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말씀하시는

                   하나님

                                                             윌리암 맥도날드

                                      24장

                       내 것으로 삼으라


   조지 바이럼은 그리스도인이 된지 얼마 안 되어 이 세상이 믿는 자의 친구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의 문화는 그의 영적인 성장을 돕는데 기여하지 않았습니다. 그 반대로 그를 아래로 끌어내렸습니다. 날마다 그는 광고나 잡지, 텔레비전 등 온갖 세속적인 것들이 쏟아내는 정욕의 시험에 시달렸습니다. 모든 아담의 자손이 그렇듯이 그는 이 세상 쓰레기를 먹고 사는 타락한 본성을 물려받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모든 자녀가 그렇듯이 그는 죄를 증오하는 새로운 성품도 부여 받았습니다.


   여러분이 어떤 집회에 참석했을 때 어떻게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직접 말씀하실지 알지 못합니다. 조지에게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설교자는 로마서 6장 1절을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는 '우리'를 '나'로 바꾸고 '죄'를 집요하게 괴롭히는 구체적인 죄로 바꾸라고 청중에게 지시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 구절이 이런 식으로 읽혀졌습니다.

   "그런즉 내가 무슨 말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정욕에 거하겠느뇨?"


   물론 그 죄는 탐심, 교만, 분노, 험담, 시기 등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그 구절은 조지에게 능력을 발했습니다.


   설교자는 이어서, 그 달갑지 않은 유혹이 보기 흉한 머리를 치켜들 때 곧바로 인용할 수 있는 성경구절을 암송해두라고 권했습니다. 조지는 적절한 암송구절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얼마 후에 욥기 31장의 다음 대목이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 내가 내 눈과 언약을 세웠나니 어찌 처녀에게 주목하랴? 그리하면 위에 계신 하나님이 내리시는 분깃이 무엇이겠으며 높은 곳에서 전능자의 주시는 산업이 무엇이겠느냐? 불의자에게는 환난이 아니겠느냐? 행악자에게는 재앙이 아니겠느냐? 그가 내길을 감찰하지 아니하시느냐? 내 걸음을 다 세지 아니하시느냐?... 언제 내 마음이 여인에게 유혹되어 이웃의 문을 엿보아 기다렸던가? 그리하였으면 내 처가 타인의 매를 돌리며 타인이 더불어 동침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는 중죄라. 재판장에게 벌 받을 악이요 멸망하도록 사르는 불이라. 나의 모든 소산을 뿌리까지 없이 할 것이니라"(1~4절, 9~12절).


   이후로 조지는 그 구절을 인용하여 마귀를 쫓아낼 수 있었습니다. 악한 자가 그를 떠났습니다. 그는 그 구절이  사단을 물리치는데 도움을 준 다음 두 경우를 기억합니다.


   첫 번째는 그가 미 해군 군목으로 있을 때였습니다. 그는 항공 모함 존 F. 케네디에서 탑승해서 임무를 수행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숙소에 돌아가 짐을 꾸리고 있는데 서랍에서 포르노 잡지들이 나왔습니다. 그는 그것을 놔둘 수 없었습니다. 청소원들이 들어와 방을 치우다가 그것을 보면 군목의 신앙을 의심할 것입니다. 그리고 청소원들에게도 유혹을 줄 것입니다. 그 잡지는 치워야 했습니다. 그래서 바이럼은 그것을 상자에 넣어 쓰레기 처리장에 가져갔습니다.


   그 때에 몇몇 승무원들이 쓰레기를 뒤적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두툼한 상자들을 한 쪽에다 모아두었다 사격훈련 때 표적으로 쓸 참이었습니다. 잠시 지켜보고 있는데 몇몇 승무원들이 그 상자에 잡지가 들어있는 것을 보고 뭔가 살피고 있었습니다. 조지는 그들이 볼 것이 아니라 폐기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그들은 잡지가 물 속에 들어가는 것을 실망스레 쳐다보았습니다. 조지는 그의 발에 등이요 그의 길에 빛인 그 말씀을 주신 주님께 감사하며 숙소에 돌아갔습니다.


   또 한 사건은 10년 후 조지가 수륙양용선에서 복무하던 중 일어났습니다. 걸프전이 끝나고 배가 하역을 하기 위해 노쓰 캐롤라이나 주 무어헤드 시티에 돌아오는 중이었습니다. 무어헤드시티에서 승무원 가족들을 배에 태우고 버지니아 주에 있는 수륙양용선 기지까지 항해한다는 전갈이 전해졌습니다. 그에 대비해서 숙소와 작업실에 붙은 모든 포르노 그림들을 떼라고 선장이 지시를 내렸습니다.


   이틀 후, 사관실에서 식사를 하고 있는데 벽에 포르노 그림이 붙은 것이 눈에 띠엇습니다. 순간 그가 암기해두었던 구절이 떠올랐습니다. 그는 그 욥기 31장 말씀을 종이에 적은 다음 그 그림 위에 스카치 테잎으로 붙였습니다. 모델의 얼굴과 팔만 보였습니다.지나가던 장교들이 무슨 글씬가 궁금해서 가서 읽어보았습니다. 어떤 장교들은 조지에게 잘했다고 등을 두들겨주었고 어떤 장교들은 불쾌한 표정이었습니다. 그 중 한 사람이 성경구절과 그림을 함께 찢어 쓰레기통에 던져버렸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의의 길로 인도하며, 더러운 죄 가운데 사는 사람들을 꾸짖고 책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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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원확신

                                     갈망하는 이들에게         

                                                                   H. A. 아이언사이드


                                  제8장

                          마음을 굳세게 함


   요한일서에는 기독교의 경험적인 측면과 관련이 있는 매우 소중한 진리가 밝혀져 있습니다. 3장 18,19절에서 우리는 다음 말씀을 통해 권면과 더불어 격려를 받습니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로다."

   이러한 마음의 견고함은 성령께서 믿는 자 안에서 역사하신 결과입니다. 내가 하나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주 예수님을 내 구주로 믿는 순간 나는 영생을 소유합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성경말씀을 근거로 알게 됩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로 내어주신 분을 믿는 자는 현재 영생을 소유했음을 거듭 거듭 말해줍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면서 나는, 내 속에서 끊임없이 일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통해, 그것이 내가 받아들인 교리를 훨씬 뛰어넘는 것이라는 확실한 많은 증거를 보게 됩니다. 나 자신이 진실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는 분명한 증거들을 날마다 발견합니다(엡 2:10). 그렇게 하여 확신이 깊어집니다. 하나님 말씀에 모든 것을 의지하고 믿음 안에 계속 거하며 살아가는 동안 나는 은혜로 말미암아 죄인인 나에게 부여된 영생의 증거들을 보고 그 말씀이 사실임을 확신하게 됩니다.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해주는 그런 확실한 증거들을 몇 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믿는 자는 하나님의 뜻을 본능적으로 사모하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우리가 그의 게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저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요일 2:3~5).

   믿지 않는 자가 하나님의 뜻을 즐거워한다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 아닙니다. 구원받지 않은 사람은 자기의 뜻을 즐거워하며, 자기 뜻을 다른 사람에게 굴복하라는 지시를 받는 것을 몹시 싫어합니다.


   영국인 변호사와 젊은이의 상담


   몬타구 굳맨이란 유명한 영국의 변호사이자 널리 알려진 설교자가 근간에 본 장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를 잘 보여주는 다음의 일화를 들려주었습니다.


   "어느 날 저녁 내가 어릴 적부터 알고 있던 한 젊은이가 내 서재에 들어와 앉았습니다. 그는 극동지역으로 떠나려는 차에 인사하러 들른 것입니다. 우리는 솔직하고 편안하게 대화를 나눴습니다. 나는 그에게 그리스도를 믿도록 권했습니다. 그 때 그가 한 대답을 잊을 수 없습니다. 그는 아무 적대감이나 불쾌감이 없이 담담히 대답했습니다. '나는 내가 하고싶은 대로 하고 싶어요. 왜 내가 내 자유를 예수 그리스도나 다른 누구에게 내주어야 하는지 알 수 없어요.'

   "그렇게 말한 것은 그가 자신이 속한 전 인류의 마음을 대변한 것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인류에 관한 보편적인 진리는 '우리는 각기 제 길로 갔다'는 것입니다(사 53:6). 이것이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당한 정죄입니다. 즉, 인간은 하나님의뜻에 자신을 복종시킬 준비가 되지 않았습니다. 인간은 자기의 길을 고집하며, 누군가 간섭하는 것을 분개합니다. 그는 하나님께 '당신의 뜻이 아니라 내 뜻이 이뤄질지어다'라고 말합니다. 그는 자기 뜻을 앞세웁니다. 그 뜻이 저속한 것이든 고상한 것이든, 감각적인 것이든, 냉혹한 것이든 인자한 것이든,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해당합니다. 그는 자신이 자기 운명의 주인이요 자기 영혼의 주인이라고 주장합니다."


   이 글을 인용한 것은, 내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바를 그보다 더 잘 보여주는 사례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구원받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생각해보겠습니다. 그리스도를 나의구주로 믿고 그분을 나의 주로 시인합니다. 그분의 넘치는 사랑이 내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내 뜻을 그분의 뜻에 굴복시킵니다. 매일의 삶에서 아무리 연약을 발견하더라도 나는 내 마음의 최고의 소원이 그분이 원하시는 대로 행하는 것임을 발견합니다. 그분의 계명을 사랑합니다. 보나르의 찬송시는 이 사실을 얼마나 아름답게 묘사하는지요!


   "나는 길 잃고 방황하는 양이었네.

   양 무리도 사랑치 않고

   내 목자의 음성도 사랑치 않았네.

   다스림도 원치 않았네.

   나는 고집불통의 아이였네.

   내 가족도 사랑치 않고

   내 아버지의 음성도 사랑치 않았네.

   나는 멀리 떠돌아다니길 좋아했네."


   "목자가 그 양을 찾았네.

   아버지가 그 자녀를 찾았네.

   그가 산과 골짜기를 넘고

   거친 광야를 헤치며 나를 찾다가

   거반 죽게 된 나를 발견했네.

   주리고 곤하고 외로운 나를 발견했네.

   그가 나를 사랑의 줄로 매었네.

   방황하던 자를 구원했네."


   "예수 나의 목자

   그가 내 영혼을 사랑했네.

   그가 그 피로 나를 씻었네.

   그가 나를 온전케 했네.

   그가 잃어버린 자를 찾았네.

   그가 길 일고 헤매는 자를 발견했네.

   그가 나를 양 우리로 인도했네.

   그가 나를 지금도 보호하네."


   "나는 길 잃고 방황하는 양이었네.

    나는 다스림을 원치 않았으나

    이제는 내 목자의 음성을 사랑하고

   양 무리를 진실로 사랑하네.

   나는 고집불통의 아이였고

   떠돌아다니길 좋아했으나

   이제는 내 아버지의 음성을 사랑하고

   그분의 가족을 진실로 사랑하네!"


   변화된 태도가 확신을 준다


   아러한 변화된 태도가, 내가 이제 거듭남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확신을 줍니다. 이전의 오만한 뜻을 굴복시키고 말씀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기를 사모하게 된 변화는 거듭난 것으로 밖에는 달리 적절히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요한이 사용한 "계명"이란 단어는 단지 시내 산에서 주어진 십계명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그것은 십계명을 훨씬 초월한 것입니다. 율법의 의(義)는 육체를 좇지 않고 성령을 좇아 행하는 우리 속에서 이뤄집니다. 그러나 그것을 뛰어넘어 우리에게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계명이 있는데, 그 계명은 그분이 지상에 계셨을 때 제자들의 행실에 대해 가르치신 모든 것과, 그 후로 성령을 통해 신약성경에 계시하신 것을 포함합니다. 거듭난 사람은 주님을 기쁘시게 할 것들을 행하기를 소원합니다. 그리고 그가 순종의 삶을 사는 동안 십자가에서 온전히 표현된 하나님의 사랑이 마음에서 샘솟게 되며, 그리스도를 알면 알수록 더욱 존귀한 분으로 여기게 됩니다.


   두 번째 예로, 요한일서 3장 9절을 보겠습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이 말씀은 많은 부주의한 독자들과 어느 정도 주의 깊은 일부 독자들을 당황케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말씀으로 예민하고 양심적인 자녀들을 격려하고자 의도하셨으나 오히려 사단은 그 말씀을 이용하여 하나님의 사랑스런 자녀들을 낙심시키고 있습니다. 사단은 이렇게 속삭입니다.

   "너도 알다시피 너는 무죄하지 않아. 너는 종종 생각과 말과 행동에 잘못을 범해. 그것은 죄를 짓는 거야. 그러니 너는 하나님의 자녀일 수가 없어."

   그러면 고민하던 그 사람은 그 말을 당연하고도 논리적인 말로 받아들이기가 쉽습니다. 물론 그리스도를 믿었기에 마음은 그 말을 거부하고, 또 뭔가 그런 논리에는 결함이 있다고 본능적으로 느끼지만 말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동사는 소위 "현재 진행형"임을 아는 것이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것은 이따금씩 실수하거나 자주 잘못을 범해 크게 닉심하는 그런 경우를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보다는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습관적인 행동을 의미합니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6절로 돌아가 관련된 본문 전체를 읽어 보겠습니다.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고,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두 가족의 상반된 행동방식


   여기에 거듭난 자와 거듭나지 않은 자의 두 가족이 어떻게 묘사되었는지 보십시오.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은 죄를 짓습니다. 세상 기준으로 볼 때 어떤 세련된 인품을 소유했다 할지라도 그들은 그들 뜻대로 하기를 기뻐합니다. 이것이 죄의 본질입니다.

   "죄는 무법(lawlessness))이라"(요일 3:4).

   모든 주의 깊은 학자들은 그것이 "죄는 불법(the transgression of the law)이라'는 번역보다 더 정확한 번역이라는데 동의합니다. 율법이 있기 전에 죄가 세상에 있었다는 말씀이 있습니다(롬 5:13). 그리고 아직 아무 기록된 기준도 주어지지 않은 까닭에 죄가 불법으로 규정되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는 자의지나 무법 등으로 자신의 모습을 나타냈으며 타락한 인류가 있는 모든 곳에서 발견되었습니다. 무법(無法)은 어떤 사람이 자기 뜻을, 절대 순종을 요구할 권한이 있는 다른 사람이나 하나님의 뜻에 굴복시키기를 거절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 점에서 마귀의 자녀는 그들이 속한 가족의 특성을 명백히 보여줍니다.

   그러나 신자의 경우는 다릅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신자는 그리스도를 믿고 위로부터 태어났으며, 그렇게 해서 새로운 성품을 소유합니다. 이 새로운 성품은 죄를 미워하는데, 그 후로 그 성품이 그의 욕망과 생각을 지배합니다. 죄는 가증한 것이 됩니다. 그는 지난 어리석고 죄악된 삶을 부끄러이 여기고 거룩을 추구합니다.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그의 삶의 방향이 변합니다. 그는 의를 행합니다. 물론 때로 실패를 하지만 그의 삶의 전체적인 방향이 바뀝니다. 하나님의 뜻이 그의 기쁨이요 즐거움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삶의 가치를 알면 알수록 은혜와 지식 안에 성장하며, 순종의 길로 걸어가도록 거룩한 능력이 주어짐을 깨닫습니다. 그의 새로운 성품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순복하는데서 기쁨을 발견하며, 따라서 죄가 그의 삶과 성품을 특징짓기를 중단합니다.

   이것은 새로운 출생의 세 번째 확실한 증거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요일 3;14).

   여기서 말하는 사랑과 단순히 인간적인 사랑은 차이가 있습니다. 헬라어 성경에 의하면 그 둘을 구분하기 위해 각각 다른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성령께서 여기서 선택하신 단어는 성경 전체에 걸쳐 하나님이 부여하신 사랑을 가리키는데 사용됩니다. 그것은 단순한 자연적인 감정을 초월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거듭날 때 우리 안에 심어집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러한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요! 그것은 우리를 모든 곳의 모든 성도들과 연결시킵니다. 새로 구원받은 사람은 자신이 새로운 가족에 속했음을 본능적으로 느끼며, 자신과 같이 구원받은 모든 자들을 그리스도 안의 형제 자매로 부릅니다. 그런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기 전에는 그리스도인의 무리를 멀리했고 세상과 짝하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동료 신자들을 오랜 친구 마냥 반기고 찾아갑니다.


   한계선이 분명해진다


   이것은 그냥 지나가는 현상이 아닙니다. 시간이 흘러갈수록 그 한계선은 오히려 더욱 명확해집니다. 세상은 갈수록 매력이 떨어지고, 구속받은 자의 가족이 갈수록 소중해집니다. 형제에 대한 사랑이 있다는 것은 새로운 생명을 소유했다는 확고한 증거입니다. 형제를 사랑할 때 우리 마음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습니다. 이 사랑은 매우 실제적인 것입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는 말이나 혀로만 사랑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습니다. 그는 적극적인 선행과 은혜로운 행실로 사랑을 나타내고자 합니다. 요한일서 전체에 걸쳐 이 진리가 강조되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나서 하나님을 알고"(4:7).

   그러나 사도 요한은 이 서신 앞 부분에서 이러한 새로운 출생의 내적인 증거들을 밝히 강조한 후에 놀랍게도 서신 뒷 부분에서, 모든 증거 중 가장 확실한 증거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단순한 믿음이라는 극히 중요한 진리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양심이 민감하면 민감할수록 그 자신과 자신의 경험을 불신하는 경향이 있는데, 복음의 중요한 근본 진리를 떠나 그러한 경험 위에 자신을 건축하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요한일서 4장 13~16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거하노니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저 안에 거하시고 저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이 말씀을 읽고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이 나에게 성령을 주셨는지 알 수 있지요?"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그 답은 성령께서 복음의 영원한 진리를 증거하신다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그리스도를 그들의 개인적인 구주로 믿은 모든 이들 안에 거하십니다. 만일 당신이 예수님을 개인적인 구주로 믿고 그분을 하나님의 아들로 시인한다면, 당신은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당신 안에 거하시고 당신도 하나님 안에 거하는 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복음 안에서 나타났습니다. 만물은 그분의 사랑과 지혜를 나타냅니다. 십자가가 그분의 사랑과 은혜를 선포합니다. 앞서 인용한 잘 알려진 찬송시 작가 중 한 사람인 호라티우스 보나르는 그다지 널리 알려지지 않은 다른 시에서 이 사실을 놀랍게 묘사했습니다.


   "꽃과 나무와

   싱그러운 바람과 지저귀는 새소리와

   사철의 변화 속에서

   우리는 당신의 모습을 대합니다.

   하늘로부터 아버지의 보내심을 받아

   우리 대신 수치의 십자가를 지기 위해 내려 오사

   우리의 삶을 겪고

   우리의 죽음을 당하신 그분 안에서

   우리는 당신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대합니다."


   구주께서는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마치고 하늘에 올려져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그런 다음, 그토록 복스럽게 완성된 구속사역을 증거하는데 능력을 더하기 위해 성령께서 이 땅에 내려오셨습니다.  로마 병정의 창이 죽은 그리스도의 옆구리를 찔렀을 때 "물과 피가 흘러나왔습니다." 그 물과 피는 죄인들을 위해 내어준 그분의 거룩한 생명을 말없이 증거해 주었습니다. 그 외에 성령께서 그 거룩한 기록을 더하십니다. 그러기에 요한일서 5장 8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증거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이 합하여 하나이니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의 구속사역의 완전함을 풍성하게 증거하셨습니다. 이제 그분은 사람들에게 그 증거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영원한 구원을 얻으라고 촉구하십니다.

   우리는 우리가 신뢰하는 사람들의 증거를 믿습니다.  설령 우리가 이해할 수 없거나 믿기 어려운 애기를 할지라도 믿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그 아들에 관해 증거하신 것은 당연히 아무 의심 없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그분의 기록을 믿기를 거절하는 것은 그분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입니다.

   기록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메시지를 마음 깊이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다"고 말합니다(요일 5:10). 아울러 요한은 이 책 서두에서 인용한 다음 말씀을 상기시킵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요일 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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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앙생활의 원리

                                                                                     윌리암 맥도날드 저

 

                                    4장 유혹에서의 승리

                                     Victory Over Temptation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죄악된 일들을 거절할 수 있는가?

 

   사람이 구원받는 즉시 그 사람 안에는 큰 투쟁이나 싸움이 시작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 안에 그가 태어날 때 받은 죄악된 인간의 본성이 아직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의 죄악된 인간적 본성은 그를 죄에 빠뜨리려고 합니다. 한편 그리스도인은 구원받을 때 새로운 성품을 받습니다. 이 새로운 성품은 죄를 미워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생명입니다. 이 두 성품이 언제나 서로 대적하여 싸우고 있습니다(갈 5:16~17, 롬 8:5~8).

 

   인간의 본성은 성품이라고도 부르는데, 이것은 절망적일 만큼 악합니다. 이 엣성품은 개선될 수 없으며, 그리스도인이 하늘나라에 갈때까지 그리스도인과 함께 머물러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본성인 죄성을 발견하셔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이 본성을 심판하셨습니다. 따라서 지금 하나님은 그리스도인들이 옛 성품을 죽은 것으로 여기길 원하십니다. 그 옛 성품을 격려하지 마십시오! 옛성품을 먹이지 마십시오! 옛성품에게 기회를 주지 마십시오(롬 13:14).

 

   새로운 성품은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의를 행하도록 합니다. 그리고 그가 새로운 성품에 순종할 수록 이 성품은 점점 강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의 새로운 성품이 격려를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도 죄를 짓도록 유혹받을 것입니다. 사단은, 그리스도인이 구원받기 전의 죄악된 삶으로 되돌아가게 하려고 힘쓸 것입니다. 구원받지 않은 몇몇 친구들 역시, 그가 죄악된 일을 하도록 그를 유혹할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러한 유혹들로부터 승리할 수 있을까요?

 

   여기에 몇가지 도움이 될 만한 방법들이 있습니다.

 

   1) 매일 기도하십시오. 하나님께, 당신이 유혹을 받을 때 어떻게 행동해야 하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있게 도와 달라고 구하십시오(히 4:16). 하나님은 당신을 강하게 하셔서 악을 거절할 수 있도록 도우실 것입니다(고전 10:13). 만일 당신이 스스로의 힘으로 이일을 행하려 한다면 실패하게 될 것입니다.

 

   2) 매일 성경을 읽으십시오. 이를 위해 하루 중 특별한 시간을 떼어 놓으십시오. 당신은 성경을 공부할 뿐 아니라 그 구절들을 암송해야 합니다(골 3:16). 이렇게 할 때 하나님의 말씀이 당신의 마음을 채우고, 당신의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당신의 말과 행동을 제어할 것입니다. 시편 119:9,11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가 범죄하지 않도록 도와 주신다고 말씀해 주십니다.

 

   3) 새로운 성품을 먹이고 격려하십시오. 옛 성품을 굶기십시오. 가는곳과 라디오나 TV를 통해 듣고 보는 것, 그리고 읽는 것을 주의하십시오(골 3:5~9).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에 대해 생각해야 합니다. 당신이 그리스도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그 시간에는 죄에 대해 생각할 수 없습니다(골 3:10~14, 히 12:3). 그리스도에 대한 생각은 당신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 수 있도록 능력을 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생각함으로 그분을 예배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당신은 당신이 예배드리는 그분과 같아질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3:18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거울에 비친 그리스도를 주목할 때 그 분처럼 된다고 가르쳐 줍니다. 즉, 당신이 그리스도의 영광과 거룩에 대해 읽고 깊이 생각할 때, 당신 안에 계신 성령님께서 당신을 변화시킨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그리스도인이 더욱더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만듭니다.

 

   4) 당신의 죄를 하나님께 자백하십시오. 당신이 잘못한 것을 아는 즉시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십시오. 당신의 잘못은 대개 죄악 된 생각이나, 죄악 된 말들, 또는 죄악 된 행동들일 것입니다. 지체하지 마십시오. 당신의 죄를 하나님께 즉시 자복하십시오(잠 28:13).

 

   5) 성도들과 사귀고 죄를 즐기는 친구들과 사귀지 마십시오(잠 10:16, 히 10:24~25). 당신은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과 함께 살 수 있고 함께 일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의 말과 행동을 통해 그들에게 당신이 그리스도인임을 보여주십시오. 그리고 그들의 죄악 된 길에는 합류하지 마십시오(엡 5:11).

 

   6) 주를 위해 바쁘게 일하십시오. 대개, 게으름은 죄로 연결됩니다. 당신의 몸을 하나님 보시기에 최선인 것에 사용되도록 주님께 드리십시오(롬 6:19). 할 일이 많이 있습니다. 만주의 주 되시는 주님을 의지하고 그분이 주시는 능력으로 일할 때 우리는 우리의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7) 영육간에 건강을 유지하십시오(딤전 4:8). 당신의 몸은 성령님께서 거하시는 집이요 성전입니다(고전 6:19~20). 운동이 좋은 것이긴 하지만, 운동에 너무 많은 시간을 빼앗기거나 영적인 일들이 뒤로 밀려나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이 한 번 유혹에 대해 승리했다고 해서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당신이 그 문제에 대해 하나님을 의지 할때에만 승리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매일의 매순간을 하나님께 의탁해야 합니다. 주님을 잊고 기도와 성경공부를 무시한다면 당신은 유혹 속에 빠져들 것입니다. 이런 일은 심지어 성경을 많이 알고 구원받은 지 오래된 성도들에게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시선을 주님께 고정시키십시오! (골 3:1~4, 히 12:2).

Posted by 행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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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기 절제를 통한 승리의 삶

                                   Self-Control Brings Victory

 

   본문말씀

 

   "모든 지킬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언 4:23).

 

   마가복음 7:21~23에서, 예수님께서는 믿는 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마음을 지키라. 왜냐하면, 모든 종류의 악한 것들이 다 마음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하여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이를 알리요마는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나니"(렘 17:9-10)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은 무엇을 취하느냐에 따라 참되기도 하며, 무엇을 생각하느냐에 따라 더욱 진실하게 되기도합니다. 잠언 23:7에서는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그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것들은 결국, 그의 말이나 행동으로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우리 믿는 자들이 자신의 생각을 절제하고 통제해야하는 까닭이 바로 이 때문입니다. 사람의 생각은 감정을 만들어 내고, 감정은 그 사람의 행동을 만들어 냅니다.

 

   사람은 자기 절제 없이 아무것도 성취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농구를 하는 것이든, 노래를 하는 것이든, 물건을 판매 하는 것이든, 운전을 하는 것이든, 공장에서 용접공으로 일하는 것이든 그 어느것 어느 분야이든 다 마찬가지입니다. 한 사람이 어느 분야에서든지 그 분야에서 성공하려면 부단한 자기 절제와 인내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가령 천재적인 골프선수라 칭송받는 사람의 경우에도 그가 정상에 오르기까지는 부단한 노력과 자기 절제가 있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우수한 체육선수나, 탁월한 음악가나, 훌륭한 기능공이 되기까지 그들 모두가 다 그와 같은 노력의 과정을 거침으로써 정상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공한 사람들은 끊임 없이 자신을 연마하고 실습을 거듭하며 철저한 자기절제를 실천함으로 승리자의 위치에 오르게 된 사람들입니다.

 

   아래의 각 문항은 자신의 마음을 잘 지킨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네 가지 특징들을 정의하고 있습니다.

 

   네 가지 유형의 인격적인 특징

 

   1. 맨 먼저 그들은 화평케 하는 자들입니다.

 

   "다투는 시작은 둑에서 물이 새는 것 같은즉 싸움이 일어나기 전에 시비를 그칠 것이니라"(잠 17:14).

 

   "허물을 덮어 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잠 17:9).

 

   "분을 쉽게 내는 자는 다툼을 일으켜도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시비를 그치게 하느니라"(잠 15:18).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느니라"(잠 19:12).

 

   "노하기를 더디 하는 것이 사람의 슬기요 허물을 용서하는 것이 자기의 영광이니라"(잠 19:11).

 

   "다툼을 멀리하는 것이 사람의 영광이거늘 미련한 자마다 다툼을 일으키느니라"(잠 20:3).

 

   "길로 지나다가 자기와 상관 없는 다툼을 간섭하는 자는 개의 귀를 잡는 자와 같으니라"(잠 26:17).

 

   예수님께서는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칭함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자신의 감정을 절제하지 못함으로 분란을 일으키고 친구간의 우정이나 자신의 가정까지 파탄시키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파멸로 몰아넣고 관계를 무너뜨림으로써 자신들의 힘을 과시하며 그것으로 만족감을 취하는 사람들입니다. 이처럼 감정을 극복하지 못하고 자신의 감정으로부터 강한 지배를 받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해치거나 피해를 입히는 일까지 서슴지 않습니다. 일부 청소년들은 절제되지 않은 감정에 이끌림을 받아 떼로 몰려다니며 남의 건물을 파괴시키거나 건물에 불을 지르기도 합니다. 이런 일들이 청소년들에게는 일종의 힘의 과시이며 스스로 힘 있는 자라고 느끼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감정에 지배를 받는 자들은 이처럼 강력한 악의 힘으로 나타납니다.

 

   하지만 사랑은 미움보다 훨씬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건물을 파손시키는 방화범들보다 건물을 세우는 건축자들이 훨씬 존경을 받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지고 분쟁이 있는 곳에 찾아가 문제를 예방시켜 주는 일을 돕거나, 깨어진 관계를 회복시켜주는 일을 하는 사람들의 힘은 사회를 깨트리고 파괴하는 사람들의 힘보다 훨씬 강하며, 많은 존경을 받게 됩니다. 분명한 사실은 전쟁을 일으키는 자보다 화평케 하는 자가 더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젭(Jeb)은 이와 같이 화평케 하는 사람에 속합니다. 교도소에 들어와 그리스도를 믿고 회심하기 전 그는 무절제한 생활로 끝내 결혼생활까지 파탄시켜버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수감되어 있던 중에 이혼을 당했기 때문에 가석방으로 풀려나온 후에도 혼자 지낼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자신이 교도소에 들어가 있을 때 자신을 떠나 이혼을 해버린 전 부인에게 찾아가 그들 부부 사이에 상처를 입고 이혼을 하게 된 것이 전적으로 자기 책임이라고 사과 했습니다. 또한, 그는 부모님에게도 찾아가 마음의 상처를 입혀드리게 된 것을 사과했습니다. 젭이 형무소에 들어가 있는 동안 그의 남동생도 범죄를 저질러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고 그의 여동생 역시 마약에 빠져 그녀의 아이마저 부모님께 맡기고 떠나버리게 되었는데 젭은 이 모든 일의 원인이 모두 자신에게 있음을 인식하고 부모님께 진심으로 사과를 했습니다. 이처럼 젭은 거듭나기 전, 과거 자신의 죄악된 생활로 말미암아 그의 부모님들께 돌이킬 수 없는 큰 상처를 입혀드리게 된 사실을 깊이 자각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젭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지난 날 자신의 잘못된 삶으로 세 남매들이 부모님께 입혀드리게 된 마음의 상처들을 남은 생애 동안에 치유시켜 드리기로 작정했습니다. 그 후 젭은 화평케하는 자로서 새로운 삶을 살아갔고, 마침내 그의 부모님께 자랑을 기쳐드리는 아들로까지 변화되었습니다.

 

   2. 그들은 즐거움을 잃지 않는 긍정적인 심령을 소유한 사람들입니다.

 

   "근심이 사람의 마음에 있으면 그것으로 번뇌하게 되나 선한 말은 그것을 즐겁게 하느니라"(잠 12:25).

 

   "온순한 혀는 곧 생명 나무이지만 패역한 혀는 마음을 상하게 하느니라"(잠 14:30).

 

   "사람은 그 입의 대답으로 말미암아 기쁨을 얻나니 때에 맞는 말이 얼마나 아름다운고!"(잠 15:23).

 

   "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 빛나게 하여도 마음의 근심은 심령을 상하게 하느니라"(잠 15:13).

 

   "선한 말은 꿀송이 같아서 마음에 달고 뼈에 양약이 되느니라"(잠 16:24).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하느니라"(잠 17:22).

 

   어떤 사람은 천성적으로 낙천적인 성격을 가지고 태어나 매사에 긍정적이고, 근심이나 걱정보다는 행복을 느끼며 살아갑니다. 그들은 언제나 웃음을 잃지 않습니다. 반면에 우울하고 소극적이고 비관적인 성격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들도 있습니다. 항상 즐거워하는 사람은 주위 사람들에게 기쁨을 가져다 줍니다. 그들의 기쁨과 풍요로움은 우물물처럼 다른 이들을 말끔히 씻겨주는 역할을 해줍니다.

   특히 구치소나 교도소나 재활원 같은 곳에 있는 사람들에게서는 기쁨을 찾기가 더 더욱 쉽지 않습니다. 그런 곳에는 부정적인 생각, 불평 혹은 자기비관에 빠진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그곳에 들어와 있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미 우울증을 앓았거나 아니면 절망을 이기지 못해 마약과 같은 약물에 빠진 경우가 많습니다.

   약물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약물이 가져다주는 효능에 의지해 인위적으로 자신을 현실세계에서 벗어나게 하여 환각상태에 빠짐으로써 일시적으로나마 해방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약물은 그들의 뇌 속에 있는 호르몬과 뇌세포에 일시적으로 영향을 미치게 함으로 단지 순간적인 만족감을 그들에게 가져다줍니다. 이러한 환각적 만족감은 순간적일뿐이며 결코 진정한 것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영혼에 기쁨을 가져다 주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긍정적인 사람에게는 기쁨을 전염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의 심령이 만들어내는 효과는 병을 치료하는 약효를 능가합니다. 그것은 단지 치료의 효능뿐만 아니라 장래에 겪게 될 심령의 정서적 장애를 예방하는 면역주사를 맞는 것과 같은 효과를 가져다줍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이미 깨달은 사람입니다. 그는 로마에 있는 감옥으로부터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써서 그들을 격려하였습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 4:4)고 하였고 계속하여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웟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나"(빌 4:11-13)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우리로 하여금 적극적인 생각을 하도록 하기위하여 다음과 같은 처방을 해주었습니다.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런 것들을 생각하라"(빌 4:8).

 

   빈센트(Vincent)는 경제적 기능장애를 겪고 있는 역기능가정(신체적 결함은 없어도 경제적으로 무능력한 가정)에서 자라났습니다. 그가 범죄로 인해 재판정에 처음 선 것은 불과 그의 나이 9살이었습니다. 이제 30대가 된 그는 오랜 세월 동안 여러 교도소를 전전하며 지냈습니다. 그러나 몇 년 전, 빈센트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부터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된 빈센트(Vincent)는 아주 새로운 사람으로 변하였습니다. 그는 늘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마다 마음의 평안으로부터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미소를 띠며 행복해 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신앙생활을 시작하면서 그는 자신이 속해 있던 갱단으로부터 탈퇴를 결행하였습니다. 그 일로 인하여 교도소내에서 그는 두 번이나 거의 죽임을 당할뻔하였습니다. 그렇지만 그 누구도 그 어떠한 일도 그의 마음속에 있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가 누리는 즐거움을 빼앗아 가지 못하였습니다. 여전히 그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마음의 평강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미소를 잃지 않았습니다. 빈센트(Vincent)의 그러한 미소는 교도관들로부터 늘 호의적인 반응을 받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빈센트는 그의 마음 깊숙한 곳에서부터 흘러나오는 평강과 즐거워하는 마음을 억누르기가 어려웠습니다.

   한 번은, 빈센트(Vincent)는 교도소의 목사에게 조차도 그의 설교에 대한 감사의 말을 정중하게 전하면서 조금만 미소를 지었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다고 부탁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이제는 다른 여러 그리스도인들이 빈센트(Vincent)를 찾아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들에 대하여 빈센트의 충고와 조언을 받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빈센트는 그와 같은 상담을 통하여 행복한 심령은 다른 사람들을 치료 할 수 있는 치료의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3. 그들은 지위가 낮고 가난한 자들에게도 차별하지 않고 늘 친절한 사람들입니다.

 

   "입을 열어 지혜를 베풀며 그의 혀로 인애의 법을 말하며"(잠 31:26).

 

   "가난한 자를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요 궁핍한 자들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를 존경하는 자니라"(잠 14:31).

 

   "가난한 자는 이웃에게서도 미움을 받게 되나 부요한 자는 친구가 많으니라. 이웃을 업신여기는 자는 죄를 범하는 자요 빈곤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는 자니라"(잠 14:20-21).

 

   '친구는 사랑이 끊어지지 아니하고 형제는 위급한 때를 위하여 났느니라"(잠 17:17).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 주시리라"(잠 19:17).

 

   "의인은 가난한 자의 사정을 알아 주나 악인은 알아 줄 지식이 없느니라"(잠 29:7).

 

   청소년 중에는 다른 친구들을 자신이 보기에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여 그들과 자신을 구별하여 행동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여학생들 중에서도 자신만을 인기 있고 멋지다고 생각을 하고 그렇지 못하다고 생각되어지는 다른 친구들을 외톨이 취급하고 그들을 괴롭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소위 학교에서 일부 동료 학생을 왕따(bully)로 몰아 그들을 집단으로 괴롭히는 문제는 오늘날 이미 심각한 사회문제로 까지 대두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여기에서 집단으로부터 따돌림을 당하는 왕따 문제가 사회적으로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가를 좀 더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어느 교수의 연구조사 보고에 의하면 자신이 다른 친구를 따돌린 경험이 있는 학생이 50%, 친구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해본 경험이 있는 학생들은 30% 정도나 된다고 하는 통계가 나와 있습니다. 다른 친구들을 왕따시키는 방법에는 별명부르기, 신체외모에 대해서 놀리기, 멍청하다거나 바보라고 놀리기, 무시하며 비웃기, 함께 놀아주지 않기, 말을 따라 하기, 빈정거리기, 말로 상처를 입히기 ,몸을 건드리기, 때리기, 물건을 빼앗거나 손상시키기, 째려보기,외면하기 등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문제는 이와 같은 괴롭힘을 당한  피해자의 경우, 그 영혼이 파괴되고 정신적인 병을 얻는 데까지 발전 될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결국, 그와 같은 피해자들은 사람을 무서워하거나, 기피하거나, 대인 관계에서 자신감을 잃거나,고립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이런 문제가 더 심각하게 발전하는 경우에는 자살로까지 발전할 수도 있습니다.

 

   이와 같이 남을 집단으로 괴롭히는 왕따문제가 특히 청소년들 사이에서 생기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와 같은 청소년들 속에는 무엇보다도 인간성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청소년들 마음이 각박해 있고 그들의 심성이 잔인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마음속 깊은 곳에 악한 죄악의 쓴 뿌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거듭남으로써  새로운 성품을 소유한 자로 변하지 않는 한 이런 악한 쓴 뿌리를 처리할 수 없습니다. 일찍부터 마음속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나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으로  잘 양육된 청소년들은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이런 악한 쓴 뿌리를 넉넉히 이기며 성실하고 친절하고 이해심이 있고 예절 바르고 공손한 사람으로 자라갑니다. 나이가 어리거나 성인이거나 할 것 없이 믿음 안에서 승리하는 삶을 살며 친절하며 남을 위하며 섬기며 봉사하고 돕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 당시 당대의 종교 및 사회적 지도자들은 문둥병자들이나 사회적으로 천시받는 사람들이나 창기나 세리 같이 죄인 취급을 당하는 사람들을 항상 가까이하시는 예수님을 비난하고 조롱하고 배척하였습니다. 그들은 항상 하나님의 법과 의로움과 거룩을 내세우면서도, 실제 생활에서는 가난한 자들과 소외된 자들과 죄인들로부터 자신들을 철저하게 구별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반대로 오히려 그러한 낮고 천하고 가난한 자들과 친구가 되어주시고 가까이하며 함께 음식을 먹고 마심으로 당대 종교 지도자들이 가지고 있고 금기시하던 사회적 관습과 통념을 깨트리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인자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누가복음 6:20-22).

 

   사도 바울은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린도 전서 1:26-29).

 

   델버트(Delbert)는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명문대학을 졸업했고 훌륭한 경력을 쌓는데 초석이 될 만한 사업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은 강력하게  부인하였지만, 그는 어떤 부정사건에 연루되어 교도소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 때 그는 자신에 대한 분노를 보이기보다는 오히려 자신을 불쌍하게 보았고 전적으로 자기 연민에 가득차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리스도에게로 돌아가 그의 삶을 그리스도에게 맡기며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믿음생활에 전념하기로 결단하였습니다. 그리고 교도소 안에서 수감생활을 하는 가운데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부정적인 환경들에 굴복하기 보다는 맞서는 편을 택하였습니다. 델버트는 자신이 참기 어려운 현실에 대하여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거부하고 아무리 참기 어려운 일이라 할지라도 오히려 범사에 긍정적으로 받아드리는 생활을 하면서 지냈습니다.

 

   그리고 그는 감방 안에서 성경공부반을 만들어 감옥 안의 동료들과 함께 성경공부를 하는 일에 열중하였습니다. 때로는 일부이지만 성경공부에 참여하지 않는 다른 감방 동료 중에는 어떤 번역 성경이 제일 좋으냐는 등의 사소한 문제들을 제기하면서 그와 변론하기를 원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그들에게 조차 변론을 피하며 계속해서 사랑과 은혜로  그들을 대했습니다. 한 달에 한 번은 아이스크림을 사서 거기에 자신이 직접 쓴 성경구절들을 함께 묶어 감방 안에 있는 동료들에게 나눠주기도 하였습니다.

   이처럼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고 변화된 델버트는 전에는 세상에서 거의 쓰레기 취급을 받아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동료 죄수들을 꾸준히 찾아가서 진심으로 사랑하며 주님의 친절을 온전히 나타내 보여주었습니다.

 

   4. 그들은 선으로 악을 이긴 사람들입니다.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나 의인은  사자 같이 담대하니라"(잠 28:1).

 

   "누가 현숙한 여인을 찾아 얻겠느냐?...그런 자는 살아 있는 동안에 그의 남편에게 선을 행하고 악을 행하지 아니하느니라"(잠 31:10-12).

 

   "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음식을 먹이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마시게하라"( 잠 25:21).

 

   "네 원수가 넘어질 때에 즐거워하지 말며(bloat: 고소하게 느끼는 감정을 의미) 그가 엎드러질 때에 마음에 기뻐하지 말라. 여호와께서 이것을 보시고 기뻐하지 아니하사"(잠 24:17-18).

 

   "오래 참으면 관원도 설득할 수 있나니 부드러운 혀는 뼈를 꺾느니라(잠 25:15).

 

   "적당한 말로 대답함은 입맞춤과 같으니라"(잠 24:26).

 

   "의인은 환난에서 구원을 얻으나 악인은 자기의 길로 가느니라"(잠 11:8).

 

   칼(Carl)은 40세로, 전직 마약 밀매꾼이었고 연립주택단지에서 자랐습니다. 지난날 그의 동료였던 사람 중 다수가 현재 교도소 안에서 무기수로 복역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칼은 교도소 내에서 그들과 함께 불의한 생활에 동참하는 대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함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가 그리스도인이 된 이후로 그는 매사에 아주 적극적이며 긍정적인 사람으로 변하였습니다. 마침내 그는 교도소 내에서 재소자들의 상담과 전도를 담당하는 교도소 목사의 보조원이 되어 동료 죄수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고, 성경공부를 인도하는 일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가석방으로 출소한 후에는 길거리에 나가서 노방전도를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언제 어느 곳이든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이면 달려가서 주의 복음을 전파하였습니다. 가석방 후 2년이 지나고, 드디어 그는 완전한 자유인의 신분을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칼(Carl)은 여전히 그리스도인으로서 선으로 악을 이기는  승리자의 생활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는 놀라울 정도로 그가 하는 모든 일에 사자처럼 담대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자신이 속한 지역의 교육 발전을 위해 헌신적인 봉사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편지를 통하여 교도소 안에 있는 옛 동료들을 격려하는 일까지 하면서  그들이 믿음 생활을 잘 할 수 있도록 계속해서 독려하였습니다. 칼은 굳은 확신 위에 거듭난 그리스도인으로서 부끄럽지 않은 승리자로서의 자신의 삶을 이어갔습니다. 그는 " 바른 길로 행하는 자는 걸음이 평안하려니와"(잠 10:9) 하는 잠언의 교훈을 실천에 옮기며 살았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선으로 악을 이기는 법을 삶 가운데 확실하게 배웠으며 이로 인하여 그가 속한 사회안에서 강력하고도 선한 영향을 끼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진정으로 칼은 거듭난 그리스도인으로서 마침내 그의 삶에서 선으로 악을 이기는 '승리자'가 되었습니다.

 

   결론

 

   세상에 속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환경에 쉬이 지배를 받습니다. 그리고는 자신들을 환경의 피해자로 보게 됩니다. 그들은 정서적으로 두려움과 분노 그리고 절망의 지배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결국 그들의 종말은 자신들을 멸망시키려는 자들의 먹이가 되어 그들의 의도대로 파멸을 당하고 마는 것입니다(요 10:10). 반면에, 잠언은 우리 믿는 자들에게 이기는 자 곧 승리자가 될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 믿는 자들은 "모든 지킬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고 하는 말씀을 따라 자신의 마음을 절제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그들은 주 안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성령의 능력으로 자신들을 강하게 함으로 앞으로 닥칠 시련들을 넉넉히 이길 수 있는 대비를 미리 하게 됩니다. 주 안에서 믿는 자들은 겸손하지만, 성령의 능력에 힘입어 사자처럼 담대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그들의 친절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불편한 관계에 있는 사람들 까지도 자신들과 우호적인 관계로 바꿔 놓습니다. 실로 믿는 자들은 선으로 악을 이기는 자들입니다(롬 12:21).

 

   그러므로 믿는 자들은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고 하신 우리 주님의 말씀과 또한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 8:37)고 한 사도 바울의 권면을 기억하며 이 땅을 떠나는 마지막 날 까지 적극적인 믿음 안에 거하며 이 세상을 넉넉히 이기는 승리자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EMMAUS     

Posted by 행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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