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세계를 품은 그리스도인 | 정성목
원문 http://blog.naver.com/jsmok1/220088383517

한별가족들 소개

 

박수일,  정순자 선교사 소개 및 사역

1. 가족사항 : 박수일, 정순자, 박지훈(장남) 박정훈(차남)
2. 파송단체 : SIM, 신안교회 파송
3. 파송연도 : 1993년 9월(선교지 입국 년도)

 


박수일 선교사님 사역

 

 

 

 

 

 

 

 

교회개척 사역, 정순자선교사- 한별 크리스찬 아카데미 운영 
박수일선교사는 사역 초기에 아르시 종족 가운데서 일해 왔으나 현재 구찌 종족 안에서 교회 개척 사역을 진행하고 있는 중인데 사역자 양성(성경학교)과 사역자 재훈련 그리고 교회 건축 사역을 중점적으로 진행하고 있다. 앞으로 주님이 허락하시면 구찌 종족 가운데 모든 마을마다 교회를 세운다는 목표아래 기도하며 나아가고 있다.

현재 에디오피아에 100군데 이상의 교회를 개척하셨다.

 기도제목
- 구찌 종족 가운데 생명을 얻는 회개 운동이 불같이 일어나도록
- 교회를 맡은 사역자들이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을 회복하며 사역에 긍지를 가지고 어려운 환경에 감 사하며 살아 갈수 있도록
- 고등학교 교실 건축이 진행될 때에 순탄한 자재 구입과 안전사고 일어나지 않도록 지켜주시도록
- 학교에서 사역하는 한국 직원들의 아름다운 팀웍이 이뤄 지도록 
 
 

정순자 선교사님 사역

 

 

 

 

 정순자선교사는 학원 사역으로 미래의 크리스찬 일꾼을 키우는 일을 주님께 받은 사명이라 생각하며 1000여명이 넘는 학생들과 매일 부대끼며 살고 있다. 현재 유치원부터 고등학교 1학년 까지 수업 중인데 2년 뒤에는 고등학교가 본 궤도에 올라 에티오피아 남부에서 제일가는 학교가 되어 미래의 기둥들을 키우는 묘목 밭이 될 것을 기대하고 있다.  

당시 국제선교단체인 SIM선교회 소속으로 방글라데시에서 10여 년간 고아원을 운영하던 정순자 선생님은 1984년 TV 언론을 통해 본 에티오피아 대기근의 참상을 잊지 못하고 10년 후인 1993년 목사인 남편과 중학생인 두 아들과 함께 선교사 신분으로 에티오피아로 향했다. 남부 랑가노 지역에 첫 터전을 잡고 7년 동안 영양실조에 걸린 아이들을 먹이고 살리는 일에 매달렸다. 먹지 못해 생명이 꺼져가는 상태로 보건소에 오는 아이들을 볼보며 영양실조로 걷지 못하던 아이들이 다시 걷게 되고, 좁은 방에 방치됐던 환자가 햇볕을 쬐는 것만으로도 다시 건강해지곤 했다. 조그만 도움이 큰 기적으로 변하는 것을 경험하는 시간이었다. 이후 야벨로 지역에서는 환자 수송 등 의료지원 활동을 했다. 케냐 국경이 가까운 시골 지역을 돌아다니며 일일이 가정을 방문해 아픈 이들을 돌보며 말라리아와 영양실조로 고통받는 현지인을 도왔다. 그 당시 정순자 선교사님은 그곳이 '슬픔의 땅'이었다고 말했다. "분만이 임박한 10대 임신부를 병원으로 옮겼지요. 가까스로 나온 아이가 머리 반쪽이 없더군요. 어머니가 영양실조에 걸린 탓에 태아의 몸이 제대로 만들어지지도 못했던 겁니다." 한밤중, 마을에서 40km 떨어진 병원에 환자를 싣고 갔지만 도착해보니 이미 숨을 거둔 적도 있었다. 싸늘한 주검을 부둥켜 안고 부부는 통곡했다. "'짐 싸서 돌아가자' 결심했던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정 교장은 말했다. 먹을 것이 없어 영양실조로 죽어가는 아이들에게 영양식을 나눠주고 아이를 낳고 세상을 떠난 엄마들을 대신해 아이를 키워 입양 보내는 일을 했다. 정순자 교장 선생님은 에티오피아로 떠난 지 10년쯤 됐을 무렵, 큰아들의 입대와 맞물려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렸으며 특별한 병명도 없이 몸이 아프고 모든 의욕이 사라져 누워서 죽음만 생각했다. 몸도, 마음도 병든 상태라 어쩔 수 없이 귀국길에 올랐으나 1년이 채 못돼 다시 에티오피아로 되돌아왔다.
"곧 죽는다고 생각하니 지금까지 한 일이 너무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주위에서는 다들 고생 많았다고 하는데 정작 하나도 한 것이 없는 것 같아 조바심이 났죠. 무언가를 찾아서 해야겠다 생각하다가 시작한 것이 교육이었습니다."
그러나 학교 설립은 쉽지 않았다. 학교설립은 부지 확보부터 난항을 겪었다. 담당공무원들은 ‘뇌물’을 주지 않는 낯선 동양인 선교사 부부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결국 매일 찾아오는 선교사 부부의 정성에 담당공무원들도 손을 들었다. 임대기간 99년으로 3만9600㎡의 학교 부지를 제공받고, 시멘트 건축 자재 등을 저렴한 가격에 공급받아 그렇게 2005년 다시 도착한 에티오피아에서 한 독지가의 도움으로 한별학교를 설립했다. 학교설립 시 땅에 물을 많이 머금고 있어서 유칼립투스를 심고, 땅이 굳어 진 뒤에 건물을 설립할 수 있었다. 수도 아디스아바바에서 360㎞ 떨어진 딜라 지역에 교실 4개를 만들어 유치원과 1학년 과정 학생 180명을 가르쳤다. 시멘트 파동 당시에는 부부는 10 여시간 거리의 수도를 찾아 당국자들을 만났고, 그들을 설득해 시멘트 등을 저렴한 가격에 공급받기도 했다. 못 품귀현상으로 공사가 중단될 위기에 놓이자 철물점 앞에서 밤을 새우기도 하였다. 고용한 교사들은 집안 일을 핑계삼아 결근하기 일쑤였고, 지원을 약속했던 독지가와도 이듬해 연락이 끊겨 운영난을 겪어야 했다. 게다가 열악한 환경의 현지 공립학교와는 달리 과학, 지리, 수학 등의 기본 과목은 물론 지역에서는 처음으로 컴퓨터, 음악, 미술까지 가르치다 보니 운영비 또한 만만치 않았다. "학교 문을 닫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매일 아이들 손을 잡고 오는 어머니들의 눈빛을 보니 도저히 그럴 수가 없더군요." 정 교장은 남편 몰래 한국에서 수 천만원 빚까지 끌어와 교실을 짓고 교사 월급을 주었다. 기존 학생들의 학년이 높아지고 신규 학생들이 늘어나면서 가장 큰 문제는 부족한 교실이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시작했는데 학교라는 것이 정말 돈이 많이 드는 일이더라고요. 교실부터 교재, 기자재까지... 형편이 어려운 학부모들로부터 받는 수업료는 20명의 교직원 월급과 운영비를 충당하기에도 턱없이 모자랐다. 사람들이 밀집되어 있는 도시가 아닌 오지라 후원의 손길도 미치지 않아 학교 운영을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고민이 커졌다. 그러나 커피 원두를 수입하는 에티오피아 한국전참전용사협회가 국내의 뜻 있는 기관과 모금 등을 통해 건물을 신축해 주기로 하는 등 지원을 약속을 받아 위기를 넘기고, 몇몇 소액 후원으로 근근이 이어오던 중 2011년 밀알복지재단의 후원을 받아 지금까지 학교를 이어올 수 있었다.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많았지만 인간미가 넘치는 에티오피아 사람들에게 끌려 학교운영을 포기 할 수 없었다”며 “최근 이곳에도 ‘먹지 못해도 공부는 시켜야 한다’는 교육열이 일고 있어 큰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예전에 4살짜리 아이가 일반 교실에서 알파벳을 배우며 꾸벅꾸벅 조는 모습을 보고 가슴이 아팠어요. 그래서 한별학교에서는 아이들이 넓은 공간에서 몸을 움직이면서 창의성을 키울 수 있도록 했죠. 가위질도 익숙지 않던 아이들이 색종이를 오려붙여 만든 작품을 보고 학부모나 교육청 관계자들이 깜짝 놀라더군요." 지난 20년을 돌아보면 "좀 더 잘할 걸, 좀 더 사랑할 걸" 하는 안타까움이 앞선다는 정 교장은 에티오피아 사람들에게 베푼 것만큼 그들로부터 배운 것도 많다고 한다. "우리가 상상하지 못하는 순수함이 있습니다. 기근이 들어 아무것도 없으면 남의 것을 훔치려 들지 않고 조용히 그냥 죽는 사람들입니다. 아둥바둥 욕심부리지 않죠. 서두르지 않고 순리에 따르는 것, 여러 사람이 함께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아무것도 없는 데서 살아가는 법도 배웠죠." 언제 다시 귀국할지 기약은 없다. “앞으로 아이들이 학교를 졸업한 이후에도 잘 살아갈 수 있도록 한국에서 선진 기술을 배워 가서 에티오피아에 전파할 방법을 모색하려고 합니다.” 그녀는 "에티오피아는 이제 '기쁨의 땅'이 돼가고 있다"고 말했다. 한별학교 학생은 정 교장을 한국어로 '엄마'라고 부른다. "애들이 와서 '엄마, 전 나중에 높은 공무원이 되면 뇌물 같은 것은 받지 않을 거예요'라고 말해요. 공무원에게 뇌물을 주는 것이 일상적인 이곳에서요." 에티오피아 부흥을 위한 '희망의 밀알'을 뿌리는 정 교장의 요즘 바람은 하나이다. "1년만 지나면 한별학교 학생이 대학에 진학합니다. 단 한 명이라도 좋으니, 한국의 서울대 같은 곳에서 에티오피아 학생을 받아 훌륭하게 교육해 돌려보냈으면 좋겠습니다.
현재 유치원부터 고등학교 과정까지 21학급 1056명의 학생이 다니고 있는 학교로 성장했다. 그리고 가정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학비 지원과 장학제도를 운용하고 있다. 태권도와 한국어 등도 가르치는데, 체계적인 교육 방식으로 호응을 얻으면서 2010년에는 딜라시 최우수상, 2012년에는 에티오피아 남부 지역 최우수 학교상, 2013년 제8회 대한민국 해외봉사상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이번 수상을 계기로 뛰어난 에티오피아 학생들이 한국으로 유학할 수 있는 기회도 열렸으면 좋겠다”고 바람을 이야기했다. 다시 태어나도 ‘ 에티오피아로 올겁니다. 6. 25 전쟁 때 우릴 도운 그들을 위해 한국인인 제가 조그만
보답이라도 했다면 다행입니다. 앞으로 박 목사 부부는 현지 학제에 맞게 학교를 계속 증축하고 취업교육을 담당할 전문대학까지 세워 한국인이 만든 학교에서 에티오피아의 미래 인재를 양성해 나가는 것을 목표와 함께 실버타운을 세울 계획을 하고 있다.

 

문병학 선교사님 소개 및 사역 




저는 전주대학교 학사 9기 문병학입니다. 하나님께서 1987년 고3 시절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구원의 은혜로 찾아와 주셨고, 대학을 입학하면서 ESF를 통해 말씀 제자훈련으로 제 인격과 가치관, 인생관을 새롭게 하셨습니다. 비로소 하나님께서 제 인생의 주인이요 힘이시며 소망이 되심을 고백하게 하셨습니다. 참으로 겨자씨만한 연약한 믿음을 믿음 되게 하셔서 지금까지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 오늘도 내일도 이 하나님의 은혜로 살게 될 것을 믿으니 감사가 되고 기쁨이 되고 오늘도 기대가 됩니다. 인생을 시작하게 하신 하나님께서 늘 제 앞서 행하시고, 사면을 둘러 진 치시고 인도하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보게 되니 행복하고 평안합니다.
저는 2009년 5월 23일 에티오피아 선교사로, 에티오피아 한인교회 목회자로서 에티오피아 한인교회와 교회의 동역자들과 함께 에티오피아 영혼들을 섬기고 있습니다. 안식월을 기해 그리웠던 조국과 가족, 동역자들을 4년 만에 보게 되니 너무 감사하고 좋습니다.
제가 사역하게 된 곳은 에티오피아로 구약 성경의 시바 여왕, 신약 사도행전의 간다게 등을 통해 알려져 있는 나라입니다. 우리 조국이 풍전등화의 시기인 1950. 6. 25 때 당시 하일레 셀라세 황제는 자신의 친 근위대 6,037명을 45일간 배로 태워 UN군 소속으로 참전케 하여 우리 조국을 지켜준 나라인 혈맹국가이기도 합니다. 현재 이곳은 1971년부터 20여 년간의 공산정권과 1990년 초반부터 이어온 군사 독재정치로 인해 온갖 질병과 가난, 꿈을 현실로 바꾸기에는 여전히 힘에 겨운 광야와 같은 곳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1~2년 기간 구슬땀을 흘리며 섬기시는 봉사자들과 복음을 위하여 애쓰시는 선교사님들과 함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세워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사역(마9:35)을 주님께서 남기신 사역으로 받아 우리 삶의 자리와 교회에 잘 채워가고자 “선교와 교육과 치유하는 교회”라는 목표로 달려가고 있습니다. 장학생들을 발굴하여 후원, 관리하여 10년, 20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교회와 선교사, 봉사자들과 더불어 팀사역의 형태로 선교하고 있습니다. 각색질병 든 환우들을 돌보는 치유사역을 이루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후배 동역자 여러분, 바라기는 하나님과 동행된 기본 경건생활에 충실합시다. 그리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늘 열린 마음으로 우리 삶에 복음과 함께 고난 받고자 하는 열심을 품읍시다. 마지막으로 주님과 함께 좀 더 크고 멀리 바라보면서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도전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가능하면 국외에서 봉사할 수 있는 길이나 경험의 자리를 많이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존경하는 선배 동역자 여러분, 주 안에서 늘 성령으로 충만하시길 바랍니다. 믿음의 아름다운 본들을 기억하고 오늘도 열심히 달려가고자 하오니, 믿음과 축복의 근원으로서 늘 영육간 늘 강건하시길 기도합니다. 오늘도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장차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저와 여러분을 위해 많은 증인들이 증거할 수 있는 섬김의 삶들을 잘 채워갈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그런 복 있는 저와 여러분의 인생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게타 이바르카츠후 !! God bless you !!

 

남충성선교사님

 

 

 

 

 졸업식을 기점으로 다사다난했던 1년간의 사역이 마무리 되며 방학이 시작되었습니다. 학교 안에서의 사역들을 정리하며 이곳에서의 관계와 사역을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무엇보다도 일 년을 보내며 이 자리에서 어떤 삶을 살아내는 것이 필요하며 중요할지를 깊이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지난 번 처음으로 진행한 9학년 캠프의 반응이 좋아 그 연장으로 각 학년별로 캠프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 캠프들의 책임을 맡아 섬기고 있습니다. 암하릭을 지속적으로 사용하면서 꾸준히 언어가 늘어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단지 진행을 넘어서 아이들과 마음을 터놓고 생각을 나눌 수 있을 만큼의 언어 능력을 위해 계속해서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혼자 있는 시간 충성이는 무엇을 하나? 주로 하루 일과가 끝나는 시간은 오후 5시입니다. 그때부터는 특별히 학교에 일이 생기지 않으면 제 시간을 갖습니다. 암하릭 공부도 원래는 수업을 해야 하지만 학교 일이 많은 관계로 수업을 지난 달부터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주경야독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5시 일과가 끝나면 가벼운 조깅과 웨이트 트레이닝으로 운동을 합니다. 체력이 뒷받침 되지 않으면 이 나라에서는 금방 지치기 때문에 체력관리는 어느 정도 필수입니다. 그리고 나서 운동이 끝나면 한 시간정도 저녁식사를 준비하고 저녁 식사 후 정리하면 한 시간이 또 훌쩍 지나갑니다. 그리고 에티오피아 예가체프 커피를 마시며 잠시 휴식을 취합니다. 9시부터는 본격적으로 암하릭 공부를 합니다. 어느 정도 기본기를 마쳤기 때문에 혼자 공부하는 것이 크게 무리는 없습니다. 하지만 가능하다면 더 깊이 있는 구사하고 설교가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아직 멀었기 때문에 가끔 지칠 때도 있기는 하지만 꾸준히 공부를 놓지 않고 있습니다. 12시까지 암하릭 공부를 하고 12시가 되면 취침을 합니다. 그리고 6시반에 기상하여 다시 하루의 일과를 시작하지요. 아내가 없기 때문에 혼자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고 깊이 있게 공부할 수 있어서 좋은 점도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내의 공백이 너무나도 커서 하루하루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는 중입니다. 가끔씩 찾아오는 고독감과 우울함이 지금으로서는 가장 큰 문제입니다. 우울함으로 말미암아 무기력함에 빠져 의욕을 상실하지 않도록 노력하고 있는 중이며 그것을 위해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한국가기 전까지의 시간동안 더 열심히 공부도 하고 경건의 시간을 보내며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의 시간을 보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 기 도 제 목 -
1. 1년 동안의 선교기간을 돌아보며 사역지에 잘 적응하게 하시고 또 우리가정의 모든 필요를 넘치게
채우신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립니다.
2. 하나님과 독대하며 사역과 관계에 대한 내 마음을 잠잠하게 하시고 오직 그 분의 음성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는 선교사가 될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
3. 혼자있는 시간이 길어지고 있습니다. 이 시간에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고 새로운 시작을 위한 준비를
하는 시간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허달무선교사님

 

 

 

 

현지 여성과 결혼하였으며 한별학교의 행정 및 운영,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국말과 컴퓨터, 태권도를
가르치고 있는 교사이면서 밀알복지재단 에티오피아 프로젝트코디네이터로 섬김.
허달무라는 이름은 가명이 아니고 큰할아버님께서 심사숙고해서 지어주신 본명입니다.
나는 전라도종족입니다. 어느 나라를 가든지 한국과는 다른 문화, 경제적 배경 등으로 인해 해프닝이 자주 일어나곤 합니다. 83여개의 종족이 함께 모여 있는 에티오피아와 한국은 근본적으로 매우 다르기 때문에 웃지 못 할 일들이 자주 벌어지곤 합니다.

에티오피아에서 생활한지 2개월쯤 접어들었을 때 한 선생님이 다가와서 더듬더듬 영어로 몇 가지를 묻더니 돌연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넌 무슨 종족이니?” 그래서, 저는 한국은 단일 민족으로 구성된 나라고, 그렇기 때문에 나라에서 사용하는 말도 하나뿐이다 라고 설명을 했답니다. 에티오피아는 암하릭 어라는 공용어가 사용되지만 지역별로 83개의 종족언어가 각기 제2언어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한별학교가 있는 딜라 지역은 게데오라는 종족이 사용하는 게데우파라는 언어가 공통 지역 언어입니다. 그랬더니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하더군요. 어떻게 6천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하나의 말로 소통을 할 수 있냐면서 거짓말하지 말라 하더군요. 그래서 전 어쩔 수 없이 제 고향이 광주광역시인터라 “전라도종족”이라고 대답해 버렸습니다. 몇 달 뒤 3개월 정도 한별학교에 봉사를 오신 분의 고향이 경주라 말투가 약간 다르게 들렸나 봅니다. 다시, 그 선생님이 와서 종족을 묻길래, “경상도종족”이라고 대답해줬더니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워 주더군요.
에티오피아에서 생활한지 9개월째 접어들었을 때 몸의 상태가 서서히 나빠지기 시작했습니다. 갑자기 이상해졌다면 바로 병원에 갈텐데 약한 몸살감기 증세가 한동안 계속되더니 갑자기 오한에 몸을 부르르 떨면서 두개골이 깨지는 두통에 시달리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병원에 가서야 말라리아와 장티푸스라는 중한 병에 한꺼번에 감염되었음을 알게 되었고, 약 한 달 간 치료를 받아야 했답니다.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다 밤에는 잠을 이루지 못해 멍한 상태로 다음날 아침을 매일 맞이하다 보니 이게 정말 아픔이라는 것이고, 치료가 없다면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치료 받는 동안 학교는 출근하지 못할 정도로 힘든 시간을 보내다 겨우 보름 후부터 조금씩 움직일 수 있었습니다. 이 곳 아이들의 얼굴을 바라보면 참 예쁘게 생겼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한국의 아이들과는 달리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눈이 너무나 예쁘게 커다랗게 반짝거립니다. 제가 아이들 곁을 지나치려할 때마다 고사리 같은 손을 쭉 뻗어 악수를 청합니다. 악수를 받아줄라치면 바로 안겨버리구요. 엉겹 결에 아이의 등을 토닥거리고 있노라면 주변의 아이들이 한꺼번에 달려들어 뒤로 넘어질 뻔한 적이 여러 번 있었답니다.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이 아이들이 저를 에티오피아에 남게 했죠.
이 아이들이 공부하며, 뛰어노는 한별학교가 아이들의 꿈을 이끌어주는 소망동산이 되길 기대하고 에티오피아 다음세대를 책임지는 학생들이 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길 바랍니다.

Posted by 행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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