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아사는 인생들이여!


                      나아만의 육체 구원과  영혼 구원


   " 나아만이 가로되... 이제부터는 종이 번제든지 다른 제든지 다른 신에게는 드리지 아니하고 다만 여호와께 드리겠나이다" (열왕기하 5:17).


   " 나는 예수 믿고 그 지긋지긋한 관절염 고치고 건강하게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릅니다."

   구원받았느냐는 필자의 물음에 신앙생활을 10년이나 했다는 어느 집사님의 대답이었다. 집사님의 대답이 하나님 앞에서 왜 잘못되었는지 나아만의 경우를 살펴보면서 교훈을 받기를 원한다.


   나아만 장군이 처음 하나님 앞에 나오게 된 동기는 문둥병 때문이었다. 인간의 방법으로 치료가 불가능한 문둥병을 고치지 못하여 괴로워하고 있다가 계집종이 전해준 선지자의 소식을 듣고 먼 거리를 찾아와 고침받게 되지 아니하였던가! 나아만의 이 과정은 인간의 눈으로 볼 때 우연으로 생각되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분명한 계획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비록 적국의 장수였지만 하나님을 믿을만한 양심이 그 속에 있는 것을 보시고, 한 소녀가 포로로 잡히게 하시고 그 소녀를 통해 선지자의 소식을 듣게 하신 이 모든 과정은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오늘날에도 수많은 죄인들이 죄악의 깊은 잠을 자고 있는동안 하나님은 자기의 종들을 부르시고 그들을 통하여 자기 일을 진행하고 계신다. 죄인들이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와 사랑스런 음성을 깨닫지 못하고 멸망의 지옥으로 가고 있음을 생각하고 슬퍼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 나아만에 대한 하나님의 경륜을 더 생각해 보자. 하나님께서 나아만을 부르사 병을 고치신 것은 병 자체를 고치시는 것보다 그 역사를 통하여 창조주 하나님을 발견케하사 그분을 섬기며 그분을 통하여만 구원받음을 알게 하는데 목적이 있으셨던 것이다.

   서두에 말씀을 소개한대로 나아만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따라 하나님을 발견하고 구원받은 후 돌아갔다. 다시 말하면 나아만이 문둥병을 고친 것은 육체적 구원인데 하나님의 뜻은 이 육체적 구원을 통해 영혼의 구원을 목적하셨던 것이다.

   그는 그의 육신의 고침받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역사하심을 깨닫고 큰 충격을 받았음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그는 큰 물질을 아낌없이 선지자에게 바치려 했다 (열왕기하 5:15,16). 선지자가 받기를 거절했을 때 그는 선지자를 통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분께 감사하며 예배하기 시작한 것이다.

   필자는 이 장면에서 두가지 중요한 사실을 말하고 싶다.

   첫째는 나아만에 대한 계획이 2단계, 즉 육체 구원을 통한 영혼 구원이었으며, 금일의 수많은 구도자들도 이러한 경험을 거쳐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깨닫게 되는 과정은 다양할 수 있다. 병고침이나, 기도 응답이나, 능력 경험, 혹은 교육을 통해서 다양하게 하나님의 실존을 경험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경험 자체가 곧 구원이 될 수는 결코 없는 것이다. 슬픈 사실은 필자가 상담한 많은 경우의 교인들이 이러한 경험을 붙들고서 구원받은 자로 착각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아니다. 결단코 아니다. 이 경우는 구원으로 가는 과정이지 구원은 결코 아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육체적 구원이나 표적을 주러 오시지 않고 당신의 영혼을 구원하러 오셨다.

   바울도 표적만 찾는 유대인, 지식만 추구하는 헬라인을 책망하고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강력하게 증거하고 있다 (고린도전서 1:22,23).

   독자여, 누가복음 17장 11절 이하를 보라. 열 문둥병자가 다 병고침 받았으나 구원받는 자는 사마리아인 한 사람이었음을 명심하시라. 만약 당신이 하나님을 믿게 된 것으로만 구원받은 것으로 여긴다면 당신의 믿음도 검토해 보아야만 할 것이다.

   놀랄 일은 주님 나라에 갈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대다수의 사람 중에 천국에 이르지 못할 자가 생각보다 많다는 것이 성경의 증거이다 (마태복음 7:13~23). 당신이 지신의 영혼을 진정 사랑한다면 위의 말씀을 찾아 살피고 겸손히 당신의 영혼을 검토해 보라. 이 일이 중요한 것은 만약 당신이 버리운 자라면 당신의 그 훌륭한 신앙 경력에도 불구하고 영원히, 영원히 꺼지지 않는 지옥 불에서 통곡하고 있을 것임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둘째로 이 장면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나아만이 하마터면 병만 고치고 영혼 구원에 이르지 못하였을 뻔하였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으로 사려 하였기 때문이다. 만약 엘리사가 그 물질을 받았다면 나아만은 자기의 병고침에 대한 값을 치렀다고 당당한 생각을 하며 하나님을 경배하지는 못하였을 것이 분명하다. 엘리사야말로 훌륭한 하나님의 종의 모습이다. 엘리사는 영안이 온전히 열려있는 거룩한 하나님의 종이었던 것이다.

   구원의 문제, 영생의 문제에 돈이나 기타 인간의 생각이 개입하면 하나님의 선물인 영생이 훼손되는 것이다. 영생은 온전히 선물로만 주어진다. 그 아무것도 우리들의 댓가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며 순전한 하나님의 선물인 것이다(에베소서 2:8). 나아만을 감동시킨 이 하나님의 선물이 교회 역사 2,000년 동안 수많은 죄인들을 변화시켜, 주 앞에서 주님을 사랑하여 순교의 자리까지 이르게 하지 아니하였던가?

   영생은, 돈으로나 기타 아무것이나, 심지어는 하나님을 사랑하여 순교하였다 하는 신앙 경력으로도, 그 어떤 댓가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순수하게 거져주시는 선물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 놀라운 구원의 그림자를 구약에 두신 것은 온전한 자비이다. 오늘을 사는 우리가 이 나아만 장군에게 임한 하나님의 역사를 거울 삼아 하나님 앞에 갈 수 있는 길을 찾는다면 얼마나 기쁜 일인가!

   나아만이 자기의 잘못된 생각을 버린 것처럼 당신도 그러하기를 바라며, 나아만이 겸손해진 것처럼 당신도 그러해야 될 것이며, 나아만이 하나님을 경배한 자가 된 것처럼 당신도 구원받은 성도로 하나님께 알려졌기를 바란다.

   거듭 말씀을 드리지만 당신의 생각을 버리지 않는 한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

   "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베드로전서 1: 8,9).

   당신은 분명히 영혼 구원을 받았는지 아니면 육체 구원만 받았는지 겸손하게 점검해 보시기 바란다.

                                                                                                                        - 전도자 허윤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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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고보서


                      제11과

                     기도와 병고침 (야고보서 5:13-15)


   야고보서 5장을 마무리하는 구절들의 주제는 기도입니다. 이 기도는 명사나 동사의 형태로 일곱 번 나타나고 있습니다.


언제나 할 수 있는 기도(5:13)


   삶의 모든 환경 속에서 우리는 기도로 주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고난 중에 있다면, 우리는 간절히 구함으로 주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기쁨 가운데 있다면, 우리는 찬송으로 주님께 우리 마음을 높여야 합니다. 주님은 모든 우리 생활의 환경에 변화를 일으키기 원하십니다.

   우리는 삶 속에서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의 위대한 근원-창조주-으로서 하나님을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것을 러더포드(Rutherford)가 말한 "이차 원인으로 이루어진 바퀴들의 혼란한 회전" (우연한 결과로 일어나는 일들)이라고 여겨서는 안됩니다. 이것은 좌절하여 자신이 환경에 의한 희생자라고 인정한다든지 환경이 변화하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방법 외에는 아무 방법도 보지 말아야 합니다.


병든 자와 기도(5:14-15)


   이 구절들은 야고보서 가운데, 아마도 신약성경 가운데 가장 논란이 많은 부분일 것입니다. 그러한 논란은 오늘날 신자들의 삶 속에서 병 고침의 현장에서 우리가 직면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구절들을 자세히 살펴보기 전에 성경에서 병든 자와 병 고침에 대해 어떻게 가르치고 있는지 짚고 넘어가는 것이 도움이 될 것입니다.


   1. 우리는 일반적으로 모든 병이 세상에 있는 죄의 결과라는 것을 인정합니다. 만일 죄가 들어오지 않았다면 병도 없었을 것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2. 어떤 병은 사람이 생활 가운데 범한 죄의 직접적인 결과일 수도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1:30에서 어떤 고린도사람은 자기 생활 가운데 있는 죄를 판단하지 않은 채, 즉 죄를 고백하고 용서받지 않은 채 주님의 만찬에 참여했기 때문에 병이 들었습니다.


   3. 모든 병이 사람이 생활 가운데 범한 죄의 직접적인 결과는 아닙니다. 욥은 그가 가장 의로운 사람이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병이 들었습니다(욥 1:8). 날 때부터 소경이 된 것은 그가 범한 죄로 인한 고통이 아니었습니다(요 9:2,3). 에바브로디도는 주님의 일에 대한 그의 지칠 줄 모르는 활동으로 인해 병이 들었습니다(빌 2:30). 가이오는 육체적으로 건강치 못했으나 영적으로는 강건했습니다(요삼 2절).


   4. 어떤 병은 사단적인 활동의 결과이기도 합니다. 욥의 온 몸을 뒤덮은 부스럼은 사단이 일으킨 것입니다(욥 2:7). 누가복음 13:10-17의 여인을 꼬부라지게 한 것은 사단이기 때문에 그 여인은 스스로 펼 수 없도록 두 번 꼬부라진 것입니다. 16절의 "십 팔 년 동안 사단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 이라는 것에 유의해야 합니다. 바울은 사단에 의해 생긴 육체의 연약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것을 "...육체의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내게 주셨으니..." (고후 12:7)라고 불렀습니다.


   5. 하나님은 치료하실 수 있으시고 또 치료하십니다. 아주 실제적인 의미로, 모든 치료는 하나님께로 온 것입니다. 구약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이름 중 한 가지는 여호와 로페카로서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 (출 15:26)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모든 치료의 경우에 있어서 하나님을 인정해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치료하는데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하신다는 것을 분명하게 해줍니다. 때로 하나님은 몸의 자연 치유 과정을 통해 치료하시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몸에 놀랄만한 회복의 능력을 두셨습니다. 어떤 때 하나님은 약으로 치료하십니다. 예를 들면, 바울은 디모데에게 그의 비위와 자주 나는 병을 위하여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고 조언하였습니다(딤전 5:23). 또 어떤 때 하나님은 의사들을 통하여 고치십니다. 예수님은 병든 자에게는 의사가 필요하다고 분명하게 가르치셨습니다(마 9:12). 바울은 누가를 "사랑 받는 의원" (골 4:14)이라고 말함으로 그리스도인들 사이에도 의사가 필요하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치료의 사역에 의사를 사용하십니다. 유명한 프랑스 외과의사인 듀보이스(Dubois)는 "외과의사는 상처를 손질하고, 하나님은 그것을 치료한다" 라고 말했습니다.


   6. 또한 하나님은 기적적으로 치료하시기도 합니다. 복음서에는 이에 대한 많은 예가 들어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늘 기적으로 치료하신다고 하는 것은 옳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결코 기적으로 치료하시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더욱 없습니다. 성경에는 오늘날도 하나님께서 기적으로 치료할 수 있다는 것을 믿지 못하게 하는 것은 없습니다.


   7.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해야 하는 것은 치료하는 것이 늘 하나님의 뜻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드로비모가 병듦으로 밀레도에 두고 떠났습니다(딤후 4:20). 주님께서는 바울의 육체의 가시를 치료하시지 않으셨습니다(고후 12:7-10). 만일 항상 치료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그 누구도 늙거나 죽지 않을 것입니다.


   8. 하나님께서는 모든 경우마다 치료하시겠다고 약속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치료해 달라고 요구할 수 없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2:27에서는 치료를 우리가 정당히 요구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긍휼과 같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9. 일반적인 의미로 치료가 "속죄" 에 들어있다고 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주님의 속죄에 속한 모든 복이 아직 우리에게 다 주어진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몸의 구속은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사역에 들어 있지만 그리스도께서 그의 성도들을 데리러 오실 때까지 우리는 또한 모든 질병에 대해 완전하고 궁극적인 치료를 받게 될 것입니다.


   10. 치료가 되지 않는 것이 믿음의 부족을 나타낸다는 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만약 그렇다면 어떤 사람은 무한히 살아야 한다는 의미가 되는데 그러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바울도 드로비모와 가이오도 치료되지 않았지만 그들의 믿음은 강하고 적극적이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야고보서 5장의 본문으로 돌아가서 그것이 치료에 대해 가르치고 있는 성경의 나머지 부분과 얼마나 일치하는지 보겠습니다.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

   만일 치료에 대한 성경 구절이 이 구절들 뿐이라면, 여기에 기록된 조건을 만족하기만 하면 그리스도인들의 생활 속에 찾아오는 모든 병이 치료된다는 확신을 가져도 될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언제나 치료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을 다른 성경에서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야고보가 모든 병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특별한 환경의 결과로 오게된 어떤 형태의 병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이 구절을 이해할 수 있는 열쇠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 는 말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 구절에 있는 치료는 죄사함과 연관된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한 사람이 아마도 지역교회의 간증과 연관된 어떤 죄를 범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후 얼마 안되어 그가 병이 들었습니다. 그는 이 병이 자기가 범한 죄의 직접적인 결과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자기 죄를 뉘우치고 하나님께 자백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죄는 교회의 공적인 간증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장로들을 초청하여 그들에게도 완전히 자백해야 되었습니다. 장로들은 그를 위해 기도하면서 주의 이름으로 그에게 기름을 바릅니다. 그 믿음의 기도는 그 병든 자를 구원하며, 주님께서는 그를 일으키실 것입니다. 이것은 죄의 직접적인 결과로 오게된 병에만 한정적으로 하신 주님의 약속이며, 여기에 기록된 방법으로 죄를 자백하면 용서되며, 주님께서 그를 치료하실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 사람이 죄를 범했는지 어떻게 알며 그가 회개하고 자백하였는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 그 대답은 15절 끝 부분에서 그 사람의 죄가 용서되었다고 하는데 있습니다. 우리는 죄가 오직 자백함으로써만 용서되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요일 1:9).

   어떤 이는 " 여기에서 그가 죄를 범하였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라고 말하고 있다" 라고 반대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전체 문맥은 죄의 고백과 타락한 자의 회복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구절에 유의하십시오. "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16절). 17절과 18절에 언급된 기근은 이스라엘의 죄로 인한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이 기근은 그들이 여호와를 참된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그분께로 돌이켰을 때 거두어졌습니다(왕상 18:39).  이제 우리가 보게될 19절과 20절은 타락한 자의 회복을 다루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야고보서 5:13-20의 전체 문맥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치료가 죄의 결과로 병든 자로서 장로들에게 그 죄를 고백한 자를 위한 것임을 보여줍니다. 그 장로들의 의무는 그를 위해 기도하는 것과 기름을 바르는 것입니다. 혹자는 야고보가 이 서신을 기록할 당시에는 기름이 약의 형태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여기에서의 기름이 의약적인 수단들을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했습니다.(눅 10:34). 다른 견해는 기름이 의미하는 바는 의식적인 사용이라는 것입니다. 이 견해는 "주의 이름으로" 라는 말씀에 의해 지지됩니다. 다른 말로 하면, 기름을 바르는 것은 주님의 권위에 의해 또한 주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행해지는 것입니다. 기름은 종종 기적적인 치료약으로 사도들에 의해 사용되었습니다(막 6:13). 그 기름에 치료하는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고 그 기름은 성령님과 그분의 치료의 사역을 나타내는 것입니다(고전 12:9).

   어떤 사람은 기름을 의식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은혜의 시대와 또한 은혜의 시대가 의식과 예식을 강조하지 않는 것과 모순된다고 하며 반대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떡과 잔을 주님의 몸과 피의 상징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또한 교회에서 여자들이 머리를 가리는 것은 그들이 남자에게 속했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의식적으로 기름을 사용하는 것에 반대합니까?

   "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라고 야고보는 말했습니다. 그러한 믿음의 기도에 응답하심으로 하나님께서 그 병든 자를 치료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약속에 기초한 기도이기 때문에 믿음의 기도입니다. 이것은 그 장로들이 얼마나 큰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 또는 그 병든 자가 얼마나 큰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 장로들은 하나님께서 앞에서 말한 조건들을 온전히 만족하면 그 사람을 일으키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에 완전한 확신 가운데 기도 할 수 있습니다. "...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 이는 그 사람이 죄를 범하였다고 못박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강하게 시사하는 것입니다. 또한 죄사함은 자백에 달려있기 때문에 그 사람이 자기 죄를 자백했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입니다(잠 28:13).

   이제 요약하면, 14절과 15절은 어떤 죄의 직접적인 결과로서 병든 사람의 경우에 적용된다고 믿습니다. 그가 이것을 깨닫고 회개하면 교회의 장로들을 청하여 그들에게 완전히 자백해야 합니다. 그러면 장로들은 그를 위해 기도하며 주의 이름으로 그에게 기름을 바릅니다. 장로들은 하나님께서 그를 치료하신다고 여기에서 약속하셨기 때문에 믿음으로 그의 회복을 위해 기도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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