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믿음에 있는가

                                        시험하고 확증하라


                                          믿음 좋은 집사님들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마태복음 3:10).


   이 말씀은 한국교회가 새겨야할 추상(秋霜)같은 경고의 말씀이다. 한국교회는 이 말씀 앞에서 울어야한다. 떨어야 하며 통곡하며 자신을 점검해야 한다.

   당연히 천국에 갈 것으로 생각했던 수많은 교회 지도자들, 직분을 맡아 충성을 다했던 사람들이 지옥으로 떨어졌을 때의 모습을 상상해보라. 반드시 천국에 간다고 자타가 공인하는 사람들이 무더기로 지옥에 떨어져 이를 갈며 서로 싸우고 증오하며, 또 뜨거운 불 고통을 견디면서 영원히 살아야 할 것을 생각해보라. 평생을 하나님만 사랑하며 온갖 고난과 슬픔을 참으면서 인내로 견디어온 불굴의 신앙인들이 지옥에 갈 수도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생각해 본적이 있는가.

   결혼을 반납하고 평생 처녀와 총각으로 지내면서 일평생 하나님을 위하여 충성을 다 바치고 하나님에게 버림받을 수 있다는 말이 독자들에게는 어떻게 들리는가.

   그러나 이와 같은 일이 이 글을 읽는 그대의 현실일 수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라. 하나님의 판단은 냉정하다. 동정이나 치우침이 없음이 분명하다. 하나님은 공의롭기 때문이다.

   공의의 기준은 무엇인가? 셩경말씀이다. 하나님은 말씀대로 심판하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 기독교 지도자들이나 그 추종자들은 말씀을 두려워하지 않는 경향이 있으니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필자는 제목을 "믿음 좋은 집사님들"로 정했다. 왜 이 제목을 선정하였는가? 한국의 기독교 사회에서 "믿음이 좋다"는 말은 흔하게 쓰일 뿐만 아니라 이것이 믿음의 척도를 나타내는 말로 쓰이고 있음에 틀림없다.

   먼저 알 것은 "믿음이 좋다"라는 단어가 신구약에 전혀 보이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성경에 없는 단어가 한국의 기독교를 휘젓고 다닌다고 하는 것은 한번쯤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가 아닐까?

   물론 신앙생활에 있어서 성경에 있는 단어만 구사해야 된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는 간과하기에는 너무 중요한 문제이다. 필자는 사전을 두루 찾아보아도 믿음이 좋다는 말이 도무지 없음을 보고 충격을 받은 지 오래다.

   한국의 기독교에서 믿음이 좋은 집사님이라는 말은 널리 쓰이고 있는데, 그러므로 필자는 어떤 분들이 믿음이 좋다는 말을 듣는가 깊이 생각해 보았다.


   첫째는 믿음 좋은 집사는 예배당에 잘 출석하는 사람들이다. 신자가 예배당에 잘 출석하는 일은 당연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내면에 믿음이 성숙하지 못한 상태에서 열정적으로 출석만 한다고 하여 믿음이 좋다고 말할 수 있는가? 진실로 믿음이 좋다고 하는 어떤 집사님에게 물어보았다.

   "20여 년간 주일성수하고 계시다는데 성경의 주제가 무엇입니까?"

   "글쎄요 무어라고 말을 못하겠네요. 배우기는 배웠는데 기억이 잘 안 나네요."

   이와 같은 비슷한 답변을 수없이 듣는다. 성경의 주제도 파악하지 못하고, 내 죄가 어떻게 되었는지 깨닫지도 못하고 성경책만 들고 열심히 자리만 지킨다고 믿음 좋은 집사님인가? 예배당 출석하는 일이 대단히 중요하지만 믿음의 본질도, 성경의 주제도 깨닫지 못하면서 출석만 잘하면 그러한 사람을 천국에서 만나볼 수 있을까? 슬픈 일이다.


   두 번째로 믿음 좋은 집사는 목사님 말씀에 순종 잘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종을 순종하는 일은 대단히 중요하고 성경의 가르침이기도 하다. 필자도 목회하면서 주의 종들의 가르침에 순종해야 한다고 수없이 가르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 말씀을 따라서 순종하고 복종해야 할 것이다. 주의 종이 성경 말씀과 관계없이 잘못된 길로 가르쳐도 맹종하라는 뜻은 아니다.

   신앙은 인격적인 것이다. 그리고 생명의 활동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이해하는 능력이다. 교회는 이와 같은 생명들이 모인 유기체이다. 그래서 생명의 교제를 나눈다. 그 중심에는 성경이 있다. 성경의 범위 안에서 교제하고 내용을 따라서 즐거워하고 인도하심 따라서 살아가고 역사하심을 따라서 그 열매를 누리는 축복된 삶의 현장이다.

   그러므로 가르치는 자도 성경의 범주 안에서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생명력이 있는 말씀을 가르쳐야 하며, 듣는 자도 성령님의 가르침에 따라 생명력 있는 귀로 들으며 교제하는 현장이 되어야 한다. 교회는 사람들의 인격적인 교제를 나누는 곳이 아니다. 그러므로 목사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필연적인 것이지만 가르치는 자도 말씀 중심이어야 하고, 순종하는 자도 말씀 안에서 분별하여 순종하여야 한다.

   다시 한번 말하거니와 교회는 성경을 중심으로 모여서 성경 안에서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잔칫집이요 아름다운 교제의 현장이다.

   어떤 사람이 필자에게 말하였다. 자기는 진리를 알고자 하여 친구를 따라서 교회에 상당 기간 출석하였으나 진리를 알 길은 없고 설교 내용은 늘 설교자의 자랑이나, 잘 믿으면 축복 받는다는 축복론이나, 헌금 내면 잘 된다는 헌금 강조론이 대부분이었다고 했다. 그는 답답한 마음으로 교회를 그만 두었다고 했다.

   어떤 성도는 어떻게 하면 천국에 갈 수 있느냐 물으니 목사님 대답이 "새벽 기도를 열심히 나오시오" 하는 것이었다. 이런 말을 어찌 순종할 수 있는가.


   세 번째로 믿음 좋은 집사는 헌금 많이 내는 사람이다. 일반적인 교회는 대부분 기명헌금을 하기 때문에 누가 헌금을 내는지 다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큰 헌금을 내고 교회재정을 넉넉하게 하는 집사는 당연히 목사님의 사랑과 칭찬을 독차지하기 마련이다.

   교회가 운영되는데 있어서 돈의 역할은 상당히 중요하다. 돈으로 전도하는 것은 아니지만 전도하는 데는 돈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헌금 많이 내는 사람은 곧 믿음 좋은 사람의 등식은 맞지 않다고 본다. 그렇다면 가난한 자의 설 땅이 어디 있는가. 가난한 자는 하나님이 버리시는가? 가난한 자는 하나님도 섬길 수 없는가?

   예수님은 가난한 자의 친구가 되셨는데 오늘날 기독교는 가난한 자에게 친구가 되기는커녕 오히려 그들에게 상처를 주고 고통을 주고 눈물을 주어 울면서 기독교를 등지게 하고 있다. 기독교를 등지는 그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은 계시지만 하나님을 섬길 방법을, 장소를 찾지 못하는 것이다. 참으로 슬픈 일이다.

   한국의 기독교가 양적으로 팽창하여 엄청나게 큰 건물을 소유하고 그 안에 비싼 장식물로 치장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하나님을 예배한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수많은 사람들을 실족시키고, 순수하게 하나님을 믿고자 하는 사람들을 실망시킨 죄악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보라, 저 거리를 방황하는 불쌍한 영혼들을! 그들은 한때 하나님을 사랑하고 눈물을 흘리며 찬송을 불렀고 주님 없이는 살 수 없다고 간증하였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힘을 다하여 헌금을 냈으며 피곤한 가운데도 정규예배에 빠지지 않고 참석했으며 한때는 새벽기도도 열심히 했던 자들이다. 지금은 하나님을 믿지만 교회에는 나가고 싶지 않다는 고백과 함께 슬픈 눈물을 흘리는 자들이다.

   한국 교회는 이 사람들을 책임져야 할 것이다. 믿음 좋은 집사님들을 헌금의 액수로 판단하고, 그들의 직업으로 판단하고, 사회적 수준으로 판단하는 냄새나는 기독교는 개혁되어야 한다. 그들의 마음속에 지옥이 있는지 조차도 알지 못하는 빈 깡통인데 웬 감투는 그렇게도 많은지!

   얼마 전 필자가 만난 구도자는 아무것도 모르고 하나님을 믿어 볼까 하여 교회에 출석하였는데 얼마 나가지 않아서 집사를 하라고 하여 혼비백산하고 놀라며 못하겠다고 하니, 왜 못하느냐고 묻더란다. 그는 말하기를 내가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데 무슨 집사를 한단 말인가 하니, 집사 직분을 하다보면 다 알게 된다고 하였단디. 마지못하여 집사를 하고 있는데 그때부터 직접, 간접 방법으로 헌금을 강요하기 시작하여 마음속에 부담을 갖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더 고통스러운 것은 나 자신의 신앙도 감당하기 힘들고 이제 불과 몇 년 다녔지만 무엇이 무엇인지 모르겠는데 구역장으로 임명하여 가르치라 하니 참으로 힘들고 어려워서 하루하루 버티기가 고통스러웠다고 했다.

   예수 믿는 것은 기쁨이요 안식이라 하는데 나는 왜 이렇게 예수 믿기가 힘든가. 차라리 하나님도 십게명도 몰랐을 때는 평안하게 살았는데 어설피 알고 보니 버릴 수도 없고 따라갈 수도 없고 눈물의 나날을 보내다가 결국은 결심하고 하지 않아도 될 이사를 하면서 교회를 졸업하였다고 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기독교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생각하여 보자. 서두에도 말했듯이 믿음이 좋다는 말은 성경에 없는 말이다. 무슨 믿음이 좋은 믿음이 있고 나쁜 믿음이 있는가. 이것은 사단이 교묘하게 속이기 위하여 만들어낸 단어가 분명하다. 오늘날 수많은 신자들이 이 단어에 속아서 자신은 하나님을 잘 믿으며 구원을 받았으며 틀림없이 천국에 간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한 사단의 속임수다. 왜 속임수인가?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믿음이 좋다는 사람들의 상태는 사실상 믿음이라고 하는 포장 속에 잘 감추어진 행위들이다. 그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깨달음과, 깨달음으로 인한 변화와 성장 속에서 신앙의 인격으로 말미암은 삶의 모습이 아니고, 믿어보겠다고 뛰어들어 잘 믿으려고 열심히 뛰어다니는 행위에 불과한 것이다.

   믿음은 진리에 근거해야 한다. 진리는 영원히 변하지 않기 때문에 진리에 근거한 믿음은 상황에 따라서 흔들리지 않는 것이다. 생각하여 보라. 영원한 멸망의 지옥에서 우리를 건지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단번에 용서하여 지옥에서 건져주신 은혜를 깨달은 그리스도인이 어찌 변할 수 있는가. 그 은혜의 복음에 기초하여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며 모든 실족케 하는 일을 극복하고 어려운 환경에서도 주님을 섬겨 나가는 것이다.

   그러나 행위에 붙잡힌 사람들은 그들의 상태가 좋을 때는 천국에 소망을 두지만 그들의 신앙 상태가 나빠지면 곧 무너질 수밖에 없다.

   최근에 60여년 신앙생활을 한 여인이 구원을 받았다. 필자가 그녀에게 묻기를 "지금 죽으면 천국에 갈 수 있는가, 아니면 지옥에 갈 것인가" 물었다. 그의 대답은 "내 지은 죄가 많은데 어떻게 천국에 가겠는가" 하는 것이었다. 필자는 믿음이 좋다는 것과 믿음이 있다는 것의 차이를 설명하며 성경이 말하는 십자가 속죄를 증거하였을 때 그녀는 크게 기뻐하며 구원을 받았다. 그는 말하기를 "내 신앙생활 60년은 헛것이었으며 내가 이제야 천국에 가게 되었다"고 기뻐하였다. 지금 그녀는 주님 나라에 가고 없지만 그녀의 외침을 한국교회는 새겨들어야 할 것이다.

   성경은 여기에 대하여 잘 말해주고 있다.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라디아서 2:16하).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갈라디아서 3:10상).

   이와 같은 말씀에서 보는 것처럼 행위에 잡혀서 고민하고 갈등하는 신자들은 구원받지 못한 것이 분명하다. 믿음은 행위가 아니요 사실에 근거를 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죄로 말미암아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불쌍한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셔서 나의 모든 죄를 해결해 준 사실을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 것이다. 여기에는 우리의 행위가 1%도 포함되지 않는다. 다만 이 사실을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 여기에는 아무런 조건도 없다. 우리들의 수고는 더욱 없다. 온전한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

그런데 필자가 슬프게 생각하는 것은 믿음이 좋다는 어정쩡한 말에 속아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자기도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고 말은 하면서 실상은 행위에 잡혀 지옥으로 가고 있다는 것이다. 필자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그들이 자신의 실상을 깨닫지 못하고 이와 같은 사실을 지적해주는 필자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믿음 좋은 집사님들이여, 여러분은 정말 구원받았는가? 이렇게 물으면 "구원받았다. 그리고 지금 행위를 하고 있는 것은 구원을 받았기에 하고 있는 것이다"고 강변할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알고 있다. 그대들의 뒤범벅된 신앙상태를... 어디까지가 믿음이고 어디까지가 행위인가 자신도 분간 못하고 있음을... .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로마서 4:5).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분명하니 이는 의인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였음이니라"(갈라디아서 3:11).. 

  

Posted by 행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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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희믿음에 있는가

                                        시험하고 확증하라


                                           돈으로 천국을 사려는 신자들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라"(누가복음 16:14).


   오늘날 한국의 기독교가 몽땅 바리새인이 되었다고 하면 지나칠까? 지나치다 할 것이다. 왜냐하면 진실하게 살고자하는 목자들이나 신자들도 있으니까. 그러나 왠지 그런 경우는 가뭄에 콩 나듯 드물고 모두가 바리새인이 되어 버린 것 같은 생각에 아픈 가슴을 어찌할 수가 없다.

   예수께서 오시기 700년 전에 이사야 선지자는 "너희가 돈 없이 팔렸으니 값없이 속량되리라"(이사야 52:3) 하였거늘, 분명히 말하거니와 오늘의 한국 기독교에는 돈으로 천국을 사는 일이 벌어졌다. 물론 그들도 값없이 의롭다함을 얻으며, 값없이 구원받는다고 가르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가르친들 무엇 하랴. 현실은 돈 없으면 예수를 믿을 수 없는 세상인데...

   좀 심하게 말하자면 예수님을 머리요, 주인의 자리에 앉혀야 할 교회가 예수님을 몰아내고 돈을 그 자리에 앉혀 놓고 있는 현실이다. 돈에 의해서 교회의 직책이 정해지고 직분과 질서가 정해진다면 기가 막히지 않는가?

   세상의 타락을 배금주의라 하여 돈에게 절하는 풍토를 말하지 않는가? 작금의 기독교 상황은 돈이 교회 주인이요, 돈이 하나님이요, 돈이 천국 가는 차표가 된다.

   어떤 구도자는 교회에 나갔다가 놀라서 그만 두었다고 고백하였다. 왜냐고 물으니 그 대답이 슬프다. 모름지기 하나님 말씀을 듣고 예수 믿어보고자 참석하였는데, 상당 시간 헌금에 관한 광고를 하더니 또 한 사람 한 사람 헌금자의 이름을 발표하는데 나중에는 시간에 쫓겨서 정작 말씀은 짧게 끝나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 기막힌 모습을 보고 그는 말했다. 자기는 불우이웃을 도울 때도 이름을 숨기고 도왔다는 것이다. 이 구도자는 교회를 이상한 단체로 보고 있었다.

   세상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모든 부정한 죄악에는 돈이 개입되어 있다. 돈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인격이 썩고, 양심이 썩고, 행동이 썩어간다. 돈으로 사람을 팔고 사고, 돈 앞에서 자존심도 던져버리고, 심지어 아내나 자식들까지도 팔아넘기는 무서운 세상이다. 인간 세상의 모든 계급이 돈에 의해서 결정되고, 인간 사회의 모든 체계가 돈으로 결정되지 아니한가. 공산주의는 돈을 공동관리 하자는 것이요, 자본주의는 개인관리 하자는 것 아닌가.

   국제질서도 돈에 의해서 결정되지 아니한가. 미국의 힘은 돈에 있다. 큰 경제력으로 세계를 지배하지 않는가. 일본은 인도보다 작은 나라지만 돈이 있으니 큰 소리 치고 있지 아니한가. 돈으로 모든 질서가 결정되는 세상, 돈에 의해서 우방이 원수가 되기도 하고, 원수가 우방으로 바뀌기도 한다. 세상의 구조는 돈으로 말미암아 엮어져 있다.

   돈은 사람을 추하게도 만들고 귀하게도 만들며, 강하게도 하고 약하게도 한다.

   돈이 교회를 정복했다. 돈이 교회를 농락했다. 돈에 의해서 교회가 무너졌다. 부하든지 가난하든지 상관없이 중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진실이 주님의 뜻을 순종하는 신실한 신자가 평가받는 교회가 되어야 할 터인데, 헌금 실적이 어떠하냐에 따라서 평가되고 있는 현실이 아닌가. 이것은 교회의 구조적인 문제도 있고, 지도자들의 인격적인 문제도 있다.

   필자는 수십 년간 목회를 해오면서 한번도 기명헌금을 강요한 적이 없다. 언제나 한결같이 무기명으로 헌금하게 하였다. 예배당 건축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큰 돈이 필요해도, 순수한 무기명 헌금으로 빚 없이 예배당을 완공하여 하나님께 드렸다.

   성경에는 물질과 연관되어서 하나님의 책망을 받거나 심판을 받는 경우가 많다.

   여호수아 7장 1절 이하에 보면 아간이라는 사람이 몰래 하나님의 물건을 도적질하다가 심판 받는 장면이 있다. 그는 물질에 대한 욕심 때문에 하나님의 것을 두려움이 없이 훔쳤다가 무서운 심판의 형벌을 받았다.

   열왕기하 5장을 보면 게하시라는 사람이 물질 욕심이 나서 자기의 주 엘리사를 속이다가 문둥병의 저주를 받게 된 일이 기록되어 있다.

   물질은 참으로 사람을 비참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신약에서도 가룟 유다가 은 삼십 냥에 예수님을 팔아넘긴 사실은 너무도 잘 알려진 사건이 아닌가? 오늘날 기독교 안에도 또 다른 가룟 유다들로 채워져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돈으로 진리를 팔고 사며, 양심을 팔고 사며, 인생을 팔고 사는데 결국은 영혼을 팔아먹는 타락한 오늘의 한국의 기독교여! 정신을 차려야 한다. 회개하여야 한다.

   가룟 유다의 경우는 얼마나 슬픈 모습인가. 돈에 눈이 어두워 예수님의 그 주옥같은 설교를 직접 듣되 3년 동안을 듣고도 결국은 지옥에 갔으니, 돈이 얼마나 무서운 사단의 무기인지, 끔찍하고도 끔찍하다. 이 돈이 한국의 기독교를 잡아먹고 있는 것이다. 가룟 유다는 돈에 의해서 귀가 막히고 눈이 가려지고 모두가 막혀 지옥에 들어갈 때까지 깨닫지 못하다가 지금 지옥에서 깨닫고 울어본들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기독교인들이여! 부정하게 번 돈을 하나님 앞에 몇 푼 바치면 하나님이 갸륵하게 여기어 죄를 용서해 줄 것 같은가? 세상의 더러운 돈 몇 푼으로 천국을 사려는 간사하고 악한 무리들이 예배당 안을 채우고 있으니 슬픈 현실이 아닌가.

   가룟 유다는 예수께서 그 많은 기적을 행하실 때 현장에서 보지 않았던가? 물위를 걷는 기적, 죽은 자를 살리는 기적, 소경의 눈을 뜨게 하는 기적 등 수많은 기적들을 그의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인간의 지혜로, 힘으로 불가능한 역사, 상식을 초월한 놀라운 기적을 현장에서 보고도 주님을 믿지 못했다. 돈에 눈이 멀면 이렇게 되는 것이다. 오늘의 기독교가 돈으로 말미암아 마비상태가 되었는데, 얼마나 비참하고 불쌍한 모습인가!

   집사, 권사, 장로 취임하는데 일정한 돈을 내어야만 하고, 모든 행사나 절기에 특별헌금을 해야 하며, 모든 명목으로 만든 헌금들을 해야 한다. 그것도 모자라서 약정헌금을 내야하며, 월정헌금, 주정헌금을 내야하며, 그 외에도 공사석에서 필요에 따라 돈을 써야만 한다. 현실이 이러하니 자연적으로 돈 없는 사람은 교회에서 행세할 수가 없고 멀어지다가 떨어져 나가게 되는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어떤 이가 있다. 그는 오래 전에 헌금을 약정했는데, 사업이 망하여 낼 수가 없게 되었다. 집도 처분하고, 변두리에 초라한 집을 빌려 사는데 거기까지 약정헌금을 받으러 찾아오는 것도 보았다. 세금 징수하듯이... .

   이와 같은 슬픈 현실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교회가 돈을 많이 거두어 엄청난 규모의 예배당을 짓고 기업적으로 움직여 몇몇 사람의 배나 채우고 가난한 자들에게는 약간의 생색내기 봉사를 한다면 이게 될 말인가?

   하나님께 쓰임 받은 종들을 잘 살펴보면 물질에 대해서 청렴하였음을 알 수 있다. 아브라함이 그러했다. 그는 소돔성의 인민과 재산을 연합군의 포로된 가운데에서 되찾아왔을 때 사람 외에 모든 재산을 가지라는 제의를 거절하고, 실오라기 하나도 취하지 않았다. 그는 치부하지 않았으며, 하나님의 하신 역사를 돈과 바꾸려 하지 않았다. 그는 분명 영적인 사람이었다. 하나님의 선물을 돈으로 계산할 수 없는 것이며, 하나님의 역사에 돈이 개입되면, 하나님의 하신 일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어리석음의 행동임을 알았던 것이다. 어찌 성령의 역사를 돈으로 계산하랴(창세기 14장 참조).

   엘리사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는 나아만 장군의 문둥병을 고쳐주었다. 나아만이 사례의 뜻으로 엄청난 양의 물질을 주었지만 거절했다. 그는 진실로 하나님의 사람이요, 영적인 사람이었다(열왕기하 5장 참조).

   신약성경에도 하나님의 선물을 돈으로 사려던 어리석은 사람이 있었다(사도행전 8:14~24). 베드로와 요한이 안수함으로 성령 세례받은 것을 보고 시몬이라는 사람이 돈을 들여 자기도 안수하는 사람이 세례를 받도록 해달라고 요청하다가 사도들에게 무섭게 책망받은 장면이 있다. "베드로가 가로되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줄로 생각하였으니,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사도행전 8:20).

   사랑하는 독자여! 돈으로 직분을 사고, 돈으로 교회 안에서 일정한 위치를 확보하고, 돈으로... , "돈! 돈! 돈!" 돈으로 하나님의 선물들을 농락하다가 돈과 함께 망하여 지옥에 가면 어찌 하시려는가?

   회개하라. 오늘의 기독교 상황은 회개하지 아니하면 돈과 함께 망하게 되어 있다. 진정으로 회개하여 은혜로 주신 선물을 받으라.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에베소서 2:8)고 하셨다. 구원은 조건 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죄로 말미암아 지옥에 던져질 불쌍한 죄인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은 아무 조건 없이, 온 인류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하셨다.

   이렇게 말하니 어떤 집사님은 "믿는 자들에 한하여 용서하지 않았는가" 하는데, 성경은 모든 죄인들의 죄를 일방적으로 이미 용서하셨다고 선언하셨다. 하나님을 모르는 죄인들까지도... .

   "다 이루었다"(요한복음 19:30 참조).

   모든 죄, 과거, 현재, 미래의 죄가 이미 다 용서되었다. 이 사실을 믿음으로 천국 가고, 믿지 아니함으로 지옥에 던져지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로마서 3장 23,24절에서도 반복하여 말하고 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값없이"라고 하지 아니하였는가. 예수님 당시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해졌다고 하였는데, 오늘의 현실은 부한 자들, 넉넉한 자들에게만 복음이 전해지는가? 도대체 무슨 일인가?

   누가복음 17장 11절 이하에 보면 열 명의 문둥병자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들이 예수님 앞에 나왔을 때 다 병이 나았다. "제사장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는 말씀을 순종하러 가다가 나았는데, 그 중 한 명만 돌아와서 예수님께 사례하였다. 그 때 예수님께서 이 사람에게 말씀하시기를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하셨다. 아무것도 드릴 것 없는 이 불쌍한 문둥병자, 그가 주님 앞에 단순히 회개하고, 사례함으로 구원받았다. 그의 행위는 전혀 참작되지 아니하고, 선물로만 구원받았다. 물질은 더욱 아무것도 없는 불쌍한 이 사람 문둥병자가 선물로 구원을 얻은 것이다.

   이 글을 읽는 그대가 만약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죄를 통하여 모든 죄를 다 용서받음으로 이제는 죄인이 아니라 의인이 되었으며,마귀의 자녀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실을 깨달았다면 구원받은 것이다. 멸망의 지옥에 가지 않고 천국에 가게된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구원이다. 천국을 가는 데는 아무 조건도 물질도 행위도 상관없다.

   이렇게 값없이 구원받은 성도가, 지옥에서 건짐 받은 너무도 놀라운 사실을 깨닫고 지옥에 갈 뻔했던 끔찍한 사실을 생각하며, 고마운 마음으로 성의를 표시하는 헌물, 헌금, 봉사 이것이 진정한 헌금이요, 신앙이다. 제도에 의해서 내는 헌금이 아니고, 주변의 분위기와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고, 하나님이 두려워서가 아니고, 구원에 의해서 드리는 헌금이다. 나를 영원한 멸망의 지옥에서 건져내기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은혜를 평생 갚아도 다 갚지 못하여 눈물로, 행위로, 물질로 섬기는 섬김, 이것이 진정한 헌신이요, 헌금인 것이다.

   헌금을 내지 않으면 하나님께 저주받거나, 사업 망할까 무서워서 드리는 헌금, 복 받기 위해서 조건적으로 드리는 헌금, 이것들은 다 가증한 것이다. 우주와 바다와 만유를 지으신 하나님이 무엇이 부족하여 헌금을 강요하겠는가.

   "깨어라, 정신을 차려라." 사람에게 속지 말라. 우둔한 자들이여! 평생 예수 믿고 목숨 바쳐 죽도록 충성하고 지옥에 가면 얼마나 원통하겠는가. 깊이 생각하시기 바란다.

   성경은 좁은 문을 이야기하고 있다. 오늘날 대다수가 쫓아가는 이 넓은 문을 따라가다가 지옥에 떨어지는 날 그대들의 눈물과 통곡과 비참한 처지에서의 후회는 영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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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종교로부터의 자유


                        자유주의로 하나님을 떠난 기독교인들이여!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라디아서 5:1)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이유를 여러 측면에서 조명할 수 있다고 본다. 그 중에  예수님께서는 인생들에게 자유, 즉 참된 자유를 주시려고 오셨다. 예수님께서 인생들에게 주시고자 하셨던 자유의 본질이 무엇인가? 이 문제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언급하셨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한복음 8:32).

   이 말씀이 가리키는 바와 같이 참 자유는 진리를 통하여 나는 것이며, 진리 안에서 나는 것이다. 진리를 벗어난 자유는 참된 자유가 아니다. 그러므로 이 진리의 본질과 방종의 모습을 고찰하여 우리의 신앙의 지표로 삼고자 한다.

   진리는 무엇인가? 우선 쉽게 말하여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우리 조상 아담은 에덴에서 범죄하기 이전에 하나님 안에서 자유를 누리며 살았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자유를 주셨던 것이다. 그들은 모든 만물을 다스리고 정복할 자유를 하나님께 받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지 말라고 하셨고 따먹은 후의 결과에 대해서도 가르쳐 주셨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창세기 2:10).

   그들은 말씀 안에서 자유를 받았다. 그들은 말씀을 통하여 자유를 받았던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 국민들은 자유가 있다. 그들은 자유를 보장받고 살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나라 법의 테두리 안에서의 자유이다. 법을 벗어나 자기 욕심대로 살아가는 것은 방종이지 자유가 아니다. 아담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주님이 주신 말씀(법)의 테두리 안에서 자유를 부여받은 것이다.

   어떤 종파에서는 선악과 자체에 무슨 독이 있는 것처럼, 혹은 그 자체에 무슨 의미가 있는 것처럼 가르치는 것을 들었는데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심지어 어리석은 종파의 지도자는 복숭아가 선악과라고 하며 먹지 말라고 가르친다고 들었는데 바보스럽고 우스운 일일 수밖에 없다. 선악과 자체에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고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하신 말씀이 중요한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어떤 부모가 아이에게 학교에 내야할 납부금을 1,000원 주었는데 그 아이가 그 돈을 학교에 내지않고 마음대로 과자를 사먹었다 하자. 그 아이가 부모에게 혼나고 매를 맞을 때 돈 때문에 맞는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다! 그 부모의 말씀을 거역하고 자기 욕심과 고집대로 한 것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자유가 있다. 그러나 그분의 말씀안에서만 자유가 있는 것이다. 그러면 서두에서 요한복음 8장 32절의 "우리를 자유케 하리라" 하신 주님의 말씀을 소개한 바 있는데, 성경에는 수많은 진리가 있어 이 진리를 깨달은 사람들을 자유케 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요한 복음 8장에서 몇 가지 언급하신 진리와 그에 따르는 자유를 언급하고자 한다.


   첫째로, 요한복음 8장 1~11절에 나오는 진리는 "예수님은 죄인을 정죄하러 이 세상에 오시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정죄에서 자유를 주시기 위하여 오신 것"을 증거한다.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한 여인은 율법적으로 볼 때 정죄받아 마땅한 죄인이다. 그는 재판 절차 없이 당장에 죽여도 할 말이 없는 죄인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유대인의 정죄를 물리칠 뿐만 아니라 자신도 그 여인을 정죄하지 않으셨다. 앞서 예수님은  요한 복음 3장 17절에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혹 정죄)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셨다. 주님은 3장의 이 약속을 8장에서 이루셨다. 예수님이 인생을 정죄하러 오시지 않았음이 분명한 진리이거늘 필자가 만나본 오늘의 기독교인들이 "죄에 대한 정죄"에 사로잡혀 고통하고 있는 모습은 무슨 일인가?

   필자도 17년전 우리나라에서 제일 크다는 교파에 속하여 날마다 "정죄감" 에 사로잡혀 예배당에만 가면 울고 통곡하는 것이 일이었고, 새벽기도에 가서 탄식 기도로 울면서 소리지르므로 이웃집 이방인들을 괴롭혔던 사람 중의 한 사람이었다. 실제로 금일의 수많은 눈뜬 소경 목자들은 예배당에서 많이 울고 통곡하는 사람들이 믿음 있는 사람이라고 선전하며 인정하며 가르치고 있다.

   물론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인 것을 깨닫고 통곡과 탄식하는 심령으로 죄에서 돌이키고, 예수님의 십자가 용서를 깨달아 구원받는 것은 매우 중요한 필수다. 그러나 이러한 구원의 역사는 개개인의 일생에 한번 있는 것이다.

   날마다 예배당에 가서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주소서" 하고 통곡하는 것은 "정죄하러 오시지 않은 예수 그리스도" 라는 진리를 깨닫지 못한 불쌍한 거짓 그리스도인이다. 그들의 지도자는 소경이요 거짓 목자임이 분명하다.

   찬송가에도 "죄에서 자유를 얻게 함은 보혈의 능력, 주의 보혈" 하고 찬송하고 있지 아니한가!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로마서 8:1~2).

   이 말씀처럼 주님이 우리를 정죄에서 해방시켜 주시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는데 왜 아직도 정죄에서 자유를 얻지 못하는가?

   오! 불쌍한 소경 목자들이여, 소경 양들이여, 정신을 차리라! 정신을 차리라! 말씀을 읽고 말씀으로 돌아가라. 성경에 "영원한 속죄" "완전한속죄"가 분명하게 있거늘 왜 가르치지 못하는가? 왜 믿지 못하는가?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히브리서 9:12).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히브리서 10;14).

   그대들은 말씀으로 말미암는 자유를 가르치지 아니하고 그대들의 생각대로 가르치므로 양들을 지옥으로 끌어가고 있지 아니한가!


   둘째 8장 21절에 나오는 진리를 주목해 볼 수 있다. 그것은 죄인이 주님을 찾다가 죄 가운데서 죽고 그 후에는 주님 곁에 가지 못하고 지옥에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나의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요한복음 8:21).

   금일의 수많은 소경기독교인들이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열심히 따르며 주님 때문에 죽을 준비는 갖추고 있으나 정작 자신의 죄 문제는 분명히 해결하지 못하고 조 가운데서 고민하고 정죄하고 눈물 흘리고 있는 모습은 얼마나 슬픈 현실인가? 이 사람들은 하나님을 짝사랑하는 달콤한 가운데 있다가 결국은 멸망의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하나님은 그를 받아주지도, 받아줄 수도 없는데 꿈 많은 소녀처럼 천국의 소망에 부풀어 있다가 지옥에 던져지는 불쌍한 기독교인들이 우리 시대에 얼마든지 있다. 이글을 읽는 그대도 믿음을 점검해 보기 바란다(고린도후서 13:5).

   이들의 문제는 23절에 있는 대로 세상에서 죄 가운데 난 것이므로 근본적으로 죄 가운데 있다. 또한 34절에 있는 대로 행동으로 죄를 범하므로 죄의 종이다. 그러므로 근본적으로나 행동으로나 죄인이며 죄 속에서 죽어 지옥에 던져지는 순서를 따르고 있는 것이다.

   생각해 보라. 주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죄의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라고 부르고 있는데(마태복음 11:28) 왜 죄의 짐을 예수님께 내려놓지 않고 있는가?

   천국에는 죄가 있는가? 죄 있는 자가 천국에 갈 수 있는가? 왜 그대는 세상 죄(당신의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를 포함)를 다 지고 가신 예수님 앞에 나아가서 죄 문제를 해결하여 죄 용서함 받지 아니하는가?

   당신의 죄가 "호리라도 남김없이"(마태복음 5:26) 다 갚아지기 전에는 결단코 지옥을 피할 수 없다. 죄 가운데서 죽은 기독교인들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지옥에 모일 것이다.

   오! 그대여, 속히 이 지옥에서 당신의 영혼을 구원하라. 건지라. 주님께서 이 일을 위해서 이 땅에 오셨나니 주님의 십자가 속죄를 속히 받아들이고 영생의 소망을 가지라.

   예수님은 죄의 종이 된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시려고 이땅에 오셨다. 금일의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죄에서 자유를 얻지 못하고 죄 가운데 살면서도 자신의 분수를 모르고 천국 갈 것으로 착각하는 모습을 볼 때 필자는 흥분하지 않을 수 없다.

   35절에 보면 "죄를 범하는 자는 죄의 종" 이며 36절에는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고 말씀하시고 있다.

   죄의 종에서 자유를 얻으라! 이것은 분명히 성경에 기록된 불멸의 진리다. 이 불멸의 진리가 인생들을 멸망의 지옥에서 건지는 열쇠요 그대 자신이 이 죄의 종에서 해방되는 것은 44절의 "마귀의 자식" 에서 해방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자식이 아비를 따라다니는 것처럼 그대가 죄에서 해방받지 못하였다면 마귀의 자식이니 마귀를 따라 멸망의 지옥에 던져질 것이다.


   셋째, 8장 58절에 나타난 진리를 살펴보자. 우리를 죄와 멸망의 지옥에서 해방시키는 이 모든 일은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런데 이 예수님은 아브라함이 있기 전부터 있었던 분이라고 소개되고 있다. 실제 이 말씀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은 예수님보다 2,000여 년 전에 이 세상에 있었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2,000년 후에 세상에 오신 예수님이 아브라함보다 먼저 있었다는 것은 육신적으로 이해가 불가능한 말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영원 전부터 계시다가 이 세상에 오신 분이시며, 그분은 영원히 계시는 분이시고, 그분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이 창조된 것이며, 그분으로 말미암아 세상이 운행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분은 만유를 붙잡고 계신 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분은 바로 창조주 하나님 여호와이시다. 창조주 하나님이 육신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이다. 창조주께서 그대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그분이 영원히 계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그분을 통해서 구원받은 우리의 구원도 영원하다. 구원은 종종 소멸되었다가 다시 받는 것이 아니고 한 번 받으면 영원하다. 왜냐하면 우리의 구원을 이루시고 보장하신 주님이 영원하시기 때문이다.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한복음 10:28).

   이것은 구원을 잃을까 걱정하는 자들을 해방시키는 놀라운 진리이다. 금일의 많은 기독교인들이 열심히 믿어서 구원을 얻고 그 구원을 잘 보존하여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들이 구원을 잃을까 불안해하는 것은 얼마나 슬픈 일인가?

   구원은 십자가 속죄로 말미암아 단번에 얻는 것이며 우리가 그것을 보전하기 위하여 고생할 필요가 없다. 영원부터 계신 주님께서 그대의 모든 죄를 십자가에서 다 용서하심으로 그대를 구원하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살아 계셔서 영원히 그대의 구원을 보장하셨다. 그대는 이제 모든 정죄와 지옥에서 완전한 구원을 얻었다.

   오! 그대여, 이 놀라운 진리를 통해서 그대가 자유를 얻었을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요한복음 8:3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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