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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의 꿈> ⑫에티오피아 한국전 참전용사들
(아디스아바바=연합뉴스) 강진욱 기자 = 1992년 결성된 `에티오피아 한국전 참전용사회(Ethiopian Korean War Veterans Association)' 회장 멜레세 테세마 씨는 한국이 "폐허에서 일어선 기적"을 이뤘다고 말했고 " 일마 벨라츄 부회장은 "파괴와 절망의 나라가 위대한 나라 돼 기쁘다"고 밝혔다. 멜레세 회장이 아디스아바바 시내에 있는 참전기념비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 기념비는 한국 보훈처와 춘천시가 2006년 건립했다. 2010.3.28
kjw@yna.co.kr

용사회장 테세마 씨 "폐허에서 일어선 기적 부러워"
`각뉴 부대' 활약 다룬 책 내년 한국서 출판

(아디스아바바=연합뉴스) 강진욱 기자 =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에티오피아는 1951년 4월 왕실 근위대인 `각뉴(KAGNEW)' 부대 1천300명을 보낸 것을 시작으로 휴전협정이 체결된 후인 1956년 3월까지 5차례에 걸쳐 6천37명을 파병했다. 이들은 중동부전선 화천과 양구, 철원 등지에서 싸웠다.

이들 가운데 현재 생존해 있는 약 900명 가량은 이미 80∼90대 노인이 됐다. 1991년 쿠데타로 사회주의 정권이 무너진 이듬해인 1992년 `한국전참전용사회(Ethiopian Korean War Veterans Association)'가 결성됐다.

22일 아디스아바바 시내 한국국제협력단(KOICA) 사무소에서 송인엽 소장의 소개로 한국전참전용사회 멜레세 테세마(Melesse Tessema.78) 회장과 일마 벨라츄(Yilma Belachew.79) 부회장을 만났다.

송 소장은 각뉴 부대의 혁혁한 전과를 다룬 그리스 종군 기자의 책 `각뉴'를 우리말로 번역해 내달 한국에서 출간할 예정이다.

이 책에는 "과거에는 각뉴, 오늘날에는 한국국제협력단(KOICA)이 있어 에티오피아와 한국 간 우의가 이어지고 있다"는 내용의 에티오피아 대통령의 글이 들어 있다.

테세마 회장과 벨라츄 부회장은 모두 각뉴부대 2진(1952년)으로, 테세마 회장은 4중대 2소대장이었고 화랑무공훈장과 미국 은성무공훈장을 탔으며 벨라츄 부회장은 중기중대 75mm 포 소대장으로 화랑무공훈장과 미국 동성무공훈장을 수상했다.

참전 당시 상황을 묻자 테세마 회장은 "1∼5진 모두 미국에서 대형 군함을 보냈고 에티오피아에서 출발한 배는 그리스와 태국, 필리핀을 거쳐가며 군인들을 태워 3주 걸려 부산항에 입항했다"면서 "약간의 적응 훈련을 거쳐 곧 바로 전선에 투입됐다"고 말했다.

한국에서의 경험에 대해 그는 "각뉴 부대원 모두 최정예병답게 용맹하게 싸웠다"면서 "253번 싸워 모두 이겼다. 123명이 전사하고 536명이 부상했지만 포로는 한 명도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또 "당시에는 우리(에티오피아)가 훨씬 잘 살았고 한국 사람들은 남녀 할 것 없이 우리(각뉴부대원)보다 키가 작았다"면서 "한국이 기적적으로 발전하는 동안 에티오피아는 후퇴를 거듭했다"고 말했다.
옆에 있던 벨라츄 부회장은 "한국은 파괴와 절망의 나라였으나 지금은 위대한 나라가 돼 기쁘다"고 말했다.

귀국 후 각뉴 부대원들은 거국적 환영을 받았다.

귀국 후의 생활을 묻자 테세마 회장은 "1972년 대령 진급 뒤 육군 핵심 여단장으로 복무했고 1974년 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 소령 주도로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서면서 강제 퇴역 당한 뒤 사기업과 비정부기구(NGO)에서 근무했다"고 밝혔다.

벨라츄 부회장은 "1957년 대위로 진급했고 1960년 서방파 군엘리트 그룹이 주도하는 쿠데타에 가담했다 실패한 뒤 3년간 투옥 후 1963년 출옥했고 이후 여러 직업을 전전하다 마지막으로 포도주 공장 매니저로 1987년 퇴직했다"고 말했다.

1960년 쿠데타는 왜 일어났고 왜 가담했느냐고 묻자 벨라츄 부회장은 "당시 부동산을 많이 소유한 부자들과 로열패밀리들에 반감을 가진 유럽파 젊은 군인들이 더 나은 정부를 갖기 위한 변화를 꾀했다"고 밝혔다.

그는 "쿠데타의 리더는 멩기스투 장군으로 그의 형이 존 F.케네디 전 미국 대통령과 동문수학했다"고 설명했다. 테세마 회장은 쿠데타 직전인 1959년 7월부터 2년 반 동안 내전 중인 콩고에 가 있었기 때문에 쿠데타와 무관했다.

에티오피아로 돌아온 테세마 회장은 황제 보디가드를 거쳐 대대장으로 진급한 뒤 승승장구, 1974년 대령 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1960년 쿠데타 주역과 다른 인물)이 이끄는 쿠데타가 일어나기 직전 탱크여단장에 임명됐다.

강제 퇴역 당한 뒤 민간인으로서의 생활을 묻자 테세마 회장은 "밤이 되면 늘 집으로 누군가가 찾아와 근황을 묻는 등 감시를 받았지만 사회 활동에는 지장을 받지 않았고 물질적으로도 어려움이 없었다"고 말했다.

1991년 멜레스 제나위 현 총리가 이끄는 쿠데타로 사회주의 정권이 무너져 이듬해 한국전참전용사회가 결성됐고 벨라츄 부회장은 1995년과 1997년 두 차례 한국을 방문했다. 에티오피아는 현재 모든 실권을 총리가 갖고 있으며 대통령은 명예직이다.

테세마 회장은 아들 딸 각각 세 명씩 여섯 자녀를 뒀고 아들들은 모두 엔지니어로 성장해 하나는 카타르에서 국제기구에 소속돼 일하고 있으며 딸 하나는 대법원 판사와 결혼했고 다른 두 딸은 미국에서 살고 있다.

벨라츄 부회장의 외아들은 국제기구에서, 딸 하나는 간호사로 일하고 있고 다른 딸 하나는 영국에서 살고 있다면서 "손자 다섯을 둬 행복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참전용사회 회원들은 지금도 여전히 어렵게 생활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오후에는 테세메 회장과 함께 아디스아바바 북쪽 아핀초 베르 파크(Afincho Ber Park)에 있는 참전기념비를 방문했다. 시내 중심가에서 차로 약 20여분 거리에 있다. 이곳에 기념비가 세워진 것은 2006년 2월. 당시 한국 보훈처와 춘천시가 예산을 지원해 아디스아바바 시 당국과 함께 건립했다.

기념비 중간에는 에티오피아라고 쓴 큰 현판이, 상단에는 사자 동상이 올라앉아 있다. 기념비 좌우 양측에는 에티오피아 국기와 태극기를 단 깃대와 분수대가 있고 분수대 바닥에도 각각 에티오피아 국기와 태극기가 새겨져 있다. 기념비 앞에는 한국전에 참가했다 산화한 에티오피아 장병들의 이름이 새겨진 비석 122개가 원형으로 도열해 있다.

테세마 회장은 부상당한 한국 병사를 들쳐 업고 뛰어가다 적의 폭격으로 함께 산화해 한국에 함께 묻혔다는 멜레세 제리훈의 비석을 손으로 가리켰다.

기념관과 기념비를 관리하고 있는 아스랄르카 가브라마리암 알라모(80) 씨 역시 참전용사회 회원으로, 스무살 때인 1951년부터 약 2년 간 한국에 머물렀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키가 180cm는 족히 넘어 보이는 그는 귀국한 뒤에도 계속 군대에 남아 1986년 예편할 때까지 26년 간 군인으로 일했다 한다.

1974년 혁명 당시 알라모 씨는 약 10년 간 현재 에리트레아가 된 지역에 파견돼 있었기 때문에 사회주의 혁명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았다고 밝혔다. 사회주의 체제가 들어선 뒤 한국전에 참전했던 이들이 모두 군대에서 쫒겨난 것은 아니었다.

테세마 회장은 "한국은 여전히 분단 상태"라는 지적에 "우리가 한국에 간 것은 남한만 도우러 간 것이 아니고 코리아의 자유와 통일을 위해 싸운 것"이라면서 "각뉴 부대원들이 한국 고아들을 위한 고아원도 짓고 이들을 키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싸움은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아니므로 협상하고 설득해 합의를 이뤄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국제사회가 이를 도와야 하고 우리도 도울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또 "북한이 초청하면 북한에 가 통일을 위해 이야기 하겠다"고 덧붙였다.

한국인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청하자 테세마 회장은 "코리아의 통일을 위해 싸운 우리를 후세가 기억해 주기를 바라며 한국이 우리 용사들을 계속 도와주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kjw@yna.co.kr
Posted by 행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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