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믿음에 있는가

                          시험하고 확증하라


                                       사람을 따르는 신자들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로마서 3:4)


   우리는 앞에서 주님을 위해 한평생을 바친 위대한 신앙인들이 지옥에 떨어질 수도 있다는 끔찍한 현실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여기서는 왜 이와 같은 비극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을까 하는 문제를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 보고자 한다.  우리가 이와  같은 문제를 본질적으로 알려면 신앙의 근본적인 문제들을 파고들어야 할 것이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이것은 사단의 끔찍한 전략에 의한 역사로 말미암았다는 것이다. 이 전략은 창세 이래로 한번도 변경되지 않고 진행되어오고 있으므로 성경을 조금만 세밀하게 연구하면 즉시 알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대대로 사단에게 속고 있다.

그렇다면 사단의 탁월한 전략은 무엇인가? 그것은 사람의 마음을 부추기어 사람을 하나님 앞에서 높이는 일이다. 간단한 이 전략이 놀랍게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영혼들을 지옥에 데려가는데 성공하였고 기독교를 3류 종교로 타락시켜 비참한 모습으로 만드는데 성공했다.

   세상의 모든 종교는 사람에 의해서 생겨났다. 그러나 기독교만은 유일하게 사람이 창시자가 아니다. 오직 창조주 하나님께서 기독교를 시작하셨고 그의 아들, 즉 사람이 아닌 신께서 만드신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세상 종교들은 사단이 인간 중에 명철한 사람을 택하여 자기 능력을 입혀주어 종교 창시자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종교의 위력으로 인하여 수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거짓 것을 믿게 하여 지옥으로 데려가는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영계(靈界)의 이와 같은 실상을 인간들이 한번만이라도 상상한다면 지옥에 가지 않게 될 가능성은 높아지는 것이다.

   실로 안타까운 일은 사단이 기독교에도 이와 같은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는 실상이다. 기독교인들 중에 다른 사람보다 신앙심이 좋고 실력이 있고 외모가 나아보이면 곧잘 사단의 목표가 된다. 일단 사단은 자기의 목표를 정하고 나면 작업에 들어간다. 먼저 그를 사람들의 시선을 끌 수 있는 능력자로 세운다. 성공하게 하고 남보다 다른 장점이 드러나게 하고 사람들의 존경과 신망을 받게 한다. 그는 명성을 얻으며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기에 이른다. 때가 되면 사람들은 그를 추앙하게 된다. 그리하여 특별한 사람으로, 특별한 지도자로 추대하기에 이른다. 이제 그는 점점 높아져서 사람들 위에 군림하고 사람들을 지배하는 지배자로 나타나도 사람들은 당연시 여기는 것이다. 이단은 이렇게 나타나며 이렇게 만들어진다. 그는 이제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나고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받은 종이라고 자기를 선전하기에 이른다. 주변에서 그렇게 만들어 가는 것이다. 여러분 주변을 살펴보라. 이와 같은 현상은 기독교에 만연하고 있는 모습이다.

   성경은 여기에 대해서 무어라고 말하고 있는가? 서두에 기록한 말씀처럼 "사람은 다 거짓되되 하나님은 참되시다." 사람은 다 거짓되다. 다른 사람보다 나아도 나은 것이 아니며 특별하여도 특별한 것이 아니다. 사단은 사람을 높여서 사람들의 시선이 하나님에게 있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주목하게 한다. 이렇게 하여 사람 우상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는 사람 우상으로 가득 차 있어서 선량한 양들이 하나님을 발견할 수 없도록 가로막고 있다. 예수님은 이것을 아시고 마태복음 23장에서 경고하셨다.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는 하나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자니라.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지도자는 하나이시니 곧 그리스도니라"(마태복음 23:8~10).

   이 말씀을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 교회에는 선생이 없는 것인가? 지도자도 없는 것인가? 아비도 필요 없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교회에는 성경을 가르치는 교사가 필요하며 교회를 인도하는 지도자가 반드시 필요하다. 아비의 마음으로 자녀를 돌아보는 바울과 같은 지도자가 교회 안에 많아야 교회가 부흥한다. 그러나 그들이 선생으로 호칭 받으며 군림하는 것을 경계한 것이다. 지도자라 칭함 받으며 양들을 늑탈할 것을 막고자 한 뜻이다. 아비라 하여 양들과 격차를 두고 교회 안에 계급을 만들어내는 것을 막고자 한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는 오직 예수뿐이라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디모데전서 2:5). 분명히 말하거니와 오늘날 기독교의 목사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일은 주님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한 인간이 만들어낸 제도다. 인간이 교회를 조직적이고 합리적으로 잘 운영한다는 미명아래 인간의 생각대로 만들어낸 제도일 뿐 우리의 왕 되시는 주님은 이 일을 인정한 적이 없다. 이것은 단정코 외칠 수 있는 불변의 진리이다. 교회는 유기체요 생명체이다. 교회는 가족이다.

   첫째로, 사람을 높이는 사단의 전략은 하나님을 슬프게 한다. 이 일에 사울왕은 합당한 본이다. 그는 전쟁에 승리한 후에 여호와 하나님께만 영광과 존귀를 돌려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만드는데 주저하지 않았다(사무엘상 15:12). 이 일로 말미암아 주님은 슬퍼하시고 사울의 왕조를 철회하실 수밖에 없었다. 그는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우고 자신의 명예와 기쁨을 위하여 당연히 죽이라고 하였던 적국의 왕 아각을 죽이지 않았다. 이것은 참으로 하나님을 슬프게 하는 일이었다. 하나님은 사울을 슬퍼하시고 사울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기독교 역사에서 기념비를 세울만한 인물들이 많았던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을 기억하여 그들 중심으로 교파를 만들어 오늘날 수많은 교단이 일어났는데 이것은 결단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아니다. 사단은 이일을 주도하여 성공했고 그러므로 사울을 떠난 하나님이 오늘의 기독교를 떠난 것이다. 슬픈 일이다. 생각하여 보자. 루터, 칼빈,웨슬러, 무디 등 얼마나 많은 존경받을 만한 인물들이었는가. 그러나 그들을 오늘날 교파의 우두머리로 추앙하는 일은 결단코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일이 아니다.

   둘째로, 사람을 높이는 사단의 전략으로 인하여 하나님이 떠나시니 복음의 역사가 사라지는 것이다. 구원받는 역사가 점점 사라지다가 결국 오늘날은 구원을 말하는 것조차 이단시하는 데까지 이르지 아니하였는가?

   어떤 교파에서 만든 이단 분별에 관한 책을 본적이 있는데 그 내용 중에 하나는 "당신은 구원받았는가?" 하는 질문을 하면 이단이라고 써놓은 것을 보았다. 사도들이 구원을 외쳤고 구원을 받으라 하였고 구원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지 아니한가? 그것이 성경말씀이 아닌가(사도행전 2:40, 4:12, 16:31, 에베소서 2:8, 유다서 3절 등). 그런데 오늘날 한국의 기독교는 구원을 강조하면 이단이라고 가르치고 있으니 얼마나 슬픈 일인가? 예수라는 이름의 뜻이 구원이라는 뜻인데 도대체 구원을 강조하지 말라는 오늘의 가르침이 사단의 가르침이 아닌가? 구원을 말하지 못하게 하면 예수 이름을 우리 언어에서 지우라는 뜻이 아닌가? 얼마나 슬픈 이야기인가?

   이 글을 읽는 독자여, 기독교인들이여, 정신을 차려야 한다. 그리고 성경을 읽어야 한다. 성경과 다른 기독교, 성경과 다른 당신의 교회는 잘못된 교회다. 주님을 위해서 목숨이라도 바치고자 하는 순전한 신자, 성자 같은 신자들을 지옥으로 내몰고 있는 잘못된 교회는 속히 떠나야 한다.

   셋째로, 하나님이 떠나고 성령의 역사가 떠난 교회는 사람이 만든 조직으로 운영되고 거듭난 적 없는 교인들로 채워져 있다. 그곳에는 더 이상 하나님도 말씀도 성령도 없다. 기독교는 진정한 의미에서 종교가 아니요 생명 그 자체인데 결국 사단의 전략에 의해서 종교화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라지고 사람의 말이 교회 안에서 힘을 얻으며 교회를 운영해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혹자는 "오늘의 교회 안에서 우리가 성경을 배우고 있지 않은가? 성경대로 살려고 노력하고 있지 아니한가?"라고 말할 것이다. 물론 필자도 이와 같은 사실을 안다. 그러나 분명히 알것은 성경을 공부하거나 연구하는 것이 중요하나 그 말씀을 순종치 아니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만약에 오늘의 기독교가 바른길로 가려한다면 먼저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 모든 제도를 성경 안에서 찾고, 헌법은 성경으로, 지도자는 예수님으로 대체되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의 얼굴이 교회를 향할 것이며 예수님의 이름이 교회의 주인이 될 것이며 성령님의 역사는 교회 안에 살아날 것이다. 또한 십자가의 복음은 죄인을 구원할 것이며 거듭난 성도들로 교회당이 채워져서 교회는 사도행전의 기쁨을 회복할 것이다.

   오늘날 한국의 기독교가 큰 예배당을 짓는데 교회의 모든 목적을 두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큰 건물보다 큰 구원의 역사를 사모해야 할 것이며 많은 숫자보다 성령 충만을 사모하여야 할 것이다.

   이제 끝으로 결론을 내리려 한다. 다시 말하지만 오늘의 모든 기독교인을 다 지옥 자식으로 정죄하려 함이 아니다. 다만 필자를 포함하여 우리 모두가 성경을 기준하여 자신을 돌아볼 필요가 있음을 말한 것이다. 사랑을 실천하는 성자들이 지옥에 갈 수 있다고 말했다 하여 섭섭해 할 것이 아니라 그것이 성경적인가 살피며 자신의 영혼의 문제도 겸손하게 점검해보아야 한다. 지옥에 가는 사람 모두 불쌍하지만 그 중에 더 불쌍한 사람이 있다면 평생 예수 믿는다고 종교생활하다 지옥에 가는 사람이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고린도후서 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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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종교로부터의 자유


                             초등학문 아래 갇혀 있는 불쌍한 기독교인들이여!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저희에게 종노릇하려 하느냐"(갈라디아서 4:9).


   에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 강하게 책망하셨던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바리새인들이다. 주님은 때때로 그들과 진지하게 대화하기도 하셨지만 성경 여러 곳에서 그들을 질타하시며 책망하시곤 하셨다. 그러면 그들은 왜 책망을 받아야 했던가? 마태복음 23장에 보면 여기에 대하여 비교적 자세히 서술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저들은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하며"(마태복음 23:3).

   첫째로 이 말씀에서 보는 것같이 그들은 모든 것에 대하여 말로만 하고 행함이 없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다른 사람을 시키는 데는 잘 훈련되어 있었으나 자신은 그런 일을 하려 들지 않았다. 그들은 섬기는 자로 있지 아니하고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자들이었다. 쉽게 말하면 그들은 양들을 위하여 고난 당하는 목자의 모습이 아니라 양들 위에 군림하며, 행세하는 선생의 자리에 있었으며. 양들을 자기 이익을 위해 이용하고 있는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내용은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을 책망하는 말씀 중에 이미 지적되어 있다.

   "...주 여호와의 말씀에 자기만 먹이는 이스라엘 목자들은 화있을 진저, 목자들이 양의 무리를 먹이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냐? 너희가 살진 양을 잡아 그 기름을 먹으며 그 털을 입되 양의 무리는 먹이지 아니하는도다"(에스겔 34:2~3.

   주님이 에스겔을 통해서 지적한 이 목자상은 예수님 당시에도 바리새인들에 의해서 나타났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 시대에도 쉽게 볼 수 있는 목자상이 아닌가?

   여러분이 주의 깊게 에스겔 34장 나머지 말씀들을 살펴보면 오늘날 기독교의 큰 문제점 중 하나를 알게 되리라 믿는다. 그것은 무엇인가? 사람이 사람위에 군림하여 사람을 임의로 다스리고 있는 것이다. 마치 한 사람이 하나님과 인간을 중보하는 중요한 교량역할을 하는 것처럼 행세하는 모습은 얼마나 가증한 모습인가?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디모데전서 2:5).

   어떤 신령한 자라도 인간으로서 예수님의 중보의 자리를 대신할 수 있는 위치에 있을 수는 없다. 이와 같은 거짓 목자가 자기의 이익만을 추구하며 양떼를 이익의 도구로 삼는 일이 오늘날 기독교계에서 자행되어도 이상하게 보지 않으니 이 얼마나 슬픈 현실인가? 가슴 아플 따름이다.

   둘째로, 바리새인들이 지적 받은 것은 그들의 심한 형식주의였다.

   "저희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하나니 곧 그 차는 경문을 넓게 하며 옷술을 크게 하고"(마태복음 23:5).

   바리새인들은 이와 같은 말씀 외에도 많은 형식과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성경에 기록된 절기와 기록되지 않은 절기를 만들어 지키되 알맹이는 빼고 형식주의에 빠져서 사람들을 속이고 있었다.

   필자가 여기에서 다루고자 하는 내용은 이 부분, 즉 초등학문의 내용 중 "달과 날과 절기를 삼가 지키므로"(갈라디아서 4:10) 바울을 근심케 하였던 부분이다.

   갈라디아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모든 죄가 용서되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이 밝히 보였거늘(갈라디아서 3:1) 사단의 간계로 율법주의와 형식주의에 빠져서 점점 복음의 초점이 흐려져 가고 있었다. 그 율법주의는 사람이 믿음으로만 구원받기에 부족해서 행위도 필요하다고 주장하므로 하나님께서 온전히 '선물로 주시는 구원'을 훼손시켰던 것이다.

   오! 독자여, 부디 하나님을 자존심 상하시게 하지 말라. 하나님이 무엇이 부족하여 인간의 행위를 조금 받고 구원을 반쪽 선물로 주시겠는가? 신성하고 거룩한 하나님의 구원은 하나님께로부터 인간에게 주어지는 온전한 선물이다.

   또한 그들이 빠졌던 형식주의는 신앙의 핵심인 "마음의 중심으로부터 하나님과 십자가의 도를 깨달아 구원을 받아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기"보다 형식과 외식에 치우침으로 구원받는 길을 막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이와 같은 날과 달과 절기 등은 형식적으로 피곤하게 지켰지만 그들의 중심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구속의 도리를 따르는 데는 약해지고 있었다.

   이제 바리새인들이 지켰던 절기를 생각하여 보자. 그들은 유월절을 열심히 지켰고 대대적인 행사를 행했지만 실제로 유월절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을 다락방으로 내몰아버리지 아니하였던가? 그들은 안식일을 열심히 지켰지만 안식일의 주인 되는 예수님(마태복음 12:8)을 몰라볼 뿐만 아니라 십자가에 못박지 아니하였던가?

   필자는 한국의 기독교 상황을 보면서 예수님 당시의 모습과 상당히 흡사한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만약 신자의 가슴에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야만 했던 이유가 새겨져 있지 아니하다면 크리스마스가 무엇 때문에 필요하겠는가? 만약 크리스마스가 이방인을 전도하지 못한다면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크리스마스만 되면 왜 청소년들은 거리에서 방황하며 밤새 돌아다니는 것인가? 예수님의 탄생하심과 12월 25일이 1년 중 술이 제일 많이 팔리는 것과는 무슨 관계가 있는가?

   심지어 어떤 잡지에서는 "크리스마스 베이비"라는 신조어마저 생겼음을 이야기 해주고 있다. 이와 관련된 한 산부인과 의사의 말에 의하면 크리스마스 후 정확히 10개월 후에는 부모 없는 사생아가 갑자기 늘어난다는 것이다. 오! 이 얼마나 탄식할 일인가? 성탄절이라고 하는 이 절기가 오히려 세상을 타락시키는데 한 몫을 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슬픈 현실인가?

   또한 오늘날 부활절마다 초교파적으로 대대적인 행사를 하고 있는 것이 기독교의 현실이지만 필자가 만나본 수많은 기독교인 중에는 예수님이 왜 이 세상에 오셨는가? 왜 죽으셔야만 했는가? 예수님의 부활은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에 대한 시원스러운 해답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만나기가 쉽지 않았다. 부활의 의미를 질문하면 단순히 다른 종교 창시자는 다 죽고 그후에 소식이 없는데 예수님만이 죽음을 극복하셨다고 하는 위로가 고작이다. 만약 예수님의 부활의 의미가 그대의 양심에 새겨지지 않았다면 부활절 행사에 몇 십 번 참석하였다 할지라도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오! 기독교가 쉽게 망하는 지름길은 형식과 절기에만 집착하여 참된 믿음의 의미를 신자의 마음에 심는 일을 버리는 것이다. 예수님 당시 대적자들이 가이사에게 세 바치는 것이 옳은가 물었을 때 예수님의 대답은 무었이었는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누가복음 20:25) 하지 아니하셨는가?

   하나님의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양심이요 마음이요 영혼이 아니겠는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외모와 형식이 아니라 그들 중심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었던 것이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세아 6;6).

   이제 계속해서 마태복음 23장을 통해서 주님께서 지적하신 바리새인의 문제점을 살펴보기로 하자.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마태복음 23;23).

   이 십일조 문제를 잘 분석해 보면 형식과 내면의 문제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창세기 14장 17~20절에 십일조가 처음으로 언급되어 있다. 아브람이 조카 롯을 사로잡아갔던 왕들을 파하고 조카 롯과 모든 사로잡힌 사람들과 물건을 찾아 가지고 돌아오던 길에 살렘 왕 멜기세덱이 나와서 이김의 근원은 하나님께로부터임을 강조했다.

   "너의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창세기 14:20).

   이 말씀을 정밀하게 분석하여 보면 먼저 아브람이 깨달은 것은 이 전쟁이 아브람이나 그의 군대들의 용맹으로 승리한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아마 아브람이 멜기세덱을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그 중심의 상당 부분이 자만에 빠져서 자기의 능력으로 이긴 것처럼 생각하였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멜기세덱은 아브람에게 전쟁의 승리의 원인을 깨우쳐 주었으며 아브람은 이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를 깨닫고 감격하여 그에게 10분의 1을 드렸다. 이것은 주님의 베푸신 은혜에 대한 넘치는 감사의 표시였던 것이다. 이 멜기세덱은 예수님을 상징적으로 나타내주고 있는바(히브리서 7장 참조), 오늘날 우리가 주님께 어떤 자세로 헌금과 헌물을 드려야 할 것인가를 깨우쳐주는 말씀이기도 하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에 십일조는 형식만 남고 그들 중심에 이루어져야 할 내면적 깨달음, 즉 의와 인과 신은 사라졌던 것이다. 아브람이 멜기세덱에게 드릴 때에 가졌던 하나님을 경외하던 믿음은 사라지고 만 것이다.

   말라기 시대에도 역시 하나님은 경외하지 아니하고 외식적으로 드렸던 십일조와 헌물 때문에 차라리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다"(말라기 1:10)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중심이 빠진 형식적 절기와 의식은 주님의 마음에 얼마나 고통을 주고 있는가를 생각해 볼 수 있는 말씀이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마태복음 23:27~28).

   바리새인들의 또다른 문제점은 외형적인 것을 너무 꾸미고 단장하였으나 내면적인 것은 썩어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특별한 옷을 지어 입었으며 경문을 차고 다녔다.

   오늘날 한국의 기독교가 100년의 세월을 흐르면서 양적 팽창과 물질적 부요에는 성공하였으나 신자의 마음 중심에 믿음의 본질을 심어주어 내적인 변화를 일으키는데는 무관심하였다고 생각되지 않는가? 물질이 풍요하기 때문에 수 십, 수 백억을 들여 거대한 예배당을 지어 몇 부로 나누어 예배를 드리고 있다. 실로 그 숫자와 그 외형적 장중함에 있어서 엄청난 발전이다. 한국 기독교 100년 사에 이와 같은 양적 팽창은 세계 어느 나라 기독교사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일이다.

   그러나 생각하여 보라. 예수님이 이 거대한 예배당에서 성가대의 아름다운 멜로디를 들으며 예배를 진행하고 헌금자의 명단을 일일이 불러서 드러내어가며 에배하는 곳에 기쁨으로 동참하실 수 있다고 보는가?

   가난한 신자들은 돈 몇 푼이 없어 자식들 학업을 중단하고 공장으로 보내야만 하지 아니한가? 소년 가장의 눈물어린 호소나 불쌍한 이웃의 호소를 교회가 외면하고 형식주의, 외형주의에 빠져서 거대한 건물 짓는 데만 혈안이 되어도 괜찮다고 보는가? 한국의 기독교가 이와 같은 길로 계속 치닫는다면 스스로 자멸하고 있음을 어찌 알지 못하는가?

   신앙의 본질은 외적인 꾸밈이 아니라 내적인 변화를 통해서 나타나는 것 자체가 아닌가? 찬송가에 "주 예수 내 맘에 들어와 계신 후 변하여 새 사람되고..."(찬송가 208장)라는 가사가 있는데 참으로 신앙의 본질을 잘 말하여 주고 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린도후서 5:17)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이 죄인의 마음에 깨달아지게 될 때 그는 전혀 새 사람으로 변화된다. 왜냐하면 복음이 그의 영혼을 변화시켰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죄를 짓고 죄인의 신분으로 지옥을 향하여 가고 있던 저주받은 자들에게 복음은 이제 그가 모든 죄에서 벗어났음을 가르치고 있다. 이제 그는 죄인의 신분에서 벗어나 의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천국의 소망을 가지며 당당한 성도가 되었다는--"머리털보다도 더 많던 내 죄가 눈보다 더 희어졌네" (찬송가 208장)--사실을 깨달을 때 그의 중심은 기쁨으로 가득 채워질 수밖에 없다. 그의 중심에 있었던 의심과 근심의 구름이 모두 사라지고 만 것이다-- "의심의 구름이 사라져 버림은 주 예수 내 맘에 오심"(찬송가 208장).

   날과 달과 절기에 대하여 결론적으로 한 가지만 생각하여 보자. 만약 한국인이 너무 부모에 효도하여 효심이 지나치므로 나라 발전 및 공업 발전에 지장이 있을 정도라고 하자. 쉽게 말하여 부모님께 효도하느나 너무 많은 사람들이 결근하고 직장에 불성실한 상황이라면 구태여 "어버이날"을 따로 만들어서 부모에게 효도하라고 가르칠 필요가 있겠는가? 오히려 너무 부모를 등한시하고 돌아보지 않기에 어버이날을 정한 것이리라.

   기독교 절기도 이와 같아서 신자의 내면에 이 놀라운 변화와 깨달음을 통해서 주님의 오심을 기억하고 감사하며,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므로 내 죄를 용서하신 주님을 눈물로 날마다 감사하는 신자에게 부활절이 따로 필요하겠는가?

   신앙의 본질은 여기에 있다. 독자여! 그대의 마음에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모셔 들이라. 그리하면 그대의 죄가 십자가에서 완전하게 해결된 사실을 깨달을 뿐만 아니라 날마다 주님의 오심과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찬양하여 1년 365일이 날마다 성탄절, 부활절이 될 것이다. 그대의 마음에 이와 같은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졌기를 기도드린다.

   오, 독자여! 주님의 오심은 그대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며(요한복음 3:16), 주님의 죽으심은 그대의 죄를 다 용서하셨으며(요한복음 19:30), 그분의 부활하심은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그대를 구원하신 증인으로서 부활하신 것이다.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로마서 4:25).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가 그대의 마음 중심에 자리 잡았는가? 그대의 마음으로 믿어졌는가? 그렇다면 그대는 구원 받은 자라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로마서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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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죄와 종교로부터의 자유


                         성령으로 시작하여 육체로 마치려느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치겠느냐"(갈라디아서 3:3).


   바울은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들을 생각할 때, 패역한 세대와 우상종교 속에서 신음하던 자들을 성령의 역사로 건지셔서 성령께서 저들을 양육하시고 인도하여 아름다운 교회로 이루어감을 보면서 무한한 감사와 찬양을 하나님께 드리고 있었다. 하나님은 갈라디아 뿐만 아니라 각처에서 성령의 사역을 통하여 얼마나 놀랍고 기이한 일들을 행하셨는지 모른다.

   성령의 사역은 거룩하고 진실하며, 억지나 무리함이 없으며 하나님과 사람을 동시에 기쁘게 하는 열매를 맺는 사역이다. 이것은 무더운 여름날 땀흘려 일하는 농부에게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과 같은 것이어서 눈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역사는 분명하고, 그 역사는 하나님과 사람을 시원케 한다.

   성령의 사역은 인간의 지식이나 경험, 능력을 뛰어넘는 지극히 초자연적인 것이어서 놀라운 이적과 기이한 역사를 이룬다. 이 놀라운 역사가 갈라디아 지방에서 일어난 것이 바울의 마음에 얼마나 큰 위로와 기쁨이 되었겠는가? 필자는 여기에서는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일어난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생각하며 성령으로 말미암는 구원의 본질을 알아보고자 한다.

   구원에 대한 성령의 사역은, 인간의 본성으로 이룰 수 없는 속죄나 거룩하여짐을 이루시고, 거룩할 수 없는 죄인에게 의인의 신분을 선물로 주시며, 또는 거룩한 행실로 자신을 변화시킬 수 없는 자를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변화시켜 주시는 일을 하신다.


   복음의 차원에서 성령의 사역을 알고자 하면 먼저 우리의 육체의 본성부터 깨달아야 한다. 성경은 자신의 육체적 노력(행위)으로 의로워지려 했지만 실패한 사람들의 모습을 여러 부분에서 증거하고 있다.

   아담의 피를 이어받은 가인은 죄의 성품을 타고나서 그의 성품을 억제하지 못하고 아벨을 질투하여 죽이고 말았으므로 아담 이후 최초의 실패자로 나타나고 있다.그는 왜 동생을 죽였는가? 그것은 아담의 육체의 정욕을 어어받은 때문이 아니겠는가?

   또한 우리는 아브라함을 생각하여 볼 수 있는데,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이방인에게도 대단히 칭찬을 받았던 선한 믿음의 사람이었다.

   "내 주여 들으소서. 당신은 우리 중에 하나님의 방백이시니 우리 묘실 중에서 좋은 것을 택하여 당신의 죽은 자를 장사하소서..."(창세기 23:6).

   이것은 아내 사라를 장사 지내기 위해 아브라함이 헷 족속에게서 땅을 구입하고자 했을 때 헷 사람이 한 말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간증인가! 이방인의 입으로 아브라함을 주(主) 또는 방백이라 칭했으니 놀라운 간증이 아닌가? 방백이라는 뜻은 어른, 두목, 왕으로 번역될 수 있는 대단한 존칭이다. 그러나 이러한 위대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이방인을 두려워할 때가 있었고 그로 인하여 아내를 빼앗길 뻔한 적이 두 번이나 있었다(창세기 12장, 20장). 이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아브라함의 육신적 연약함을 잘 드러내준 것이다.

   또한 모세를 생각해 보자. 그는 위대한 신앙인이었다. 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였다(민수기 12:3). 온유는 주님의 성품이었던 바(마태복음 11:29)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였던 모세를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도 또한 므리바 물가의 실수로 인하여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남긴 사실을 기억할 수 있다(민수기 27:12~14). 이 모세는 율법의 상징이 되고 있는 바, 이 실수로 인하여 인간이 율법의 행위로는 천국에 갈 수 없음이 명백히 증명되었다.

   이러한 예는 수없이 많다. 수많은 선진들이 믿음의 큰 발자취를 남겼으나 그들의 육체적 약점 또한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부인할 수 없었다. 우리의 육체는 때로는 하나님의 도구로, 때로는 사단의 도구로 곧 잘 이용되곤 한다(로마서 6:12~13).

   만약 어떤 종파나 혹은 교회지도자가 말하기를 우리의 영혼과 함께 육체가 온전하게 변화되어야 천국에 간다고 가르친다면 이는 그릇된 가르침이다. 육체의 본성은 이 세상에서 온전해질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장차 오실 주님을 통해서 몸의 구속(몸까지 변화됨)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로마서 8:2).

   신구약을 막론하고 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육체는 온전하게 변화되지 아니한 채 다만 그들의 신분과 상태가 변화되었던 것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사단은 교회사 2,000년 동안 꾸준히 인간을 속여왔다. 사단은 교회에 한 가지 불순한 사상을 은밀하게 침투시켰는데 그것은 거듭난 경험이 전혀 없는 사람에게 정직하고 의롭게 말씀을 순종하여 살것을 꾸준히 가르쳐 온 것이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사람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하는데도 사단은 열심히 순종하고 노력하여 육체의 정욕을 억제하여 천국에 가거나 하나님의 복을 받는 것처럼 속여왔다. 지금도 수많은 종파나 목사님들이 이와 같이 가르치고 있는 것을 필자는 수없이 목격하고 있다.

   예배당에 처음 나가는 사람에게는 거듭남의 필요성과 거듭남의 방법을 열심히 전하여 그 사람이 확실하게 거듭날 때까지 이러한 노력을 쉬지 말아야 할 것이다.

   오늘날 어떤 교인을 만나보니, 그는 날마다 거듭나야 하며 또한 자신은 날마다 거듭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 사람은 거듭남의 뜻도 모르는 교인이었다. 거듭남은 위로부터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나는 것을 말한다. 두 번 난다는 뜻이다. 생일이 두 번이라는 말이다. 즉 이 세상에 육체로 출생한 생일과 영적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출생한 생일을 말한다.

   또 어떤 종파는 거듭난 경험도 없는 사람에게 거듭난 생활을 가르치고 있다. 이것은 아이를 임신하지도 아니한 사람에게 아이를 낳으라고 다그치는 것과 같고, 여자에게 남자답게 살라고 괴롭히는 것과 같다. 그것은 성령의 열매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거듭나지도 안은 채 거듭난 자답게 살려고 육체적인 노력으로 고통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결국은 위선된 생활로 자기를 포장하며 살아가는 위선자의 길을 가든지, 양심을 선언하고 힘들어서 예수 못 믿겠다고 포기하든지 둘 중 하나의 길을 갈 것이 분명하다.

   사단이 교회를 속이는 또 한 방법은 이제 육체를 학대하므로 거듭난 자다운 생활을 하여 보라고 가르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을 산으로 기도원으로 수도원으로 내몰았다. 그리고 성경이, 신성하고 존귀하다고 말하고 있는 결혼을 죄악시 여겨 금하고 있다. 그러나 분명히 알 것은 결혼을 금하는 사상은 귀신으로부터 왔다고 성경은 분명하게 증거하고 있다.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하였으니 자기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혼인을 금하고 식물을 폐하라할 터이나..."(디모데전서 4:1~3).

   분명히 말씀드리거니와 수도원 사상은 성령으로부터 오지 않고 사단으로부터 왔다. 기독교의 본질은 현실도피에 있지 아니하고 더럽고 어두운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직분을 다하여 죄인들 곁에 가서 죄인을 구원하는 것이다.

   생각하여 보라. 이와 같은 인간적인 방법으로 사람이 의로워질 수 있겠는가? 이 모든 것들은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 결단코 아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여러 지방에서 경험했던 성령의 역사는 결코 사람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었다. 오로지 복음을 들고 가는 곳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역사만 활발하게 일어났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성령께서 죄인들을 회개시켜 우상과 더러운 죄악의 어리석음을 깨닫게 하고, 그와 같은 것들이 마귀로부터 온 것임을 깨달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속죄와 용서를 받아들이고 거듭나게 하신 것이다. 그것은 성령의 능력으로 변화된 삶이며 그러한 사람들의 초기 신앙생활은 성령으로 인도 받아 살았던 것이다.

   참 신자는 모름지기 성령으로 거듭나고 성령으로 생활하여야 신자다운 삶을 누리게 된다. 거듭난 신자의 마음에 성령께서 거하시며(로마서 8:9, 요한복음 14:17), 신자의 생활을 성령께서 주장하여 주셔서 죄를 이기고 말씀의 뜻을 분별할 뿐만 아니라 순종할 수 있는 능력까지도 성령의 선물로 받는다. 이와 같은 아름다운 역사는 온전히 성령의 선물로만 이루어진다.

   오, 독자여! 사랑하는 독자여! 바울이 갈라디아에서 언제 수도원을 지었던가? 수도원을 통하여 육체를 정죄하고 억제하며 말씀을 좇는 것처럼, 거룩해진 것처럼 잘 훈련된 수도사들을 양성하였던가? 바울이 언제 특정 종파를 만들어 조직을 강화하고 총회를 창설하였던가? 무슨 종파 이름을 붙이고 교주나 총회 어른으로 대접받은 적이 있었던가? 믿음이 아닌 육체적 노력, 즉 육체를 학대하여 의로워진다고 가르쳤던가? 교회 조직에 잘 순종하고 충성을 다하여 믿음 좋은 사람으로 인정받아 감사패나 상장을 나누어주어 방에 걸어 놓게 하였던가? 오! 이 모든 것은 육체로부터 온 육신적인 방법이 아닌가? 언제 바울이 교회 재정이 어려워 헌금을 호소하여 헌금 봉투에 이름을 쓰게 하며, 공개하며, 육신적인 방법으로 헌금을 강요하였던가? 성령으로 시작한 초대교회가 오늘날 육체로 마치게 되었다고 탄식하지 않겠는가?

   성령의 사역은 거룩하고 진실하며 억지나 무리함이 없는 것이며 하나님과 사람을 동시에 기쁘게 하는 것이다.

   독자여! 사랑하는 독자여! 깊이 생각하고 성찰하여 보기 바란다. 기독교는 성령으로 시작하고 성령으로 진행하여 성령으로 마쳐져야 한다. 성령은 말하고 듣고 가르치고 진리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영이시며 인격이시다. 성령은 신자를 양육하고 바로잡고 깨우치는 인격이시다(요한복음 14:26, 16:13).

   길을 가다가 포스터를 보니 부흥회 광고였는데 "성령폭발" 이라고 쓰여 있었다. 얼마나 어리석고 암흑에 갇힌 모습인가! 성령이 폭발한다고? 그들의 상태는 디모데전서 1장 7절에서 지적하고 있는 대로 "자기의 말하는 것이나 자기의 확증하는 것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성령은 삼위 하나님이시요 능력이시다 하나님의 영이시다. 성령은 죄인을 의인으로 만드는 능력이시다. 성령은 진리를 증거한다. 진리를 벗어난 역사는 성령의 역사라고 볼 수 없다. 성령은 예수님을 증거한다.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요한복음 15:26).

   성령은 예수님을 증거한다. 곧 그분은 예수님의 사역을 증거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의 사역의 초점은 잃어버린 죄인을 찾아 구원하시는, 즉 거듭나게 하시는 사역이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로다"(누가복음 19:10).

   집을 나간 자식, 길을 잃은 죄인, 선악을 분별치 못하는 타락하고 패역한 죄인, 더러운 죄인을 찾아서 건지시고자 하는 것이 주님의 사역이다.

   삭개오를 변화시키신 주님께서, 죽음 직전의 강도를 변화시키고 건지신 주님께서, 오늘날에도 이와 같은 동일한 일을 행하고 계신다.

   인간 스스로 할 수 없는 일들을 성령께서 하신다. 그러므로 성령의 사역은 온전한 선물이다.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사도행전 2:38).

   성령의 사역에 대하여 요한복음 16장 8절에 잘 나타나 있다.

   "그가(성령)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요한복음 16:8).

   '책망'이라는 말은 '엘렝코'라는 헬라어로서 '드러내다', 증명하다, 시정하다' 등의 뜻으로도 번역할 수 있다. 즉 성령께서는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드러내고 증명하고 계시다는 뜻이 된다. 9절부터는 무엇을 드러내느냐에 대한 자세한 내용이 나와 있다.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요한복음 16:9).

   성령은 참된 죄가 무엇인가를 드러내신다. 죄가 무엇인가? 무슨 죄가 인간을 지옥으로 보내고 있는가? 그것은 '믿지 아니하는 죄'인 것이다.

   주님의 십자가 대속으로 창세 이래로 발생하고 앞으로도 발생할 모든 죄가 단번에 사하여졌다. 인간을 지옥으로 끌고 갈 수 있는 죄는 모두 사라졌다. 2,000년 전 십자가에서 주님께서 외치신 "다 이루었다" (요한복음 19:30)는 이 한 마디는 인간 세계의 모든 죄를 단번에 해결하셨다는 선언이다.

   이제는 이같은 놀라운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을 믿기만 하면 죄에서 해방될 뿐만 아니라(로마서 8:1), 구원을 얻은 것이며(에베소서 2:8), 확실한 영생의 소망을 가지게 된 것이다(요한복음 5:24). 이제 인간을 지옥으로 데려갈 수 있는 모든 죄(과거, 현재, 미래의 죄)는 십자가로 말미암아 다 청산되었다. 모두 해결되었다. 아름다운 십자가의 속죄를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 성령께서는 사람들이 이 놀라운 구속의 사실을 믿지 아니함으로 지옥에 간다는 것을 드러내 증명하신다.

   또한 둘째로 성령은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요한복음 16:10)라는 사실을 증거하신다. 로마서 3장 21절과 22절에 보면 율법으로 의로워질 수 없는 인생에게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는데 이 의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며 또한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자는 의인의 신분을 얻게 되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가 의가 되신 것을 증거하시며 또한 그 예수를 믿는 자는 의로워지는 진리를 증거하신다.

   셋째로 성령은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요한복음 16:11)는 사실을 증거하신다. 이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의 결과이다. 성령께서는 이세상 임금(사단)이 심판을 받았음을 증거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창세기 3장 15절 말씀이 성취된 것인데, 뱀의 머리가 깨어진 것, 즉 사단의 권세가 예수님 앞에 완전히 굴복된 것을 말한다. 사단은 사망을 무기로 하여(히브리서 2:14) 인간을 멸망의 지옥으로 끌고 가던 바, 주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사단의 사망 권세가 여지없이 무너졌다. 주님의 부활 권세가 온 세상 사람에게 구원의 기쁜 소식이 되었다. 비록 아직도 많은 사람이 사단의 속임수에 속고 있지만 성령께서는 이 승리의 소식을 드러내 증거하신다.

   이 세 가지 사역을 종합하면 우선 예수님은 인간의 불행의 근원인 죄악을 다 청산하셔서 인간을 죄로부터 완전하게 해방하신 분이시다. 그러므로 이 예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책망 받고 심판 받음을 드러내고 있다.

   또한 예수님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완전한 의가 되셨으니 그분에게는 불의가 조금도 없으시다. 그러므로 그분을 믿는 자를 의롭다 하실 뿐만 아니라 또한 그분은 장차 의와 불의를 심판하시는 주가 되신다. 끝으로 그분은 이 세상 사단의 권세를 심판하셨으며 이제 이 세상의 모든 권세를 잡으셨다(빌립보서 2:9~11). 그분은 인생 구원의 근원이시다. 모든 속죄와 권세와 다스리심이 예수님에게 돌아왔으니 그분을 믿는 자는 영생을 얻은 것이며 그분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심판을 자처하는 것이다.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한복음 3:36).

Posted by 행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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