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믿음에 있는가

                                            시험하고 확증하라


                      자기 의를 내세우는 신자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라디아서 2:16).


   필자는 사랑을 실천하는 성자들에 관한 주제를 다시 한번 다루고자 한다. 먼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경건한 삶을 살다간 그 많은 훌륭한 분들이 모두 지옥에 갔다고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님을 밝혀두는 바이다. 다만 거듭난 경험 없이도 얼마든지 순교할 수 있고 경건한 성자 생활을 할 수도 있다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보자.구원 없는 이교도 중에도 존경스러운 성자는 얼마든지 있다. 필자가 생각할 때 그들이 지옥에 가기에는 너무나도 아름다운 생활을 한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속죄의 진리를 모르는 저들을 우리가 어찌 인정할 수 있으랴. 기독교내에서 이 문제를 적용해보면 답이 나오지 아니한가. 거듭난 경험 없이도 얼마든지 거룩한 삶으로 많은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하고 반문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와 같은 질문에 필자도 이해는 한다. 그럼에됴 불구하고 사실이요 현실임에 어찌하겠는가.

   필자는 앞에서 그들을 자기 의에 붙잡힌 사람들이라고 말하였다. 그들이 자기 의에 붙잡힌 까닭은 이러하다. 거듭남의 경험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거듭남은 영적인 출생이기 때문에 경험하지 못한 자는 그 속의 세계를 알지 못할 뿐 아니라 이해할 수도 없고 상상할 수도 없다. 사실이 그러하니 그냥 그리스도의 사랑을 열심히 실천하여 가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며 그분을 기쁘게 하는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으로 살아간다. 구원에 있어서 그들의 인격이 잘못된 것이 아니고 그들의 경험이 잘못된 것이다.

   이것은 성자들의 이야기로만 규정하여 남의 이야기처럼 지내치지 말아야 한다. 오늘날 기독교에 몸담고 있는 모든 이들이 심각하게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이다. 거듭남으로 인한 하나님과의 관계가 명확하지 않은 상태에서 열심만 내다보면 하나님의 의, 즉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값없이 의롭다 하시는 의(롬 3:24)에 복종치 아니하고 자기 의를 내세우는 교만에 빠지게 된다.

   교만의 특징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신의 교만을 자각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자신이 교만한 것을 깨닫기 시작하면 이미 교만에서 벗어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감히 우러러 볼 수 없는 겸손한 성자가, 평생을 봉사한 경건한 성직자가,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드린 충성스런 열심 장로가, 교만한 자로 정죄 되어 멸망의 지옥에 떨어질 수 있다는 일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신앙의 절대적 실패 요인이 무엇인가? 속는 것 아닌가? 사단의 본질은 속이는 것이다. 요한복음 8장 44절에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하지 아니하였는가. 사단은 사람들을 감쪽같이 속여 지옥으로 데려간다.

   생각하여 보라. 속이는 자가 엉성하게 속이는가? 속는 자도 수상하면 속겠는가? 완벽한 진짜 같으니 속는 것이다. 이 글을 읽으면서도 나는 큰 교회의 이름 있는 목사님 밑에서 잘 배우고 있으니 절대 안전하다고 자위하는 사람은 분명 위험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렇게 말하면, "당신이 어찌 쉽게 함부로 판단하느냐"고 반문한다. 성경은 구원의 문은 좁은 문이라고 하였음을 생각하여 보라. 거듭난 자들이 결코 큰 무리일 수 없으며 유명한 교파일 수 없음을 왜 모르는가. 유명한 교단을 자랑하고, 유명한 목사님을 자랑하는 자기 도취에 빠져있는 불쌍한 종교인들이여! 기독교는 종교가 아님을 왜 모르는가! 제발 정신을 차리라.

   비극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필자는 이단에 속한 여호와의 증인들의 수가 증가하고 있는 이유를 생각해 보았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 중에 한 가지는 그들의 말에 먹혀 들어가는 내용에 있다. 그것은 기독교에 대한 비판이다. 그들이 오늘날 기독교의 약점인 온갖 비리들을 깊이 연구하여 낱낱이 폭로하면 쉽게 설득력을 얻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문제의 본질은 어디에 있는가? 오늘날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거듭나지 못한 상태에서 거룩한 생활을 해보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오는 실수들을 파고드는 것이다.

   필자는 여호와의 증인들과 변론할 기회를 많이 가졌던바 저들이 왕년에 한국의 제일 유명하다는 교회의 장로요 집사였다는 경력을 들을 때마다 얼마나 가슴 아팠는지 모른다. 심지어 전도사 목사 출신도 있다고 들었다. 요한복음 10장 28,29절을 보면 참으로 영생 얻은 자는 영원히 빼앗기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만약 그들이 제대로 거듭난 양이었다면 왜 사단의 자식이 되었겠는가.

   이 글을 읽는 장로여, 집사여, 그리고 목사님들이여! 진정 거듭났는가? 정말 그대의 영혼은 안전한가? 기회는 항상 주어지지 않는다.


   필자는 이제 거듭남의 본질에 접근하면서 그 훌륭한 종교인들이 지옥 갈 수도 있는 이유를 살펴보고자 한다. 거듭남의 본질은 무엇인가? 거듭남은 나를 아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하나님 앞에서 나는 누구인가? 썩어 가는 문둥이처럼 불쌍한 죄인이요, 구더기처럼 더러운 죄인이요, 사자처럼 사나우며, 뱀처럼 간교하며, 여우처럼 약삭빠르며, 돼지처럼 천박하고, 거북이처럼 게으르며, 양처럼 무능하고, 소처럼 고집 세고, 공작처럼 자랑하되 자랑할 것도 없는데 자랑하기 좋아하여 도저히 거룩할 수 없는 죄인의 종자이다. 선을 행하려하나 할 수 없다는 바울의 고백처럼 나는 도저히 선을 행할 능력이 전혀 없는 죄인이다. 사람이 선을 행할 수 있겠는가?

   돼지가 깨끗해지려고 노력하여 깨끗해질 수 있겠는가? 밤낮으로 교육받으면 가능하리라고 보는가? 밤낮으로 훈련하면 깨끗해질까? 조금은 개선될 수도 있을 것이다. 사자가 유순하려고 노력하여 유순해질 수 있겠는가? 사자가 양처럼 되려면 가능한가? 얼마큼의 노력으로 가능할까? 잠을 안자고 걸음걸이 연습을 하면 가능할까? 몇년 동안, 아니 몇 십 년 동안 목소리 연습하면 가능할까? 불가능하다. 절대로 불가능하다.

   사실이 이러한데 오늘날 죄인들을 모아다가 교육시키고 훈련하여 경건한 모습 흉내 내게 하고 있으니(이것이 종교다) 저들의 피곤한 고생은 말로 다할 수 없고, 고난은 글로 다 표현하기 힘들다. 물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는 대의명분에 의해서 충분히 이기고 순례의 길을 가는 그들의 삶에 경의를 표하는 바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듭남의 경험 없이 고생하는 저들의 수고에 눈물이 있다. 거듭난 신앙은 결코 교육이 아니다. 훈련도 아니다. 흉내 내는 것도 아니며 연습하는 것은 더욱 아니다.

   생각하여 보라. 스스로 움직일 힘없는 리어카와 움직일 힘 있는 자동차 중에서 무엇을 선택하겠는가? 거듭남 없는 종교생활은 리어카를 끌고 가는 모습이다. 평생을 종교적인 훈련을 통하여 온갖 고생하며 아름다운 간증을 쌓았으나 그들은 하나님에게 배척 받을 것이다. 거듭남은 하나님의 생명이 내 안에 역사하여 힘들이지 않고 가는 자동차처럼 쉽게 가는 것이다. 주님도 마태복음 11장 30절에서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니라" 하시지 아니하였는가. 분명히 말하거니와 이 말씀을 제대로 깨닫고 누리는 독자가 있다면 거듭난 그리스도인임에 틀림없으리라.

   그렇다면 거듭남은 무엇인가? 돼지가 양으로 바뀌는 것이다. 어찌 이러한 일이 가능하겠는가 하지 말라. 1900여 년 전에 니고데모도 똑같은 말을 하지 아니하였던가(요한복음 3:9). 이것은 하나님의 사역이요 인간에게는 비밀인 것이다.

   거듭남은 단번에 이루어지는 사건이다. 사자가 점점 양으로 바뀔수 있겠는가? 그것이 아니다. 유다서 1장 3절에 주님은 "단번에"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죄인이 어느 날 갑자기 성도로 바뀌는 사건이다. 바울은 말하기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혀 죽었다"고 설명하고 있다(갈라디아서 2:20). 과거형으로 말하고 있다.

   거듭남은 사자가 죽고 양으로 다시 태어나는 사건이다. 다시 설명하자면 죄인 아무개는 십자가에서 죽었고 의인 아무개로 다시 태어난 사건인 것이다. 십자가에서 예수가 죽으신 것이 아니고 내가 죽었으며 부활시에 내가 다시 부활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은 지옥에 가서 영원히 치루어도 치루지 못할 끔찍한 내 죄를 대신 지고 죽으심으로 나의 죄를 영원히 해결하신 것이다. 이것을 믿을 때 이제는 의인이요 하나님의 자식이 된 것이다. 이 사건을 바울은 그림처럼 그려주고 있다.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 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로마서 6:4).

   죄인된 나는 십자가에서 죽고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났다. 두 번 태어났으니 거듭난 것이다. 양으로 태어났으니 흉내 내려고 억지로 노력하지 않아도 양의 성품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신앙생활이요 성도의 삶이다.

   이사야 1장 3절의 "행악의 종자:라는 말씀을 다시 생각해보자. 여기 돌감나무가 있는데 그 감나무에 아무리 거름을 주고 열심히 가꾸어도 좋은 감이 열리지 않는다. 좋은 종자를 접붙이기 전에는 불가능하다. 거듭남도 이와 같아서 좋은 종자를 접붙이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종자 자체를 바꾸는 것이다. 또다시 말하자면 마귀 자식으로 태어난 죄인이 하나님의 자식으로 두 번째 태어나는 것이다.

   생각하여 보라. 종자 자체가 안 바뀌었는데 어떻게 그 종의 흉내를 낼 수 있으며 흉내를 낸다고 종이 바뀌겠는가? 천국은 양이 가는 곳이지 돼지가 가는 곳은 아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우리의 인격은 사랑을 실천할 수 없고 실천한다고 하는 말 자체가 교만일 수도 있다. 물론 성경에 사랑을 행하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을 필자도 안다. 그러나 알 것은 우리가 사랑을 실천하려는 기도와 노력을 하더라도 주님의 은혜로 성령의역사하심과 도우심으로 행할 수 있을 뿐 우리의 육신은 구원받은 이후에도 여전히 육신일 뿐이다. 바울은 이에 대하여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고백하고 있다(빌립보서 4:13). 또한 "나의 나 된 것은 주의 은혜라"고 단언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성령으로 말미암은 삶이요, 성령은 거듭나는 순간 신자들 안에 내주하신다. 종교인들이 성령 없이도 얼마든지 그리스도인 흉내를 낼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바울은 경고하고 있다. 사단도 얼마든지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할 수 있다고.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단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큰일이 아니라. 저희의 결국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고린도후서 11:14,15).

   얼마나 무섭고 끔찍하고 두려운 일인가.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 하나님의 훌륭한 종이라 여겼던 사람이 사단의 종일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필자는 누구를 정죄하기 위하여 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다만 여러분의 영혼에 대하여 관대하거나 방심하는 오류로 망할 수 있기 때문에 이 글을 쓰는 것이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고린도후서 13:5).

Posted by 행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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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믿어도 죄인인가?


                         율법에서 해방되던 날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갈라디아서 3:26).


   저는 본래 믿는 가정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주일학교에 다니며 하나님을 배웠습니다. 또 기독교 선교부 계통의 학교에 다녔기 때문에 항상 하나님의 존재를 막연하게나마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주일이오면 습관적으로 부모님을 따라 예배당에 가고는 했지만, 실제로 주님을 저의 개인의 구주로 믿고 거듭난 경험 곧 구원받은 믿음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고등학교 1학년 말에 우연히 어느 부흥회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아무것도 모르면서 광적인 흥분 상태 속에 빠지게 되었는데 그것을 가리켜 성령 받은 것으로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당시로는 마음이 뜨거워졌고 알 수 없는 방언을 마구 터뜨렸고 계속 기도하고 찬송하면서 무려 2년간이나 돌아다녔습니다. 특히 매일 다락방에 올라가 3~4시간 이상씩 기도를 드리고 지옥가지 않도록 이 죄인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통회의 눈물을 한없이 흘렸습니다.

   부흥회란 부흥회는 거의 모두 참석할 정도였고, 소득의 십일조를 바쳤고, 추운 겨울에 감기로 쓰러질 정도가 되어도 쉬지 않고 새벽기도를 열심히 나갔습니다. 매일 열심히 성경책을 읽었고 심지어는 미친 사람처럼 길거리에 우뚝 서서 열렬히 전도도 했습니다. 율법적인 교파에 충성을 다해보려고 무던히 애를 썼습니다.

   심지어는 사랑하는 후배가 학비가 없어 학교 공부를 그만 두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급히 병원으로 달려가 피를 뽑아 판 돈으로 그의 학비를 내주기까지 하였습니다. 선한 일이라면 모두 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면서도 한편 저는 계속 제 마음 속에 도사리고 있는 악한 정욕 때문에 몹시 괴로워했습니다. 마가복음 7장 21절 이하의 말씀처럼,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와 같은 모든 악한 것" 이 다 제 속에 있고 이것이 속에서 나와서 저를 괴롭히고 더럽게 만들었습니다. 저는 어쩔 수 없는 죄인으로 지옥에 갈까봐 두려웠습니다.

   매일 엎드려 눈물을 흘리면서 원죄와 모든 자범죄를 용서해 달라고 회개의 기도를 계속 반복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저의 심령에는 참 평안이 없었고 항상 죄의식으로 인한 정죄함 때문에 괴로움만 계속 받고 있었습니다. 계속 회개의 기도를 드리고 교회에 충성하고 도덕적으로 선히 살려고 애썼지만 그럴수록 더욱 더 시험을 당했고 범죄와 가증한 형식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착잡하고 번민하는 상태에 있던 저에게 하나님께서 어느 날 전도인 한 사람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참으로 믿고 거듭난 그리스도인임을 그 후에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저에게 요한계시록 21장 8절을 펴서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저를 향해, "당신은 당신의 모든 죄로 인하여 죽은 후 지옥에 갈까봐 항상 두려워하는 자에 속해 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신 것을 확신하고 있지 않으니 이것이 가장 큰 죄, 곧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지 않는 불신의 죄" 라고 일러주었습니다. 그가 다시 저에게, "당신의 선행과 노력이 훌륭하고 종교생활에 충성을 다한다고 할지라도 지옥 가는 것을 면할 수는 없다" 고 직고했을 때, 저의 자존심은 몹시 상했고, 저를 전혀 인정해주지 않는 그가 굉장히 미웠습니다.

   저는 몇 시간 동안 미칠 것 같은 괴로움을 당했습니다.그러나 솔직히 양심적으로 생각해 볼 때, 저는 모든 죄를 그대로 가지고 있는 그것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으며, 죽으면 지옥가지 않을까하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물론 주님을 믿고 따른다고는 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제 나름대로의 일방적인 열심에 불과했습니다. 제가 지켜오던 모든 종교적인 형식과 규칙, 조직과 전통, 유전과 사람의 가르침을 붙잡고 있었을 뿐이지 정말 주님의 말씀과 그분의 생명이 저의 마음속에 계시지 않음을 순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는 무릎을 꿇고 제가 얼마나 큰 죄인인가를, 전혀 믿음이 없고 생명이 없다는 것을, 그리스도의 속죄의 공로를 알고는 있었지만 참으로 마음으로 믿고는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시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의 모든 죄, 꿈틀거리는 무서운 정욕, 교만심, 가증스런 형식주의, 거듭나지 않은 사람이 그리스도인인 것처럼 행동한 것, 성령님 없이 육신의 방법대로 주님을 섬긴 것, 율법이나 십계명을 지켜서 구원받으려고 했던 어리석음, 영적인 변화가 없이 예배당 잘 다니고 헌금 잘 드리고 새벽기도 열심히 하고 이웃에 선을 베풀면 하늘나라에 갈 수 있는 것으로 크게 오해하고 있던 것이 바로 이 무지몽매한 사람이었습니다.

   사실 제가 하루에 여러 시간씩 기도를  드린 것도 주님과의 성령님에 의한 생명의 관계가 아니고 날마다 짓는 죄에 대한 괴로움을 호소함으로써 스스로 위로를 받으려는 자위책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무 유익도 없는 방언을 계속 토하는 것을 은혜 받은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은근히 남에게 보이며 인정을 받으려 하고 자신의 죄악을 선행으로 덮어 보려고 하는 것이 가증한 행실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저는 주님 앞에서 두 손을 들고 항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무서운 죄인이고, 교만한 죄인이며, 육신적인 의를 나타내려고 했던 가증한 죄인임을 주님께 고했습니다. 마음의 문을 열고 주님의 은혜와 그 속죄를 구했을 때 주님께서는 제 속에 들어오셨습니다. 저는 그 순간 저를 사랑하사 저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피 흘려 돌아가신 예수님을 저의 주님으로 믿게 되었습니다. 저의 모든 죄를 하나도 남김없이 온전히 사해 주신 주님을 확실히 제 마음에 받아들여 믿었을 때 이때까지 의심하고 괴롭던 모든 죄의 문제, 심판과 지옥의 문제가 아침 햇살에 안개가 걷히듯 깨끗이 사라지는 것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그 후 하나님의 말씀을 보았을 때,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전부 받은 사실과(에베소서 1:7). 믿는 자는 이미 영생을 얻었다는 것과(요한복음 5: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것과(로마서 8:1, 31~39), 그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빌립보서 4:3, 요한계시록 20:12,15). 또 로마서 8장 14절을 읽었을 때 제가 곧 하나님의 아들(자녀)이 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저로서는 너무나 감사한 일이고 너무나 황송한 말씀이었습니다.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참으로 기뻤습니다. 그 구원의 기쁨을 가눌 길이 없어 저는 계속 합동 찬송가 425장을 부르고 또 불렀습니다. 특히 "그 율법과 그 계명은 날 가르친 율법일세. 주 함께한 새 언약은 그 흘린 피 내 증걸세" 라는 내용은 내 눈시울을 적셨습니다. 얼마나 기뻤던지 어린 학생들 앞에서 춤을 추고 간증을 하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제 구원받고 30여년이 지났지만 주님 안에 있는 저의 영혼은 참 평온함을 맛보고 있으며 이 영원한 생명을 저에게 주신 주님께 감사 찬양을 드립니다.

Posted by 행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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