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장
왕의 체포당하심과 고난당하심
(마태복음 26장)-2
동산에서의 고통(26 :36-46)
겟세마네는 예수님이 제자들과 자주 가시던 작은 감람나무 숲이었습니다
(요 18 :2). 예수님은 동산 입구에 여덟 명의 제자들을 남겨놓으시고 베드로
와 야고보, 요한과 함께 동산에 들어가셔서 슬픔을 나누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깨어 있으라고 명하시고 조금 나아가서 고통 가운데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셨습니다. 제자들과 그
슬픔을 같이 하시기 위해 예수님은 그 세 명을 돌아보셨지만 그들은 자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너희가 한 시도 나와 함께 깨어 있을 수
없느냐"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몇 분전에 자신의 대단한 충성심을 자랑
했던 베드로의 양심에 가책이 되었을까요? 만약 그랬다면 베드로가 또 다시
잠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마음은 원했지만 육신은 약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 번 기도하셨고 잠자고 있는 제자들을 두 번 깨우셔야 했습니
다. 마침내 예수님은 일어나셔서 잡히실 때가 임박했음을 제자들에게 알리
시고 주님과 함께 깨어있을 기회가 지나갔음을 말씀하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주님의 경험은 독특한 것이었습니다. 주님의 영혼
은 "고민하고 슬퍼하사... 죽게 되었"습니다(37, 38절). 그 말씀은 절망의 깊
이와 설명할 수 없는 슬픔의 물결을 생각하게 합니다. 예수님은 불길한 두
려움의 공포에 사로잡혀 계셨을 것입니다. 시편 116 :3의 옛 예언은 다윗이
아니라 주님 자신의 말씀이었습니다. "사망의 줄이 나를 두르고 음부의 고
통이 내게 미치므로 내가 환난과 슬픔을 만났을 때에.." 이 말씀은 그 날 밤
에 예수님이 경험한 사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고난의 잔을 바라보셨습니
다. 어떤 이들이 추측하는 대로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사단이 예수
님을 죽일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두려워하지 않으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힐 때의 고통을 겁내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런 것들은 예수님
을 겁쟁이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십자가에 관련된 두려움으로, 우리
의 죄악과 죄를 미워하시는 하나님의 저주를 모두 감당해야 하는 부담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 고난의 잔은 형벌의 상징이었고 그것을 마신다는 것
은 모든 형벌을 감당한다는 의미였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
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이었습니다(고후 5 :21).
물론 예수님의 인간적인 의지는 신성과 상충되지 않습니다. 주님은 고난
의 잔을 바라보셨고 그 잔을 마신다는 것은 영원 가운데 하나님과 누렸던
교제의 중단을 의미한다는 것을 아셨기에 그 두려움에 몸을 떠셨습니다. 그
것은 단순히 함께 하지 못하는 것 이상이었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진노를
감당하셔야만 했습니다. 갈보리에 덮인 어두움은 주님의 영혼을 덮었던 헤
아릴 수 없는 영적 어두움을 어렴풋이 묘사하는 것입니다. 39절의 고통의
외침에서 주님은 인류를 구원할 다른 어떤 방법이 있다면 그것을 구하고 싶
으셨습니다. 두 번째 세 번째 기도하시는 가운데 주님은 순종이외의 다른
방법이 없음에 동의하셨습니다. 주님은 고난의 잔을 받으실 것입니다. 그
전쟁은 승리입니다.
배신, 체포, 예언의 성취(26 :47-56)
동산을 떠나시면서 주님은 다시 한 번 앞으로 되어질 일들에 대한 그 분
의 완벽한 예지를 증명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놀랐지만 예수님은 그렇지 않
으셨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셨을 때(46, 47절) 어둠 속에서 대제사장들과 장
로들에게서 파송된 흉악한 무리들과 함께 유다가 나타났습니다. 배신자 유
다는 예수님께 입을 맞추었고 그것은 예수님을 붙잡으라고 신호하는 배신
행위였습니다. 솔로몬의 잠언 27 :6은 그날 밤에 증명되었습니다. "친구의
통책은 충성에서 말미암은 것이나(주님의 꾸지람에서 볼수 있는)원수의
자주 입맞춤은 거짓에서 난 것이니라"(유다의 배신 행위에서 보여지는). "친
구"라는 사랑스러운 호칭은 유다의 양심을 일깨웠지만 소용없는 일이었습
니다. 사단이 이미 유다의 마음을 차지해 버렸으며 유다는 돌이킬 수 없는
곳으로 간 것이었습니다. 유다의 입맞춤은 "속히 그를 잡으라"는 신호였습
니다. 그는 하잘 것없는 사람들에게 전능하신 왕께서 체포당하는 것을 피할
까봐 속히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으니 얼마나 마귀에게 눈이 먼 것입니까!
하지만 주님은 순종하셨고 이 순종은 베드로의 어설픈 대항을 더 크게했
을 뿐입니다. 베드로의 마음에는 이미 죄가 들어와 있었기 때문에 열 두 영
이 더 되는 천군을 부르실 수 있는 주님의 위엄과 영광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열 두 영을 부르시는 것은 구약성경에서 주님께서 죽음으로 내려가
는 좁은 길에 대해 나타낸 성경을 완전히 이루기 위해 주어지지 않았습니
다.
유다의 배신과 베드로의 육신적 행동 그리고 마태 자신을 포함한 제자들
의 비겁한 행동은 주 예수님의 온유함과 끈기있는 순종과는 분명히 대조되
는 것이었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말씀 안에 거하시는 균형잡힌 모습으로
침착과 위엄을 보이셨습니다.
종교재판(26 :57-68)
두 번의 재판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종교재판이었고 또 하나는 민사재판
이었습니다. 종교재판에서는 신성모독의 혐의를 받았고 민사재판에서는 국
가에 대한 반역의 혐의를 받았습니다. 종교 재판장은 당시의 대제사장인 가
야바였고 민사재판은 로마 총독인 빌라도가 맡았습니다.
베드로는 멀찍이 주님을 따라갔으며 "일의 결국을 보기 위해" 대제사장
의 집 뜰까지 위험을 무릎쓰고 들어갔습니다. 그의 마음은 냉담했고 무거웠
으며 그가 꿈꿔왔던 모든 것들이 무너졌다는 느낌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
습니다. 우리는 베드로가 특히 나머지 모든 사람들은 달아났을 때 따라갔다
는 점에서 그에게 약간의 점수를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가 보고 들은 것
은 그를 비참한 결과로 이끌었습니다.
재판은 처음부터 끝까지 잘못되었습니다. 재판이 밤에 열렸으며, 거짓 증
인을 소환했고 그들의 말만 듣고 재판을 집행했으며 대제사장은 그의 옷을
찢었기 때문에(레 21 :10) 이것은 불법재판이었습니다. 이것이 이교도의 재
판이 아니라 히브리 사람들의 소위 종교재판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때 우
리의 법적인 평등의식은 모욕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어떤 "증거"도 들어보
기 전에 판결이 내려졌습니다. 왜곡된 허위 진술에 근거를 두고 잘못된 증
언과 근거없는 혐의에 의한 성급한 판결은(61절과 요 2 :18-22을 비교하십
시오) 그 재판이 불법이라는 것과 급히 유죄판결을 내렸음을 증명했습니다.
우리는 재판장과 증인들은 화가 나서 흥분했음을 느낄 수 있으며 잠잠한 죄
수에 대한 기록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단 한마디
의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같이 주님은
단 한마디의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마침내 대 제사장은 묶인 주님이 진실을 말하게 하려고 가장 위엄있는 방
법인 재판장의 맹세를 사용하였습니다. 주님이 메시야라는 주장에 관한 소
문과 이야기는 한시라도 계속되어서는 안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
나님의 아들인지 아닌지, 메시야인지 아닌지 말해야 했습니다. 근엄한 위엄
으로 예수님은 두가지 주장을 하셨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며 다니
엘이 예언한 인자라고 하셨습니다.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
든 백성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로 그를 섬기게" 한 만유의 후사이십니다
(단 7 :13, 14).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어조와 그 중대함은 법정을 어리둥절
하게 했음이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그 두려운 침묵은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화를 냄으로써 깨졌습니다. 대제사장은 구약의 예언을 알고 있었습
니다. 그는 예수님이 엄청난 주장을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네가
말하였느니라"는 말씀은 메시야라고 하는 예수님의 주장을 견고히 하는 것
이었습니다. 주님께서 "그러나" 라고 하여 덧붙여 주장하신 말씀은 예수님
이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시고 결국 승리 가운데 이 땅으로 되돌아오실 것을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이것으로 충분했습니다. 빠르게 유죄판결이 내려졌습니다. 67, 68절의
무서운 말씀을 읽으면서 우리는 그들이 모든 사람들에게 존경과 숭배를 요
구했던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이었다는 것을 기억하게 됩니다. 실제로 그
들은 자신들의 악행을 감추기 위해 종교를 이용했던 위선자들이었습니다.
베드로는 항의 한 번 하지 않고 조용히 구경꾼으로 앉아 있었음에 틀림없
습니다. 요한도 유다도 멀리 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동정의 말한
마디 나오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감각은 종종 죄를 짓기도 하고 무뎌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절대로 죄를 범하지 않으셨고 그분의 감각은 무뎌
지지 않고 살아있었습니다. 주 예수님께서 그 날밤 고난당하셨던 감정과 표
현할 수 없는 고통-정신적, 영적 육체적-은 얼마나 깊었을까요?
다른 의미로 하나님의 아들은 여기에서 심판을 받으신 것이 아니라 가야
바와 모든 민족들이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계속되는 죄악은 이
제 절정에 달했고 그 판결은 또다른 죄악 중의 하나였습니다.
베드로의 불시험(26 :69-75)
새벽이 가까워지고 뜰에서 다른 사람들과 불가에 모여있던 베드로는 잠
시동안 주님이 대적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확인받았습니다. 불빛 속에서 베
드로의 얼굴을 유심히 쳐다보던 한 소녀가 소리쳤습니다. "당신도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어요" 베드로는 놀라서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척 하면서 그녀를 피해 불가에서 멀찍이 떨어졌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하녀가 그를 보고 사람들에게 베드로가 예수님과 "함께 다니던 사람"
이었음을 확인했습니다.베드로는 진실을 말하겠다고 맹세하면서 그 하녀
의 말을 부인했습니다. 마지막으로 곁에 서 있던 사람들도 베드로가 예수님
과 함께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베드로는 갈릴리의 어투로 말했기 때문에 사
람들은 그것이 베드로가 예수님과 함께 다녔음을 알리는 확실한 증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베드로는 마구 화를 내었습니다. 저주하면서 맹세하여 예수
님과 아무 관계도 없다고 강하게 부정하였습니다. 베드로의 부인은 불길한
아침이 밝아오는 가운데 닭이 울면서 끝났습니다. 곧 베드로는 전날 밤에
주님이 하신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마음이 무너지면서 눈물이 흘러내렸습
니다. 혼자 밖으로 나가 그는 통곡했습니다.
진정한 베드로의 실패는 이미 오래 전에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그 시작은
베드로의 자만심, 교만함이었습니다. 사단이 밀까부르듯 하는 것은(눅
22 :31, 32) 힘들지만 철저했으며 많은 껍데기들을 발견해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밀이었습니다. 중보자이신 예수님의 기도는 응답되었습니다. 베
드로의 눈물은 그의 "변화" 또는 관계의 회복 그리고 베드로의 자아가 깨지
는 첫단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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