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보서


                     제4과

                    믿음과 행함(야고보서 2:14-26)


   아마도 이 구절들이 야고보에서 가장 논쟁이 되는 구절들일 것입니다. 루터와 같은 기독교회에서 위대한 인물로 평가받는 사람도 행함으로 의롭게 되는 야고보의 가르침과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바울의 교훈이 조화될 수 없는 모순으로 보았습니다. 이 구절들은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믿음에 행위를 더하여야 한다는 이단적인 가르침을 지지하는데 늘 사용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주 예수님을 우리의 구세주로 믿어야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주님의 구속사역에 우리의 자선과 헌신이라는 행위를 더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단락은 실제적으로 "행위로 의롭게 됨" 이라는 제목을 붙일 수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행위로 의롭게 되는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칭의에 관한 온전한 진리를 꼭 붙잡기 위해서는 은혜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 사실을 분명하게 깨달아야 합니다(롬 3:24). 이것은 단순히 우리가 의롭게 될만한 가치가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실 우리는 반대되는 가치가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됩니다(롬 5:1).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인간의 응답입니다. 믿음으로 우리는 거저 주시는 선물을 받았습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이루어 주신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었습니다(롬5:9). 이 피는 우리에게 의로움을 주시기 위해 치러진 대가입니다. 죄의 값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치러졌고, 이제 의로운 행동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경건치 못한 죄인들을 의롭다고 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됩니다(롬 8:33).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하시는 분이라는 진리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행함으로 의롭게 됩니다(약 2:24). 행위는 우리의 믿음이 진실하다는 외적인 증거입니다. 이러한 행위는 보이지 않는 것들을 밖으로 드러내어 줍니다. 이것으로 우리는 어떤 사람이 은혜로, 믿음으로, 피로, 하나님으로 그리고 행함으로 의롭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여기에는 조금도 모순이 없습니다. 이러한 주장들은 동일한 진리의 다른 면을 나타내 주고 있는 것뿐입니다. 은혜는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하시는 원리입니다. 믿음은 사람이 그 은혜를 받는 수단입니다. 피는 구주께서 치러 놓으신 대가입니다. 하나님은 실제로 의롭다고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행위는 그 결과입니다.

   헬렌 쇼(Helen Shaw)는 이러한 진리를 아름다운 시로 나타내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가 나를 택하셨네

   하늘나라에 두시기 위해.

   이것이 주님의 기쁜 뜻이었네

   나는 은혜로 의롭게 되었다네.


   그리스도께서 갈보리에서 죽으시는 바로 그 시간에

   진홍 같은 피가 흘러내렸네.

   가장 추악한 것을 눈처럼 희게 만든 피

   나는 피로 의롭게 되었다네.


   하나님이 주를 일으키신 것, 이것이 보증이기에

   악한 의심들은 가라앉아야 한다네

   주님의 부활은 모든 두려움을 잠재운다네

   나는 능력으로 의롭게 되었다네.


   성령께서 나를 인도하시네

   성경에서 말씀하는 곳으로.

   나는 그 진리를 붙잡았다네,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나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네.


   당신이 혹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의심한다면

   혹 누구든 의심이 든다면 숨어 살피시오.

   내가 주님의 것임을 행함으로 보이리라

   나는 행함으로 의롭게 되었다네.


   주님을 찬양하네, 이 모든 것이 주님의 것임을.

   은혜도 믿음도 피도,

   부활의 능력도 행위도,

   나는 하나님으로 의롭게 되었다네.


무가치한 행함 없는 믿음(2:14)


   야고보는 선한 행위가 따르지 않는 믿음은 구원할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을 깨닫는데 크게 도움이 되는 두 가지 열쇠가 있습니다. 첫째, 야고보는 "사람이 믿음을 가진 것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라고 말한 것이 아니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그 사람이 진실로 믿음을 가진 자인가 아니면 구원받지 않은 자인가 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야고보는 그 사람의 믿음을 가졌다고 하는 고백이 헛된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믿음이 있다고 말하지만 그 사람의 삶에서는 그것을 나타내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유용한 열쇠는 이 구절의 끝에 있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라는 물음에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그러한 믿음이 구원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야고보가 제시하고 있는 믿음이 어떠한 믿음이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이 구절의 앞부분에 나오고 있습니다. 야고보는 선한 행위가 뒷받침되 않는 말뿐인 믿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믿음은 무가치한 것이며, 말만 있을 뿐 아무 것도 아닙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에 대한 예(2:15-16)


   행함이 없는 헛된 말들에 대해 여기에 예를 들었습니다. 두 사람에 대한 소개가 나오고 있습니다. 한 사람은 먹을 것도 입을 것도 없는 사람이며 다른 한 사람은 둘 다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나누기를 원치 않는 사람입니다. 무척이나 관대하다고 말하는 그가 가난한 형제에게 "옷을 좀 입고 다니게나, 그리고 좋은 음식도 좀 먹고." 라고 말하면서도 그 사람을 도와주기 위해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그 말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한 말들은 전혀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들은 전혀 배부르게도 몸을 따뜻하게 해주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2:17)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입니다(17절). 행함이 없는 믿음은 전혀 진실한 믿음이 아닙니다. 야고보는 우리가 믿음에 행위를 더함으로 구원받는다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견해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 이뤄 놓으신 사역을 모욕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믿음과 행위로 구원받았다면 주 예수님과 우리 자신이라는 두 명의 구주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은 아주 분명하게 그리스도께서 유일하신 구주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야고보가 강조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다만 행위의 믿음으로 구원받았다는 것이 아니라 선한 행위의 삶이 수반되는 그러한 믿음으로 구원받았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행위는 구원의 뿌리가 아니라 구원의 열매라는 것이며, 동기가 아니라 결과라는 것입니다.


나뉘어질 수 없는 믿음과 행위(2:18)


   참된 믿음과 선한 행위는 나뉘어질 수 없습니다. 야고보는 이것을 두 사람의 논쟁에서 끌어다 보여줍니다. 첫째 사람은 진실로 구원받은 사람으로 말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두 번째 사람은 믿음이 있다고 고백은 하지만 그 믿음을 선한 행위로 나타내지 않는 사람입니다. 첫 번째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서 대답할 수 없는 말로 도전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대화로 바꾸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 사람이 아마도 바르고도 타당하게 말하였을 것입니다. "그렇습니까? 당신은 믿음이 있다고 말하지만 그것을 나타내는 행위는 없으시군요. 나는 그러한 믿음은 선한 행위로 뒷받침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선한 행위 없이 당신이 믿음이 있다는 것을 나에게 증명해 보십시오. 당신은 그렇게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당신이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나타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삶으로 그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나는 나의 행위로 내 믿음을 당신에게 보여주겠습니다." 행위를 떼어놓고 믿음을 나타내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충분치 않은 지적인 동의(2:19-20)


   그 논쟁은 계속 됩니다. 첫째 사람이 계속 말을 이어갑니다. 어떤 사람이 고백한 믿음이 그저 잘 알고 있는 사실에 대한 지적인 동의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지적인 동의는 인격적인 신뢰가 전혀 포함되어있지 않으며, 어떠한 삶의 변화도 일으키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믿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참되고 꼭 필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이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마귀들도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고 하나님에 의해 그들에게 임할 최후의 형벌을 생각하므로 떱니다. 마귀들도 그 사실은 믿고 있지만 그분께 나아오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진실로 주님을 믿는다면 그것은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완전히 맡긴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신뢰는 삶의 변화로 나타납니다. 행위와 동떨어진 믿음은 머리로 믿는 것이며 황무지와 같습니다.


두 가지 예(2:21-25)


   여기에서는 행위로 말미암은 믿음에 대한 두 가지 예가 구약 성경으로부터 제시되었습니다. 유대인 아브라함과 이방인 라합에 관련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 행함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었습니다. 올바른 시각으로 이 진리를 보기 위해 창세기 15:6을 살펴보겠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여기에서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그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받은 것입니다. 아직 우리는 아브라함이 그 아들을 드리는 것을 보게되는 창세기 22장까지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그곳에서는 아브라함이 행함으로 의롭다하심을 얻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자 곧 하나님의 보시기에 의롭게 되었지만 그로부터 일곱 장 뒤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기꺼이 드림으로 그의 믿음이 진실된 것임을 나타냈습니다. 아브라함의 순종은 그의 믿음이 그저 머리로만 믿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신뢰하는 것임을 보여주었습니다.

   때로 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릴 때 다른 어느 누구도 그 자리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 누구도 그의 믿음의 실상을 증명할 수 없었다는 반대적인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과 동행했던 젊은 사람들이 멀지 않은 곳에서 아브라함과 이삭이 산에서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더욱이 그곳에는 이삭이 있었습니다. 또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자기 아들을 기꺼이 드리려 했던 것을 성경이 기록으로 보존하고 있기에 모든 세대에 아브라함의 믿음의 실상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믿음이 행위를 낳았고 아브라함의 행위로 말미암아 그의 믿음이 완전하게된 것이 분명합니다.  참된 믿음과 행위는 나뉘어질 수 없습니다. 믿음은 행위를 낳고, 행위는 믿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이삭을 제물로 드리는 것에서 우리는 아브라함의 믿음이 실제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는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는 성경에 대한 실제적인 성취입니다. 아브라함의 선한 행위는 그가 하나님의 벗임을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여기에서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이지 믿음으로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24절).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사람이 믿음에 행함을 더하여 의롭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하나님께 대하여는 믿음으로 그리고 사람에 대하여는 행함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믿는 순간 그를 의롭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네 믿음의 진실성을 보여봐라". 그렇게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선한 행위로 말미암습니다.

   두 번째 예는 구약성경의 기생 라합입니다(25절). 라합은 기생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선한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것이 아님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라합이 사자(정탐)를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아가게 하였으므로 행함으로 의롭게 된 것입니다. 라합은 가나안 족속으로 여리고 성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어떤 전승하는 군대가 그성으로 진군해 오고 있으며, 그 군대에 대항할 자가 아무도 없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라합은 히브리인의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리고는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자신은 그 하나님과 함께 하리라고 결심했습니다. 그 때 정탐들이 그 성으로 들어오자 그들을 도와주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 라합은 참되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믿음에 대한 진실성을 증명하였습니다. 라합이 정탐들을 숨겨줌으로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이러한 친절한 행동이 그녀가 참된 신자라는 것을 증명해 준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구절을 가지고 구원이 선한 행위로 말미암는 것임을 증명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선한 행위란 자선을 베풀고, 빚을 갚고, 진실을 말하며 교회에 나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브라함과 라합에게 이러한 선한 행위가 있었나요? 분명히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경우는, 기꺼이 자기의 아들을 죽이려 했던 것이었습니다! 라합의 경우에는, 반역이었습니다. 만일 이러한 행위들에서 믿음을 빼 버린다면 그것은 선한 것이 아니라 악한 것입니다. 이에 대해 매킨토시는(Mackintosh) 다음과 같이 잘 말하였습니다. "그 행위에서 믿음을 떼 내어 보라 그러면 그것은 부도덕하고 무정할 뿐 아니라 죄악된 것이리라. 이 단락이 제시하는 것은 율법적인 행위가 아니라 생명의 행위이다. 당신이 아브라함과 라합의 행위에서 믿음을 제거해 보라. 그러면 그 행위들은 악한 행위일 뿐이다. 그러나 그 행위들을 믿음의 열매로 바라보라 그러면 그 행위들은 생명의 행위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선한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 사용될 수 없습니다. 그렇게 사용하는 자들은 이 구절을 살인과 반역으로 말미암아 구원받는다고 하는 어처구니없는 가르침으로 전락시키는 것입니다.


행함이 없는 생명 없는 믿음(2:26)


   이 단원은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26절)는 선언으로 끝납니다. 이는 매우 훌륭한 요약입니다. 야고보는 믿음을 사람의 몸으로 비교했고, 행함을 영혼으로 비유했습니다. 영혼이 없는 몸은 생명이 없는 것이며, 쓸데없고, 가치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며, 소용없고, 무가치한 것입니다. 그것은 참으로 구원하는 믿음이 아니라 거짓된 믿음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다음과 같은 질문에 답함으로 우리의 믿음을 시험해 보라고 요약하는 것입니다. 나는 옷이 충분치 못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기 위해 작은 옷장으로 만족합니까? 나는 주린 사람들을 돕기 위해 음식을 절약합니까? 나는 생명의 양식을 갈구하는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경건하게 살고 있습니까? 나는 아브라함과 같이 내 삶에서 가장 아끼는 것을 하나님께 기꺼이 드릴 수 있습니까? 나는 라합과 같이 그리스도께 충성된 자가 되기 위해 세상에 대해 기꺼이 반역자가 될 수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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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제 11 과

                            권면의 원리(5:26-6:10)


   바울은 수신자들에게 성령으로 행하라고 말했습니다. 이제 그는 성령에 충만한 삶에 대한 하지 말아야 할 것과 해야할 것의 실제적인 몇가지 예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5:26 (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격동하고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 취하지 말아야 할 세가지 태도는 자만, 격동, 투기입니다. 율법 아래 사는 사람은 종종 그들의 하찮은 업적으로 교만해지며, 그들의 표준에 도달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조롱합니다. 이에 반하여 재능이 별로 없는 사람이나 약한 성격을 가진 사람들은 율법을 지키는데 더 성공한 것처럼 보이는 다른 사람들을 투기하기 쉽습니다. 그러한 모든 태도들은 은혜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참된 신자는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깁니다. 율법준수자는 잘못된 영광을 구합니다. 참으로 큰 자는 무시받는 사람들을 섬기는 자이고 보이지 않게 수고하는 사람입니다.


개선되어야 할 세가지 습관(6:1-10)


   1. 범죄한 자를 바로잡음


6:1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여기에 범죄한 신자를 다른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취급해야 하는지에 대한 훌륭한 말씀이 있습니다. 물론 범죄자를 심판함으로 꾸짖어야 하지만 이것은 율법과는 뚜렷이 대조됩니다.

   범죄한 일이 드러났다는 말은 문자적으로 "범죄에 놀랐다" 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 사람이 습관적으로 죄를 짓는다기 보다는 어떤 범죄 행위에 연루된 사람을 묘사한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은 신령한 사람들에 의해 다루어지게 됩니다. 세속적인 그리스도인은 무정하고, 냉정한 태도로, 이롭게 하기보다는 더 상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범죄한 사람도 주님과 접하고 있지 않은 사람의 훈계는 받기를 좋아하지 않게 됩니다.

   이 구절은 생각해 볼 만한 질문을 하게 합니다. 만일 참으로 신령한 사람이라면 자신이 신령하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을까요? 신령한 사람들은 그들의 부족함을  가장 크게 느끼는 사람들이 아닙니까?  만일 그러한 일을 한다면  신령한 사람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인데 그렇다면 누가 바로잡는 일을 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겸양이 부족함을 드러내는 것이 아닐까요? 그 답은 이렇습니다. 참으로 신령한 사람은 결코 자신의 상태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 범죄한 사람을 바로잡기 원하는 돌아보는 목자의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는 교만하거나 우월한 심령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도 유혹받을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온유한 심령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6:2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짐" 이라는 단어는 실패, 유혹, 시험, 시련을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근심하고 고통 가운데 있는 형제에 대해, 거리를 두고 비판하면서 가까이 하지 않기 보다는 곁으로 다가가서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그를 돕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법은 모세의 율법과는 너무도 다릅니다. 모세의 율법은 순종에 대해 생명을 약속했지만 순종할 아무 능력도 주지 않았으며, 형벌에 대한 두려움 만이 순종하도록 권할 뿐입니다. 반면에 그리스도의 법은 이미 생명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사랑의 교훈입니다. 신자들은 성령님의 능력으로 그 교훈을 지킬 수 있으며,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 그들의 동기입니다

6:3 (만일 누가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니라) 우리는 모두 동일하게 흙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우리가 어떤 형제의 죄를 보게 되면 우리 자신도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우수하다는 이상심리는 자기기만의 한 형태입니다.

6:4 (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만 있고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  이 구절은 만족을 위한 이유를 찾으려고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는 습관에 대해 경고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사도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시험될 것을 지적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의 실패 보다는 자신의 일로 인해 자랑할 수 있기 때문에 자기 자신에 대해 주의해야 합니다.

6:5 (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임이니라) 처음 볼 때, 이 구절은 2절과 모순되게 보입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의 원어로는 2절에서 번역된 "짐" 이라는 단어와 5절의 단어는 완전히 다른 단어입니다. 2절에서 바울은 우리가 이생에서 다른 사람의 슬픔과 고통과 문제들을 함께 하라고 가르칩니다. 5절은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 자기 자신의 책임의 짐을 진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2. 말씀을 가르치는 자들에 대한 부양


6:6 (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신자들은 그리스도인 교사들을 부양할 책임이 있습니다. "모든 좋은 것으로 함께 하라" 는 것은 그들이 기도와 경건한 열심을 유지하도록 생활에 대한 물질적인 것을 그들과 나누라는 의미입니다.

6:7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비록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의 종들에 대한 우리의 무관심을 말하지 않더라도 하나님께서 그것을 보고 계시며 그에 따라 거두게 하십니다. 우리는 우리가 심은대로 거두며, 우리가 심은 것보다 여러 배로 거두게 됩니다. 농부가 밀을 심으면 밀을 거두는데 때로 삼십배, 육십배 또는 백배로 거둡니다. 스코필드 박사는 "성령님은 여기에서 죄인들에게 그들의 죄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에게 그들의 천한 행위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이다" 라고 평했습니다.

6:8 (자기의 육체를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비록 심은 대로 거둔다는 것이 일반적인 진리이지만 이것은 그리스도인에게 베풀도록 권하는 것임에 주의해야 합니다. 이러한 견해에 의해 우리가 자기의 돈을 자기를 위해, 자기의 쾌락과 안락을 위해 사용하는 것은 육체를 심는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심는 것은 사람이 자기의 돈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촉진하기 위해 사용하는 것입니다.

   육체를 위하여 심은 사람들은 그들이 더 늙어지면 쾌락을 위해 살았던 그 육체가 쇠퇴하여 죽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에 바로 이 땅위에서 실망과 패배를 거두는 것입니다. 이제 그때가 되면 그들은 영원한 상급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성령을 위하여 심은 사람은 성령으로 영생을 거두게 됩니다. 성경에서는 영생을 두가지로 사용하였습니다 (1) 모든 신자에게 주어진 신분으로(요 3:36) (2) 이 땅위에서의 신자의 삶이 끝났을 때 그가 받을 것으로(롬 6:22) 사용되었습니다. 성령으로 심은 사람들은 지금 여기에서 다른 그리스도인들이 누리지 못하는 영생을 어느정도 누립니다. 그리고 그에 동반된 신실함에 대한 상급을 그들이 하늘 본향에 이르게 될 때 거두게 될 것입니다.

6:9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어떠한 사람도 낙심하지 않기 위해 바울은 수신자들에게 즉시는 아닐 지라도 어떤 상급이 있을 것을 상기시켰습니다. 씨를 뿌린 다음날 밭에서 추수하지는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영적인 영역에서도 신실하게 뿌린 것에 따라서 적당한 시기에 확실히 상급을 받을 것입니다.


   3. 모든 사람에게 선을 행하되 특히 그리스도인들에게 함


6:10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믿음의 가정은 교파나 교단에 관계없이 구원받은 모든 사람들을 포함합니다. 우리가 신자들에게만 제한하여 친절을 베푸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는 특별하게 나타내는 것입니다. 바틀렛은 " 이 권고의 명확한 강조에 주의하라. 그것은 얼마나 조금 해를 끼쳤는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우리 앞에 놓여있는 선한 일을 얼마나 많이 했는가를 말하는 것이다" 라고 말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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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생활의 원리

                                                                  월리암 맥도날드 저

 

   머리말

   이 책은 새로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쓰여 졌습니다. 이 책의 목적은 그리스도인의 생활 가운데 성장하는 법을 알기 원하는 사람들을 돕기 위한 것입니다. 많은 말씀들이 이 부분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런 부분의 말씀들은 매우 주의 깊게 살펴보며 읽어야 합니다. 인용된 성경구절들은 강조체로 되었고, 일반적으로 한글 개역성경에서 인용했습니다. 여기에서 당신은 거듭난 결과와 확실하고 영원한 구원의 사실을 배우게 되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유혹을 이겨나가는 방법과, 기도와 전도와 성경연구 등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가치 있는 삶을 사는 것에 대해 성경말씀으로 살펴보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성경공부는, 주님이 당신의 마음을 열어 그의 말씀을 통해 당신에게 가르치고자하시는 진리들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기도함으로써 시작하십시오. 최소한 두 번 이상 읽으십시오. 한번은 내용의 개략적인 흐름을 위해서 한번은 연구하기 위해 천천히 살펴보십시오. 그리고 본문에 언급된 모든 성경구절들을 찾아서 직접 확인해보고 모든 각주들을 조사하며 읽으십시오.

 

   1장 거듭남의 결과들

 

   사람이 거듭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먼저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는 하나님의 성령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거룩하시기 때문에 반드시 그 죄를 벌하셔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 죄에 대한 형벌은 "지옥"이라고 불리는 곳에서 하나님과 분리된 상태로 영원히 고통 가운데 사는 것이라는 것도 알게 됩니다. 결국 자신은 죄인이기 때문에 이 죄에서 자기 자신을 구원해 줄 구주가 필요하다는 것을 하나님 앞에서 인정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일을 위하여 이미 하나님께서 그분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를 죄인 대신 죽도록 십자가에 내어 주셨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죄인은 자신을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이 분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이어서 이 분이 바로 하나님이라는 사실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 때 성령께서 이분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믿고 의지하도록 도우십니다. 이 죄인이 그 마음으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가 그리스도께 자신의 구주와 주님이 되어 달라고 요청할 때, 그의 죄는 용서되어집니다. 이 때 성령께서 그 마음의 진실함을 아시고 능력을 베푸셔서 그에게 생명을 허락하십니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이 죄인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을 치시고 그 안에 내주하시는 것입니다. 바로 이 순간에 그는 거듭나게 되며 하나님의 가족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죄인이 이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가 되고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립니다. 그러나 이것은 새로운 삶의 시작일 뿐입니다. 성경은 이 외에도 많은 놀라운 일들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 중 열 가지만 소개하겠습니다.

 

   1. 하나님은, 그리스도인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삼았기 때문에 그를 받아들이십니다. 에베소서 1:3, 6을 보면 하나님 곧 아버지께서 사랑하시는 자안에서 우리를 받아들이셨습니다. 여기서 "사랑하시는 자"는 그 분이 사랑하는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은 먼저 그의 아들을 보시고, 그다음에 그리스도인을 보십니다. 그 분은 그리스도인들을 자신의 아들에게 속한 사람들로 보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임재 안으로 들어오는 그리스도인들이  있다는 것에 기뻐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앞에서 환영받으시는 한 그리스도인들도 하나님께 환대를 받습니다. 이것은 영원합니다(엡 2:6~7)

 

   2.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요 1:12). 만일 당신이 위대한 사람이나 왕 또는 대통령의 자녀가 된다면 얼마나 영광스럽겠습니까! 전능하신 창조주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이보다 얼마나 더 영광스러울까요! 당신은 그 분 가족의 일원이며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3.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에 의해 의롭게 되었습니다(롬 5:1, 8:30, 33). 의롭게 되었다는 것은 죄 사함 받았다는 것 이상입니다. 죄를 범한 사람은 죄 사함을 받기는 하지만 의롭게 되지는 않습니다. 이와 같은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어떤 사람이 이웃의 돈을 훔쳐서 법정의 판사 앞에 끌려갔습니다. 그 사람은 유죄로 판명되었고, 그는 감옥에 가야만 하게 되었는 데, 바로 그때 한 친구가 그 법정에 나타났습니다. 그 친구가 말하기를 "만일 이 사람을 자유롭게 해 준다면 내가 이 사람의 빚과 도둑질에 대한 벌금을 다 지불하겠소."라고 했습니다. 재판장은 그렇게 하는 것에 동의하고, 도둑질했던 사람은 법정을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비록 그에게 여전히 죄가 있지만 그의 범죄로 인한 형벌로부터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그를 위해 벌금을 내 주었기 때문에 그는 용서받고 형벌을 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가 의롭게 된 것은 아닙니다. 그의 죄악 된 행동은 여전히 남아 있고 사람들은 그가 도둑임을 기억할 것입니다.

  

   그러나 재판장이신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죄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가 지은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롬 6:23).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믿는 자들을 대신하여 죽으셨습니다. 그 분의 죽음이 믿는 자들의 죄에 대한 값을 지불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를 용서하시고, 그는 자신의 잘못에 대한 심판을 결코 받지 않게 될 것입니다(엡 1:7, 요 5:24).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믿는 자들을 의롭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그를 과거의  어떤 죄악 된 삶과는 전혀 상관없는 새로운 사람으로 보시기 위해 그의 죄를 완전히 제거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마치 그를 한 번도 죄를 지은 적이 없는 사람처럼 여기십니다.

 

   4. 그리스도인의 몸은 성령님을 위한 집입니다(고전 6:19). 성경은 하나님이신 성령님께서 거듭난 각 사람들 속에 거하신다고 가르쳐 줍니다(요일 4:13). 그리스도인의 몸은 성령님이 거하시는 성전 혹은 집입니다. 믿는 자는 그의 속에 성령님께서 거하시므로, 언행과 그가 가는 장소 등에 주의해야 합니다. 

 

   5. 그리스도인은 참된 교회의 구성원이 됩니다. 이 교회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참된 신자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행 2:47). 이 세상에, 참된 교회의 일원이 된다는 것보다 더 영광은 없습니다. 이 교회는 전 세계의 신자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습니다. 이러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묘사되고 있는데(골 1:18) 이 "몸" 은 이 땅에 있고 "교회의 머리" 이신 그리스도는 하늘에 계십니다.

 

   6.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상속자입니다(롬 8:17). 상속자는 어떤 사람이 죽은 뒤에 그 재산을 물려받게 되는 사람입니다. 예를 들어 많은 땅과 어마어마한 돈을 가지고 있던 부자가 죽는다면, 이러한 부자의 재산들은 그의 아들들에게 분배됩니다. 그들은 그의 상속자들로서 부자인 아버지가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 분은 우리가 살고 있는 땅과 해와 달과 별 등의 하늘을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우주의 창조자이십니다. 하나님은 죽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언젠가 그분은 그의 모든 보물들을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는 모든 거듭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상속자라고 일컬어지는 것입니다.

 

   7. 그리스도인은 성도라고 일컬어집니다(롬 1:7). 성경은 구원받은 자들을 성도 혹은 하나님 백성이라고 부릅니다. 성도는 성령님께서 하나님께 속했다고 선택한 사람입니다.

 

   성령님께서 하나님을 위한 특별한 사람으로 믿는 자들을 구분해 놓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아들을 통해서 그리스도인을 바라 보십니다. 그 분은 먼저 그리스도를 보시는데, 그리스도는 거룩하십니다. 그리스도는 결코 죄를 짓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언제나 거룩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리스도인들을 "그리스도의 거룩으로 옷 입은 자들"로 보십니다(고전 1:2). 이렇게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위해 구별된 매우 특별한 사람, 즉 성도인 것입니다.

 

   8.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합니다(골 2:10). "그리스도 안에서의 완전" 이라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기 위해 더 이상 해야 할 것이 아무 것도 없음을 의미합니다. 물론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 안에서 완전하지 못한 것들과 하나님의 기준에 도달하지 못한 많은 것들을 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모든 기준을 만족시켰는데, 그 분은 완전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안에 있는 신자들을 보십니다. 즉, 하나님께서 먼저 그리스도를 보시고 만족하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믿는 자들을 보시고 역시 만족해하십니다. 이것은 믿는 자들이 완전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믿는 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합니다.

 

 

   9. 그리스도인들은 신의 성품을 받았습니다(벧후 1:4).

   이 거룩한 성품은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모든 사람은 인간적인 성품을 그들의 부모로부터 받습니다. 이 성품은 인류 대대로 전해 내려온 아담의 죄악된 성품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두 가지 성품이 있습니다. 즉, 태어날 때 받은 자신의 인간적인 성품과 거듭날 때 받게 된 거룩한 성품입니다. 이 거룩하고 새로운 성품은  죄를 미워하고 하나님에 대해 알고 싶어 하도록 만듭니다. 그는 자신들에게도 하나님과 그리고 자신들과 다른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새로운 사랑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인 안에 있는 거룩한 성품은 그로 하여금 주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가도록 합니다(골 3:10, 고후 3:18).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모든 자녀들에게 원하시는 것입니다.

 

   10.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지키신다는 것을 알고 즐거워합니다(롬 8:28).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아십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유익이 되는 일들이 일어나도록 허락하십니다. 그 중에는 기쁜 일도 있지만 시련과 시험도 믿는 자들에게 더 깊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가르쳐 줍니다. 이러한 일들은  믿는 자들로 하여금 그 분께 더욱 가까이 가게 합니다. 이런 방법으로 하나님은 그 자녀들이 하나님의 길을 이해할 수 없을 때조차도 인내하고 그분을 신뢰하도록 가르치십니다(롬 5:3~5).

 

   이상, 하나님께서 이루어 놓으신 몇 가지 놀라운 일들을 소개했습니다. 이런 일들로 인해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1.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에 대해 하나님께 예배하고 그 분을 찬양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예배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분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으로 나타납니다(하나님을 섬기는 것에 대해서는 12장에서 공부하게 될 것입니다)

Posted by 행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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