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쁜소식]
사단이 변질시킨 복음
말씀 (2)
-허 윤 욱
"하나님의 말씀은 다 순전하며 하나님은 그를 의지하는 자의 방패시니라. 너는 그 말씀에 더하지 말라. 그가 너를 책망하시겠고 너는 거짓말하는 자가 될까 두려우니라" (잠 30:5-6).
지난 글에서 우리는 말씀의 권위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말씀이 하나님이며 말씀이 인격적으로 역사하는 힘이 있다는 것을 다양한 측면에서 살펴보았다. 그러므로 말씀을 믿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라는 것도 생각해보았다. 지난번에 예고한 대로 이번글에는 이 놀라운 말씀을 사단이 어떻게 변질시켰는가 하는 문제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먼저 서두의 기록한 말씀에서 우리는 두 가지를 알 수 있다.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이 순전하다고 하는 것과 또 하나는 말씀에 더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다. 이 부분은 더 자세히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사단이 말씀을 변질시키는 전통적인 방법은 이미 에덴에서부터 나타나 있다.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하신 것인데 사단은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고 하는 말을 추가하였다. 이 말은 이미 사단의 미혹을 받은 하와에게서 나온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가 성경에 없는 많은 것들을 왜 더하였나 하고 어떤 목사님에게 필자가 물은 적이 있다. 그의 대답은 교회를 효율적으로 발전시키며 부흥을 위하여 하였다는 것이다. 사단도 똑같이 말한다. 먹지 말라고 하셨는데 왜 만지지 말라고 하는 말을 추가하였는가 물으면 만져야 따먹으니 아예 만지지도 말도록 도와주기 위해서 그렇게 하였다고 말할 것이다. 얼마나 그럴듯한 말인가. 그러나 성경은 기록된 그대로 믿고 전하며 순종하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경고하신다.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말을 너희는 가감하지 말고..." (신 4:2). 하나님의 말씀에 가감하는 일은 절대로 안 된다. 아주 쉽게 표현하자면 말씀에 더하는 것은 마치 하나님의 얼굴에 무슨 혹 같은 것을 붙이는 것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세상에서 사장님의 말씀도 더하거나 빼지 못할진대 하물며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에 어찌 피조물인 인간이 더하거나 뺄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은 어처구니없는 행동이요 교만의 산물이다. 이와 같은 경고는 요한계시록에도 있다.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계 22:18-19). 말씀이 하나님이시며 말씀이 일하시며 말씀이 인격이신데 성경에 더하거나 빼버리는 일들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그러나 오늘날 기독교는 성경을 어떻게 변질시키고 있는가. 성경의 능력을 어떻게 약화시키고 있는가? 심각하게 분석하고 조사하여 회개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이 일에 대하여 주님은 이미 바리새인들에게 하신 말씀에서 경고하셨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마 15:8-9). 얼마나 분명한 경고인가. 바리새인들은 구약성경에 없는 수많은 그들의 교훈을 만들어 시행하고 있었다. 그것들은 모두 하나님을 잘 섬기기 위해 인간들이고안해낸 것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더욱 잘 섬기기 위해서 수많은 유전과 전통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훈은 더욱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하나님으로 분노하게 하는 잘못된 교훈이다.
한국 기독교의 현실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바리새인의 경우를 살펴봄이 좋을 줄 안다. 바리새인들이 자기들의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 경우를 보면 몸서리 쳐지는 경우를 보게 된다. 그들은 부모님께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부모님에게는 드리지 않아도 된다고 하는 이론을 만들어 하나님이 주신 십계명을 폐한 것이다. "너희는 가로되 누구든지 아비에게나 어미에게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 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마 15:5-6). 아마 저들은 더 많은 헌금을 위하여 그와 같은 방법을 고안하였는지도 모른다.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 한다고 성경이 증거하고 있지 아니한가.
오늘날 한국의 기독교 현실은 어떠한가. 숫자를 헤아리기 어려운 교파를 만들어놓고 교파에 의한 조직과 헌법을 만들어 운영하면서 그러한 것들을 배제하는 순수한 교회들을 이단으로 내몰아 버린다. 성경에 장로는 있지만 장로교회는 아무리 찾아보아도 없다. 성경대로 순수한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지마는 순복음 교회는 없다. 침례를 주어야 하고 감독이 있어야 하지만 침례교회나 감리교회는 주님과 아무런 관계도 없다. 이것들은 사람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교단들로서 성경의 가르침과는 전혀 거리가 먼 제도들이다. 사단은 하나 되어야 할 기독교를 온갖 명칭 아래 모이게 하므로 서로 반목하고 싸우며 하나 되지 못하게 함이라.
필자는 지금 성경에 없는 제도를 말하는 것이지 그와 같은 교회에 속한 사람은 모두 지옥에 간다고 말하고 있지 아니함을 주의 시키는 바이다. 왜 성경에 근거도 없는 교파를 만들어 놓고 순수한 사람들을 정죄하는가. 필자가 전도하면서 교파를 따르지 않고 순수한 복음을 전한다고 성경의 예를 들어 아무리 가르쳐주어도 사람들은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분명히 경고하거니와 교파는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요 하나님의 뜻도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머리에서 나온 사람의 계명이다. 교계의 목사님들 중에도 양심적인 목사님들은 잘못된 것을 시인한다. 그러나 저들이 개혁을 하지 못하는 것은 오늘날 현실이 너무 말씀에서 멀리 떨어져 나왔기 때문이다.
교파만의 문제가 아니다. 교회 안에 수많은 제도들도 그러하다. 헌금의 경우도 도대체 어떤 말씀을 근거로 공개적으로 하는지 묻고 싶다. 한 사람 한 사람 일일이 이름을 불러가면서 축복기도하는 것은 어떤 말씀에 근거한 것인가. 주보에 십일조 헌금자 명단을 올리는 것은 무슨 연고인가. 월정헌금 주정헌금을 카드에 일일이 도장 찍어나가는 것은 어떤 가르침을 근거로 하고 있는가. 건축헌금자의 명단을 일일이 공개 하는 것은 정말 성경의 가르침인가. 헌금을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하는 협박인가. 장로 권사 임직 때 의무로 하게 하는 헌금은 어떤 말씀을 토대로 하고 있는가. 필자는 아무리 찾아보아도 성경의 근거를 찾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가난하여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은 아무리 장로의 인격과 자격을 갖추어도 장로가 되지 못하는 것 아닌가.
이 말을 하고 보니 필자가 청년시절까지 다녔던 교회의 일이 생각난다. 어떤 집사님은 가난하므로 평생집사로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왜냐하면 가난하기 때문에 헌금을 하거나 임직에 돈을 낼 수 없기 때문이다. 실제교회사에서 교회의 직책을 사고팔던 슬픈 사실을 알고 있는 우리는 오늘날 똑같은 일이 반복되는 상황을 탄식할 수밖에 없다. 헌금에 관한 성경의 원칙은 이러하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의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구제 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마 6:1-4).
성경이 이렇게 가르치고 있는데 성경에 없는 이와 같은 일들을 하면서도 오늘날 목사님들 중에 이 문제에 관하여 이의를 제기하는 분을 필자는 만나보지 못했다.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것은 헌금의 방법을 분명하게 가르쳐주신 주님의 말씀임에 누구도 이의를 달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주님의 명령을 그대로 순종하는 교회는 거의 찾아 볼 수 없다. 오늘날 헌금으로 말미암아 얼마나 많은 문제가 일어나고 있는가. 그래도 누가 이 문제를 성경대로 하려하는가. 참으로 슬픈 현실이다. 하나님을 가장 사랑한다는 사람들에 의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무시되고 있는 현실이다.
오늘날 한국의 기독교가 성경을 무시하고 만들어낸 것들을 다 말하자면 한이 없을 것이다. 그 많은 중에 한 가지만 더 언급하고 싶다. 성경 갈라디아서 4장 10절과 11절에 보면 절기에 관한 경고가 있다.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 이때의 절기들은 구약의 절기였다고 보여진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날 기독교가 또 새로운 절기들을 만들어 지켜가고 있다. 성탄절과 부활절 등 오늘날 기독교가 지키고 있는 절기들이 그것이다. 일반적으로 예수님의 탄생은 여름이라고 하는 것이 성경학자들의 견해다. 그런데 날짜를 잡아놓고 성탄절이라고 하며 미신적인 행사들을 벌리고 있지 아니한가. 사단은 이런 종교적인 행사로 말미암아 정신을 혼돈시켜 진정한 예수님에 대하여 깨달을 수 없도록 방해하는 줄을 오늘날 기독교 지도자들 중에 누가 깨닫고 있단 말인가. 도대체 예수님이 오셔서 기쁘다고 노래는 하는데 왜 기쁜지 알고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는가. 그리고 예수님이 오셨는데 왜 그날 술이 많이 팔리고 있는가. 어떤 술 판매업자에게 필자가 물어보니 일 년 중에 술이 가장 많이 팔리고 숙박업이 가장 잘 되는 날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크리스마스 베이비라는 말이 산부인과를 중심으로 나돌고 있다. 수많은 남녀들의 음란과 방탕으로 인하여 미혼모가 만들어지는 날이 크리스마스라는 사실을 오늘날 기독교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묻고 싶다.
또한 부활절이 있다. 이것은 4월에 있는데 예수님의 부활을 기리는 것이 취지인바 부활이 없으면 우리의 믿음도 헛것이요 소망도 아무것도 아닌 줄을 누가 모르겠는가. 그러나 성경을 아무리 보아도 부활절을 지켜야 할만한 근거가 없다. 주님이 부활하셨고 우리가 부활을 경험할 것이니 부활이야말로 기독교의 핵심 진리가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활절은 주님이 만든 절기가 아니다. 사단이 이와 같은 절기를 만들어서 오히려 부활을 믿는 믿음을 흐리게 하고 있는 것이다.
본래 절기는 종교에 있는 것이다.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고 신앙 그 자체이다. 오늘날 막연한 신을 믿는 종교 속에 기독교를 포함시켜 진정한 신앙의 본질에 이르지 못하게 하는 것은 사단의 무서운 전략이다. 어떤 집사님이 말하는 것을 들으니 부활절에 예배당에서 계란을 나누어 먹었단다. 왜냐고 물으니 달걀처럼 부활한다는 의미라고 하였다. 이것은 미신이 교회 안에 들어온 것이다. 참으로 어처구니 없고 기가 막힐 일이 기독교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천주교에 미신이 들어오고 우상이 들어오므로 종교개혁을 한 것인데 오늘날 기독교는 천주교와 사촌간이 되었다. 슬프고 개탄스러운 일이다.
그 외에도 수많은 절기들이 기독교 안에 있다. 그러한 것들은 성경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일이다. 하나님은 그러한 절기를 만든 적도 없고 지키라 한 적도 결코 없다. 예수님의 오심과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종교적이고 절기적으로 지키는 것이 아니고 마음에 새겨야 한다. 이 놀라운 십자가의 본질을 마음의 심비에 새겨야 하는 것이다. 멸망의 지옥에 가야할 불쌍한 죄인들을 위하여 주님이 오셨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다 용서하여주셨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주님을 거역하고 살던 지난날을 회개하고 주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천국에 가게 된 것이다. 이제는 죄인이 아니라 모든 죄를 용서받은 의인의 자격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며 영생을 얻은바 되었다. 영원히 지옥 가지 않는 생명, 지옥에 갈 수 없는 생명을 얻은 것이다. 이것이 요한복음 3장 16절의 뜻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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