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만 양병설' 문화재에 걸려 있는 박정희 붓글씨
경기도 파주에 있는 이율곡 관련 임진왜란 유적 화석정
오마이뉴스 정만진 입력 2016.12.23 09:26
▲ 화석정에서 바라본 임진강의 밤 풍경. 1592년 4월 30일 밤, 선조와 조선 조정의 대신들과 일부 수행원들도 야밤에 임진강을 넘어 의주를 향해 도망갔다. 당일 <선조실록>에는 임금을 따라나선 사람이 대신까지 다 합쳐도 채 100명이 안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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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선조는 장남 임해군 대신 차남 광해군을 급히 세자로 책봉했다. 세자 책봉은 임금이 돌연사했을 때 즉시 뒤를 이을 왕을 정하는 국가적 중대 정치 행위이지만, 지금은 번갯불에 콩을 볶아 먹듯 그 일을 서둘러야 할 만큼 상황이 다급했던 것이다.
광해군이 왕위 계승자로 지명된 것은 형 임해군이 난폭한 성정에다 어리석다는 평판을 얻어온 덕분이었다. 그에 비해 광해는 총명하다고 소문이 자자했다. 아니나 다를까, 선조가 4월 30일 새벽 2시경 도승지(비서실장) 이항복의 등불 인도에 따라 돈의문 아래를 출발하여 서울을 떠나자, 기다렸다는 듯이 백성들이 몰려들어 임해군의 집을 불태워버렸다.
▲ 경기도 남양주에 있는 광해군의 묘. 왕릉이라는 이름을 얻지 못한 이 무덤은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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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 1592년 4월 29일 : 이날 밤 호위하는 군사들이 모두 달아났고, 궁문엔 자물쇠가 채워지지 않았으며, 금루(물시계)는 시간을 알리지 않았다.
궁궐 타오르는 불빛이 선조 일행의 등을 비추었다. 불빛은 빗물 위를 둥둥 떠 다녔다. 궁궐이 활활 타면서 토해낸 불빛은 깊은 밤 칠흑 같은 빗속의 도성 내부를 그런대로 걸을 만하게 만들어 주었다. 선조와 대신, 그리고 내시까지 다 합해도 겨우 100여 명에 지나지 않는 도피 일행은 불빛을 등진 채 철벅철벅 물길을 걸었다.
비는, 선조가 벽제역을 지나 혜음령(고양시와 파주군 광탄면 경계)에 닿자 더욱 세차게 쏟아졌다. 일행 중 시종들은 말할 것도 없고, 대신들까지도 슬금슬금 눈치를 보더니 하나 둘 종적을 감췄다. 왕을 따라가 봐야 고생만 할 뿐,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것쯤은 삼척동자라도 다 눈치챌 수 있는 상황이었다.
선조 일행이 임진강에 도착한 때는 천지사방이 암흑에 캄캄하게 파묻힌 뒤였다. 율곡의 후손들이 강변의 정자 화석정에 불을 질러 어둠의 기운을 죽였다. 그러자 불빛이 강 북쪽까지 비추어 길을 찾을 수 있었다. 강을 건넌 선조가 말했다.
"나루는 끊고, 주위의 인가도 남김없이 철거하라. 배들도 구멍을 뚫어 가라앉혀 버려라."
진작 불태워 버렸으므로 왜적들이 화석정을 뜯어 뗏목을 만들 일은 없어졌지만, 인가도 남겨둘 것이 아니었다. 무엇이든 남겨두면 적들은 그것을 활용해 도강 시간을 줄일 것이다.
"참으로 세심하고도 영명하신 분부이십니다."
누군가가 선조의 비위를 맞추느라 얄팍한 아부를 일삼는다. 하지만 그 꼼꼼하고도 지혜로운 어명 탓에 일행 중 반은 결국 강을 건너지 못하고 말았다.
개성을 버리고, 또 평양도 버리려는 선조
다음날인 5월 1일, 개성에 당도했다. 다시 한 달 뒤인 6월 10일, 선조는 평양도 버리고 다시 북쪽으로 가려 했다. 백성들이 극심하게 반발했다. 백성들은 도끼와 몽둥이를 들고 선조 일행을 가로막았다. 백성들의 방화로 서울에서 집을 잃은 홍여순은 이번에도 민중의 몽둥이질에 맞아 말에서 떨어지는 망신을 당했다. 그래도 홍여순은 군사들에게 고함을 질렀다.
"반역자들의 목을 베어라! 감히 임금의 앞을 가로막아?"
군사들이 주저하자 홍여순은 직접 칼을 휘두르며 윽박질렀다.
"말을 듣지 않으면 네놈들부터 죽이겠다!"
지켜보고 있던 류성룡이 평안감사 송언신을 강하게 질타했다.
"어째서 난민들의 행동을 진정시키지 못하는가?"
송언신이 그 길로 주동자 셋을 골라 대동문 앞에서 공개 처형한 후 목을 창공에 내걸었다. 비로소 길이 열렸다. 그 사이로 선조 일행이 재빨리 빠져나가 내달렸다.
▲ 경기도 구리시에 있는 선조 왕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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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석정(花石亭)은 경기도 파주시 파평면 율곡리 산100-1에 있다. 임진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강변 언덕 위에 세워져 있는 이 정자는 조선 중기의 대학자 율곡 이이(1536~1584)가 제자들과 함께 시를 짓고 학문을 논한 유서 깊은 곳이다. 화석정은 본래 율곡의 5대조 이명신이 세종 25년(1443)에 건립하였고, 성종 9년(1478)에 이이의 증조부 이의석이 중수하였으며, 이때 이숙함이 '화석정'이라는 이름을 지었다고 전해진다.
이율곡 유적 화석정, 임진란과 6.25 겪으며 두 번 전소
화석정은 임진왜란 때 불에 타 없어진다. 그 후 80여 년간 빈 터만 남아 있던 중, 현종 14년(1673)에 이르러 율곡의 후손들이 복원했다. 하지만 1950년의 6.25전쟁 때 다시 소실되고 마는데, 1966년 파주의 유림들이 성금을 모아 재차 복원한다. 화석정은 경기도 유형문화재 61호로, 현판 글씨는 박정희가 썼다.
▲ 율곡이 8세 때 쓴 시가 화석정에 편액으로 걸려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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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속 정자에 가을이 이미 깊으니
騷客意無窮
시인의 생각은 끝없이 이어지누나
遠水連天碧
먼 곳 물은 하늘에 닿아 푸르고
霜楓向日紅
서리 맞은 단풍은 햇빛 받아 불타네
山吐孤輪月
산은 외로운 둥근 달을 토해내고
江含萬里風
강은 만 리 바람을 머금는다
塞鴻何處去
변방의 기러기는 어디로 가는고?
聲斷暮雲中
새소리, 저녁 구름 속으로 사라지네'
화석정에 걸려 있는 '八歲賦詩(팔세부시)' 편액의 시 작품이다. 율곡이 여덟 살 때 지은 시라하여 그런 제목이 붙었다. 이 시 역시 화석정에 서린 역사의 발자취를 떠올리게 해준다. 그래도, 화석정에 깃들어 있는 이야기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임진왜란 당시 상황과 맞물려 있는 '율곡의 선견지명' 설화일 것이다.
임진왜란 발발과 선조의 화석정 야밤 방문 예언했다?
율곡은 10년 안에 일본이 조선을 침범할 것을 미리 알고 10만 양병설을 주장하였다. 하지만 유성룡 등 대부분의 대신들은 율곡의 말을 두고 지나친 걱정이라면서, 나라가 태평성대인데 까닭도 없이 군사를 양성하면 혼란만 키울 뿐이라고 반대하였다. 결국 율곡은 뜻을 이룰 수 없었고, 은퇴한 뒤 화석정에서 은거하였다.
율곡이 타계하고 8년 후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아무 대비도 하지 않았던 선조는 신하를 거느리고 한양을 떠나 의주 쪽으로 피란을 떠났다. 하지만 임진나루에 도착한 선조 일행은 강을 건널 수가 없었다. 너무나 칠흑 같은 어둠이어서 한 치 앞도 내다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때 갑자기 화석정에 불이 붙어 타오르면서 나루를 환하게 비추어 주었다. 1592년 4월 30일 밤, 화석정에 불을 지른 이들은 율곡의 후손들이었다. 율곡은 세상을 떠나면서 후손들에게 "화석정 건물 곳곳에 기름칠을 잘 해 두었다가 모년 모월 모일에 불을 지르라" 하고 유언을 남겼는데, 그 모년 모월 모일이 바로 선조가 임진강을 건너기 위해 쫓아온 그날이었던 것이다.
▲ 화석정 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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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10만양병설'은 <선조수정실록> 1582년 9월 1일자에 실려 있다. 실록은 '이이가 "미리 10만의 군사를 양성하여(預養十萬兵) 앞으로 뜻하지 않은 변란에 대비해야 한다(以備前頭不虞之變)"라고 말하자 류성룡이 "군사를 양성하는 것은 화를 키우는 것(養兵所以養禍)"이라며 매우 강력히 반박했다(論辨甚力)'면서 '그 후 이이는 항상 "(동인인) 류성룡은 재주와 기개가 참으로 특출하지만 (서인인) 우리와는 일을 함께 하려고 하지 않으니 우리들이 죽은 뒤에야 반드시 그 재주를 펼 수 있을 것"이라고 탄식하였다. 임진년(1592)에 변란이 일어났을 때 군사 관련 일을 맡은 류성룡은 늘 "이이는 선견지명이 있고 충성스럽고 부지런한 의지가 있었으니 그가 죽지 않았다면 반드시 오늘날에 도움이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라고 증언하고 있다.
이율곡의 '10만 양병' 주장은 역사적 사실일까?
문제는, 북인들이 <선조실록>을 편찬하면서 서인인 이이, 성혼, 박순, 정철 등을 고의로 헐뜯어 놓았다고 판단한 서인들이 1643년 이래 새로 만든 것이 <선조'수정'실록>이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 10만양병설이 처음 나타나는 곳이 율곡의 문집이 아니라 그의 문인(門人) 김장생(1548~1631)이 1597년에 쓴 '율곡 행장(行狀, 전기)'이라는 데서 논란이 싹튼다. <선조수정실록>의 10만양병 부분은 김장생이 쓴 '율곡 행장'의 기록을 베껴서 옮긴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율곡이 일찍부터 임진왜란을 대비해 10만양병설을 주장했다는 근거가 될 만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 화석정 밖에서 임진강을 바라보고 있는 아들과 그의 노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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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은 '죄를 지어 유배 중인 장수들을 풀어주어 반란 지역으로 파견할 것, 경상도 바닷가 지역의 쌀을 육로나 해로로 경성으로 보내 군량미로 쓰도록 할 것, 군량미를 운반하는 데 필요하면 종친과 대신들의 소와 말을 내놓게 할 것' 등의 대책까지 발표한다.
5월에 또 다시 같은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2만 기나 되는 니탕개 일당은 종성을 포위하여 군관 등 아군을 죽였는데, 특히 5월 16일에는 반란군의 세가 3만 기나 되었다. 7월 9일에도 니탕개 등이 2만여 기를 이끌고 와 방원보를 포위해 접전이 벌어졌다.
그해 7월 초, 선조는 "하삼도(下三道,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일원에 있는 절의 종을 거두어 총통(銃筒)을 만들도록 하라"는 명령까지 내린다. 이듬해인 1584년 4월에는 전라도 쌀 5천 석과 경상도 쌀 4천 석이 북방 국경 지역으로 전달되기도 한다.
▲ 화석정 |
ⓒ 정만진 |
그 이후에도 오랑캐들은 계속 쳐들어 왔고, 아군의 반격 및 선제 공격도 이어진다. 1588년 1월 1일 북병사 이일은 우후 김우추에게 군사 400명을 주어 적의 소굴 추도를 급습하게 하여 33명의 목을 베고, 따로 2천여 기를 녹둔도에 쳐들어 왔던 자들의 거주지인 시전부락에 보내 380여 적군을 죽였다. 그로부터 며칠 뒤인 1월 중순에도 시전부락에 대한 소탕전은 이어졌다.
2월, 오랑캐들이 혜산을 침입하여 조선 군관 등을 살상하였고, 6월에는 누란도에 적선 20척이 쳐들어오기도 했다. 그리하여 6월 20일에는 남병사 신립이 적들의 고미포 부락을 공격하여 20여 명을 죽였다.
요약하면, 임진왜란 이전의 조선이 태평성대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즉, 태평성대에 무슨 10만 군사를 양병하느냐며 류성룡 등이 율곡을 비난했다는 것은, 비난 자체는 사실일 수도 있겠지만 '태평성대 운운'은 결코 당대 상황과 일치되지 않는 허구라 할 것이다.
임진왜란 이전 10여 년, 조선은 태평성대가 아니었다
▲ 화석정 너머로 바라보이는 임진강의 풍경. 마침 구경을 온 아들이 노모에게 손가락으로 임진강을 가리키며 뭔가 설명을 하고 있다. |
ⓒ 정만진 |
그래도 이때까지는 아직 율곡의 우려가 "지금 경원의 오랑캐는 한두 해에 평정될 것이 아니니 군사의 위력을 한번 떨쳐 그들의 소굴을 소탕하지 않으면 육진은 끝내 편안할 때가 없을 것입니다"로 나타나 있어, 그의 걱정이 북방의 외침에 집중되고 있는 듯 여겨진다.
하지만 니탕개의 반란 이전에 선조에게 제출된 것으로 보이는 군정책에서는 '우리나라는 바다에 접한 땅이기 때문에 왜구가 날뛰어 불시에 출현하니, 어찌 전쟁을 잊은 채 군사 준비를 넉넉하게 하지 않을 도리가 있겠습니까? (중략) 지금 방어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곳은 바다에 접한 3면보다 더 급한 곳은 없습니다'라고 말한다.
이는 일본의 대규모 전쟁 도발에 대한 우려를 율곡이 적극적으로 밝힌 대목이다. 즉, 일본이 임진왜란과 같은 대규모 전쟁을 도발할 것으로 율곡이 예상한 바는 없다는 논조는 옳지 않다는 지적이다. 다만 선조가 화석장에 도착하여 야밤에 임진강을 건너려고 하는 날짜까지 율곡이 맞추었다는 민간의 설화조차 역사적 사실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 화석정 앞 안내판에 그려져 있는 화석정의 모습 |
ⓒ 정만진 |
그 결과 '박정희 정권이 추진한 자주국방 확립 목적의 전력(戰力) 증강 사업에 붙인 암호명도 율곡(栗谷)사업이 되었다. 박정희는 율곡사업을 추진하여 방위산업을 일으켰고, 1974년 시작한 제1차 율곡사업은 제3차까지 이어졌다.' 박정희 정권은 율곡의 십만양병설을 차용하여 전쟁 위험을 국민들에게 주입함으로써 권력을 강화하고 유지하는 밑거름으로 썼던 것이다. 그 상징적 행위로 박정희는 화석정 현판의 글씨를 썼다.
▲ 화석정의 현판에 '朴正熙' 세 글자가 뚜렷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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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아래 임진나루에서 선조 일행이 야밤 도강을 했구나... 그런 생각을 하니 어쩐지 강물이 슬픈 소리를 내며 흘러가는 듯 느껴지고, 율곡의 '팔세부시'의 표현처럼 저 강물은 어디로 흘러가는 것일까 싶기도 하고, 아득하게 멀어진 끝에 하늘과 맞닿았다가 푸르른 빛깔과 함께 사라지는 임진강이 만 리 바람을 머금은 채 허공을 떠도는 듯 여겨지기도 한다.
게다가 놀랍게도 그 순간, 마치 화석정이 붉게 화염에 불타 붉게 번져 오르다가 순식간에 소멸되어 없어지는 광경까지 눈앞에 펼쳐진다. 아무도 없는데, 지금 이 순간 화석정에는 사람 하나 없는데, 누군가가 정자에 불을 지르는 환상이 보이다니...? 여덟 살 난 율곡의 말처럼, 숲속 정자에 이미 가을이 깊어진 탓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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