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믿음에 있는가

                                시험하고 확증하라


                                    넓은 길로 가는 신자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마태복음 7:13,14)


   성경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무섭고 놀라와 가슴이 떨리는 내용이 많다. 앞에 기록한 말씀도 그 중의 대표적인 말씀이다. 이 땅의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으로 인하여 살고 있지만 그러나 진정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은 지극히 적은 숫자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성경은 이에 대해서 수 없이 이야기하고 있다. 그 중에 앞에 기록한 말씀은 너무나도 분명하게 하신 말씀이다. 이 말씀을 계속 읽어나가면 거짓 선지자에 관한 말씀으로 연결되어져 있다. 그 거짓 선지자들은 이 시대 기독교의 거듭나지 못한 지도자들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위하여 전 생애를 드리며 고생하며 충성을 다 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들의 대부분은 거짓 선지자요, 멸망의 자식이라고 성경은 경고하고 있다.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으며 찾는 이가 많다는 말씀이 두렵지 아니한가. 생각하여보라.

   기독교의 지도자로서 소경의 눈이요, 길 잃은 자의 안내자요, 상심한 자의 위로자요, 양들의 목자라고 자처하며 살아왔던 사람들이 멸망의 지옥 불에 떨어져서 끔찍한 고통을 당할 것이다. 그들 자신은 (지옥을 진실로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멸망의 지옥에 떨어지리라고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자신은 하나님을 향하여 충성을 다했기 때문에 천국이 있다면 들어감은 물론이고 각종 면류관을 받게 되리라고 기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멸망의 지옥에 떨어졌다. 참으로 슬픈 일이다. 무서운 일이다.

   이 글을 읽는 그대가 누구인지 필자는 모르지만 이 글을 통하여 자신을 점검해보기만 한다면 하나님의축복이 그대에게 함께 할 것이다. 영생을 얻게 될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은 큰 교회, 유명한 교회, 유명한 목사님들이 목회 하는 교회, 큰 교파에 속하여 있는 자신을 스스로 위로한다. 그와 같은 교회에 속하면 아무 탈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필자는 대규모 교회의 유명한 목사님을 자랑하며 자신은 당연히 천국에 갈 것이라고 생각하는 불쌍한 소경을 수없이 만나보았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들을 만나보면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지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고 자기의 경력이나 자기가 속한 교회의 자랑을 늘어놓기 일쑤이다. 거짓 목자들은 거짓 목자로 살았기 때문에 멸망의 지옥에 가는 것이 당연하지만 그들을 따라가다가 지옥 불에 들어가는 사람들을 어찌 한단 말인가.

   그들은 왜 성경에 대해서 무지하냐고 물어보면 우리 교회 목사님이 성경을 잘 가르치고 훌륭한 믿음으로 인도하니 걱정이 없다는 것이다. 직접 그렇게 말하지 않을지라도 그런 태도로 이야기한다.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인가.

   다시 말하건대 이와 같은 거짓 목자가 참 목자보다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참된 하나님의 종은 정말 찾아보기 힘든 것이 기독교 역사요, 우리의 현실이다.

   거짓 목자 밑에서 배운 불쌍한 양들은 목자를 잘못 만나서 지옥에 떨어진다. 이 얼마나 슬픈 일인가. 혹자는 필자에게 말하리라. 어찌 자신 있게 이와 같이 말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성경이 말하고 있지 아니한가. 구원의 진리는 비밀이라고, 비밀은 여러 사람이 알고 있는 것이 아니다. 보편적인 지식도 아니다. 극히 적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이 비밀이다. 성경은 구원을 비밀이라고 말하고 있다.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고전 2:7).


   이번에는 성경을 중심으로 구원 받은 자의 적음을 알아보고 그 이유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첫째는 서두에 기록된 말씀이다. 이 말씀을 하실 때에는 예수님 사역의 초기라고 생각이 된다. 예수님은 세상에 오셔서 참된 진리를 증거하며 불의를 지적하고 선한 양심으로 가르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추종하지 아니할 것을 이미 아셨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무리들이 있었지만 그러나 십자가의 현장에서 보듯이 주님을 믿고 따르는 무리들은 적은 무리였다.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거부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임에 동조하였다.

   두 번째로는 누가복음 17장에 기록된 말씀이다. 26절에 보면 마지막 시대가 노아의 시대와 같다 하였다. 그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세상에 취해 있었다. 그들은 노아의 경고를 무시하고 복음을 받아들이지 아니하였다. 그들은 결국 멸망의 지옥에 떨어졌다. 그들 중에 구원받은 사람이 몇 명인가. 성경은 겨우 여덟 명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베드로전서 3:20).

   얼마나 떨리는 말씀인가. 겨우 여덟 명이라고 하지 아니한가. 혹자는 그 당시 인구를 5억 정도로 이야기한다. 정확하지는 않겠지만 그 말이 사실이라 한다면 5억의 인구 중에서 겨우 여덟 명이 구원받았다. 기가 막히지 아니한가. "겨우"라는 말에 주목하라.  오늘의 한국 기독교에서  구원받은 사람이 얼마나 될까. 생각보다는 너무 적으므로  "겨우"라는 단어를 쓸 수밖에 없지 아니할까. 필자는 믿는다. 성경을 통해서 알고 있다. 지극히 적은 수가 구원받은 것을... .

   누가복음 17장에는 또 다른 말씀도 있다. 롯에 관한 말씀이다. 불과 유황으로 멸망당하는 소돔과 고모라에서 극적으로 건짐 받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오늘날 지옥 유황불에서 구원받는 성도들의 이야기이다. 의인 열 명만 있어도 멸망시키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그들에게 임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큰 성읍에서 구원받은 자가 4명이지 아니한가.

   여리고 성이 무너질 때에 몇 명이나 건짐 받았는가. 기생 라합과 그의 가족뿐이지 아니한가.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마지막 시대에도 마찬가지이다. 오늘의 한국에 천만이 넘는 기독교인들이 있다고 말한다. 그들 중에 과연 얼마나 구원받을 수 있을까? 필자는 말한다. 오늘날 기독교 범주 안에 있는 사람 중에 삼분의 일이라 하여도 성경은 이를 수용하지 못한다. 필자가 어떻게 감히 숫자를 다 말할 수 있을까마는 성경의 전반적인 내용은 극히 소수가 구원받을 것을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현상은 왜 왔을까?

   첫째는 구조적인 모순에 있다. 예수님은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하였거니와 오늘날 교회 일꾼들을 양성하는 신학교에서 거듭남을 체크하고 있는가? 필자가 만나본 신학생들의 대부분은 거듭남이 무엇인지 조차 알지 못하고,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알고 있는 후배 목회자는 신학생 시절에 거듭났는데 동료들에게 거듭났느냐고 물어보고 다니다가 이상한 사람 취급받고 교수님에게까지 왕따 당한 슬픈 간증을 이야기하고 있다.

   진정으로 참된 하나님의 종을 양성하려면 우선 거듭남부터 점검해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의 현실은 어떠한가. 그냥 신학교에 지원하면 합격하여 졸업하고 일정한 자격을 갖추면 성직자로 세움을 입는다. 거듭나지 못한 일꾼은 거듭나지 못한 양들을 만들어내고야 말 것이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진다고 주님이 친히 경고하셨다.

   또 다른 나의 친구 목회자는 집사로 재직시에 구원을 받았다. 문제는 이와 같이 구원이 무엇인지도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집사로 임명되어 교회 일을 참여하고 있으니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라. 디모데전서를 읽어 보라. 집사는 얼마나 말씀 충만, 성령 충만하였는가.

   두 번째로 오늘날의 교회가 지향하는 목표에 문제가 있다. 한국의 교회 대부분은 기복신앙에 잡혀 있다. 예수 믿어서 복을 받는다고 가르치고 있다. 필자가 얼마 전까지 휴대하고 다니던 교회 안내 전도지가 있었는데 제주도의 어느 교회에서 작성한 것이었다. "부자 되기 원하는 사람은 우리 교회로 오라! 교회 출석하여 도장 받아 오면 선물을 주겠다." 어떤 장로가 교회 명의로 내보낸 전도용 안내서였다. 노골적으로 예수 믿어서 부자 된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실제로 오늘날 수많은 교회 지도자들이 교회 헌금 잘 내고 십일조 떼어먹지 아니하며, 또한 열심히 충성하면 축복 받아 잘되고 부자 된다고 말하고 있다. 가난한 것은 축복을 받지 못하고 저주받은 것처럼 말하고 있는 것이다.

   또 건강에 관한 이야기도 있다. 예수 믿어서 병 낫고 건강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돌린다고 말한다. 실제로 병 고침 받기 원하는 자는 기도원으로 오라는 전단지를 심심찮게 본다. 물론 예수 믿는 사람이 부자 되는 것도 필요하고 건강한 것도 필요하다. 필자도 성도를 위하여 기도할 때 그와 같이 기도하기도 한다. 그러나 성경을 자세히 보면 그것이 목적이 아니다. 그러한 것들은 부수적이고 지엽적인 문제이다. 성경은 영원한 멸망의 지옥과 천국을 경고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통해서 거듭나지 아니하면 멸망의 지옥에 떨어진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이 성경의 핵심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신 목적이다.

   혹자는 이렇게 반박하리라. 나와 나의 동료 교인들은 다 천국을 믿으며, 천국에 갈 소망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것이다. 예수 믿고 천국 가는 것은 기본이 아니냐고 말할 것이다.

   실제로 많은 집사님들이 나에게 그렇게 반박하였다. 그래서 나는 그들에게 물었다. "집사님, 지옥이 있습니까?" 하니 그렇다고 하였다. 그래서 "정말 지옥이 있습니까?" 하고 되물었다. 그는 그렇다고 하였다. 그래서 또 묻기를 "지옥이 어떤 곳입니까? 어떤 사람이 갑니까? 여기에 대해서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얼버무렸다.

   오늘날 한국의 수많은 기독교인들의 문제점은 여기에 있다. 지옥을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믿는다고 말은 하지만 모르고 있다. 그들의 지옥에 대한 믿음은 막연하게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구체적으로 물으면 대답하지 못한다. 어떤 집사님은 끝까지 지옥을 믿는다고 주장하여 그렇다면 누구에게 지옥을 증거했느냐고 물으니 대답을 못하였다. 정말 지옥을 믿는 사람이라면 지옥을 경고할 것이다. 슬픈 일이다.

   강단에서 지옥을 전하지 않으니 양들이 지옥을 알겠는가? 지옥을 알지 못하니 그들은 구원을 알지 못하고 그 지옥 형벌에서 구원받은 적도 없다. 오래 전 예레미야 선지자는 거짓 목자와 그를 따르는 양들에 대해서 예언한 적이 있다.

   "이 땅에 기괴하고 놀라운 일이 있도다.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그 결국에는 너희가 어찌하려느냐"(예레미야 5:30,31).

   그 당시에도 하나님의 말씀과 관계없는 거짓 예언으로 백성들을 속이는 자들이 있었으며, 자기 취향에 맞는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들을 좋아하고 따르는 어리석은 백성들이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과 관계없는 불쌍한 사람들이었다.

   오늘날에도 성경의 중심 내용과는 관계없는 기복신앙을 전하여 복을 받기 위해서는 열심히 충성하며 헌금을 많이 내면 하나님의 큰 축복을 받게 된다고 양들을 속이고 있다. 양들은 그것을 좋게 여겨 천국의 소망과는 아무 관계없는 그와 같은 가르침을 따른다. 그들의 삶은 성경과는 아무 관계없는 죄악된 삶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사회생활에서의 문란한 삶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영적인 삶도 성경을 깨닫고 성경을 사랑하며 성경에서 능력을 얻고 성경을 전하며 성경이 가르치는 소망으로 인하여 기뻐하는 삶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일주일 동안 세상에 빠져서 적당히 살아가다가 주일날 헌금 좀 잘 내고 목사님 설교 듣고 지은 죄 회개하고 돌아오면 마음이 조금 평안해지며 위로를 받으니 그것이 신앙생활인줄 안다.

   사도행전을 보라. 초대교회 성도들이 그러하였는가? 그들이 그렇게 살았는가? 신앙의 깊이는 먼저 내적인 변화에 있다. 영원한 멸망의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비참한 죄인을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 공로로 모든 죄를 용서하여 천국에 갈 수 있는 자격을 주신 것이다. 모든 죄라는 말에 주목하기 바란다. 그대의 모든 죄가 다 용서된 것이다. 십자가의 능력은 여기에 있다.

   이제 결론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다. 마태복음 7장 21절 이하에는 많은 사람이 천국에 갈 것으로 생각하였다가 영원한 멸망의 지옥에 떨어지는 참담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그들은 천국에 갈 것이라고 생각하며 이 땅에서 죽도록 충성한 자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지옥에 떨어졌다. 얼마나 황당했겠는가? 얼마나 기가 막혔겠는가? 얼마나 놀랐겠는가?

   이 글을 읽는 그대는 이러한 비극에 빠지지 않기를 바란다. 진정 거듭난 소수의 무리만 천국에 이를 것이다.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누가복음 12:32).

Posted by 행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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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희믿음에 있는가

                                        시험하고 확증하라


                                           돈으로 천국을 사려는 신자들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라"(누가복음 16:14).


   오늘날 한국의 기독교가 몽땅 바리새인이 되었다고 하면 지나칠까? 지나치다 할 것이다. 왜냐하면 진실하게 살고자하는 목자들이나 신자들도 있으니까. 그러나 왠지 그런 경우는 가뭄에 콩 나듯 드물고 모두가 바리새인이 되어 버린 것 같은 생각에 아픈 가슴을 어찌할 수가 없다.

   예수께서 오시기 700년 전에 이사야 선지자는 "너희가 돈 없이 팔렸으니 값없이 속량되리라"(이사야 52:3) 하였거늘, 분명히 말하거니와 오늘의 한국 기독교에는 돈으로 천국을 사는 일이 벌어졌다. 물론 그들도 값없이 의롭다함을 얻으며, 값없이 구원받는다고 가르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가르친들 무엇 하랴. 현실은 돈 없으면 예수를 믿을 수 없는 세상인데...

   좀 심하게 말하자면 예수님을 머리요, 주인의 자리에 앉혀야 할 교회가 예수님을 몰아내고 돈을 그 자리에 앉혀 놓고 있는 현실이다. 돈에 의해서 교회의 직책이 정해지고 직분과 질서가 정해진다면 기가 막히지 않는가?

   세상의 타락을 배금주의라 하여 돈에게 절하는 풍토를 말하지 않는가? 작금의 기독교 상황은 돈이 교회 주인이요, 돈이 하나님이요, 돈이 천국 가는 차표가 된다.

   어떤 구도자는 교회에 나갔다가 놀라서 그만 두었다고 고백하였다. 왜냐고 물으니 그 대답이 슬프다. 모름지기 하나님 말씀을 듣고 예수 믿어보고자 참석하였는데, 상당 시간 헌금에 관한 광고를 하더니 또 한 사람 한 사람 헌금자의 이름을 발표하는데 나중에는 시간에 쫓겨서 정작 말씀은 짧게 끝나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 기막힌 모습을 보고 그는 말했다. 자기는 불우이웃을 도울 때도 이름을 숨기고 도왔다는 것이다. 이 구도자는 교회를 이상한 단체로 보고 있었다.

   세상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모든 부정한 죄악에는 돈이 개입되어 있다. 돈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인격이 썩고, 양심이 썩고, 행동이 썩어간다. 돈으로 사람을 팔고 사고, 돈 앞에서 자존심도 던져버리고, 심지어 아내나 자식들까지도 팔아넘기는 무서운 세상이다. 인간 세상의 모든 계급이 돈에 의해서 결정되고, 인간 사회의 모든 체계가 돈으로 결정되지 아니한가. 공산주의는 돈을 공동관리 하자는 것이요, 자본주의는 개인관리 하자는 것 아닌가.

   국제질서도 돈에 의해서 결정되지 아니한가. 미국의 힘은 돈에 있다. 큰 경제력으로 세계를 지배하지 않는가. 일본은 인도보다 작은 나라지만 돈이 있으니 큰 소리 치고 있지 아니한가. 돈으로 모든 질서가 결정되는 세상, 돈에 의해서 우방이 원수가 되기도 하고, 원수가 우방으로 바뀌기도 한다. 세상의 구조는 돈으로 말미암아 엮어져 있다.

   돈은 사람을 추하게도 만들고 귀하게도 만들며, 강하게도 하고 약하게도 한다.

   돈이 교회를 정복했다. 돈이 교회를 농락했다. 돈에 의해서 교회가 무너졌다. 부하든지 가난하든지 상관없이 중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진실이 주님의 뜻을 순종하는 신실한 신자가 평가받는 교회가 되어야 할 터인데, 헌금 실적이 어떠하냐에 따라서 평가되고 있는 현실이 아닌가. 이것은 교회의 구조적인 문제도 있고, 지도자들의 인격적인 문제도 있다.

   필자는 수십 년간 목회를 해오면서 한번도 기명헌금을 강요한 적이 없다. 언제나 한결같이 무기명으로 헌금하게 하였다. 예배당 건축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큰 돈이 필요해도, 순수한 무기명 헌금으로 빚 없이 예배당을 완공하여 하나님께 드렸다.

   성경에는 물질과 연관되어서 하나님의 책망을 받거나 심판을 받는 경우가 많다.

   여호수아 7장 1절 이하에 보면 아간이라는 사람이 몰래 하나님의 물건을 도적질하다가 심판 받는 장면이 있다. 그는 물질에 대한 욕심 때문에 하나님의 것을 두려움이 없이 훔쳤다가 무서운 심판의 형벌을 받았다.

   열왕기하 5장을 보면 게하시라는 사람이 물질 욕심이 나서 자기의 주 엘리사를 속이다가 문둥병의 저주를 받게 된 일이 기록되어 있다.

   물질은 참으로 사람을 비참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신약에서도 가룟 유다가 은 삼십 냥에 예수님을 팔아넘긴 사실은 너무도 잘 알려진 사건이 아닌가? 오늘날 기독교 안에도 또 다른 가룟 유다들로 채워져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돈으로 진리를 팔고 사며, 양심을 팔고 사며, 인생을 팔고 사는데 결국은 영혼을 팔아먹는 타락한 오늘의 한국의 기독교여! 정신을 차려야 한다. 회개하여야 한다.

   가룟 유다의 경우는 얼마나 슬픈 모습인가. 돈에 눈이 어두워 예수님의 그 주옥같은 설교를 직접 듣되 3년 동안을 듣고도 결국은 지옥에 갔으니, 돈이 얼마나 무서운 사단의 무기인지, 끔찍하고도 끔찍하다. 이 돈이 한국의 기독교를 잡아먹고 있는 것이다. 가룟 유다는 돈에 의해서 귀가 막히고 눈이 가려지고 모두가 막혀 지옥에 들어갈 때까지 깨닫지 못하다가 지금 지옥에서 깨닫고 울어본들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기독교인들이여! 부정하게 번 돈을 하나님 앞에 몇 푼 바치면 하나님이 갸륵하게 여기어 죄를 용서해 줄 것 같은가? 세상의 더러운 돈 몇 푼으로 천국을 사려는 간사하고 악한 무리들이 예배당 안을 채우고 있으니 슬픈 현실이 아닌가.

   가룟 유다는 예수께서 그 많은 기적을 행하실 때 현장에서 보지 않았던가? 물위를 걷는 기적, 죽은 자를 살리는 기적, 소경의 눈을 뜨게 하는 기적 등 수많은 기적들을 그의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인간의 지혜로, 힘으로 불가능한 역사, 상식을 초월한 놀라운 기적을 현장에서 보고도 주님을 믿지 못했다. 돈에 눈이 멀면 이렇게 되는 것이다. 오늘의 기독교가 돈으로 말미암아 마비상태가 되었는데, 얼마나 비참하고 불쌍한 모습인가!

   집사, 권사, 장로 취임하는데 일정한 돈을 내어야만 하고, 모든 행사나 절기에 특별헌금을 해야 하며, 모든 명목으로 만든 헌금들을 해야 한다. 그것도 모자라서 약정헌금을 내야하며, 월정헌금, 주정헌금을 내야하며, 그 외에도 공사석에서 필요에 따라 돈을 써야만 한다. 현실이 이러하니 자연적으로 돈 없는 사람은 교회에서 행세할 수가 없고 멀어지다가 떨어져 나가게 되는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어떤 이가 있다. 그는 오래 전에 헌금을 약정했는데, 사업이 망하여 낼 수가 없게 되었다. 집도 처분하고, 변두리에 초라한 집을 빌려 사는데 거기까지 약정헌금을 받으러 찾아오는 것도 보았다. 세금 징수하듯이... .

   이와 같은 슬픈 현실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교회가 돈을 많이 거두어 엄청난 규모의 예배당을 짓고 기업적으로 움직여 몇몇 사람의 배나 채우고 가난한 자들에게는 약간의 생색내기 봉사를 한다면 이게 될 말인가?

   하나님께 쓰임 받은 종들을 잘 살펴보면 물질에 대해서 청렴하였음을 알 수 있다. 아브라함이 그러했다. 그는 소돔성의 인민과 재산을 연합군의 포로된 가운데에서 되찾아왔을 때 사람 외에 모든 재산을 가지라는 제의를 거절하고, 실오라기 하나도 취하지 않았다. 그는 치부하지 않았으며, 하나님의 하신 역사를 돈과 바꾸려 하지 않았다. 그는 분명 영적인 사람이었다. 하나님의 선물을 돈으로 계산할 수 없는 것이며, 하나님의 역사에 돈이 개입되면, 하나님의 하신 일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어리석음의 행동임을 알았던 것이다. 어찌 성령의 역사를 돈으로 계산하랴(창세기 14장 참조).

   엘리사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는 나아만 장군의 문둥병을 고쳐주었다. 나아만이 사례의 뜻으로 엄청난 양의 물질을 주었지만 거절했다. 그는 진실로 하나님의 사람이요, 영적인 사람이었다(열왕기하 5장 참조).

   신약성경에도 하나님의 선물을 돈으로 사려던 어리석은 사람이 있었다(사도행전 8:14~24). 베드로와 요한이 안수함으로 성령 세례받은 것을 보고 시몬이라는 사람이 돈을 들여 자기도 안수하는 사람이 세례를 받도록 해달라고 요청하다가 사도들에게 무섭게 책망받은 장면이 있다. "베드로가 가로되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줄로 생각하였으니,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사도행전 8:20).

   사랑하는 독자여! 돈으로 직분을 사고, 돈으로 교회 안에서 일정한 위치를 확보하고, 돈으로... , "돈! 돈! 돈!" 돈으로 하나님의 선물들을 농락하다가 돈과 함께 망하여 지옥에 가면 어찌 하시려는가?

   회개하라. 오늘의 기독교 상황은 회개하지 아니하면 돈과 함께 망하게 되어 있다. 진정으로 회개하여 은혜로 주신 선물을 받으라.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에베소서 2:8)고 하셨다. 구원은 조건 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죄로 말미암아 지옥에 던져질 불쌍한 죄인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은 아무 조건 없이, 온 인류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하셨다.

   이렇게 말하니 어떤 집사님은 "믿는 자들에 한하여 용서하지 않았는가" 하는데, 성경은 모든 죄인들의 죄를 일방적으로 이미 용서하셨다고 선언하셨다. 하나님을 모르는 죄인들까지도... .

   "다 이루었다"(요한복음 19:30 참조).

   모든 죄, 과거, 현재, 미래의 죄가 이미 다 용서되었다. 이 사실을 믿음으로 천국 가고, 믿지 아니함으로 지옥에 던져지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로마서 3장 23,24절에서도 반복하여 말하고 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값없이"라고 하지 아니하였는가. 예수님 당시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해졌다고 하였는데, 오늘의 현실은 부한 자들, 넉넉한 자들에게만 복음이 전해지는가? 도대체 무슨 일인가?

   누가복음 17장 11절 이하에 보면 열 명의 문둥병자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들이 예수님 앞에 나왔을 때 다 병이 나았다. "제사장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는 말씀을 순종하러 가다가 나았는데, 그 중 한 명만 돌아와서 예수님께 사례하였다. 그 때 예수님께서 이 사람에게 말씀하시기를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하셨다. 아무것도 드릴 것 없는 이 불쌍한 문둥병자, 그가 주님 앞에 단순히 회개하고, 사례함으로 구원받았다. 그의 행위는 전혀 참작되지 아니하고, 선물로만 구원받았다. 물질은 더욱 아무것도 없는 불쌍한 이 사람 문둥병자가 선물로 구원을 얻은 것이다.

   이 글을 읽는 그대가 만약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죄를 통하여 모든 죄를 다 용서받음으로 이제는 죄인이 아니라 의인이 되었으며,마귀의 자녀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실을 깨달았다면 구원받은 것이다. 멸망의 지옥에 가지 않고 천국에 가게된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구원이다. 천국을 가는 데는 아무 조건도 물질도 행위도 상관없다.

   이렇게 값없이 구원받은 성도가, 지옥에서 건짐 받은 너무도 놀라운 사실을 깨닫고 지옥에 갈 뻔했던 끔찍한 사실을 생각하며, 고마운 마음으로 성의를 표시하는 헌물, 헌금, 봉사 이것이 진정한 헌금이요, 신앙이다. 제도에 의해서 내는 헌금이 아니고, 주변의 분위기와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고, 하나님이 두려워서가 아니고, 구원에 의해서 드리는 헌금이다. 나를 영원한 멸망의 지옥에서 건져내기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은혜를 평생 갚아도 다 갚지 못하여 눈물로, 행위로, 물질로 섬기는 섬김, 이것이 진정한 헌신이요, 헌금인 것이다.

   헌금을 내지 않으면 하나님께 저주받거나, 사업 망할까 무서워서 드리는 헌금, 복 받기 위해서 조건적으로 드리는 헌금, 이것들은 다 가증한 것이다. 우주와 바다와 만유를 지으신 하나님이 무엇이 부족하여 헌금을 강요하겠는가.

   "깨어라, 정신을 차려라." 사람에게 속지 말라. 우둔한 자들이여! 평생 예수 믿고 목숨 바쳐 죽도록 충성하고 지옥에 가면 얼마나 원통하겠는가. 깊이 생각하시기 바란다.

   성경은 좁은 문을 이야기하고 있다. 오늘날 대다수가 쫓아가는 이 넓은 문을 따라가다가 지옥에 떨어지는 날 그대들의 눈물과 통곡과 비참한 처지에서의 후회는 영원할 것이다.

Posted by 행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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