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믿음에 있는가

                                          시험하고 확증하라


                                  구원받았느냐?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마태복음 1:21).


   "구원을 받았습니까?" 하고 물으면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는 것이 작금의 한국기독교의 현주소인데 이것은 바람직한 모습인가? 성경적인 행동인가? 과연 주님의 뜻인가? 여기서는 이와 같은 문제를 살펴보면서 참된 믿음의 길이 무엇인지 알게 되기를 바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구원 받았느냐?"고 묻는 것은 당연한 것이며 지극히 성경적인 질문이다. 그 이유는 이렇다.

   첫째, 기독교 역사에서 첫 번째 설교제목이 "구원을 받으라"였다. 사도행전 2장에는 베드로의 유명한 설교가 기록되어 있다. 베드로는 설교에서 성령으로 방언하는 것을 가리켜 요엘 성경에 예언된 말씀을 상기시켰다. 그리고 성경의 예언대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유대인들의 중대한 범죄를 드러냈다. 그리고 죄인들의 손에 애매히 죽은 예수님을 하나님이 살리신 사실을 외치며 결론을 내린 것이 "구원을 받으라"였다. 그리고 이날 3,000명이 구원을 받았다.

   기독교의 시작이 이럴진대 "구원을 받으라", "받았느냐" 하는 질문은 당연하지 아니한가? 오늘날 한국의 기독교에서 "구원 받았느냐"는 질문이 충만해질 때에 한국의 기독교는 양적으로 질적으로 풍성한 발전을 이룩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원을 받으라"는 질문과 함께 "구원을 받았는가"를 서로 확인하며 도와주며 주님 앞에서 영생의 문제를 위해서 서로 협력하여야 할 것이다.

   어느 때에 필자는 전도하다가 어떤 기독교인을 만나 "구원 받았느냐"고 질문한 적이 있다. 그는 눈을 덩그렇게 뜨고 떨리는 목소리로 "구원파가 아니요?" 하는 것이었다. 필자는 그가 가지고 있는 찬송가를 받아서 194장을 찾았다.


   "우리를 죄에서 구하시려

   주 예수 십자가 지셨으니

   기쁘게 부르세 할렐루야

   나 구원 얻었네."


   여기까지 읽어주고는 "당신도 구원파요?" 하고 물으니 그는 찬송가를 유심히 들여다보며 말을 하지 못하였다. 구원을 주제로 파를 만들거나 또 다른 조직을 만드는 데는 필자가 동의할 수 없으나 "구원 받았느냐"고 물으면 "구원파요?" 하고 질문하여 잘못된 믿음을 가진 것처럼 인식하고 있는 오늘의 기독교 현실은 분명 문제가 있는 것이다. 194장뿐 아니라 여러 찬송가들이 구원 받은 기쁨을 노래하고 있다. 기독교가 구원의 기쁨을 잃는다면 이는 알맹이 없는 선물 상자일뿐이다. 아무 쓸모없는 종교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둘째로, 구원을 얻었다는 말씀이 성경 여러 곳에 보이고 있다. 에베소서 2장 8절에 보면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중요한 내용 중 하나는 "구원을 얻었나니"이다. 사도 바울은 초대교회의 여러 교회에 서신을 보내면서 구원을 얻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유다서 1장 3절에서도 "얻은 구원" 이라고 증거하고 있다. 이미 얻었다는 것이며 얻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말씀이다. 그렇다면 이 역시 구원을 얻었다고 간증하고 있다면 얻었느냐고 묻는 것 또한 당연하지 아니한가?

   바울의 서신서를 잘 살펴보면 그로 하여금 그처럼 열정적으로 힘있게 신앙생활을 하게 한 원동력은 구원받은 기쁨이었음을 볼 수 있다.

   필자는 어느 경우에 또 기독교 신자를 만나서 "구원 받았느냐?" 고 물었다. 그는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며 "어찌 그것을 알 수 있는가?" 하고 되묻는 것이었다. 필자는 담대히 말하기를 "그것을 모르면서 무엇 때문에 교회에 나가는가?" 하였다. 월급을 받는다는 확실한 근거도 없이 무작정 일하는 사람이 있는가? 당장 죽어도 천국에 간다는 보장도 없이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얼마나 불쌍한지 아는 사람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다.

   하나님 믿느라고 온갖 희생 다하고 헌신하고 이방인들에게 온갖 핍박 다 받고 애매한 고난을 당하면서 슬픔을 참고 천국에서 위로 받을 줄 알았는데 천국에 가지도 못하고 지옥에 떨어진다면 얼마나 무서운 비극인가? 어찌 이런 일이 있겠느냐고? 있다. 충분히 있을 수 있다. 못 믿겠으면 마태복음 7장 21절 이하를 자세히 읽어보시기 바란다. 주님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병고치고 주님의 이름으로 권능을 행한 충실한 기독교 지도자들이 지옥에 떨어지는 것이다. 그들은 평생 하나님의 이름으로 살았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았으며 온갖 희생을 다 치루면서 주님을 위해 한 평생 바친 자들이다. 그러한 지도자들이 지옥에 가는 마당이니 그 밑에 딸린 양들의 형편을 어찌하려는가?

   성경은 믿는 자들에게 확실한 천국의 약속을 보장해 주고 있다. 그와 같은 말씀의 근거 속에 거듭난 성도들은 이 말씀의 뜻을 이해 할 것이다. "그 사랑 받은 자만이 그 사랑 알도다"라는 찬송가 가사처럼... .

   사랑하는 그대여, 구원 받았는가? 진정 구원받았는가? 진정으로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구원받았느냐는 질문에 불쾌하게 생각할 일이 아니라, 조심스런 마음으로 자기를 살펴야 할 것이다.

   얼마 전 필자는 한 구도자를 만나서 상담하였다. 그는 자신은 구원받았으니 교리적인 부분만 자세히 가르쳐서 자신이 잘못된 것을 지적해 달라고 하였다. 그런데 필자가 정확하게 바로 잡아야 할 부분을 지적하여 주어도 그는 받아들이지 못하였다. 다시 말하여 말씀을 순종할 영력이 없고 성령의교통도 없는 사실을 보면서 필자는 말해주었다. "선생에게는 교리적인 부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구원에 문제가 있네요" 하니 얼굴색이 변하였다. 다시 말하기를 구원 받은 것 같지 않아요" 하니 그는 얼굴을 붉히면서 "왜 내가 구원 받지 못했습니까?" 하였다. "보세요. 그대가 구원 받지 못한 것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이 그대의 언어입니다. 구원 받지 못한 사람이 과격하고 저돌적이다가도 구원 받으면 순한 양으로 변하지요. 당신에게는 영원한 지옥에서 건짐 받은 기쁨, 건저 주신 자에 대한 감사, 전해준 자에 대한 감사 등 구원 받은 자의 기본적인 모습들이 없어요. 구원은 이론적인 것이 아니요 막연한 교리 정립이 아닙니다."

   그에게 구원의 증거를 말해달라고 하니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구원받으니 구원받은 것 아닙니까?"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무엇을 믿습니까?" 하고 물으니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으니 믿는 것 아닙니까?" 하는데 얼마나 불쌍하고 처량한지 안타깝고 안타까울 수밖에 없었다. 무조건 예수님 믿으니 구원 받았다고 우기는데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 글를 읽는 독자여, 그대의 모습은 어떠한가?

   세 번째로 구원 받으라는 질문이 합당한 이유는 무엇인가? 예수를 믿었다는 뜻은 구원을 받았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예수"라는 뜻은 구원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서두에 예시한 말씀은  이 시실을 말해 주고 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구원할 자이심이라." 주님의 이름의 뜻이 그러하고 주님의 오신 목적이 그러하다면 구원을 질문하고 구원을 답변하는 것이 당연하지 아니한가?

   다시 말하거니와 예수께서 오신 목적을 바울도 죄인을 구원하러 오셨다고 증거했다. 디모데전서 1장 15절에서 그렇게 증거하고 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셨도다." 얼마나 정확한 말씀인가. 해석이 따로 필요 없는 분명한 선언이다.

   구원을 물어야 하는 네 번째 이유는 무엇인가? 성경 전체가 구원을 이야기 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한 복음 5장 39절에는 성경이 예수님을 증거하고 있다고 직접 증언하신 말씀이 있다. 말씀은 예수님이다. 예수라는 이름의 뜻이 구원이다. 그렇다. 디모데후서 3장 15절에도 성경은 구원을 말하고 있다고 가르쳐주고 있다. 이 부분을 더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창세기 3장 15절에 보면 하나님의 구원 프로그램이 나와 있다. 이 계획은 아담의 범죄 직후에 발표되었다. 여자의 후손(예수님)은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고 뱀은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한다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음으로 죄인을 구원하실 것을 이미 선언하신 것이다. 이 발표 후 하나님은 이 구원 계획을 실천하셨으며 그 과정을 기록한 것이 신구약 성경이다. 신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기록한 책이다.

   실제로 구약에 나타난 수많은 인물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을 나타내고 있다. 구약의 수많은 사건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나타내고 있다.

   가인의 제사와 아벨의 제사의 경우도 그러하다. 하나님이 아벨의 제사는 받으셨으나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아니하셨다. 왜일까? 아벨의 제사는 정성스러웠고 가인이 드린 제사는 정성이 부족했기 때문인가? 어떤 목회자는 그렇게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분별은 소경이요 구원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 거듭나지 못한 사람인 것을 스스로 드러내는 넋두리인 것이다. 가인의 제사는 피가 없고 아벨의 제사는 피가 있는 차이였다. 그 피가 예수님의 피를 말하고 있으며 이 피는 죄인을 죄에서 구원하는 유일한 길을 말하고 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제사로 드리려하는 사건은 무엇인가? 외아들로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나타내고 있지 아니한가? 하나님은 외아들을 내어주셔서 죄인을 구원하신 자비로우신 분이시다.

   구약의 사건 중에서 가장 확실하고 분명하게 주님의 구원 모습을 나타내는 사건 중의 사건은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출애굽 사건이다. 바로가 끝까지 이스라엘의 해방을 거절했을 때 하나님은 유월절 양을 잡아서 그 피를 문설주에 발랐다. 그리고 심판이 지나가는 밤에 문설주에 피를 바른 집에는 장자를 죽이는 재앙이 지나갔다.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의 거하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출애굽기 12:13).

   오늘날도 여러분의 마음의 문에 예수님의 피를 발랐으면 하나님의 심판을 면하려니와 그 피가 없으면 심판 받고 멸망의 지옥에 떨어질 뿐이다. 이것 또한 구원의 모형이다.

   찬송가 가사에도 "그 피가 맘속에 큰 증거 됩니다. 나의 죄를 씻기는 예수의 피 밖에 없네"라고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은 찬송가 가사만 제대로 깨달아도 구원받기에 충분하다.

   구약의 사건뿐만 아니라 인물들도 구세주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모세는 예수님의 모형중의 모형이다. 그 이름이 모세 즉 건져냄을 뜻하였으니 곧 구원이라는 뜻이다. 그는 이스라엘을 애굽과 바로의 손에서 건져냈으니 우리의 구주 예수께서 우리를 마귀와 그의 나라로부터 구원하심과 같다.

   그 외에도 구약의 수많은 인물, 수많은 사건이 예수님과 그분의 구원을 나타내고 있다.

   성경은 온통 구원을 나타내고 있거니와 성경을 말하면서 구원에 대한 관심을 무시하는 것은 대단히 잘못된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어떤 사람에게 "구원 받았는가?" 물으니 말하기를 "그것은 기초요 기본인데 왜 묻느냐"고 반문하였다. 물론 어떤 의미에서 그 말이 맞다. 더구나 그가 만약 구원을 받았다면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그렇게 대답하는 사람치고 구원을 확실하게 받은 사람을 필자는 보지 못하였다. 구원은 신앙의 기초일 뿐만 아니라 전부이다.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잃어진 인생들을 되찾아 영원한 천국으로 데려가는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성경이 쓰여졌고 성경대로 역사는 진행되고 있다. 구원은 성경전체요 성경의 주제인 것이다.

   오늘날 많은 기독인들이 구원을 기초 및 초보라 하여 가볍게 여기는 풍조를 보는데 이것은 한심한 모습이 아닐 수 없다. 구원이 없으면 천국도 없고 영생도 없고 부활도 필요 없으며 모든 하나님의 약속은 아무것도 아니다.

   구약은 구원의 약속이요 신약은 약속의 성취이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구원을 발견해야 한다. 구약의 구원의 그림자 중에 확실한 그림자는 제사법이다. 구약의 거의 모든 제사는 동물의 피를 통하여 제사를 지낸다. 레위기 17장 11절에는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고 선포하고 있다. 그러므로 피 없는 제사가 속죄를 이룰 수 없다고 성경은 선언하고 있다.

   "...피 흘림이 없이는 사함이 없느니라"(히브리서 9:22).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베드로전서 1:19).

   이로 보건대 양은 예수요 피는 예수님의 피임이 틀림없다.

   이제 결론을 내리려 한다. "구원 받았느냐" 하는 질문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서두에 기록하였거니와 이제 분명히 말하노니 그렇게 묻지 아니하는 것이 이상한 것이요 어쩌면 구원 없는 이단이기 쉬우리라. 그대는 십자가 위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모든 죄를 용서받고 이제는 죄인이 가야 하는 멸망의 지옥에 갈 걱정이 전혀 없어졌다는 확신 가운데 기뻐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구원받았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 즐거움이 있으리라. 그렇지 않다면 빌립보 간수처럼 정직하게 묻게 되기를 바란다.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사도행전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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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믿음에 있는가

                          시험하고 확증하라


                                       사람을 따르는 신자들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로마서 3:4)


   우리는 앞에서 주님을 위해 한평생을 바친 위대한 신앙인들이 지옥에 떨어질 수도 있다는 끔찍한 현실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여기서는 왜 이와 같은 비극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을까 하는 문제를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 보고자 한다.  우리가 이와  같은 문제를 본질적으로 알려면 신앙의 근본적인 문제들을 파고들어야 할 것이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이것은 사단의 끔찍한 전략에 의한 역사로 말미암았다는 것이다. 이 전략은 창세 이래로 한번도 변경되지 않고 진행되어오고 있으므로 성경을 조금만 세밀하게 연구하면 즉시 알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대대로 사단에게 속고 있다.

그렇다면 사단의 탁월한 전략은 무엇인가? 그것은 사람의 마음을 부추기어 사람을 하나님 앞에서 높이는 일이다. 간단한 이 전략이 놀랍게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영혼들을 지옥에 데려가는데 성공하였고 기독교를 3류 종교로 타락시켜 비참한 모습으로 만드는데 성공했다.

   세상의 모든 종교는 사람에 의해서 생겨났다. 그러나 기독교만은 유일하게 사람이 창시자가 아니다. 오직 창조주 하나님께서 기독교를 시작하셨고 그의 아들, 즉 사람이 아닌 신께서 만드신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세상 종교들은 사단이 인간 중에 명철한 사람을 택하여 자기 능력을 입혀주어 종교 창시자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종교의 위력으로 인하여 수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거짓 것을 믿게 하여 지옥으로 데려가는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영계(靈界)의 이와 같은 실상을 인간들이 한번만이라도 상상한다면 지옥에 가지 않게 될 가능성은 높아지는 것이다.

   실로 안타까운 일은 사단이 기독교에도 이와 같은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는 실상이다. 기독교인들 중에 다른 사람보다 신앙심이 좋고 실력이 있고 외모가 나아보이면 곧잘 사단의 목표가 된다. 일단 사단은 자기의 목표를 정하고 나면 작업에 들어간다. 먼저 그를 사람들의 시선을 끌 수 있는 능력자로 세운다. 성공하게 하고 남보다 다른 장점이 드러나게 하고 사람들의 존경과 신망을 받게 한다. 그는 명성을 얻으며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기에 이른다. 때가 되면 사람들은 그를 추앙하게 된다. 그리하여 특별한 사람으로, 특별한 지도자로 추대하기에 이른다. 이제 그는 점점 높아져서 사람들 위에 군림하고 사람들을 지배하는 지배자로 나타나도 사람들은 당연시 여기는 것이다. 이단은 이렇게 나타나며 이렇게 만들어진다. 그는 이제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나고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받은 종이라고 자기를 선전하기에 이른다. 주변에서 그렇게 만들어 가는 것이다. 여러분 주변을 살펴보라. 이와 같은 현상은 기독교에 만연하고 있는 모습이다.

   성경은 여기에 대해서 무어라고 말하고 있는가? 서두에 기록한 말씀처럼 "사람은 다 거짓되되 하나님은 참되시다." 사람은 다 거짓되다. 다른 사람보다 나아도 나은 것이 아니며 특별하여도 특별한 것이 아니다. 사단은 사람을 높여서 사람들의 시선이 하나님에게 있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주목하게 한다. 이렇게 하여 사람 우상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는 사람 우상으로 가득 차 있어서 선량한 양들이 하나님을 발견할 수 없도록 가로막고 있다. 예수님은 이것을 아시고 마태복음 23장에서 경고하셨다.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는 하나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자니라.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지도자는 하나이시니 곧 그리스도니라"(마태복음 23:8~10).

   이 말씀을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 교회에는 선생이 없는 것인가? 지도자도 없는 것인가? 아비도 필요 없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교회에는 성경을 가르치는 교사가 필요하며 교회를 인도하는 지도자가 반드시 필요하다. 아비의 마음으로 자녀를 돌아보는 바울과 같은 지도자가 교회 안에 많아야 교회가 부흥한다. 그러나 그들이 선생으로 호칭 받으며 군림하는 것을 경계한 것이다. 지도자라 칭함 받으며 양들을 늑탈할 것을 막고자 한 뜻이다. 아비라 하여 양들과 격차를 두고 교회 안에 계급을 만들어내는 것을 막고자 한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는 오직 예수뿐이라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디모데전서 2:5). 분명히 말하거니와 오늘날 기독교의 목사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일은 주님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한 인간이 만들어낸 제도다. 인간이 교회를 조직적이고 합리적으로 잘 운영한다는 미명아래 인간의 생각대로 만들어낸 제도일 뿐 우리의 왕 되시는 주님은 이 일을 인정한 적이 없다. 이것은 단정코 외칠 수 있는 불변의 진리이다. 교회는 유기체요 생명체이다. 교회는 가족이다.

   첫째로, 사람을 높이는 사단의 전략은 하나님을 슬프게 한다. 이 일에 사울왕은 합당한 본이다. 그는 전쟁에 승리한 후에 여호와 하나님께만 영광과 존귀를 돌려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만드는데 주저하지 않았다(사무엘상 15:12). 이 일로 말미암아 주님은 슬퍼하시고 사울의 왕조를 철회하실 수밖에 없었다. 그는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우고 자신의 명예와 기쁨을 위하여 당연히 죽이라고 하였던 적국의 왕 아각을 죽이지 않았다. 이것은 참으로 하나님을 슬프게 하는 일이었다. 하나님은 사울을 슬퍼하시고 사울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기독교 역사에서 기념비를 세울만한 인물들이 많았던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을 기억하여 그들 중심으로 교파를 만들어 오늘날 수많은 교단이 일어났는데 이것은 결단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아니다. 사단은 이일을 주도하여 성공했고 그러므로 사울을 떠난 하나님이 오늘의 기독교를 떠난 것이다. 슬픈 일이다. 생각하여 보자. 루터, 칼빈,웨슬러, 무디 등 얼마나 많은 존경받을 만한 인물들이었는가. 그러나 그들을 오늘날 교파의 우두머리로 추앙하는 일은 결단코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일이 아니다.

   둘째로, 사람을 높이는 사단의 전략으로 인하여 하나님이 떠나시니 복음의 역사가 사라지는 것이다. 구원받는 역사가 점점 사라지다가 결국 오늘날은 구원을 말하는 것조차 이단시하는 데까지 이르지 아니하였는가?

   어떤 교파에서 만든 이단 분별에 관한 책을 본적이 있는데 그 내용 중에 하나는 "당신은 구원받았는가?" 하는 질문을 하면 이단이라고 써놓은 것을 보았다. 사도들이 구원을 외쳤고 구원을 받으라 하였고 구원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지 아니한가? 그것이 성경말씀이 아닌가(사도행전 2:40, 4:12, 16:31, 에베소서 2:8, 유다서 3절 등). 그런데 오늘날 한국의 기독교는 구원을 강조하면 이단이라고 가르치고 있으니 얼마나 슬픈 일인가? 예수라는 이름의 뜻이 구원이라는 뜻인데 도대체 구원을 강조하지 말라는 오늘의 가르침이 사단의 가르침이 아닌가? 구원을 말하지 못하게 하면 예수 이름을 우리 언어에서 지우라는 뜻이 아닌가? 얼마나 슬픈 이야기인가?

   이 글을 읽는 독자여, 기독교인들이여, 정신을 차려야 한다. 그리고 성경을 읽어야 한다. 성경과 다른 기독교, 성경과 다른 당신의 교회는 잘못된 교회다. 주님을 위해서 목숨이라도 바치고자 하는 순전한 신자, 성자 같은 신자들을 지옥으로 내몰고 있는 잘못된 교회는 속히 떠나야 한다.

   셋째로, 하나님이 떠나고 성령의 역사가 떠난 교회는 사람이 만든 조직으로 운영되고 거듭난 적 없는 교인들로 채워져 있다. 그곳에는 더 이상 하나님도 말씀도 성령도 없다. 기독교는 진정한 의미에서 종교가 아니요 생명 그 자체인데 결국 사단의 전략에 의해서 종교화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라지고 사람의 말이 교회 안에서 힘을 얻으며 교회를 운영해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혹자는 "오늘의 교회 안에서 우리가 성경을 배우고 있지 않은가? 성경대로 살려고 노력하고 있지 아니한가?"라고 말할 것이다. 물론 필자도 이와 같은 사실을 안다. 그러나 분명히 알것은 성경을 공부하거나 연구하는 것이 중요하나 그 말씀을 순종치 아니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만약에 오늘의 기독교가 바른길로 가려한다면 먼저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 모든 제도를 성경 안에서 찾고, 헌법은 성경으로, 지도자는 예수님으로 대체되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의 얼굴이 교회를 향할 것이며 예수님의 이름이 교회의 주인이 될 것이며 성령님의 역사는 교회 안에 살아날 것이다. 또한 십자가의 복음은 죄인을 구원할 것이며 거듭난 성도들로 교회당이 채워져서 교회는 사도행전의 기쁨을 회복할 것이다.

   오늘날 한국의 기독교가 큰 예배당을 짓는데 교회의 모든 목적을 두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큰 건물보다 큰 구원의 역사를 사모해야 할 것이며 많은 숫자보다 성령 충만을 사모하여야 할 것이다.

   이제 끝으로 결론을 내리려 한다. 다시 말하지만 오늘의 모든 기독교인을 다 지옥 자식으로 정죄하려 함이 아니다. 다만 필자를 포함하여 우리 모두가 성경을 기준하여 자신을 돌아볼 필요가 있음을 말한 것이다. 사랑을 실천하는 성자들이 지옥에 갈 수 있다고 말했다 하여 섭섭해 할 것이 아니라 그것이 성경적인가 살피며 자신의 영혼의 문제도 겸손하게 점검해보아야 한다. 지옥에 가는 사람 모두 불쌍하지만 그 중에 더 불쌍한 사람이 있다면 평생 예수 믿는다고 종교생활하다 지옥에 가는 사람이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고린도후서 13:5)

Posted by 행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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