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믿음에 있는가

                                    시험하고 확증하라


                                천국에 갈 수 있느냐?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빌립보서 3:20).


   "천국에 갈 수 있습니까?" 이와 같은 질문은 필자가 수없이 해온 고전적인 질문이다. 필자뿐만 아니라 바른 전도자라면 당연히 했을 질문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전도함은 천국에 감을 목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땅위에 있는 기독교 신자에게 " 왜 하나님을 믿는가"라고 물으면 당연히 "천국에 가려고 믿는다"고 대답해야 할 것이다.

   성경 요한복음 3장 16절에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신" 이유는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시고 있다. 멸망의 지옥에 가지 않고 영생을 얻어 천국에 가게하기 위하여 예수께서 오신 것이 사실이라면 당연히 천국가기 위하여 예수 믿는다고 말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한국의 기독교 현실은 이와 같은 질문을 하면 일단은 이상한 사람 취급하는 것이 현실이다. 이것은 슬픈 일이요 비극적인 모습이다.


   여기서는 "천국에 갈 수 있느냐"는 질문을 중심으로 이어지는 여러 가지 상황들을 살펴보면서 구원의 진리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먼저 천국에 갈 수 있느냐는 질문은 지옥을 전제로 하는 것인데 상당한 기독교인들이 지옥을 믿지 않는다. 그들도 지옥을 믿는다고 대답은 한다. 그러나 실제로 그들은 입으로는 인정하나 행위로는 부인한다. 오늘날 기독교가 샤머니즘의 영향을 받아 내세보다는 현세의 복을 중심으로 발전한 결과 지옥에 대한 강조가 약해진 까닭이리라. 그러므로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현세의복에 관심을 두고 지옥에 대한 관심이 점점 없어진 것이다.

   성경말씀이나 찬송들은 하나같이 현실의 복보다는 내세의 복에 대한 소망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언제부턴가 천국에 대한 소망의 가르침이 약해지면서 현실의 축복에만 매달려 있다. 그리고 사람들의 뇌리에서 지옥에 대한 관심이 점점 사라져갔다. 결국 지옥을 믿지 않는 교인은 이렇게 만들어진다. 이것이 사단의 전략이다. 한국의 기독교는 이러한 절차를 거쳐 사단에게 먹힌 것이다. 지옥이 빠진 기독교는 더 이상 사단에게 두려움을 주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사단의 친구가 된 기독교, 사단의 도구나 노리개가 된 기독교가 되는 것이다.

   직선적으로 이야기한다면 예수님은 사람을 지옥에서 천국으로 데려가는 것이요, 사단은 지옥으로 데려가는 것이다. 지옥에 대하여 관심 없는 기독교는 사람을 지옥에 데려가기 위해 분주한 사단의 전략을 착실히 수행하는 종으로 전락한 모습이다.

   지옥을 믿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자주 만난다.  그러나 필자가 그들에게 지옥이 어떤 곳이냐고 물으면 자신 있게 대답하는 신자들을 거의 만나보지 못했다. 지옥이 얼마나 끔찍한 곳인데 믿는다고 하면서 구체적으로 설명도 못할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은 지옥을 믿지 않는 것이다. 필자는 감히 말하고자 한다. 우리나라 기독교인들의 상당수가 지옥을 안 믿는다. 참으로 슬프고 비통한 현실이다.

   천국에 갈 수 있느냐는 질문은 이와 같은 관점에서 대단히 중요한 질문이요 기독교인들을 향한 중요한 도전이 되고 있다. 이 질문은 수많은 기독교인들을 살릴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필자가 "천국에 갈 수 있느냐"는 질문을 하였을 때 나온 반응들을 함께 생각해보며 구원의 진리를 생각해보고자 한다.

   첫 번째 반응은 "그것을 어떻게 미리 알 수 있느냐"는 것이다. 우리가 열심히 주님을 섬기며 살다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가면 그때에 가부간 결정되는 것 아니겠느냐는 것이다. 어떤 이는 지금 천국에 간다고 확신하고는 있지만 앞으로 신앙생활을 잘 하지 못하면 탈락하고 말 터인데 어떻게 천국 간다고 함부로 확신 있게 대답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성경은 "믿는자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요한 복음 6:47)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러한 말씀에 관심이 없거나 무지한 신자들이 의외로 많아 천국의 소망을 불확실하게 생각하고 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자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한복음 5:24).

   얼마나 명확한 하나님의 약속인가! 천국에 가는 것을 확실하게 알고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천국의 소망에 잡혀 날마다 당하는 어려움을 극복하며 한 걸음 한걸음 믿음으로 나아가는 것이 성도의 삶이다. 천국에 갈 수 있는 확신도 없이 교회에 다닌다는 것은 학교에 입학한 적도 없이 학교에 날마다 나가는 학생처럼 불행한 것이다. 그는 졸업식날 울어도 졸업장을 받지 못할 것이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열심히 다닌 학교생활이 졸업장을 받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은 기가 막힐 일이다.

   그대는 입학식과 같은 구원을 받은 적이 있는가? 냉정히 그대의 신앙을 점검해 보라. 진정 양심적으로 생각해보라! 천국에 대한 소망에 부풀어 있는가? 그리고 그 소망은 말씀에 확실한 근거를 가지고 있는가? 성경에 근거도 없는 자기 확신은 스스로 속는 것임을 명심하라! 스스로를 냉정하게 점검해 봄이 그대의 생명을 진정 사랑하는 것임을 명심하라. 한 번 더 강조하거와 자신에 대해서 관대하지 말라. 대충 넘어가지 말라.

   이 질문에 대한 두 번째 반응을 들어보자. "나는 천국에 가려고 예수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교회에 다니지만 자신은 사람답게 사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는다는 것이다. 기독교가 사회를 위해 소금의 역할을 하며 불쌍하고 소외당하는 사람들을 돌아보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가. 소위 말하는 해방신학이라고 하는 이 사상은 억압당하고 소외당하는 사람을 위해서 투쟁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와 같은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폭력 투쟁도 사용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세상을 밝게 아름답게 하는 사회 사업에 힘써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세상을 낙원으로 만들어야지 어디 새로운 낙원이나 천국이 있겠느냐는 것이다.

   그들의 말은 상당히 매력이 있어 보인다. 그러나 거기에는 허점이 있으니 그들의 이상은 좋으나 이루어질 수없는 이상, 즉 허상에 불과한 것이다. 성경은 모든 인생이 다 죄인이라고 증거하고 있다. 죄인들이 모여서 어떻게 낙원을 만들 수 있는가? 수많은 사상가들이 만든 이론으로 세상을 고쳐보려 하였으나 모두 실패로 끝나지 아니하였던가.

   기독교 사상으로 세상을 낙원으로 만들 수 없다. 예수님은 천년왕국을 약속하셨지만 하나님의 특별한 역사로 천년낙원을 만드시는 것이지 인간을 서서히 개조하여 만드는 것이 아니다.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빌립보서 3:20).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마태복음 5:3).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은 필자가 사회사업이나 복지사업을 필요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것들은 필요하나 천국복음을 위해서 해야만 함을 말하는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한 세 번째 반응을 보면 "당연히 갈 수 있지요" 하는 것이다.  물론 합당한 말씀이다. 그러나 필자의 두 번째 질문에 그는 막히고 만다. "무슨 근거로 천국에 간다고 말합니까?" 하고 질문하면 "그냥 믿으니까 가는 것 아닙니까?" 하는 대답이 대부분이다. 물론 원칙적으로 믿음으로 간다고 하는 말에 모순이 없다.

   어떤 이는 그냥 예수를 믿으면 되는 것이지 왜 그렇게 복잡하게 말하는가 하고 물을 것이다. 그러나 믿음을 논할 때 그렇게 막연한 것이 아니다. 무엇을 어떻게 믿느냐 하는 문제가 있는 것이다. 마태복음 7장21절 이하의 말씀에는 믿음이 막연한 것이 아님을 명백히 말해주고 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이 얼마나 두렵고 무서운 주님의 경고요 엄숙한 선언인가! 그들은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평생을 살았던 헌신적인 신자였다. 분명하게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그들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천국에서 볼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하나님의 공의는 두려운 것이다. 성경은 진실하고 완전한 책이다. 분명하게 성경에 있는 구속의 진리를 따라서 거듭난 성도가 아니면 평생을 주님을 위하여 산 순교자라 할지라도 멸망의 지옥에 갈 수밖에 없다.

   오늘날 주여 주여 하면서 막연하게 천국에 갈 거라는 생각만 가지고 교회에 출입하는 수많은 허수아비교도들은 자신의 영혼을 생각하여 정신을 차리고 구원을 받아야 할 것이다.

   오늘의 많은 신자들은 믿음을 단순히 "신앙의 행위"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래서 교회의 모든 모이는 시간에 열심히 참여하고 신자로서 모범된 행실로 살기 위하여 노력하고 교회에서 맡긴 직분에 충실하고 헌금을 성심을 다하여 내고 목사님의 말씀에 순종 잘하는 그런 모습이 믿음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믿음이며 좋은 믿음을 가졌다고 말하는 것 아닌가. 그리고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하였으니 결국 천국에 가지 않겠느냐고 그들은 곧잘 말한다. 이들은 "나는 이미 믿고 있으니 나에게 전도하지 말고 다른 사람에게 전도하시오 왜 잘 믿고 있는 사람에게 전도하시오?" 하면서 불쾌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알 것은, 이런 반응을 나타내는 사람은 자신이 구원 받지 못했음을 실토하고 있는 것이다. 죄송하지만 정상적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의 눈에는 한국의 대부분의 기독인들이 구원받지 못한 자들로 보인다는 현실이다.

   한국의 영적 현실은 이교도들에게 전도하는 것보다 기독교인들에게 먼저 전도하여서 기독종교인에서 거듭난 그리스도인으로 만들어야 한다. 바울도 지적했듯이 자기의 말하는 내용이 무엇인지조차 깨닫지 못하는 종교인들, 그들은 종교 속에 갇혀 자기가 무엇을 믿는지조차도 알지 못하며 지옥에 가고 있다.

   "사람들이 이에서 벗어나 헛된 말에 빠져 율법의 선생이 되려 하나 자기의 말하는 것이나 자기의 확증하는 것도 깨닫지 못하는도다"(디모데전서 1:6).

   이러한 사람들은 사도신경을 잘 외우며 주기도문을 잘 말하지만 그 뜻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방황하는 자들이다. 아무 뜻도 모르고 종교적으로 경을 외우는 사람들은 사도시대에도 있었으며 그들은 소경이 되어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 "예루살렘에 사는 자들과 저희 관원들이 예수와 및 안식일마다 외우는바 선지자들의 말을 알지 못하므로 예수를 정죄하여 선지자들의 말을 응하게 하였도다"(사도행전 13:27).

   아무 의미도 모르고 종교적으로 외우는 경전, 앵무새의 말과 무엇이 다를까? 그들은 종교적으로 그 알지 못하는 것을 믿을 뿐 아니라 그 알지 못하는 것들을 훼방하기도 한다.

   앞에 인용한 사도행전의 말씀을 보아도 그들은 성경 속에서 태어나서 성경을 늘 외우면서 자라고, 또한 성경을 가르치는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은 성경대로 오신 예수님을 대적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 얼마나 이상하고 우스운 이야기인가. 참으로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어처구니없는 이와 같은 일이 초림 예수 때에 일어났고 재림 예수 때에 또 일어나는 것이다.

   예수님이 성경을 사랑하고 믿는다는 종교인들에 의해서 죽임당함 같이 오늘날도 거듭난 사람들이 기독교 정통이라는 사람들에 의해서 핍박을 받고 있다. 이 시대에 참으로 거듭난 아름다운 무리들이 성경의 진리를 따라 모이는 순수한 교회를 주님이 감추어두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소수이지마는 행복한 사람들이다.

   이외에도 이 질문에 대한 기이한 대답들이 많다. 그러나 지면 관계로 그칠 수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천국에 가는 진리를 소개하며 마치고 싶다.

   천국은 거룩한 곳이요 하나님이 계시는 곳이다. 그러므로 죄인은 천국에 데려갈 수 없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이다. 털끝만한 죄만 있어도 지옥에 떨어질 수밖에 없는 무서운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누가 당당히 설 수 있겠는가? 아무도 없다. 그러므로 교회에 다니면서 자신이 아직도 죄인이라고 하거나, 의인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죄 문제를 하나님 앞에서 명쾌하게 해결 받지 못했다면 지옥에 갈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은 무서운 심판 아래 있는 인생들을 누가 살릴 수 있겠는가?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로마서 3:19).

   주님께서는 이와 같은 죄인의 현실을 보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셔서 죽으시므로 우리의 모든 죄를 온전히 해결하셨다. 죄인들의 모든 죄, 곧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를 대신 담당하심으로 죄인을 죄에서 해방시키셨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로마서 3:23,24).

   모든 죄를 해결하신 주님을 믿는 자는 죄에서 해방되었다. 그는 천국에 들어갈 시민권을 얻은 것이다. 그에게는 정죄가 없되 영원히 없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로마서 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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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희믿음에 있는가

                        시험하고 확증하라


                                    구원을 배운 신자들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한복음 17:3)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을 모르던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죄 용서함 받아서 멸망의 지옥에 가지 않고 천국에 가게 되었음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곧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의 진리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위에 열거한 두 가지 내용은 복음을 깨닫는 것과 그리스도를 발견하는 것을 말한다. 깨닫는 것과 발견하는 것은 동일하게 경험을 통해서 알게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서두에 기록된 말씀처럼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영생이라고 했는데 '안다'는 말은 곧 경험을 통해서 안다는 뜻이다. 이 단어는 히브리어 "기노스코"라는 단어로써 "...에 의하여 ...을 알게 되다", "발견하다", "깨닫다"라는 뜻이다. 다시 말하자면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통하여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은 지식적으로 배우는 것이 아니고 경험적으로 깨닫는 것을 의미한다.

   필자가 수많은 기독교인들을 상담하면서 느끼는 것은 구원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았으며, 혹 구원의 진리를 아는 사람을 만나보아도 그들은 구원을 배웠을 뿐이었다.

   구원을 배운 사람을 천국에서 만날 수 있을까? 결단코 아니다. 구원은 배우는 것이 아니다. 예전과 달라서 오늘날은 각 교회마다 성경공부를 열심히 하여 성경 지식수준이 상당히 올라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구원을 지식적으로만 배워서 이론으로는 알지만 경험하지 못한 사실을 볼 수 있다. 이것이 한국 기독교의 심각한 문제요, 근심거리이다.

   사단의 입장에서보면 대 성공을 거둔 것이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의 영혼을 노략질하는데 성공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단의 속삭임에 속고 있다. 사단은 구원의 지식을 가르쳐주고 말하기를 "너는 구원의 진리를 알고 있으니 구원받은 거야. 더구나 한국에서 제일 이름있는 교파에 속했으며 유명한 목사님도 너와 같이 생각 하고 있지 않느냐? 너는 너의 목사님에게도 인정받고 있지 않느냐" 라고 한다.

   사람이 구원받지 못하고 지옥에 가는 현상을 여러 방면에서 조명하여 규정지을 수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사단에게 속아서 지옥에 가는 것이다. 오늘날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기가 막힌 사단의 전략에 속아서 지옥으로 떨어지고 있는 현실을 보면서 필자는 눈물을 금할 수 없다.

   이제 본론적인 이야기를 해보자. 구원에 관해서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가? "구원을 얻으라" 혹은 "구원을 얻었나니" 등으로 말하고 있지 아니한가! 성경 어디에도 구원을 이론적으로 배우라는 가르침은 없다. 원칙적으로 복음은 외치는 것이며 경고하는 것이며 깨닫게 하는 것이다. 학술적으로 가르쳐서 지식을 습득하면 구원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구원과 다르다. 이러한 사람들을 만나보면, 구원에 관해서 자신이 없으며 막연하게 천국에 갈 것이라 생각하여 자신 없는 대답만 한다. 혹 자신 있는 대답을 하는 사람도 알고 보면 자존심 때문에 말하거나 착각으로 말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여기서는 이와 같은 주제, 즉 구원을 배운 사람들의 상태를 점검해 보면서 이글을 읽는 독자들의 신앙에 도움을 주고자 한다. 먼저 성경에서 경험을 통하여 구원받은 경우를 살펴보고자 한다.

   요한복음 4장에 보면 사마리아 사람들이 불쌍한 여인의 안내를 받고 예수그리스도를 만나는 장면이 나온다. 그들은 여인을 통해서 "메시야를 만났다"는 말을 듣게 된다. 이것은 배움의 단계이다. 배움은 듣는 것이며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며 소식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자기 확인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그것은 소문일 뿐이다. 누군가가 그것의 사실성을 물어볼 때 자신 있게 말할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확인되지 않은 소문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은 메시아이며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구세주라고 믿고 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렇게 배운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은 왜 메시아이며 왜 구세주인가, 그가 메시아라면 나와 어떤 관계가 있으며, 나의 인생에 구체적으로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가를 알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그냥 구세주라고만 알고 있는 것이다.

   여인의 말을 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은 지혜로운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여인을 따라가서 예수님을 만났다. 그리고 직접 그분의 말씀을 들었다. 그들은 구원을 받았다(경험했다). 그들의 고백을 들어보자.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을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니라 하였더라"(요한복음 4:42).

   이 얼마나 확실한 경험인가.

   또 다른 경우도 있다. 누가복음 19장의 삭개오의 경우이다. 삭개오는 예수님에 관해서 여러 경로를 통하여 들었다. 그분은 메시아라고 들었다. 또는 선지자라고 들었다. 여러 기적들에 관해서도 들었다. 가르친 말씀에 대해서도 들었다. 그는 들은 상식으로 예수님을 알뿐이었다. 만약에 누군가가 삭개오에게 예수가 누구냐고 물었으면 자신 없는 대답을 하되 알고 있는 상식 수준에서 하였을 것이다.

   금일에 필자가 만나본 교인들이 오랜 교회생활에도 불구하고 구원의 확신 없이 어정쩡한 대답을 하거나 분명한 대답을 한다 하여도, 학생이 배운바를 대답하듯 지식적인 대답에 머무르고 있다.

   필자는 언젠가 교인을 만나서 "천국에 갈 수 있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그는 "갈 수 있다"고 말하였다. 그래서 또 묻기를 "무슨 근거로 그렇게 말하는가?"하니 "구역집회에서 전도사님에게 배웠다"고 하였다. "무엇을 배웠느냐?" 물으니 "여러분이 에배당에 나오는 날 예수님을 믿기 시작했으니 구원을 받은 것이다. 왜냐하면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하였기 때문이라고 배웠다"고 대답하였다. 그래서 필자는 또 묻기를 "그러면 죄는 어떻게 되었는가?" 하니 "십자가에서 모두 용서되었다"고 대답하였다. "그러면 또 계속해서 죄를 짓는데 어떻게 되는가?" 그는 "죄를 짓지 않아야지요" 하였다 "그래도 실수로 죄를 짓지 않는가?" 하니 "그러면 회개해야 하지요" 하였다. 또 끈질기게 묻기를 "회개하지 못하고 죽거나 죄를 짓다가 죽으면 어찌됩니까?" 하니 "할 수 없지요" 하고 말하였다. "그러면 당신은 지옥으로 가는데 어찌 하렵니까?" 하였을 때, 너무나도 뜻밖의 대답을 들었다. 수십 년 교회 다닌 그의 입에서 놀라운 말을 들었다. "지옥이 있기는 있는 겁니까?" 하는 것이었다. 필자는 어이가 없어서 "지옥을 못 믿습니까?" 하니 "아니, 믿기는 믿는데 지옥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여기까지 대화를 들으면서 독자는 무슨 생각을 하는가? 그는 지식으로 구원을 배웠을 뿐 구원받은 적이 없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삭개오는 지혜로운 사람이었다. 삭개오는 자신의 알고 있는 지식에 대해서 확실하게 확인하고 싶었다. 그는 뽕나무 위에서 기다리다가 예수님을 만났다. 그의 생애는 달라졌다. 그는 구원받은 성도의 대열에 합류하게 된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이여! 그대는 거듭났는가? 구원을 경험했는가? 속죄를 경험했는가? 지옥을 경험했는가? 진지하게 묻고 싶다. 그대가 하나님의 실존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아들 되심을 믿고 있다 할지라도 앞에 질문한 질문들을 경험하지 못하였다면 구원받았다고 인정할 수 없다. 이 말을 이해할 수 없다는 독자들도 있을 줄 안다. 그러나 이렇게 경고할 수밖에 없는 전도자의 마음을 아는가?


   구약의 예를 보자. 열왕기상 10장에 보면 스바 여왕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스바 여왕은 솔로몬에 관하여 많은 소문을 들었지만 솔로몬의 위대함에 대해서 오히려 믿지 못하고 의심하는 마음이 있었는데 그는 진실을 알아보기 위하여 멀고도 힘든 여행을 하였다. 그리고 솔로몬을 만나게 되었다. 솔로몬을 만나서 그가 한 고백은 무엇인가?

   "왕께 고하되 내가 내 나라에서 당신의 행위와 당신의 지혜에 대하여 들은 소문이 진실하도다. 내가 그 말을 믿지 아니하였더니 이제 와서 목도한즉 내게 말한 것은 절반도 못되니 당신의 지혜와 복이 나의 들은 소문에 지나도다" 하였다. 그는 소문을 확인한 것이다. 예수님도 이 여왕을 칭찬하지 아니하였던가(마12:42).

   여기에 필자가 강조하고 싶은 단어가 있다. "소문"이다. 소문은 확실한 것이 아니다. 신뢰할 만한 것이 못 된다. 소문은 알고 있는 지식일 뿐이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소문적 신앙에 머물러 있음을 통탄하지 않을 수 없다. 앞에 말했던  구도자의 경우 지옥을 믿는데 믿어지지 않는다고 하는 해괴망측한 이야기도 소문적 신앙의 전형이다,

   오늘의 기독교 현실이 수요일과 주일에 교회에 나가서 목사님의 설교말씀을 일방적으로 듣고(배우고) 끝나면 집에 와서 자기의 삶을 살고, 이렇게 살다 보니 들은 것은 많은데 내 것이라고 할만한 지식은 없다. 아무것도 모른다고, 아직은 믿음이 없다고 거부하는 사람들에게 억지로 세례 주고 교인을 만들면 천국에 가는가? 교회를 몇년 다녔지만 아직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고 자격도 없으므로 직분을 맡을 수 없다는 사람들에게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말씀을 인용하여 협박하다시피 집사 직분을 맡기면 천국에 가는가? 그것이 구원받은 사람인가?

   필자는 어려서부터 아버지와 어머니가 목사님의 강요에 의해서 어쩔 수 없이 세례 받고 직분 맡으며 힘들어하는 것을 보면서 자라왔다. 나의 부모뿐만 아니라 주변의 수많은 사람들이 그와 같은 고통 속에 있는 것을 보아왔다. 얼마나 잘못된 현실인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에게 세례를 주어서는 안 되며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집사를 맡기면 교회 망하는 것이다.

   한국 사람들은 예로부터 관료주의에 젖어서 감투를 좋아하는 속성이 있다. 오늘의 기독교가 이 속성을 이용하여 성경에도 없는 수많은 종류의 감투를 만들어 교인들에게 나누어주고, 교인들은 그 속에서 위안을 받으며 천국에 갈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집사, 장로 임명을 받으면 얼마만큼의 헌금을 해야 하는 의무는 자연스러운 관행으로 요구되고 있다. 이것은 중세 천주교에서 속죄권을 팔았던 사실과 무슨 차이가 있단 말인가. 또한 성직을 매매했던 슬픈 기독교 역사와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참으로 기가 막힌 현실이다. 영생의 비밀에 관해서는 가르쳐 주지 못하고, 가르쳐도 이론적으로 가르쳐 줄 뿐 그들의 생명을 살리지는 못하는 현실 아닌가.

   독자여, 그대가 수 십 년 하나님을 섬겼는가? 구원의 교리를 배워서 잘 알고 있는가? 예수님은 나 때문에 죽어서 내 죄를 용서하였다고 고백하고 있는가?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고 배워서 주장하고 있는가? 그러므로 나는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장담하고 있는가? 그러나 필자는 권하고 싶다. 그대가 진정 멸망의 지옥에서 건짐 받은 경험 있는 성도들인가를 정직하게 점검해보길 바란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고린도후서 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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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속아사는 인생들이여!


                     겸손한 자가 구원받는다


   "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가로되 내 생각에는 저가 내게로 나아와 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당처 위에 손을 흔들어 문둥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열왕기하 5:11).


   나아만은 자신을 나와서 마중하지도 않고 종을 보내어 요단강에 가서 몸을 일곱번 담그면 깨끗하게 되리라는 엘리사의 말을 듣고, 분하고 화가 난 모습으로 고향을 향하여 발길을 돌렸다.

   그가 어찌하여 이와 같이 교만하여졌는가? 그가 처음에는 겸손하지 아니하였던가? 처음 계집 아이의 말을 듣고 출발할 때는 참으로 겸손하여 순전하지 아니하였던가?

   생각해 보자. 어른이며 대인(大人)이라고 생각하는 그가 적국에서 잡혀온 작은 계집아이의 말을 믿고 경솔하게 이 먼 여행길을 준비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그는 출발하였다. 믿음을 가지고... .

   더구나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문둥병을 고쳤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음이 분명하다. 그 당시나 지금이나 문둥병은 천질(天疾)이요 불치의 병이다. 의학이 놀랍도록 발전한 현대에도 그러할진대 하물며 그때였으랴?

   그러나 하나님을 의지하여 고쳐보겠다고 나서는 이 사람은 참으로 놀라운 믿음이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런데 엘리사 앞에 나타난 이 사람이 왜 갑자기 이토록 교만하여졌는가? 그가 처음 나설 때보다 교만하여졌다면 중간에 마음이 변한 것임에 틀림없다.

   아마도 그가 이스라엘 왕을 만났을 때 영향을 받은 것 같다. 이스라엘 왕은 나아만에게 패하였던 왕인데 그 당시는 아람이 이스라엘보다 대국으로 군림하던 시절이었다. 이스라엘 왕의 저자세를 보면서ㅡ그는 급속도로 교만하여진 것이 분명하다. 하여간 그는 큰 실수를 할뻔 하였다.

   여기서 나아만이 실수하여 잘못될 뻔 하였던 사실을 살펴보면서 오늘날 구원받아야 할 죄인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나아갈 것인가를 도움받기 바란다.


   첫째 나아만은 자신이 문둥병자라는 사실을 순간적으로 잊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엘리사가 한 말이 무엇이었는가? 요단강 물에 씻어서 문둥병을 고치라 하지 아니하였는가? 그런데 화를 내고 돌이킬 이유가 무엇인가? 그는 지금 자신이 왕의 총애를 받는 장관이요, 장군으로만 생각한 것이다.

   문둥병으로 죽어가는 순간에 장관은 무엇이며, 장군은 무엇인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아무 쓸모없는 감투때문에 교만하여져서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고 있지 아니한가?

   필자가 만나보는 구도자들 중에 어떤이들은 교회에 대해서나 상담자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부담을 갖고 있거나 불쾌한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경우를 가끔 본다. 그중에는 젊은 사람이 늙은 나에게 가르치려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필자는 그분들의 그 말씀과 심정을 이해는 하나 동조할 수는 없다.

   나아만 장군을 보라. 그렇게 큰 자가 어린 아이의 말에 관심두고 순종함으로 문둥병을 고쳤지 않는가! 죄값으로 지옥에 가는 마당에 자존심을 앞세우고 불쾌해 하면 자신만 멸망의 길로 가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어떤이는 아내가 믿는 하나님이기에 남편의 자존심으로 따르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신앙에는 선후가 없고 세상적인 질서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먼저 깨달은 자가 가르쳐주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길은 파멸과 멸망의 길이요, 지옥으로 가는 끔찍한 길이기 때문이다.

   어떤이는 자기의 학식의 높음이나 자기의 부(富)를 내세워 자존심을 꺾지 못하고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어리석음 가운데 있는 경우도 보았다. 얼마나 서글픈 일인가?


   둘째로 나아만은 자신이 불쌍한 처지에 있음을 잊었다.

   만약 그에게 있는 문둥병이 더 번지고 심해지면 그는 모든 직책과 가정과 이웃으로부터 떠나서 토굴이나 문둥병자 격리소로 떠나야 하는 것이다. 이 얼마나 비참한가. 그때나 지금이나 문둥병자는 정상인과 격리하는 것이 관습이요 순리였다.

   그가 자신의 처지를 알았다면 어떤 말에도 불쾌해 하지 않고 순종하였을 것이다. 죄인의 형편도 이와 같다. 이글을 읽는 당신이 만약 거듭나지 못한 죄인이라면 문둥병자와 같아서 영원한 세계에서 따로 격리 수용될 것이다. 그 수용소는 물론 지옥이다. 죄인은 지옥에 격리되어 그들의 믿는 가족이나 친구, 이웃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히 버림받게 될 것이다. 사실은 하나님이 당신을 버린 것이 아니고 당신이 스스로 버림받는 길을 택한 것이다.


   셋째로 나아만은 자신의 생각에만 몰두하고 있으므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할뻔 하였다.

   하나님은 이 불쌍한 인간 나아만을 위하여 계집 아이를 예비하시고 엘리사라고 하는 하나님의 종을 예비하셨건만 지금 이 불쌍한 소경 나아만은 하나님의 이같은 은혜와 자비를 모르고 자기 생각에만 사로잡혀 돌아가려고 했다.

   오늘날에도 나아만처럼 자기의 아내나 남편이나 자식이나 친구들을 통해서 들려주는 하나님의 사랑의 경고를 인간의 말로 생각하여 그들의 말을 무시하는 불쌍한 소경들이 수없이 많음을 볼 때 심히 가슴 아픈 일이다.

   12절에 보면 나아만은 자기 생각을 토하면서 " 분한 모양" 으로 떠나가고 있다. 독자여 만약 당신이 하나님에게나 전도자에게나 믿는 신자들에 대해서 "분한 모양" 을 하고 있다면 이글을 읽는 즉시 고치라. 이것은 당신이 비참하게 되는 길이기에 빨리 버리고 회개하여야 한다.

   물론 오늘날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수많은 교회나 교직자나 기독교인이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불멸의 진리이다. 어떤 이유로든지 성경을 통해서 구원의 진리를 발견하지 못한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잘못될 수 있어도 성경은 잘못될 수 없으며 사람은 변해도 하나님의 진리는 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독자여, 당신의 태도를 바꾸라. 겸손하게 바꾸라.

   다행히 나아만은 주변 사람들의 간곡한 권면을 듣고 돌이켜 하나님 말씀을 순종하므로 병을 고쳤다. 그리고 그는 그후 하나님께 경배한 것을 보게 된다.

   " 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씀대로 요단강에 일곱번 몸을 잠그니 그 살이 여전하여 어린 아이의 살 같아서 깨끗하게 되었더라" (열왕기하 5:14).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그가 깨끗해졌으므로 이제는 따로 격리할 필요가 없어지지 아니하였는가?

   독자여, 주 예수님께서 나아만에 관해 언급한 말씀을 들어보라.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문둥이가 있었으되 그 중에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아람) 사람 나아만 뿐이니라" (누가복음 4:27).

   많은 문둥병자들이 있었는데 어떻게 이방 사람이었던 나아만만 깨끗함을 입었는가? 그 이유는 단 한가지,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의지했기 때문이다.

   만약 당신도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이다. 나아만의 병을 고치신 하나님은 당신의 영혼을 구하신다. 중요한 것은 당신이 겸손히 하나님의 말씀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이다.

   대저 하나님의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는 것이다(누가복음 1:37). 누구든지 겸손하여 하나님을 바라보느 자는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당신의 영혼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다. 당신의 영혼이 예수님의 보혈을 통해서 깨끗함을 입기를 바란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은 당신의 죄값을 대신하여 흘려주신 사랑의 흔적이다.

   "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로마서 5:8).

Posted by 행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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