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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일주 인문기행 - 여덟 번째 편지] 음악과 바다, 낭만과 혁명의 나라 쿠바

오마이뉴스 | 정수현 | 입력 2017.03.31 11:07




[오마이뉴스정수현 기자]

지금부터 거의 20년 전에 신영복 선생님의 <더불어 숲>(신영복의 세계여행)을 처음 접했습니다. 새로운 세기를 맞이하는 문명과 사람에 대한 깊은 통찰이 담긴 따뜻한 글과 그림 엽서. 20대 초반의 대학생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갖는데 큰 영향을 받았음은 물론이며 그 감동으로 막연하게 세계일주에 대한 꿈도 품게 됐습니다. 인생의 반환점에 이르렀다고 생각되는 2017년, 배낭여행자가 되어 그 꿈을 실행에 옮깁니다. 당신이 보낸 첫 번째 엽서에 적혀있던 '언젠가 나는 당신의 답장을 읽어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라는 문구에 무모한 용기를 얻어 여행지에서 편지를 띄웁니다. 이 여행기는 당신 그리고 또 다른 수많은 당신들과의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 기자 말

 소설 '노인과 바다'의 배경이 되었던 작은 어촌마을 꼬히마르의 포구
ⓒ 정수현
쿠바는 <노인과 바다>의 주인공 산티아고를 닮았다

꼬히마르라는 바닷가 마을에 살던 노인 산티아고. 84일 동안 한 마리의 물고기도 잡지 못하다가, 85일째 되는 날 만난 엄청난 크기의 청새치. 사투 끝에 청새치를 잡지만 기다리고 있던 것은 상어 떼의 습격. 드넓은 바다의 한가운데에서 노인이 가진 것은 고작 몽둥이와 노. 고독한 싸움 끝에 마침내 5일만에 항구로 귀환. 남은 것은 살점이 다 떨어져 나간 청새치의 앙상한 흔적 뿐.

"인간은 파괴될 수는 있어도 패배할 수는 없다."

당신도 잘 알고 있는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소설 '노인과 바다'의 줄거리입니다.

아바나 인근 꼬히마르에서 앉아 노인이 떠났다가 돌아왔을 바다를 바라봅니다. 그리고 지금의 쿠바는 소설 속 주인공 산티아고를 참 많이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쿠바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수십년이 지난 낡은 건물과 올드카
ⓒ 정수현
체 게바라와 헤밍웨이, 쿠바 관광의 핵심 요소

쿠바는 매우 역설적인 나라입니다.

먼저 우리의 인식에서 그렇습니다.

냉전시기에 쿠바는 빨간 나라였습니다. 북한과 사회주의 형제국가로서 우리에게는 경계해야 할 대상이었습니다. 냉전시대 이후에도 우리의 최대 우방 미국이 지목한 '악의 축'이었기에 공식적으로 가까이 하기엔 먼 나라였습니다. 

한편으로 미지의 세상을 여행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쿠바는 로망이었습니다. 카리브해와 멕시코만으로 둘러싸인 에메랄드빛 바다, 살사, 시가, 럼, 이국적인 풍경과 순박한 사람들. 미국과 쿠바가 다시 수교를 맺게 되면서 쿠바여행을 꿈꾸던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제 쿠바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말이 돌았습니다. 그 의미는 자본주의 물결이 본격적으로 밀려오면 여행의 낭만적 요소들이 모두 사라져 버릴 것이라는 뜻이었을 겁니다.

여행지 쿠바의 상황이 또한 역설적입니다.

쿠바의 상징과도 같은 풍경으로 여겨지는 올드카,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 같은 낡은 건물, 이동과 농경의 수단으로 쓰이는 마차, … 이 모든 것들이 미국의 봉쇄정책 속에서 생존을 위해 몸부림을 친 흔적이지만, 그것이 쿠바를 찾는 사람들에게는 매력적인 볼 거리가 되었습니다.

관광업은 쿠바경제를 떠받치는 중요한 축입니다. 그리고 관광수입의 상당 부분에 기여하는 인물이 쿠바인은 아니지만 쿠바를 사랑했던 체 게바라와 어니스트 헤밍웨이입니다. 

혁명광장과 산따끌라라의 기념관에서 마주하는 혁명영웅 체 게바라에 대한 쿠바인들의 존경심과 사랑은 대단했습니다. 그렇지만 자본주의 폐해를 극복하고자 사회주의혁명에 투신했던 저항의 아이콘 게바라가 이제는 매우 자본주의적인 방식으로 상품화 되어버린 현실은 아이러니 했습니다. 

헤밍웨이는 20년을 쿠바에서 지내며 '노인과 바다'를 비롯한 명작을 남겼습니다. 헤밍웨이가 머물렀던 호텔, 집, 카페, 바, 해변에는 그의 흔적을 찾는 사람들의 발걸음으로 늘 북적였습니다. 적성국가 미국의 대문호가 벌어주는 달러 역시 아이러니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시인이자 독립혁명가였던 호세 마르티의 동상. 쿠바의 정신은 사회과학적인 이론 보다 시적인 정서에 가까웠습니다.
ⓒ 정수현
저항과 전염병으로 원주민이 거의 사라진 쿠바

쿠바의 역사에서도 콜럼버스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그가 상륙하여 아름다운 땅이라고 말을 했다면, 그것은 곧 착취와 학살의 다른 표현이 됩니다. 지금 쿠바에는 원주민이 거의 남아 있지 않습니다. 절반은 저항하다가 절반은 전염병으로 사라졌습니다. 그 자리는 아프리카에서 끌려온 흑인노예들이 채웠습니다. 스페인 식민지배와 흑백혼혈이 지금의 쿠바를 구성하는 인구와 문화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쿠바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동상은 피델 카스트로도 체 게바라도 아닌 호세 마르티입니다. 19세기 후반 스페인과의 독립투쟁에서 구심점이 되었던 그는 민족주의 혁명가이자 시인이었습니다. 글에 그치지 않고 직접 독립전쟁에 참여했던 호세 마르티는 1895년 전장에서 시처럼 전사했습니다. 어디에 가나 들을 수 있어 쿠바의 아리랑으로 불리기도 하는 유명한 노래 '관따나메라'는 그의 시에서 가사를 따왔습니다. 

2016년 3월 쿠바를 방문했던 미국의 오바마 전 대통령이 쿠바에 던진 화해의 메시지로 인용한 시 '하얀 장미'도 다름 아닌 호세 마르티의 작품입니다. 쿠바인들의 정신과 정서는 맑스도 레닌도, 피델도 게바라도 아닌 호세 마르티에 닿아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내부의 독립의지는 치열했지만 쿠바의 독립을 결정적으로 가능하게 한 요인은 외부에 있었습니다. 1898년 미국과 스페인간의 전쟁에서 미국이 승리하며 쿠바도 독립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외부의 힘이 작용한 독립은 또 다른 종속으로 이어지게 마련입니다. 쿠바도 그랬습니다.

미군정 기간을 거쳐 외관상으로는 독립을 했지만, 미국이 정치적으로 언제든지 개입할 수 있는 불평등한 조약을 맺었고, 쿠바의 경제기반이라고 할 수 있는 사탕수수 농장과 제당소, 토지 등이 모두 미국자본의 손아귀에 들어갔습니다. 친미정권의 독재자들은 마피아와 손잡고 이익을 나누어 가지며 아바나를 미국 향락문화의 배설구로 전락시켰습니다. 

달라진 것 없는 민중의 피폐한 삶, 꺾여버린 민족적 자존심은 필연적으로 혁명을 잉태하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1956년 12월, 피델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 등 무장 게릴라 82명이 승선한 요트 '그란마'호가 쿠바의 동남부에 도착합니다.

게릴라군은 시에라마에스트라 산맥을 거점으로 투쟁하며, 뉴욕타임스 등의 미디어를 활용하여 국내외적인 여론을 우호적으로 장악해갑니다. 마침내 독재자 바티스타는 도미니카로 도망치고 1959년 1월 게릴라군이 아바나에 입성하며 쿠바혁명이 일단락됩니다.

 아바나 혁명광장 전경. 쿠바혁명에 지대한 공을 세운 체 게바라와 씨엔푸에고스의 이미지가 건물 외벽을 철제구조물로 장식하고 있습니다.
ⓒ 정수현
초기 카스트로는 사회주의가 아니라 민족주의 성향이 강했다

쿠바혁명이 처음부터 사회주의적인 색채를 강하게 띤 것은 아니었습니다. 혁명 초기 카스트로의 성향은 민족주의적인 면이 많았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그러나 미국의 턱 밑에서 친미정권을 뒤엎어 버린 이 혁명에 미국은 처음부터 적대적으로 나오게 되고, 이것은 쿠바가 생존을 위해 소련을 위시한 공산진영으로 급속하게 기울게 만드는 원인이 됩니다.

국교단절, 혁명정부를 무너뜨리기 위한 미국의 피그만 침공과 실패, 미국과 소련의 힘겨루기가 벌어진 쿠바 미사일 위기, 미국의 대(對)쿠바 봉쇄조치, CIA가 수없이 시도한 카스트로 암살기도 등 냉전기간 내내 쿠바와 미국은 극한으로 대치합니다.

냉전이 끝난 이후에도 미국은 그들의 방식을 수용하지 않는 쿠바를 혹독하게 다루었습니다. '악의 축'이 필요했던 미국에게 좋은 구실이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주요 수출품인 설탕을 좋은 가격에 쳐주고, 원유를 값싸게 공급해주던 소련과 공산권 국가들의 몰락에 쿠바 경제는 큰 타격을 받습니다. 미국의 으름장 앞에 거의 모든 국가들이 등을 돌려 국제적인 외톨이가 되었기에 상황은 더욱 어려워졌습니다. 

이 위기 앞에서 쿠바는 소련식 개혁개방이 아닌 중국식의 점진적인 개혁개방의 길을 선택합니다. 국영농장의 개혁, 자영업 허용, 관광업 진흥, 의료인력의 해외수출 등 경제적인 조치 뿐만 아니라 입법부를 강화하고 의원선출에 직접선거를 도입하는 등 정치개혁을 단행합니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았던 쿠바는 나름의 방식으로 다시 버티어냈습니다.

 민박 개념의 숙소 '까사'에 비치된 여행 정보북. 한국인 여행자들이 본인의 여행담과 체험정보를 오프라인 형식의 기록을 통해 교류합니다. 예전 대학교의 과방과 동아리방에 존재하던 정서를 느낄 수 있습니다.
ⓒ 정수현
여행자가 마주하는 쿠바는 생경하면서도 매력적인 나라임에 틀림 없습니다.

당신이 쿠바를 방문한다면 아날로그적인 감성을 충분히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인터넷이 제한된 환경에서 휴대폰 배터리가 천천히 닳아감을 느끼며, 휴대폰을 들여다 보던 시간에 무엇을 해야할까 잠시 당혹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이미 우리나라에서는 무용지물이 된 공중전화부스 앞에선 사람들을 보며 옛 추억을 더듬을 수도 있습니다. 

아바나에 처음 도착한 우리나라 배낭여행객들이 많이 찾아서 유명해진 소위 3대까사(까사는 정부에서 공식 인가를 받은 일종의 민박) 소파에 비치된 정보북을 뒤적거리며 여행정보를 수집하고, 또 자신의 경험을 볼펜으로 꾹꾹 눌러 기록하여 뒷사람에게 남기며 시간의 여백을 둔 소통방식을 체험할 수도 있습니다. 

쿠바의 명동이라고 불리는 오비스뽀 거리에서 들려오는 흥겨운 라이브 음악연주와 그 리듬에 몸을 맡긴 사람들의 자유로운 몸놀림, 그리고 무엇보다 섬나라 쿠바를 둘러싼 아름다운 바다를 당신은 잊지 못할 것입니다.

미국의 경제봉쇄가 없었다면 쿠바는 달랐을까

여러 나라를 여행하고 있다 보니 그곳을 지나칠 때, 여행하기 좋은 곳과 살고 싶은 곳에 대해서 종종 생각합니다. 쿠바는 어떤 나라일까 생각해보았습니다. 혁명이 '여행하고 싶은 나라'를 만드는 데 있지 않고 '살고 싶은 나라'를 만드는 데 목적이 있었다면, 분명 쿠바혁명을 성공적으로 평가하기 어려울 것 같았습니다.

시장경제의 빠른 속도에 익숙해진 우리의 습성을 감안해서 생각하더라도 비효율적인 시스템, 공공서비스에서 경험하는 경직된 관료문화가 존재합니다. 혁명 이후 몇 차례 있었던 대규모 탈주는 경제적인 배고픔 뿐만 아니라 정치적 자유의 문제도 있었음을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대규모로 사람이 떠나야 했던 곳이 행복한 공간은 아니었을 터입니다.

물론 이에 대한 반론도 충분히 인정합니다. 

미국이라는 초강대국의 정치적 압박과 경제봉쇄가 없었더라면 상황은 많이 달라질 수 있을 것이라는 의견입니다. 문맹퇴치와 높은 교육수준, 세계적인 의료기술과 의료시스템, 자급자족에 가까운 농업 등은 어려운 외부환경 속에서도 혁명이 목표한 사회적 가치들을 이룩한 성과를 간과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교육과 의료, 국민소득을 종합하는 인간개발지수에서 중남미 국가 중 5위(2008년 기준)를 차지했다는 사실은 쿠바에 대한 우리의 편견을 보여주는 지표였습니다.

그래서 쿠바혁명 60년의 세월은 '노인과 바다'에 나오는 어부 산티아고를 닮았습니다. 성공이라 하기에는 허전하고, 실패라고 하기에는 모진 풍파를 견디어 낸 의지가 경이롭기 때문입니다.

 작은 바닷가 마을 쁠라야 히론의 석양. 섬나라 쿠바는 어느 지역에서나 쉽게 아름다운 바다에 접근할 수 있습니다.
ⓒ 정수현
"혁명은 계승됨으로써만 완성되는 것이며, 역사는 새로 써짐으로써만 실천적 뜻을 얻는 것입니다."

언젠가 당신이 했던 이 말을 쿠바에 들려주고 싶습니다.

인류사의 모든 혁명이 그랬습니다.  혁명 초창기의 이상은 현실 앞에서 시련을 겪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퇴색되고 화석화되었습니다. 정치적인 독립과 경제적인 자립, 사회적인 평등을 꿈꾸었던 쿠바의 혁명도 여느 혁명처럼 그러한 길을 걸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는 쿠바에 머물며 그들의 혁명이 많이 늙어버렸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혁명 조차 추억으로 소비되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의 등장으로 미국과 쿠바의 관계가 어떻게 흘러갈지 알 수 없는 상황이 되었지만,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이전보다 쿠바가 더 넓은 세계를 마주할 것임은 확실해 보입니다. 물론 개방을 통한 변화가 꼭 긍정적인 방향으로 흘러가리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봉쇄된 상황 속에서 사회주의를 실행하는 과정에서 맞이했던 어려움과는 또 다른 차원의 문제점들이 발생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쿠바의 미래가 희망적일 것이라 믿습니다.  아니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입니다. 시인의 마음에 정체성과 자립의 뿌리를 두고 있고, 거인에 맞서 60년을 싸워 낸 의지를 가진 쿠바인들이기에 혁명의 이상을 새롭게 해석하고 실천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오비스뽀 거리의 악사들이 옛 노래를 새로운 느낌으로 멋지게 연주하듯이 그렇게 '살고 싶은 나라'를 멋지게 만들어 내기를 바랍니다. 쿠바의 건투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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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행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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