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믿음에 있는가

                        시험하고 확증하라


                                    구원을 배운 신자들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한복음 17:3)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을 모르던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죄 용서함 받아서 멸망의 지옥에 가지 않고 천국에 가게 되었음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곧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의 진리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위에 열거한 두 가지 내용은 복음을 깨닫는 것과 그리스도를 발견하는 것을 말한다. 깨닫는 것과 발견하는 것은 동일하게 경험을 통해서 알게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서두에 기록된 말씀처럼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영생이라고 했는데 '안다'는 말은 곧 경험을 통해서 안다는 뜻이다. 이 단어는 히브리어 "기노스코"라는 단어로써 "...에 의하여 ...을 알게 되다", "발견하다", "깨닫다"라는 뜻이다. 다시 말하자면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통하여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은 지식적으로 배우는 것이 아니고 경험적으로 깨닫는 것을 의미한다.

   필자가 수많은 기독교인들을 상담하면서 느끼는 것은 구원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았으며, 혹 구원의 진리를 아는 사람을 만나보아도 그들은 구원을 배웠을 뿐이었다.

   구원을 배운 사람을 천국에서 만날 수 있을까? 결단코 아니다. 구원은 배우는 것이 아니다. 예전과 달라서 오늘날은 각 교회마다 성경공부를 열심히 하여 성경 지식수준이 상당히 올라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구원을 지식적으로만 배워서 이론으로는 알지만 경험하지 못한 사실을 볼 수 있다. 이것이 한국 기독교의 심각한 문제요, 근심거리이다.

   사단의 입장에서보면 대 성공을 거둔 것이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의 영혼을 노략질하는데 성공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단의 속삭임에 속고 있다. 사단은 구원의 지식을 가르쳐주고 말하기를 "너는 구원의 진리를 알고 있으니 구원받은 거야. 더구나 한국에서 제일 이름있는 교파에 속했으며 유명한 목사님도 너와 같이 생각 하고 있지 않느냐? 너는 너의 목사님에게도 인정받고 있지 않느냐" 라고 한다.

   사람이 구원받지 못하고 지옥에 가는 현상을 여러 방면에서 조명하여 규정지을 수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사단에게 속아서 지옥에 가는 것이다. 오늘날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기가 막힌 사단의 전략에 속아서 지옥으로 떨어지고 있는 현실을 보면서 필자는 눈물을 금할 수 없다.

   이제 본론적인 이야기를 해보자. 구원에 관해서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가? "구원을 얻으라" 혹은 "구원을 얻었나니" 등으로 말하고 있지 아니한가! 성경 어디에도 구원을 이론적으로 배우라는 가르침은 없다. 원칙적으로 복음은 외치는 것이며 경고하는 것이며 깨닫게 하는 것이다. 학술적으로 가르쳐서 지식을 습득하면 구원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구원과 다르다. 이러한 사람들을 만나보면, 구원에 관해서 자신이 없으며 막연하게 천국에 갈 것이라 생각하여 자신 없는 대답만 한다. 혹 자신 있는 대답을 하는 사람도 알고 보면 자존심 때문에 말하거나 착각으로 말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여기서는 이와 같은 주제, 즉 구원을 배운 사람들의 상태를 점검해 보면서 이글을 읽는 독자들의 신앙에 도움을 주고자 한다. 먼저 성경에서 경험을 통하여 구원받은 경우를 살펴보고자 한다.

   요한복음 4장에 보면 사마리아 사람들이 불쌍한 여인의 안내를 받고 예수그리스도를 만나는 장면이 나온다. 그들은 여인을 통해서 "메시야를 만났다"는 말을 듣게 된다. 이것은 배움의 단계이다. 배움은 듣는 것이며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며 소식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자기 확인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그것은 소문일 뿐이다. 누군가가 그것의 사실성을 물어볼 때 자신 있게 말할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확인되지 않은 소문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은 메시아이며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구세주라고 믿고 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렇게 배운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은 왜 메시아이며 왜 구세주인가, 그가 메시아라면 나와 어떤 관계가 있으며, 나의 인생에 구체적으로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가를 알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그냥 구세주라고만 알고 있는 것이다.

   여인의 말을 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은 지혜로운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여인을 따라가서 예수님을 만났다. 그리고 직접 그분의 말씀을 들었다. 그들은 구원을 받았다(경험했다). 그들의 고백을 들어보자.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을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니라 하였더라"(요한복음 4:42).

   이 얼마나 확실한 경험인가.

   또 다른 경우도 있다. 누가복음 19장의 삭개오의 경우이다. 삭개오는 예수님에 관해서 여러 경로를 통하여 들었다. 그분은 메시아라고 들었다. 또는 선지자라고 들었다. 여러 기적들에 관해서도 들었다. 가르친 말씀에 대해서도 들었다. 그는 들은 상식으로 예수님을 알뿐이었다. 만약에 누군가가 삭개오에게 예수가 누구냐고 물었으면 자신 없는 대답을 하되 알고 있는 상식 수준에서 하였을 것이다.

   금일에 필자가 만나본 교인들이 오랜 교회생활에도 불구하고 구원의 확신 없이 어정쩡한 대답을 하거나 분명한 대답을 한다 하여도, 학생이 배운바를 대답하듯 지식적인 대답에 머무르고 있다.

   필자는 언젠가 교인을 만나서 "천국에 갈 수 있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그는 "갈 수 있다"고 말하였다. 그래서 또 묻기를 "무슨 근거로 그렇게 말하는가?"하니 "구역집회에서 전도사님에게 배웠다"고 하였다. "무엇을 배웠느냐?" 물으니 "여러분이 에배당에 나오는 날 예수님을 믿기 시작했으니 구원을 받은 것이다. 왜냐하면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하였기 때문이라고 배웠다"고 대답하였다. 그래서 필자는 또 묻기를 "그러면 죄는 어떻게 되었는가?" 하니 "십자가에서 모두 용서되었다"고 대답하였다. "그러면 또 계속해서 죄를 짓는데 어떻게 되는가?" 그는 "죄를 짓지 않아야지요" 하였다 "그래도 실수로 죄를 짓지 않는가?" 하니 "그러면 회개해야 하지요" 하였다. 또 끈질기게 묻기를 "회개하지 못하고 죽거나 죄를 짓다가 죽으면 어찌됩니까?" 하니 "할 수 없지요" 하고 말하였다. "그러면 당신은 지옥으로 가는데 어찌 하렵니까?" 하였을 때, 너무나도 뜻밖의 대답을 들었다. 수십 년 교회 다닌 그의 입에서 놀라운 말을 들었다. "지옥이 있기는 있는 겁니까?" 하는 것이었다. 필자는 어이가 없어서 "지옥을 못 믿습니까?" 하니 "아니, 믿기는 믿는데 지옥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여기까지 대화를 들으면서 독자는 무슨 생각을 하는가? 그는 지식으로 구원을 배웠을 뿐 구원받은 적이 없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삭개오는 지혜로운 사람이었다. 삭개오는 자신의 알고 있는 지식에 대해서 확실하게 확인하고 싶었다. 그는 뽕나무 위에서 기다리다가 예수님을 만났다. 그의 생애는 달라졌다. 그는 구원받은 성도의 대열에 합류하게 된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이여! 그대는 거듭났는가? 구원을 경험했는가? 속죄를 경험했는가? 지옥을 경험했는가? 진지하게 묻고 싶다. 그대가 하나님의 실존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아들 되심을 믿고 있다 할지라도 앞에 질문한 질문들을 경험하지 못하였다면 구원받았다고 인정할 수 없다. 이 말을 이해할 수 없다는 독자들도 있을 줄 안다. 그러나 이렇게 경고할 수밖에 없는 전도자의 마음을 아는가?


   구약의 예를 보자. 열왕기상 10장에 보면 스바 여왕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스바 여왕은 솔로몬에 관하여 많은 소문을 들었지만 솔로몬의 위대함에 대해서 오히려 믿지 못하고 의심하는 마음이 있었는데 그는 진실을 알아보기 위하여 멀고도 힘든 여행을 하였다. 그리고 솔로몬을 만나게 되었다. 솔로몬을 만나서 그가 한 고백은 무엇인가?

   "왕께 고하되 내가 내 나라에서 당신의 행위와 당신의 지혜에 대하여 들은 소문이 진실하도다. 내가 그 말을 믿지 아니하였더니 이제 와서 목도한즉 내게 말한 것은 절반도 못되니 당신의 지혜와 복이 나의 들은 소문에 지나도다" 하였다. 그는 소문을 확인한 것이다. 예수님도 이 여왕을 칭찬하지 아니하였던가(마12:42).

   여기에 필자가 강조하고 싶은 단어가 있다. "소문"이다. 소문은 확실한 것이 아니다. 신뢰할 만한 것이 못 된다. 소문은 알고 있는 지식일 뿐이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소문적 신앙에 머물러 있음을 통탄하지 않을 수 없다. 앞에 말했던  구도자의 경우 지옥을 믿는데 믿어지지 않는다고 하는 해괴망측한 이야기도 소문적 신앙의 전형이다,

   오늘의 기독교 현실이 수요일과 주일에 교회에 나가서 목사님의 설교말씀을 일방적으로 듣고(배우고) 끝나면 집에 와서 자기의 삶을 살고, 이렇게 살다 보니 들은 것은 많은데 내 것이라고 할만한 지식은 없다. 아무것도 모른다고, 아직은 믿음이 없다고 거부하는 사람들에게 억지로 세례 주고 교인을 만들면 천국에 가는가? 교회를 몇년 다녔지만 아직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고 자격도 없으므로 직분을 맡을 수 없다는 사람들에게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말씀을 인용하여 협박하다시피 집사 직분을 맡기면 천국에 가는가? 그것이 구원받은 사람인가?

   필자는 어려서부터 아버지와 어머니가 목사님의 강요에 의해서 어쩔 수 없이 세례 받고 직분 맡으며 힘들어하는 것을 보면서 자라왔다. 나의 부모뿐만 아니라 주변의 수많은 사람들이 그와 같은 고통 속에 있는 것을 보아왔다. 얼마나 잘못된 현실인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에게 세례를 주어서는 안 되며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집사를 맡기면 교회 망하는 것이다.

   한국 사람들은 예로부터 관료주의에 젖어서 감투를 좋아하는 속성이 있다. 오늘의 기독교가 이 속성을 이용하여 성경에도 없는 수많은 종류의 감투를 만들어 교인들에게 나누어주고, 교인들은 그 속에서 위안을 받으며 천국에 갈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집사, 장로 임명을 받으면 얼마만큼의 헌금을 해야 하는 의무는 자연스러운 관행으로 요구되고 있다. 이것은 중세 천주교에서 속죄권을 팔았던 사실과 무슨 차이가 있단 말인가. 또한 성직을 매매했던 슬픈 기독교 역사와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참으로 기가 막힌 현실이다. 영생의 비밀에 관해서는 가르쳐 주지 못하고, 가르쳐도 이론적으로 가르쳐 줄 뿐 그들의 생명을 살리지는 못하는 현실 아닌가.

   독자여, 그대가 수 십 년 하나님을 섬겼는가? 구원의 교리를 배워서 잘 알고 있는가? 예수님은 나 때문에 죽어서 내 죄를 용서하였다고 고백하고 있는가?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고 배워서 주장하고 있는가? 그러므로 나는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장담하고 있는가? 그러나 필자는 권하고 싶다. 그대가 진정 멸망의 지옥에서 건짐 받은 경험 있는 성도들인가를 정직하게 점검해보길 바란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고린도후서 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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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을 위한 갈라디아서  


                             죄와 종교로부터의 자유

                                                                                                    - 허윤욱-

                                           서문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로 인하여 십 년 전에 횃불에 연재된 채 묻혀 있었던 이 글이 다시 빛을 보게 됨에 한없는 감사와 눈물이 있다.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기록한 때는 학자들에 따라 차이는 있으나 대략 서기 55년경으로 본다.

   순수하고 깨끗하고 너무도 아름다운 교회가 성령님에 의해서 시작되었으나, 2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어느 날 하나님을 순전하게 사랑했던 갈라디아 지방의 교회들에게 사단의 역사가 시작되니, 지도자들이 변질된 교리를 받아들이고 양들이 그것을 좋게 여겨 급속도로 썩어 가고 있었다. 이것은 사단이 가라지를 뿌린다고 하신 주님의 예언의 성취였다.

   이 때에 바울은 하나님의 거룩한 분노를 대변하는 대변인이 되어 악을 제거하고 진리를 확실하게 드러내는 이 서신을 쓰게 되었다. 이 분노는 이스라엘의 음행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분노가 일어날 때에 창으로 시므리와 고스비를 찔러 악을 제함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케 하여 영원한 제사장 직분을 받았던 아론의 손자 비느하스의 분노와 같다(민수기 25장).

   오늘날은 갈라디아 시대보다도 더 혼탁하여 복음을 듣고자 하여도 정직한 복음을 듣기 힘들며, 진리를 왜곡하여 성경과 전혀 관계없는 종교로 만들고, 그 집단 속에서 순응하지 아니하면 이단으로 정죄 당하는 슬픈 현실이 되었다. 정직한 그리스도인들이 아무리 성경적으로, 양심적으로 진지하게 믿으려 발버둥쳐도 거대한 종교 집단에 순응하지 아니하면 정죄 당하는 현실 아닌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말씀이 곧 하나님이라고 가르치기도 부끄러운 현실이 아닌가? 성경의 권위는 땅에 떨어져서 성경의 가르침보다 자신의 종파의 헌법을 더 주장하면서 사람의 가르침을 더 따르지 아니한가?

   필자는 썩을 대로 썩어 가는 한국 기독교 현실을 바라보면서 갈라디아서를 중심으로 쓰여진 이 글들이 길을 잃고 방황하는 양떼들의 길잡이요 등불이 되기를 기도할 뿐이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이글을 읽는 모든 분들과 함께 하시어 이글을 읽고도 구원받지 못하고 지옥에 떨어지는 비극은 없었으면 하는 기도와 바람이 있다.

   다소 직설적이고 강력한 책망의 표현이 있을지라도 비느하스가 가졌던 거룩한 분노로 받아서 소화하여 주기를 바란다.

   이 글이 다시 빛을 보기까지 기도해 주신 동역자들에게 감사하고 전도출판사 직원들에게 감사드린다.

                                                                                                                             2001년 8월


             사람을 따라 몰려다니는 기독인들이여!


   "사람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갈라디아서 1:1)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성경도 사람이 기록한 책이 아니냐?" "단순한 이스라엘의 역사책이 아니냐?" "특별한 지능을 가진 사람에 의해서 만들어진 책이 아니겠느냐?" 하며 근거도 없는 자신의 외고집 생각만가지고 질문하는 것을 보게 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성경은 단순한 이스라엘의 역사책이 아니다. 절대로 아니다. 성경은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의 진실은 하나님이 보장하시고(여러 가지 방법으로), 하나님의 실존에 대한 증명은 성경이 담당하고 있다. 성경 없이 하나님을 믿을 수도 없고, 알 수도 없으며, 하나님의 깨우치심 없이 성경을 깨달을 수 없다.

   우리는 말씀이 하나님 자신인 것을 요한복음 1장 1절을 통해 알고 있다. 또한 말씀은 모든 사람들을 심판하시는 주체가 된다고 요한복음 12장 48절에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성경의 말씀은 모든 신자가 읽고 순종하고 높이고 신앙의 지표로 삼아야 마땅하다.

   그러나 오늘의 기독교인들의 상태는 어떠한가? 사람에 의해서 좌우되고, 사람 중심으로 모여지며, 사람에 의해서 건설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본래 초대교회는 사람에 의해서 시작되지 않았다. 교회는 하나님의 계획과 역사하심으로 시작되었다.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계획하신 계획을 이루기 위하여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그분을 통하여 죄인을 구원하기 시작하심으로 초대교회가 시작된 것이다. 주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은 창세전에 계획되었으며, 구약에서 예언되고 준비되어 신약교회 시작 전에 이루어져 신약교회를 이루는 초석이 되었다. 이것은 순전한 하나님의 경륜 속에서 이루어졌으며, 주님께서는 이 일에 사람을 사용하셨을 뿐이다.

   금일의 교회들은 어떠한가? 사람의 이름과 가르침을 중심으로 종파를 만들어 여기에 소속하면 잘 믿는 것이고 이 종파에 소속하지 않으면 잘못된 것처럼 가르치고 있으니 얼마나 슬픈 일인가? 각 종파들은 대부분 불과 3,4백년을 넘지 않는 역사를 가지고 있으나 그들만이 순수하고 정통인 것처럼 착각 속에서 주장하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그렇다면 그들 전에 순수하게 믿었던(종파와 소속없이) 사람들은 무엇이었던가? 초대교회의 12제자들을 비롯한 수많은 성도들은 금세기에 있는 아무 종파에도 속하지 아니하였는데, 그렇다면 그들 모두는 잘못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란 말인가?

   오늘날 수많은 기독교인들 중에 필자를 슬프게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은 성경의 순수한 진리를 잘 설명하여 주어도 자기가 소속한 교회의 목사님의 말은 무조건 따르지만 성경말씀은 따르지 않는다.

   슬프다, 현실이여! 어쩌다 성경의 권위가 이토록 떨어졌단 말인가? 성경이 사람의 말보다 못하단 말인가? 성경을 사람의 말과 가르침보다 푸대접하는 이 세대는 정죄 받아 마땅한 세대다.

   사람을 무조건 따르다가 망한 사람들의 교훈이 구약에 기록되어 있어 소개하고자 한다.

   사무엘하 15장부터는 압살롬의 반역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다윗을 반역한 압살롬이 자기의 세력을 넓히고 다윗을 몰락시키기 위하여 사전에 헤브론으로 사람을 모을 때, "청함을 받은 200명이 그 사기를 알지 못하고 아무 뜻 없이 예루살렘에서 저와 함께 갔으며..."(사무엘하 15:11)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들은 왜 가야하는지, 자기를 청한 압살롬이 무엇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아무 뜻 없이" 사람만 보고 몰려갔던 것이다. 압살롬은 그 외모가 다른 왕자보다 뛰어났으며, 그는 다윗의 왕자였으니 차마 아비를 배반하랴 생각하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 생각은 얼마나 잘못된 생각인가? 외모와 상황과 신분만 보고 바보처럼 따라갔던 이 사람들의 말로가 처참했다. 이 사건은 오늘날 기독교의 상황을 잘 예언하여 주고 있는 한 폭의 그림이요 거울이다.

   금일에도 하나님을 가장 잘 섬기는 자로 위장하는 자칭 하나님의 종들 중 거짓 종들이 얼마든지 있다. 그들은 오늘날 각 종파들이 만들어놓은 모든 절차를 다 밟아서 정상적으로 목사의 직분에 이르렀으나, 성경은 그것만 가지고는 부족하다고 증언하고 있다. 그들 중 거짓 종들이 얼마든지 섞여 있을 수 있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마태복음 7:15).

   조심하여야 한다. 반드시 조심하여야만 할 것이다. 어린 양떼들이여! 저들이 지극히 거룩하게 보일지라도 거짓 목자이며, 거짓 그리스도인일 수 있다. 말씀은 거짓일 수 없으니 "양의 옷을 입고 나아오는 이리"라는 말씀을 잘 묵상하기 바란다. 자식된 압살롬이 아버지를 배반할 줄 생각하지 못한 것처럼, 오늘에도 입만 열면 하나님을 높이고 거룩한 하나님의 종처럼 보이는 그들이 어찌 거짓 종일 수 있느냐고 의심할지 모르나 압살롬을 따랐던 자들처럼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아버지를 반역하여 모반한 압살롬과 다윗의 싸움은 18장에 나오는데, 그 싸움이 얼마나 치열하였는지 모른다. 2만을 헤아리는 백성이 희생되었으며, "그 날에 수풀에서 죽은자가 칼에 죽은 자보다 많았다"는 기록이 주는 교훈이 크다고 생각한다(사무엘하 18:8).

   오늘날 영적인 세계의 혼탁한 상황은 수풀을 가리키는바, 이 영적인 세계의 수풀 속에서 사람을 따라 방황하다가 죽어 가는 불쌍한 양떼들을 말함이 아닌가? 그들은 진리를 찾아 이 교회, 저 교회 이 종파, 저 종파로 몰려다니며 방황하다가 하나님을 원망하고, 사람을 원망하며 죽어간 것이다. 자신들은 잘 믿는다고 알았는데 왜 지옥에 갔는지 그 이유를 지옥에 가서야 비로소 알 게 될 것이다. 성경은 그들이 "울며 이를 간다"고 기록하고 있다(마태복음 13;50).

   오늘의 기독교인들이여! 양떼들이여! 사람을 따르지 말고, 사람을 의지하지 말라. 주님의 말씀을 따르라.

   "이 땅에 괴이하고도 놀라운 일이 있도다.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그 결국에는 너희가 어찌 하려느냐"(예레미야 5:30,31).

   이와 같은 일은 전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다고 보여진다. 성경을 멋대로 해석하여 자기 욕심대로 가르치고 인도하여도 사람들은 분별없이 따르니 도대체 어찌 하려는가? 선한 양떼들이여, 불쌍한 소경들이여!

   이 말씀에서 가르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첫째로 그들의 행위는 괴이하고 놀라운 일이라는 것이다. 이 말은 그들의 가르침이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금일의 기독교계서 행해지고 있는 사례들을 보면 기본 상식과 이치에도 맞지 않는 것을 양심의 가책도 없이 따르고 있다. 비성경적인 방법으로 헌금을 강요하고, 육신적인 방법으로 교회를 운영하여 교회가 물질화, 인본주의화 되어도 그대로 수용하고 있는 모습은 지극히 안타까운 현실이다. 그들은 에서의 망령된 길을 스스로 따르고 있다.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처럼 스스로 팔린 사람들이다. 사람의 생각대로 믿으며, 이권을 따라 움직이는 현실은 신구약 여러 곳에서 지적하는 죄악이다.

   둘째로, 그들은 거짓 것을 예언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많은 거짓 선지자들이 예수님의 재림 날짜를 발표하였다가 부끄러움을 당했는데 아직도 그러한 거짓 것을 따라가는 우매한 교인들이 있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마태복음 24:36).

   그들이 거짓 것을 예언하는 것은 예수님을 잘못 알고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어떤 이들은 예수님을 해방자라 하여 폭력적 권력이나 독재자들로부터, 억압자나 가진 자들로부터 해방시켜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러한 사람들이 오늘날 기독교의 가면을 쓰고 정치운동을 하거나 사회운동을 하여 예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한다.

   예수님께서 해방자인 것은 성경도 가르친다(로마서 8:1,2). 그러나 예수님은 죄와 사망(지옥)으로부터의 해방자이시지, 독재자나 착취자로부터 해방자가 아닌 것을 알아야 한다. 또 그들은 거짓 것을 가르치되, 열심히 노력하고 교회 제단에 충성하면 은혜 받고 천국에 갈 것처럼 가르치나 성경에는 그런 가르침이 없다. 오직 성경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불쌍히 여기시는 은혜와 사랑을 통해서 거저 주시는 선물로 구원을 받을 뿐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다만 이 엄청난 구원을 단번에 선물로 받은 사람들이 감격, 감사하여 자의적 충성으로 주님을 섬기고, 말씀대로 살아가고자 하는 성도들의 무리인 교회가 있을 뿐이다.

   셋째로, 그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는 자들이라는 것이다. 옛날 타락된 제사장들은 제사장직을 하나의 권력으로 생각하여 권위주의를 발전시켜 나갔었는데, 금일의 기독교 상황은 목사를 공공연하게 제사장으로 비유하여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처럼, 가르치는 것은 절대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진다"는 마태복음 15장 4절 말씀을 읽지 못하였는가? 성경은 구원 받은 자면 다 제사장이라고 선포하고 있지 아니한가! 루터가 만인제사장주의를 부르짖은 지가 얼마나 지났다고 벌써 잊었는가!

   "너희도...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시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베드로전서 2:5).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베드로전서 2:9).

   누구에게 하신 말씀인가? 베드로전서 1장 2절에 있는 대로 예수님의 피로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하신 말씀이 아닌가? 금일의 수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이 자신을 제사장처럼 가르쳐 교인들 위에 군림하여 자신을 잘 섬기면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이며, 자신의 말을 불순종하면 하나님께 저주 받는다고 협박하여 양떼들을 공포에 떨게 하는 무서운 죄악이 백주에 자행되고 있다.

   인간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가 될 수 없다. 그리고 생각하여 보라. 하나님께서 자신을 잘 섬기면 복 주고 자신의 마음에 안 들면 저주해 버리는 독재자인가? 무서운 심판자 하나님만이 하나님의 모습인가? 물론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또한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이 양면의 조화가 필요한 것이다. 공포에 사로잡혀 성수주일 안 하고 십일조나 기타 헌금실적이 부실하면 당장에 저주를 퍼붓는 무서운 하나님으로만 보이게 하는 현실은 탄식할 일임에 틀림없다.

   오늘날 기독교를 병들게 한 권위주의, 즉 일인목회주의는 반드시 타파되어야 한다. 성경은 그와 같은 가르침을 동조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디모데전서 2:5).

   예수님은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는 유일한 중보이시다. 이 일에 필요하다면 사람이 쓰임 받을 수 있겠으나 중보는 한 분 예수님뿐이시다.

   첫째로 예수님은 우리의 죄사함에 대한 중보이시다. 그분은 인간 편을 바라보실 때 죄 속에서 죽어서 죄값으로 멸망의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인간의 딱한 처지를 보셨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죽을 때까지 자기의 죄 문제와 싸우다 죽어 가는 슬픈 존재인 것을 주님이 보셨던 것이다.

   또한 주님께서 하나님의 편을 바라보실 때 인간을 사랑하시나 죄는 사랑하실 수 없고, 인간과 같이 계시고 싶으시나 죄와 함께 하실 수 없으신 거룩하신 공의와 사랑의 하나님을 보셨다. 다시 말하자면 인간을 천국에 데려가고 싶으시나 죄와 한 덩어리가 되어있는 죄인을 데려가실 수 없는 하나님의 입장을 보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 주심으로 인간의 모든 죄를 단번에 해결하셔서 하나님의 입장과 인간의 입장을 다 충족시켜주신 완전한 중보자(중재자)가 되셨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히브리서 9;12)

   영원한 속죄! 독자여, 이 말씀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깨달은 적이 있는가! 만약 그대가 마음속 깊이 이 말씀을 깨달았다면 그대는 구원 얻은 사람임에 틀림없다고 성경은 약속하고 있다. 그대의 과거, 현재 그리고 앞으로 지을 미래의 모든 죄가 영원히 해결 되었다.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피가 모든 죄를 씻었다! 말끔히 씻었다! 이제 그대가 할 일은 이 십자가의 속죄를 단순히 감사하여 받아들이기만 하면 구원을 받았으며, 거룩해졌다고 성경은 이미 선포하고 있다.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내)가 거룩함을 얻었노라"(히브리서 10;10)

   이 글을 읽는 그대는 이 말씀으로 의로워졌고 구원받았기를 바란다.

   둘째로 예수님께서 중보가 되신 것은 천국의 하나님과 우리를 만나게 해주실 분이시기 때문이다. 잠시 후에 주님은 공중에 오셔서 우리를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데려가셔서 하나님 아버지 앞으로 인도하실 것이다(데살로니가전서 4:15~18). 구원받은 모든 하나님의 자녀가 그 자리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비록 어떤 성도는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모습일지라도 구원받은 모든 자가 이 영광의 자리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복스러운 영생의 소망이다. 주님은 친히 약속하셨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한복음 14:2~3).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이 이 영광스러운 자리에 동참하게 되기를 기도한다. 아멘.

Posted by 행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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