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편지]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 구원, 거듭남
- 차 광선
그 파란 하늘 아래 노랗게 익은 벼가 추수됩니다. 겨울이 오기 전 모든 알곡들은 거두어질 것이며, 추수가 끝난 후 들판에 남겨지고 버려지는 것들은 끝끝내 열매 맺지 못한 쭉정이 뿐일 것입니다. 거두어지는 것이 있고 버려지는 것이 있게 되는 것이지요.
오 선생님, 늦은 가을의 냉기가 옷깃을 여미게 만드는 때입니다. 그간 평안하셨는지요.
복음의 축복을 나누고 싶어 시작한 편지쓰기가 벌써 열 번째입니다. 해가 저물어가는 마당에 이제 마지막 서신을 준비할 때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이 새삼스럽습니다. 이후 한 번의 서신을 더 쓸 기회가 남겨져 있다는 사실이 제게 안도감을 가져다줍니다. 한 번 더 말씀드릴 수 있다는 것! 바로 그 기회 때문입니다.
홍수가 난 때에 오히려 마실 물이 많지 않듯이, 정보가 넘치는 시대에 쓸만한 정보는 그리 많지 않다고 누군가 말했던 것이 기억납니다. 공감이 되는 말입니다. 모든 정보는 저마다의 가치를 품고 인터넷 시장에서 유통되지만, 정보 중의 정보, 진리 중의 진리, 소식 중의 참으로 귀하고 기쁘고 복된 소식은 바로 복음입니다. 그것은 한 사람으로 하여금 인생의 존재 이유와 삶의 실상과 죄와 심판의 엄중함과 구원의 길과 참된 자유와 환희를 가져다주는 유일한 진리이고 정보이며 소식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자신을 일컬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마태복음 9:13).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죄인)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누가복음 19:10).
예수님은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오신 분입니다. 교회 예배당에 달려 있는 십자가는 단순히 교회를 표시하는 구조물이 아니라 '죄인들'을 위하여 예수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속죄의 현장이고 분명한 증거임을 말해 주는 메시지입니다
바다에 조난당하여 침몰한 배에는 희망이 없습니다. 구조선이나 구조 헬기가 와서 생명줄을 던져 주지 않는 한 바다 위에 생존의 가망성은 없습니다. 모든 인생은 바다 한가운데서 표류하는 존재와 같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모든 사람들의 실상입니다. 이 사실을 깨달을 때 복음은 그 구조선과 생명줄 역할을 해줄 것입니다.
오 선생님도 세상이라는 절망의 바다에서 구조되어야 할 표류자 중 하나입니다. 세상이라는 바다는 마치 사람이 원하는 모든 즐거움과 기쁨과 행복을 가져다 줄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허무의 바다이며 사망의 바다입니다. 어둠의 바다이며 사망의 바다입니다. 어둠의 바다를 비치는 등대 같이 복음과 생명의 빛을 비추는 성경 말씀에 구원의 길이 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각 제길로 갔거늘 하나님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이사야 53:5-6).
우리의 죄를, 오 선생님의 죄를 하나님께서 그 아들(예수)에게 담당시키셨다는 말씀입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 죽으심이 믿는 자에게 영생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 3:16).
성경에 문자로 기록된 이 내용을 읽었을 때 이것을 기록하신 하나님의 성령으로 인해 오 선생님의 심령에 하나님의 음성이 메아리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또한 이렇게 하나님의 마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우리가 아직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로마서 5:6-8).
오 선생님께서 죄인으로 출생하여, 보이지 않으나 그리고 느끼지 못하나, 죄의 세력 아래서 죄악 된 삶을 자연스럽게 살아오셨습니다. 아무 거리낌 없이 여전히 죄악 된 삶을 살고 있을 때, 성경에 예언한 대로 오 선생님을 위하여 예수께서 대신 죽으셨는데, 그것은 창조자 하나님께서 오 선생님을 사랑하신다는 확실한 증거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밤에 찾아 온 니고데모라 하는 한 지도자와 대화를 하셨습니다.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줄 아나이다. 하나님과 함께하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니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니까?"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으로 불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이 대화의 내용은 요한복음 3장(2-8절)에 기록된 말씀입니다. 니고데모는 옛 예언자들의 기록과 모세의 기록을 통해 메시야가 오시리라는 예언에 대해 어느 정도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느 때부턴가 예수라는 인물에 대한 보고가 들려오고, 더구나 그에 의해서 나타난다는 일련의 이적 혹은 기적에 대한 소문이 들려올 때마다 그는 선지자 이사야가 기록했던 장차 오실 메시야에 대한 예언과 징조를 기억헤냈을 것입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 즉 우리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그 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사야 53:2-3, 35:5-6).
소경의 눈을 뜨게 하셨다는 소문, 말못하던 사람과 듣지 못하던 사람이 말을 하고 들을 수 있도록 고치셨다는 소문, 귀신들렸던 자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어 온전케 하셨다는 소문... 그 소문들을 확인하고자, 니고데모라는 사람은 저 예수님이 바로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하여 기록한 그 분이 아닌가 하여 찾아 온 것입니다. 예수께서 기록된 대로 당시 로마의 사형 틀인 십자가에 온 인류의 죄를 담당한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피 흘려 죽음을 당했을 때, 이사람 니고데모는 몇몇 여인들과 함께 그의 장례를 치루는 것으로 보아(요한복음 19:39), 후에 예수님의 말씀대로 성령으로 거듭나는 경험을 하였을 것이 분명합니다.
예수님은 성경에 예언대로 오셨고 대속의 죽음을 십자가에서 죽으셨으며, 예언대로 부자의 묘실에 묻히셨고 기록된 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이제까지 말씀드려온 대로 이 모든 것이 바로 오 선생님을 위한 하나님의 섭리라는 사실입니다.
오 선생님도, 니고데모가 그랬던 것처럼, 그 말씀 앞에 있습니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그러므로 오 선생님도 거듭나야 합니다. 거듭남이란 위로부터, 하늘로부터, 하나님의 자녀로 출생하는 것을 말합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입니다. 우리가 출생일을 기억하고 있는 그 몸의 출생 외에, 우리의 영혼이 말씀과 성령으로 출생하게 되는 영적 경험입니다. 그 신비한 역사를 주도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십니다.
그러면 누가 어떻게 거듭나게 되는 것인가요? 온 우주 만물과 모든 생명과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 앞에 그 복음이 보여주신 대로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하나님과 관계없이 각기 제 마음대로 살아온 삶이 불순종의 죄로 살아온 삶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 자신에게 있는 죄의 실상을 깨닫고 그 죄와 그 죄로 인한 열매로 인해 슬퍼하고 괴로워할때, 그리고 사람에게는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길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께 긍휼과 자비를 구할 때, 하나님은 그렇게 상한 영혼을 십자가 앞으로 인도해가십니다. 참혹한 죽음의 십자가 위에 달린 당신의 아들을 보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고난의 죽음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의 죽음이 죄인을 위한 죽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리하여 그의 죽음이 '나의 죽음'인 것을 깨닫게 될 때 은하수 같이 넘쳐오는 하나님의 사랑을 또한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다 이루었다!" 외치신 그 의미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 사실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비로소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강도처럼, 절도처럼 허락 없이 먼저 들어와서 농락해버린 영혼 앞에 예수님은 진실하신 구주요 주님이시요 왕이시며 친구입니다. '내 마음의 보좌'에 앉으셔서 '나'를 다스리시기에 유일하고 지극히 합당한 분입니다. 그 분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한다고 말씀드리는 것, 그것이 예수를 주로 시인하는 것입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로마서 10:9-10).
이렇게 하면 하나님의 성령께서 그런 자를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게 하십니다. 영적인 세계에서 하나님께서 신비스럽게 이루시는 용서와 구원과 거듭남의 역사입니다. 이것이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길입니다. 이렇게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이지요. 이것은 사람에게서 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의 선물입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나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에베소서 2:8-9).
지금까지 증거된 성경의 말씀을 보고 들으시면서 오 선생님은 지정의를 통하여 인격적인 반응을 보일 수 있습니다. 저 십자가에 대한 성경의 진술이 오 선생님을 위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라고 인정하시든지, 아니면 여전히 오 선생님과는 전혀 무관한 이야기로, 무시해도 좋을 그저 그렇고 그런 잡다한 정보 중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여기시든지.
입학과 졸업, 취업문제, 결혼과 출산 문제, 모든 인간관계 문제, 노후 대책 등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것들 중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영원한 삶이 달려 있는 죄와 구원의 문제는 영원한 천국과 지옥의 갈림길 위에 서게 한다는 점에서 그 어떤 문제보다 중요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시선을 다른 곳으로 옮겨서 결국 이 문제에서 비껴가게 만드는 영적으로 속이는 자가 여전히 무수한 인생들을 속이고 있다는 사실 또한 성경의 경고입니다.
"또 그들을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지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요한계시록 20:10).
성경은 이 영적 기만자에 대하여 '큰 용,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꾀는 자'(요한 계시록 12:9) 라고 폭로하고 있는데, 그에 의해 속은 사람들이 결국 복음을 거절하게 되고 영원히 구원 얻을 기회를 잃어버리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심오한 철학이나 유사 종교를 통하여 그것에도 구원에 이르는 길이 있다고 속입니다. 혹은 하나님도 영원한 나라도 지옥도 없다는 사상으로 속이기도 합니다. 또는 이렇듯 저렇듯 결국 모두 구원을 받아 좋은 곳에 가게 될 것이라고 속일 수도 있습니다.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고린도후서 4:4).
복음을 깨닫지 못하도록 어둠의 신, 마귀가 속이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일상에 넘쳐나는 속임수와 기만에 빠지지 않기 위해 얼마나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지 모릅니다. 요즘은 보이스 피싱으로 금전적 피해를 입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 외에도 정말 그럴듯하게 사람들을 속이는 기발한 아이디어들이 얼마나 속출하는지 자고나면 새로운 유형들이 우리 앞에 덫처럼 펼쳐지고 있습니다. 그것들에 의한 피해가 작은 일이 아니지만, 영혼의 문제는 말할 수 없이 더 큽니다.
만일 오 선생님이 성경이 말하는 십자가의 진리를 자신의 것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면 창세전부터 계획하여 오신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죄인으로 죽는 것을 결코 기뻐하지 않으시며 모든 사람이 다 회개하여 구원에 이르기를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오 선생님의 죄 때문이라는 것을 사실로 인정하신다면, 예수께서 무덤에서 부활하신 것이 또한 오 선생님을 위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이제 그 부활하신 예수님을 오 선생님의 주님으로 마음에 모셔 들여야 합니다. 모든 인생은 그 마음에 영원하신 하나님을 모실만한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사실, 그 곳에 예수 그리스도만이 죄인의 구주와 주님으로 오셔야 합니다. 그렇게 되기 전에 모든 죄인의 마음에 그 누군가가 주인이 되어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 마음대로 생각하고 결정하고 살아감으로 마치 자신이 자신의 주인인 것처럼 살지만 사실은 사탄의 기만으로 속아살고 있는 것입니다.
"나 보다 먼저 온 자는 절도요 강도니..." (요한복음 10:8).
오 선생님도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기 전까지 그와 같은 삶을 살아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주인으로 왕으로 계셔야할 자리에 어떤 상식이, 철학이, 명예가, 부귀가, 혹은 어떤 우상이나 욕망이 주인노릇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실상은 그 배후에 미혹하는 자 마귀가 있었다는 것이 성경의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그 사실을 밝혀줄 수 있습니다. 복음만이 그 모든 것을 청산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게 합니다. 혹시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시는 중에 오 선생님의 심령에 울려오는 그분의 음성을 인식한 적이 있습니까?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 들을 때, 겸손한 마음으로 그 말씀 앞에 자신을 낮춰 조아릴 때 일어날 수 있습니다.
여기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거듭난 한 청년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해 추운 겨울 저녁. 섬의 무선국에서 한 청년이 근무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어젯밤처럼 복음전도집회에 참석하고 싶어서 직장 상사에게 일찍 퇴근하게 해 달라고 요청을 하였습니다. 집회가 열리는 마을로 돌아가려면 몇 구비의 산기슭을 돌아가야 하는데 가는 도중에는 공동묘지를 지나야 하는길도 있었습니다. 밤이 찾아온 산길에 청년은 더 늦지 않게 복음집회에 참석하고 싶어서 발걸음을 재촉하였습니다. 어제 집회를 통해서 그는 하나님의 존재를 믿게 되었고 천국과 지옥의 실재도 믿었습니다. 자신이 죄인인 것과 이 죄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지옥에 갈 수 밖에 없는 자라는 사실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청년은 구원을 받고 싶었고, 그래서 이틀째 열리는 복음 집회에 꼭 참석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는 어제 들었던 말씀을 기억하며 이제는 뛰다시피 하는 걸음이 되었습니다. 공동묘지 부근을 지나는 길에 청년은 죽음의 두려움과 지옥의 두려움이 깊어 옴을 느꼈습니다. 그와 동시에 하나님의 한 말씀이 명확하게 떠오르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씀은 요한이 쓴 복음서 3장 16절의 말씀이었습니다. 청년은 그 말씀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인다고 고백했습니다. 그와 동시에 청년의 마음에 믿음이 생겨났습니다. '죄인인 나를 위해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셨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나를 구원해 주셨구나.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멸망하지 않게 하시고 영생을 얻게 하셨구나! 주님, 제가 믿습니다!' 청년의 마음에 확신이 생겼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랑하시고 용서하셨다는 확신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음에 감사와 평안과 기쁨이 은은히 그리고 가득 차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찬송이 흘러나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때, 소년이었던 저는 추운 겨울밤 냉기가 쏟아져 들어오는 예배당 뒷자리에 앉아있었습니다. 전도자의 외치는 소리를 들으며 가끔 불꽃이 흔들리는 등잔불을 보고 있을 때 뒷문이 조용히 열렸습니다. 뒤돌아보니 찬바람을 가득품고 들어오는 이웃집 형의 환한 모습이 있었습니다. 나중에 들은 간증인데, 그 형은 그렇게 복음을 깨닫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으며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났노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궁벽한 섬마을에 사는 영혼들도 사랑하셔서 복음이 증거 되게 하시고 거듭나는 역사를 이루시는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듭났습니다.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베드로전서 1:23).
그는 선한 행위나 종교적 열심으로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받았으며,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었습니다.
노예선에서 일했던 존 뉴턴이라는 사람. 그는 앞서 말씀드린 청년과 똑같은 진리의 말씀인 복음을 깨닫고 회심하여 거듭났습니다.
자유라고는 한 틈도 누릴 수도 없는 노예의 처참한 모습을 보았던 그는 죄에 매여 있는 모든 사람들의 상태가 바로 저 노예들과 다름없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 누구보다도 자신이 사망의 어두운 골짜기에서 헤매는 가련한 인생임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영원한 멸망이 작정된 존재임을 알았습니다. 그는 누군가가 전해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 생명의 말씀, 복음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거듭났습니다. 그 후 1779년에 죤 뉴튼은 그 구원의 감격과 기쁨을 다음과 같은 찬송시로 표현했습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큰 죄악에서 건지신 주 은혜 고마워
나 처음 믿은 그 시간 귀하고 귀하다.
거기서 우리 영원히 주님의 은혜로
해처럼 밝게 살면서 주 찬앙하리라.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린도후서 5:17).
진리의 말씀을 보고 들을 때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회입니다. 누군가는 말하기를 아직 죽음을 이야기 할 때가 아니라고 종교를 가질 때가 아니라고 그런 것은 인생을 다 살고난 후에나 생각해 볼 일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생각이 아닙니다. 왜냐면 성경은 이렇게 강조하기 때문입니다.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 (잠언 27:1).
그렇습니다. 그날 밤 잠자리에 누운 것이 영원한 죽음으로 이어질 줄 누가 알겠습니까? 희망차게 시작한 하루이지만 뜻밖의 사고로 불귀의 객이 되어 그날 아침의 외출이 마지막 외출이 될 줄을 누가 알 수 있단 말입니까? 그래서 이 중대한 말씀 앞에 무관심하고 태연히 미루는 것은 지혜가 아닙니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린도후서 6:4).
구원의 복음과 영혼의 문제에 대하여는 하루 이틀 미룰 문제가 아닙니다. 잘 익은 곡식은 때가 지나기 전에 추수되어 곡간에 저장되기 마련입니다. 축복받은 영혼은 복음을 깨닫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결국 열매가 되지 못한 쭉정이는 버려지고 마침내 불태워질 것입니다. 복음에 대하여 태만히 하고 거절하여 마침내 구원을 얻지 못하게 되면 영원한 어둠에 버려지게 될 것입니다. 영원히. 영원히.
"추수할 때가 지나고 여름이 다하였으나 우리는 구원 얻지 못한다 하는도다" (예레미야 8:20).
몇 년 전, 늦가을과 초겨울이 겹쳐가던 어느 날 밤, 혜화동 어떤 창고극장에 가스펠 싱어 S자매의 콘서트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그녀가 선택한 마지막 곡은 '왕이 여기 계시네!'
깊고 맑은 성량으로 S자매는 마치 왕의 현현을 실감하듯 열창했습니다. '왕이 여기 계시네! 엎드려 경배하라!'
백여 남짓 모여든 사람들은 적어도 그 '왕'이 누구를 가리키는지를 아는 성도들이었습니다. 마지막 곡이 끝나고 문을 나섰을 때도 그 멜로디, 그 짧은 가사가 제 심령 속에 메아리 되어 울리고 있었습니다. 마침 밖에는 샛노란 은행잎들이 계절을 바꾸려 거세게 부는 바람에 의해 흩날리며 가로등 황색 불 빛 속에서 화려하고도 자유로운 군무를 추고 있었습니다. 제 시야엔 어둔 밤하늘 너머 파란 창공으로 이어지는, 그분을 향한 장엄한 경외심이 그 금빛 이파리들에 실려 가는 것이 보였습니다. 모두 엎드려 경배 드려야 할 그 분! 그분은 거듭난 자만이 모시고 섬기며 동행할 수 있는 분, 왕 중의 왕이시며, 모든 주 중의 주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제 마음에 친밀한 이웃으로 계신 오 선생님께서도 믿음으로 거듭나셔서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영광의 세계를 보실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라고 기쁨으로 찬송할 수 있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평안하세요.*
11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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