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원동, 해방촌, 도산공원 일대 등 소위 ‘놀러 가는 동네’에는 역사적인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 이야기를 따라 동네 탐방을 떠났다.
① 망원동|망원정
망원동망원동망원동
서울을 가로지르는 한강에는 본래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노닐던 공간이 있었다. 겸재 정선의 그림 속에 남아 있는 압구정과 동작나루(일명 ‘동작진’)를 비롯해 30개가 넘는 정자가 강줄기를 따라 자리해 있었으나 지금 흔적이 남은 곳은 단 한 곳이다. 망원 한강공원을 내려다볼 수 있는 ‘망원정’이 그곳이다. 1925년 홍수로 인해 없어졌던 것을 1986년 서울시에서 복원했다. 조선 태종의 둘째 아들인 효령대군이 세운 정자로 주로 왕과 그 인척들이 찾거나 외국 사신을 위한 연회를 베풀던 곳이다. 망원정 인근에는 논밭이 펼쳐져 있고 한강 앞에선 수군들이 훈련을 했다. 세종이 이곳을 시찰 나왔을 때 가뭄 끝에 큰비가 내렸다 해서 ‘희우정喜雨亭’이란 이름을 붙였다. 조선시대 문인인 이식은 이 일화를 <형재시집> 제3권에 ‘희우정의 시에 차운하다’란 제목의 한시로 남겼다. 이후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 소유가 되어 ‘망원정’이란 이름으로 바꾸었다. 성종은 월산대군이 죽은 후 형을 그리워하는 마음에 다시는 망원정을 찾지 않았다 한다. 2014년 여름, 강변북로와 접해 불편했던 출입로를 개선하는 망원초록길 조성 사업이 완료되어 한강을 내려다보며 쉴 수 있는 온전한 쉼터가 되었다.
LOCATION 서울시 마포구 동교로8안길 23
+ WHERE TO GO 망원동
1 뇽뇽마카롱 망원정에서 나와 망원역 방향으로 걷다 보면 ‘뇽뇽마카롱’이라는 간판이 보인다. 크림을 잔뜩 넣은 색색의 마카롱이 진열장에 가득 놓여 있다. 오레오크림치즈, 유자크림치즈, 딸기요구르트, 인절미 등 다채로운 맛을 만들어낸다.
LOCATION 서울시 마포구 희우정로 72 TEL 02-337-7911
2 코브라파스타클럽공연 티케팅만큼 예약이 어려워 ‘코켓팅(코브라파스타 티켓팅)’이란 신조어를 만들어낸 파스타 전문점이다. 대표적인 메뉴는 ‘파스타 가브라스’. 간장 베이스로 만든 파스타로 어디서도 맛보지 못한 동양적인 맛이 특징이다.
LOCATION 서울시 마포구 희우정로 114 TEL 070-4100-0088
3 어쩌다가게 시인과의 만남, 주말 밤에 열리는 플리마켓 등 요즘 망원동의 크고 작은 이벤트가 열리는 공간 어쩌다가게. 연남동에 있는 어쩌다가게 2호점으로 책방, 보틀 숍, 밥집, 소품 편집 숍을 한 번에 만나볼 수 있다.
LOCATION 서울시 마포구 월드컵로19길 74 TEL 02-3144-7147
② 창전동|공민왕사당
공민왕사당공민왕사당이미지 설명을 넣어주세요
창전동 아파트 단지 뒤로 들어서면 150년 이상 된 나무 사이로 기와지붕이 보인다. 와우산체육공원 초입에 자리한 공민왕사당이다. 조선시대 때 곡식 보관 창고인 광흥창 인근에 거주하던 노인의 꿈에 공민왕이 나타나 자신을 위한 사당을 지으면 나라가 번창할 것이라는 계시를 내렸다. 실제로 이 장소는 고려시대 때 공민왕이 시화를 즐긴 곳이었다. 이렇게 만든 사당에서 매년 음력 10월 1일에 제례를 지내는 전통이 지금까지 이어진다. 2016년에는 공교롭게도 음력 10월 1일이 핼러윈데이와 같은 날이었는데, 인근 상수역과 창전동에서 열리는 핼러윈 파티와 사뭇 다른 풍경을 만들어냈다. 본래 3채가 함께 있는 전통적인 사당 건축 방법과 달리 2채가 함께 있는 형태로, 조선시대 서민들의 건축법을 엿볼 수 있는 대표적인 사료다. 사당 바로 옆에는 광흥창을 본떠 만든 한옥인 ‘광흥당’이 있다. 이곳에선 가야금, 대금 등의 연주 공연이 매달 열린다. 둘레 300센티미터 이상의 거대한 느티나무와 회화나무로 둘러싸여 있어 고즈넉한 숲속에 들어와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LOCATION 서울시 마포구 창전동 42-17
+ WHERE TO GO 창전동
1 펠트새하얀 공간에 커피 머신이 올라간 커피 바와 몇 개의 나무 의자만이 놓여 있다. 지금은 늘어난 커피 바 형태의 카페를 유행시킨 장본인이다. 창전동에서 가장 맛있는 커피를 마실 수 있는 카페로 직접 로스팅하고 블렌딩한 원두를 사용한다.
LOCATION 서울시 마포구 서강로11길 23
TEL 070-4108-3145
2 대디서울와우산 자락의 가파른 언덕을 올라야만 도달할 수 있는 스피크이지 라운지 대디서울은 미술관에 딸려 있는 카페처럼 모던한 분위기다. 칵테일, 와인, 샴페인 등이 주를 이루며 그에 맞는 음식도 준비된다.
LOCATION 서울시 마포구 와우산로30길 80
TEL 02-335-0180
3 올라이트 노트와 펜을 좋아하는 이라면 이곳을 찾을 것. ‘기록광을 위한 문구류’ 브랜드 올라이트의 쇼룸이다. 대표이자 디자이너 이효은이 자신이 직접 쓰면서 필요한 것들을 고려해 디자인했다. 빈티지 그릇과 소품도 함께 판매한다.
LOCATION 서울시 마포구 서강로11길 28
③ 해방촌|108계단
108계단해방촌해방촌
후암동 종점에서 해방촌으로 가는 언덕에 자리한 108계단은 해방촌의 대표적인 랜드마크다. ‘하늘계단’이란 감성적인 이름을 달고 색색의 벽화가 그려졌지만 사실 이곳엔 비극적인 역사가 담겨 있다. 과거 일제가 중일전쟁과 아시아태평양전쟁 전사자의 영혼을 기리기 위해 만든 ‘경성호국신사’로 향하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일제는 불교와 도교가 합쳐진 일본의 신사 문화를 따라 108개의 계단을 만들었다. 당시엔 조선인도 징집 대상이어서 이 신사에는 조선인 전사자도 모셔져 아침마다 초등학생부터 어른들까지 참배를 하러 가야 했다. 일제는 서울의 중심이자 정신인 남산에 이런 공간을 만들어 정신까지 지배하려 든 것이다. 해방 이후 조선인들은 가장 먼저 남산에 있는 일제의 흔적을 모조리 없애버렸고, 현재는 계단을 제외하곤 신사의 흔적이 모두 사라졌다. 일대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이 물러난 자리에는 해방 이후 북에서 넘어온 한국인들이 자리를 잡았다. 108계단 끝에는 1980년대 형성된 시장인 해방촌 신흥시장이 나온다. 세월이 흐르며 쇠락해 거의 모든 점포가 문을 닫아 어두컴컴했던 시장에 최근 카페와 책방, 전시 공간이 생겨나 젊은이들이 눈에 띈다.
LOCATION 서울시 용산구 신흥로36길 13 앞
+ WHERE TO GO 해방촌
1 오랑오랑신흥시장의 존재를 다시 알린 건 카페 오랑오랑의 역할이 크다. 지난겨울 텅 빈 점포만 있던 자리에 2층짜리 로스터리 카페 오랑오랑이 오픈한 것. 커다란 로스터로 직접 로스팅과 블렌딩을 해 커피를 내린다. 옥상이 있어 해방촌과 남산을 내려다볼 수 있다.
LOCATION 서울시 용산구 소월로20길 26-14 TEL 02-3789-7007
2 춘광사설 왕자웨이 감독의 영화 <해피 투게더>의 원제를 이름으로 삼은 술집 춘광사설. 밖에서도 내부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이곳은 홍콩의 화려한 밤을 본떠 만들었다. 대표 메뉴는 굴소스로 맛을 낸 홍콩식 파스타로 중국식 볶음면과 비슷하다. 예약제로만 운영한다.
LOCATION 서울시 용산구 신흥로26길 11-20 TEL 010-8933-8784
3 별책부록 108계단을 오르면 별 모양의 작은 간판이 보인다. 책방 별책부록이다. 2년 전 연남동 어쩌다가게에서 시작해 올해 초 해방촌으로 이전한 책방으로 문화, 예술, 건축에 관한 서적을 주로 취급한다. 저녁이면 취미 생활과 관련된 워크숍을 진행한다.
LOCATION 서울시 용산구 신흥로22가길 8 TEL 070-5103-0341
④ 도산공원|도산의 묘
도산의 묘도산 안창호 기념관도산공원
에르메스, 칼 라거펠트, 랄프로렌 등 럭셔리 디자이너 브랜드의 화려한 플래그십 스토어를 따라 걷다 보면 도산공원 입구가 나온다. 공원 문을 지나 한 방향으로 쭉 들어가면 동그란 묘 하나가 보인다. 얼마 전 MBC <무한도전>에 나와 그 존재를 새롭게 알린 도산 안창호 선생과 그의 부인 이혜련의 묘다. 방송에 나오기 전만 해도 이곳에 묘지가 있단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중국 상하이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일제에 붙잡힌 선생은 두 차례 옥살이 끝에 만 60세의 나이로 서거했다. 처음엔 망우리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가 1973년 그의 정신을 기리고자 이곳에 공원을 조성하고 안창호 선생 부부를 합장해 모셨다. 공원에는 묘 외에도 선생의 동상, 기념관 등이 자리했다. “나 하나를 건전한 인격으로 만드는 것이 우리 민족을 건전하게 하는 유일한 길이다.” 묘에서 동상으로 가는 길에는 선생이 남긴 말을 새긴 돌이 새삼 뭉클한 감동을 준다. 생전 모습을 본떠 만든 거대한 동상 앞에 서면 그 말의 무게가 느껴진다. 공원 입구에는 안창호 선생의 활동을 알 수 있는 전시관도 있다.
LOCATION 서울시 강남구 도산대로45길 20
+ WHERE TO GO도산공원
1 퀸마마마켓라이프스타일 편집 숍 퀸마마마켓이 최근 새 단장을 끝냈다. 국내산 녹차를 젊은 감각으로 해석한 티 콜렉티브, 리빙 편집 숍 목화씨 잡화점, 책방 파르크 등이 각각 입점했다. 한 건물에서 다양한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LOCATION 서울시 강남구 압구정로46길 50
TEL 070-4281-3372
2 아우어 다이닝도산공원 일대에서 가장 인기 있는 빵집 아우어 베이커리가 이번엔 ‘다이닝’을 시작했다. 갑오징어의 살과 먹물이 들어간 리소토로 만든 아란치니, 트러플 오일과 고소한 달걀노른자로 맛을 낸 ‘블랙 트러플 파스타’ 등 창의적인 요리를 선보인다.
LOCATION 서울시 강남구 압구정로46길 75 1층 TEL 02-516-5056
3 디센트 백색공간에 로즈 골드 컬러를 입혀 사랑스러운 분위기를 내는 카페 디센트. 인테리어에 포인트가 된 분홍빛을 메뉴에서도 찾을 수 있다. 분홍색 크림을 올린 ‘디센트 라떼’, ‘레드 벨벳 치즈케이크’ 등이 이곳의 시그니처 메뉴다.
'제주도 여행 가이드'라는 자유로운 직업 덕분에 한겨울 같은 비수기에는 가까운 곳으로 자유여행을 자주 가는 편이다. 최근 2년간은 비용이 저렴한 일본(오키나와, 홋카이도, 오사카 등)을 자주 다녔다. 과거 중년 층 대부분은 패키지여행을 더 선호하는 편이지만, '혼밥', '혼술' 등 혼자 무얼 하는 문화가 더 이상 생소해 보이지 않는 지금은 혼자 돌아다니는 중년의 자유여행객도 흔히 볼 수 있다.
물론 지금도 배낭 메고 혼자 여행 떠난다고 하면 주변에서 고개를 갸웃하는 사람들이 있긴 하다. '아저씨가 혼자 무슨 청승이냐...'라는 반응이나 '너무 쓸쓸하지 않느냐' 등. 나는 속으로만 중얼거린다. '쓸쓸하려고 여행 가는 거야...' 여행의 '맛'은 멋진 풍광이나 화려한 볼거리, 다양한 쇼핑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생소한 거리 풍경이나 낯선 잠자리에서 맞는 아침, 고즈넉하고 무료한 시간 속에서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다니는 것에서도 감성을 자극하는 여행의 '느낌'을 찾을 수 있다.
요즘 언론에서 중년 층이 혼자 자유여행을 많이 떠난다는 기사를 자주 본다. 자식들에게 이것저것 묻거나 익숙지 않은 인터넷을 뒤져 불안불안하지만 여러 에피소드를 만들어 가며 대견(?) 하게 자유여행의 세계로 입문하게 된다는 투의 글이 많다. 하지만 그렇게 서툴지 않은 중년도 많이 있다. 오히려 차분하고 원숙한 여행을 하는 이들이 더 많다고 생각한다.
테마와 목적에서 중년의 자유여행은 젊은 층의 그것에 비해 약간 다를 수 있다. 아니 어느 정도는 달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젊은 층의 여행이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인터넷을 뒤져 유명 관광지를 도장 찍듯 순례하거나, 꼭 먹어야 한다는 소위 인터넷 맛집을 찾아다니거나, 셀카를 찍기 위해 여행을 온 것 같은 방식을 답습할 필요가 없다는 얘기다. 중년은 그렇게 남들과 똑같이 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풍성한 여행을 즐길 수 있는 '세상 경험 많은 자'의 방식을 찾을 수 있다.
여행은 양적인 성과도 무시할 순 없지만 그것보다 깊이 있는 여행이 더 중요하다고 본다. 여기저기 많이 다닌 것을 자랑삼아 얘기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장소의 횟수에만 매달려 다니면 스스로에게 오래도록 남는 것은 거의 없다. 심지어 한두 달만 지나도 다녔던 곳들이 대부분 기억에서 잊혀진다. 그래서 한 군데를 가더라도 깊이 있고 차분한 여행을 권하고 싶다. 시간적인 여유가 더 많은 중년층에겐 그런 '느린 여행'이 훨씬 더 잘 어울린다. 실제로도 많이 그렇게 하고 있지만.
흔히 하는 말로 아이들 다 키워 놓고 이제 비로소 자신을 좀 돌아보기 시작하는, 그래서 나도 배낭 메고 떠나는 '자유여행'이라는 걸 해 보고자 하는 중년층을 위해 나의 경험을 토대로 몇 가지 팁을 얘기해 본다. 남들이 나에게 혼자 무슨 재미로 가느냐고 물으면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중년 남자의 쓸쓸하고 외로운 여행이야...'라고. 심각하게 한 얘기가 아닌 절반은 우스갯 소리이고 남들도 대부분 어이없어 하는 반응이지만, 여하튼 기본 콘셉트는 그렇게 잡아 보자.
최근 가장 많이 간 곳은 일본의 오키나와이다. 오키나와가 매력적인 점은 근래 저비용항공사가 많이 생겨 가격도 저렴해졌고 운항횟수도 많아서 접근성이 뛰어나다는 것을 우선 들 수 있다. 또 남국의 섬으로서 자연 풍광이 빼어나고 바다 물색이 신비로울 만큼 아름다운 점, 면적이 넓지 않고 오지스러운 곳이 별로 없어서 쾌적하고 수월하게 다닐 수 있는 점 등이다.
오키나와는 위도 상으로 한반도보다 훨씬 아래(적도 쪽)에 있다. 그래서 겨울철에도 따뜻하다. 위도가 다르기 때문에 기후도 다르고 자연 풍광도 다르고 식물생태나 문화도 다르다. 여행의 맛은 '다름'을 보는 것에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오키나와는 섬의 형태가 남북으로 기다랗게 되어 있어 다양한 섬의 모습들을 보려면 적어도 3박 4일 정도는 다녀와야 한다. 이렇게 '오키나와에서의 일주일 - 중년의 자유여행(준비 편)'이라는 가상의 제목을 정하고 내 경험을 얘기해 본다.
예를 들어 한 달 정도의 여유를 두고 인천-오키나와 혹은 부산-오키나와 편 항공권을 구입했다고 치자. 맨 먼저 할 준비는 책을 사는 것이다. 요즘은 인터넷 검색만 하면 해당 여행지에 대한 정보가 홍수처럼 쏟아진다. 하지만 그런 무지막지한 방대함이 효율적인 여행을 준비하는데 있어 오히려 혼란을 가중하거나 단편적인 것들만 나열하는데 그치는 것 일 수 있다. 일단 여행책자를 구입해서 한 차례 정독하고 나면 전반적인 맥락을 잡을 수 있다. 여행지나 맛집 등은 그 후에 차근차근 찾아보면 된다. 막연하다고 괜히 아이들에게 구박받으며 가르쳐 달라고 하지 말자.
가까운 도서관에 들러 한두 시간이라도 오키나와에 대한 공부를 하는 것도 참 좋다. 맨 처음 오키나와에 가보고 싶었던 이유는 내가 살고 있는 제주도와 비슷한 점들이 있어서이다. 일본 본토로부터 많은 핍박을 받은 곳, 일본에 합병된 지 불과 140년이 되지 않아 고유의 문화가 살아 있는 곳 등등. 개략적이나마 그 나라의 역사와 문화적인 특징들을 찾아보고 풍습이나 상징물, 고유 음식 등을 알고 가면 훨씬 더 의미 있는 여행이 가능하다고 본다.
예를 들어 오키나와에는 '시사'라고 하는 상징물이 있다. 동물 형상의 오키나와 수호신인데 제주도로 치면 돌하르방 정도에 해당된다 하겠다. 사자나 '해태' 비슷하게 생겼는데 오키나와의 전신 '류큐왕국'에서 전통적으로 내려온 것이다. 오키나와의 거의 모든 전통주택들 지붕에는 암수로 된 '시사'상이 놓여 있고 특이하게 조각된 다양한 '시사'들이 많다. 오키나와 전통 마을을 걸으며 '시사'찾기를 하는 것도 쏠쏠한 재미이다.
다음으로 교통수단을 정한다. 렌터카로 다니는 것과 대중교통이 있는데 오키나와는 대중교통이 불편한 편이라 차를 빌려 다니는 것이 좋다. 하지만 일본은 우리나라와 운전 방향이 반대라 왼쪽 도로 운전에 대한 대비가 필요하다. 관련 자료들을 찾아 요령만 잘 숙지하면 크게 어려울 건 없다. 중년이라면 수십 년간의 운전 경력이 있지 않은가.
숙박은 호텔 비교사이트가 많아 미리 예약하는 것이 어렵지 않은데 혼자 하는 여행이라면 게스트하우스나 민박을 추천한다. 단지 저렴한 비용 때문이 아니고 각지에서 자유여행을 온 여행자들을 만나 사귈 수 있는 공간이라는 매력이 크다. 이층 침대에서 낯선 이와 같은 방에서 자는 것을 불편하게 생각할 수 있으나 그런 '즐거운 불편'이 여행의 참 맛이 되기도 한다.
숙소를 예약할 때 도착 날 하루만 하고 떠나는 것도 생각할 수 있다. 숙소를 다 예약하지 않고 불안하게 어떻게 가느냐라고 할 수 있지만 인터넷만 있으면 현지에서도 얼마든지 방을 구할 수 있다. 휴대용 와이파이 기기를 대여해 가면 말 그대로 정처 없이 다니며 아무 데서나 방을 구해 자는 것이 어렵지 않다. 다만 사전에 해당 지역에 대한 정보들을 잘 공부할 필요는 있다.
요즘은 너무 편한 여행만을 고집하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 대부분 배낭 대신 캐리어를 끌고 다니며 많이 걸으려고도 하지 않는다. 아무런 시행착오도 없이 맞춰지고 짜인 틀 속에서만 다니려 한다. 하지만 여행의 매력은 어느 정도의 '모험'이 있어야 훨씬 더 흥미진진하고 맛이 있는 편이다. 예정에 없는 곳도 가보고 기분 내키는 대로 일정도 바꿔보고 다채로운 경험들을 해보는 것이 훨씬 기억에도 남는다. 일정과 코스를 완벽하게 짜는 것도 좋겠지만 어느 정도 불확실성을 가져가는 것도 매력이다. 하지만 그전에 내가 가는 곳에 대한 공부는 많이 하기를 권한다. 보물섬에 가더라도 보물이 묻혀있는 지도는 미리 보고 가야 하지 않겠는가.
여행은 준비하는 기간이 더 설레고 즐겁다는 말이 있다. 나이 먹어서 귀찮고 잘 모른다는 이유로 천편일률적인 패키지여행만을 고집하지 말자. '자유여행'이 별건가... 산전수전 겪으며 쌓이고 쌓인 내공이 여행에서도 젊은이들보다 훨씬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도 있으니 걱정은 접어두고 떠나보자.
"코카콜라 광고가 없는 곳을 찾게 되어 행복하다." 마추픽추에 올라가서 누군가 이렇게 외쳤다. 그 사람 이름은 알 수 없다. 그러나 어느 호텔 방명록에 남겨진 이 글을 보고 감탄한 인물이 있다. 얼마나 감탄했는지 자신의 자서전에 이 방명록 내용을 그대로 남겼다. 그 사람은 누구일까.
물론, 나는 아니다. 나는 가끔 글을 쓰면서 내 자랑을 슬쩍슬쩍 집어넣기는 해도, 독자들에게 여행기 도입부에 내 이름 알아맞히기 수수께끼를 낼 정도로 뻔뻔하지는 않다. 그리고 나는 높은 산에 올라가거나 유적지를 보면 기껏해야 "야~호"라거나, "와! 멋지다"라는 감탄사급 탄식을 내뱉을 뿐이다. 코카콜라를 보면 반미감정이 일어날 정도로, 미국을 싫어하지도 않는다.
마추픽추로 가는 길은 하나의 탐험이자 탐사였다. 단순한 관광이나 여행이 아니었다. 마치 영화 <인디아나 존스>처럼, 고대 유적을 찾아나서는 모험 그 자체였다. 여행은 목적지만큼이나 그곳에 이르는 여정이, 여행자의 마음을 더욱 흥분시키기도 한다. 쿠스코를 떠나 마추픽추로 가는 여정이 그랬다.
볼리비아에서 마추픽추를 가려면, 먼저 옛 잉카 제국의 수도였던 페루 쿠스코를 거쳐야 했다. 볼리비아 수도 라파스에서 코파카바나를 거쳐, 아름다운 티티카카 호수를 구경하기 위해 페루 푸노에서 하루를 묵었다. 다음날 푸노에서 쿠스코에 도착한 것은 밤 10시쯤. 마침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고산지대인데다 비까지 내리니, 날씨는 시베리아의 겨울추위를 방불케 했다.
잠과는 태어날 때부터 연인사이였던 나도, 이날 밤은 어쩔 수 없었다. 얼마나 춥던지 손을 내밀어 잠을 끌어안으려면, 어느새 추위가 그 틈새로 비집고 들어와 나와 잠 사이를 밀쳐냈다. 나는 그 긴 밤 동안 단 한 번도 잠과의 따뜻한 포옹조차 할 수 없었다. 추위의 시샘은 인간의 시샘 못지않았다. 나는 사실 추위하고 사귄 적도 없는데, 왜 나와 잠 사이의 연애를 방해하는지....
해가 뜨기를 기다릴 수 없었다. 추위가 나를 고드름 미라로 만들려고 작정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새벽 일찍 일어났다. 곧바로 나는 마추픽추로 가는 열차를 타기 위해 포로이 기차역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최근 연이은 폭우로 쿠스코에서 마추픽추로 가는 기차 운행이 중단되었다고 한다. 난감했다. 이 추운 곳에서 다시 하루를 묵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앞이 캄캄했다.
철도회사에서는 쿠스코에서 마추픽추로 가는 기차표를 예매한 관광객들을 오얀타이탐보까지 버스로 실어 나르고 있었다. 오얀타이탐보 역에서 마추픽추 종착역인 아구아스 칼리엔테스 까지는 철로가 뚫려 있었다. 나는 기차표를 예매하지 않아 처음에는 버스 탑승을 거절당했으나, 마지막 순간 자리가 생겨 간신히 버스를 얻어 탈 수 있었다.
아마도 행색이 초라한 아시아 배낭여행객이 불쌍해보였는지, 오얀타이탐보에서 기차표가 있는 지는 보장할 수 없다며, 나를 태워줬다. 비보호좌회전 탑승이다. 버스로 오얀타이탐보까지는 태워주는데, 그 이후부터는 책임지지 못한다는 뜻이다. 모든 생명은 원래 태어나는 순간 비보호좌회전의 길을 가야하고, 여행은 출발할 때부터 비보호좌회전의 여정이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사르트르의 말도 쉽게 말하면, 인간의 삶은 태생적으로 비보호좌회전이라는 말이다. 인간은 '비보호좌회전이다'는 말과, 인간은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말은 뭐가 다른가. 자기 책임 아래 좌회전하라는 말과, 자기 책임 아래 주체적으로 삶을 살아가라는 말은 도긴개긴이다. 여행을 하다보면, 사르트르, 키르케고르, 포이어바흐 등 실존주의 철학자들하고도 만난다. 철학자들은 쉬운 말을 두고 왜 그리 어렵게 표현하는지 모르겠다.
오얀타이탐보에서 기차표를 끊어 마추픽추 종착역으로 가는 길은, 순식간에 나를 동심의 세계로 이끌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하얀 토끼를 따라 '이상한 나라'로 따라갔듯, 나는 푸른색의 마추픽추 기차를 타고 환상의 세계로 빨려 들어갔다. 어릴 적 <로빈슨 크루소>나 <걸리버 여행기>를 읽을 때의 설렘과 기대, 불안과 공포가 뒤섞인 묘한 스릴과 쾌감이 느껴졌다.
기차는 역을 떠나자, 안데스 산맥의 계곡을 따라 흐르는 우루밤바 강과 끝없는 사랑놀이에 빠졌다. 기차가 안데스 산맥의 허리를 돌아 강물이 흐르는 계곡 쪽으로 다가가면, 갑자기 강물은 홍수가 되어 기차를 삼킬 듯이 달려들었다. 마치 암사자가 수사자의 접근을 경계하듯, 며칠 동안 쏟아진 폭우로 불어난 강물은 기차에게 멀리 가라고 포효까지 해댔다. 안데스 산맥의 강물이 울부짖는 소리는 마치 천둥소리 같았다.
강물의 쓰나미에 놀라 기차가 다시 안데스 산 쪽으로 달아나면, 순식간에 조용해진 강물은 계곡의 굽이굽이를 따라 덩실덩실 춤을 추면 기차를 유혹하고 있었다. 수사자가 달아나면, 암사자가 꼬리를 흔들며 다시 오라고 하는 구애 짓과 안데스 강물의 하는 짓은 너무 닮았다.
강물아, 너의 진짜 마음은 어디에 있는가. 마추픽추로 가는 기차와 안데스 산맥의 계곡을 흐르는 우루밤바 강물은 그렇게 서로의 애간장을 태우며, 단 한 번도 만나지 못하고 종착역에 닿았다. 푸른 하늘색을 닮아 마치 하늘로 날아갈 듯 힘차게 달리던 푸른색의 마추픽추 기차도, 갑자기 멈춰버린 잉카문명처럼 아구아스 칼리엔테스 역에서 힘이 빠지더니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안데스 산맥의 깊은 정글 속으로 가는 이런 기찻길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나에게는 경이로움이었다. 조금만 비가 와도 계곡으로 총집결한 강물이 기차를 한 입에 삼켜버릴 듯 달려들고, 작은 바위덩어리 하나만 굴러도 철길이 막혀버리는데, 마추픽추 기차는 계곡의 강물과 안데스 산맥의 허리 사이를 교묘하게 왔다갔다하며 달리고 있었다.
이런 첩첩산중이니, 그 악랄한 스페인 침략자들도 이곳까지는 들어올 수 없었다. 마추픽추로 가는 길은, 스페인 침략자들의 기마병들이 가는 길이 아니었다. 기찻길이 생기기 전에는, 오로지 사람의 발길로만 닿을 수 있는 곳이었다.
기차를 타고 가다보면, 옛날 인디오들이 걸어서 다니던 길이었으나 지금은 트레킹 여행코스로 개발된 '잉카트레일'을 따라, 마추픽추 정상을 걸어서 오르는 세계의 여행자들을 볼 수 있다. 지금도 쿠스코에서 오얀타이탐보까지는 기차와 버스가 함께 다니지만, 오얀타이탐보에서 아구아스 칼리엔테스까지는 기찻길이 유일한 대중교통이다.
종착역인 아구아스 칼리엔테스에서 내려, 다시 버스를 타고 마추픽추 정상으로 오르는 길도 산등성이를 마치 뱀이 휘감듯 올라간다. 절벽 같은 비탈길을 따라 올라가다보니, 계단식 밭들이 나타났다. 그 위로 해발 2400m의 높은 고원도시가 모습을 보였다. 수많은 책들과 사진, 영화, 텔레비전, 그리고 나의 상상력 속에서 살아 숨 쉬던 마추픽추 정상이 하얀 구름이 걷히면서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잃어버린 도시', '공중도시', '비밀도시'는 지난 500년 동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마추픽추는 말이 없었다. 역사의 패배자는 말이 없는 법인가. 스페인 백인 침략자에게 '문명'의 이름으로, 기독교 포교라는 '성전'의 이름으로, 영토의 개인소유라는 '정착'의 이름으로, 인디오 황인종의 '야만'과 태양신 숭배의 '이교도', 자연의 공동소유인 '유목'은 짓밟혀도 좋은가. 재레드 다이아몬드가 말한 <총, 균, 쇠>에 밀려, 데이비드 데이가 말한 <정복의 법칙>에 따라, 세계는 이렇게 남의 땅을 빼앗는 자들의 역사가 되었다.
패자의 아픈 이야기는 단지 신화나 전설, 민간신앙으로만 물러나 있어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실망할 필요는 없다. 우리에게는 서낭당(성황당)이 있고, 사당이 있고, 무당이 있다. 사대주의자 이성계에게 죽임을 당한 최영 장군과, 간신들의 무고로 억울한 죽음을 당한 남이 장군은 민간신앙에서 살아나고 있다.
정의는 그렇게 쉽게 죽지 않는다. 권력에 의해 죽임을 당한 자는 민중이 살려내는 법이다. 역사는 반전이 있어 대하드라마고, 스릴이 있어 탐정소설이다. 조지프 캠벨은 <신화의 세계>에서 "들어간 것은 족장들이고, 나온 것은 민중이다"고 했다. 모든 신화에서도 궁극적 신화의 주인공은 민중이고, 역사의 영웅은 민중이다.
마추픽추야, 슬퍼하지 마라. 너에게는 우리에게는, 위대한 시인과 소설가, 혁명가들이 있지 않은가. 정의가 패하는 것을 두고 보지 않는 사람들이다. 이들이야말로, 역사의 연금술사들이다. 너를 말발굽으로 짓밟았던 스페인 침략자들을 무도한 학살자로 끌어내리고, 찬란했던 잉카제국의 문명을 역사의 승자로 다시 세우고 있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억울하게 죽어간 수많은 잉카 민중의 영혼을 달래는 신원굿, 진혼굿 소리가 들리지 않은가.
"아메리카여, 나는 헛되이 네 이름을 부를 수 없다"고 외친 파블로 네루다가, 68년 전 마추픽추에 바친 진혼시가 들려오는 듯 했다. 네루다는 1943년 "오르자 나와 함께, 아메리카의 사랑이여"라고 외치며, 나귀를 타고 마추픽추 정상에 올랐다. "죽은 왕국은 여전히 살아 숨 쉰다"고 네루다가 마추픽추에게 다시 생명을 불어넣은 순간, 마추픽추는 남미의 투쟁과 저항 정신의 상징으로 부활했다.
네루다는 "쓸모없는 행동들의 곡창, 불쌍한 사건들의 곡창에서 옥수수처럼 인간의 영혼이 탈곡되었다"고 민중의 영혼을 위로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모두들 낙담하여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안타까워하던 네루다의 탄식은, 마추픽추의 비밀스런 돌 사이에 울부짖음으로, 계단식 밭에 붉은 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네루다가 마추픽추에 오른 뒤 9년이 지난 1952년, 한 젊은이가 네루다의 <마추픽추 산정>이란 시를 가슴에 품고 땀을 뻘뻘 흘리며 올라왔다. 그 젊은이는 "칠레의 시인 네루다처럼 마음을 다져먹은 난, 저 멀리 비춰오는 황혼마저 놓치지 않기 위해 달려왔다. … 마추픽추의 언덕에 고여 있는 잉카문명의 흔적들을 보노라면, 네루다가 느낀 감동이 느껴진다"며 마추픽추를 바라보며 네루다를 칭송했다.
"아, 마추픽추, 어느 영국인 여행객의 표현대로 코카콜라 광고가 없어 행복한 곳. 아메리카 대륙의 가장 위대한 토착문명이 숨 쉬고 있는 고대의 도시. 정복자들의 침략 속에 숨죽인 영혼들이 석벽과 돌계단 틈에서 여전히 꿈틀대는 곳"이라며, 그는 네루다처럼 시인이 되어갔다.
여기까지는 그가 누구인지 알기 어렵다. 다음 말을 들어봐야 한다. "실용적인 세계관으로 인해 편협하가 짝이 없는 북아메리카의 관광객들은 모르지만, 순수한 토착정신을 가진 남아메리카 사람들만이 몰락한 잉카인들의 우수성을 알아차릴 수 있다." 북아메리카, 즉 미국에 대한 적대감이 여기서도 드러난다.
이제 짐작이 가는가. 이 젊은이는 바로 미래의 혁명가 체 게바라다. 한 영국 여행자가 호텔 방명록에 쓴 "코카콜라 광고가 없는 곳을 찾게 되어 행복하다"는 글에 얼마나 감동했는지, 체 게바라는 마추픽추 여행기를 쓴 자신의 노트에 이를 기록해 놓았다. 체 게바라의 마음을 대변했던 것이다.
피노체트 군사 쿠데타 당시 살해된 칠레 민중가수인 빅토르 하라도, 1972년 마추픽추에 올라 "엄청난 역사에 눈떴다"는 기념으로 기타를 들고 마추픽추를 배경으로 멋진 사진을 찍었다. 그의 부인 조안 하라가 대신 쓴 자서전 <빅토르 하라>에는 빅토르 하라가 마추픽추에서 "많은 사람들이 함께 공유해온 열망과, 자기 민족과 같은 고통을 겪은 그곳 사람들의 엄청난 고통을 봤다"고 했다.
네루다도, 체 게바라도, 빅토르 하라도 모두 마추픽추에서 남미 아메리카의 문화적 동질성을 확인하고, '아메리카 인디오 혁명'의 길로 나섰던 것이다. 마추픽추에 올라, 잉카의 영혼들이 울부짖는 절규를 들어서 일까. 마추픽추는 중남미 혁명가들의 성지와도 같은 곳이다. 마추픽추가 잉카 왕궁이든, 태양신을 모시는 신전이든, 마지막 피난처든, 군사 비밀도시든, 그 도시의 성격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잉카의 정신과 영혼이 살아 있는 잉카 문명인 것만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마추픽추 정상에서 가장 관심을 끄는 건축물은 동지 때 줄을 달아 태양을 묶으려 했던 인티와타나라는 돌이었다. 잉카인들은 천체의 궤도가 바뀌면 커다란 재앙이 생긴다는 믿음에 따라, 태양을 돌에 매달아 놓은 의식을 치렀다.
세계 어떤 민족이 태양을 돌에 매달겠다는 상상력을 발휘한 적이 있는가. 잉카의 몰락과 함께 잉카인의 이런 초현실적 상상력도 사라졌다. 마추픽추 정상에서 풀을 뜯던 두 마리의 라마가 먼 산을 쳐다보고 있었다. '늙은 봉우리'라는 뜻의 마추픽추를 마주보며 우뚝 솟은 '젊은 봉우리'라는 뜻의 와이나픽추를 보고 있었다.
체 게바라는 와이나픽추에 올라 마추픽추를 내려다보며, "돌의 어머니여, 콘도르의 잔해여"라는 네루다의 시 <마추픽추 산정>을 큰 소리로 불렀다. 장 코르미에가 지은 <체 게바라 평전>이나, 영화 <모터싸이클다이어리>를 보면 체 게바라가 마추픽추 정상에 올라 감격해하는 장면이 나온다.
마추픽추 정상에 짙은 먹구름이 몰려오더니, 빗줄기가 굵어지기 시작했다. 정상 출입구를 나오자, 바로 옆에 뷔페식 식당이 있었다. 마추픽추 정상에 딱 하나 있는 식당이라, 많은 여행자들이 늦은 점심을 먹기 위해 북적거렸다. 식당에서는 5인조 인디오 밴드가 부르는 <엘 콘도르 파사(콘도르는 날아가고)>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인디오 밴드의 노래는 빅토르 하라가 마추픽추 정상에서 부르는 '끝나지 않은 노래'였다.
마추픽추 어디에도 잉카를 상징하는 콘도르는 보이지 않았다. 콘도르 날개 모양을 한 돌만이 콘도르 신전으로 남아 있었다. 안데스 산맥을 구름처럼, 이불처럼 덮었다던, 그 많던 콘도르는 어디로 갔을까. 그러고 보니, 나는 마추픽추 뿐 아니라 중남미를 여행하면서, 안데스 산맥 어디서도 콘도르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잉카의 몰락과 함께, 인디오의 도피와 함께, 콘도르도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
인류 역사상 최악의 범죄행위는 서구백인에 의한 잉카와 마야, 아스텍 등 아메리카 인디언 문명의 파괴일 것이다. 수천 년 동안 독자적인 문명을 일궈온 인디언(인디오) 문명 전체가 한 대륙에서 완전히 사라졌기 때문이다. 세계 역사상 한 대륙의 문명 전체가 사라진 적은 없다.
만약 아메리카 인디언 문명이 스페인의 침략을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발전했다면, 세계는 백인의 유럽문명과, 황인종의 아시아 문명, 흑인의 아프리카 문명, 인디오의 아메리카 문명으로 다양한 문명을 꽃피웠을 것이다. 인디오 문명은 르네상스를 맞기도 전에 짓밟혔다.
이제는 잃어버린 잉카문명을 되살릴 때다. 올해는 그렇잖아도, 잊혔던 마추픽추를 미국 고고학자 하이럼 빙엄이 다시 발견한지, 100주년이 되는 해다. 콘도르가 다시 안데스 산맥을 따라 마추픽추 정상으로 비상할 때, 잉카의 부활은 시작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지난 2월부터 5월까지 90여 일에 걸쳐 중남미의 혁명가, 여성운동가, 문학가, 예술가, 그리고 소설무대와 생태마을 등을 둘러봤다.
지금부터 거의 20년 전에 신영복 선생님의 <더불어 숲>(신영복의 세계여행)을 처음 접했습니다. 새로운 세기를 맞이하는 문명과 사람에 대한 깊은 통찰이 담긴 따뜻한 글과 그림 엽서. 20대 초반의 대학생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갖는데 큰 영향을 받았음은 물론이며 그 감동으로 막연하게 세계일주에 대한 꿈도 품게 됐습니다. 인생의 반환점에 이르렀다고 생각되는 2017년, 배낭여행자가 되어 그 꿈을 실행에 옮깁니다. 당신이 보낸 첫 번째 엽서에 적혀있던 '언젠가 나는 당신의 답장을 읽어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라는 문구에 무모한 용기를 얻어 여행지에서 편지를 띄웁니다. 이 여행기는 당신 그리고 또 다른 수많은 당신들과의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 기자 말
▲ 쿠스코의 아르마스광장. 낮부터 밤까지 언제나 사람들로 붐비는 옛 잉카의 중심부
ⓒ 정수현
스페인이 지배했던 남미대륙에는 하나의 공통된 패턴이 있습니다. 도시나 마을 중심에 광장이 자리 잡고 있고, 광장을 중심으로 대로가 뻗어 나갑니다. 광장의 상부에 성당이 위치하고 중앙에는 분수대와 동상이 서 있습니다. 동상의 주인공은 대부분 19세기 초반 남미대륙 전체의 독립을 이끌었던 두 영웅 산 마르틴, 시몬 볼리바르 아니면 각국의 독립 지도자들이 차지하기 마련입니다.
페루의 쿠스코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습니다. 스페인어로 '군대'를 뜻하는 아르마스 광장에는 바로크 양식의 대성당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광장의 중심에 서있는 동상의 주인공은 백인 혈통의 인물이 아니라, 잉카의 9대 왕으로서 제국의 기초를 닦은 '파차쿠텍'이었습니다. 이곳 쿠스코가 과거 찬란했던 잉카제국의 중심이었음을 웅변하는 자존심이 느껴지는 광경이었습니다.
▲ 잉카제국의 초석을 다진 파차쿠텍의 동상
ⓒ 정수현
쿠스코 주변 작은 부족국가에 불과했던 잉카는 파차쿠텍 통치시절(1438년~1471년) 정복전쟁을 통해 영토를 넓히고, 종교의식 체계화, 조세제도 확립, 수도 쿠스코시 건설 등을 통해 제국의 면모를 갖추게 됩니다.
무엇보다 케추아어를 공용어로 삼아 넓은 지역 다양한 부족을 잉카라는 하나의 공통된 문화권으로 묶어냈습니다. 그의 아들 투팍 유팡키와 손자 우아이나 카팍 시절에는 세력을 더욱 확장하여 지금의 에콰도르, 페루, 볼리비아의 중앙 및 남서지방, 칠레 북부, 아르헨티나 북부, 콜롬비아 남부까지를 차지하게 됩니다.
하지만 우아이나 카팍이 후계자를 지명하지 못한 채 천연두로 갑자기 사망합니다. 이후 왕위 계승문제를 둘러싸고 파벌이 갈려 잉카는 극심한 내분에 휩싸이게 됩니다. 이런 어수선한 상황 속에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스페인의 피사로가 등장합니다. 황금에 눈이 멀어 그 외의 모든 것들은 무자비하게 파괴하며 잔인한 살육을 자행하는 스페인의 참략자들 앞에서 잉카는 너무도 허망하게 몰락하게 됩니다.
침략자들은 잉카의 모든 흔적을 지우고자 했습니다. 잉카인들이 최고신으로 추앙한 태양신을 모시던 신전은 성당으로, 영광의 역사를 간직했던 광장은 군인들의 집합 장소로 바꾸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 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의식까지 바꾸고자 했습니다. 가톨릭으로 개종하지 않는 사람들은 잔혹하게 처형했습니다.
그 장소가 종이 한 장 들어갈 틈이 없는 석조 건축물로 유명한 사크사이와만 유적지 부근입니다. 하지만 잉카의 혼(魂)은 석조 구조물 이상으로 단단한 것이었습니다. 쿠스코와 그 주변부의 유적과 마추픽추, 그리고 잉카인들의 한(恨)이 담긴 노래에서 우리는 그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 잉카의 신전이자 요새였던 사크사이와만. 종이 한장 들어갈 틈이 없는 정교한 잉카 석조기술의 극치를 볼 수 있습니다.
ⓒ 정수현
쿠스코는 도시 자체가 잉카의 박물관입니다.
시내 골목 골목의 담장 하단부에서 잉카시대에 쌓여진 석조 구조물이 그대로 남아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유명한 산토 도밍고 성당도 잉카의 코리칸차 신전의 토대 위에 올려진 것입니다. 지금도 미스터리로 남아있는 잉카의 석조기술이 얼마나 정교했는지, 1950년 쿠스코 대지진 때 스페인 지배 시절의 건축물은 거의 다 무너졌는데, 잉카의 건축물은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합니다.
쿠스코 인근의 모라이 유적지는 지금으로 비유하면 '농업기술 연구소'에 해당하는 곳입니다. 척박한 산악지대에서 효율적인 농사를 짓기 위해서 층층이 높이를 달리하여 온도와 배수에 따른 최적의 재배작물을 연구했다고 합니다.
▲ 농업기술을 연구했던 모라이 유적지. 2~3m 간격의 층위 마다 온도와 배수를 다르게 하여, 최적의 재배작물을 연구했습니다.
ⓒ 정수현
이렇듯 발달한 석조기술, 농경기술, 수로기술의 흔적을 돌아보며, 잉카시대 쿠스코가 인구 100만에 육박하는 거대 도시였음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으로는 뛰어난 기술을 지녔던 이 문명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무엇이며, 제국의 흥망성쇠를 통해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의문이 들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 잉카의 흔적을 찾는 이들에게 일으키는 깊은 공감의 정서는 과연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머릿속을 계속 맴돌았습니다.
▲ 구름에 휩싸인 마추픽추의 전경. '자기의 이유'가 아닌 다른 힘에 밀려 떠나야했던 자들의 회한이 느껴지는 곳입니다.
ⓒ 정수현
쿠스코에서 마추픽추로 이동할 때 나는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방법을 선택했습니다. 7시간 동안 구불구불 비포장 도로를 타고 첩첩산중의 마추픽추를 향해 가면서, 어떻게 400년 동안 이 '공중도시'가 역사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철저하게 잊혀질 수 있었는지 그 이유가 충분히 이해되었습니다.
우기의 마추픽추는 구름이 가득했습니다. 내가 머무는 동안 비는 내리지 않았지만, 산을 넘어 올라가지 못하는 구름으로 마추픽추의 전경이 가려져 있는 시간이 훨씬 많았습니다. 이런 흐린 날씨가 회한이 서려 있는 이곳을 감상하기에는 더 적합하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잉카는 매듭을 지어 메시지를 전달하는 결승문자(結繩文字) 외에 글로 된 문자를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잉카의 유적과 유물을 설명할 때 유독 많이 쓰는 표현이 '~였을 것으로 추정된다'입니다. 아직까지 마추픽추가 어떤 역할을 하는 장소였을지 확실하게 나온 결론은 없습니다.
예상보다는 작은 규모의 마을에 제의(祭儀)와 관련된 시설이 절반을 차지하고 나머지 공간은 제의를 수행하는 사람들의 생활과 관련된 시설임을 보았을 때, 나는 마추픽추가 일반적인 생활을 위한 도시가 아니라 태양신에 대한 신성한 의식을 지내던 소도(蘇塗)였다고 추정해 봅니다.
스페인의 침략군들이 쿠스코를 점령한 후 이곳으로 오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마추픽추를 지키고 있던 잉카인들에게 결사항전의 용기가 없지는 않았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다만 그들이 가장 신성시 여기는 장소가 외부의 침입자들에 의해 겁탈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차라리 세월의 망각 속에 이곳을 묻어 버리고 떠나는 길을 선택하지 않았나 짐작해봅니다. 가장 귀한 것을 지키기 위해 떠나야 하는 자들의 서러운 고뇌가 느껴졌습니다.
▲ 저 산을 넘으면, 저 구름을 넘으면 자유의 새 콘도르를 볼 수 있을까
ⓒ 정수현
당신은 20년 전 이곳 마추픽추에 올라 사이먼 앤 가펑클이 노래했던 <엘 콘도르 파사>의 노랫말을 읊조리며, 개인적으로 수감생활을 통해 겪었던 공감의 정서를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달팽이보다는 참새가 되고 싶고, 못보다는 망치가 되고 싶다'는 자유에 대한 갈망을 이야기했습니다.
굳이 수감생활이라는 특별한 경험이 아니더라도, 누구라도 더 이상 갈 곳 없는 마추픽추의 고봉에 서면 원치 않는 떠남에서 오는 비극적인 감정과 자유에 대한 열망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잘 알려져 있듯이 사이먼 앤 가펑클이 부른 <엘 콘도르 파사>는 페루의 전통 민요에서 가져온 노래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엘 콘도르 파사>가 <철새는 날아가고>로 번역되었지만, 사실 콘도르는 철새가 아니라 길이가 1m가 넘는 맹금류로 안데스산맥 바위산에 둥지를 틀고 사는 새입니다.
잉카에서는 예로부터 그들의 영웅이 죽으면 이 콘도르로 부활한다는 전설을 가지고 있으며, '콘도르'라는 말 자체가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 잉카인들에게 읽히기도 합니다.
스페인의 지배 아래에서 안데스 광산에서 일하는 원주민들은 노예처럼 혹사를 당합니다. 이에 1780년 쿠스코 출신 원주민 지도자 '호세 가브리엘 콘도르칸키'가 봉기를 일으킵니다. 스페인군에 대항하여 싸웠던 잉카의 마지막 왕족의 이름이 '투팍아마루'인데, 원주민들 사이에서는 이 투팍아마루가 언젠가 다시 돌아와 그들을 고난에서 구원해줄 것이라 믿었습니다.
콘도르칸키는 스스로를 '투팍아마루2세'라 칭하고 탁월한 지도력을 발휘하여 쿠스코를 비롯하여 남부 페루 및 볼리비아와 아르헨티나 북부까지 점령하는 위세를 떨칩니다. 사로잡은 스페인 총독에게는 녹인 금을 먹게 한 뒤 처형하여, 황금에 대한 탐욕을 상징적으로 응징합니다.
그러나 그의 봉기는 이듬해 스페인군에 의해 진압당합니다. 콘도르칸키는 자신의 가족이 눈 앞에서 죽어가는 것을 목격해야만 했고, 그 자신 역시 광장에서 사지가 찢기는 참형으로 최후를 맞이합니다. 이 콘도르칸키에 대한 애잔한 마음과 잉카인의 슬픔을 담은 노래가 <엘 콘도르 파사>의 원형이 되는 민요입니다.
"오~ 하늘의 전능한 주인인 콘도르여, 우리를 안데스 산맥의 고향으로 데려다 주오. 잉카의 동포들과 함께 살던 곳으로 돌아가 마추픽추와 와이나픽추를 거닐고 싶어요."
팝송 가사보다 민요의 가사에서 훨씬 더 비장미가 느껴집니다.
당신은 언젠가 자유(自由)를 '자기(自己)의 이유(理由)'로 풀이한 적이 있습니다. "자기의 이유, 이것은 우리가 지켜야 할 자부심이며, 자기의 이유를 가지고 있는 한 아무리 멀고 힘든 여정이라 하더라도 결코 좌절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쿠스코를 거쳐 마추픽추에 이르는 여정 동안 잉카의 흔적과 내가 느낀 공감의 단어는 '자유'였습니다. 자기의 이유, 스스로의 선택이 아닌 어쩔 수 없이 밀려난 자들의 애환과 그 처지를 벗어나고자 하는 열망… 그것은 비단 잉카인들만의 경험과 정서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부질없는 가정이지만, 피사로 일행을 처음 맞이했을 때 잉카인들이 이 수염난 백인들을 그들이 오랫동안 기다려온 전설 속의 구원자 '비라코차'로 착각하지 않았더라면, 잉카의 역사가 어떻게 되었을까 상상해봅니다.
맹목적인 구원에 대한 바람과 스스로를 해방하기 위해 '투팍아마루'를 자처했던 콘도르칸키의 선택이 오버랩됩니다. 자유는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평범한 역사적 진실을 마주합니다.
마지막으로 당신이 20년전 이곳을 다녀간 뒤 달라진 이야기 하나를 전하며 편지를 마무리할까 합니다. 단순히 혈통과 피부색을 떠나 피사로는 자유를 억압하고 파괴와 학살을 자행한 인간 탐욕과 잔인성의 상징적인 인물입니다. 이런 피사로의 기마동상이 페루의 수도 리마 광장의 한복판을 장식하고 있음에 당신은 씁쓸한 심경을 가졌었습니다. 이 피사로의 기마동상은 2001년에 철거되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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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2016년 12월 말부터 약 1년간의 일정으로 세계일주 인문기행을 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