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믿음에 있는가

                                    시험하고 확증하라


                                천국에 갈 수 있느냐?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빌립보서 3:20).


   "천국에 갈 수 있습니까?" 이와 같은 질문은 필자가 수없이 해온 고전적인 질문이다. 필자뿐만 아니라 바른 전도자라면 당연히 했을 질문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전도함은 천국에 감을 목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땅위에 있는 기독교 신자에게 " 왜 하나님을 믿는가"라고 물으면 당연히 "천국에 가려고 믿는다"고 대답해야 할 것이다.

   성경 요한복음 3장 16절에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신" 이유는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시고 있다. 멸망의 지옥에 가지 않고 영생을 얻어 천국에 가게하기 위하여 예수께서 오신 것이 사실이라면 당연히 천국가기 위하여 예수 믿는다고 말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한국의 기독교 현실은 이와 같은 질문을 하면 일단은 이상한 사람 취급하는 것이 현실이다. 이것은 슬픈 일이요 비극적인 모습이다.


   여기서는 "천국에 갈 수 있느냐"는 질문을 중심으로 이어지는 여러 가지 상황들을 살펴보면서 구원의 진리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먼저 천국에 갈 수 있느냐는 질문은 지옥을 전제로 하는 것인데 상당한 기독교인들이 지옥을 믿지 않는다. 그들도 지옥을 믿는다고 대답은 한다. 그러나 실제로 그들은 입으로는 인정하나 행위로는 부인한다. 오늘날 기독교가 샤머니즘의 영향을 받아 내세보다는 현세의 복을 중심으로 발전한 결과 지옥에 대한 강조가 약해진 까닭이리라. 그러므로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현세의복에 관심을 두고 지옥에 대한 관심이 점점 없어진 것이다.

   성경말씀이나 찬송들은 하나같이 현실의 복보다는 내세의 복에 대한 소망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언제부턴가 천국에 대한 소망의 가르침이 약해지면서 현실의 축복에만 매달려 있다. 그리고 사람들의 뇌리에서 지옥에 대한 관심이 점점 사라져갔다. 결국 지옥을 믿지 않는 교인은 이렇게 만들어진다. 이것이 사단의 전략이다. 한국의 기독교는 이러한 절차를 거쳐 사단에게 먹힌 것이다. 지옥이 빠진 기독교는 더 이상 사단에게 두려움을 주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사단의 친구가 된 기독교, 사단의 도구나 노리개가 된 기독교가 되는 것이다.

   직선적으로 이야기한다면 예수님은 사람을 지옥에서 천국으로 데려가는 것이요, 사단은 지옥으로 데려가는 것이다. 지옥에 대하여 관심 없는 기독교는 사람을 지옥에 데려가기 위해 분주한 사단의 전략을 착실히 수행하는 종으로 전락한 모습이다.

   지옥을 믿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자주 만난다.  그러나 필자가 그들에게 지옥이 어떤 곳이냐고 물으면 자신 있게 대답하는 신자들을 거의 만나보지 못했다. 지옥이 얼마나 끔찍한 곳인데 믿는다고 하면서 구체적으로 설명도 못할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은 지옥을 믿지 않는 것이다. 필자는 감히 말하고자 한다. 우리나라 기독교인들의 상당수가 지옥을 안 믿는다. 참으로 슬프고 비통한 현실이다.

   천국에 갈 수 있느냐는 질문은 이와 같은 관점에서 대단히 중요한 질문이요 기독교인들을 향한 중요한 도전이 되고 있다. 이 질문은 수많은 기독교인들을 살릴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필자가 "천국에 갈 수 있느냐"는 질문을 하였을 때 나온 반응들을 함께 생각해보며 구원의 진리를 생각해보고자 한다.

   첫 번째 반응은 "그것을 어떻게 미리 알 수 있느냐"는 것이다. 우리가 열심히 주님을 섬기며 살다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가면 그때에 가부간 결정되는 것 아니겠느냐는 것이다. 어떤 이는 지금 천국에 간다고 확신하고는 있지만 앞으로 신앙생활을 잘 하지 못하면 탈락하고 말 터인데 어떻게 천국 간다고 함부로 확신 있게 대답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성경은 "믿는자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요한 복음 6:47)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러한 말씀에 관심이 없거나 무지한 신자들이 의외로 많아 천국의 소망을 불확실하게 생각하고 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자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한복음 5:24).

   얼마나 명확한 하나님의 약속인가! 천국에 가는 것을 확실하게 알고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천국의 소망에 잡혀 날마다 당하는 어려움을 극복하며 한 걸음 한걸음 믿음으로 나아가는 것이 성도의 삶이다. 천국에 갈 수 있는 확신도 없이 교회에 다닌다는 것은 학교에 입학한 적도 없이 학교에 날마다 나가는 학생처럼 불행한 것이다. 그는 졸업식날 울어도 졸업장을 받지 못할 것이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열심히 다닌 학교생활이 졸업장을 받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은 기가 막힐 일이다.

   그대는 입학식과 같은 구원을 받은 적이 있는가? 냉정히 그대의 신앙을 점검해 보라. 진정 양심적으로 생각해보라! 천국에 대한 소망에 부풀어 있는가? 그리고 그 소망은 말씀에 확실한 근거를 가지고 있는가? 성경에 근거도 없는 자기 확신은 스스로 속는 것임을 명심하라! 스스로를 냉정하게 점검해 봄이 그대의 생명을 진정 사랑하는 것임을 명심하라. 한 번 더 강조하거와 자신에 대해서 관대하지 말라. 대충 넘어가지 말라.

   이 질문에 대한 두 번째 반응을 들어보자. "나는 천국에 가려고 예수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교회에 다니지만 자신은 사람답게 사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는다는 것이다. 기독교가 사회를 위해 소금의 역할을 하며 불쌍하고 소외당하는 사람들을 돌아보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가. 소위 말하는 해방신학이라고 하는 이 사상은 억압당하고 소외당하는 사람을 위해서 투쟁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와 같은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폭력 투쟁도 사용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세상을 밝게 아름답게 하는 사회 사업에 힘써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세상을 낙원으로 만들어야지 어디 새로운 낙원이나 천국이 있겠느냐는 것이다.

   그들의 말은 상당히 매력이 있어 보인다. 그러나 거기에는 허점이 있으니 그들의 이상은 좋으나 이루어질 수없는 이상, 즉 허상에 불과한 것이다. 성경은 모든 인생이 다 죄인이라고 증거하고 있다. 죄인들이 모여서 어떻게 낙원을 만들 수 있는가? 수많은 사상가들이 만든 이론으로 세상을 고쳐보려 하였으나 모두 실패로 끝나지 아니하였던가.

   기독교 사상으로 세상을 낙원으로 만들 수 없다. 예수님은 천년왕국을 약속하셨지만 하나님의 특별한 역사로 천년낙원을 만드시는 것이지 인간을 서서히 개조하여 만드는 것이 아니다.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빌립보서 3:20).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마태복음 5:3).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은 필자가 사회사업이나 복지사업을 필요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것들은 필요하나 천국복음을 위해서 해야만 함을 말하는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한 세 번째 반응을 보면 "당연히 갈 수 있지요" 하는 것이다.  물론 합당한 말씀이다. 그러나 필자의 두 번째 질문에 그는 막히고 만다. "무슨 근거로 천국에 간다고 말합니까?" 하고 질문하면 "그냥 믿으니까 가는 것 아닙니까?" 하는 대답이 대부분이다. 물론 원칙적으로 믿음으로 간다고 하는 말에 모순이 없다.

   어떤 이는 그냥 예수를 믿으면 되는 것이지 왜 그렇게 복잡하게 말하는가 하고 물을 것이다. 그러나 믿음을 논할 때 그렇게 막연한 것이 아니다. 무엇을 어떻게 믿느냐 하는 문제가 있는 것이다. 마태복음 7장21절 이하의 말씀에는 믿음이 막연한 것이 아님을 명백히 말해주고 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이 얼마나 두렵고 무서운 주님의 경고요 엄숙한 선언인가! 그들은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평생을 살았던 헌신적인 신자였다. 분명하게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그들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천국에서 볼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하나님의 공의는 두려운 것이다. 성경은 진실하고 완전한 책이다. 분명하게 성경에 있는 구속의 진리를 따라서 거듭난 성도가 아니면 평생을 주님을 위하여 산 순교자라 할지라도 멸망의 지옥에 갈 수밖에 없다.

   오늘날 주여 주여 하면서 막연하게 천국에 갈 거라는 생각만 가지고 교회에 출입하는 수많은 허수아비교도들은 자신의 영혼을 생각하여 정신을 차리고 구원을 받아야 할 것이다.

   오늘의 많은 신자들은 믿음을 단순히 "신앙의 행위"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래서 교회의 모든 모이는 시간에 열심히 참여하고 신자로서 모범된 행실로 살기 위하여 노력하고 교회에서 맡긴 직분에 충실하고 헌금을 성심을 다하여 내고 목사님의 말씀에 순종 잘하는 그런 모습이 믿음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믿음이며 좋은 믿음을 가졌다고 말하는 것 아닌가. 그리고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하였으니 결국 천국에 가지 않겠느냐고 그들은 곧잘 말한다. 이들은 "나는 이미 믿고 있으니 나에게 전도하지 말고 다른 사람에게 전도하시오 왜 잘 믿고 있는 사람에게 전도하시오?" 하면서 불쾌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알 것은, 이런 반응을 나타내는 사람은 자신이 구원 받지 못했음을 실토하고 있는 것이다. 죄송하지만 정상적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의 눈에는 한국의 대부분의 기독인들이 구원받지 못한 자들로 보인다는 현실이다.

   한국의 영적 현실은 이교도들에게 전도하는 것보다 기독교인들에게 먼저 전도하여서 기독종교인에서 거듭난 그리스도인으로 만들어야 한다. 바울도 지적했듯이 자기의 말하는 내용이 무엇인지조차 깨닫지 못하는 종교인들, 그들은 종교 속에 갇혀 자기가 무엇을 믿는지조차도 알지 못하며 지옥에 가고 있다.

   "사람들이 이에서 벗어나 헛된 말에 빠져 율법의 선생이 되려 하나 자기의 말하는 것이나 자기의 확증하는 것도 깨닫지 못하는도다"(디모데전서 1:6).

   이러한 사람들은 사도신경을 잘 외우며 주기도문을 잘 말하지만 그 뜻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방황하는 자들이다. 아무 뜻도 모르고 종교적으로 경을 외우는 사람들은 사도시대에도 있었으며 그들은 소경이 되어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 "예루살렘에 사는 자들과 저희 관원들이 예수와 및 안식일마다 외우는바 선지자들의 말을 알지 못하므로 예수를 정죄하여 선지자들의 말을 응하게 하였도다"(사도행전 13:27).

   아무 의미도 모르고 종교적으로 외우는 경전, 앵무새의 말과 무엇이 다를까? 그들은 종교적으로 그 알지 못하는 것을 믿을 뿐 아니라 그 알지 못하는 것들을 훼방하기도 한다.

   앞에 인용한 사도행전의 말씀을 보아도 그들은 성경 속에서 태어나서 성경을 늘 외우면서 자라고, 또한 성경을 가르치는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은 성경대로 오신 예수님을 대적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 얼마나 이상하고 우스운 이야기인가. 참으로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어처구니없는 이와 같은 일이 초림 예수 때에 일어났고 재림 예수 때에 또 일어나는 것이다.

   예수님이 성경을 사랑하고 믿는다는 종교인들에 의해서 죽임당함 같이 오늘날도 거듭난 사람들이 기독교 정통이라는 사람들에 의해서 핍박을 받고 있다. 이 시대에 참으로 거듭난 아름다운 무리들이 성경의 진리를 따라 모이는 순수한 교회를 주님이 감추어두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소수이지마는 행복한 사람들이다.

   이외에도 이 질문에 대한 기이한 대답들이 많다. 그러나 지면 관계로 그칠 수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천국에 가는 진리를 소개하며 마치고 싶다.

   천국은 거룩한 곳이요 하나님이 계시는 곳이다. 그러므로 죄인은 천국에 데려갈 수 없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이다. 털끝만한 죄만 있어도 지옥에 떨어질 수밖에 없는 무서운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누가 당당히 설 수 있겠는가? 아무도 없다. 그러므로 교회에 다니면서 자신이 아직도 죄인이라고 하거나, 의인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죄 문제를 하나님 앞에서 명쾌하게 해결 받지 못했다면 지옥에 갈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은 무서운 심판 아래 있는 인생들을 누가 살릴 수 있겠는가?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로마서 3:19).

   주님께서는 이와 같은 죄인의 현실을 보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셔서 죽으시므로 우리의 모든 죄를 온전히 해결하셨다. 죄인들의 모든 죄, 곧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를 대신 담당하심으로 죄인을 죄에서 해방시키셨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로마서 3:23,24).

   모든 죄를 해결하신 주님을 믿는 자는 죄에서 해방되었다. 그는 천국에 들어갈 시민권을 얻은 것이다. 그에게는 정죄가 없되 영원히 없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로마서 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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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희믿음에 있는가

                                        시험하고 확증하라


                            주일은 천국, 평일은 지옥 가는 신자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라디아서 3:10).


   금일의 기독교 범주 아래 있는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율법 아래서 고통당하고 있는 현실을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면 쉽게 분별할 수 있다. 물론 그들은 예수를 믿고 있으며, 죄 용서함 받았으며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말하는 자들아 상당수임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가 그들을 율법 아래 있다고 말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 글을 읽는 분들 중에 기독교인이 있다면 스스로를 분석해 보고 구원의 문제를 분명히 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사단은 수많은 사람들을 속이되 감쪽같이 속인다. 성경에 "율법 아래 있는 자는 저주 아래 있으며" 지옥 자식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 누가 자기를 율법 아래 있다고 말할 사람이 있겠는가? 그러나 자신이 율법 아래 있는 것을 안다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몸부림치지 않겠는가? 필자가 볼 때에 율법 아래 있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신을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사단에게 철저히 속은 결과이다.

   여기서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의 증상을 철저히 분석해 봄으로 아직 구원받지 못한 독자들에게 자신의 믿음을 점검하는 계기를 만들어주고자 한다.

   제목에서 보는 바와 같이 "주일은 천국, 평일은 지옥"이라는 말은 오늘날 기독교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클 것이다. 어떤 분이 나에게 고백하였다.

   "예배당에서 목사님의 말씀을 듣고 성도들과 함께 찬송을 부르며 통성기도 시간에 힘을 다하여 기도하면 마음이 기쁘고 하나님의 사랑을 혼자만 받은 것처럼 즐겁고 당장 죽어도 천국에 갈 것 같은 자신감이 솟습니다. 그런데 그와 같은 시간이 지나고 직장에서나 사회에서 세파에 시달리고, 또 형편에 따라서 실수가 나타나고, 죄를 짓게 되면 신앙에도 자신감이 없어질 뿐만 아니라 죽으면 지옥에 갈 것 같은 불안이 엄습해 옵니다. 나는 왜 이럴까요?"

   그는 왜 예배당에서는 천국이요, 집에서는 지옥인가? 무엇이 문제인가? 그들의 양심의 문제인가, 아니면 인격의 문제인가? 아니다. 결단코 아니다. 양심도 인격도 아니고 그들의 근본적인 신앙의 문제이다. 그리고 잘못된 신앙은 잘못된 가르침에서 온다. 그 가르침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첫째는 진지하게 구원의 문제로 갈등해 본 일이 없다. 오늘날 거리에서 만나는 수많은 기독교인들을 개인적으로 상담해 보라. 그들의 대부분은 지옥에서 구원받는 문제를 진지하게 갈등해 본적이 없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나의 영혼이 어느 날 죽음을 맞이하게 될 때에 지옥에 떨어지면 어떻게 할까? 정말 지옥이 있는 것인가? 은혜 아래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지옥에 가지 아니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거듭남이라는 것은 무엇이며 영생을 얻었다는 확신은 어떻게 가질 수 있는가? 나의 죄가 얼마큼 용서 되었으며, 속죄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갈등의 제목은 얼마든지 있다. 참된 신앙은 진지한 갈등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자신의 영혼의 문제를 위하여 이 정도의 갈등도 하지 아니하면서 참된 신앙의 소유자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은  어떠한가? 진지한 갈등의 시간들이 있었는가?

   예전에 필자는 어떤 성도를 만났다. 그는 현재 캐나다 교포로서 한인교회에 나가는 성도이다. 그가 이민 가기 전에 친구의 권유에 따라서 필자가 복음을 증거하는 전도집회에 딱 한번 참석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후에 보니 그 때에 구원받았다고 간증하였다. 당시에 교회에 다니지 아니하던 그가 어떻게 딱 한 번 전도집회에 출석하고 구원받을 수 있었겠는가?

   그의 고백은 이러하였다. 그가 어려서 주일학교에 얼마 동안 나간 적이 있었다. 그 때 어떤 주일학교 교사가 지옥에 대해서 실감나게 설명해 준 적이 있었다. 그 설교를 들은 뒤 그는 교회에 다니지 않았지만 자기는 죄인이기 때문에 언젠가는 죽으면 지옥에 간다는 생각이 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다. 아니 사실상 마음의 고통과 지옥에 대한 두려움이 그 마음에 있었으며 그로 인하여 하나님 아버지 앞에 언젠가는 돌아가야 된다는 생각이 그의 마음에 있었던 것이다. 그가 참석했던 그 날은 필자가 지옥 갈 죄인이 어떻게 천국에 갈 수 있는가에 대하여 전하고 있었다. 그는 그 날 나도 지옥가지 않고 천국에 갈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으로 집에 돌아갔다고 한다. 훗날 깨달아 보니 그 날 구원받은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비록 교회에 출석하지 않았지만 지옥에 대한 갈등이 그를 구원받게 하였다. 다시 말하거니와 구원은 갈등으로부터 시작된다.


   둘째로 진지한 상담의 기회가 없었다. 대부분의 구원은 구원 문제를 진지하게 상담하는 가운데서 이루어진다. 물론 상담은 구원받은 자에 의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생명이 생명을 낳을 수 있다는 원칙에서 말하는 바이다. 여러분 주변에 기독교인들을 상담해 보라. 그들 중에 상당수는 그래도 앞에 말한 갈등을 겪은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갈등이 있든 없든 그 모든자의 문제점은 누구도 그들에게 구원에 대한 진지한 상담을 해주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필자도 같은 경험을 겪었거니와 필자가 만나는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은 이렇게 목사님과 같이 앉아서 진지하게 구원의 문제를 놓고 상담하는 것이 처음있는 일이라고 고백한다. 기독교인들을 만나보라. 그들은 상담은커녕 이와 같은 상담이 있는지 조차도 모르고 있다.

   얼마 전에도 한 교인이 구원받았는데 그는 수 십 년 교회를 다니는 중 이와 같은 상담을 처음 했으며 지옥에 대한 갈등에 대해서 감히 누구에게 물어볼 수도 없었다고 한다. 상담의 기회가 없으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냥 교회에 출석해서 목사님의 설교를 잘 듣고 교회생활 충실히 하면, 그리고 성경 공부반에서 배워 나가다보면 신앙이 성장하고 점점 믿음이 자라서 천국에 가게 되지 않겠는가 생각하는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다니다보면 다 잘되지 않겠는가 하고 막연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신앙은 막연한 것이 아니다. 작은 구멍가게를 열어도 잘 되겠지 하는 막연한 생각으로 하면 안 되는데 그대의 영혼이 영원한 지옥에 빠질 수 있는 문제를 막연하게 처리하지 말라.


   셋째로 상담을 하되 잘못된 상담도 문제이다. 어떤 구도자는 기가 막힌 사연을 필자에게 고백하였다. 성경을 읽다가 지옥을 발견하고 어떻게 하면 지옥에 가지 아니하는지를 목사님에게 상담을 요청하였다. 목사님은 상기된 목소리로 다니다보면 다 잘 될 것인데 왜 급하게 생각하며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가 하고 퉁명스럽게 말하므로 민망한 생각을 하며 쫓기다시피 나왔다고 한다. 또 어떤 사람은 말하였다. 구원의 문제를 물어보니 목사님이 대답하시기를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냐? 그러니 예배당에 나오는 날 믿음으로 나왔으니 그 날을 구원받은 날로 알고 있어라." 그래서 그는 그냥 그렇게 알고 있었는데 말은 맞지만 어딘가 모르게 석연치 않고 자꾸 의문이 생겨서 고민하였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내가 어떻게 하여야 죄를 용서받는가를 상담하였는데 예수님이 내 죄를 십자가에서 다 담당해 주셨다는 대답을 들었다. 마음이 시원하고 그 목사님의 설교도 은혜롭고 한동안 좋았다고 한다. 죄를 용서받은 기쁨도 있었고 주님이 나를 사랑하신다고 하는 확신도 있으므로 마음이 편하고 좋았다.  그런데 어느 날 목사님 설교에 우리는 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우리의 죄를 숨기지 말고 통회하여야 한다는 설교를 듣고 난 다음, 집에 와서 생각해보니 사라진 줄 알았던 죄가 자기 가슴에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죄는 자기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의 심령은 나날이 죄에 대한 갈등으로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예수님이 내 죄를 용서하시지 않았는가 하고 반문하면서 죄의 고통을 이겨보려 하였지만 고통은 사라지지 아니하였다. 십자가의 속죄는 성경에 있고 2000년 전에 있었고 멀리 있는데 내 마음속의 죄는 현실이 아닌가! 이 밤을 새고 나면 내일 직장에 나가서 나는 또 죄를 지어야 하는데 나는 언제까지 자신을 속이면서 살아야 하는가?

      주일날 말씀에 죄를 통회하라고 하여서 통곡을 하고 죄를 고백했다. 또 말씀하시기를 예수님은 여러분의 죄 때문에 죽으셨다. 기뻐하고 감사하라. 찬양하고 경배하라. 하염없는 눈물과 함께 찬양하고 또 찬양하였다. 주변의 수많은 사람들이 같이 울고 같이 찬양하고 같이 기뻐하였다. 당장에 죽어도 천국에 갈 것 같았다. 진실로 기쁨으로 충만하였다. 그런데 오늘이 겨우 화요일이 아닌가. 나는 벌써 죄의 올무에 걸려서 괴로워하고 있지 아니한가. 기쁨은 한 때의 감정으로 끝나고 이틀도 다 지나지 않은 화요일 밤에 나는 죄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는 것이다. 주일날의 그 신령한 말씀과 성령 충만한 분위기는 왜 나의 신앙을 이틀도 지탱시켜주지 못하는가. 어찌하여 나는 주일날은 천국이요 평일에는 지옥인가? 이 신앙의 틀은 언제까지 지속될 것인가?

   금일의 상당히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와 같은 갈등에 잡혀있다. 그 중에는 그냥 그러려니 하고 포기한 사람도 많다. 한 주간 지은 죄를 주일날에 가서 회개하고 용서받으면 되지 아니한가. 그 다음에는 또 주일이 있으니 그냥 족하지 아니한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람들은 서두에 말한 것처럼 율법 아래 있는 것이 문제이다. 율법 아래 있는 것은 율법의 통제를 받고 있다는 뜻이다. 그것은 저주 아래 있는 것이며 지옥을 향하여 가고 있는 것이다. 이 사람이 주일날 말씀을 듣고 찬송 부르고 기도하며 예배당에 있을 동안에는 죄를 멀리 하고 있다. 그러나 월요일부터는 죄와 가까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죄를 멀리하고 있는 동안에는 기쁘고 죄와 가까이 있을 때는 기쁨이 없고 답답한 것이다. 이것이 율법 아래 있는 모습이다. 생각하여 보라. 세상법도 내가 법을 지켰을 때는 담대하고 당당하고 기쁨이 있다 그러나 법을 어기고 죄를 짓는 순간 기쁨과 담대함은 사라지고 불안이 찾아온다. 그런데 일이 잘 되어서 구속되었다가 석방되면 다시 편안해진다. 다시 말해서 죄와 나와의 관계 속에서 기쁨과 불안이 수시로 교차하는 것이다. 이것은 세상의 법에 의해서 죄인이 되었다가 풀려났다가 하는 과정에 의해서 나의 마음상태가 수시로 변하는 것이다.

   이처럼 율법 아래 있는 사람도 하나님의 율법에 의해서 정죄 될만한 죄 가운데에 있을 때에는 낙심되고 죄를 회개했거나 신앙의 상태가 좋을 때에는 기쁨이 찾아오는 것이다. 율법 아래서는 대단한 열심을 내고 있는 사람은 천국 갈 수 있는 확신에 차있다. 그는 큰소리로 구원받았다고 우기고 심지어 구원받은 날까지도  주장하지만 그의 실상은 자기 열심에 의한 자기의 의에 잡혀서 교만한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열심과 그의 정직과 그의 충성과 그의 성실함이 그가 천국 가는데 오히려 장애물이 되고 있는 것이다. 아! 얼마나 불쌍한 모습인가. 구원의 문제를 본질적으로 해결하고 그 후에 열심을 내야 할 것인데 본질적인 구원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열심만 내고 있으니 율법 아래서 교만한 모습이다. 그는 교만하여 지옥에 가는 것이다.

   율법 아래 있는 또 다른 모습은 앞에서도 언급한대로 열심을 내지 못하고 자주 죄와 타협하고 말씀을 순종하지 못함으로 괴로워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나 같은 죄인이 무슨 천국인가' 하는 낙심 속에 겸손(?)하다. 그는 그 겸손으로 인하여 지옥에 간다.

   그렇다면 은혜 아래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다음 말씀에 답이 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 하셨으니..."(갈라디아서 3;13).

   예수께서 저주받을 죄인을 위하여 저주의 십자가를 지심으로 죄인을 죄와 저주의 지옥에서 해방시키셨다. 죄가 죄인을 주장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이 후로는 그를 죄인이라 부르는 것이 아니라 의인이라 부른다. 십자가에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죄까지 다 해결하셨으므로 이 후로는 죄로 말미암아 지옥 갈 번민에서 해방받았다. 그러므로 나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하신 그 은혜 아래서 살아가는 것이다. 죄를 절제하는 것도 지옥이 겁나서가 아니라 은혜를 갚기 위함이요 헌금을 내는 것도 벌을 겁냄이 아니요 체면문제가 아니라 은혜를 보답하기 위하여 자원함으로 하는 것이다. 삶의 모든 행동이 십자가의 은혜와 관계가 있는 것이니 이것을 은혜 아래 있다고 말한다.구원의 문제,

   오! 그대여 그대는 율법 아래 있는가, 은혜 아래 있는가?

   신앙의 상태와 관계없이 천국에 갈 수 있는 자격을 취득하였는가? 그대의 모든 죄가 십자가상에서 온전히 해결된 사실을 그대의 양심이 믿고 있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천국에서 같이 살게 될 것이다. 종파와 인종과 빈부귀천에 관계없이... .

Posted by 행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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