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대제사장 되심

                                                                                                        -짐 베이커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이라.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 (히 2:17-18).


   유대인들 가운데 구원받은 성도들은, 다른 민족의 경우도 마찬가지지만 특히 유대인들은 그 주위 사람들에 의해 극심한 핍박과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들이 교회에 영접되게 되면 많은 것을 잃어야 했습니다.  더구나 이같은 가르침이 그들에게 도전적으로 주어졌습니다. "예수님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모세도 필요하다. 구약의 아담, 다윗, 아론 같은 위대한 인물들을 생각해보라. 그들도 필요하다." 이에 대해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만 가진다는 것은 손실이 아니다. 오히려 유익하다."

   주님 안에는 모든 위대한 것이 충만하게 있습니다. 주님은 산에 있었던 모세보다 더 위대하십니다. 또한 하나님이 최초로 만든 아담보다 더 위대하십니다.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놀라운 통치를 했지만, 죄로 인해 이같은 특권을 상실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죄를 범한 적이 없으십니다. 아담은 동산에서 시험을 받았지만, 주님은 광야에서 받았습니다.

   아담은 뱀에게 시험을 받았지만, 주님은 사단에게 직접 받으셨습니다. 아담은 모든 열매를 먹어도 되나 단 한가지만 먹지 않으면 되었으나 주님은 40일 밤낮을 굶주린 후에 사단의 유혹을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죄를 결코 범하지 않았습니다.

   계곡에 있던 다윗은 이스라엘 중 최고의 왕입니다. 그는 모든 적을 물리치고 승리한 왕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최고의 전쟁에서 승리합니다. 주님은 골리앗이 아닌 사단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십니다. 주님은 다윗보다 위대하십니다.

   이스라엘 최초의 제사장은 아론입니다. 주님은 그보다 더 위대하십니다. 이 시간에는 히브리서에 나타난 주님의 제사장 직분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히브리서는 주님이 드리신 희생 제사의 위대함을 말합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죄를 용서받으려면 희생 제사를 드릴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피 흘림이 없은즉 (죄) 사함이 없느니라" (히 9;22). 아론은 대제사장으로서 속죄일에 피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간 사람입니다. 일 년에 한 차례 속죄일에 이스라엘은 짐승을 이스라엘의 진 밖에서 잡았습니다.  그 피를 가지고 대 제사장이 성막으로 가져갔습니다. 바깥뜰과 성소를 지나 마지막으로 지성소로 가져갔습니다. 지성소는 대제사장이 일 년에 한 차례만 겨우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속죄는 성경에서 매우 중요한 개념입니다. "속죄" 라는 히브리어("카파")의 첫 번째 뜻은 "덮다" 는 의미입니다. 최초로 이 단어가 쓰인 곳은 창세기 6장입니다. 하나님이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라고 명할 때 쓰입니다. "너는 잣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짓되 그 안에 간들을 막고 역청으로 그 안팎에 칠하라"(창 6:14) 여기서 "칠하다" 가 카파라는 단어입니다.

   두 번째로 사용된 곳은 창세기 32장입니다. 야곱은 형 에서가 죽이려고 하자 형을 피해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갑니다.  이는 매우 먼 거리입니다. 21년이 지난 후 그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다시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는 과거의 두려움이 다시 떠올랐습니다. 그동안 그는 라반의 딸과 결혼하고 들에서 양을 쳤습니다. 그는 많은 짐승을 가진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가족과 짐승 때문에 빨리 움직일 수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런데 에서가 400명을 데리고 마중을 나온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두려워졌습니다. 에서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 그는 좋은 가축을 고릅니다. 그리고 종에게 이같이 말합니다. "또 너희는 말하기를 주의 종 야곱이 우리 뒤에 있다 하라 하니 이는 야곱의 생각에 내가 내 앞에 보내는 예물로 형의 감정을 푼 후에 대면하면 형이 혹시 나를 받으리라 함이었더라" (창 32:20). 여기서 사용된 "감정을 푼다" 는 단어가 "속죄"(카파)입니다. 속죄는 "덮다" "마음을 기쁘게 하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세번째로 속죄가 사용된 곳이 출애굽기 입니다. 이는 속죄일과 관련됩니다. 피가 하나님의 시은좌에 뿌려져 덮었을 때 하나님이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1년 동안만 받아주셨습니다. 1년 후에는 다시 피가 덮어져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피는 1년만 죄를 덮었습니다.  이를 히브리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이 제사들은 해마다 죄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그러므로 세상에 임하실 때에 가라사대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히 10:3-6). 이는 하나님이 완전히 만족하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이같은 제사는 매년 드려져야 했습니다. 여기 "기뻐하다"는 단어가 쓰이고 있습니다. 이는 속죄(atonement)보다 더 강하고 완전한 것을 의미하는 단어가 쓰이고 있습니다. "화목" (propitiat-ion)입니다. 이는 긴 단어이나 매우 중요합니다. 속죄 즉 덮고 기쁘게 할 뿐 아니라 "만족시키다" 는 의미가 더 들어간 것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때 이는 하나님이 주님을 죄를 위한 제물로 드린 것입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셨습니다. 그 아들을 하나님은 세상에 보내 모든 죄를 없애고자 하셨습니다.

   구약의 모든 제사는 사람이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를 위한 최초의 제사를 누가 드렸습니까? 최초의 죄를 위한 제사는 에덴동산에서 드려졌습니다. 아담은 죄를 범한 후 자신이 벌거벗었음을 알았습니다. 죄를 범하기 전에는 그는 이를 알지 못했습니다. 이제 죄를 범하자 벌거벗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 무화과 나무 잎으로 부끄러움을 가리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소용이 없었습니다. 아담을 위해 하나님이 가죽 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이 가죽 옷은 어디서 난 것일까요? 짐승이 죽은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를 위한 첫 희생 제사는 하나님이 드리셨습니다.

   죄를 위한 마지막 제사도 하나님이 드리십니다. 아들을 죄인을 위해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히브리서는 "이제 더 이상 죄를 위해 드릴 것이 없다" 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모든 죄를 제하셨다. 이제 죄는 더 이상 기억되지 않는다. 구약의 제사는 1년간 유효하나 하나님이 완전히 만족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은 주님의 제사를 영원히 만족하게 여기셨다." 이게 히브리서의 설명입니다. 세례 요한은 주님을 보고 이렇게 증거했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요 1:29). 우리는 주님이 하신 일은 다 합당하게 표현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온전한 제사를 드리셨고 하나님이 만족하셨습니다.

   히브리서는 말합니다. "구약에는 매년 제사장이 제사를 드려야 했다 그런데 주님이 제사장으로 오셨다. 그리고 하나님이 만족히 여기시는 제사를 드리셨다. 주님은 구약의 제사장처럼 이 땅의 지성소에 들어가신 게 아닙니다. 주님은 어디로 들어가셨습니까? " 예수께서 저희를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사 손을 들어 저희에게 축복하시더니 축복하실 때에 저희를 떠나 (하늘로 올리우)시니" (눅 24:50-51). 주님은 손을 들고 축복하시면서 승천하셨습니다. 이게 주님의 마지막 모습입니다. 손을 들고 축복하는 것은 제사장이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히 8:1). 구약의 제사장은 앉을 수 없습니다. 반복적으로 동일한 제사를 드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아론은 놀라운 대제사장입니다. 하나님이 그를 기름 부어 제사장을 삼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실패했습니다. 주님은 실패한 적이 없습니다. 주님은 아론보다 나은 제사장이십니다. 아론은 죽어 흙으로 돌아갔습니다. 주님은 온전한 제사를 드리시고 지금도 살아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히 4;14-16).


   주님은 승천하신 분입니다. 하늘을 지나 하나님 보좌로 가신 분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체휼(동정)하는 제사장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이십니다. 빌라도가 사형을 판결하고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시신을 무덤에 두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렇게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부활하셔서 승천하시고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계십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마리아의 아들로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 아들됨에 대해서는 히브리서 1장이 자세히 설명했습니다. 히브리서 1장은 구약을 인용하여 주님이 하나님임을 증거했습니다. 주님은 영원한 하나님 아들이시고 지금은 하나님 보좌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믿는 도리를 굳게 붙잡아야 합니다." 여러 사람들이 히브리서를 받는 유대인 신자들의 믿음을 흔들고자 하나 "이 믿음의 도리를 굳게 붙잡자" 고 히브리서 기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하나님의 보좌에 앉으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구약 유대교의 제사를 다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사역이 완성되었음은 부활로 증거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신 예수님을 하나님이 살리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믿음을 붙잡아야 합니다. 우리가 더 나은 것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구약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구약 이스라엘 제사장에게 가르쳐주신 희생 제사는 단지 하나님의 아들이 오실 때까지만 주신 것입니다. 이제 주님의 죽으심으로 구약 제사는 끝났습니다. 주님의 제사로 속죄와 화목이 다 이루어졌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연약을 체휼하십니다. 우리와 똑같이 사셨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세계 여러 곳에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 믿음 때문에 가난에 처하거나 굶주리고 있습니다. 주님은 이 땅에 계실 때 가난하게 사시고 40일을 금식하신 적이 있으십니다. 주님은 가난이 무엇인지 아십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일을 위해 수고하는 분이 많이 계십니다. 주님도 여행에 지쳐 우물가에 앉으신 적이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피곤을 이해하십니다. 세상에서 부끄러움을 당하는 그리스도인이 지금도 있고 핍박을 받아 여러 사람에게 고난을 당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백 년 전에 스코틀랜드에 이단으로 몰려 핍박을 받은 성도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를 부인 앞에 세우고 모독하고 고문하여 죽였습니다. 이 모습을 그 부인에게 다 보여 주었습니다. "당신은 어떤 생각이 듭니까?" 그 부인은 대답했습니다. "나는 그가 죽기 전에 주님을 생각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나는 이제 그를 더욱 생각 하게 됩니다." 하늘 보좌에 계신 주님은 사람들에게 뺨을 맞고, 침 뱉음을 당하고 등에 채찍질을 당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고난을 알아주십니다.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지금도 연약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저는 한 전도자를 알고 있습니다. 그는 작은 섬에서 15년간 전도했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도 구원받지 못했습니다. 그는 계속 울고 있습니다. 하늘 보좌에 앉으신 주님도 이같은 말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바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하리로다 할 때까지는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눅 13:34-35). 영혼들이 구원받지 않을 때 고통하는 전도자의 마음을 주는 아십니다. 그 외에도 수많은 측면이 있지만 다 말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연약을 체휼하십니다. 주님이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와 달리 죄를 범하지 않았습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히 9:28).

   여기서 "죄 없이" 라는 단어가 히브리서에서 두 번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주님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기 위해 죽으셨습니다.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두 번째로 오실 것입니다. 첫 번째는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 결과 우리의 모든 죄가 사해졌습니다. 이제 주님께서 두 번째로 오실 때는 죄와 상관없이 오실 것입니다. 주님이 경험하지 않은 유일한 것은 죄입니다. 주님은 사람이 되셨지만, 나사렛 거리를 다니셨지만, 사람의 몸을 갖고 계셨지만 죄를 범치 않으셨습니다.

   주님이 우리의 대제사장이 된 것은 죄를 범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죄를 지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죄를 짓게 되면 주님의 제사장 직분이 아닌 중보사역이 필요합니다. 이는 요한 일서 2장에 나옵니다. 이는 매우 중요한 구절이니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우리의 죄를 위한 화목제물입니다. 우리 죄만 위함이 아니라 온 세상 죄를 위한 화목제물입니다. 사도 요한이 이를 쓴 것은 우리로 죄를 범치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죄를 범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그러나 잘못해서 죄를 범하면 하나님 앞에 우리를 중보해주는 분이 계십니다. 이는 하나님의 가족이 범한 죄에 대한 진리를 말해줍니다. 우리가 죄를 범할 때 주님의 십자가 사역을 상기시키고 이에 하나님은 만족하게 여기십니다. 주님은 희생 제사를 드리는 대제사장일 뿐 아니라, 우리를 체휼하는 제사장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감정을 아십니다. 우리를 동정하시고 필요하면 우리를 돕는 분입니다. 히브리서 8장, 로마서 8장을 보면 우리를 위해 중보기도하시는 주님의 사역이 나옵니다. 이는 과거, 미래 시제가 아닌 현재시제로 쓰였습니다. 지금 우리를 위해 기도해주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할지라도 주님이 항상 기도해주고 계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영광스러운 아버지 하나님의 집으로 데려가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대제사장마다 사람 가운데서 취한 자이므로 하나님께 속한 일에 사람을 위하여 예물과 속죄하는 제사를 드리게 하나니 저가 무식하고 미혹한 자를 능히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자기도 연약에 싸여 있음이니라. 이러므로 백성을 위하여 속죄제를 드림과 같이 또한 자기를 위하여 드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 존귀는 아무나 스스로 취하지 못하고 오직 아론과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라야 할 것이니라. 또한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 되심도 스스로 영광을 취하심이 아니요, 오직 말씀하신 이가 저더러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니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 하셨고, 또한 이와 같이 다른데 말씀하시되,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라 하셨으니" (히 5:1-6).


   아론 제사장은 사람 가운데서 택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 속한 일을 했습니다. 제사장은 백성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돕는 일을 했습니다.  제사장은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제사를 드릴 뿐만 아니라 자신을 위한 제사도 드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아론 제사장보다 뛰어나신 분입니다. 자신을 위한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었습니다. 죄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주님은 지상의 성소가 아닌 하나님 보좌 우편에 가셨습니다. 이 영광은 주님이 스스로 취한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부르시고 임명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론을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은 주님도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유다 지파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다른 반차를 좇은 제사장입니다. 하나님은 주님에게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영원히" 는 주님이 죽을 수 없음을 말해줍니다. 아론 제사장은 죽으면 그 아들이 직분을 이어갔습니다.  주님은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랐습니다. 창세기 14장에 나오는 멜기세덱은 왕이자 제사장입니다. 그도 사람이기에 부모가 있었을 것이고 그도 죽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에 대해 침묵하고 있습니다. 멜기세덱의 어린 시절에 대한 설명도 없습니다. 그는 갑자기 아브라함이 가는 길에 등장합니다. 비유적으로 말하면, 그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습니다. 즉 그는 주님에 대한 그림자입니다.

   주님은 희생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이십니다. 또한 우리를 체휼하는 제사장이십니다. 세 번째로 택함을 받은 제사장이십니다. 주는 하늘에 계시며 뛰어나신 유일하신 분입니다. "이러한 대제사장은 우리에게 합당하니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 자라" (히 7:26). 이 놀라운 주님을 찬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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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원확신

                                     갈망하는 이들에게         

                                                                   H. A. 아이언사이드


                                  제8장

                          마음을 굳세게 함


   요한일서에는 기독교의 경험적인 측면과 관련이 있는 매우 소중한 진리가 밝혀져 있습니다. 3장 18,19절에서 우리는 다음 말씀을 통해 권면과 더불어 격려를 받습니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로다."

   이러한 마음의 견고함은 성령께서 믿는 자 안에서 역사하신 결과입니다. 내가 하나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주 예수님을 내 구주로 믿는 순간 나는 영생을 소유합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성경말씀을 근거로 알게 됩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로 내어주신 분을 믿는 자는 현재 영생을 소유했음을 거듭 거듭 말해줍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면서 나는, 내 속에서 끊임없이 일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통해, 그것이 내가 받아들인 교리를 훨씬 뛰어넘는 것이라는 확실한 많은 증거를 보게 됩니다. 나 자신이 진실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는 분명한 증거들을 날마다 발견합니다(엡 2:10). 그렇게 하여 확신이 깊어집니다. 하나님 말씀에 모든 것을 의지하고 믿음 안에 계속 거하며 살아가는 동안 나는 은혜로 말미암아 죄인인 나에게 부여된 영생의 증거들을 보고 그 말씀이 사실임을 확신하게 됩니다.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해주는 그런 확실한 증거들을 몇 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믿는 자는 하나님의 뜻을 본능적으로 사모하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우리가 그의 게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저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요일 2:3~5).

   믿지 않는 자가 하나님의 뜻을 즐거워한다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 아닙니다. 구원받지 않은 사람은 자기의 뜻을 즐거워하며, 자기 뜻을 다른 사람에게 굴복하라는 지시를 받는 것을 몹시 싫어합니다.


   영국인 변호사와 젊은이의 상담


   몬타구 굳맨이란 유명한 영국의 변호사이자 널리 알려진 설교자가 근간에 본 장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를 잘 보여주는 다음의 일화를 들려주었습니다.


   "어느 날 저녁 내가 어릴 적부터 알고 있던 한 젊은이가 내 서재에 들어와 앉았습니다. 그는 극동지역으로 떠나려는 차에 인사하러 들른 것입니다. 우리는 솔직하고 편안하게 대화를 나눴습니다. 나는 그에게 그리스도를 믿도록 권했습니다. 그 때 그가 한 대답을 잊을 수 없습니다. 그는 아무 적대감이나 불쾌감이 없이 담담히 대답했습니다. '나는 내가 하고싶은 대로 하고 싶어요. 왜 내가 내 자유를 예수 그리스도나 다른 누구에게 내주어야 하는지 알 수 없어요.'

   "그렇게 말한 것은 그가 자신이 속한 전 인류의 마음을 대변한 것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인류에 관한 보편적인 진리는 '우리는 각기 제 길로 갔다'는 것입니다(사 53:6). 이것이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당한 정죄입니다. 즉, 인간은 하나님의뜻에 자신을 복종시킬 준비가 되지 않았습니다. 인간은 자기의 길을 고집하며, 누군가 간섭하는 것을 분개합니다. 그는 하나님께 '당신의 뜻이 아니라 내 뜻이 이뤄질지어다'라고 말합니다. 그는 자기 뜻을 앞세웁니다. 그 뜻이 저속한 것이든 고상한 것이든, 감각적인 것이든, 냉혹한 것이든 인자한 것이든,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해당합니다. 그는 자신이 자기 운명의 주인이요 자기 영혼의 주인이라고 주장합니다."


   이 글을 인용한 것은, 내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바를 그보다 더 잘 보여주는 사례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구원받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생각해보겠습니다. 그리스도를 나의구주로 믿고 그분을 나의 주로 시인합니다. 그분의 넘치는 사랑이 내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내 뜻을 그분의 뜻에 굴복시킵니다. 매일의 삶에서 아무리 연약을 발견하더라도 나는 내 마음의 최고의 소원이 그분이 원하시는 대로 행하는 것임을 발견합니다. 그분의 계명을 사랑합니다. 보나르의 찬송시는 이 사실을 얼마나 아름답게 묘사하는지요!


   "나는 길 잃고 방황하는 양이었네.

   양 무리도 사랑치 않고

   내 목자의 음성도 사랑치 않았네.

   다스림도 원치 않았네.

   나는 고집불통의 아이였네.

   내 가족도 사랑치 않고

   내 아버지의 음성도 사랑치 않았네.

   나는 멀리 떠돌아다니길 좋아했네."


   "목자가 그 양을 찾았네.

   아버지가 그 자녀를 찾았네.

   그가 산과 골짜기를 넘고

   거친 광야를 헤치며 나를 찾다가

   거반 죽게 된 나를 발견했네.

   주리고 곤하고 외로운 나를 발견했네.

   그가 나를 사랑의 줄로 매었네.

   방황하던 자를 구원했네."


   "예수 나의 목자

   그가 내 영혼을 사랑했네.

   그가 그 피로 나를 씻었네.

   그가 나를 온전케 했네.

   그가 잃어버린 자를 찾았네.

   그가 길 일고 헤매는 자를 발견했네.

   그가 나를 양 우리로 인도했네.

   그가 나를 지금도 보호하네."


   "나는 길 잃고 방황하는 양이었네.

    나는 다스림을 원치 않았으나

    이제는 내 목자의 음성을 사랑하고

   양 무리를 진실로 사랑하네.

   나는 고집불통의 아이였고

   떠돌아다니길 좋아했으나

   이제는 내 아버지의 음성을 사랑하고

   그분의 가족을 진실로 사랑하네!"


   변화된 태도가 확신을 준다


   아러한 변화된 태도가, 내가 이제 거듭남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확신을 줍니다. 이전의 오만한 뜻을 굴복시키고 말씀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기를 사모하게 된 변화는 거듭난 것으로 밖에는 달리 적절히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요한이 사용한 "계명"이란 단어는 단지 시내 산에서 주어진 십계명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그것은 십계명을 훨씬 초월한 것입니다. 율법의 의(義)는 육체를 좇지 않고 성령을 좇아 행하는 우리 속에서 이뤄집니다. 그러나 그것을 뛰어넘어 우리에게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계명이 있는데, 그 계명은 그분이 지상에 계셨을 때 제자들의 행실에 대해 가르치신 모든 것과, 그 후로 성령을 통해 신약성경에 계시하신 것을 포함합니다. 거듭난 사람은 주님을 기쁘시게 할 것들을 행하기를 소원합니다. 그리고 그가 순종의 삶을 사는 동안 십자가에서 온전히 표현된 하나님의 사랑이 마음에서 샘솟게 되며, 그리스도를 알면 알수록 더욱 존귀한 분으로 여기게 됩니다.


   두 번째 예로, 요한일서 3장 9절을 보겠습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이 말씀은 많은 부주의한 독자들과 어느 정도 주의 깊은 일부 독자들을 당황케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말씀으로 예민하고 양심적인 자녀들을 격려하고자 의도하셨으나 오히려 사단은 그 말씀을 이용하여 하나님의 사랑스런 자녀들을 낙심시키고 있습니다. 사단은 이렇게 속삭입니다.

   "너도 알다시피 너는 무죄하지 않아. 너는 종종 생각과 말과 행동에 잘못을 범해. 그것은 죄를 짓는 거야. 그러니 너는 하나님의 자녀일 수가 없어."

   그러면 고민하던 그 사람은 그 말을 당연하고도 논리적인 말로 받아들이기가 쉽습니다. 물론 그리스도를 믿었기에 마음은 그 말을 거부하고, 또 뭔가 그런 논리에는 결함이 있다고 본능적으로 느끼지만 말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동사는 소위 "현재 진행형"임을 아는 것이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것은 이따금씩 실수하거나 자주 잘못을 범해 크게 닉심하는 그런 경우를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보다는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습관적인 행동을 의미합니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6절로 돌아가 관련된 본문 전체를 읽어 보겠습니다.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고,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두 가족의 상반된 행동방식


   여기에 거듭난 자와 거듭나지 않은 자의 두 가족이 어떻게 묘사되었는지 보십시오.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은 죄를 짓습니다. 세상 기준으로 볼 때 어떤 세련된 인품을 소유했다 할지라도 그들은 그들 뜻대로 하기를 기뻐합니다. 이것이 죄의 본질입니다.

   "죄는 무법(lawlessness))이라"(요일 3:4).

   모든 주의 깊은 학자들은 그것이 "죄는 불법(the transgression of the law)이라'는 번역보다 더 정확한 번역이라는데 동의합니다. 율법이 있기 전에 죄가 세상에 있었다는 말씀이 있습니다(롬 5:13). 그리고 아직 아무 기록된 기준도 주어지지 않은 까닭에 죄가 불법으로 규정되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는 자의지나 무법 등으로 자신의 모습을 나타냈으며 타락한 인류가 있는 모든 곳에서 발견되었습니다. 무법(無法)은 어떤 사람이 자기 뜻을, 절대 순종을 요구할 권한이 있는 다른 사람이나 하나님의 뜻에 굴복시키기를 거절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 점에서 마귀의 자녀는 그들이 속한 가족의 특성을 명백히 보여줍니다.

   그러나 신자의 경우는 다릅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신자는 그리스도를 믿고 위로부터 태어났으며, 그렇게 해서 새로운 성품을 소유합니다. 이 새로운 성품은 죄를 미워하는데, 그 후로 그 성품이 그의 욕망과 생각을 지배합니다. 죄는 가증한 것이 됩니다. 그는 지난 어리석고 죄악된 삶을 부끄러이 여기고 거룩을 추구합니다.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그의 삶의 방향이 변합니다. 그는 의를 행합니다. 물론 때로 실패를 하지만 그의 삶의 전체적인 방향이 바뀝니다. 하나님의 뜻이 그의 기쁨이요 즐거움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삶의 가치를 알면 알수록 은혜와 지식 안에 성장하며, 순종의 길로 걸어가도록 거룩한 능력이 주어짐을 깨닫습니다. 그의 새로운 성품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순복하는데서 기쁨을 발견하며, 따라서 죄가 그의 삶과 성품을 특징짓기를 중단합니다.

   이것은 새로운 출생의 세 번째 확실한 증거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요일 3;14).

   여기서 말하는 사랑과 단순히 인간적인 사랑은 차이가 있습니다. 헬라어 성경에 의하면 그 둘을 구분하기 위해 각각 다른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성령께서 여기서 선택하신 단어는 성경 전체에 걸쳐 하나님이 부여하신 사랑을 가리키는데 사용됩니다. 그것은 단순한 자연적인 감정을 초월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거듭날 때 우리 안에 심어집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러한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요! 그것은 우리를 모든 곳의 모든 성도들과 연결시킵니다. 새로 구원받은 사람은 자신이 새로운 가족에 속했음을 본능적으로 느끼며, 자신과 같이 구원받은 모든 자들을 그리스도 안의 형제 자매로 부릅니다. 그런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기 전에는 그리스도인의 무리를 멀리했고 세상과 짝하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동료 신자들을 오랜 친구 마냥 반기고 찾아갑니다.


   한계선이 분명해진다


   이것은 그냥 지나가는 현상이 아닙니다. 시간이 흘러갈수록 그 한계선은 오히려 더욱 명확해집니다. 세상은 갈수록 매력이 떨어지고, 구속받은 자의 가족이 갈수록 소중해집니다. 형제에 대한 사랑이 있다는 것은 새로운 생명을 소유했다는 확고한 증거입니다. 형제를 사랑할 때 우리 마음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습니다. 이 사랑은 매우 실제적인 것입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는 말이나 혀로만 사랑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습니다. 그는 적극적인 선행과 은혜로운 행실로 사랑을 나타내고자 합니다. 요한일서 전체에 걸쳐 이 진리가 강조되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나서 하나님을 알고"(4:7).

   그러나 사도 요한은 이 서신 앞 부분에서 이러한 새로운 출생의 내적인 증거들을 밝히 강조한 후에 놀랍게도 서신 뒷 부분에서, 모든 증거 중 가장 확실한 증거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단순한 믿음이라는 극히 중요한 진리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양심이 민감하면 민감할수록 그 자신과 자신의 경험을 불신하는 경향이 있는데, 복음의 중요한 근본 진리를 떠나 그러한 경험 위에 자신을 건축하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요한일서 4장 13~16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거하노니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저 안에 거하시고 저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이 말씀을 읽고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이 나에게 성령을 주셨는지 알 수 있지요?"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그 답은 성령께서 복음의 영원한 진리를 증거하신다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그리스도를 그들의 개인적인 구주로 믿은 모든 이들 안에 거하십니다. 만일 당신이 예수님을 개인적인 구주로 믿고 그분을 하나님의 아들로 시인한다면, 당신은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당신 안에 거하시고 당신도 하나님 안에 거하는 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복음 안에서 나타났습니다. 만물은 그분의 사랑과 지혜를 나타냅니다. 십자가가 그분의 사랑과 은혜를 선포합니다. 앞서 인용한 잘 알려진 찬송시 작가 중 한 사람인 호라티우스 보나르는 그다지 널리 알려지지 않은 다른 시에서 이 사실을 놀랍게 묘사했습니다.


   "꽃과 나무와

   싱그러운 바람과 지저귀는 새소리와

   사철의 변화 속에서

   우리는 당신의 모습을 대합니다.

   하늘로부터 아버지의 보내심을 받아

   우리 대신 수치의 십자가를 지기 위해 내려 오사

   우리의 삶을 겪고

   우리의 죽음을 당하신 그분 안에서

   우리는 당신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대합니다."


   구주께서는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마치고 하늘에 올려져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그런 다음, 그토록 복스럽게 완성된 구속사역을 증거하는데 능력을 더하기 위해 성령께서 이 땅에 내려오셨습니다.  로마 병정의 창이 죽은 그리스도의 옆구리를 찔렀을 때 "물과 피가 흘러나왔습니다." 그 물과 피는 죄인들을 위해 내어준 그분의 거룩한 생명을 말없이 증거해 주었습니다. 그 외에 성령께서 그 거룩한 기록을 더하십니다. 그러기에 요한일서 5장 8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증거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이 합하여 하나이니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의 구속사역의 완전함을 풍성하게 증거하셨습니다. 이제 그분은 사람들에게 그 증거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영원한 구원을 얻으라고 촉구하십니다.

   우리는 우리가 신뢰하는 사람들의 증거를 믿습니다.  설령 우리가 이해할 수 없거나 믿기 어려운 애기를 할지라도 믿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그 아들에 관해 증거하신 것은 당연히 아무 의심 없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그분의 기록을 믿기를 거절하는 것은 그분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입니다.

   기록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메시지를 마음 깊이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다"고 말합니다(요일 5:10). 아울러 요한은 이 책 서두에서 인용한 다음 말씀을 상기시킵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요일 5:13).

Posted by 행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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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원, 새로운 출생(BORN TO WIN)

                                                                            -윌리암 맥도날드

                                               제 8 과

                 본문 : 마태27:37-66 마가 15:26-47 누가23:38-56 요한 19:19-42


                                          인류 최대의 범죄

                     (The Greatest Crime Ever Committed)


   범죄 장면은 예루살렘 성 밖에서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일반적으로 그곳은 사형수들이 끌려와 처형당하는 장소였습니다. 당시 팔레스타인을 지배하던 로마인들은 사형수들을 나무 십자가 위에 달아 처형하고 있었습니다. 그날도 그곳에서는 죄수들의 처형식이 시행되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곳을 골고다(Golgotha)라 불렀고, 로마인들은 갈보리(Calvary)라 불렀습니다. 오늘 날에는 해골의 언덕(Hill of a Skull)이라 불리고 있습니다. 이곳은 예루살렘 성 시내로 들어가는 중심가 곁에 위치해 있습니다.

   그 날은 금요일 오전이었습니다. 로마 병사들은 죄수 하나를 처형하기 위해 그곳으로 그를 끌고 왔습니다. 그는 이제 30대가 갓 넘은 젊은이었습니다. 그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이곳 골고다로 끌려 올 때 길가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었습니다. 어떤 여인들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으며, 또한 그의 뒤를 계속 따르며 그를 향하여 온갖 조롱과 저주와 모욕과 욕설을 퍼붓고, 이를 갈면서 그에 대한 극한 증오심을 들어내는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마침내 처형장소에 이르렀을 때, 무리들은 더욱 큰소리로 일제히 "십자가에 못 박아라" "십자가에 못 박아라" (crucify, crucify!) 라고 외쳤습니다. 궁극적으로 그들이 원하는 것은 그의 피를 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날 범죄자로 이끌려 온 이 사람의 정체는 과연 누구였을까요? 그의 이름은 예수(Jesus)였습니다. 그는 다윗 왕의 후손으로, 다윗의 고향 베들레헴에서 출생하였고, 나사렛에서 성장하였습니다. 그는 그의 의부 요셉의 뒤를 이어 목수가 되어 그의 식구들을 돌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30세 쯤 되었을 때 그는 홀연히 자신의 목공 연장들을 내려놓고, 현대인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전도단(Crusade)의 사명을 띠고, 이를 위해 전적으로 헌신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운동은 초기부터 순탄하지 못하였습니다. 그의 가르침과 자신의 신성에 대한 주장은 당대의 기존 종교지도자들과 심한 충돌을 일으키기 시작하였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날로 대중들이 날로 그의 가르침과 기적에 이끌리고 있음을 보고 극한 시기와 증오심으로 여러 번 그를 죽일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 계획은 번번이 실패했지만 그의 제자 중 하나인 배반자 가룟 유다의 도움을 받아 마침내 그를 체포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모여 그를 죽일 구실을 찾으려고 노력했으나 자신들 간에도 의견 일치를 보지 못하였습니다. 결국 그가 하나님과 자신이 동등하다고 주장한다 하여 신성모독 죄를 구실 삼아 로마인들에게 그를 넘기며 그의 사형을 요구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에게는 사형 판결권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죄수를 넘겨받은 로마 총독 빌라도는 그를 심리한 결과, 그에게서 아무 죄도 발견할 수가 없었습니다. 단지 그들 유대인들 간의 종교 문제임을 깨닫고 무죄를 선언하였습니다. 그러나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굽히지 않고, 그의 처형을 강력하게 요구하였습니다. 총독은 자신의 양심에 따라 그를 살리려고 힘써 보았지만 자칫 민란이 일어 날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그들의 요구에 굴복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물을 담은 대야를 가져오게 하고 자신의 손을 씻으며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마 27:24)고 선언한 후, 그를 사형 집행자들에게 넘겼습니다. 이상이 예수의 생애에 대한 개략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누구이며, 그는 왜 죽어야 했는가? (Who Was The Man? Why Did He Die?)


   우리 모두는 이 분에 대해서 좀 더 정확히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들과 같은 단순한 인간이 아니십니다. 그는 바로 하나님의 아들(Son of God)이십니다. 그는 온 우주를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만물은 그에 의해 창조되었으며, 그는 그가 만드신 온 우주와 만물을 붙들고 계시는 분이십니다(요 1:10 ; 골 1:17, 히 1:3). 그러나 그는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를 찾아오셨습니다.

   그가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목적은 우리를 죄악으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함 이었습니다. 그는 오셔서 우리의 대속 제물(substitute)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우리가 마땅히 지불해야 할 모든 죄 값을 대신 다 지불하여 주셨습니다. 그는 우리들이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그와 함께 살 수 있는 길을 준비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인간들은 그를 죽일 만반의 채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그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누구에게 돌려야 할까요? 그의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들에게 돌리라" (마 27:25)고 맹세하며 그의 십자가 처형을 요구했던 종교 지도자들과 그에 동조했던 모든 유대 사람들에게 일차적인 책임이 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일입니다. 다음에는 그의 무죄함을 알면서도 그를 처형하도록 허락한 로마 총독 빌라도와 로마 병사들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나 에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바로 우리들 모두에게 그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진정으로 깨닫지 않는 한 신비한 그 십자가의 완전한 의미를 우리는 결코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입니까?" 많은 사람들은 의아해하며 이의를 제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기록된 말씀들을 자세히 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요 1서 2;2)하였고 "그리스도께서 한 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벧전 3;18)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말씀들을 통하여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사실은 그는 어떤 사람들에게 타의적으로 죽임을 당하신 것도 아니며 또한 그 자신의 죄나 잘못 때문에 죽임을 당하신 것도 아닌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바로 우리 모든 인간들의 죄를 위한 화목 제물로 죽으셨습니다. 우리 모든 인간은 범죄함으로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진 상태였습니다. 성경에 이르기를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하였다"(이사야 59:1-2)고 하였습니다. 또한 사도 바울은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더불어 화목 되었다" (롬 5:10)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자신의 죽으심을 통하여 하나님과 우리 인간들 사이에 가로 막혔던 죄의 담을 영원히 제거해 주셨습니다. 그는 이 일을 위하여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시고 십자가의 죽음을 스스로 택하셨습니다(빌 2:8 ;히 5:7-9). 그는 십자가를 앞에 두고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히 10:7, 10).

   또한 그는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요 10:17-18).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 10;15). 또한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 물로 주려 함이라" (마 20;28)고 거듭 거듭 그 자신의 죽으심에 대해서 밝히 말씀하셨습니다. 세례 요한은 그를 증거 하기를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요 1;29)고 외쳤고, 선지자 이사야는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위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이사야 53:5)라고 그의 죽음을 예언으로 증거 하였습니다. 그 외에도 시편 22편과 다른 여러 곳에서도 그의 죽으심을 예언한 사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또한 구약의 모든 제사 제도와 규례 등은 다 그의 죽으심을 예표하는 그림자들이었습니다. 죄를 속죄하기 위해 수많은 짐승들의 희생 제물들의 피를 요구했던 그 모든 제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단 한번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완성되었습니다. 진실로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하여 우리의 완전한 구원을 성취하셨습니다.

   그러면 이처럼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친히 당하셨던 형언할 수 없는 그 십자가의 죽으심과 그 모든 고통에 대해서 좀 더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오늘날 성지 순례자들의 코스 중에 하나인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가 있습니다. 일명 고통의 길(the way of sorrows) 혹은 통곡의 길(the way of tears)이라 불리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으시던 곳으로부터 이 길을 따라 골고다 언덕까지 자신의 십자가를 지시고 가신 길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 길이는 약 1km이며 폭은 약 3-5m 가량입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고 약 세번 가량 쓰러지신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가 쓰러지실 때마다 로마 군병들의 채찍이 사정없이 그의 등을 내리쳤습니다. 그 채찍은 쇠붙이가 달려 있어 맞을 때마다 그의 등은 무참히 찢기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성경은 이렇게 예언되었습니다. "밭가는 자가 내 등에 갈아 그 고랑을 길게 지었도다" (시129:3)

   마침내 그가 골고다 언덕에 이르렀을 때 그의 십자가 처형식은 이렇게 이루어 졌습니다. 군병들은 먼저 예수께  쓸개 탄 초(vinegar and gall)를 권했습니다. (주- 여기에서 식초는 아마 발효된 포도주를 의미하는 듯 싶음) 이는 사형수에게 고통을 덜어주기 위한 마취의 기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를 받아 마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수행하는데 반 마취 상태(half-drugged condition)로 임하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오전 9시, 병사들은 나무 십자가 위에 그를 누이고 그의 양손과 발에 쇠못을 박은 후 이미 파 놓은 구덩이 속으로 십자가를 던져 넣었습니다. 그때 그의 손과 발이 찢기는 고통을 어찌 능히 다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오후 3시 가까이 이르렀을 때 갈증과 그 고통은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그 때 그는 외치셨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창조주 하나님께서 자신의 손으로 만드신 피조물들의 손에 의해 죽임을 당하시다니! 이는 인류 최대의 범죄 사건이었습니다.


   우주 만물의 창조주께서

   한 인간으로서 인간을 위해 저주가 되셨네.

   그의 거룩한 손가락으로 지음을 받은 그 가지들은

   가시덩굴로 자라 그 이마를 찌른 가시관이 되었네.

   그의 설계를 따라 신비 속에 깊게 감취였던,

   그 손으로 만드신 광물은 그를 찌르는 못이 되었네.

   그가 만드신 아름다운 수풀 속에서 자라난 나무들,

   그 나무 십자가위에 그 몸 달리셨네.

   그가 우리를 지극히 사랑해 달리셨던,

   그의 나무 십자가 서있던,

   그가 만드신 저 언덕,

   예처럼 지금도 그대로 서 있네.


   사형수의 옷을 나누는 것은 병사들의 관습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옷을 제비를 뽑아 나누어 가졌습니다. 이는 일찍이 다윗에 의해 예언된바 있습니다,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 (시 22:18).

   예수님의 머리위에는 그의 범죄 푯말을 달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단순하게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 이라고 쓰인 푯말을 달았습니다. 많은 백성들은 이를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빌라도에게 "자칭 유대인의 왕" 이라 바꿔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죽을 때, 그의 가족이나 친척들 그리고 친구들은 그가 임종 시에 남기는 마지막 말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됩니다. 예수께서는 그가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일곱가지 중요한 말씀을 남기겼습니다. 그 첫 번째 말씀은 "아버지여,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는 저들을 용서해 주소서" (눅 23;34)라고 하는 기도였습니다.  원수들을 위한 이러한 예수님의 기도는 그의 놀라운 은혜를 나타냅니다. 그 기도는 주님을 배척하는 자들이 훗날 자신들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여 주께 돌아오게 될 때, 그들을 구원하여 주실 것을 간구하는 기도입니다. 실제로 사도행전 2장 37절 이하를 보면 그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고 주님께로 돌아왔던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마땅히 예수님처럼 원수의 영혼을 위해서라도 기도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주님의 마음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 대신 벌을 받다 (Taking The Rap For Others)


   이처럼 아무 죄도 없는 사람을 죽음으로까지 몰고 간 성난 군중들은 조금도 자신들의 만행을 참회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향해 "성전을 헐고 삼 일 만에 다시 세울 수 있다고 했지, 만일 네가 정말로 하나님의 아들이면 이제 십자가에서 내려와 너 자신을 구원해 보라." 라고 조롱했습니다. 또한 종교 지도자들 역시 그를 희롱하기를 "너는 거짓으로 남을 구원한다고 한 자다. 이제 너 자신을 구원해 보라. 십자가에서 내려옴으로 네가 참 이스라엘의 왕인지 증명해 보라. 그러면 우리도 믿겠노라. 너는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했다. 좋다. 네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참아들이면 하나님께서 너를 구원하시게 하라. 그러면 모든 진실은 드러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예수께서는 물론 그가 당장 십자가에서 내려와 그 자신을 구원하실 능력도 있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예수님께서 사십 일간 광야에서 금식기도를 마치셨을 때, 마귀가 그에게로 다가와 세 가지 시험을 했던 사실을 기억할 것입니다. 마귀는 의심 없이 예수님께서 초능력적인 기적을 행하실 수 있는 신성을 지니신 분이심을 믿고 있었습니다. 마귀는 예수께서 돌을 떡으로 만드실 수도 있는 분이심을 믿었으며, 높은 성전 꼭대기에서 아무런 해를 입지 않고 밑으로 뛰어내리실 수도 있는 분임을 믿었습니다. 우리가 분명히 깨달아야만 할 중요한 포인트가 있습니다. 십자가는 고통스럽고 수치스러운 것임이 분명했지만, 예수께서는 그 십자가를 자신이 감당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그 자신의 사명을 알고 계셨습니다.

   한번은 학교 교실 안에서 다른 학생의 물건을 훔친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담임선생님은 그 문제의 학생이 누구인지 반드시 가려내려고 작정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선뜻 자백하고 나서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자 담임선생님은 강하게 엄포를 내렸습니다. "내가 범인을 반드시 찾아내기 전까지는 오늘 한 사람도 집에 돌아 갈 생각을 말라" 이미 해는 지고 교실 창밖이 어둑어둑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러다가는 30여명의 무고한 학생들까지 꼬박 벌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그때 반장 윤군이 당임선생님 앞으로 나아왔습니다. 그는 선생님 앞에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말했습니다. "선생님, 제가 물건을 훔친 범인입니다. 부디 저를 처벌하시고, 이제 다른 친구들은 모두 집으로 돌려보내 주십시오." 모든 학생들뿐만이 아니라 담임선생님도 그가 그럴 학생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담임선생님은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자신의 입으로 범인임을 자백한 자를 지금 벌하지 않으면 다음에도 똑같은 일이 반드시 다시 생기리라 생각한 선생님은 아무 죄도 없는 그를 회초리로 사정없이 때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온몸에 상처를 입으며 매를 맞으면서도 끝까지 참고 견디고 있는 모습을 본 학생들은 마치 자신이 채찍을 맞는 것처럼 모두 고통과 아픔을 느꼈습니다. 그 때 한 사람이 큰 소리로 울부짖으면서 앞으로 달려 나왔습니다. "실은 제가 그 나쁜 범인입니다. 저를 벌해주세요. 선생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교실 안은 갑자기 울음바다가 되었습니다. 선생님도 울었습니다. 벌을 대신 받고 아픔을 참던 학생도, 자신의 죄를 진심으로 깨닫고 용서를 비는 학생도 더 이상 죄인이 아니었습니다. 여기에서 선생님은 하나님을, 다른 학생들을 위하여 대신 벌을 자청한 사람은 예수님을, 그리고 나중에 눈물을 흘리며 자기 자신의 잘못과 죄를 깨닫고 그 죄를 고백한 사람은 우리 모든 죄인들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은 바로 이와 똑같은 원리입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이천 년 전, 예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갈보리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하나님 앞에서 심판의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 앞에 나아가 우리의 죄를 고백해야 합니다.

   "하나님, 저는 정말 죄인입니다. 저는 하나님 앞에 형벌을 받아야 마땅한 죄인입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께서 저를 사랑하심으로 당신의 외아들을 보내주시고, 그가 나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당하시며, 고난의 십자가를 지신 사실을 깨닫고 믿습니다. 하나님, 이제 저의 죄를 회개하오니 예수님의 보배로우신 그 피로 저의 모든 죄를 씻어주시옵소서. 지금까지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악한 죄악 중에 이 세상을 살아왔던 저를 용서해 주시옵소서. 이제 예수님을 진심으로 저의 마음과 저의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기를 원합니다. 제 마음 문을 열고, 이제 주님을 구주로 영접합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저를 대신하여 죽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 주신 이유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주 예수께서는 이제 갈보리 십자가 위에서 거룩한 희생의 죽음을 감당하셨습니다. 원수들의 조롱대로 그가 십자가에서 내려오셔서 그의 십자가를 포기하셨다면, 우리 모든 인류의 소망은 영영히 끊어졌을 것입니다. 육신을 지니신 예수님인들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으셨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다가오는 죽음을 앞에 두시고, 겟세마네 동산으로 오르셔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그는 심히 놀라고 슬퍼하시면서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이렇게 말씀하시고, 그는 홀로 앞으로 나아가셔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하실 수 있다면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가 그처럼 기도하실 때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방울 같이 되더라." 고 복음서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그의 기도가 간절하셨던가를 우리는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주의 이름에 감사, 찬양을 드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세 번째 기도에서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이뤄지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의 고통이 아무리 고통스럽고, 수치스럽고, 괴로울지라도 예수께서는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귀중한 생명을 우리를 위한 대속제물로 내어주셨습니다.

   또한 그는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의 순간에서도 구주로서 자신에게로 나아오는 오른 편 강도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주 예수님을 향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여 주소서." 라고 간구하는 강도를 향하여 예수께서는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오늘 너는 낙원에서 나와 함께 있으리라." 이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과에서 더욱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말할 수 없는 슬픔에 잠긴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도 군중들 틈에 서 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의 동정어린 눈길로 자신의 어머니를 내려다보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사랑하는 제자 요한에게 그의 어머니를 부탁하였습니다. 이처럼 그는 자신을 위해서는 동정하지 않았지만 그러나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는 넓고 큰 바다처럼 한없는 사랑과 동정을 쏟으셨습니다.

   정오로부터 오후 3시까지, 태양은 빛을 잃고 온 세상은 깊은 암흑으로 덮이게 되었습니다. 이는 자연과 온 만물마저 처참한 십자가의 광경에 슬픔을 드러낸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옛 찬송가의 한 구절처럼,


   인간을 위해, 

   피조물 되어 그들의 죄를 지시고

   그리스도, 전능자께서 죽음을 당하실 때

   밝은 태양마저 어둠속에 숨어

   그의 영광을 가리 우네.


   이 세 시간 동안은 주 예수께서 우리들의 죄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의 진노를 담당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의 고통은 장차 우리가 지옥으로 가서 영원토록 당해야 할 모든 고통을 함축한 고통이었습니다. 그는 끝까지 인내하며 우리를 위해 참으셨습니다. 그가 겪으셨던 그 모든 고난을 어찌 그 누가 능히 다 측량하리요! 또한 예수님에게는 우리 인간들의 손에 의해 당하신 어떠한 고통도 하나님 손에 의해 당하는 고통에 비교하면 부드러운 손길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당신과 나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가 성취하신 일은 무엇인가? (What It Took to Finish The Job)


   암흑의 세 시간이 끝날 무렵, 예수께서는 큰 소리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라고 외치셨습니다. 우리는 그와 같은 그의 기도의 의미를 알고 있습니다. 그 순간은 우리들의 모든 죄가 예수님의 양 어깨 위에 모두 지워졌던 순간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공의와 의로움은 모든 죄에 대한 완전한 심판을 요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사랑하시는 아들 위에 얹혀진 우리들의 죄를 보셨을 때 그의 아들을 버리셨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렇게 우리들의 모든 죄를 담당하시고 죄 값을 다 지불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내가 목마르다"라고 부르짖으셨습니다. 우리는 두 가지 면으로 이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 째로, 그는 적어도 여섯 시간 동안, 뜨거운 태양 아래서 피를 흘리심으로 인한 극심한 육체적 갈증을 느끼셨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 그의 목마름은 모든 사람의 구원을 위한 영적 갈증의 표현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목마름의 호소를 육체적 갈증으로 생각한 한 병사는 스폰지 달린 장대에 초(신 포도주)를 적셔 그의 입가에 대었습니다.

   그는 초를 조금 맛보신 후 "다 이루었다!" (It is finished)라고 외치시고 운명하셨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우리들의 구원을 위한 모든 사역을 그가 마침내 다 이루신 것을 나타내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 죄인들을 위한 완전한 구원의 길을 친히 예비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리들의 죄에 대한 대가를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그 모든 요구를 완전하게 만족시키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들의 구원을 위한 일을 마치셨기 때문에, 우리는 더 보탤 것도 없고, 우리에게 더 필요한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만 이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구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통하여 이미 다 완성해 놓으신 그 "구원의 선물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일" 뿐입니다.

   최후로, 구주께서는 "아버지여, 아버지의 손에 내 영혼을 부탁하나이다." 라고 외치신 후 그의 영혼을 하나님께 의탁하시고 운명하셨습니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그는 자신의 죽음의 시간을 스스로 주관하고(controlled) 계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 시간이 오면 우리는 죽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생명을 스스로 버릴 수 있는 권세를 가지신 분이셨습니다(요 10:18).

   예수께서 운명하셨을 때, 두 가지 놀라운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예루살렘 성전 안에 있는 성소와 지성소 사이를 가로막는 성전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졌습니다. 이는 우리들에게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길이 열리게 된 것을 의미합니다(히 10:19-20). 또 다른 사건은, 지진이 일어나 무덤들이 열리며, 많은 죽은 자들이 다시 살아났습니다. 이는 예수께서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신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모든 사실들을 직접 자신의 눈으로 목격한 로마 장교(백부장)는 심히 놀라며 "이는 분명 무죄한 사람이었도다. 그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고 놀라운 증언을 했습니다.

   관례에 따라, 병사들은 죄수들의 죽음을 더욱 촉진시키기 위하여 두 강도의 다리를 꺾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미 운명하신 것을 알고 그의 다리를 꺾지 않았습니다. 한 병사가 그의 창으로 예수님의 옆구리를 찌르매 피와 물이 흘러내렸습니다.

   예수님의 숨은 제자 중 한 사람이었던 아리마대 요셉은 십자가에서 예수님의 몸을 내려, 바위 속에 판 그의 새 무덤에 그를 장사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야기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삼 일이 지난 후, 예수께서는 무덤으로부터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늘나라로 다시 오르셔서 우리의 왕과 구주로서 지금 하나님 우편 보좌 위에 앉아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신 것은 분명한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이는 기독교가 참된 종교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게 하는 것입니다.

다른 모든 종교의 창시자들은 죽었고, 그들의 시신은 여전히 무덤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하늘나라에 지금 살아 계십니다. 오직 어리석은 자들은 죽은 사람을 자신들의 신(神)으로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자들은 살아계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그의 신(神)으로 믿습니다.

   생명과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은 우리 인간들의 인류 최대 범죄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크신 자비로 말미암아 이것을 우리의 영원한 복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이제 누구든지 그리스도께서 나의 대속자로 죽으신 사실을 깨닫고, 참된 믿음으로 자신의 삶 가운데 그분을 영접하면 하나님은 진정한 복을 그의 생애 가운데 임하게 해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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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서


                              3과 하나님의 의 (1)

                                                         (3장 21절~31절)


   복음에 의하면 어떻게 죄인들이 거룩하신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는가?


   지금까지 살펴 본 내용에서, 모든 사람은 죄인이고, 그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되어 있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죄를 벌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내리신 죄에대한 형벌의 선언은 죽음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죄를 어떻게 벌하시며, 또 죄인을 어떻게 구원하실 것인가?" 라는 중대한 의문이 생깁니다.

   사도 바울은 본 과의 본문에 "칭의"의 교리를 그 해답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본 단원은 귀한 진리를 가진 매우 중요한 단원입니다.


   칭의(稱義)


   먼저, 신약 성경에 나타난 칭의의 뜻을 검토해 보겠습니다.


   1. 칭의는 죄인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하나님이 그를 하늘나라에 들어가기에 완전히 합당한 자로 여기시는 것을 가리킵니다.


   2. 칭의는 신자 자신이 무죄하게 되거나 외형적으로 의롭게 되는 것을 뜻함이 아니라, 하나님이 신자를 의의 옷으로 가리워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제부터 그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로 보시고, 하나님께 그가 용납됨은 그 자신의 행위로써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친히 행하신 일 때문입니다.


   3.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는 것을,  마치 죄를 범한 일이 없거나, 죽은 것과 같이 정의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의미들은 대체로 옳은 표현입니다. 그러나 그 의미들은 다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사함이 이루어졌음을 뜻합니다. 칭의는, 그 이상으로 죄인이었던 자가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앞에 완전한 신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4. 하나님은 죄인들을 의롭다 하심으로 의롭지 않은 그들을 실제로 의롭다고 부르시며, 죄가 있어도 죄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의가 없어도 의로 여기십니다.


   5. 그렇다고 하나님은 그리스도인이 범하는 죄를 무마하시거나 묵인 하시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먼저 사람을 거룩하게 여기시고, 그 후 그들을 실제로 거룩한 사람이 되도록 하십니다. 성결이라는 이 과정은 신자가 하늘나라로 들어갈 때 비로소 완성됩니다.


   이제, 사도 바울이 이와 같은 감격적인 진리를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를 주목해서 생각해 봅시다.


   (1) 우리는 21절에서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죄인들에게 의를 주시되 공정한 길을 나타내셨다는 뜻입니다.

   2) 하나님의 의는 "율법 외에" 나타난 의입니다(21절), 사람은 십계명을 지키거나 어떤 노력으로도 도저히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합니다.

   3) 하나님의 의는 "율법과 선지자들의 증거"를 받은 것입니다(21절) 이 말은, 곧 구약 성경의 가르침과 일치한다는 뜻입니다.

   4)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를 믿음으로" 말미암습니다(22절). 이것으로 죄인들이 의롭게 됩니다.

   5) 하나님의 의는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의입니다(23절). 여기에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별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고, 따라서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의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이 하나님의 의는 모든 믿는 자에게 차별이 없이 주어집니다(22,23절).

   6)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받습니다(24절). 이 말씀은 사람들이 구원의 댓가를 지불할 필요가 없음을 뜻할 뿐 아니라 구원을 받을 만한 가치가 우리에게 없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에 대해서 염려하시는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사랑이 많으시고, 자비하시고, 은혜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7) 칭의는 "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습니다(24절). 이것이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실 수 있는 유일한 근거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묵인하시거나 용납하실 수 없으십니다. 율법은 죄인의 죽음을 요구했습니다. 하나님은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는 것을 보셔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죄 없는 그의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셔서 죄인들을 대신해서 죽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믿음으로 자기를 영접하는 모든 자를 위하여 그들의 범법에 대한 형벌을 담당하셨습니다.

   8) 그리스도께서는 "화목 제물" 이 되셨습니다(25절). 이 말은, 그리스도께서 몸 소 피를 흘려 하나님의 의로우신 모든 요구를 이루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이 하신 이 일에 만족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제 그의 아들을 믿는 자들에게 자비를 베푸실 수 있습니다.

   9) 한 걸음 더 나아가, 복음은 하나님이 구약 시대의 사람들의 죄를 어떻게 용서하셨는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25절). "전에 지은 죄" 는 갈보리 십자가 사건 이전에 지은 죄를 가리킵니다. 이 죄는 당시의 시점으로 보아 아직도 미래에 있을 그리스도의 사역을 근거로하여 용서 되었습니다. 오늘날의 우리들은 갈보리 십자가를 믿음으로 뒤돌아보고 있으나, 구약의 선지자들은 십자가를 앞으로 내다보았습니다.

   10) 이와 같이 예수님을 믿는 모든 자들을 하나님이 의롭다 하실 수 있는 것과 또한 하나님은 여전히 공정하심이 밝히 보여 졌습니다(26절). 하나님의 공의는 죄인의 죽음을 요구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버림 받은 영혼이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아들을 보내셔서 사람들을 대신하여 죽게 하심으로 이 문제를 만족스럽게 해결하셨습니다.

   11) 이 구원의 계획은 인간의 모든 자랑을 배제합니다(27절). 만일 사람이 어떤 일을 행함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면 자랑할 수 있을 런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데에는 어떤 노고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믿음만이 합당한 것입니다.

   12) 이제까지를 요약한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사람은 다만 믿음에 의해서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이지, 율법의 행위에 의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28절)

   둘째, 칭의는 유대인이나 이방인 모두를 위한 것입니다(29,30절).

   셋째, 복음은 율법을 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완전한 순종이 아니면, 그것을 범하는 자에게 죽음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우리가 상고한 대로,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죄인을 위한 율법의 완전한 요구를 다 이루셨습니다. 이와 같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의 복음을 전파함에 있어서 최대한도의 요구가 완전히 이루어졌다는 것을 통하여 오히려 우리는 율법을 높이게 됩니다.

Posted by 행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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