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믿음에 있는가

                                          시험하고 확증하라


                                  구원받았느냐?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마태복음 1:21).


   "구원을 받았습니까?" 하고 물으면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는 것이 작금의 한국기독교의 현주소인데 이것은 바람직한 모습인가? 성경적인 행동인가? 과연 주님의 뜻인가? 여기서는 이와 같은 문제를 살펴보면서 참된 믿음의 길이 무엇인지 알게 되기를 바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구원 받았느냐?"고 묻는 것은 당연한 것이며 지극히 성경적인 질문이다. 그 이유는 이렇다.

   첫째, 기독교 역사에서 첫 번째 설교제목이 "구원을 받으라"였다. 사도행전 2장에는 베드로의 유명한 설교가 기록되어 있다. 베드로는 설교에서 성령으로 방언하는 것을 가리켜 요엘 성경에 예언된 말씀을 상기시켰다. 그리고 성경의 예언대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유대인들의 중대한 범죄를 드러냈다. 그리고 죄인들의 손에 애매히 죽은 예수님을 하나님이 살리신 사실을 외치며 결론을 내린 것이 "구원을 받으라"였다. 그리고 이날 3,000명이 구원을 받았다.

   기독교의 시작이 이럴진대 "구원을 받으라", "받았느냐" 하는 질문은 당연하지 아니한가? 오늘날 한국의 기독교에서 "구원 받았느냐"는 질문이 충만해질 때에 한국의 기독교는 양적으로 질적으로 풍성한 발전을 이룩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원을 받으라"는 질문과 함께 "구원을 받았는가"를 서로 확인하며 도와주며 주님 앞에서 영생의 문제를 위해서 서로 협력하여야 할 것이다.

   어느 때에 필자는 전도하다가 어떤 기독교인을 만나 "구원 받았느냐"고 질문한 적이 있다. 그는 눈을 덩그렇게 뜨고 떨리는 목소리로 "구원파가 아니요?" 하는 것이었다. 필자는 그가 가지고 있는 찬송가를 받아서 194장을 찾았다.


   "우리를 죄에서 구하시려

   주 예수 십자가 지셨으니

   기쁘게 부르세 할렐루야

   나 구원 얻었네."


   여기까지 읽어주고는 "당신도 구원파요?" 하고 물으니 그는 찬송가를 유심히 들여다보며 말을 하지 못하였다. 구원을 주제로 파를 만들거나 또 다른 조직을 만드는 데는 필자가 동의할 수 없으나 "구원 받았느냐"고 물으면 "구원파요?" 하고 질문하여 잘못된 믿음을 가진 것처럼 인식하고 있는 오늘의 기독교 현실은 분명 문제가 있는 것이다. 194장뿐 아니라 여러 찬송가들이 구원 받은 기쁨을 노래하고 있다. 기독교가 구원의 기쁨을 잃는다면 이는 알맹이 없는 선물 상자일뿐이다. 아무 쓸모없는 종교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둘째로, 구원을 얻었다는 말씀이 성경 여러 곳에 보이고 있다. 에베소서 2장 8절에 보면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중요한 내용 중 하나는 "구원을 얻었나니"이다. 사도 바울은 초대교회의 여러 교회에 서신을 보내면서 구원을 얻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유다서 1장 3절에서도 "얻은 구원" 이라고 증거하고 있다. 이미 얻었다는 것이며 얻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말씀이다. 그렇다면 이 역시 구원을 얻었다고 간증하고 있다면 얻었느냐고 묻는 것 또한 당연하지 아니한가?

   바울의 서신서를 잘 살펴보면 그로 하여금 그처럼 열정적으로 힘있게 신앙생활을 하게 한 원동력은 구원받은 기쁨이었음을 볼 수 있다.

   필자는 어느 경우에 또 기독교 신자를 만나서 "구원 받았느냐?" 고 물었다. 그는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며 "어찌 그것을 알 수 있는가?" 하고 되묻는 것이었다. 필자는 담대히 말하기를 "그것을 모르면서 무엇 때문에 교회에 나가는가?" 하였다. 월급을 받는다는 확실한 근거도 없이 무작정 일하는 사람이 있는가? 당장 죽어도 천국에 간다는 보장도 없이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얼마나 불쌍한지 아는 사람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다.

   하나님 믿느라고 온갖 희생 다하고 헌신하고 이방인들에게 온갖 핍박 다 받고 애매한 고난을 당하면서 슬픔을 참고 천국에서 위로 받을 줄 알았는데 천국에 가지도 못하고 지옥에 떨어진다면 얼마나 무서운 비극인가? 어찌 이런 일이 있겠느냐고? 있다. 충분히 있을 수 있다. 못 믿겠으면 마태복음 7장 21절 이하를 자세히 읽어보시기 바란다. 주님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병고치고 주님의 이름으로 권능을 행한 충실한 기독교 지도자들이 지옥에 떨어지는 것이다. 그들은 평생 하나님의 이름으로 살았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았으며 온갖 희생을 다 치루면서 주님을 위해 한 평생 바친 자들이다. 그러한 지도자들이 지옥에 가는 마당이니 그 밑에 딸린 양들의 형편을 어찌하려는가?

   성경은 믿는 자들에게 확실한 천국의 약속을 보장해 주고 있다. 그와 같은 말씀의 근거 속에 거듭난 성도들은 이 말씀의 뜻을 이해 할 것이다. "그 사랑 받은 자만이 그 사랑 알도다"라는 찬송가 가사처럼... .

   사랑하는 그대여, 구원 받았는가? 진정 구원받았는가? 진정으로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구원받았느냐는 질문에 불쾌하게 생각할 일이 아니라, 조심스런 마음으로 자기를 살펴야 할 것이다.

   얼마 전 필자는 한 구도자를 만나서 상담하였다. 그는 자신은 구원받았으니 교리적인 부분만 자세히 가르쳐서 자신이 잘못된 것을 지적해 달라고 하였다. 그런데 필자가 정확하게 바로 잡아야 할 부분을 지적하여 주어도 그는 받아들이지 못하였다. 다시 말하여 말씀을 순종할 영력이 없고 성령의교통도 없는 사실을 보면서 필자는 말해주었다. "선생에게는 교리적인 부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구원에 문제가 있네요" 하니 얼굴색이 변하였다. 다시 말하기를 구원 받은 것 같지 않아요" 하니 그는 얼굴을 붉히면서 "왜 내가 구원 받지 못했습니까?" 하였다. "보세요. 그대가 구원 받지 못한 것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이 그대의 언어입니다. 구원 받지 못한 사람이 과격하고 저돌적이다가도 구원 받으면 순한 양으로 변하지요. 당신에게는 영원한 지옥에서 건짐 받은 기쁨, 건저 주신 자에 대한 감사, 전해준 자에 대한 감사 등 구원 받은 자의 기본적인 모습들이 없어요. 구원은 이론적인 것이 아니요 막연한 교리 정립이 아닙니다."

   그에게 구원의 증거를 말해달라고 하니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구원받으니 구원받은 것 아닙니까?"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무엇을 믿습니까?" 하고 물으니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으니 믿는 것 아닙니까?" 하는데 얼마나 불쌍하고 처량한지 안타깝고 안타까울 수밖에 없었다. 무조건 예수님 믿으니 구원 받았다고 우기는데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 글를 읽는 독자여, 그대의 모습은 어떠한가?

   세 번째로 구원 받으라는 질문이 합당한 이유는 무엇인가? 예수를 믿었다는 뜻은 구원을 받았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예수"라는 뜻은 구원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서두에 예시한 말씀은  이 시실을 말해 주고 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구원할 자이심이라." 주님의 이름의 뜻이 그러하고 주님의 오신 목적이 그러하다면 구원을 질문하고 구원을 답변하는 것이 당연하지 아니한가?

   다시 말하거니와 예수께서 오신 목적을 바울도 죄인을 구원하러 오셨다고 증거했다. 디모데전서 1장 15절에서 그렇게 증거하고 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셨도다." 얼마나 정확한 말씀인가. 해석이 따로 필요 없는 분명한 선언이다.

   구원을 물어야 하는 네 번째 이유는 무엇인가? 성경 전체가 구원을 이야기 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한 복음 5장 39절에는 성경이 예수님을 증거하고 있다고 직접 증언하신 말씀이 있다. 말씀은 예수님이다. 예수라는 이름의 뜻이 구원이다. 그렇다. 디모데후서 3장 15절에도 성경은 구원을 말하고 있다고 가르쳐주고 있다. 이 부분을 더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창세기 3장 15절에 보면 하나님의 구원 프로그램이 나와 있다. 이 계획은 아담의 범죄 직후에 발표되었다. 여자의 후손(예수님)은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고 뱀은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한다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음으로 죄인을 구원하실 것을 이미 선언하신 것이다. 이 발표 후 하나님은 이 구원 계획을 실천하셨으며 그 과정을 기록한 것이 신구약 성경이다. 신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기록한 책이다.

   실제로 구약에 나타난 수많은 인물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을 나타내고 있다. 구약의 수많은 사건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나타내고 있다.

   가인의 제사와 아벨의 제사의 경우도 그러하다. 하나님이 아벨의 제사는 받으셨으나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아니하셨다. 왜일까? 아벨의 제사는 정성스러웠고 가인이 드린 제사는 정성이 부족했기 때문인가? 어떤 목회자는 그렇게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분별은 소경이요 구원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 거듭나지 못한 사람인 것을 스스로 드러내는 넋두리인 것이다. 가인의 제사는 피가 없고 아벨의 제사는 피가 있는 차이였다. 그 피가 예수님의 피를 말하고 있으며 이 피는 죄인을 죄에서 구원하는 유일한 길을 말하고 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제사로 드리려하는 사건은 무엇인가? 외아들로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나타내고 있지 아니한가? 하나님은 외아들을 내어주셔서 죄인을 구원하신 자비로우신 분이시다.

   구약의 사건 중에서 가장 확실하고 분명하게 주님의 구원 모습을 나타내는 사건 중의 사건은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출애굽 사건이다. 바로가 끝까지 이스라엘의 해방을 거절했을 때 하나님은 유월절 양을 잡아서 그 피를 문설주에 발랐다. 그리고 심판이 지나가는 밤에 문설주에 피를 바른 집에는 장자를 죽이는 재앙이 지나갔다.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의 거하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출애굽기 12:13).

   오늘날도 여러분의 마음의 문에 예수님의 피를 발랐으면 하나님의 심판을 면하려니와 그 피가 없으면 심판 받고 멸망의 지옥에 떨어질 뿐이다. 이것 또한 구원의 모형이다.

   찬송가 가사에도 "그 피가 맘속에 큰 증거 됩니다. 나의 죄를 씻기는 예수의 피 밖에 없네"라고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은 찬송가 가사만 제대로 깨달아도 구원받기에 충분하다.

   구약의 사건뿐만 아니라 인물들도 구세주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모세는 예수님의 모형중의 모형이다. 그 이름이 모세 즉 건져냄을 뜻하였으니 곧 구원이라는 뜻이다. 그는 이스라엘을 애굽과 바로의 손에서 건져냈으니 우리의 구주 예수께서 우리를 마귀와 그의 나라로부터 구원하심과 같다.

   그 외에도 구약의 수많은 인물, 수많은 사건이 예수님과 그분의 구원을 나타내고 있다.

   성경은 온통 구원을 나타내고 있거니와 성경을 말하면서 구원에 대한 관심을 무시하는 것은 대단히 잘못된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어떤 사람에게 "구원 받았는가?" 물으니 말하기를 "그것은 기초요 기본인데 왜 묻느냐"고 반문하였다. 물론 어떤 의미에서 그 말이 맞다. 더구나 그가 만약 구원을 받았다면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그렇게 대답하는 사람치고 구원을 확실하게 받은 사람을 필자는 보지 못하였다. 구원은 신앙의 기초일 뿐만 아니라 전부이다.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잃어진 인생들을 되찾아 영원한 천국으로 데려가는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성경이 쓰여졌고 성경대로 역사는 진행되고 있다. 구원은 성경전체요 성경의 주제인 것이다.

   오늘날 많은 기독인들이 구원을 기초 및 초보라 하여 가볍게 여기는 풍조를 보는데 이것은 한심한 모습이 아닐 수 없다. 구원이 없으면 천국도 없고 영생도 없고 부활도 필요 없으며 모든 하나님의 약속은 아무것도 아니다.

   구약은 구원의 약속이요 신약은 약속의 성취이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구원을 발견해야 한다. 구약의 구원의 그림자 중에 확실한 그림자는 제사법이다. 구약의 거의 모든 제사는 동물의 피를 통하여 제사를 지낸다. 레위기 17장 11절에는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고 선포하고 있다. 그러므로 피 없는 제사가 속죄를 이룰 수 없다고 성경은 선언하고 있다.

   "...피 흘림이 없이는 사함이 없느니라"(히브리서 9:22).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베드로전서 1:19).

   이로 보건대 양은 예수요 피는 예수님의 피임이 틀림없다.

   이제 결론을 내리려 한다. "구원 받았느냐" 하는 질문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서두에 기록하였거니와 이제 분명히 말하노니 그렇게 묻지 아니하는 것이 이상한 것이요 어쩌면 구원 없는 이단이기 쉬우리라. 그대는 십자가 위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모든 죄를 용서받고 이제는 죄인이 가야 하는 멸망의 지옥에 갈 걱정이 전혀 없어졌다는 확신 가운데 기뻐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구원받았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 즐거움이 있으리라. 그렇지 않다면 빌립보 간수처럼 정직하게 묻게 되기를 바란다.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사도행전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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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죄와 종교로부터의 자유


                               십자가만 자랑하라


   "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갈라디아서 6:14).


   필자는 많은 독서를 한 사람이라 말할 수는 없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세상의 어떤 책도 성경만큼 한가지 주제를 분명히 증거하는 완벽한 책은 없다고 생각한다. 성경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한가지 분명한 주제를 통해서 인생을 깨우치고 있다.

   어떤 이는 "성경은 어려워서 읽지 못하겠다" 고 말한다.

   그러나 성경은 결코 어려운 책이 아니다. 어찌 아비가 자식에게 알아듣지 못하는 어려운 말을 하는자가 있겠는가? 하물며 아버지 되신 하나님께서 자녀 된 인간에게 주신 말씀인 성경이 당연히 쉬워야 하지 않겠는가! 기독교 역사 2000년 동안, 특히 중세 및 근대 기독교가 일반인들의 성경 접촉을 막거나 혹은 성경을 어려운 책으로 가르쳐왔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이면 누구나 깨달아야 할, 또는 깨달을 수 있는 쉬운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면 성경의 주제는 무엇인가? 성경의 주제는 구원이요 구원의 성취는 십자가이다.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디모데후서 3:15).

   성경에서 십자가를 빼어버리면 성경은 당장에 쓸모 없는 휴지조각으로 전락해 버린다. 십자가를 증거하기 위하여 성경은 쓰여졌다. 사도 바울은 이 놀라운 진리를 깨달은 후 뜨겁고 간절한 마음으로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고 고백했다. 십자가는 인류를 구원하는 유일한 길이다. 십자가는 인간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인간 누구도 십자가 앞에 나오지 않고 결코 하나님을 만날 자가 없다.우리 신앙의 시작도 십자가요 우리 신앙의 진행도 십자가요 우리 신앙의 아름다운 열매의 모든 능력도 십자가에만 있다. 인간이 사단과 싸워 이길 수 있는 모든 능력도 십자가에서만 나온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린도전서 1:18).

   진실이 이러할진대 우리에게 있어서 십자가를 믿고 증거하고 사랑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 그러므로 사단은 갈보리 십자가 사건 이후 오늘날까지 줄기차게 십자가의 진리를 왜곡시키며 훼손하려고 대적하고 있다.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의 교회적 문제점들을 바로잡기 위하여 서신을 보내면서  마지막 결론의 내용이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는 것이었다.

   필자는 갈라디아서의 주제들을 마감하려 함에 있어서 갈라디아서의 주제가 되며 결론이 되는 십자가의 역할에 대해서 몇 가지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로 십자가는 구원의 길이다. 거룩하시고 완전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본질적으로 거룩 그 자체이시기 때문에 죄를 무조건 용납하시거나 죄에 관여하시거나 죄인과 상종하실 수 없는 분이시다.

   인간이 멸망의 지옥에 가는 것은 하나님을 닮은 본래의 모습을 잃어버리고 사단의 꾀임을 좇아서 죄인의 길로 들어간 까닭이다. 하나님은 본래 인간을 선하게 만드셨지만 인간이 타락의 길로 간 것이다(전도서 7:20). 창세기 1장 27절에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 함은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도 포함된다. 하나님이 인간을 이토록 악한 모습으로 만든 것은 절대 아니다. 전술한 바와 같이 인간이 하나님(아버지)을 버리고 사단을 아버지로 섬김으로(요한복음 8:44) 사단을 따라서 포악해진 것이다. 사실 현재도 인간의 속성 깊은 곳에 선한(거룩한) 성품이 내재하고 있음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다.

   바울은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로마서 7:21)라고 고백하였다.

   이제 죄로 말미암아 더러워진 인간은 약간의 선한 성품이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 결코 나아질 수 없는 신분과 상태로 전락하여 버렸다. 만약 성경이 구약만 기록되고 그리스도의 실체를 나타내는 신약이 진술되지 않았다면 인간을 구원하는 길은 영원히 막혀버리고 전 인류는 멸망의 지옥에 떨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의 구원을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의 선물로 받아들이고 있다. 실제로 오늘날 십자가의 은혜와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거나 모르고 있는 자들이 영원한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데살로니가후서 1:8).

   그러면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끊어진 인간들을 위하여 십자가는 무슨 역할을 하였는가? 그것은 주님이 십자가에서 구속의 사역을 완성하는 그 위대한 최후의 순간에 외치신 내용에 잘 나타나 있다.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요한복음 19:30).

   여기에서 "다 이루었다" 하신 말씀은 무슨 뜻인가? 죄인을 구속하는 일을 다 이루었다는 뜻이다. 즉 헬라어로 "테텔레스타이" 란 단어로서 '다 갚았다'는 뜻이다. 인간이 갚아야 할 죄를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다 갚았다는 뜻이다.

   이것은 전 인류의 죄, 즉 창세 초기의 아담으로부터 마지막 인간까지의 모든 인간의 죄를 의미한다. 예를 들어 여기 '갑'이라는 한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는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을 대적하며 현재 주님을 심히 모독하는 사람이다. 그는 십자가의 속죄를 안 믿을 뿐 아니라, 모르고 있다. 그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의 죄는 어떻게 되었는가? 그것은 간단하다.

   이미 2000년 전에 갈보리 언덕 십자가상에서 고통 중에 돌아가신 주님은 '갑'이라는 사람의 죄를 포함해서 모든 사람의 죄를 단번에 해결하셨다. 그런데 사람이 왜 지옥에 가는가? 그것은 그가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기보다 이 복음을 믿지 않음으로 지옥에 가는 것이다. 십자가는 모든 죄인을 의인으로 만든다. 더러운 죄인이 거룩해지는 것은 십자가의 길뿐이다. 이제 거듭난 자는 죄인이라 하지 않고 거룩한 의인이라 칭한다. 이제는 하나님과 상종할 자격이 주어진 의인이 된 것이다. 이것은 십자가의 속죄를 받아들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이다(로마서 3:23~24).


   둘째로 십자가는 능력이다. 구원받은 신자는 어떻게 이 악한 세대에서 하나님을 섬기며 기쁘게 살아갈 수 있는가?

그것은 십자가의 능력을 의지함으로만 가능한 것이다.

   신자가 구원받았을지라도 신자의 육체에는 여전히 죄의 속성이 있어서 신자를 괴롭힌다. 사단은 이 육체의 속성을 이용하여 신자로 하여금 기쁘고 즐겁게 생활하지 못하도록 역사한다. 그러나 십자가의 능력은 이러한 죄의 유혹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주는 능력이다.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서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십자가에 달리신)를 바라보자"(히브리서 12:1~2).

   사단은 우리 육체의 속성 중 정과 욕심을 사용하여 우리를 죄 가운데로 인도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우리의 죄의 근원은 정과 욕심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러나 육체의 정욕이 역사하여 우리의 신앙이 흔들릴 때 십자가 앞으로 나가면 불같이 일어나던 정욕이 사그라지고 신령한 그리스도인으로 회복 받게 된다.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고 성도를 용서하지 못하다가도 십자가의 사랑이 중심에 살아나면 저절로 용서하는 마음으로 변화된다.

   모든 평강의 근원도 십자가로 말미암은 것이다. 죄를 향하여 달려가기를 즐겨하는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사실을 묵상하기 바란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라디아서 2:20).


   셋째로 십자가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핍박이 따른다.

   "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하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핍박을 받으리요 그리하였으면 십자가의 거치는 것이 그쳤으리니"(갈라디아서 5:11).

   바울이 만약 할례와 율법의 행위를 전하였다면 핍박이 없었을 것이요 그러하였다면 바울을 통하여 죄인이 구원받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이것은 무슨 뜻인가? 십자가가 전해지는 곳에는 구원 역사가 일어난다. 구원받는 자들이 십자가로 인하여 성장하며  용감하게 주님을 따르게 된다.

   이것은 사단이 가장 싫어하는 성령님의 역사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전하고자 하는 곳에는 반드시 사단이 핍박하며 자기의 종들을 동원하여 방해공작을 일삼는다.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은 훌륭한 종파, 큰 교회에 속하여 자신은 정통이라고 하여 다른 사람들을 힘부로 판단하고 핍박하며 스스로 정통적인 믿음의 소유자로 위로 받고 있는데 이것은 엄청난 자기 착각임을 알아야 한다.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사단은 하나님의 종들을 핍박하여 왔다. 성경을 자세히 보라. 항상 핍빅하는 자 편에 선 자들이 이단이요 거짓이었다.

   물론 오늘날 실제로 잘못된 이단이기 때문에 핍박받는 경우도 많지만 정상적인 하나님의 자녀들도 핌박받는 자 중에 있음을 성경이 가르치고 있다.

   핍박의 역사를 간단히 살펴보면 가인이 아벨을 핍박하였고, 이스마엘이 이삭을, 에서가 야곱을, 사울이 다윗을, 여러 잘못된 왕들이 선지자들을 핍박하였다. 예수님도 핍박 받고 이단으로 정죄받아 죽임을 당하셨으며 제자들도 대부분 이단으로 몰려 순교하였다.

   오, 독자여! 그대가 참된 진리 중에 있는지 아는 방법 중 하나는 그대가 지금 그리스도 때문에 핍박받는 자인가 아닌가 하는 것이다. 교회사에도 보면 수많은 하나님의 종들이 핍박을 받았다.

   주님이 친히 말씀하셨다. "이(십자가 예수)을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마태복음 5:10~12).

   분명히 말하거니와 성경의 역사나 교회의 역사는 정상적인 하나님의 종들이 심한 핍박에 시달렸음을 잘 대변하고 있다. 오늘날에도 기독교의 거대한 조직들이 참된 하나님의 교회들을 자기 교인들을 지킬 목적으로 얼마나 정죄하고 있는가? 이 핍박은 주님 오실 때까지도 계속될 것이다.주님이 친히 말씀하신 바 "좁은 문"의 비밀을 독자들은 알기 바란다.

   끝으로 바울이 탄식으로 경고하고 있는 말씀이 있다. 참된 하나님의 교회가 어떻게 변질 되는가 하는 문제다. 그것은 "핍박을 면하려는 생각"으로부터 변질 되는 것이다.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로 할례 받게 함은 저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하여 핍박을 면하려함 뿐이라"(갈라디아서 6:12).

   핍박을 면하기 위하여 모양을 내고 타협을 하고 안일한 생활을 추구할 때 참 진리는 점점 변질되어 가고, 성령의 능력은 점점 떠나간다. 오늘날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면서 복음의 초창기에 온갖 핍박을 정면으로 대적하며 담대하게 나아갔을 때 능력과 성령 충만이 있었던 것을 기억한다. 이러한 경험을 회상하는 성도들을 필자는 많이 보아왔다.

   그러나 핍박을 면하려고 부드러움과 평안을 추구하며, 여러 가지 지혜와 학문적 방법이 동원되고, 종교적 형식을 흉내내며, 이러한 것들을 조금씩 조금씩 용납하는 동안 숫자는 늘어날지라도 이미 교회는 변질되어가고 성령의 능력은 소멸되어 가는 것이다. "이슬비에 옷 젖는다"는 우리의 속담처럼 우리가 순종하던 성경의 진리가 놀랍게 변질될 때 주님이 얼마나 슬퍼하시겠는가?

   필자는 생각하건대 전도에는 특별한 방법이 없다고 본다. 정상적 전도라면 십자가의 본질을 분명하고 담대하게 전하는 것이다. 바울도 전도는 미련한 것이라고 하였다(고린도전서 1:21). 비록 핍박이 온다 할지라도 우리는 십자가의 도를 앞세우고 담대히 전진하여야 한다. 핍박이 더 일어난다 할지라도... .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은즉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베드로전서 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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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죄와 종교로부터의 자유


       몽학선생 아래서 착각하고 있는 기독교인들이여!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갈라디아서 3:25).


   성경의 주제는 구원이다. 성경은 인간에게 구원의 길을 알리고자 기록되었다(디모데후서 3:15, 요한복음 20:31). 만약 성경을 읽고도 구원의 길을 깨닫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이는 성경의 주제를 다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이니, 그는 마땅히 성경을 다시 읽되 구원의 길을 알고자 하는 목적으로 읽어야 할 것이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모든 성경의 총체적 내용이 구원을 말하고 있으며, 성경의 여러 부분에서 구원을 이루는 부분적 요소들을 구체적으로 나열하고 있다. 그중 갈라디아서 3장 25절의 몽학선생도 구원받기에 이르는 한 단계를 말하고 있다. 구원의 필요성을 깨닫지 못하는 인간에게 자신이 죄인임을 깨우쳐서 구원에 이르도록 인도하는 안내자 역할을 몽학선생이라고 하는데, 이는 곧 율법이 그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 몽학선생은 구원자는 아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단의 간계로 말미암아 초대교회의 수많은 사람들이 몽학선생, 즉 율법에 의해서 구원받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기에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의 이러한 부분을 깨우치기 위하여 갈라디아서를 쓴 것이다.

   그러므로 필자는 구원을 증거하는 성경의 단계를 4단계로 압축 정리함으로 중간 단계에서 마치 구원받은 것으로 착각 중에 있는 기독교인들을 깨우치고자 한다. 물론 이것은 알기 쉽게 하기 위하여 필자가 구원의 단계를 편의상 4단계로 나눈 것임을 밝혀둔다.


   구도자가 구원받기 위하여 넘어야 할 제 1단계는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깨닫는 것이다. 성경은 여러 모양으로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증거하고 있다. 불신자가 구원을 받으려면 우선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그분이 우주의 창조자요 주인이심을 발견하는 과정이 필수다. 그래서 하나님은 창세기를 통해서 하나님의 창조를 증거하고 계신 것이다. 말씀으로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여러 가지 초능력적인 기적이나 인간의 소원을 이루어주는 기도응답으로 자신의 실존을 증거하신다.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이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지하게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런데 여기서 놀라운 것은 수많은 사람들이 제 1단계, 즉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경험하고 믿게 된 것만으로 구원받은 증거인 양 착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주장하는 신비한 경험, 기도응답 등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했으니 구원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사단은 아주 지혜롭고 영리하여 수많은 거짓 그리스도인들을 이러한 방법으로 만들어내고 있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어찌나 강한지 도대체 구원의 진리를 아무리 가르쳐 주어도 자기의 경험만 꼭 붙잡고 남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과 예수님을 분명히 믿으나 지옥으로 가고 있는 것이다.


   제 2단계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발견한 사람은 곧 자신의 참 모습을 발견할 필요가 있다. 나의 근본은 무엇인가? 타락한 죄인 아닌가? 하나님을 떠난 죄인이며 양심의 악을 깨닫지 못하는 죄인인 것이다.

   "선을 행하고 죄를 범치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아주 없느니라"(전도서 7:20).

   자신이 죄인인 것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결코 구원에 이를 수 없다. 우리는 창세기에 기록된 말씀을 통해서 인간이 어떻게 타락하게 되었으며, 아담을 통하여 인간 세계에 들어온 죄가 어떻게 번창하여 나갔는가 하는 내용을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 아담의 범죄로 죄가 세상에 들어온 이래로 인간과 죄의 싸움은 시작되었다.

   그러나 어느 시대의 어느 인간이나 죄와 싸워서 완전히 승리한 사람은 하나도 없다. 우선 믿음의 조상이요 우리 신앙의 표본이 된다고 할 수 있는 아브라함과 다윗을 통해서 대표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아브라함은 훌륭한 믿음의 사람이었다. 생각하여 보라. 조상 대대로 살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하루아침에 정리하고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만 의지하고 새생활을 시작하는 일이 작은 일이겠는가? 이것은 생명을 건 모험이요 죽음을 무릅쓴 새로운 도전이다. 대단한 믿음의 사람이 아니고는 가히 흉내낼 수 없는 믿음의 간증임에 틀림없다. 그렇지만 그러한 아브라함도 두 번이나 인간을 무서워하며 자기의 아내를 아내가 아니라고 속임으로 하나님과 아내에게 죄를 지었다. 참으로 하나님의 긍휼로 말미암지 않는다면 그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했을 것임이 분명하다. 그의 행위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수가 없는 죄인이었던 것이다.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함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로마서 4:2).

   다윗을 보라. 다윗은 이스라엘의 성군이었다. 그같이 선정을 베푼 왕이 역사 이래로 없었다. 참으로 다윗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실 표상 중 한 인물로서 성경은 다윗의 훌륭한 인격과 신앙심을 여러 곳에서 증거하고 있다.

   그러한 다윗도 몇 번의 실수가 있었음을 성경은 증거하고 있다. 우리아의 아내를 불법으로 취한 사건이 바로 그 실수 중 하나이다.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를 취하고 또한 그 죄를 회피하여 보려는 간사한 꾀에 빠져서 결국은 악한 방법으로 우리아를 죽이기까지 했다. 이와 같은 사실을 생각할 때 믿음이 있고 선하다고 생각하는 우리도 갑자기 악한 죄의 유혹에 빠질 수 있음을 조심하여야 할 것이다.

   아무튼 성경은 다윗도 하나님의 긍휼을 입어야 할 죄인임을 여실히 증명하고 있다.

   혹자는 "노아에 관해서는 성경에 기록하기를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요 하나님과 동행하였다고 하지 않았느냐"고 말할 것이다(창세기 6:9). 물론 성경에 기록된 이와 같은 말씀은 사실이다. 그러나 성경을 더욱 자세히 보라. 창세기 6장 9절에 이 말씀이 나오는데 이말씀 전에 8절에서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는 말씀이 먼저 기록되어 있지 아니한가? 은혜가 무엇인가? 불쌍한 처지, 좋지 못한 처지에 있는 사람, 도저히 받을 수 없는 사람에게 베풀어지는 동정이 아닌가? 또한 노아는 술취해서 벌거벗고 누우므로 실수를 나타내지 아니하였던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로마서 3:10). 하나님은 인생을 부패하고 썩은 정죄 받아야 마땅한 죄인이라고 단언하셨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예레미야 17:9).

   깨달아야 한다. 깨달아야만 한다. 그대가 죄인인 것을... . 자신이 죄인인 것을 심장으로 깨달았다면 그 단계를 넘은 것이다. 그러나 2단계만 깨닫고 구원받은 것은 결코 아니다. 오늘날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2단계를 깨닫고 죄 때문에 고민하고 괴로워하여 예배당에 가서 울고불고 탄식하는 것을 마치 대단히 믿음이 좋은 사람이요 구원받은 사람인 것처럼 착각하고 있다. 그러나 죄인인 것을 깨달은 것은 수영을 못하는 사람이 물에 빠진 것을 깨달은 것과 같다. 그가 '물'에서 구원받아야 하는 것처럼 우리도 '죄'에서 구원받아야 한다(마태복음 1:21).


   이제 제 3단계로 넘어가 보기로 하자. 죄인인 것을 깨달은 사람은 죄값이 멸망의 지옥인 것을 알아야 한다. 금일의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죄를 지은 것에 대한 수치심과 잘못됨을 깨닫고 두려워하고 있지만 지옥의 형벌과 연결시켜 깨닫고 있는 면은 매우 빈약하다. 죄에 대한 두려움과 하나님의 심판과 책망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죄인이 저주의 지옥에 들어가는 문제에 대해서는 의외로 덤덤한 반응을 나타내는 경우가 많아 필자를 놀라게 한다.

   왜 그런가? 금일의 수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이 기복신앙의 흐름에 잡혀 죄와 회개와 하나님의 복을 가르치지만 지옥의 끔찍한 상황은 가르치고 있지 아니한 결과라고 필자는 분석하고 있다. 실제로 필자는 많은 기독교인들을 만나 지옥에 대해서 약간 들은 것, 상식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진지하게 듣고 깨달아 본 적이 있는가 하는 질문을 던졌을 때 10명중 8,9명이 "없다"고 답변하는 것을 보게 되었다.

   슬프고 탄식할 일이다. 예수님의 첫 번째 설교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마태복음 4:17)는 말씀이 아닌가? 이 말씀을 반대로 생각하여 보라. "회개하지 아니하면 지옥에 떨어진다"는 내용이 아닌가?

   예수님은 왜 이 땅에 오셨는가? 멸망의 지옥을 증거하려 함이 아닌가? 그리고 멸망의 지옥으로 들어가고 있는 죄인을 그곳에서 건지려함이 아닌가? 그런데, 집사, 장로 직분을 받은 사람들 중 상당수가 지옥에 대하여 전혀 관심조차 없으니 얼마나 충격적인 사실인가?

   양떼들은 지옥과 천국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여 눈물로 밤을 지새우고 있는지도 모르고 "우리 교회 교인은 다 천국 가겠거니..." 착각하고 안일한 생활을 즐기는 목사님들이 우리 시대에 얼마나 많은가?

   오늘의 기독교의 상황은 사랑 많으신 주님이 아니더라도 양심을 가지고 들여다보면 안타까워 눈물을 흘릴만하다.

   멸망의 지옥을 우리는 마가복음 9장 43절 이하에서 볼 수 있는데 이 지옥의 끔찍한 상황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지옥은 영원히 불타는 곳이다. 세상의 어떤 불도 지옥 불보다 뜨겁고 무서운 불은 없다.

   (2) 지옥은 영원히 나올 수 없는 곳이다. 어떤 사람이 말한 대로 모든 소망이 사라진 곳이다. 성경은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당하리라"고 기록하고 있다(요한계시록 20:10). 거기에는 후회와 탄식과 눈물과 원망과 저주만 가득할 뿐이다(마태복음 13:42).

   (3) 지옥에 있는 사람들은 인격을 완전히 무시당한 채로 영원히 고통당하는 역사상 가장 극한 고난을 당하게 되는 곳이다. 성경은 이에 대해 지옥에 "던지운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던지운다'는 뜻은 속된 말로 "쳐 넣는다"는 뜻이다(마가복음 9:45). 얼마나 절망적인 말인가 생각해 보기 바란다. 또한 '던지운다'는 뜻은 강제로 쳐 넣는다는 뜻 아닌가? 이토록 끔찍한 지옥이 기다리고 있는데도 지옥에 대해 두려움이 없는 거짓 선지자들을 보고 탄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 글을 읽는 당신의 영혼의 문제를 지금 당장 검토하여 보기를 강력하게 촉구한다. 그리고 다음 단계를 깨닫고 구원을 받으므로 영원한 지옥을 면하게 되기를 바란다. 멸망의 지옥과 거기에 가게 되는 원인인 죄 문제를 깨달았다면 비로소 구원받을 단계에 도달한 것이다.


   이제 마지막 단계인 제 4단계, 즉 구원받는 문제를 살펴 보고자 한다.

   죄 문제에 대해 논할 때 인류 역사상 어떤 사람도 죄를 정복한 사람이 없었다는 것을 말한 바 있다. 그런데 오직 한 사람 예외가 있는데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첫째, 신분상 죄를 정복한 분이시다. 아담의 피를 받지 아니한 최초이자 최후의 인간이 되신 것이다. 물론 이것은 처녀 마리아의 몸을 의탁하사 이 땅에 오심을 말한다.

   둘째로, 도덕적으로 죄를 정복하신 분이시다. 복음서를 보라. 어느 누구도 예수님의 언행 중에서 허물을 발견하지 못했다. 예수님은 모든 죄의 유혹을 완전하게 정복하셨다.

   셋째, 능력으로 죄를 정복하셨다. 이것은 죄의 삯은 사망인데 예수님은 모든 사람이 죄 값으로 죽는 것처럼 십자가에서 죽음을 맛보셨으나 3일만에 당당히 살아나심으로 사망의 권세, 즉 죄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승리하셨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히 2;14).

   넷째, 예수님은 실제로 죄 문제를 해결하셨다. 예수님은 죄와 싸워 이기셨을 뿐만 아니라 세상 모든 인생들의 죄 문제도 완벽하게 해결하셨다. 인간의 모든 죄악을 십자가 위에서 단번에 짊어지고 가셔서 무덤에 묻어버리셨다.

   당신의 모든 죄가 갈보리 십자가에서 해결되었을 뿐만 아니라 주께서 무덤에 묻힐 때 다 묻어버리시고 주님은 부활하셨다. 그것은 온 인류의 죄를 짊어지신 몸으로 묻히신 주님께서 인간의 모든 죄를 묻어둔 채 영광의 몸으로 부활하심으로 입증되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나의) 죄를 담당하셨으니..."(베드로전서 2;24).

   오 그대여! 그대를 지옥으로 끌고 가는 그대의 모든 죄가 그대의 어깨에서 다 사라졌으니(주님이 대신 담당하셨으니) 그대를 지옥가게 하는 모든 죄가 사라지지 않았는가?

   그대가 제 3단계까지 다 깨달았다 할지라도 만약 이 속죄, 곧 영원한 속죄 사실을 깨닫지 못하여 죄에서 해방 받지 못하였다면 그대는 몽학 선생 아래 있는 것이요 구원받지 못한 것이다. 옛날 몽학선생은 어린아이를 성년이 될 때까지 잘 보살펴주고 지켜주는 사람이었다. 그는 성년이 되는 과정까지만 필요한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3단계까지는 몽학선생의 관점이지 구원은 아닌 것이다.

   모든 죄의 완전 속죄를 믿음으로 그대가 죄에서 해방되어 의인이 되었다면 그대는 몽학선생에서 이미 벗어나 구원에 이른 것이다.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갈라디아서 3:25).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로마서 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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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죄와 종교로부터의 자유


              죄인도 의인도 아닌 기독교인들이여!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나타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갈라디아서 2:17).


   "성경은 왜 기록되었는가? 예수님은 왜 이 땅에 오셨는가?" 필자가 교회에 열심히 다니는 기독교인들을 만나면 흔히 던지는 질문들이다. 시원스럽게 깨닫고 대답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하여 기록된 책이라는 것을 필자가 지면을 통하여 증거한 바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왜 오셨는가?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켜 주시기 위해 오셨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마태복음 1:21).

   성경을 믿고 예수님을 진실로 믿는 거듭난 성도라면 당연히 죄를 용서받고 해방된 놀라운 간증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증거하게 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다. 이 글을 쓰면서 찬송가 405장의시자가 기억난다.

   죤 뉴톤은 아프리카 노예상인이었으며 탕아였고 이교도였다. 그러나 그가 더럽고 추악한 죄악의 사슬에서 용서받고 해방 받은 기쁨을 찬송시로 간증하고 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큰 죄악에서 건지신 주 은혜 고마워

    나 처음 믿은 그 시간 귀하고 귀하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이와 같은 간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필자가 오늘날 우리 주변의 여러 교인들을 만나서 "죄인인가요, 의인인가요" 라는 질문을 할 때, 어떤 사람은 "우리 모두가 죄인이지요" 라고 말하며, 어떤 사람들은 "의인이 되었어요" 라고 말하고, 혹은 "의인이 되었지만 죄인이라고 말해야 하지요" 라는 답변까지 듣게 된다.

   잠깐 멈추어서 묻건대, 이글을 읽고 있는 그대는 어떠한가? 무어라 답변하겠는가? 성경이 씌어진 목적도,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이유도, 수많은 전도자들이 피를 흘리며 전도한 목적도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피로 죄인이 의인이 된 진리를 전파하고 수호하기 위해서가 아닌가!


   인간은 출생 때부터 모두가 구조적으로 생리적으로 죄인일 수밖에 없다. 수많은 종교적 노력과 인격적 수양과 교육을 통해서도 의인이라는 호칭을 들을 수 없으며, 멸망당할 수밖에 없는 불행한 죄인들에게 십자가의 영원한 속죄는 긴 가뭄에 단비처럼 충격적인 기쁜 소식임에 틀림없다. 이것이 복음의 실체가 아닌가!

   도대체가 의인이면 의인이고 죄인이면 죄인이지 "의인이 되었으나 죄인이라고 불러야 한다" 는 것은 또 무엇인가? 생각하여 보라! "빚을 다 청산하여 빚은 없으나 빚쟁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말한다면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죄에서 해방시켜 의인의 신분으로 만들뿐 아니라, 의인된 기쁨에 동참시켜 주시기 위하여 십자가의 고난과 수치를 당하셨다고 성경에 수없이 기록되었거늘, 수 십년 교회에 다녔다는 사람들이 이 같은 고백을 늘어놓으니, 도대체 그들은 성경을 보는 것인가, 보지 않는 것인가? 성경을 믿는 단 말인가, 부정한단 말인가? 얼마나 우습고 안타까운 일인가!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이사야 53:5).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로마서 8:1).

   필자는 이러한 부류의 사람들이 왜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해 그 몇 가지 이유를 여기에 나열하고자 한다.

   첫째, 그들이 죄인과 의인의 문제에 대하여 분명하지 못한 이유는 그들 중의 상당수가 지옥에 대하여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은 입으로 지옥을 부정하거나 믿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오히려 지옥을 인정하고 있다고 장담하고 있다. 그러나 막상 지옥에 대해서 어떤 곳인지 아는 대로 말해보라고 하면 그냥 무서운 곳이라느니 불타는 곳 정도로 막연하게 대답하기 일쑤다. 또한 그들에게 지옥에 대해서 진지하게 들어본 적이 있느냐고 물어보면, 설교 때 잠시 듣거나 다른 기회에 지나가는 말로 약간 들은 경우 말고는 정말 지옥의 무서움과, 내가 왜 지옥에 가야만 하는가 등에 대한 심각한 깨달음이 없었다.

   그대는 어떠한가? 혹시 지옥에 대해서 피상적으로 생각하고 있지는 않는가? 입으로 지옥을 믿으나 실제로는 지옥을 두려워하지 않고 있지는 않는가?

   지옥은 끔찍한 곳이다. 마가복음 9장 43절 이하에 보면 지옥은 끔찍한 곳임을 주님께서 친히 경고하셨다. 예수님은 사역 초기부터 지옥에 대해서 증거하시고 회개하여 천국에 들어가야 할 것을 가르치셨다.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처음으로)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태복음 4:17).

   예수님은 이 땅에 왜 오셨는가? 요한복음 3장 16절에서 잘 증거된 것처럼, 죄인이 멸망당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하여 오시지 않았는가? 사람이 멸망의 지옥에 떨어지는 일이 얼마나 끔찍하고 무서운 일인가를 누구보다도 우리 주님은 친히 잘 알고 계셨다. 그러므로 주님은 기회 있을 때마다 천국과 지옥을 증거하셨고 지옥에 가지 말 것을 경고하셨다(마태복음 4:17, 5:22, 7:13, 10:28, 18:8,9 등).

   성경의 주제는 천국이요, 지옥이다. 예수님은 눈물로 지옥을 경고하셨다. 슬픔과 애절한 음성으로 아픈 가슴으로 지옥을 경고하셨다. 성경은 이 지옥과 천국을 증거하기 위하여 씌어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을 믿고 따르며 교인이라고 하는 상당수 사람들이 지옥을 피상적으로, 지식적으로 알거나 관념적으로만 생각하여 자신이 지옥에 갈 수도 있다는 가능성마저 무관심하고, 자기 나름대로는 믿는다고 하면서 교회나 교파의 가르침만 맹종하고 있으니 얼마나 슬픈 일인가!

   독자여! 그대가 만일 지옥에 대하여 두렵게 깨달아 본적이 없다면 그대의 구원을 검토하여 보라고 권하고 싶다. 왜냐하면 그대가 열심이 있는 기독교인이라 할지라도 지옥에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지옥의 문제가 내 속에서 분명하게 깨달아지면 자연적으로 내가 죄인이냐 의인이냐 하는 문제는 우리의 관심사가 되어져서 이 문제의 분명한 해결을 통한 거듭남, 곧 구원을 받게 될 것이다.


   둘째, 그들이 죄인과 의인의 문제에 대하여 분명하지 못한 이유는 그들 중에 상당수가 자신이 죄인임을 진정으로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입으로는 죄인임을 물론 시인한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미워하기만 하여도 이미 살인한 자가 되었다고 하고, 혹은 음욕만 품어도 이미 간음하였다고 하니, 죄인 아닌 사람이 있으랴. 그러니 나는 죄인이지 아니한가"라고 생각하거나, 또는 "로마서 3장 10절에 있는 대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라고 하신 것을 보아도 내가 죄인이지 아니한가" 하는 막연한 생각으로 죄인이라고 인정하고 있다. 그들이 처한 상태가 분명치 못하기 때문에 죄로부터의 구원이 분명치 못한 것이며 죄인과 의인의 규정도 분명치 못한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무엇을 증거하고 있는가? 인간을 가리켜 심히 부패하고 썩은 죄인이라고 말하고 있지 아니한가! 스스로는 구제불능의 추악한 죄인이, 자신의 노력으로 자신을 죄에서 구원할 수 없으므로 겸손하게 구원자 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할 터인데, 이 구원의 길을 거절한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자멸하는 죄인으로 규명하고 멸망의 지옥에 던지시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생을 보시는 관점은 심히 더러운 구더기 같은 인생이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눈에는 달이라도 명랑하지 못하고 별이라도 깨끗치 못하거는 하물며 벌레인 사람 구더기인 인생이랴"(욥기 25:5,6).

   독자여, 그대는 구더기처럼 더럽고 심판 받아 마땅한 죄인임을 깨닫고 주님 앞에 나와서 속히 죄 씻음 받고 구원을 얻으시라.

   결론적으로 자신이 끔찍하고 무서운 심판의 목전에 놓인 가련한 죄인임을 양심적으로 깨달은 사람은 자연히 죄인의 사슬에서 벗어나고자 몸부림칠 것이며, 그러한 사람은 '죄인과 의인의 문제'를 분명히 하여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이다.


   셋째, 그들이 죄인과 의인의 문제를 분명히 하지 못하는 것은 성경에서 말하는 죄인과 의인의 개념을 분명히 모르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죄인은 단순히 죄를 짓는 사람 정도가 아니다. 죄인의 개념은 마귀의 자식이라고 하는 두려운 뜻이 있다. 요한복음 8장 44절에서는 "너희는 마귀에게서 났으니 죄를 짓는다"고 하셨고, 요한일서 3장 8절에서는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라고 말씀하고 있다.

   거듭났다는 뜻은 마귀의 자식이 하나님의 자식으로 다시 태어났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또한 죄인의 신분이 의인의 신분으로 변화된 것을 의미한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로마서 3:23, 24).


   넷째, 그들이 의인과 죄인에 대해서 분명치 못한 것은 자신들의 행위와 노력으로 의로워지려는 종교적 고뇌에 붙잡혀 있기 때문이다.

   서두에 기록된 갈라디아서 2장 17절과 갈라디아서의 다른 말씀들을 검토하여 보면, 갈라디아 교회도 예수님을 믿는다고는 하지만 실제로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고 가르치는 이단적 가르침에 미혹된 자들이 있었다.

   성경은 분명하고 힘있게 믿음으로만 의로워지고 구원받는다고 증언하고 있다(갈라디아서 3:1; 에베소서 2:8 ; 로마서 3:28).

   생각하여 보라! 자신의 행위를 의지하고 있는 기독교인이 허물과 죄가 수없이 드러나고 있는 자신을 외식과 거짓으로 꾸미지 않고 진실하게 드러낼 때 어찌 감히 의인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겠는가! 율법적 사고를 가진 사람이 자신을 의인이라고 주장한다면 자신과 하나님을 속이고 있거나, 어떤 착각에 빠져 있음이 분명한 것이 아닌가!

   구원받는 것은 온전한 하나님의 선물이며 이것을 단순히 받아들이는 믿음뿐이지 행위는 전혀 관계되지 않는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에베소서 2:8,9).

   혹자는 말할 것이다. "야고보서 2장 26절에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행위도 필요한 것이 아니냐"라고... .

   그러나 여러분이 야고보서 2장 14~26절까지 자세히 살펴보면 의롭다함을 받고 구원받는 것은 믿음으로 되는데, 그 믿음에 거짓이 없는가 하는 문제는 믿음을 통한 행위가 증명한다는 것을 말함이 분명하다.

   다시 말하자면 확실하고 분명하게 믿음으로 구원받는 사람, 즉 의롭다 함을 얻은 사람은 십자가의 속죄를 믿은 사람이며, 그 믿음의 진실 여부는 변화된 모습(행위)을 통해서 증명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한가지 조심하여야 할 것은 믿음 후에 오는 행위는 자신의 인격과 능력을 의지한 인위적 행위가 아니고, 거듭난 이후에 우리 속에 임재하신 성령을 통한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를 뜻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독자여! 이제는 문제가 자명하여지지 않았는가! 죄인의 결국은 멸망이요, 의인의 결국은 영원한 소망인 천국이 아닌가! 그대의 믿음을 확실히 하시라.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대의 모든 죄를 이미 다 용서하였으니 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고귀한 피의 가치를 깨닫고 그리스도의 흘리신 피로 의인이 된 사실을 깨닫기 바란다. 그대도 부디 하나님의 자녀의 영광에 동참하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죄(죄인)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선물)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로마서 6:23).

Posted by 행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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