕고자 했습니다.

   당신은 구원을 받기 위해 율법을 지키는 문제가 이제 완전히 해결되어졌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바울 서신에서 보면 유대인들이 매우 적극적으로 이 사람들에게 그 가르침을 더하려고  매우 먼곳까지도 간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바울이 직면한 이러한 잘못된 가르침은 갈라디아서, 고린도전서, 빌립보서, 골로새서에 있습니다.


6. 바울과 실라가 제2차 전도여행을 시작함(15:36-41)


얼마 후에 바울이 바나바에게 전에 구원받은 사람들이 있는 성들을 다시 방문하러 가자고 제안했습니다. 바나바는 기꺼이 원했지만, 그 첫번째 전도여행에서 낙오한 조카 마가를 데리고 가자고 했습니다. 바울은 그렇게 하기를 거절하므로 결국 그들은 서로 다른 길로 가야만 했습니다. 이제 사도행전에서 바나바나 마가를 볼 수 없지만 바울은 그들 모두를 친구로 여겼습니다(고전 9 :6, 딤후 4:11).

   바울은 실라가 복음을 전하기 위해 그와 함께 가기를 기뻐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형제들은 그들을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하며 전송했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뜻 안에 있는 것은 선한 일입니다.

Posted by 행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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